블로그 이미지
작은책
'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작은책> 2020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베테랑 월급이 50만 원 적다

한영미/ 마트 시식 코너 노동자

 

 

아무도 몰랐다. 코로나가 덮칠 줄은. 전염병 때문에 지형 구도가 이렇게 달라지는 걸 보는 건 내 평생 처음이다. 마트에서 시식 알바를 하던 나는 오늘 갑자기 실업 상태가 됐다. 서울시에서 코로나 때문에 시식을 금지하라는 공문이 내려와서란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데 난들 목숨 걸고 시식 일하고 싶었을까? 그렇지만 코로나는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고 밥은 안 먹으면 확실히 죽는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귀한 내 목숨을 최저임금에 걸었었다. 그런데 오늘 출근하자 시식을 금지한다고 내일부터 나오지 말란다.

사실 세상이 이럴 때 마트에서 시식하는 것도 웃기는 얘기다. 그러나 아무리 파리 목숨이라도, 내일 먹을 밥그릇은 빼앗더라도, 숟가락까지 빼앗지는 말아야 한다. 마트 담당자에게 걱정되어 물었더니 자기들은 서울시 공문을 이행할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하니 너희들은 회사에서 알아서 하겠지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마트에서 근무하는 수많은 사원들은 마트에 물건을 대는 각자의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파견직 사원이므로 이럴 때 마트는 간단하게 사람을 정리할 수 있다.



기분이 더러웠다. 나와 자매처럼 지낸 고정 사원에게 회사에서는 어떤 입장인가를 물었다. 고정 사원 역시 나와 같은 회사에서 파견된 최저임금자이지만 마트에 물건을 진열하는 사원이므로 마트 입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또 고정 사원은 회사와 나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그는 곧 나오게 되겠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코로나가 기승인데 아무 대책 없이 무조건 기다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동안 월급 주는 것도 아니고. 상황 변화 없이 일을 다시 하게 되기는 쉽지 않을 거 같았다. 나는 회사에서 파견된 고정 사원에게 나도 생활하는 사람이니 차라리 해고해서 고용보험을 타게 해 달라고 했다. 나와 친구처럼 자매처럼 지냈던 회사 고정 사원은 이상한 논리를 폈다. ‘회사에서 나오지 말라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회사는 관계없다는 이야기다. 나로선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없어지고 생계 수단이 사라지는 것이 심각한 일인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없었다. 즉 고용보험도 뭣도 없이 손가락 빨고 기다리면 자기들 필요할 때 부른다는 이야기다. 나는 마음이 많이 상했다. 오늘 아침 때려잡은 바퀴벌레랑 내가 뭐가 다른가 말이다. 그날 그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와 표정이, 그리고 회사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듯한 태도가 서운했다. 나는 고정 사원에게 내 상한 심정을 퍼부었다.

마음대로 해. 회사가 월급 줄 돈이 없으면 내 4대 보험 내 주겠니? 그때 되면 해고가 되든 어떤 조치가 취해지겠지. 회사에서 일당 짜게 줘서 다른 사람과 돈 차이가 한 달에 몇십만 원 날 때도 난 바보같이 나 없으면 네가 꾸려 갈 이 살림 걱정해서 의리로 참았어. 어쩌면 너는 내가 백수가 될지 모를 이 마당에 회사 입장만 얘기하고 나에 대한 걱정은 없냐.”

우리 회사에서는 최저임금이 오를 때마다 내 근무 일수를 줄였고, 다음 해에는 시간을 줄였고, 또 다음 해에는 일급도 줄였다. 그래서 나는 삼 년째 같은 일당을 받고 있다. 일하는 날만 줄어 월급은 이십여만 원이 줄었다. 모든 회사들은 편법으로 돈을 줄여 나갔는데, 버젓이 내놓고 하는 일을 나라에서는 모르는 것일까? 나는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는 베테랑이다. 그러나 회사의 편법 때문에 최저임금이나마 대우해 주는 회사보다 월급이 50만 원 차이가 났다.

더러워진 기분으로 나는 계속 고정 사원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이어 갔다. ‘만일 네가 회사에 얘기해서 내가 고용보험을 타게 해 준다면 다시 나오는 날 내가 이곳으로 복귀할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봐야겠다.’라고.

고정 사원은 사과했지만 고용보험과 관련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부터 당장 백수가 되었다. 그깟 일 뭐를 하면 이보다 못하랴 싶었지만 내 의사와 관계없이 보장 없는 백수가 되고 나니 참으로 허탈하다. 이놈의 사회에서는 잘 조직되고 복지 혜택 많이 받는 제도권 국민에게만 주고 주고 또 준다.

오늘 오랜만에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정수기 청소하러 온 아줌마와 이야기했다. 자기들도 복지의 사각지대에 내몰려 있다고 한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회사의 노예라면서. 그런데도 프리랜서로 등록돼 4대 보험 혜택도 못 받고 해고돼도 고용보험도 못 탄다고 했다. 이참에 복지의 사각지대에 몰린 직업군을 찾아내어 노동조합 결성하는 일에 동참해 볼까?

일주일 뒤, 시식 행사가 재개되고 나는 기약 없는 백수에서 다시 언제 잘릴지 모르는 행사 알바로 복귀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회사 소속임을 잊고 있었다. 그저 내 일이려니 생각해서 참 우직하니 열심히 일했다. 다시 일하게 된 지금 별로 기쁘지가 않다. 그나마 일할 곳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한 번씩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존재에 대한 미미함을 깨닫게 되어 기가 죽는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회는 이루지 못할 정의일까?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성주, 한반도의 최전선

나정(가명)/ 사드가 배치되어 있는 성주에 살고 있는 주민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시계를 보니 540. 이미 남편은 거실에서 비염에 좋다는 작두콩차를 마시고 있다. 몸이 무겁다. 누운 채 손가락을 차례로 꼽아 본다. 묵직하고 뻣뻣한 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오늘도 새벽에 두 차례 종아리에 쥐가 났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남편이 깨어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아프다. 허리를 시작으로 팔꿈치, 발목, 그리고 이제는 무릎. 아무래도 오른쪽 무릎은 이미 탈이 난 듯하다. 남편 나가는 소리에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세수는 고사하고 거울조차 보지 않고 남편을 뒤따른다. 마스크 한 장이면 족한 세상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집에서 밭까지는 걸어서 30분 걸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10, 차로 가면 5. 대부분 차로 다니지만, 가을철에는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허리와 무릎 근력을 위해 걸어서 간다. 걷다 보면 세상이 다가온다. 로드킬 당한 각종 동물의 사체, 물오른 배 롱나무, 겁 많은 이 집 저 집 개들. 어느 새 도착한 딸기밭. 오십 중반을 넘긴 나와 남편은 참외로 유명한 이곳 성주에서 5년 전 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하필이면 왜 딸기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이곳은 모든 것이 '참외'로 적정화 내지 표준화되어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라서. !

나는 경주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아 길렀다. 경주에서 평생 살 거라 믿었다. 그러나 15킬로미터 인근에 핵발전소가 있다는 사실, 아니 그 핵발전소가 상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주저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그다음 해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끔찍한 참사를 보며 우리의 결정이 옳았다 믿었다. 이런 우리의 귀농사를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웃었다. ‘경주나 성주나.’ 좁은 땅덩어리에서 피해 봐야 소용 없다는 말이지만, 그래도 성주는 100킬로미터 밖. 심리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거리였고, 그 사실만으로 족했다. 그렇게 핵발전소를 피해 온 성주에 2016년 사드(THAAD)가 들어왔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곳 성주가 한반도의 최전선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다시 성주를 떠날까?’

남편과 나는 500평 규모의 딸기 농사를 짓는다. 동수로 보면 세 동이지만, 면적으로 따지면 두 마지기 반의 크기. 수십 동씩 참외 농사, 상추 농사를 짓는 다른 농가들에게는 소꿉장난처럼 보일 것이다. 평생 농사라고는 구경도 하지 않은 우리는 심지어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유기 재배를 선택했다. 시원하게 약 한번 뿌리면 되는 일을 우리는 밤마다 랜턴을 쓰고 민달팽이를 잡았다. 응애가 오면 천적인 칠레이리응애를 넣고 매일 개체수를 살폈고, 진딧물이 보이면 난황유를 만들어 쳤다.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평화로웠고, 새롭게 만난 이웃들과의 풍성한 이야기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무엇보다 가야산으로 넘어가는 노을과 마주하며 돌아오는 시간은 감사의 기도가 절로 터진다. 그런데 이곳 성주에 사드가 웬 말인가!

수확한 딸기들. ⓒ나정

30분 걸어 도착한 딸기밭 주변은 이미 한낮처럼 분주하다. 농사 이웃인 옆 하우스의 K 아저씨는 참외를 따고 있다. 낡은 트럭 위 빨간 바구니에 노란 참외가 그득하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하우스 문을 민다. 딸기는 거짓말처럼 밤새 빨갛게 익어 있다. 순간 젖은 솜처럼 무겁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옆 동에서 남편의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애청하는 채널의 사회자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이 걱정이다. 집과 딸기밭만 오간 지 벌써 석 달. 사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소성리 집회도 멈춘 지 두어 달이다. 오늘은 수요일. 남편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소성리로 올라간다. 사드가 임시 배치된 소성리 미군기지 앞에서 매일 평화행동이 열린다. 남편은 수요일마다 올라간다. 다른 주민들도 참외밭, 고추밭, 마늘밭을 뒤로하고 허겁지겁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미군기지 앞에서 외칠 것이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2019년 10월 6일 성주 소성리 진밭교에 마련된 원불교 교당의 평화 기도가 1000일째 되는 날. 우리 모두 모여 서로에게 감사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사진 제공_ 나정

다시 돌아가서, ‘성주를 떠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싱겁게 정리되었다. 핵발전소가 무서워 떠나왔던 경주가 이미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들 그곳에 제2의 핵발전소, 2의 사드 기지가 들어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특히 사람 적고 힘없는 시골은 더더욱.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떠나고 버릴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곳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사드가 임시배치되어 있는 이곳 성주에서 그냥 살기로 했다. 아니,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사드 배치로 하루아침에 한반도의 최전선이 된 성주 소성리에서, 평생 살아온 터전을 하루아 침에 미군에게 빼앗긴 소성리 어머니들과 함께,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살아 낼 것이다.

미군은 미국으로, 평화는 이 땅으로!”

사드 가고 평화 오라!!”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여름철 긴팔 남방을 입은 까닭

 

권해진/ 래소한의원 원장

 

80대 아버님이 환자로 오셨습니다. 당뇨가 심해서 인슐린을 주사제로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팔에 상처가 나서 연고 바르고 반창고 붙이고 했는데, 자꾸만 상처가 커졌습니다. 당뇨합병증 중 하나가 상처 치유가 늦어지는 것이니 그러려니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여름이 되니 반창고 아래로 땀이 차고 농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피부과에 가셨다고 합니다. 이미 괴사가 진행되었고 의사가 열이 나거나 아프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따끔따끔이야 하지. 그래도 무릎이나 허리 아픈 것만 하겠어. 다른 데가 더 아프니 그러려니 했지.”

더 이상의 괴사를 막기 위해 한쪽 팔을 잘라야 했습니다. 처음 한의원에 오셨을 때는 이미 팔 수술을 하신 지 5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피부 상처 하나 잘못해서 이리 ○○이 되었지. 자식들이 팔 없이 옷만 덜렁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놀란다고 가짜 손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게 더 무섭게 생겼어. 원장 보기에는 어때요? 다른 환자 생각해서 가짜 손 달고 오라 하면 달고 올께.”

긴팔 남방 속 의수는 무섭지도 징그럽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 눈이 뭐가 중요합니까! 아버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렇게 말씀드리던 때는 겨울이었고, 옷 안에 팔이 있는지 없는지 누구도 알 수 없을 때였습니다. 점점 더워지는데 아버님은 여전히 긴팔 남방을 입고 오십니다.

당뇨가 있으셔서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도 안 좋아요.”

남방 사이로 바람이 술술 들어와. 반팔 입으면 길 다닐 때 지켜보는 눈 때문에 내가 귀찮아서 그래.”

팔 하나가 없으면 치료받을 때 옷을 입고 벗고 하는 것을 도와야 할 것 같지만 시간만 드리면 됩니다. 그렇게 혼자서 천천히 입고 벗고 하시는 데는 남방이 티셔츠나 다른 옷보다는 편하다고 하시더군요. 이미 생활과 마음의 정리가 이루어진 분입니다. 치료를 끝낸 후 남방 단추를 한 손으로 차례차례 잠그시고 펄럭이는 남방의 빈 팔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오셨습니다.


6학년 때 만난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느리지만 왼손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의 오른손 글씨보다 예뻤습니다.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오른팔의 화상 흔적.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화상이 있었는데 글을 배우던 유치원 때 생긴 상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왼손으로 글씨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졸업 후로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자주 볼일이 있었고 그녀의 여름옷은 항상 흰색 긴팔 남방이었습니다. 교복 세대였던 우리는 여름에는 반팔 교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여름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학교에서 허용해 준 유일한 학생이었습니다. 시원하면서도 얇지만 팔의 화상 흔적을 덮을 수 있는 옷은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제 옷을 사러 갈 때도 시원한 긴팔 남방이 보이면 그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괴사로 팔을 잃은 아버님과는 달리 회사 일을 하다가 손이 절단된 지 3년이 지난 여자분이 있었습니다. 항상 의수를 하고 오셨고 여름에도 긴팔 옷에 장갑까지 끼고 오셨습니다.

제가 장애인이지만 회사를 다녀요. 저희 회사에서 정상인보다 제가 일을 더 잘해요. 그래서 어깨랑 팔이 항상 아픕니다. 사장님이 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해서 휴가도 못 쉬어요.”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자신보다 일을 못 하는 비장애인을 타박하는 말투입니다. 어깨를 만져 보니 절단된 쪽 팔을 쓰지 않고 온전한 팔로만 일을 했다는 것이 보입니다. 어깨 등세모근의 크기가 다릅니다. 한쪽 팔뚝은 다른 쪽의 두 배 크기입니다. 당연히 아픈 쪽은 비정상적으로 일을 많이 한 정상 팔입니다. 2주 동안 매일 치료받으러 오셨습니다. 치료도 열심, 일도 열심인 분입니다. 그런데 치료 효과가 없습니다.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환자분!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언지 아세요? 쉬는 것입니다. 일을 좀 줄이시면 안 되나요?”

장애 있는 나를 써 준 사장인데 일반인보다 더 열심히 해야지요.”

그런데 치료받고 가시면 덜 아프시다가 다시 일을 너무 심하게 하시니 제가 느끼기에는 팔 상태가 매일 똑같아요. 그러면 팔이 남아나질 않아요.”

더 나이 들면 다닐 직장도 없을 거예요. 올해는 몸이 부셔져라 해 보려고요.”

사장님을 욕하는 거는 아닌데요. 회사는 장애인 고용으로 국가 보조를 받을 겁니다. 그래서 환자분이 천천히 몸 생각하면서 하셔도 회사에 손해는 안 갑니다. 정년도 보장이 되고요. 환자분 잃어버린 왼쪽 팔 때문에 열심히 사시는 건 저도 압니다만, 그럼 오른쪽 팔은 누가 돌봐 주나요? 오른팔이 안쓰럽지 않으세요?”

갑자기 그녀가 웁니다.

내 인생이 안쓰럽지. 그래요. 내 오른팔도 안쓰럽지. 없어진 왼팔보다 버티고 있는 내 오른팔이.”

할 말도 해 드릴 수 있는 일도 없어서 같이 울었습니다.

여름철 긴팔 남방 안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많습니다. 느리지만 천천히 시간만 있으면 우리는 모든 사연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코로나19! 에잇! 코로나18!

신혜진/ 시간제 댄스 강사

 

  

나는 방송 댄스, 줌바 댄스, 키즈 댄스 등등 수업을 진행하는 시간제 강사이다.

오전 수업 한 곳만 더 뚫었으면 좋겠다.’ 하는 찰나에 설날 즈음 아파트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줌바 댄스 수업을 맡게 되었다. 새해부터 이게 웬일이냐며 올해 운수가 좋음을 느끼는 하루하루였다. 아직 신규 수업이라 회원은 별로 없었지만 서서히 늘려 가리라 열정을 다해 열심히 했다. 하지만 2월 초부터 기존에 하던 수업들이 하나하나 중단이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그저 손 잘 씻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면 마스크를 꼭 쓰자 뿐이었다. 코로나19를 그냥 무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점점 확진자, 격리자 심지어 사망자가 늘어 가면서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수업을 진행하는 센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종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따른 주민자치 프로그램 수강료 일시적 환불 규정을 안내 드립니다라는 문자로 시작해 하루 사이에 주민센터, 문화센터가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천시, 구에 해당하는 곳들이다. 그러다 또 며칠 뒤 개인사업자인 피트니스센터도 영업을 중지했다.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신천지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수업이 중단되었다. 솔직히 신천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종교에 있어서 누구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조금 신경이 쏠렸다. 보는 뉴스마다 신천지 이야기가 나오고 단체 카톡에는 코로나 확진자 그리고 신천지 이야기뿐이었다. 신천지 31번 확진자가 나온 후로는 위에서 지령이 내려와 그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반 교회에 가서 코로나를 전파하라, 그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아무 집이나 가서 구하기 힘든 마스크를 무료 나눔을 한다 하고 바이러스를 옮겨라 등등 너무 소름이 끼쳤다. 물론 그게 실화라면 말이다. 정말 재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또 사건이 터졌다. 천안 줌바 강사가 확진자로 나온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포인트는 줌바 강사라는 것이다. 그냥 댄스 강사라고 해도 되는 것을 줌바 강사라고 기사가 뜬 것이다.


그래서 줌바 강사들 모임에도 비상이 걸렸다. 회원들은 천안 모임에 갔었냐 물어보기 일쑤였다. 천안에서 교육을 받았던 강사들의 명단을 보건당국에 넘기고 모두 검사를 받았단다. 확진자가 많은 대구 쪽 강사들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그 외 모든 강사들은 음성으로 나왔단다.

기자들은 기사를 올려 이슈화를 시켜야 하므로 자꾸 줌바를 엮어 글을 올리는 것 같다. 그래서 다수의 선생님들이 방송사에 항의 전화를 했다. 완전히 다 고쳐지지는 않았지만 줌바 강사에서 에어로빅 강사, 댄스 강사라고 바꾼 곳이 있었다. 아니 그런데 왜 또 에어로빅이냐! 한숨만 나온다. 확진자 강사도 많이 힘들 것이다. 너무 속상하다.

코로나19 때문에 가장 큰 일은 백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시간제 강사들은 지금 모두 강제 백수가 되었다. 우리들은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파트타임 운동 강사들도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으면 합니다.”

주민자치센터 외 공공 기관에서 수업하는 모든 강사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거 없이 서로 공유를 하며 동의를 받아 냈다. 현재는 동의자가 만 명이 훌쩍 넘어 청원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인천평생학습강사회에서도 인천시청에 휴업수당 지급요청 면담도 신청했다고 한다.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한다. 단기 알바라도 하고 싶지만 요즘 상황이 그런지라 선뜻 잡히는 곳이 없다. 내가 벌어 쓰던 용돈이 있기에 더 간절하다. 전에 일했던 피자집에 전화를 해 볼까 한다.

수업을 못 하니 몸도 굳는다. 운동을 하고 싶다. 춤을 추고 싶다. 며칠 전에는 아직 수업을 진행하는 주변 선생님 수업에 가서 돈을 내고 하루 청강을 하기도 했다. 땀도 많이 안 나고 돈이 아까웠다. 내가 수업을 하면 돈도 벌고 더욱 상쾌할 텐데 말이다. 살이 찐다. 움직임이 덜 하니 진짜 뱃살이 늘어난다. 입이 늘 심심하다. 몸도 늘어진다. 방학 중인 학생처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매일 출근하는 남편에게 괜히 미안하다. 눈치가 보여서 뭐 하나라도 더 챙겨 주게 된다.

문득 생각이 난다. 매일 아침 반가운 회원들이 있는 센터에 가서 맛있는 모닝 율무차 한 잔. 힘들다고 하면서 수업 시간 50분을 잘 버텨 주던 그들. 서로의 모습을 보며 깔깔대고. 수업이 끝나면 점심 먹고 차 마시며 수다 떨자는 그들. 생각이 난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듯 평범했던 일상들이 지금은 특별한 일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리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19, 어서 없어져라.

에잇! 코로나 18! 꺼져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맨땅으로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주라고

 

이지우/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7기 수료한 청년

 

2018, 어느 초여름 저녁. 이태원 고급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뜀박질하며 불판을 나르는데 주머니가 웅- 하고 울렸다. 끊기기 직전 겨우 받은 연락은 대박쌤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십 년 넘게 영어학원을 해 오던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던 애제자의 근황이 무척 궁금했던 것 같다. 특유의 호탕한 말투는 그날따라 근심이 가득했다.

너 평생 고깃집 같은 데서 알바만 하고 살 거냐?”

저한테 한 달에 칠십 이만 팔천 육백 원만 주실래요? 전 그 돈이 꼭 필요하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사회생활이다, 생각하며 꾹 참았다. 곧 찾아뵙겠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 대충 전화를 끊었다. 인생 참 뭐 같지만 한가롭게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오른쪽 귀에 무전기를 차고, 나는 다시 기름진 소음 속으로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돈 벌기(취업)돈을 벌 수 있는 공부하기(대학)였다. 은근슬쩍 대학을 권하는 부모님의 말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올 한 해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 보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정해진 시간표 아래 주어진 일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대신 내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떠돌다, 어딘가 잠시 머무르다 우연히 누군가와 만나는 일상을 상상했다. 청년 실업이니 뭐니 말이 많지만 대학과 취업 중 무엇을 선택해도 불안하다면, 나만의 길을 선택하고 불안해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이제 앞만 보고 달려갈 일만 남았다는 스무 살에, 나는 샛길로 빠져 멈춰 서 있다. 역사와 인문학 강의를 듣고, 출판 워크숍에 참가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일 년이 생겼다. 그렇게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주제 파악을 한 건 겨울도 채 지나기 전이었다. 듣고 싶은 강의는 이십만 원이 훌쩍 넘었고 모임이나 워크숍은 매달 참가비를 내야 했다. 부모님이 보내주는 생활비는 숙소와 밥, 교통비를 해결하면 딱 알맞게 없어졌다. 네 자릿수도 되지 않는 통장 잔고를 보며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이 곧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걸.

학력도, 경력도 없는 조무래기인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알바 앱뿐이었다. 이제 내가 하고픈 일을 하지 누가 시킨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당차게 첫걸음을 내디딘 지 불과 석 달 만에, 나는 시키는 일은 뭐든 척척 해내는 일꾼이 되었다. 투잡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날 밤 열두 시에 고깃집에서 퇴근하고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빵집에 출근하는 날들로 그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면 시간과 체력이 없어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했다. 대신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으면 인생이 그런대로 살 만했다. 나의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살겠다고 해 놓고서는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건 술이야!”라며 매일 음주가무를 즐겼다. 지갑에 구멍 난 것처럼 돈이 술술 나가면 또 악착같이 돈을 벌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최저 시급 인생이라 월 백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사장님 전화를 두 번 못 받았다고 다음 날 잘리고 같이 일하던 남자 동료들이 성매매 업소에 간 걸 항의했다가 잘리는 동안, 처음에 내가 상상했던 자유롭고 빛나는 스무 살은 점점 끝나 가고 있었다.

마지막 알바였던 연남동의 카페는 바싹 태워 먹은 원두를 씹은 것처럼 쓰디쓴 기억밖에 없다. 2층짜리 매장 홀과 바를 밤늦게 혼자 쓸고 닦는 것도 버거웠는데, 자동 세척기는 컵을 넣기만 하면 깨트려서 일일이 설거지해야 했다. 그러자 매니저가 그냥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쓰라고 했다. 텀블러와 스테인리스 빨대를 챙겨 다니던 나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구를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멈춥시다!’ 외치는 사회 활동가는 못되어도 내 손으로 사람들에게 플라스틱 컵을 건네주는 건 못할 일이었다. 대신 사람을 더 뽑아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매출을 늘려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평소 윤리적인 이유로 모든 동물성 재료를 소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바를 할 때는 맛있는 라떼와 예쁜 골든와플을 만들어야 했다. 더 많은 사람이 사고 먹어서 더 많은 젖소와 닭이 희생되어야만, 내가 조금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된다니.

손님이 몰려 한 시간이나 마감이 늦어진 날, 지칠 대로 지쳐 펑펑 울며 애인에게 말했다. 나는 우유와 계란을 팔고 플라스틱과 비닐을 남겨서 돈을 벌고, 이제 진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학생이에요? 직장인? 둘 다 아니에요? 그럼 뭐하세요?”

대학과 취업이 전부인 사회에서 그 둘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나는 아무것도 아닌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조차 나를 소개할 말을 몰라 그냥 하고 싶은 거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라고 얼버무렸다.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런 순간들이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사실 너도 잘 모르겠지? 하고.

이런 일상으로 이 년째 살아오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언제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먹고살 궁리를 하면서 나의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 수 있는지.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지.

나 같은 요즘 젊은 것들을 보고 한참 전에 젊음이 끝난 사람들이 혀를 쯧쯧 찬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라고 닥치는 대로 일단 부딪혀 보라고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맨땅에 헤딩해 보라고.

하하, 큰일 날 소리. 그러다 머리 깨지는 수가 있는데. 여러 번 시도해 보는 건 여러 번 실패해도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한 번의 시도에 모든 걸 걸고 한 번의 실패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왜 모를까. 맨땅으로 자꾸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줬으면 좋겠다. 이거 쓰고 몇 번이고 시도해 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이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아이들이 졸업했고 나는 또 조금 컸다

구자숙/ 인천부개초등학교 교사

 

 

아이들이 엄마 키만큼 크는 6년 동안 곁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챙겼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나는 학교 공간에서 애달아하며 고생한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하면 급식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급식실을 찾아갔다. 점심 급식 준비로 정신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영양사 선생님과 급식실 조리원님들에게 딱 1분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모두 모시고 인사를 드렸다.

“6년 동안 여러분이 이만큼 키와 몸과 마음을 크게 하는데 가장 많이 기여해 주신 분들입니다. 그동안 맛있는 밥 하루도 빠짐없이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할게요. 자세 바로. 인사.”

19명의 아이들과 함께 고개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고 얼굴을 드는데 눈앞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물을 뚝뚝 떨구고 계셨다. 잠시 당황스러웠으나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간 맞춰 몇백 명의 밥을 짓는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얼마나 많이 담길지. 작은 실수 하나도 큰 사건인 양 떠들어 대는 사람들 덕에 얼마나 노심초사할지. 맛있는 건 얘기 안 하면서 맛없는 건 품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밥을 해 낸다는 게 얼마나 마음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인지. 그 모든 긴장감과 고단함을 졸업하는 아이들의 감사합니다 한마디에 위로받고 계셨다.

밥 맛있게 먹고 쑥쑥 커 줘서 고맙다고, 중학교 가서도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여기서 20년 일했는데 이렇게 인사하러 와 준 아이들은 너희들이 처음이라고, 너무 고맙다는 급식 조리원님 인사말을 마음에 담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은 청소 노동자! 건물이 세 채가 연결된 3층짜리 학교를 단 2명이 어떤 기계의 도움 없이 청소를 하신다. 여름에는 땀을 뚝뚝 흘리며, 겨울에는 추운 날도 편하게 움직이려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수많은 화장실과 길고 긴 복도와 사람들이 드나드는 현관을 돌본다. 구역이 달라 함께 계시는 일이 잘 없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2층 화장실 앞에 함께 계셨다. 너무 반가워서 호들갑을 떨며 종종 달려가 내일 졸업식인데 인사드리러 왔다고 했다.

여러분이 쾌적한 공간에서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를 늘 깨끗하게 관리해 주신 분들입니다. 이분들 덕에 더 행복하게 학교생활 했습니다. 인사드릴게요. 자세 바로. 인사.”

두 분에게 졸업 축하 인사를 부탁드렸는데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졸업을 축하해. 너희들이 학교를 깨끗하게 써 주어서 청소하는 게 한결 수월했어. 그리고 만날 때 반갑게 인사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고맙다고 인사드리러 갔는데 되레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아이들 19명과 나는 이렇게 학교를 샅샅이 돌면서 그간 감사했던 많은 이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물론 아이들은 인사하는 와중에도 앞 친구를 밀거나 뒤 친구를 밀치면서 몸 장난을 치고 그분들이 축하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옆 아이들과 수다를 떨면서 딴짓을 했다. 하지만 고개 숙여 다함께 감사합니다 인사하던 순간 울려 퍼지던 아이들 목소리가 아름다웠고 그 인사를 받던 이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다. 앞으로 6학년을 맡으면 이 활동은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이 졸업했고 나는 또 조금 컸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2)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

김수련/ 29년차 항공사 객실 승무원

 

 

  오늘은 내캉 밭 가는 데 따라가자. 우짜마 오늘이 내캉 밭 갈러 가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같이 안 갈끼가. 니가 서울 가기 전에 할 이야기도 좀 있고.”

아직 창호문 너머로 어스름 새벽빛만 희미하다. 날이 채 밝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동네 어귀 당산나무 근처로 밭 갈러 나갈 준비를 다 하신 모양이다. 밭을 가는 건 어쩌면 핑계고, 다음 달 서울로 일하러 떠날 나와 얘기를 나눌 구실을 만드신 건지도 모른다.

어릴 적 온갖 농사일을 거들며 살았지만 어둠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일하러 나가는 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겨울 추위 끝자락이 매서운 2월이었지만, 그날 난 정말 기꺼이 창호문을 열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19902,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초중학교를 고향 동네 면 소재지에서 보낸 뒤 밀양 읍내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니 철든 뒤 부모님 곁에서 보내는 긴 시간은 그해 2월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으며,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임을 알았다.

2월의 시골은 농한기라 외견상 한가하다. 하지만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에게는 1년 농사가 이때 판가름 난다 할 만큼 귀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농부들은 논과 밭을 돌아보면서 한 해 농사를 계획한다. 어떤 농사를 지을지를 결정하고, 심을 작물에 따라 거름을 얼마나 낼지, 비료는 뭘 쓸지, 밭이나 논을 빌려 소작을 내야 할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날이 풀려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 동네 아재들은 너도나도 들로 밭으로 쟁기질을 하러 나간다. 당시에도 경운기가 있었지만 경지 정리가 되지 않아 대부분의 논과 밭에는 기계가 들어가기 힘들었다. 기계를 조립하고 부리는 일보다는 소가 끄는 쟁기질이 훨씬 더 손쉽기도 했다. 우리 집 어미 소는 몇 해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충분히 길이 들지 않아 아버지의 호령 소리를 아직 잘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앞에서 소를 몰면서 길잡이를 해 주어야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외양간의 어미 소를 깨워 물과 여물을 먹인 후, 아버지는 쟁기를 짊어지고 나는 소를 몰고 대문을 나섰다.

아침때 늦지 않게 후딱 댕기 오이소~.”

새벽부터 빈속에 오래 일하다 자칫 부녀가 기운이라도 빠질까, 걱정하시는 어머니 목소리를 뒤로 하고 들로 향했다.

암만 힘들어도, 니는 잘할 끼다.”

이려, 이려!”

아버지의 호령 소리에 맞춰 나는 앞에서 소를 끌고, 아버지는 쟁기질을 하셨다. 밭에는 오늘 내가 뿌려야 할 거름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쟁기로 밭을 가는 동안, 거름을 뿌리는 일은 내 몫이었다. 틈틈히 말 안 듣는 어미 소를 몰기도 하며 거름을 온 밭에 뿌리는 일은 무척 고단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쟁기질과 거름 내는 일은 아침때를 한참 넘겨 해가 중천에 가서야 끝이 났다. 동쪽 산 위로 훌쩍 솟은 햇살을 받아 쟁기질로 갈아진 흙에선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서늘한 아침 공기엔 싱싱한 거름 냄새가 가득했다.

힘들제?”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몇 시간째 일을 한 후 밭두렁에 앉으니, 헉헉대는 숨결에서 쇠를 달군 듯한 단내가 피어오른다. 고르게 잘 갈린 밭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말씀을 이어 가신다.

니가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러 간다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취업 결정이 나자 엄마는 정말 기뻐하시며 여기저기 인사하러 나를 데리고 다니셨지만, 아버지에게서 좋다는 말을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항공사에서 일한다니, 그기 어떤 긴지 나는 감히 상상도 안 된다. 테레비에 나오데? 비행기 타마 하와이라는 데도 가고 할 낀데, 와이키키라 카더나? 해변가가 좋더라. 언젠가 그런 데 가더라도, 오늘 이 시간을 잊지 말아라. 나는 니가 좋은 곳을 가고 멋진 옷을 걸치고 그래 산다 캐도, 니가 살았던 이 고향 동네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젊었을 땐 큰 데 나가 살고 싶었는데, 느거 할아버지가 절대 허락 안 하셔서 고향을 지키고 살았다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젠 농사지으며 고향서 사는 것이 내 운명이라 생각한 지 오래다. 니가 일손 부족한 시골서 자라면서, 지독히도 농사일을 많이 하면서 살아온 거 미안하기도 하고 많이 고맙게 생각한다. 고되고 힘들었을 텐데 큰 불평 안 하고 잘 따라 주는 너그들을 보미, 안타까운 마음이 와 없었겠노? 서울 가서 살아 보면 니 같은 경험을 하면서 살아온 친구들을 찾아보기는 힘들 끼다. 니한테 분명 값진 경험이 될 끼라 생각한다. 살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얼마나 많겠노? 그럴 때면 오늘 내랑 같이 밭 갈면서 우리가 지금 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 봐라. 지금보다 더 힘든 날이 얼마나 더 있겠노? 니는 잘 견뎌 낼 끼라 믿는다. 고향에서 살았던 이 시절이 너의 뿌리며 너의 근본 아니겠나. 니는 서울서도 잘 살 꺼라고 믿는다. 뭘 해도 잘 할 끼다.”

아버지의 그런 당부를 듣고 있자니, 나를 키워 주고 품어 준 고향 들과 산이 새삼 달라 보였다. 소 먹이느라 헤매 다녔던 뒷산과 앞산, 부모님 따라 농사짓던 들과 밭, 동무들하고 물장구치며 놀던 작은 개울, 봄의 산딸기부터 가을의 머루까지 내가 모르는 곳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속속들이 알고 기억하는 고향 마을이었다.

막 일을 끝낸 후라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두 사람 입에선 하얀 입김이 꽃처럼 피어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어미 소의 등과 입에서도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마치 곧 고향을 떠날 나를 위한 축포의 연기 같구나, 싶었다.

그림_ 최정규

항공사에서 객실 승무원으로 일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서울 생활도 그리 쉽지 않았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자랐던지라 체력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니는 일은 지독히도 고된 노동이었다. 태평양을 걸어서 건너다닌다고 말할 정도로 힘든 일 덕분에 퉁퉁 붓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낯선 나라의 차가운 침대에서 잠들 때, 모진 승객에게 무시당하며 눈물을 삼킬 때, 무섭고 호된 선배들의 질책에 속수무책일 때, 산골 소녀로서는 차마 상상조차도 못한 일을 겪으면서, 나는 서서히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 아버지가 얘기한 하와이 비행을 드디어 가게 되었다. 와이키키 백사장 바로 앞 호텔에 짐을 풀고 당장 해변으로 달려 나갔다. 휴양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그 아름다운 해변가를 걸었다. 잠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았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지쳤으며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을 겪으며 어쩌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힘들제? 그래도 안 잊어버렸제? 니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해라.”

그 순간, 그날의 고향 풍경과 아버지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마치 영화처럼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얼어붙은 땅에 박힌 쟁기를 끌던 어미 소의 거친 숨소리, 갈아엎은 흙에서 나던 신선한 땅 내음, 아침 햇살 받으며 피어오르던 아지랭이, 이랴~이랴~ 어띠이~ ~~” 소를 부리던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고단한 아침 일을 마친 후 아버지와 나누던 긴 이야기.

그후, 그날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시차를 넘나들며 타국에서 고단한 잠을 청할 때, 무서운 선배에게 혼이 나 혼자 눈물을 삼킬 때, 모진 말을 함부로 퍼붓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괴로울 때마다 되살아나, 나를 위로했다. 어미 소의 등어리처럼 판판하고 포근한 고향 뒷산과 굽이굽이 어여뻤던 논과 밭은 지금도 나를 어루만져 준다. 해마다 입사철의 그 봄날 즈음이면 나는 언제나 그 시간을 떠올린다. 그날 아버지와 내가 언 밭을 갈아엎으며 봄 농사를 시작했듯, 나의 긴긴 비행 생활도 그날 그렇게 시작한 것이 아닐까.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10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절대 자식을 위해 살지 마세요

 

정설경/ 작은도서관 운영자

 

 

인연을 이어 오던 동네 작은도서관에서 올해부터 책임을 맡게 되었다.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도서관을 세웠고, 월세를 근근이 만드느라 자원봉사 인력에 의지하여 도서관을 가동한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기관 중에 대한노인회가 있는데, 여기에 소속된 시니어 봉사자 세 분이 하루 또는 이틀씩 오셔서 도서관 정리 정돈을 해 주신다. 그중엔 연세도 제일 많고, 가장 정갈하고, 스스로 많이 배웠다고 자랑하시는 이 선생님이 계신다.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소액이라도 돈을 주는 게 얼마나 큰 복지인지, 늘 나라에 감사하다는 시니어 선생님. 팔순이 넘었는데 그 시절에 여고를 졸업하고 여대를 다녔다며, 말씀하시는 구절엔 꼭 영어 단어 하나씩을 넣어서 자신이 배운 사람이라고 티를 내신다. 그럴 때마다 귀여워서 속으로 큭큭 웃었다. 비록 취직하느라고 대학 졸업은 못했지만 명문 여대를 나온 것을 강조하신다. 그리고 못 배운(?) 주변 할머니들을 늘 흉보신다.

“5분만 말해 보면 저 할머니가 얼마나 배운 사람인지 나는 금방 알 수 있어요. 못 배운 사람은 표가 나거든요.”

어려운 시절에 남들보다 많이 배웠다는 시니어 선생님은 누가 더 많이 배운 사람인지 감별하고 품평하느라 이야기가 길다. 그런데 선생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찼다. 미국에 사는 딸과 카카오 보이스톡으로 통화하며 언성도 높이신다. 집엔 며느리가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한다며 도서관에 오면 와이파이도 터지겠다, 속내를 얘기하시느라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다.

내가 5천만 원 갖고 있는 줄 다 아는데 어떻게 안 주니? 전셋돈을 빼 줘야 한다는데 어떻게 안 주니?”

선생님의 딸은 엄마의 마지막 남은 재산 5천만 원을 아들과 며느리한테 절대 뺏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 같고, 선생님은 아들한테 얹혀 사는 주제에 돈이 급하다는데 어떻게 안 주고 버티냐며 언성을 높인다.

몇 주 동안 딸과 전화를 주고받으며 근심 걱정이 가득하시더니 어느날 차분하게 말씀을 들려주신다.

다시 태어나면 절대 이렇게 살지 않을 거예요. 자식 위하는 것도 다 소용없어요.”

마지막 남은 5천만 원을 아들한테 건네고서 상황이 종결됐나 보다. 많이 배운 할머니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푸념과 신세한탄을 듣느라 두 시간이 속절없이 간다. 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고역이지만 나이 들어 자식에게 종속된 경제적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집에 가만 있으면 누가 돈 한푼 줘요? 이렇게 나와서 뭐라도 하니까 얼마라도 받죠.”

근데 저 이런 데 와서 일하는 거 아무도 몰라요. 누가 알면 돈독 올랐다고 욕할 거예요.”

일찍 남편과 사별했지만 많이 배운 덕에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재력도 적지 않았는데 손녀가 유학 간다고 해서 몇 번 도와주다 보니 이젠 수중에 돈 한푼 안 남았다고 자책하신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시니어 일자리를 얻어서 연중 10개월은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어 좋지만, 혹시 누가 알까 봐 창피하다며 조마조마해 하신다. 나도 적잖은 나이가 되니 경제생활에 대한 고민이 많아져 이분의 푸념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평생 돈을 벌었는데 자식들을 도와줘야 할 상황에 부딪혔고, 자꾸 도와주다 보니 이젠 수중에 돈이 없다고. 시니어 일자리마저 없었으면 할머니는 구겨진 자존감을 살릴 방안도 없었을 것이다. 고령에 일할 수 있는 것도 자랑이라면 자랑일 텐데 할머니는 누가 알까 봐, 들킬까 싶어 조심조심 작은 발걸음을 옮기신다. 혹여 나이 많다고 내년엔 기회를 안 줄까 봐 도서관에 오실 때마다 인생의 회한을 자꾸 토해 내신다. 할머니의 근심에 공감하면서 나의 우울지수가 높아져 간다. ‘저 모습이 나의 미래, 우리의 나중 모습이 아닐까.’ 할머니를 보며 50대 나이의 도서관 봉사자들은 깊은 한숨을 나눴다. 우리가 노인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은 최소 3, 40년인데 그 긴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까.


50대인 우리들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딱히 없다. 노인들은 복지제도라도 있지, 우리는 새로운 일을 할 수도 없고 자격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순노무직이거나 취업 구제책으로 나오는 단발성 일이다.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고, 그렇다고 놀기도 어쭙잖은 나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만큼 앞으로 더 살아야 한다는데 뭣을 하며 노년을 보내야 할까. 소일은 노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용어였는데 그 소일해야 할 시기가 우리에게 닥치고 있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최소한의 생계는 걱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내가 주도할 소일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작아질 것이다. 노인으로 보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할일이 없으면 많이 배운 노인이라도 뒷모습은 허전하다. ‘까지 떨어지면 비참함으로 얼룩진다. .

다시 태어나면 절대 자식만 위해서 살지 않을 거예요.”

많이 배웠다고 자랑하시는 할머니의 등 뒤엔 외로움도 겹쳐 있었다. 허무하게도 후회만 남은 어느 할머니에게서 노인의 시간을 걱정하게 된 나, 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년 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비정한 먹이사슬

이순이/ 벌농사꾼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새벽에 한바탕 벌통 내검을 하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집 안이나 그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리고 해지기 전에 또 한바탕 벌통 내검을 한다.

, 벌통은 왜 이리 많고 또 여름 해는 왜 이리 긴 거냐. 온종일 일을 하다가 문득 노예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일을 멈추고 집 안으로 들어가 캔 맥주를 마시거나 냉커피를 마시면서 일을 할지 안 할지는 내가 결정한다며 버텨 보기도 한다. 그러나 농사일이나 벌 일은 미룬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다시 작업에 돌입하곤 한다.

며칠 전 새벽일을 하다가 남편이 뭔가를 발로 차서 봉장 밖으로 치우는 것을 보았다. 차는 모습을 보니 꽤나 크고 잘 밀쳐지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뭐냐고 물었더니 두꺼비란다. 두꺼비가 벌을 잡아먹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면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면 멀리 갖다 버리든지 죽이든지 해야지 거기에 그렇게 두면 또 돌아오지 않겠냐고 툴툴댔다. 양서류나 파충류에는 적응이 안 되어 그 두꺼비를 나는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저녁 작업을 하고 뒷정리를 하다가 투실투실한 두꺼비가 벌통 앞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개구리를 귀엽게 볼 정도까지는 적응이 되었는데 두꺼비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놈은 너무 크고 징그러웠다. 무엇보다 인기척을 느끼고도 도망가지를 않고 어정어정 벌통에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네가 인기척을 모르는 게냐? 하여간 벌통 앞에 앉아 저 큰 배가 부를 때까지 꿀벌을 한 마리 한 마리 혀로 말아 먹는 생각을 하니 보호본능에 전투력이 상승했다.


그놈을 골프공 날리듯 쳐내겠다는 생각으로 벌통을 눌러놓은 굵은 각목을 집어 들었지만 입은 이미 남편을 부르고 있다. 그놈을 쳐내며 느껴질 물컹함과 무게감에 몸서리를 치며 남편에게 각목을 건넸다. 성질 급한 남편은 내가 건네주는 각목을 본 체도 않고 지나쳐 가며 두꺼비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각목으로 두꺼비가 있는 쪽을 가리키자 근시안인 남편은 그곳을 들여다보느라 허리를 굽히고 고개까지 수그린다. 위험하다. 두꺼비 혀에 독이 있다고 들은 기억에서 두꺼비 혀가 1미터도 넘게 뻗어 나와 남편의 얼굴을 핥는 것까지 상상의 날개가 순식간에 펼쳐지니 소름이 돋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발길질로 두꺼비를 걷어찼다. 그리고 어디로 날아갔는지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덩치 큰 두꺼비는 축구공처럼 멀리 날아가지 않고 바로 옆에 떨어져 별일 없었다는 듯이 벌통 쪽으로 어정어정 기어가고 있었다. 흥분한 남편은 그제야 내 손에 있는 각목을 낚아채서 게이트볼 치듯 투욱 쳐냈다. 그러나 두꺼비가 꿈쩍도 않자 맘을 고쳐먹고 장타를 날리듯 힘껏 쳐냈다. 그 타격이 빗나갔는지 두꺼비는 굴러가지도 날아가지도 않고 5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벌러덩 나자빠져 있었다. 덩치 때문일까. 파리나 모기를 잡아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버리던 것과는 다른 느낌 때문에 우리 부부는 말없이 뒷수습을 했다. , 꿀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꺼비를 죽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던 것일까. 미안함과 죄책감을 털어 내기 위해 둘이서 몇 마디 말을 더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남편이 말하고, 맞아 맞아, 저 놈이 날마다 와서 먹을 꿀벌을 생각해 봐. 우리도 먹고살자고 그런 거지 재미로 죽인 건 아니니까.그렇게 종알대며 걸어 나오다가 나는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돌아섰다. 또 다른 두꺼비가 죽은 놈과 같은 자세로 벌통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남편은 골프 치듯 두꺼비를 단번에 봉장 바깥쪽으로 쳐냈다. 살생이란 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이미 숙련이 되는가 보다. 마음이 무거워서 소주를 아니 마시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밤마다 두꺼비 보초를 서러 나갔다. 아랫마을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주변의 풀을 더 베어 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놈을 양파망에 넣어 꽉 묶어 두란다. 그놈이야 말라 죽을 테고 다른 두꺼비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록 두꺼비가 나타나지 않는다. 적당히 서로 먹고살면서 눈에 안 띄니 다행이라 했더니, 남편이 말한다.

어제 아침에 보니 뱀이 두 마리 있더라고.” 

posted by 작은책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