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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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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한국지엠 비정규직

 

아빠, 우리 집에 언제 놀러와?

정인열/ <작은책> 기자 

 

▲ 한국지엠 부평공장. 작은책(정인열)


한국지엠은 생산 물량 감소를 이유로 2014~2015년 군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약 1000명을 해고했다. 정규직은 노동조합이 있어 해고를 피했다. 인력 감축이 필요한 경우 비정규직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정규직을 전환배치해 고용을 보장한다는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이를 인소싱이라고 한다.) 비정규직이 일하던 공정에는 정규직원이 들어왔다. 정규직원들은 비정규직의 편성률(생산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회사는 해고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다시 불러 2~3개월간 정규직원에게 현장 업무를 가르치게 했다.

이완규 씨(40)도 인소싱으로 인해 20158월 해고됐다. 그는 2006년 군산공장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도어 라인(자동차 문)에서 일했다. 그러다 2015430, 3개월 유급 휴직 통보를 받았다. 복직 날짜는 없었다. 곧 해고된다고 생각하자 억울해서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지엠군산비정규직지회)에 가입했다.

모범사원 상도 세 번이나 받았어요. 성실하게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너는 비정규직이니까 나가라, 그러니까 억울한 거예요.”

2018213일 군산 및 부평공장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법원은 이완규 씨를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 45명이 한국지엠의 노동자라고 1심 선고를 내렸다. 해고 투쟁 3년 만에 들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같은 날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지엠이 군산공장 폐쇄를 발표한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공장에 돌아가겠다는 생각만으로 싸웠는데 갈 곳이 없어진다니까. 괜히 (투쟁)했나? 그때 많이 힘들었죠.”

인소싱은 2009년 부평공장에서 먼저 시작됐다. 당시 금융위기로 미국의 지엠 본사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비정규직 약 1000명이 해고됐다. 사실 비규정직이 해고된 자리에 정규직 인력을 1.5~2배 더 투입해야 공정이 돌아간다. 게다가 비정규직에게는 정규직 대비 50~70퍼센트 수준의 임금만 지급하고, 자녀의 학자금 같은 복리후생 하나 제공하지 않고, 골치 아픈 노사협상을 하지 않고도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을 손쉽게 해고했다. 비정규직에게는 노동삼권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부평공장 안에는 2, 3차 하청업체를 포함해 약 2500명의 비정규직이 있었다. 이영수 씨(46)와 박현상 씨(45)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비정규직의 열악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두 사람은 2006년 부평공장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차별을 묻자 이영수 씨가 말했다.

주말에 지게차 타는 라인 그리는 거를 한 적이 있어요. 정규직하고 똑같이 라인을 그리는데 거기는 이십몇만 원 받아가고 우리는 십만 원도 안 되는 거야. 그당시만 해도 3배 차이가 나는 거야. 야 이거는 심각하다 느꼈죠.”

▲ 출고 직전 차량에 스프레이 건으로 왁스를 도포하는 방청(녹 방지작업사진 제공_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2007년 한국지엠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 일하던 라인을 분리하고 모듈화를 도입하면서 일부 공정을 납품업체로 돌리려 했다. 이영수 씨와 박현상 씨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에 반대하며 200792일 비정규직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를 설립했다. 발기 조합원은 30여 명이었다. 설립 일주일 만에 비정규직 노조 간부들부터 차례대로 해고되더니 조합원이 가장 많았던 하청업체 스피드월드파워도 폐업됐다. 해고자만 25. 선전전, 천막농성, 집회를 해도 복직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071227, 박현상 씨는 해고자 복직 및 노조 인정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가지고 부평구청역 CCTV 탑에 올라갔다.

그날 비가 오고 날씨가 안 좋았어. 비닐 쳐 놓고 자고 일어났는데 못 내려가게 밑에 천막이 쳐져 있는 거야.(웃음)

하루 이틀 예상하고 올라갔던 그는 65일 만에 내려왔다. 이대우 당시 지회장이 이어받아 70일을 고공농성했다. 2008117일에는 황호인 씨가 부평역 CCTV에 올라갔다. 며칠 후 또 다른 조합원 4명이 한강대교 아치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했다. 227일에는 이준삼 씨가 마포대교 외줄 농성을 했다. 정화조를 잘라 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밧줄을 달고 다리 아래에 매달렸다. 이영수 씨와 박현상 씨가 말한다.

정화조가 플라스틱이잖아요. 그라인더로 그 위를 잘랐어. 밧줄도 혹시 끊어질까 봐 최고급 밧줄로 했는데 (진압하려고 하니까) 뛰어내려 버렸어.”

다행히 이준삼 씨는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고 수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방구조정에 구조돼 목숨을 건졌다.

▲ 황호인, 이준삼 조합원은 지엠대우 정문 아치에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두 달간 고공농성을 했다(2010년 12월 1일 ~ 2011년 2월 1일). 사진 제공_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부평구청역에서는 고공농성이 계속됐다. 135일째 되던 20085, 지회는 해고자 22명 중 7명만 선별 복직하기로 합의하고 이대우 지회장은 내려왔다. 하지만 지회장을 비롯해 박현상, 이영수 등 핵심 간부를 포함한 15명은 복직하지 못했다. 이들은 부평공장 서문 천막 농성장에서 2년 반이 넘게 투쟁을 이어 갔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2010121일 부평공장 정문 아치 위로 황호인, 이준삼 해고자가 올라가 또다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아래에서는 당시 지회장이었던 신현창 씨가 단식을 했다. 201121, 노사는 해고자 전원 복직에 합의했다. 2년 후인 2013년에 복직한다는 조건이었다. 신 지회장 단식 45, 고공농성 두 달이 되던 날이었다. 만족할 만한 합의는 아니었지만 일단락을 짓기로 했다. 이날 합의대로 20137월 해고자는 모두 복직됐다. 6년이 걸렸다이영수 씨가 당시 복직한 느낌을 회상했다.

돈을 버니까 좋더라.(웃음)

하지만 6년을 무임금으로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박현상 씨가 또 우스갯소리를 한다.

이영수 동지는 아직 혼자여서 버티는 거…. (웃음)

박현상 씨와 이영수 씨는 부양가족이 없는 싱글이라 버텼다며 웃는다. 겉으로는 가볍게 말하지만 아주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군산공장 이완규 씨는 어린 자녀 둘이 있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아내가 직장에 나가 돈을 벌지만 4인 가족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정규직 해고자들은 2년치 임금을 받고 나오기라도 했지만 비정규직은 빈손이다. 해고 후 4년 동안 쌓인 빚이 3천만 원. 그럼에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자녀들 때문이다.

현재 비정규직이 1200만 명 정도 된다잖아요. 가면 갈수록 비정규직은 늘어날 거거든요. 앞으로 야네들이 살아갈 세상이 보이는 거예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기자회견도 많이 하고 티비에도 나와요. 우리 와이프가 다른 건 다 좋은데 티비만 나오지마라, 전라도 말로 '거시기'하다는 거여요. 제가 와이프한테 그랬어요. 자기는 자기 '거시기'한 게 좋아 아니면 우리 자식들이 커서 비정규직으로 평생 살아가는 게 좋아? 그럼 당연히 아니래요. 그럼 자기도 좀 참아. 아빠의 투쟁으로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고 싶어요. 잠깐은 불편하겠지만 계속 싸우다 보면 우리 애기들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살 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이완규 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현상 씨와 이영수 씨가 박수를 치며 말한다.

이런 조합원이 있어야 되는데.(웃음)

한국지엠 구조조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영수 씨는 지난 11일부로 또 해고자가 됐다. 한국지엠이 정규직에게는 임금의 70퍼센트를 지급하며 유급휴직을 제안했지만 비정규직에게는 무급 순환휴직을 요구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이를 거부했고 이영수 씨는 해고됐다. 비정규직 노조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생산 물량이 없는데 무슨 해고자 복직과 정규직화 요구냐며 차가운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지회의 요구는 수긍이 갈 만하다. 작년 1교대로 전환되었던 부평2공장이 조만간 다시 2교대제가 될 예정인데, 이때 정규직 600여 명, 비정규직 100여 명이 필요할 것으로 지회는 예상한다. 지회 해고자는 46(부평 38, 군산 8). 그리고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로 법원 판결도 이미 받은 상태다. 복직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뿐만 아니라 한국지엠은 정부로부터 8100억 원을 지원받았다. 사회적 책임도 져야 한다.

▲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 이영수, 이완규, 박현상 씨(왼쪽부터). 지회는 해고자 복직 및 정규직 전환 요구를 하며 507일째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다(2019년 6월 27일). 작은책(정인열)


생계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이완규 씨와 박현상 씨의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다. 싱글인 이영수 씨는 난 담배나 피워야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박현상 씨는 네 살 된 딸이 있다. 집은 충북 진천. 딸이 두 살 때 육아휴직을 쓰고 1년 전 공장에 복귀하면서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다. 이완규 씨는 6월부터 상경 투쟁을 하고 있다. 이완규 씨가 아이들과 통화한 이야기를 한다. “‘아빠는 왜 회사 가면 (집에) 안 와?’ 이런다니까.” 이 말에 박현상 씨가 받아쳤다. 우리 애는 아빠 우리 집에 언제 놀러 와?’ 한다니까. ‘언제 와도 아니고. 하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네 사정이 더 낫네 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돌려서 표현했다. 싱글인 이영수 씨만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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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14)

 

자식을 두고 갈 때 알려 줄 것들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사랑하는 나의 딸이 엄마가 있어서 너무 불행하다고,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런 엄마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합니다. 엄마는 왜 사냐고 묻습니다.

이런 순간에 맞닥뜨리면 모멸감과 낭패감, 화살이 누구를 겨냥하는지 분명한 분노의 마음에 휩싸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진짜로 죽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미친 호기심이 일기도 합니다.

나는 평소에 딸아이한테 내가 죽으면 외딴 무덤이나 발걸음하기 어려운 곳에 두지 말고, 화장해서 곱게 빻아서 예쁜 병에 담아 부엌 찬장에 두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도 나의 부모님의 다음을 어떻게 챙길지 자신이 없는데, 우리 다음 세대들은 장례나 제사를 치러 낼 수 있을까요?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너무 슬프고 너무 절망스러워서 삶에서 저만치 비껴 나게 두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게 되어 있는데, 마치 죽음이 생과 전혀 다른 낯선 것인 양 외면하는 모양새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지나간 사람들 사진을 보고, 손때 묻은 물건들이 그대로 언제든 닿을 곳에 있어서 죽음도 삶도 관계의 영속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 죽음도 사라져 없음이 아니라 그저 삶의 일부로 있는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나의 백수 생활이 자꾸 길어지고 있을 때, 딸아이가, 엄마가 돈을 못 벌고 우리가 몹시 가난해져도 밥은 굶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엄마의 친구들이 자기가 굶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더라고요. 죽고 나면, 잠시 나의 딸을 굶어 죽게 하지 않을 나의 벗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봅니다. (한참을 계속 떠올리는 중) , 좋아요. 내가 지금 당장 물려줄 재산은 하나 없어도, 내 딸아이 밥 한 끼씩 챙겨 줄 사람들은 좀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어도 딸아이의 생존에는 하등 어려움이 없을 것 같네요. 조만간 약정서를 돌리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물론 자식을 두고 먼저 가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죽어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최소한 도시 아파트에서 얼른 벗어나 적당히 한적한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할 거 같습니다. 마당이 있고, 별다른 조리가 필요 없는 오이나 당근 같은 것들을 그 자리에서 따 먹으며 살 수 있으면 걱정이 좀 덜 되겠네요. 그리고, 고기 말고 그나마 즐겨 먹는 두부로 할 수 있는 음식들 몇 가지 요리법을 좀 정리해 놔야겠습니다.

그리고 시행착오투성이여서 실패하느라 정신없던 나의 삶보다는 조금 더 편히 살아가는 노하우를 알려 줘야겠습니다. 이를테면, 최악의 남자를 피하는 법 같은 게 있겠네요. 다음 체크리스트에서 항목을 체크해서 점수를 내 보게 하는 겁니다.

 

1. 남자 친구와 같이 밤길을 걷다가 휘파람을 부는데, ‘밤에 휘파람 불면 귀신 나온다하며 못하게 한다.

2. 머리를 자르고 만났더니, ‘긴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하며 아쉬워한다.

3. 나에 대해서 별로 궁금해하는 게 없다. 질문을 잘 안 한다.

4. 또 한편으로 나에 대해서 너무 다 알려고 한다.

5. ‘사전에 의논하지 않는다. 내 의사를 묻지 않는다.

6. 또 한편으로 하나하나 일일이 다 내 눈치를 살핀다.

7. 심부름을 하고 왔는데 또 나갔다 오게 할 때, ‘아까 말하지!’ 하며 눈을 부라린다.

8. 어떤 물건이 좋다는 이야기를 물건값으로 말한다.

9. 장난치다 다쳤을 때 갑자기 정색하며 화를 낸다. 특히 나 때문에 다쳤을 때 나를 쩔쩔매게 만든다.

10. 왠지 내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를 선뜻 만들지 않게 된다.

11. 전 여친을 몹시 안 좋게 말한다.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고도 한다.

12. 엄마, 아빠에게 원한이 깊다. 특히 어린 시절의 상처 이야기를 할 때 아직도 가시지 않은 적개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13. 화가 났을 때 주먹으로 문짝을 치는 일이 한 번이라도있다.

14. ‘도저히 답톡을 할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이 체크리스트는 체크할 때마다 1점씩 붙게 되는데, 그러면 점수 구간이 생기겠지요? 딸아이한테 단단히 일러두어야겠습니다. 정확하게 이 상황에서 이 말을 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유전자에 박혀 있는 것 같(다고 저만 믿고 있)다고요. 이 체크리스트는 무척 견고하고 엄마의 온 생을 통해 검증되고 검증된 항목이라서 단 1점이라도 나는 날에는 그 남자는 무조건 아웃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좋은 남자는 존재하기가 쉽지 않으니, 연애는 개떡 같은 남자 찰떡 같은 남자 다 만나 보다가 이 체크리트스에서 1점이라도 나는 순간에 뻥 차 버리면 된다고. 나중에 누구랑 같이 살고 싶어지면 그게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온순하고 착하고 눈이 반짝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도 해 주어야겠네요.

(그나저나, 원래 체크리스트에 14개는 어쩐지 좀 어정쩡하니, 나머지 한 개는 여러분이 좀 채워 주시지요.)

그 밖에 일기를 쓸 때는 같은 크기의 일기장에 써 두는 게 좋다거나, 설거지하기 가장 좋은 때는 밥 먹고 난 직후라는 놀라운 사실, 나의 엄마한테서 전수받은 소울푸드, 톳두부무침의 비법 같은 것, 장을 보러 갈 때는 꼭 밥을 먹고 가야 한다는 것, 양치질을 할 때는 위턱의 왼쪽 어금니, 윗니, 위턱의 오른쪽 어금니, 아래턱의 오른쪽 어금니, 아랫니, 아래턱의 왼쪽 어금니로 여섯 개 구역을 나눠서 한 구역씩 클리어하는 방식으로 칫솔질을 하면 놓치는 치아 없이 말끔하게 닦을 수 있다든가 하는, 온 생애를 통해 연마해 온 비기 가운데 비기들을 한 번에 하나씩 써서 집 안 구석구석에 숨겨 두어야겠습니다. 찾으면 찾는 대로 참고가 될 테고, 못 찾으면 못 찾는 대로 자기 노하우가 생길 테니까 어떻게 되든 괜찮을 거 같네요.

그림_ 최정규


하도 엄마 때문에 불행하고,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도대체 그 마음이 얼만큼인지 물었습니다. 지금은 한 60퍼센트라고 하네요. 다른 엄마들이 그렇듯, 나도 딸아이가 원하면 그게 뭐든 다 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100퍼센트가 되면 꼭 말해 달라, 그러면 반드시 죽어 주겠다고요.

가장 최근에 죽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딸아이가 기말고사를 망치고 걸어 온 전화 통화에서인데요. “괜찮아, 점수가 뭐가 중요해. 열심히 한 과정이 있으니까 됐지했더니, “과정이 뭐가 중요해, 시험은 다 점수로 말하는데! 내가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는데 왜 자꾸 과정이 중요하대? 내 기분을 그렇게 못 맞춰 줘?” 하는 것이 그 사유였습니다.

빵점이면 어떠냐, 공부 같은 거 못해도 된다고 말했는데 되레 욕을 먹으니, 100점 안 맞았다고 다그치다 욕먹은 엄마들보다 내가 더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는 딸아이가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80퍼센트라고 했습니다.

이 비율이 오르내릴 때마다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맑았다 개었다 날씨도 덩달아 바뀌는 것 같습니다. 100퍼센트가 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서둘러 이 글을 남겨 봅니다. 자꾸 죽으라고 하니, 죽고 나서 어떻게 될까 자꾸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모은 책은 제목을 죽으란다고 진짜 죽은 중2 엄마 이야기라고 지어 보고 싶습니다.

지난달에, 이제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무척 진중한 목소리로 엄마는, 내가 중2 때 중2병이 끝난 걸 다행으로 알아!” 그랬는데 개뿔. “넌 아직도 중2병 투병 중이거든!” 하는 말을, (차마 그녀석 면전에다가는 입도 뻥긋 못 하고) <작은책> 대나무 숲에다가 목 놓아 외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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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비정한 먹이사슬

이순이/ 벌농사꾼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새벽에 한바탕 벌통 내검을 하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집 안이나 그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리고 해지기 전에 또 한바탕 벌통 내검을 한다.

, 벌통은 왜 이리 많고 또 여름 해는 왜 이리 긴 거냐. 온종일 일을 하다가 문득 노예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일을 멈추고 집 안으로 들어가 캔 맥주를 마시거나 냉커피를 마시면서 일을 할지 안 할지는 내가 결정한다며 버텨 보기도 한다. 그러나 농사일이나 벌 일은 미룬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다시 작업에 돌입하곤 한다.

며칠 전 새벽일을 하다가 남편이 뭔가를 발로 차서 봉장 밖으로 치우는 것을 보았다. 차는 모습을 보니 꽤나 크고 잘 밀쳐지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뭐냐고 물었더니 두꺼비란다. 두꺼비가 벌을 잡아먹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면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면 멀리 갖다 버리든지 죽이든지 해야지 거기에 그렇게 두면 또 돌아오지 않겠냐고 툴툴댔다. 양서류나 파충류에는 적응이 안 되어 그 두꺼비를 나는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저녁 작업을 하고 뒷정리를 하다가 투실투실한 두꺼비가 벌통 앞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개구리를 귀엽게 볼 정도까지는 적응이 되었는데 두꺼비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놈은 너무 크고 징그러웠다. 무엇보다 인기척을 느끼고도 도망가지를 않고 어정어정 벌통에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네가 인기척을 모르는 게냐? 하여간 벌통 앞에 앉아 저 큰 배가 부를 때까지 꿀벌을 한 마리 한 마리 혀로 말아 먹는 생각을 하니 보호본능에 전투력이 상승했다.


그놈을 골프공 날리듯 쳐내겠다는 생각으로 벌통을 눌러놓은 굵은 각목을 집어 들었지만 입은 이미 남편을 부르고 있다. 그놈을 쳐내며 느껴질 물컹함과 무게감에 몸서리를 치며 남편에게 각목을 건넸다. 성질 급한 남편은 내가 건네주는 각목을 본 체도 않고 지나쳐 가며 두꺼비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각목으로 두꺼비가 있는 쪽을 가리키자 근시안인 남편은 그곳을 들여다보느라 허리를 굽히고 고개까지 수그린다. 위험하다. 두꺼비 혀에 독이 있다고 들은 기억에서 두꺼비 혀가 1미터도 넘게 뻗어 나와 남편의 얼굴을 핥는 것까지 상상의 날개가 순식간에 펼쳐지니 소름이 돋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발길질로 두꺼비를 걷어찼다. 그리고 어디로 날아갔는지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덩치 큰 두꺼비는 축구공처럼 멀리 날아가지 않고 바로 옆에 떨어져 별일 없었다는 듯이 벌통 쪽으로 어정어정 기어가고 있었다. 흥분한 남편은 그제야 내 손에 있는 각목을 낚아채서 게이트볼 치듯 투욱 쳐냈다. 그러나 두꺼비가 꿈쩍도 않자 맘을 고쳐먹고 장타를 날리듯 힘껏 쳐냈다. 그 타격이 빗나갔는지 두꺼비는 굴러가지도 날아가지도 않고 5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벌러덩 나자빠져 있었다. 덩치 때문일까. 파리나 모기를 잡아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버리던 것과는 다른 느낌 때문에 우리 부부는 말없이 뒷수습을 했다. , 꿀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꺼비를 죽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던 것일까. 미안함과 죄책감을 털어 내기 위해 둘이서 몇 마디 말을 더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남편이 말하고, 맞아 맞아, 저 놈이 날마다 와서 먹을 꿀벌을 생각해 봐. 우리도 먹고살자고 그런 거지 재미로 죽인 건 아니니까.그렇게 종알대며 걸어 나오다가 나는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돌아섰다. 또 다른 두꺼비가 죽은 놈과 같은 자세로 벌통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남편은 골프 치듯 두꺼비를 단번에 봉장 바깥쪽으로 쳐냈다. 살생이란 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이미 숙련이 되는가 보다. 마음이 무거워서 소주를 아니 마시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밤마다 두꺼비 보초를 서러 나갔다. 아랫마을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주변의 풀을 더 베어 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놈을 양파망에 넣어 꽉 묶어 두란다. 그놈이야 말라 죽을 테고 다른 두꺼비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록 두꺼비가 나타나지 않는다. 적당히 서로 먹고살면서 눈에 안 띄니 다행이라 했더니, 남편이 말한다.

어제 아침에 보니 뱀이 두 마리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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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변기 26개 닦고 엉엉 울었다

허지희/ 세종호텔에서 일하고 농성하고 애도 키우는 아줌마

 

 

명동역 10번 출구 세종호텔. 이 출근길을 25년째 다닙니다. 대표전화를 받는 전화교환원으로 20, 호텔방을 청소하는 룸어텐던트로 5년 동안 근무하고 있습니다.

▲ 객실을 정돈하는 세종호텔 룸어텐던트 노동자. ⓒ작은책(정인열)


세종대학교 재단에서 113억 회계 비리로 퇴출되었던 주명건 전 이사장이 세종호텔 회장에 복귀하면서 복수노조, 전환배치, 구조조정, 해고 등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우리 회사에서 벌어졌습니다. 전화 통화량을 조사하는 회사의 행동으로 이미 교환실이 아웃소싱되거나 해체될 수 있다는 예감에 2012년 세종호텔 노동조합의 파업과 로비 점거에 참가했습니다만, 내 일자리를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20년 근속상을 받은 201412195, 타월을 개고 침대 시트를 갈고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룸어텐던트로 발령이 났습니다. 호텔에서 장기 근속한 여직원을 청소 노동자로 발령 내는 것은 흔히 쓰는 퇴출 방법입니다. 둘째 아이의 육아휴직이 남아 있어 고민도 했지만 사표는 내일 써도 되고 다음달에 써도 되니 함께 싸우자는, 지금은 해고된 세종호텔노조 김상진 전 위원장의 말씀에 용기를 내 보기로 했습니다.

발령이 나고 처음 한 일은 교환실 유니폼을 입은 내 마지막 모습을 셀카로 찍는 일이었습니다. ‘20년을 입어 왔지만 다시는 입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었으나 막상 룸어텐던트의 유니폼과 앞치마를 입었을 때는 서러워 눈물도 나고 타인이 사용한 변기를 닦으려니 장갑을 껴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2주간의 청소 교육은 타월 개는 법부터 시작했고 단 한 번 욕실 청소하는 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날에 13, 둘째 날까지 26개의 변기와 욕조, 세면대를 닦았습니다. 청소 교육 이틀 만에 어깨와 허리에 파스가 덕지덕지 붙었습니다. 퇴근길에 만난 남편과 순댓국집에서 소주만 퍼붓고 가게가 떠나가도록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 객실 내 화장실을 청소하는 세종호텔 룸어텐던트 노동자. ⓒ작은책(정인열)


이걸 왜 해야 되는데. 흑흑. 울엄마는 이럴 줄 모르고 대학 보내고. 엉엉.”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은행 계좌에 월급이 입금된 걸 보는 순간, 돈이다. 난 돈 벌러 회사 다니는 사람이다.”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돈이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혼자라면 오래 버틸 수 없었겠지만, 우리 팀에는 노동조합 조합원이 있어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청소 노하우도 공유하며 중고 신입 막내를 살뜰히 챙겨 주셔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도 힘드신 거 뻔히 아는데, 내게 배정된 층에 오셔서 나 몰래 베드도 갈아 놓고 가시고, 그분들이 내게는 엄마였고 천사였습니다.

초보 룸어텐던트는 객실 타입도 잘 모르고 린넨을 봐도 싱글인지 더블인지 구분을 못해 정리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복도에서 우왕좌왕하는 시간이 청소 시간보다 더 많았습니다. 사드 배치 이전의 명동은 중국인 물결이었는데, 화장품을 사서 알맹이만 슈트 케이스에 담고 제품 케이스로 방마다 두세 곳의 쓰레기 언덕을 만들었고 쓰레기통을 제외한 모든 곳에 쓰레기를 버려 댔습니다. 바닥에 던져진 콘돔을 모르고 집었다가 장갑이 엉망이 되기도 하고 얇은 와인 글라스와 8온스 컵을 씻다가 금이 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전환배치된 날 어용노조 전화교환 직원도 함께 발령이 났는데 팀장은 세종호텔 노동조합원인 내게만 이런저런 이유로 수시로 경위서를 요구했습니다. 20년 동안 교환실에서 써 본 적 없는 경위서를 룸어텐던트가 된 후에는 매달 썼을 정도였습니다. 전 직원 성과연봉제가 어용노조 위원장과 대의원 3명의 직권 조인으로 통과된 후 룸어텐던트 파트는 전에 없던 인스펙터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인스펙터는 룸어텐던트가 청소한 객실을 점검하는 사람인데 원래 인스펙터 업무는 룸어텐던트가 실수로 빠뜨린 것을 채워 주고 보완하는 일이지만 세종호텔 인스펙터의 업무는 사진과 채점입니다. 청소한 객실에서 흠을 찾아 증거로 사진을 찍어 팀장에게 매일 전송하고 객실 청소 상태를 등급으로 매겼고 팀장은 사진과 등급으로 성과연봉제 임금 삭감의 사유를 준비했습니다. 마음은 그러지 말자 생각했지만 인스펙터에게 지적당하거나 사진을 찍히고 나면 더 치밀하고 꼼꼼히 일하게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병들어 갔습니다. 테니스엘보와 손목터널증후군은 룸어텐던트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병명이고, 내 경우엔 디스크가 약해 2017년에는 목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는 허리디스크도 함께 왔으며 어깨회전근 미세 파열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채점된 성과연봉제 첫해 저의 임금은 9퍼센트 삭감. 오랫동안 임금이 동결되었기에 9퍼센트 삭감된 후 월급은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습니다. 삭감 사유는 딥클리닝 개수 부족. 딥클리닝이란 욕실 천장 곰팡이부터 타일 줄눈까지 락스 작업을 하고, 사다리로 올라가 천장 먼지를 제거하고, 침대를 들거나 밀어 침대 아래 먼지도 제거하고, TV장과 걸레받이를 청소하는 일 등입니다. 타 호텔에서는 딥클리닝 전문 직원을 둔다는데 세종호텔에서는 룸어텐던트에게 시켰습니다.

그 딥클리닝을 하루에 한 방씩 점검받아야 하는데 내 경우는 대학 입학시험문제 출제 교수가 체크인 한 적이 4번이나 있었습니다. 대입 출제 교수가 묵는 방은 가벽을 만들어 직원조차 못 들어가는 출입금지 구역이 됩니다. 딥클리닝 자체가 불가능했음에도 회사는 그걸 임금 삭감 사유라고 내밀었습니다.

반면 어용노조 조합원 중에는 단 한 명이 3퍼센트 삭감되고 나머지는 전원 동결되어 세종호텔 노동조합과 형평성도 없고 차이가 심하게 났습니다. 타 회사의 성과연봉제는 인상되는 연봉제지만 세종호텔의 성과연봉제는, 사원은 최대 10퍼센트까지 계장 이상은 30퍼센트까지 삭감할 수 있는 악법 중의 악법입니다. 그 기준으로 세종노조 계장님 몇 분은 2년 연속 삭감당해 월급이 반토막 난 분도 있습니다.

호텔 직원들은 구조조정으로 퇴사해 나가고 팀장들의 회유와 협박에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로 빠져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이제 15명의 소수 노조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오전, 오후 선전전과 매주 목요일의 집회로 9년째 투쟁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내며 회사의 부당함을 당당히 말하는 힘이 세종노조의 저력입니다. 그 힘으로 특별감독관이 나오기도 하고 작년에는 잠시나마 교섭이 이뤄지기도 해 일부 조합원이 전환배치에서 복직하는 성과도 이뤄 낼 수 있었습니다.

사법 적폐 임종헌과 사돈이며 친이명박 적폐 판사 박성준이 사위고, 전 외교부 장관 유명환을 재단 이사장에 세워 놓은 주명건 회장의 힘은 영원할 듯했습니다. 그러나 임종헌이 구속된 이후 교육부의 세종대 감사가 실시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시기라 판단하고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호텔 정문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김상진 전 위원장의 해고자 복직과 나의 전환배치에 대한 원직 복직과 성과연봉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도 힘들고 농성도 힘들지만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뷔페 설거지와 고기 굽기도 했고, 전화교환이든 룸어텐던트든 내 일, 나 자신의 일이기에 나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세종호텔에서 또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으나 노조와 함께 회사에 할 말 하며 당당하게 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 세종호텔과 서비스연맹 노동자들이 지난 5월 세종호텔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_세종호텔노조

posted by 작은책
2019. 7. 24. 13:56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고창수


발행인의 글

 

국회 청문회에서 이낙연 국무총리의 되받아치는 답변이 화제입니다. 자한당 박대출 의원이 언론에서 불공정 보도하는 거 보신 적 있냐고 물었을 때 이낙연 국무총리는 자신은 꽤 오래 전부터 좀 더 공정한 채널을 보고 있다고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공정하지 않은 채널을 보면 제목이 이렇습니다. <“강제징용 보상은 청구권 협정에 포함”- ‘정부 민관서 결론당시 이해찬은 위원장 문대통령은 위원이었다’>, <고노 징용문제로 신뢰 깨져 한국, 내일까지 중재 응하라”>. 제목만 보면 대체 이게 한국 언론에서 나온 소식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첫 번째 제목을 보면 마치 이해찬 민주당 대표와 문대통령이 강제징용 보상을 청구권 협정에 포함시켰거나, 혹은 찬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제목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한 말을 따옴표로 옮겨 사람들은 제목만 보고 징용문제로 신뢰가 깨졌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15일 정미경 자한당 최고위원은 세월호 한 척 가지고 이긴 문재인 대통령이 어찌 보면 이순신 장군보다 더 낫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리고 네티즌의 댓글을 인용했다고 우기면서 그게 왜 막말이냐고 반론보도를 신청한다고 하네요. 요즘 말로 ~!”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많은 소식들을 듣고 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어떤 소식이 공정한 채널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작은책>은 그런 공정한 채널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작은책>을 보지 않는 분들에게 한번 권해 보시면 어떨까요.

 

2019717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백철

10 발행인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비정한 먹이사슬 이순이

15 부부 30년 맞짱일기

모든 옷 맘대로 처분권 최해옥과 이동수

21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여름 손님 윤혜신

26 청년으로 살아가기

취업 마지노선 유지향

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장영식

32 살아온 이야기(14)

자식을 두고 갈 때 알려 줄 것들 송추향

38 교장 일기

모험이 가득한 곳, 학교 최관의

42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까칠한 환자가 의사를 바꾼다 권해진

46 교실 이야기

숙떡, 숲떡, 쑥떡! 김미숲

50 산골부부의 시골살이

잡초는 없다? 조혜원

54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58 일터 탐방_ 한국지엠 비정규직

아빠, 우리 집에 언제 놀러와? 정인열

64 일터에서 온 소식

변기 26개 닦고 엉엉 울었다 허지희

69 작은책 법률 상담소

임차인의 권리금 회수 박시진

 

작은책이 만난 사람_ 장혜옥

73 전교조와 함께한 30, 교육운동가 장혜옥 안건모

96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98 존버 씨의 시간들

기술만큼 아름답지 않은 플랫폼 노동 김영선

103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근로기준법 이후에 무엇이 오나 고태경

108 어린이 해방과 평화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자 이주영

113 여성으로 살아가기 나는 알코올 중독자의 딸이다 홍승은

118 생태 이야기 기후변화 시대의 물 이용법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3 오앵의 일상의 온도 오앵

124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여러분 눈에는 뭐가 보이나요? 박찬희

128 책 읽고 딴 생각

유대인을 차별하고 탄압하지 않았다면 변정수

131 독립영화 이야기 위안부를 둘러싼 말의 전쟁터 류미례

137 우리말과 국어사전 짚어 보기 활과 관련된 낱말들 박일환

142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년 7월호

작은책이 만난 사람 - 연영석

 


문화노동자 연영석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문화노동자 연영석. 작은책(안건모)


 

50시간 60시간 70시간 80시간 뺑이 쳤지

때로는 형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하자기에

아침부터 새벽까지 몸 버리고 속 버리고 일했는데

이제 와서 필요없다 이제 와서 나가라니 웬 말이냐

 

이 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할 줄 아나

박 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당할 줄 아나

-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중에서

 

연영석. 이 사회의 아픈 현실을 드러내고 가진 자들에게 빅엿을 날리는 가사로 청중을 속 시원하게 만드는 인디가수다. 연영석의 아내 지민주도 집회 현장에서 청중을 휘어잡는 유명한 노동가수다. 그이들의 삶이 궁금해 <작은책>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본래 두 사람의 삶을 다 다루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지면이 짧아 이번엔 주로 연영석의 삶을 다뤘다. 지민주가 가끔 동조하거나 초를 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알콩달콩 살아가는 여느 부부나 마찬가지였다.

연영석은 <작은책> 사무실에 있는 기타를 보고는 기타 치면서 할까요?” 하며 집어 들었다. 지민주는 인터뷰하러 온 사람이 뭔 기타야?” 했지만 연영석은 기타가 눈에 보이면 치고 싶은 법이라며 코드를 잡고 줄을 튕겼다.

<작은책>엔 나와 유이분 편집장과 정인열 기자가 있었다. 인터뷰는 나 혼자 했지만 각자 책상 앞에서 두 사람이 떠는 수다를 들었다. 인터뷰 내내 즐겁고 웃겼다. 두 사람은 만담을 하듯이 싸우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풀었다.

기타는 언제부터 배웠어요?”

따로 배운 적은 없어요. 기타를 가지고 놀다가 곡을 쓰다가 공연도 다니면서 조금씩 늘게된 거죠. 작곡을 하다가 다루는 악기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후배에게 배웠죠.”

연영석은 노래를 작곡하는 법을 자세히 설명한다.

우리나라 말도 고저가 있거든요.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꽁초를 찾아 물고~’ 이렇게 가사를 써 놓고 약간 송창식 스타일로 부르면서 기타 치는 사람한테 물어봤죠. ‘아침에할 때 가 무슨 음인지. 그때는 기타를 못 칠 때였으니까. 그러면 기타 치는 사람이 내 손가락을 잡아서 ‘Am(에이 마이너)’를 알려 주고 여기에 형이 생각하는 음이 있어?’ 하면 ~ 아침에쳐 보면서 , 있어.’ 하고, 그 다음 가 음이 좀 다른데, ‘. 그럼 C() 코드로 가요.’ 아침에에 눈을 뜨면 담배꽁초를 찾아~ 이런 식으로 흥얼흥얼 노래를 붙이면 돼요.”

문화노동자 연영석은 그렇게 작곡을 하면서 기타를 배웠단다. 사실 쉬운 거 같아도 아무나 그렇게 작곡하고 기타를 쉽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한마디로 ’, 예술가 끼가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듯하다. 연영석은 조각 미술을 하다가 음반을 냈고, 노래 으로 2006년에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을 수상했고, 2007년에는 태준식 감독이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 <필승 ver2.0 연영석>에서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에는 제3회 구본주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문당리 789

연영석 노래 중에 문당리 789’라는 노래가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에 있는 문당리 789번지. 연영석이 태어난 고향 집 주소다. 연영석이 두 살 때 아버지가 식구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님이 야반도주하셨대요. 아버지가 장남인데, 결혼했는데도 할아버지가 모든 경제권을 갖고 계시니까. 아버지는 농촌에서 밭일 해 봐야 우리 학교도 못 보내겠다고, 말씀은 그렇게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농촌에 계실 스타일이 아니야. 그때 사진 보면 가다마이라고 양복 쫙 빼 입고 구두 신고. 결국 송아지 팔아서 그 돈으로 몰래 야반도주하셨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쌀도 안 보내 주셨어요. 장남이 도망갔다고. 하하하!”

그렇게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가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 연영석은 알 수가 없다. 연영석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신림동에서 세탁소를 했다. 신림동이 고향이나 다름없는데, 연영석은 그곳에서 놀던 기억보다 방학 때만 되면 태어난 괴산 문당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서 놀던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충북 괴산군 문당리 고향에서 육촌 동생들과 놀던 연영석 씨.(맨 오른쪽) 사진 제공_ 연영석


추울 때 썰매 타다가 나이롱 양말 태워 먹고, 하하하. 불 쬐다 보면 타잖아요. 저녁 때면 할머니가 영석아 밥 먹어라!’ 부르는데 노느라 신나서 안 가고 나중에 할머니가 화를 내야. 지금은 합쳐야 열 집 안 되는데 당시에는 70집이 있었어요. 집으로 들어갈 때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올라가던 풍경이.”

서울에서 살았던 어릴 때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쌀 심부름을 하던 기억, 어머니가 혼자서 국수를 먹던 장면이 떠오른다.

쌀을 사서 편지 봉투에 담아 온 기억이 나요. 서너 컵 될까? 그걸로 밥을 하면 어머니, 아버지, 우리 형제 셋에 세탁 기술자까지. 아버지가 세탁 기술이 없어서 한 명 붙이셨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드실 게 없었나 봐요. 방에 연탄아궁이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노란 냄비에 얇은 국수, 그걸 꼭 삶아 드셔요. 엄마 혼자 그냥 간장에다가. 저는 그걸 몇 젓가락 뺏어 먹었어요. 저도 면을 좋아하거든요. 근데 커서 생각하니까, 적은 쌀로 밥을 해서 다 주고 나면 먹을 게 없었던 거예요. 어머니가 그런 게 맺힌 거지. 할아버지가 쌀 안 주신 게.”

어머니가 시집을 잘못 가신 거야.” 지민주가 끼어든다.

연영석은 초등학교 때부터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중학교 1학년 때 수술을 받았다.

어머니 아버지도 정확히 몰라요. 병원 의사 말로는 열이 많이 나서 그렇거나 다쳐서라는데 부모님이 모르고 지나가셨을지도 모르죠. 너무 늦어서 가망이 없는데 어머니가 하자고 하셔서 수술을 했어요. 휴학계 내라고 했는데 제가 안 낸다고 했죠. 4교시 하고 조퇴하고 치료받았어요. 꽤 길게.”

결국 그는 한쪽 눈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연영석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합창반 활동을 하면서 합창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다른 과목은 을 받아도 미술과 음악은 를 받았다. 노래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시골집에서 할아버지가 피우고 남은 성냥개비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어려서 그림 그린 거 보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초, , 고등학교 때 내가 그린 노동자들 그림이 있더라고. 내가 왜 노동자들을 그렸지? 알고 보니 작은아버지 영향이었어요. 작은아버지가 일하는 걸 몇 번 봤어요. 포항제철 가족을 초빙해서 보여 줬는데 제가 그게 인상이 깊었나 봐요.”

연영석 씨는 10대 때, 모던 토킹(Modern Talking)과 스모키(Smokie) 등 유로댄스(Eurodance)류의 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가리봉동과 난곡동 등지의 나이트클럽을 다니면서 춤을 추었다. 운동하고 사람 됐죠 하고 말할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연영석 씨의 그 시절 꿈은 코미디언이었다.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뒤늦게 미술학원을 다니며 재수하던 시절 KBS 코미디언 공채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경험도 있다. 대본을 외워 심사위원들 앞에서 연기를 하는데, 심사위원들 앞에 서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그냥 나와 버렸단다. 연기자의 꿈을 버리지 못한 연 씨는 당시 신촌 크리스탈백화점 위에 있는 모 극단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1990, 친구였던 조각가 고 구본주 씨의 작업을 도와주다가 찍은 사진. 사진 제공_연영석


연영석은 세 번 연거푸 대학 시험에 떨어지고 ‘4끝에 홍대 미대 조소과에 들어간다. 미대 재학 중 조각가 고 구본주 씨를 만나 친구가 됐다.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함께 학생운동을 했다. 재학 중에 친구들과 학생미술인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졸업할 무렵엔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문화예술생산연합(생연)이라는 단체를 만든다.

이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면 작가를 할 텐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작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작가들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게 진보 미술동인 현실감각이었죠. 그리고 졸업한 사람들 중심으로 문학, 음악, 미술, 영상 하는 친구들이 모여 생연을 만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민예총에 견줄(?) 만한 젊은 문화예술인 단체를 만들 꿈을 꿨다.

 

가수가 된 사연

연영석은 생연 대표로 활동하면서 현장을 중심으로 전시 활동과 무대미술 제작 등 대중적인 미술운동을 펼쳐 나간다. 알바해서 번 돈을 생연에 다 투자했고, 가끔 하기 싫은 인테리어 일도 해서 보탰다. 그러나 결국 2년 만에 단체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해서 떠나더라고요. 그때는 잘 이해 못했어요. 막바지에 단체를 해산하고, 거기에 혼자 있다 보니까.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많이. 그전에는 고민하지 않았던 개인적인 고민들이. 뭘 해서 먹고살아야지? 다 내 탓처럼 느껴지고. 처음에는 그 친구들, 같이했던 동료들에 대한 원망, 실망이 크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자책이 되더라고.”

연영석은 절망감이 몰려와 한참 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그때 제게 가장 큰 위로가 된 게 기타였어요. ‘구르는 돌이라는 노래를 그때 만들었어요. 민중가요나 노동가요라고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니라 그냥 나한테 하는 말, 저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였어요. 그런 식으로 몇 곡 만들었죠.”

 

구르는 돌

세상 모든 굴레를 딛고 구르자

더러운 것들 밟고 구르자

자유로운 세상 워 전혀 다른 세상에

우리 모두 함께 가보자 - ‘구르는 돌

 

그 다음 작사 작곡한 노래가 라면’, ‘칼국수와 박카스였다. ‘라면은 후배 연습실에 얹혀 살 때 냉장고는 비어 있고 먹을 건 라면뿐이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당시 삼척에서 사살당한 무장 공비의 가방에서 나온 라면 봉지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 만든 노래다. 냉장고 안에 먹을 게 없는 우리의 현실을 빗댄 것이기도 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꽁초를 찾아 물고

테레비젼을 틀어 보면 공비를 찾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냄비 위에 물을 넣고

라면을 쪼개 쪼개 넣고 젖가락을 빨아 댄다

살기 위해 먹는 건가 먹기 위해 사는 건가 라면

 

연영석은 몇 곡을 만들고 친구들에게 음반을 내겠다며 큰소리쳤다. 친구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김영삼 정권 때였죠. 여섯 곡 정도 만들었어요. 그걸로 그냥 음반을 낸 거예요. 음반을 낼 때 생각은, 미술운동 할 때는 전시회 한 번 하려면 2.5톤 트럭에 싣고, 스티로폼 노동자 만들고, 크게 만들어야 돼요. 그러니까 화물차로 몇 번 실어 날라야 전시회 할 수 있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조직이 안 되어 있으면 불가능한 거고. 그런데 기타는 들고 다닐 수 있고, 운동은 하고 싶고. 어디 취직할까 하다가, 먹고살 만큼 하면 운동이 다시 가능할까? 내가 변하지 않을까? 기타 들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현장 가면 밥은 주지 않을까?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음반을 냈어요.”

1996년 문화예술생산자연합 회원이던 밴드 천지인의 콘서트에 오기로 했던 윤도현이 수해를 당해 오지 못하게 되자, ‘땜빵으로 무대에 올라 라면구르는 돌을 불렀다. 그것이 그의 데뷔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연영석의 노래는 대규모 집회나 결의대회 등에서는 낯선 노래로 인식됐다. 흥얼흥얼거리는 창법에 멜로디도 노동가요 같지도 않고 내용도 투쟁이 아니라 그냥 삶을 표현한 내용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음반을 냈는데 반응이 없었죠. 제가 그때 홍보를 하고 다닌 것도 아니고.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거니까.”

지민주가 에휴!” 하고 안타까운 한숨을 쉰다.

그러다가 처음 전해투에서 섭외 온 거야. 그때 서울역에서 주로 집회를 했어요.”

전해투전국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의 준말이다. 아이엠에프 무렵 수많은 사람들이 해고를 당해 투쟁하고 있었다. 노동가수 박준을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그때 준이 형 머리 짧게 깎고 수염 기르고. 거기서 처음 만났죠. 그 무렵 서울역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했어요. 주된 관객분들이 노숙인들이었지요. 실업극복국민재단인가 거기랑 같이. 매주 목요일 거리 공연, 꾸준히 했어요. 그러다 장투사업장(장기투쟁사업장)에서 (섭외하는) 전화가 오고 구로동, 하이텍, 이런 데 다니고. 보통 대공장, 큰 사업장은 섭외가 잘 안 왔어요.”

연영석 씨는 대규모 집회나 결의대회를 하는 집회보다는 비정규직, 장애인, 이주노동자 같은 소수자들 집회에 더 많이 결합했다.

 

연영석과 지민주의 만남

원래 알던 후배였는데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후배였죠.”

어떻게 만났나 하는 질문에 연영석이 대답한다. 지민주도 똑같은 대답이 나온다.

첫 만남이 안 좋았죠. 하하하.”

사연은 이렇다. 2000년 무렵 전국의 노동문화 일꾼들이 자본 문화에 대항하는 노동문화를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는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를 만들려고 했다. 연영석은 선배들과 함께 전국의 문화단체를 만나러 돌아다니면서 간담회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관심 있는 단체들이 모두 서울에 모여 회의를 했다.

그때 지민주가 선배들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런데 내 생각에는 여기 선배들이 그걸 모를 사람들이 아니거든. 그런데 이 친구가 그런 말을 하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민주가 자세히 설명한다.

저는 대구에서 좋은친구들이라는 노래패 활동을 했어요. 당시 스물일곱 살? 우리 단체가 되게 가난했어요. 라면도 못 먹고 공연 가고, 공연비도 못 받고 활동했어요. 제가 비정규직으로 학교 방과후 교사로 취직해서 월급을 받아 활동비로 썼어요. 내 친구가 대표였는데, 서울에서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를 만드는 데 각 조직당 1백만 원을 내기로 결의를 하고 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애들(회원들) 밥도 못 먹는데 백만 원을? 바로 완납해야 하는 건데 나는 못 낸다, 그래서 간담회 때 저희 7명이 서울을 올라왔어요. 단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돈, 예산안을 봤어요. 그게 몇 억대더라고. 그리고 필요한 사무기기, 뭐 컴퓨터도 사야 하고. 아니 그게 필요하면 쓰던 거 쓰면 되지, 이걸 발기인들의 돈으로 하겠다니. 그래서 빡쳐서 선배들한테 쐈어요. 쐈는데, 저 대각선 끝에 연영석 씨가 앉아 있었어요. 선배들이 다 당황해서 달래는 분위기였는데 연영석 씨가 삐딱하게 앉아서 막 ! 그게 아니고소리치는 거야. ‘아 쟤는 뭐야?’ 첫인상이 안 좋았지.”

지금도 안 좋아요. 하하하.” 연영석이 복수한다.

그렇게 감정이 좋지 않게 시작했던 두 사람은 서서히 친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지민주가 기억을 더듬는다.

영석이 형이랑은 연애도 그렇게 오래 안 했지? 명동 거리 공연.”

나한테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애. 자꾸 찾아온 거 보면.” 연영석이 약을 올린다.

내가 언제 자꾸 찾아가?” 지민주가 버럭 한다.

자꾸 명동에 오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노란 옷 좋아한다니까 자꾸 노란 거 입고 오고.”

모두 웃음이 터졌다.

명동 거리 공연은 민중가수 박준이 주도해 2002년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에 하는 공연이다. 본래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위한 거리 모금 공연이었는데, 2001년에 부평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를 계기로 2002년부터 산재, 해고, 이주노동자, 장애인 자녀들의 장학 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으로 바뀌게 됐다. 박준, 권영주, 김대원, 김종환, 다름아름, 연영석, 이씬, 처절한기타맨 등 많은 문화 활동가들이 이 공연에 참여했다. 연영석은 박준 선배의 주선으로 2001년부터 공연을 했다.

그 무렵 지민주는 대구에서 노래패 활동을 접고 서울로 올라온다.

“‘좋은친구들을 정리하고 2003년에 서울로 오게 됐잖아요. 서울에 올라오니 학연, 지연 아무것도 없잖아요. 갈 데도 없고 어떡하지? 이러다가 옛날부터 박준 선배를, 친하진 않지만 아니까, 명동에 선배들도 있으니까 노래도 하고 교류를 하자, 하고 갔더니 연영석 씨, 준이 형, 기상이 형, 미진이도 가끔 나오고, 그때는 가수들이 되게 많이 나왔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노래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처음에는 그랬어요. 명동에 나가다 보니 친해진 거죠.”

언제부터 나한테 반했냐고 물어보는 거야.” 연영석이 집요하게 묻는다.

지민주가 그 말엔 대꾸하지 않고 영석이 형이 인천에 자주 오더라고요.” 하고 대답한다. 지민주는 인천에 방을 얻어 매니저인 박효선과 같이 살고 있었다.

연영석이 다시 농담을 던진다. 제가 인천에 가면 이상하게 버스가 끊어지더라고.”

지민주가 반박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에 와서 잤어. 그때 매니저 효선이랑 같이 있을 때니까. 버스 떨어지면 효선이랑 나랑 자고. 언젠가 형이 사는 데를 가 봤는데 어우,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돼. 주차장을 개조해서 밑에서는 정화조 냄새 올라오고. 그런 데서 사는 거야.”

연영석이 보충 설명을 한다. 홍대입구 쪽 카센터 옆에, 무슨 조형연구소라는 데.”

진짜 불쌍한 거야. 측은지심. 거기 화장실도 없거든. 화장실 가려면 홍대입구역까지 뛰어가야 하는 거예요. 효선이랑 나랑 너무 안됐다 하면서, 영석이 형 인천 오게 되면 옆방에서 재워도 되겠다, 따뜻한 밥 한 끼 먹이고. 그렇게 된 거지.”

연영석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첫 인상이 좋지 않은 때가 있었는데, 보면 에너지가 많아요, 당차고. 그런 면이 좋아 보였어요. 명동 와서 친해졌고. 그전에는 그냥 후배, 활동하는 후배. 명동 와서 노래하고 친해지고 하다 보니까. 무대에 올라가면 센 척하는데 귀엽더라고요.”

내가 좀 귀여운 데가 있어요.” 지민주 말에 작은책 일꾼들까지 모두들 웃음이 터진다.

 

4집 앨범 <서럽다, 꿈같다, 우습다>

연영석은 1999년에 1<돼지 다이어트>, 2001년에 2<공장>, 2005년에 <>, 이렇게 모두 세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돼지 다이어트>에 들어 있는 곡은 모두 여섯 곡밖에 안 된다. 그래서 연영석은 그 앨범을 미니 앨범이라고 한다. 그다음 2집 앨범 <공장>은 라인이 있는 공장과 부가 세습되는 사회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노래다.

1<돼지 다이어트>(1999) 앨범 표지.

2<공장>(2001) 앨범 표지.

3<>(2005) 앨범 표지.


우리 사회가 거대한 공장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태어나는 게 그냥 재수잖아요. 어쩌다 보니 재벌 집에서 태어난 거고, 어쩌다 보니 가난한 집 아이로 태어난 거고. 그래도 우리 사회가 가능성이 있었잖아요. 공부하면 신분 상승 하니까 공부, 공부 한 거야.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닌 거야. 신자유주의가 그만큼 공고화되면서 지금은 개천에서 용 안 나는 사회. 거기에 딱 맞춰서 너희는 노동자군, 너는 재벌군 등. 그런 생각에 <공장>이란 제목을 붙인 거예요.”

이 음반에 들어 있는 노래 중 간절히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가 주목을 끌었다. ‘간절히내 할 수 있을 때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만 받는 세상난 아직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하는 정말 간절한 노래인데 리듬은 경쾌하다. ‘이 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실컷 부려먹고 돈 떼먹고 도망가는 자본가들을 비꼬는 노래다. 이 노래는 콜트콜텍 해고자들이 만든 밴드에서 불러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리는 데 한 몫 했다. 여기서 이 씨는 물론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을 가리키는 가사였는데 나중에 이 씨라는 가사를 박 씨라고 바꿔 부르기도 했다. ‘박 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 또는 콜트콜텍 사장인 박영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노래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마음대로 생각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이 사회에 균열을 내려고 해도 쉽지가 않은 거예요. 어느 순간 투쟁사업장들이 15, 20년 싸워도 승리했다는 소식 듣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숨 쉬고 사는 게 힘든 거예요. 정말 질식해서 죽겠구나. 그래서 3집은 <>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2005년에.”

노래 은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을 받은 노래다. 하지만 상금은 없었다. 2017년 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는 신의 놀이로 최우수 포크 노래상을 수상한 이랑이 지난달 총수입이 42만 원, 2월이 96만 원이다. 상을 받지만 상금이 없더라. 혹시 이 메탈릭 디자인의 소품을 구입하실 분 있느냐며 즉석 경매에 부친 상패가 50만 원에 낙찰되는 씁쓸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한국에서 문화로 먹고살기란 얼마나 척박한 실정인지 보여 주는 사례다.

그래도 문화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버릴 수 없다. 뭔가 생산해 내고 싶어 한다. 연영석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연영석은 늘 4집 낼 거다’, ‘내년쯤에 낼 거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번에는 계획을 단단히 세우고 작업 중이다. 제목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노래가 담겨 있을까. 결혼하고 난 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을 텐데.

지금은 좀 다르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14년 세월도 지나고, 예전만큼 운동 열정도 떨어지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욕을 먹더라도. 지금은 내가 살아가면서 얼마만큼 내 삶을 가능한 한 스스로 존중하고 타인과의 관계도 존중하고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예전보다 물음표가 더 생긴 거죠. 음반에 제목을 굳이 넣을까? 넣는다면 서럽다, 꿈같다, 우습다하려고 했어요. 가끔 내 삶이 서럽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꿈 같아요. 그러면서 웃겨. 사는 게 그런 거예요. 그런 느낌을 담은 노래예요. 그걸 내 식대로. 가사가 비틀비틀거리다가 펄썩 주저앉았지. 아기가 울어서 깼더니 꿈 같고. 배고파서 밥 먹고 물 한잔 마시니 어, 웃기네.’ 그런 거예요."

지난 64일 작은책을 방문한 지민주 씨와 연영석 씨. 인터뷰 도중 기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힘내라 마음아>

지민주도 연영석과 비슷한 시기에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1996년에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라는 노래를 만들기 시작해 2003년에 1, 2006년에 2집을 냈고, 2010년에 연영석과 결혼한 뒤 2016년에 3<힘내라 마음아>를 냈다. 결혼하기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한국에서 여자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활동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한계를 굉장히 많이 느꼈죠. 구성원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할 수는 있지만, 저도 마흔에 결혼했는데 이미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는데 그걸 또 다른 관계로 부숴야 한다는 게. 사실 좋았던 건 아이 낳고, 시각이 넓어지는 거야. 그래서 노래에 변화들이 많아요. ‘지민주 동지 노래가 예전에는 되게 쎘는데 지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위로가 된다.’ 그런 말 들으면 울컥해요. 예전에는 힘이 됐다는 말 들었지만 위로가 됐다는 말은 못 들어 봤어요. 예전에는 무기가 되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일상에서 위로를 받는. 그래서 3집에 말랑말랑한 곡들이 많아요. 좋은 쪽으로 변한 건 그거죠.”

지민주와 연영석은 서로 힘이 돼 주는 동지이자 부부다. 하지만 가끔 생활비 때문에 다툰다. 서로 씀씀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연영석이 말한다.

저는 돈이 남더라고요, 제가 관리하면. 그런데 민주는 항상 돈이 부족하대요. 다른 엄마들이 전부 다 그 돈으로 어떻게 생활하냬요. 사실 저는 예전에 혼자 살 때 한 달 15만 원으로. 저는 외식도 안 해요. 우리 부모님이 너무 검소하게 사시는 분들이라 쓰실 줄을 몰라요. 그것도 훈련인 거 같아.”

지민주는 반박한다. 남자들이 모르는, 돈이 들어갈 데가 많다.

한 달에 훨씬 많은 돈을 써요. 적금도 들고 아이한테 들어가는 거 등. 영석이 형이 생활비를 적게 내서 불만이 아니라 잘 모르는 거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데. 그런데 그걸 자꾸 얘기하면 자존심도 상해하고. 얘기해서 풀리면 얘기하면 되는데 더 상처받고 안 좋아지는 거지.”

연영석의 칭찬 모드가 발동한다.

민주가 배려 많이 해 주는 편이고요. 생활비 관리하니까 공과금 등 내 예상보다 많이 들어간다는 걸 알아요. 노력은 해요, 저도. 하지만 제가 살아온 나름의 철학, 비록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살아가는 사회가 이러해서 어쩔 수 없다지만, 내 철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저는 최대한 비우고 없애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 점에 동의하지만 정도가 다른 거지. 예전에 영석이 형이 나보고 인터넷 쇼핑중독자라고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아주 평범한 정도지만.”

지민주가 폭로하고 있다. 이래서 대질 심문이 중요한가 보다.

저는 옷을 사지 않아요.” 연영석이 말한다.

지민주는 연영석이 돈을 안 쓴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애를 낳고 기저귀, 우유, 이런 거 있어야 하니까. 공연도 다녀야 하고. 영석이 형이 다정하게 마트 가는 것도 싫어하고. 그런 부분에서 난 정말 평범한 부부들이 부러운 거야. 평범한 신랑들처럼 식당 섭외해서 아내랑 아이와 저녁 한 번 먹은 적도 없고. 형 들어올 때 아이 과자 같은 것도 한 번도 안 사 와서 돌멩이라도 갖고 들어오라고 했어. 하하.”

연영석이 아이와 같이 가다 생겼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합정역 살 때 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키다리빵집이라고 있거든요. 아이가 처음으로 나한테 말을 한 거야. ‘아빠 빵 사 줘.’ 감정이 묘한 거야. 그런데 제가 뭐라 그랬는지 알아요? ‘아빠 돈 없어.’ 하하하!” 작은책 일꾼들이 폭소를 터뜨린다.

지민주가 그거 보라는 듯 내가 뭐 말하는지 알겠지?” 한다. 연영석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당시 나의 마인드였다는 거야. 저는 산을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해요. 고사리 같은 손 잡고 망원시장 지나서 걸어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망원시장부터 애가 힘들어해요. 껌 하나 사서 반 잘라! 아빠 반, 너 반.’ 나는 요즘 애들이 너무 풍족한 게 걱정인 거야. 그런데 이젠 나도 많이 놓았어.”

영석이 형이 너무 안 하니까 내가 채워 주기 시작한 거예요. 딴 애들은 아빠 엄마랑 놀이공원 가끔 가잖아. 아이가 이번에 처음 롯데월드 갔어요. 워터파크도 작년에 처음 갔고. 그래서 난 약간 불만이 평범한 행복, 저녁이 있는 삶, 저녁에 식구들하고 밥 먹으러 갈까 술 먹으러 갈까, 말만 해 놓고. 나는 그렇게 못하고 아이와 내가 어딜 검색해서 가고. 요즘 영석이 형이 집에서 일을 하니까, 집에 있으면 아이가 아빠한테 가서 놀아 달라고 하니까 데리고 나오는 게 편하잖아. 근데 집에 들어와서 애 씻기려고 하면 나도 힘든 거지.”

나는 (아이가) 혼자 할 줄 알아라, 하고 안 하는 거지.”

서로 평행선을 달린다. 명절에 누구 집을 먼저 가는가 하는 문제도 서로 부딪친다. 이 문제는 어느 집에서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연영석이 말한다.

방법은 많아요. 이게 가부장적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부모님한테 잘할 수 있으면 잘하고, 아니면 냉정하게 당신이 버는 만큼 서로 자기 집에 알아서 해라, 했잖아. 그런데 남자로서 느끼는 압박감이 있어요. 장모님은 나한테 인사가 연 서방 이제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어?’ 그게 대화 내용의 핵심이야. 그리고 처갓집 가서 밥 먹으면 내가 사야잖아. 대구 사람들 내가 쏠게요, 그런 문화를 좋아한다며?”

그건 누구나 다 그래!”

아냐, 우리 집은 안 그래. 문화가 다른 거야.” 연영석이 말을 잇는다. “내가 망원시장 장 보러 가면서, 장모님에게 닭도리탕이라도 해 드리고 싶어서, 난 내 손으로 해 주는 게 최선이야. 어머니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제가 장 보러 가는데, 그러면 장모님이 됐네. 그런 걸 뭘.’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엄마는 계속 밥을 해 먹잖아요. 집에서 뭘 해 먹는 게 싫은 거야.”

문화가 다른 거야.”

도무지 대화 접점을 찾지 못한다.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다. 결론을 맺으려고 내가 다시 이번에 새로 나올 음반에 대해 물었다. 연영석이 대답한다.

새로 나올 4집 앨범 표지 사진. 사진_ 전수현

제가 14년 만에 작업하게 된 이유가 단지 결혼, 애 낳고서만은 아닌 거 같아요. 음악이라는 것도 내가 뭔가 작업을 하려고 할 때 그 여건이 갖춰져 있으면 구현해 내는데, 걸리는 게 너무 많은 거야. 거기서 지치는 거죠. 그러다 한 해, 두 해, 14년 걸린 건데. 더는 안 되겠다, 갈수록 자존감이 떨어져서. 더는 이렇게 있다가는.”

음반을 낸다는 것과 자존감은 무슨 연관이 있나요?”

음반을 낸다는 것은 내 음악을 세상에 발표하는 거잖아요. 어떤 노래는 10, 15년 전에 만든 노래도 있어요. 그 노래는 나만 아는 거예요. 내가 정식으로 발표를 한 게 아니잖아요. 음반은 하나의 과정인 거죠. 그런데 자꾸 핑계 대는 것 같고. ‘내년쯤에 낼 거예요.’ 계속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예요.”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로에 있는 톤스튜디오에서 음반 작업을 하고 있는 연영석 씨. 작은책(안건모)


지민주는 연영석과 다르다.

저는 현장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언제든지 제 노래가 아닌 노래도 현장에서 필요하다 싶으면 부르는 그런 스타일. 거기서 만족감을 느끼고, 또 팀을 만들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걸 하고 있거든요. 콘서트도 하고 나름 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할 수 있어요. 잘하지는 못하지만요. 영석이 형은 저랑 다른 거 같아요. 결론은 영석이 형이 뮤지션은 맞아요. 음악을 해야 하고, 음악 할 때 에너지가 생기는 사람이에요. 제가 조금 미안한 게, 형이 그동안 음반 못 냈던 게 나랑 연애하고 애 낳고 딱 그 시기더라고. 그때 음반이 나왔어야 하는데. 같은 동료, 음악하는 사람으로 봤을 때는 가장 치고 올라가는 시기에 작품들이 못 나왔다는 게 조금 아쉬운 게 있어요.”

둘 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지만 지민주는 노동가수라고 불리기를 원하고 연영석은 문화노동자로 불리기를 원한다. 노동가수와 문화노동자는 비슷하지만 전혀 달랐다. 노동가수 지민주는 계속 현장에서 노래를 할 거라는 데 변함이 없다. 문화노동자 연영석도 늘 현장에서 노래를 하겠지만 마음가짐은 조금 달랐다.

저는 운동하면서 작업에 대한 욕망을 조금씩 억누르고 살았어요. 작가는 명확한 기준을 잡고 밀고 나가야 된다고들 하는데. 여전히 저에게는 어려운 문제예요. 저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고, 뭔가 만들고, 표현하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사람!인 거예요. 공연 다닐 때, 예를 들면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르려고 가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그래서 준비해서 가요. 그런데 현장 가면 그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에요. 모두들 검은 얼굴로 뜨거운 햇볕 아래 앉아 있는데 차마 준비한 노래를 부를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물론 강요된 건 아니에요. 저의 판단과 선택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저는 운동에 복무한다는 합리화된 자기 검열을 한다니까요. 결론은 제 욕망도 살리고 사회적 가치를 살리는 길을 찾고 싶어요. 결국 스스로 느끼는 부족함을 채워 가야 하겠죠. 저는 운동도 자기 성장과 자기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거 희생이지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늘 그런 생각을 했지만 솔직히 용기도 없었고 실천도 잘 못한 것 같아요.”

지민주가 격하게 맞장구친다. 그래, 살날이 얼마 안 남았잖아.”

운동을 행복하려고 하는 거지 학대하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희생을 할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연영석이 힘주어 말한다.

유이분 편집장이 물었다. 그래도 민주 씨는 행복하잖아요.”

나요? 나는 행복해요. 사람들 만나고 공연하는 거 좋아하고 행복해요.”

연영석이 강조한다. 그게 중요해요. 저는 공연 섭외가 오면 두려워요. 제일 무서운 말이 뭐냐면 분위기 띄워 주세요하는 거예요.”

연영석 노래는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삶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노래다. 그래서 이 세상은 다양한 예술가가 필요한 것이다. 분위기를 띄워 주는 건 노동가수 지민주 몫이고, 노동자의 삶과, 사회 현실을 시처럼 들려주는 음악을 음미하게 해 주는 건 문화노동자 연영석 몫이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다 노래로 약자들이 포기하지 않게 힘을 주거나, 메마른 감성을 적셔 주거나 하는 예술인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예술가들이 생활 걱정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긴 인터뷰가 끝났다. 지민주는 오늘도 공연하러 마로니에공원을 가고, 연영석은 음반 작업을 하러 작업실로 간다. 누가 뭐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현장에 있을 것이다. (연영석은 다음 날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에 와서 콜텍 노동자들 강연에 찬조 출연해 노래를 불렀다. ‘문당리 789’, ‘윤식이 나간다’, ‘인터뷰세 곡을 불렀다. 모두 우리와 같은 가난한 이웃들의 이야기였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년 7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여성가족부 아이돌보미

 

여성가족부의 기막힌 꼼수

정인열/ <작은책> 기자

 

 

아이돌보미 고정래 씨(60)는 아침 일찍 돌봄을 요청한 이용자의 가정으로 출근했다. 네 살 아이가 있는 맞벌이 가정이었다.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어린이집 등원 준비 및 등원을 시켜 주는 일이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는 시리얼을 먹고 있다가 고 씨를 보고 멀리 떨어졌다. 아이 아빠는 출근하러 나갔다. 고 씨는 아이가 먹는 것을 도와주려 했지만 아이는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잠시 후 아이 아빠한테 거실에 있는 전자기기를 꺼 달라는 문자가 왔다. CCTV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고 씨는 기분이 언짢았다. 거의 대부분 이용자 집에 CCTV가 설치되어 있지만, 이용자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10년 경력자인 고 씨는 아직도 위축된다. 일터에 있는 아이 엄마한테는 어린이집 위치를 알려주는 문자가 왔다. 문자를 확인하려고 고 씨는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아이 엄마는 그날 아이돌보미를 파견하는 건강가정지원센터(센터)에 아이돌보미 교체 민원을 넣었다. 고 씨가 아이 밥은 안 먹이고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는 이유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잘리는 인생이에요. 내가 감시당하면서까지 이 일을 해야 되나?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고 씨를 비롯한 아이돌보미들은 요즘 일할 맛이 안 난다고 한다. 이용자들의 불신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 강서구 한 카페에서 고 씨와 김경인(58), 배민주(54) 씨를 만나 속사정을 들어 보았다. 이들은 모두 서울 강서·양천구 건강가정지원센터 소속 돌보미들로, 노동조합(민주노총 공공연대노동조합 아이돌봄분과) 조합원이기도 하다.

▲ 서울 강서.양천 지역 아이돌보미 배민주, 김경인, 고정래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아이돌봄 서비스는 여성가족부가 가정의 아이돌봄을 지원하여 아이의 복지 증진과 보호자의 일·가정 양립을 통한 가족 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과 양육친화적인 사회 환경을 조성(아이돌봄 서비스 홈페이지 인용)할 목적으로 2007년부터 시작됐다. 3개월~12세 아동을 둔 가정에서 시간당 9650(2019년 기준)을 내면 이용이 가능한데, 소득 기준에 따라 최대 80퍼센트까지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여성가족부가 관련 법령 및 행정 지침 등을 각 지방자치단체에 내리면 단체장들은 돌봄서비스를 운영할 기관을 선정하고 지역 기관들은 돌보미를 채용해 이용자 가정에 보낸다. 아이돌보미를 연계해 주는 기관은 건강가정지원센터. 각 시군구마다 있는 센터는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다양한 가족지원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설치한 기관으로, 대부분 민간 위탁 운영되고 있다. 전국 아이돌보미 종사자는 2018년 기준 23천여 명이다.

원래 아이들을 좋아했어요. 아이들이 예뻐서, 손주를 돌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요.”

배민주 씨와 고정래 씨가 말했다. 고정래 씨는 2009년부터, 배민주 씨와 김경인 씨는 2013년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은 이용자가 많아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급격히 일감이 줄었다. 정부가 2022년까지 아이돌보미를 3만 명으로 증원하기로 계획하며 2018년부터 인력을 대폭 채용해 돌보미들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센터는 올 11일부터 주 52시간 노동시간 시행을 핑계로 종일제 서비스 이용 가정에 2시간~3시간 30분씩 돌보미를 나누어 보내는, 일명 돌보미 쪼개기를 시행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정책이었다. 돌보미들은 주 15시간(60시간)도 채우지 못하게 되는 처지가 됐다.(60시간을 채워야 4대 보험 가입 및 주휴수당과 연차휴가가 생긴다.)

() 60시간 채울려고 이 집 저 집 땜빵을 다니고. 정말 아주 치사한 집까지 다 다녔거든요. 그래야 60시간이 채워져요.”

60시간을 채워봤자 이들이 손에 쥐는 임금은 504천 원. 직업을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이다. 돌보미들은 여성가족부가 돌보미 쪼개기를 하는 이유가 휴게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꼼수라고 본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회사는 노동자에게 4시간 근무하면 30, 8시간 근무하면 1시간 이상의 휴게 시간을 의무적으로 부여해야 하는데 휴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4시간이 되기 전에 다른 가정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동안 업무 특성상 아이돌보미들은 쉴 수가 없었다. 근로기준법상 권리인 휴게 시간을 사실상 박탈 당해 하루에 1시간 이상을 무급으로 일해 왔다. 노조가 아이돌보미에 한해 법령 개정하고 임금으로 보상해 줄 것을 요구하자 여성가족부는 돌보미 쪼개기로 휴게 시간 발생을 차단한 것이다.

돌보미 쪼개기때문에 아이돌보미들은 물론 종일제 서비스 이용 가정들도 큰 고충을 겪고 있다. 아이돌보미가 너무 자주 바뀌어 아이들이 돌보미들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고정래 씨가 말한다.

기존 선생님하고는 잘 놀다가도 제가 들어가면 애가 울고불고 난리에요. 애한테도 정말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안 하고 싶고, 힘들어요.”

배민주 씨는 애착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최소 한 달에서 석 달이 걸린다며 정부의 탁상 행정을 비판했다.

아이를 정서적으로 학대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용자도 엄청 불만이고요.”

3~4시간을 일한 뒤 다른 가정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돌보미들의 이동 시간과 교통비도 배로 들었다. 입사할 당시에는 최저시급이 안 됐지만 교통비도 지급됐고 급여의 10퍼센트만큼 경력수당도 지급됐다. 하지만 20139월부터 교통비가 없어졌다.

거리가 좀 먼 가정은 1시간을 가야 돼요. 2시간 돌봄하고 왕복 2시간, 모두 4시간 투자해서 (2013년 당시) 1만 원을 벌려고 가는 거예요.”

시급은 법정 최저임금에 맞춰졌지만 교통비뿐만 아니라 경력수당, 활동지원금 등 각종 수당마저 삭감되자 총급여는 갈수록 줄었다. CCTV 감시, 이용자의 갑질 및 갈등에 항상 심리적 스트레스를 안고 지내다가 센터에 호소도 해 봤다.

여성가족부나 센터는 오로지 이용자 편이에요. 여성가족부에 이용자 민원이 들어가면 센터 점수가 깎이거든요. 시시비비를 가려서 이용자 갑질도 없애 줘야 하는데 무조건 이용자 편이에요.”

바뀌는 것이 없자 20179, 배민주 씨는 여성가족부에 처우 개선을 호소하는 민원을 넣었다.

“‘이 사업은 이용자를 위한 사업이지 선생님들을 위한 사업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저희도 세금 내는 국민인데, 그리고 우리가 있어야 아이가 있는 거고 아이가 있어야 우리가 있는 건데 그렇게 말씀하시냐따졌죠. 그랬더니 거기 사무관인가가 ~ . 이용자 민원 갖고도 우리 머리 폭발할 거 같으니까 전화하지 마세요한 거예요.”

배 씨는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더 높은 기관인 국무총리실에 투서를 했다. 다시 여성가족부로부터 메일이 왔다.

“CCTV 있는 데는 안 가면 되고, 인권 논하지 말라는 메일을 받았어요. 생각해 보니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생각이 드는 거예요.”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자 배 씨는 인터넷으로 노동조합을 알아보았다. 광주와 울산에서 먼저 노조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광주지회에 연락해 권현숙 지회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부터 아이돌보미들 100명 이상에게 무작위로 연락을 했다. 10시 넘어 돌보미들을 만나고 두 달 만에 80명 넘게 조합 가입서를 받았다. 2017123, 민주노총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강서분회가 설립됐다. 현재 전국 조합원 수는 약 3500. 이들의 요구는 교통비 지급 및 급여 인상, 경조사 유급휴일 적용, 근무 연수에 따른 연차수당 반영 및 미사용 휴게 시간 보상 등이다. 그리고 여성가족부 앞에 천막을 치고 진선미 장관 면담을 요구했다. 노조는 여성가족부 담당 공무원들과 몇 차례 면담을 진행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노조에 노력하고 발전하는 방향으로 가겠다고 입장을 밝힌 상태다.

▲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조합원들이 진선미 장관과 대화를 요구하며 천막에서 기다리고 있다(2019.6.3). 사진 제공_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열악한 처우에도 아이돌보미들은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보람을 생각하며 지금껏 버티고 있다. 자라나는 아이와 이용자 가정의 신뢰를 받을 때가 가장 뿌듯하다. 배민주 씨가 말한다.

“3개월 아기 때 만나서 7년째 보고 있는 아이가 있어요. 애들이 저하고 떨어지기 싫어해서 그 부모님이 저 믿고 주말마다 저희 집으로 보내요. 놀고 돌아가면 애들이 그렇게 밝대요. (웃음)”

고정래 씨도 마찬가지다.

저도 18개월부터 본 애가 초등학교 2학년인데 지금까지도 보고 있어요. 저 때문에 제가 있는 곳으로 이사올 정도로. 보람 있어요.”

민감한 CCTV 설치 문제도 신뢰 속에서 풀어 갈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CCTV 달지 마시고 한 달만 믿고 지켜봐 주세요. 아이가 선생님한테 애착을 갖는지 안 갖는지가 CCTV보다 더 정확합니다하고 설득해요. 그래서 3년을 안 달고 했어요.”

묻지마 살인 같은 게 늘어나는 건 우리 사회가 불행한 거예요. 그런 일 없으려면 지금 자라는 아이들이 정말 맑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이 되어야 해요. 저희는 거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거든요. 아무리 좋은 마인드로 일을 해도 갈수록 처우가 안 좋아지고 내 급여도 없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이들은 아이돌봄 사업이 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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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학교급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정명옥/ 경기 삼성초등학교 영양교사

 

 

어느 날 저녁 9시 뉴스에서 경기도교육청이 공채로 학교 영양사를 뽑는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그때는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던 터라, 시댁 아주버니가 그 밤중에 부리나케 달려와 얘기해 줘서 알게 됐다.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이라 뉴스거리였던 모양이었다. 아기도 없는 신혼집을 한밤중에 들이닥치다니,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바로 다음 날이 접수 마감일이었고 나는 마감 시간을 채 한 시간도 남겨 두지 않고 겨우 접수했다. 19895월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했던 순간이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일을 올해로 30년째 하고 있다.

학교급식은 1953년에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후 유네스코의 부분적 구호로 빵 무료급식을 실시하였고, 19811월 학교급식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됐다. 교육활동 지원을 위해 식품위생직 영양사가 운영하다가, 2003년 지금과 같은 영양교사 제도가 도입되었다. 애초에 지원 성격으로 출발했기에 급식과 교육의 연결고리는 약했다.

학교급식에서 사람들(학생이나 선생이나 모두들)을 함부로 버리는 모습을 보면 나는 지금까지도 무뎌지지 않고 실망을 넘어 거의 분노를 느낀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집에서 밥을 먹다가 한 톨이라도 흘리면 주워서 먹어야 했다. 더군다나 음식을 남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단체급식이 학교, 병원, 기업체 등에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음식 남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오호 통재라~! 차라리 아이를 굶겨라라는 책도 있듯이 차라리 급식제도를 없애라~!’ 주장하고 싶을 정도이다.

학교급식은 보편성, 일회성, 주관성의 특성을 갖는다. 단체급식으로서의 보편성, 먹고 나면 서류밖에 남는 것이 없는 일회성 그리고 먹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느끼는 맛의 주관성이 그것이다. 사실 이란 레시피에 의한 과학적인 맛(절대성)이라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배가 고픈 정도(시장이 반찬)나 건강 상태(몸이 아프면 입맛이 없어진다) 등에 따라 느낌이 매우 다른 상대성이 훨씬 크다. 나에게 제일 어려운 일은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건강에 이로운 음식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먹기 좋은 학교급식, 몸에 좋은 학교급식, 약이 되는 학교급식을 추구한다.

초등학교는 1학년과 6학년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1학년은 학교 밥을 잘 먹는 편인데 점점 자라서 6학년 어르신이 되면 학교 밥이 맛이 없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한다.

나는 일부러 6학년 1학기 영양 수업을 학교급식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이라는 주제로 진행한다. 내 수업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발표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분단별 발표 주제(분단 구성원 모두 각자 발표)는 학교급식의 좋은 점 이야기하기, 학교급식의 문제점 이야기하기, 앞의 분단에서 발표한 문제점을 잘 듣고 개선 방안 제시하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양심선언을 하는 친구들이 제법 출현한다는 것이다. 몸에 좋은 음식은 잘 먹지 않고, 몸에 이롭지 않은 음식은 엄청 먹어 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이 편식을 하고 있어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고쳐지질 않는 것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이 주변에 너무 많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학교급식을 하려면 영양교사가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레시피, 이를테면 파스타나 고기 요리(고기 요리는 대충 만들어도 다 맛있다고 잘 먹는다.) 등 다양한 요리법을 연구하여 식단을 구성하고, 그 레시피와 식단을 조리사와 조리실무사들이 밥상에 구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재료비가 충분해야 하는데, 예산이란 늘 부족하거나 빠듯하다. 또 조리사와 조리실무사의 요리 솜씨도 좋아야 하고 조리기구도 잘 갖추어지면 훨씬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일하는 작업자들 간의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협력이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음식이 맛이 없게 만들어진다. 이건 진짜다. ‘음식은 정성이라는 옛말이 정말로 옳다. 거기에 무어라 해도 학교급식의 완성은 먹는 학생들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이 배가 고픈 상태에서 급식을 먹으러 오면 좋겠다. 그리고 애초에 건강하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배가 적당히 고파야 맛을 제대로 느끼면서 달게 먹을 수 있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건강 상태가 좋은 친 구일수록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얘길 하다 보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말이 생각난다. 건강한 학생을 기르기 위해 학교급식을 하고 있는데, 건강한 학생들이 학교급식을 맛나게 먹는다니.

작은책(정인열)

나는 하얀 위생복을 입고 1, 2, 3(우리 학교는 식당이 3개 층으로 나뉘어 있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점심을 먹는 아이들 모습을 보러 다닌다. 우리가 마련한 음식을 얼마나 먹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지켜본다. 잘 먹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들이 먹는 모습, 먹는 양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내가 정성을 쏟는 일이 있는데, 퇴식구에 지키고 서서 식판을 깨끗이 정리하도록 지도하는 일이다. 밥 한 톨도 식판에 붙은 채로 배출하지 않도록 호랑이 눈을 뜨고 지킨다. 식판을 깨끗이 배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지구를 살리는 최소한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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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아이 짐을 교실까지 들어다 줘, 말아?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 교장

 

 

첫날이라 짐이 많아서요.” “교실을 못 찾을까 봐 그러는데요.”

짐도 무겁고 아이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몰라서 오늘만 들어가면 안 될까요?” “아이만 먼저 들여보내고 제가 뒤따라가서 잘하나 보면 안 될까요?”

이런 말을, 입학식 다음 날 교문에서 아침맞이하며 1학년 학부모들과 쉴 새 없이 주고받았어. ‘아이가 힘들다는데 잠깐 들어갔다 오는 게 문제요?’ 하는 당당한 민원인 표정부터 안 들어가는 게 원칙인 건 아는데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 아이만하는 애틋한 호소까지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게 장난이 아니네.

다른 날보다 몇 배 힘든 아침맞이였어. 운동장과 학교 건물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걷는데 1학년 학부모와 아이들이 자꾸 떠올라. 학부모와 입학 초 학교 생활 적응 방법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했는데 놓쳤다는 생각이 드네. 예비 소집 이후 몇 차례 신입생 학부모를 위한 소통의 자리가 마련되었다면 오늘 아침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 상황에 따라 부모가 교실까지 들어갈 수도 있어. 사전에 담임과 학부모가 아이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나눈 뒤 나온 결론이라면 무엇은 못 하겠어?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학교가 정한 원칙을 무너뜨리는 건 교육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오늘 아침에 겪은 일을 가볍게 넘어가면 내년에도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거야. 그러지 않도록 내년 교육 과정 수립과 운영에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봤어.

유치원을 떠나 학교라고 하는 곳에 처음 등교하는 아침이야. 그런데 갖고 가야 할 준비물이 많아. 이걸 어떻게 들고 간다? 태어나 학교에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날, 준비물을 들고 가는 방법에 따라 아이에게 심리적으로 어떤 움직임과 변화가 있고 그 교육적 의미는 뭘까? 아침맞이하며 만난 1학년 아이들과 부모를, 준비물을 들고 오는 방법에 따라 세 묶음으로 나눠 봤어. 그랬더니 부모와 아이들 표정, 몸짓, 눈빛,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다르더라고.

첫 번째는 부모가 짐을 교실까지 가져다주는 거야. 부모 표정을 보면 밝고 뿌듯해. 그런데 온몸에 긴장감이 흐르고 양 볼이 불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어. 기운이 올라와 있다는 이야기지. 아이와 말을 하면서도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로 봐서 빠르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 교실 위치가 어디인지, 준비물을 어디에 넣어야 하고 담임을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등 생각이 많아.

반면 아이는 발걸음이 가볍고 두 손바닥은 펼쳐져 있고 눈은 이리저리 편하고 자유롭게 움직여. 편안하고 느긋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어느 하나를 깊이 바라보지는 않아. 여유롭고 편안하고 행복해. 눈길과 마음 모두 친구가 아니라 부모에게 쏠려 있어.

두 번째는 부모가 짐을 교문까지만 들어다 주고 거기서부터 아이가 들고 들어가는 거야. 부모 먼저 살펴보면 들여보내 주면 안 되나, 다른 사람도 들어가는데. 애 보는 앞에서 규칙을 어길 순 없고.’ 하며 교문 앞에서 아침맞이를 하고 있는 교장 눈치를 슬쩍 살피는데 갈등이라고 할까. 망설임, 머뭇거림이 느껴져. 애당초 집에서 떠날 때부터 교문까지만 들어다 주기로 아이와 약속하고 온 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이에게 짐을 넘겨주는데, 교실까지 들어다 주기로 해 놓고 교장이 버티고 서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들려 보내는 경우에는 떼쓰고 울고 난리야.

이렇든 저렇든 대부분의 부모에게서 불안감, 걱정, 두려움, 노심초사 같은 감정이 느껴져.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한다. 혼자 갈 수 있지?”, “넌 잘할 수 있어.”, “이제 네 힘으로 하는 거야.”, “화이팅!”, “너 파일 박스 어디에 둬야 해? 크레파스는? 실내화는? 잘 보고 해라.”, “교실 찾을 수 있어? 모르면 내게 전화해.”

반면 대부분의 아이들 입이 댓 발은 나와 있어. 골이 난 거야. 왜 교실까지 들어다 주지 않냐는 거지. 울거나 드물게는 같이 들어가자고 우기기도 해. 기운은 가라앉아 있고 눈꼬리와 어깨도 처져 있어. 발은 끌리고 다리는 풀려 있다. 친구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쳐다보지도 않거나 더 말 붙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게 하는 표정으로 영혼 없이 건성으로 대답하고. 가끔은 웃으며 걱정 마라는 표정을 짓거나 엄마를 힘차게 부르는 아이도 있지만 아주 드물지.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집에서부터 혼자 짐을 들고 오는 아이들이야. 이런 아이들은 교문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신호등을 건너오는 순간부터 아우라가 느껴져. 얼굴은 상기되어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두 손은 마치 절벽에 오르며 밧줄 붙잡듯 봉지와 손가방을 꽉 움켜쥐고 있는데 발은 번쩍번쩍 들어 힘차게 앞으로 내딛어. 친구들이 부르면 대답은 하면서도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듯 길게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아. 얼굴에는 긴장감이 넘치는데 짜증은 없고 눈동자는 앞만 보고 머릿 속에서는 뭔가 많은 생각이 솟구치고 있는 게 보여. 낯선 세상에 혼자 들어가는 두려움이 느껴지고 콧구멍은 벌렁거리고 콧등엔 땀이 솟아 있어. 주먹 하이파이브 하자고 말을 걸어도 귓등으로 흘리고 몇 녀석은 눈으로 자기 두 손을 가리켜. ‘보면 모르냐. 지금 내 손이 하이파이브 하게 생겼냐?’ 이런 뜻이지. 목에 힘 주고 당당하게 나를 쳐다보는데 가슴이 뭉클해.

이 세 종류의 아이들 가운데 삶에서 만나는 문제 상황을 풀어내고 해결해 삶의 주인으로 설 힘을 얻은 아이는 누구일까? 손발이 편안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얻기로 따지면 첫 번째 아이가 가장 큰 이익을 본 거고 세상살이라는 큰 바다와 산을 넘어갈 힘을 얻은 걸로 치면 세 번째 아이를 당할 수 없어. 사람들은 학교란 아늑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곳이어야 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난 아니라고 믿어. 학교라는 곳, 배움이 일어나는 곳은 낯설고 두렵고 불안한 자극이 가득한 곳이야. 모험이 가득한 곳이라는 거지. 학교가 왜 모험이 가득한 곳이어야 하는지는 다음 호에서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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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작은책 법률 상담소

 

반지하에서 생기는 법률 분쟁

김묘희/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더욱 주목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는 주인공 가족이 살고 있는 반지하 집이 등장합니다. 반지하 집은 빛이 잘 들지 않고, 통풍이 잘되지 않지만, 외부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고, 지하이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화장실 하수구가 역류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 반지하 집은 그런 단점을 현실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인지 영화를 본 관객 중에는 자신이 살았던 반지하 집의 추억을 떠올렸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하영 씨는 영화가 끝나면 현실의 반지하 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화 속 리얼한 반지하 집을 보고 나자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죠. 하영 씨가 반지하에서 겪었던 일은 무엇일까요.

 

하영 씨는 독립 후 첫 자취방을 알아보러 다니다가 본인 예산 안에서 가장 넓고 깨끗한 집을 발견하고 바로 계약을 했습니다. 반지하라는 게 신경이 쓰였지만 도배·장판이 깨끗하고 월세도 싸니까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장판 밑에 물이 고이고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옷장 속까지 곰팡이가 펴서 몇몇 옷은 버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집주인은 하영 씨가 환기를 안 해서 생긴 문제라며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림_ 이동수

 

우리 법에는 집주인이 집을 빌려줄 때에는 세입자가 집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빌려주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임대인은 목적물을 임차인에게 인도하고 계약존속 중 그 사용, 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의무를 부담한다(민법 제623)”.

반지하 건물의 특성상 세입자의 생활 습관보다는 채광과 통풍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곰팡이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곰팡이 때문에 집을 집처럼 이용할 수 없다면 임대인은 당연히 수선 의무를 부담하게 됩니다. 다만, 세입자는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집주인에게 알려야 합니다. 만약 세입자가 집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집주인에게 신속히 알리지 않아 피해가 발생한다면 피해 비용 일부를 세입자가 부담하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하영 씨의 경우, 새로 도배·장판을 하고 입주한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곰팡이가 생겼기 때문에, 곰팡이가 생긴 곳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잘 기록해두었다면 집주인에게 곰팡이 제거 시공 등을 요청할 수 있었고, 수선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반복되는 경우였다면 임대차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림_ 이동수

 

사실 하영 씨는 지난여름에는 더 큰 일을 겪었습니다. 큰비가 내려 하영 씨가 살고 있는 반지하 방으로 물이 넘쳐 들어왔습니다. 집주인이 장판과 창문 쪽 벽지를 교체해 주기는 했지만, 물에 잠겨 결국 버릴 수밖에 없게 된 가재도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법적으로 따져 보면 침수 피해로 인하여 집에 생긴 피해는 집주인이 복구해야 합니다. 민법에서는 집주인에게 수리 의무를 부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주인의 의무는 임대 목적물인 집을 수리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고, 집 안에 있는 가재도구에 대한 피해 보상 책임까지 없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집 구조적인 하자로 인하여 가재도구에 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는 점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집주인에게 그러한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재난지원금

국가에서 침수 피해로 인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난지원금은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서 정한 바에 따라 침수 피해를 본 당사자에게 지급됩니다. 이 때문에 집주인이 세입자가 받은 재난지원금을 돌려달라고 하여 종종 분쟁이 발생하는데, 침수 피해를 본 세입자가 이를 돌려줄 의무는 없지만 해당 지원금은 침수 피해 복구에 사용해야 합니다.

주택 침수 피해를 입고 재난지원금을 받은 세입자가 호우 피해로 인한 장판과 벽지 상태가 심하지 않다고 생각해 그대로 지내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해당 세입자가 재난지원금을 받고도 이를 침수 피해 복구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면, 계약 기간이 끝나 이사를 나가려고 할 때 집주인이 침수 피해로 인하여 하자가 발생한 장판과 벽지를 교체하라고 한다면, 재난지원금을 받은 세입자는 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림_ 이동수

 

주택법에서는 국민이 쾌적하고 살기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저주거기준을 설정·공고하도록 정하고 있고(5조의2), 2011년 마지막으로 공고된 최저주거기준에 의하면 주택은 적절한 방음, 환기, 채광 및 난방설비를 갖추어야 하고, 자연재해로 인한 위험이 현저한 지역에 위치해서는 안 됩니다. 하영 씨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최저주거기준이 지켜졌더라면 겪지 않았을 일을 겪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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