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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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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가 만든 '영전강', 사교육비 절감한다며 뽑더니…
[작은책] "사실혼 인정하고 무기 계약 보장하라!"



"같이 살림 차리고 8년을 살던 놈이 다시 4년 더 살자고 하면서 혼인 신고는 절대 안 해 준대. 당신 같으면 이 X새끼 어떻게 할 거야! 판사도 인정했잖아, 사실혼이라고. 왜 당신들만 쌩까냐고!"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말이 거칠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친정에서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았고, 학창 시절 대단한 천재는 아니었지만 총명하다는 말을 듣던 모범생이었고, 성장해서는 교통 법규조차 함부로 어기지 않는 시민이 되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싹싹하게 웃으며 일했고, 어른들 명절 선물 챙기기에도 최선을 다했다. 친구들에게조차 소홀하게 되어 핀잔을 들어가면서까지 그 비겁한 놈에게 온 마음을 쏟았다. 누군가는 나에게 혹시 '착한 여자 콤플렉스' 아니냐고 말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누구에게 말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참고 살았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상황을 면해 보려 했다. '부당하다'는 말은 입 밖에 꺼낼 처지가 못 되었고, 싸움을 일으키는 것은 나에게 큰 상처를 남길 것이 분명했다. 설마 했는데 나를 데리고 살던 이놈은 애초부터 나랑 가족이 될 생각이 없었는데, 나 혼자 헛꿈을 꾸었음을 알고 나니 분노가 치민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쫓겨날까 봐 조마조마하며 눈치 보고 살던 습관은 내 자존감에 커다란 상처를 남겨 놓았다.  

▲ 전국 영어회화전문강사들은 지난 7월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무기계약 전환을 요구하며 결의대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이것은 지금 학교 현장에서 4년마다 거듭 해고를 당하며 일하는 비정규직 교사인 영어회화 전문강사(이하 영전강)들이 겪고 있는 이야기다. 지난 8월 대전고등법원은 4년을 근무하고 해고된 영전강이 사실상 무기 계약이라고 판결하였으며, 학교장과 계약하더라도 실제 사용자는 교육감임을 확인해 주었다. 또한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영전강의 업무가 상시 지속적임을 인정하여 무기 계약 전환과 고용 주체를 학교장에서 교육청으로 바꿀 것을 교육부 장관에게 권고하였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사교육비 절감과 영어 말하기 교육의 문제점을 보강하기 위해 영전강 제도를 만들었다. 전국 시도교육청은 영어 지도안 작성과 영어 수업 시연, 영어 면접 등을 거쳐 6200여 명의 영전강을 선발하여 초중고교로 배치했다. 그러나 초중등 교육법 시행령 42조에 영전강의 근무 기간이 4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해고를 반복하는 꼼수를 썼다. 그동안 절반 정도가 일터를 떠나 현재는 3200여 명 남았다.

공개 채용을 거쳐 8년간의 실무를 통해 검증받은 영전강들에게 임용고시를 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법원이 자격을 인정했음에도 최상위의 기준을 다시 정해 무한 경쟁에 밀어 넣는 논리는 아이들이 경쟁 교육에서 마주하는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주장대로 영전강이 임용고시에 응시하여 모두가 합격한다 해도 교육부의 생각이 이렇다면 학교는 계속하여 해고하기 쉬운 일자리를 만들어 낼 것이고 정규직에서 밀려난 청년들이 다시 이 비루한 일자리를 메울 것이다. 

머지않아 비정규직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 마구 쏟아 내는 화풀이 식 댓글과 새 정부의 정규직 전환 공약이라는 희망 고문에 상처받고 주눅 들어 한없이 우울해졌다. '동일 노동·동일 임금'은 고사하고 8년간 15만 원 오른 월급에도 불평 없이 방학에도 아이들 가르쳤는데, 이제 와서 무자격자라고 흠을 잡으려 든다. 그들의 주장에서는 인간에 대한 도리도 필요 없고, 오로지 살자고 발버둥치는 생존 본능의 처절함마저 느껴진다. 가난한 비정규직이 넘쳐 나는 한 이런 진흙탕 싸움은 끝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겪고 지켜본 해고는 지위가 높고 낮음을 떠나 모두 살인이다. 왜냐하면 일자리는 그 사람의 존재를 다 걸기 때문이다. 한 영전강은 임신을 이유로 해고되는 것에 저항하여 학교와 말싸움을 벌이다 태아를 잃기도 했다. 교수나 박사님의 해고 또한 다르지 않다. 누구에게나 해고의 위협은 사람의 마음을 하릴없이 좀먹게 만든다. 

교원 임용 선발 인원을 깎아 먹는다고 영전강 제도를 폐지하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잔인한 왕정의 노예들도 태어날 귀한 신분(정규직)의 앞길을 위해 먼저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수년 전 영전강 제도 폐지 서명 용지가 내가 앉은 책상 옆에서 돌던 날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느 집단이나 주장하고 싶은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라는 일터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온 힘을 다해 굴려 내고 싶은 역사의 수레바퀴 같은 것이 있겠지만, 그 밑에 깔려 다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냈던 얼마 안 되는 후원금을 돌려주겠다던 모 의원님은 줏대가 약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영전강을 반대하는 이들의 반발이 그만큼 거세었다는 말이 옳다. 수년 전 교육공무직 법안 발의 때 한 국회의원의 홈페이지는 영전강에 대한 댓글로 다운될 지경이었다. 합법적인 후원금조차 낼 수 없게 되자, 내가 어쩌다 이렇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8년의 학교생활에서 나는 비굴함과 겸손의 차이를 아직 모른다. 나는 아이들에게 겸손하기 위해 비굴함을 선택했다. 어른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지 않고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다. 학교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풀 죽어 있던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이 그냥 들여다보였다. 나는 아이들과 공감하는 방법을 교육학에서보다 한없이 내 몸을 낮추어야 했던 비정규직 생활에서 더 많이 배웠다.

나는 '교사'라는 이름을 원하지 않는다. 일하던 대로 일하도록 고용 안정만 바랄 뿐이다. 내가 만약 학교가 아닌 다른 공공 기관에서 2년을 근무했다면, 기간제법에 의해 무기 계약 대상이 된다. 공공 기관과 학교는 무엇이 얼마나 다른 곳인가. 가르치는 일이 노동법 적용 대상이 아닌 이유가 무엇인가. 가르치는 일에는 얼마나 혹독한 전문성이 요구되는가. 9년이 아니고 90년을 일하면 인정해 줄 것인가. 

추석 명절을 지내며 여성과 비정규직의 삶은 서로 많이도 닮았음을 느낀다. 함부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 언제나 남에게 해석 당하는 사람들. 그들은 '나는 착하지 않아, 능력이 부족해'라고 끝없이 죄책감을 강요받는다. "임용고시 합격하여 떳떳하게 일하라"라는 말은 영전강의 생각은 들어볼 것 없이 너희는 부정한 집단이라는 누군가의 일방적 해석이다. 짜장면집 주방장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반드시 세계적 요리사가 되라고 윽박지르는 꼰대의 모습이다. 어느 한 편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건강할 수 없고 이익을 누리는 쪽의 도덕적 해이로 이어질 수 있다.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그리하여 직무유기가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아무리 말단의 일이라도 해고될 걱정 없이 소신껏 할 수 있어야 그다음에 민주주의고 뭐고 꿈이라도 꿀 수 있지 않을까. 

계속하여 약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강자들에게 이제 더 이상 나만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비정규직의 눈물을 팔아 우리가 옳다고 누구를 설득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나를 지지하며 수고를 인정하고 내 노동의 법적 권리가 옳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마치고 밤샘 농성을 하기도 하고 광화문 땡볕 아래서, 교육청에서 싸움을 이어간다. 거기엔 함께하는 친구도 있고 공감도 있어 견딜 만하다. 오늘은 교육부 높은 담장을 향해 소리친다.

"사실혼 인정하고 무기 계약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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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욱/ KT노동인권센터 집행위원장


  나는 2003년 참여정부 때 해고됐다가 그해 원직 복직됐다. MB가 취임한 후 2009년 여름, KT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할 때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한 이유로 그해 가을 인천에서 삼천포로 징계와 동시에 전보되었다. 그런데 회사가 사택을 제공하지 않아 KT삼천포지사 앞 인도에서 텐트 노숙으로 겨울을 지냈다. 노동위원회의 부당 징계 부당 전보 판정으로 2010년 봄에 원대 복귀하자마자 두 번째로 해고됐다. 지금 1년 8개월째에 접어들고 있다. 

  올가을, 국정 감사에서 이미경 의원이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삼성백혈병 산재 문제를 따지며 근거 자료로 KT사례가 제시됐다.

  2002년 12월에 치러진 KT노조 선거에 관리자(수도권강남망건설국 총무과장)가 상부의 지시를 받아 강성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고 회사가 미는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과로하며 술을 먹다가 2003년에 ‘간경변’으로 쓰러졌다. 결국 2005년 간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2007년 뇌림프종에 걸려 2008년에 사망했고, 유족이 산재 신청을 제출하자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승인 뒤 유족보상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한 사건이었다. 그동안 무수한 의혹이 제기되던 KT노조 선거에 대한 회사 지배 개입(부당노동행위)이 9년이나 지나서 국정 감사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내가 노조위원장으로 출마했던 2008년 12월 선거 생각이 난다. 후보자 등록을 위한 조합원 추천 서명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회사 관리자가 31개 팀장들에게 ‘회사 측 후보자에 대한 서명은 괜찮지만 민동회(민주동지회, KT내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유일한 조합원 현장 조직) 후보자의 출입이나 추천 서명은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사내 메신저를 보냈다. 이 사실이 발각돼 법원으로부터 2009년에 부당노동행위로 벌금 200만 원의 약식 명령을 받았다.

  어쩌면 9년 전에 선거 개입을 무리하게 하면서 병에 걸려 사망한 관리자나, 3년 전 선거에 지배 개입한 혐의로 벌금 200만 원을 부과받은 관리자도 자본의 지시를 관철시키면서 발생한 동일한 피해자일 뿐일 것이다. 자본은 아직도 어떤 상처도 받지 않고 끄떡없이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현대중공업 노조 선거에서 민주 후보 진영에서 회사 측의 지배 개입을 감시하도록 근로감독관의 파견을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했던 사실과 후보 추천 서명지를 각 후보 선거대책본부가 합의해 공동으로 은행 금고에 임시 보관한 것(회사가 추천 조합원을 알게 되면 각종 불이익 및 압박을 가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 기아자동차에서 대리 투표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 등을 보면 이미 KT에서 회사 개입과 투개표 조작을 통한 노조 무력화 수법이 주요 사업장에 전파됐음을 알 수 있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들이 권력과 자본의 힘을 총동원해 민주노조를 무력화시켰다면, 우리는 역으로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전략적 사업장에 민주노조를 세우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KT노조는 1994~1996년(5대 유덕상 집행부)을 제외하고 내리 5번씩이나 선거에서 민주노조가 패했다. 그 과정 속에 해외 민영화가 되었으며 10여 차례 이상의 정리 해고로 3만여 조합원들이 잘려 나갔다.

  KT노조 선거 투개표소는 전국에 489개나 퍼져 있다. 그리고 3년 전 선거에서 참관인을 배치하지 못한 투개표소는 150여 군데가 넘었다. 투개표 참관인도 세우지 못한 채로 내가 42.79퍼센트를 득표했다는 것은 사실상 민주노조의 승리를 의미한다. 참관인을 세운 투개표소에서는 민주노조 측이 대부분 압승을 했고 참관인이 없는 곳에서는 어용 세력이 몰표를 거두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전국에 산재한 분산 투개표 제도는 통합 투개표를 시행하는 사회보험노조나 투개표소가 130여 개인 철도노조와 달리 KT가 민주노조를 세우기가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조합원의 성향 파악이 용이하고 참관인을 세우기가 어려움) 중의 하나다. 계속해서 통합 투개표 제도 도입을 요구했으나 회사가 관리하고 있는 어용 집행부는 항상 묵살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는 선거를 감시하는 참관인 문제이다. 10여 년간 지속된 조합원 회유와 탄압 속에 전국의 투개표소를 제대로 감시할 참관인을 조직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용 집행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함에도 선거를 코앞에 둔 10월 1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해 선거관리규정을 더욱더 개악했다. 민동회 40여 명 조합원들의 출입을 경찰과 청경 그리고 구사대를 동원해 원천 봉쇄한 가운데 안건을 통과시켰다.

  조합원이라면 소속을 달리하더라도 전국의 투개표소를 참관할 수 있었던 규정을 ‘지방본부별로 제한’(예를 들어 서울 조합원이 충남이나 강원도에 투개표 참관을 할 수 없도록 함)했으며, ‘지부 선관위의 의결을 거쳐 참관인을 퇴장시킬 수 있는 규정’을 도입했고, 투표 용지도 선거인명부에 등재된 조합원 수와 동일하게 제작해야 함에도 ‘예비 투표 용지를 3퍼센트 추가로 제작’(투표 용지 바꿔치기 합법화함)하도록 했고, IT업체라는 특성과 어울리지 않게 인터넷과 통신 매체 등을 이용한 ‘어떠한 선거 운동도 금지’했으며, ‘선거 운동 기간도 기존 20일에서 15일’로 5일을 단축시켰다. 

  민주노조 진영(장현일 선본)에서는 개악된 선거관리규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서를 지난 11월 9일 수원지법 성남지원에 제출했다. 더불어 투개표를 감시해 달라는 청구 취지도 포함시켰다. 이러한 법률적 대응과 함께, 조합원들이 용기를 내 투개표 참관을 하도록 하는 시민 사회  연대체인 ‘KT노조 공정 선거 감시단’을 만들었다. 민주노총과 민주. 진보 정당들 그리고 민중의 힘을 비롯한 단체들이 속속 결합하고 있다. 참여 의사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KT노조 선거 공정 선거 감시단 상황실(02-701-0070)로 연락하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2011년 올해에만, KT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14명이 자살 및 돌연사 등으로 죽었다. 그리고 낙하산 인사가 취임한 2009년 이후로 45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현장은 피폐화됐다. 얼마 전 방영된 〈PD수첩〉(10월 11일: KT인력퇴출프로그램, 11월 8일: 분신사망한 KTcs 전해남 지부장 편)은 현재 KT의 모습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기 위해 KT 내부를 민주화시키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직장을 민주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조합부터 먼저 민주노조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해외 투기 자본의 돈벌이 수단(해외 민영화 10년간 2조 4천억이 국부 유출됨)으로 전락한 KT가 다시 통신 공공성을 회복하고 국민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된다.

  많은 분들이 노조 선거 공정 선거 감시단에 참여해 죽어 가고 있는 KT 노동자들을 살려 내고, KT를 민주적이고 인간다운 직장으로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11월 14일 선거 공고가 났고, 11월 30일 하루 동안 투표가 시행될 예정이다. 적극적인 연대와 공정 선거 감시단 참여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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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성/ 대전대리운전 노동조합 사무국장


  2010년 6월, 망설이고 망설이던 대리운전을 시작했습니다. 

  대리운전 노동자들은 사연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택시 기사, 공무원, 은행원, 보험 영업인 등 다양한 전, 현직을 가지고 대리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컴퓨터 프로그램 판매 및 유지 보수를 하며 10년 이상 사장님 소리를 듣다가 대리운전을 한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술을 드신 고객들은 여기저기 대리운전 회사마다 부르고, 10분 이상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빨리 가지 못하면 콜이 취소됩니다. 대전의 대리 요금은 기본이 8,000원입니다. 거의 모든 지역이 그렇기 때문에 고객에게 갈 때 택시를 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콜이 많은 시간에는 콜을 잡아 놓고 지원 차를 기다릴 시간도 없었고 2천 원을 내야 하는 지원비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거의 20년을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을 해 왔기에 몸은 불어나고 운동이라고는 전혀 안 하다가 갑자기 대리운전을 하며 뛰어다니기 시작하니 약해진 인대가 버티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늘어나서 절룩거리며 일했습니다. 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가족들의 생계 때문에 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콜을 받고 절룩거리며 뛰는데 손님이 뛰지 말랍니다. 손님을 태우고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왜 그리 절룩거리냐고 묻기에 안 하던 운동을 갑자기 해서 그렇다고 하니, 무릎 인대가 늘어나서 그런 거라고 2주 이상 쉬어야 한다고 합니다. 손님은 병원의 의사였고 내 증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주며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지 말고 치료를 하고 그 다음에 일을 하랍니다. 하루하루 생계가 빠듯한데 2주를 쉬어야 한다니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 손님의 조언도 있고, 저도 너무 아팠기에 그렇게 대리운전 일주일 하고 2주 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때 2주를 쉬면서, 관리비(하루 2,800원)를 안 내 보려고 “사정이 이래서 병원에 다녀야 하니 관리비를 보류 좀 하자”고 하니 콜센터에서 “안 된다”고 합니다. 처리하려면 퇴사 처리를 해야 하고, 그러면 입사할 때 냈던 보증금 10만 원을 돌려받을 수 없으니 그냥 하루 2,800원씩 39,200원을 내는 것이 더 낫다고요. 결국 저는 일을 안 한 2주의 관리비를 내고 치료를 끝내고 다시 밤거리를 뛰어다녔습니다.
 
  한 콜을 타고 다음 콜을 찍는데 보통 20~30분 정도 걸립니다. 손님한테 가는 시간을 포함하면 한 시간에 한 콜 타기도 힘들었습니다. 대리운전에 익숙해지면서, 한 회사의 콜만 타던 저는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7~8콜 정도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때쯤 지원 차를 타는 다른 기사님들의 손에는 두 개의 핸드폰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어보니 한 회사의 콜만 타면 기다리는 시간들이 많아져서 두 회사의 콜을 받으며 탄다고 했습니다. 대리운전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제 손에도 두 개의 핸드폰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두 개 회사의 콜을 타며 콜당 25퍼센트의 수수료에 하루 5,600원씩 관리비를 내며 저녁 7시부터 새벽 6시까지 밤거리를 뛰며 버는 돈은 고작 7~8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하루 종일 13~15콜 정도를 타야 나오는 수입입니다. 

  1년 정도를 대리운전을 하며 날마다 내가 탄 콜 수와 금액, 취소 벌금 건수 및 금액, 지원 차량비 등을 꼼꼼히 기록해 봤습니다. 일 년 통계를 내 보니 회사로 들어가는 금액이 내가 벌은 금액의 30퍼센트 이상이고, 또 지원 차를 탈 때마다 내는 지원비 등을 포함하면 40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을 하는 건 기사인데 회사가 너무 많은 수익을 가져간다는 걸 알았습니다. 혼자서 돈이 모아지면 대리 기사들을 위한 회사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쯤 대전에 대리운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거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노조는 7월 3일 출범식을 하고 6차례에 걸친 교섭 요구 공문을 업체들에게 보냈습니다. 업체들은 공문에 반응하지 않았고,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너희는 노동자가 아니니 너희 노조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노조 간부 8명을 부당 해고했습니다. 부당 해고를 철회해 달라고 찾아가 대표자 면담을 요구한 간부들이 경찰에 업무 방해로 고소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노조는 두 차례의 파업을 했습니다. 우리는 8월 18일 하루, 그리고 10월 20일과 21일 이틀 동안 파업을 했습니다. 이런 파업을 보면서 일반 사람들은 그런 말들을 합니다. 하루 하는 파업이 파업이냐고. 하지만 하루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10월 20일, 2차 파업 결의 대회 때 저는 삭발을 했습니다. 삭발을 하는 동안 동지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동지들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습니다. 결의 대회 시작 전에 사측에서 전체 공지를 보냈습니다. 파업에 동참하면 한 달간 콜을 제한하겠다는 공지였습니다. 결의 대회를 준비하던 저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400여 명 조합원 중 결의 대회 참여 인원은 고작 60여 명. 계획했던 무료콜 투쟁(파업은 하지만 시민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료로 집에 데려다 주는 투쟁, 콜센터와의 싸움이 우리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기에 시민의 여론을 이끌어 내려고 처음 시도해 본 방법이었음)도 진행하기 힘든 인원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와 준 60여 명의 조합원 앞에서 삭발을 하면서 그이들을 떳떳이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측의 협박 때문에 눈치를 보며 참석하지 못한 조합원들에게 우리 노조가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참여해 준 용기 있는 조합원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습니다. 삭발식 내내 저는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리운전 업계에는 많은 비리가 있습니다. 25퍼센트에 달하는 많은 수수료를 징수하면서도 회사의 경상비에 해당하는 보험료, 프로그램 사용료, 영업비, 광고비를 대리운전 노동자들에게 떠맡기고, 그것도 모자라 고객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콜 취소 벌금(요금 체계를 거리에 관계없이 동일 요금으로 책정해 놓고는, 장거리 콜을 기사들이 기피했을 때 물리는 페널티)이란 것을 만들어 2중 3중의 착취를 하고 있습니다. 보험도 같은 보험회사에 두 개씩 들고 콜을 타야 합니다(2011년 4월 22일 KBS ‘소비자 고발’).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대화로 고치고자 노조를 만들고 노동자로서의 기본 권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어디에도 우리 대리운전 노동자를 지켜 줄 법은 없었습니다. 대전광역시장에게 중재도 요청해 봤지만 관련 법규가 없는 관계로 중재를 할 수 없다는 답변만을 들었습니다. 

  노동조합을 뉴스에만 나오는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던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악질 센터’를 이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이기고 동지와 함께 짐을 지고,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posted by 작은책

김정훈/ 대우자동차판매지회 조합원


  2011년 1월 31일. 대우자동차판매주식회사는 노동조합원 전원을 포함한 정리 해고 명단을 발표했다. 예상했던 미래였지만 현실이 되지 않길 바라던 일이었다.     

  내가 입사한 1999년도는 IMF 구제 금융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시기였다. 입사하기는 어려웠고 정규직으로 들어가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런데 그때 국가가 급여의 일부를 지원하는 인턴 제도가 있어 3개월간의 수습 기간을 거쳐 대우자동차판매(주)의 정규직 사원이 될 수 있었다.  
  
자동차를 판매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업을 다니는 곳마다 거절을 당하기 일쑤였고, 대우 차는 죽어도 안 산다는 사람도 많았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차를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일터에서는 다달이 그려지는 판매 실적 그래프가 곧 인격이요, 그 사람의 모든 것이었다. 잘 파는 사람은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못 파는 사람은 인격체로서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사기를 당해 차량 대금을 대신 변제하는 사람도 있었고, 실적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원치도 않는 자기 차를 뽑는 사람도 있었다. 회사는 마른 수건 짜내는 격으로 친구, 친척, 지인들에게 차량 판매를 강요하고 못 견디겠으면 나가라는 식이었다. 동기들은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입사하던 해 12월에 결혼을 했다. 당시 28살이던 나는 가장이 된다는 책임감으로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구두 굽이 닳도록 열심히 일했다. 사람을 만나고 명함을 건네고 차량을 설명하고 견적을 내고 계약을 하고 출고하고 차량을 인도하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힘들기도 했지만 세상을 배워 가는 과정이라 생각했고 살림이 조금씩 늘어나는 재미에 즐거웠다. 2001년 9월 첫째 딸이 태어났다. 기쁘고 행복한 시기였지만 회사는 안팎으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회사는 고정급을 줄이고 변동급을 높이는 쪽으로 영업직 급여 체계를 바꾸겠다며 서명을 받기 시작했고, 이 급여 체계에 반대하면 정리 해고 하겠다고 협박했다.  2001년 12월, 노동조합은 파업에 들어갔다. 전국 각지의 조합원들이 올라와 서울의 여러 대학의 강당을 빌려 잠을 자며 6개월 동안 파업을 진행했다. 그사이 관리직들은 친분이 있는 조합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을 하여 정리 해고 되기 전에 위로금을 받고 나가거나 퇴직금을 담보로 대리점을 차리면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겠다는 감언이설로 회유했다. 점점 변동급 체계에 동의하고 조합을 탈퇴하는 조합원들이 늘어났다. 대리점을 차려 소장으로 나가거나 아예 위로금을 받고 희망퇴직을 하는 조합원들도 늘어났다. 정리 해고 사태는 막았지만 조합은 반의 반 토막이 났다.  

  이때부터 사측은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노동조합을 말살하려는 음모를 숨기지 않고 본격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이 근무하는 영업소 간판을 새벽에 용역을 동원하여 몰래 뜯어 내고 집기를 옮기는가 하면 정상적으로 출퇴근하기 어려울 정도의 원거리 영업소에 발령을 냈고 그 영업소마저도 전시장도 간판도 없이 골목길 쌀가게 2층, 치킨집 3층, 슈퍼마켓 5층 등에서 근무하도록 하면서 조합원들이 판매 실적이 좋지 않다는 구실을 만들어 냈다.  

  2006년 결국 사측은 이 구실을 핑계로 회사가 적자가 난다고 하면서 직영승용판매 부문을 별도의 자회사를 만들어 떼어 내려 하였다. 자본금 1조 5천 억짜리 회사에서 10억짜리 회사로 옮기라는데 동의하는 직원이 있을 리 없었다. 비조합원들이 조합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5년 전 변동급 급여 체계에 동의하고 조합을 탈퇴했던 직원들도 많았다. 사측은 자회사 발령을 거부하는 조합원들을 무기한 대기 발령 조치했다.  

  이 과정에서 대구에 있는 최동규 조합원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조합은 사측의 무리한 자회사 발령과 대기 발령 압박이 스트레스에 의한 사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사측의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했지만 사측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며 성의 있는 대화 요구조차 묵살했다. 조합은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시신을 본사 앞 냉동탑차에 보관하며 투쟁했다. 한여름에 조합원들이 돌아가며, 세워져 있는 냉동탑차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도록 차량을 관리하고 천막을 지키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측은 1년이 다 되도록 조합의 해결 요구에 응하지 않더니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유족을 앞세워 고인의 시신을 운구차에 실어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허탈했지만, 그동안 유족들이 겪었을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그이들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측의 태도에는 정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2008년 10월 조합은 대기 발령 철회와 원직 복직을 요구하며 부평 본사 B동을 점거했다. 사측은 단전을 하고 용역을 동원해 끌어내려 했지만 1층 복도에서 촛불을 켜고 지내면서 45일을 버텼다. 조건부 합의로 나왔지만, 사 측의 합의 이행은 미뤄지고 이번엔 보직 대기가 시작됐다. 보직 대기에 이어 자택 대기까지 또다시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측은 건설 사업에 무리한 투자를 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고도 회사의 알짜배기 부동산들을 헐값에 매각하고 이름도 모르는 유령 기업에 거액의 대출 보증을 서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으며 회사의 부실을 초래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외부에서 배구연맹총재라는 직함으로 저명한 기업인 행세를 하고 다녔다. 회사는 결국 법정 관리를 받게 되었고, 회사 자구 노력의 일환이라는 명목으로 인적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2011년 1월 31일, 정리 해고 명단을 발표했다.  

  조합은 또다시 본사를 점거했다. 이번에는 본동인 A동을 통째로 점거했다. 1층에 주방을 차리고, 외부에 있던 조합 사무실도 아예 5층으로 이전했다. 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조합원들은 고향에서 택배로 부친 김치 맛을 보며 끝내준다고 즐거워하며 싸움의 힘겨움을 털어 내고 있다. 고향의 맛이 그립듯 가족도 그리울 것이다.  

  참여하는 조합원 수가 점점 줄어들고 손에 잡힐 듯 보였던 희망이 희미해져 보일 때도 있다. 사측에서는 자신들이 망쳐 버린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밀린 임금과 퇴직금 지급도 하지 않고 있다. 외부에서 보면 이슈가 될 만한 비정규직 투쟁도 아니고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만한 사건도 별로 없어 보인다. 

  조합원들 얼굴을 보면 좋아할 일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얼굴들이 밝다. 그런데 항상 웃는 얼굴의 선배님이 보여 준 핸드폰 문자에는 돈이 하나도 없어 애들 교복 살 돈도 없으니까 당장 다 때려치우고 내려오라는 내용의 문자로 가득했다.  

  이 싸움이 언제쯤 끝이 날까? 10년 전 파업에 처음 참가했을 때 3~4일 정도면 되겠지 하고 짐을 꾸린 적이 있었다. 그랬던 게 지금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는 3~4년 안에만 끝나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투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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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열 / <작은책> 기자
 

  “저는 해고 2호, 여긴 해고 3호에요”

  좋은 일도 아닌데 밝게 웃으시며 자기소개를 하신다. 이분들은 청주시립노인전문병원에서 요양보호사(보통 간병인이라고 한다)를 하다 '짤렸다'는 권옥자(54세), 이선애(62세) 씨다. 어르신들 돌보는 게 업이라 그런가, 부드러운 인상과 말투 때문에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거리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청주노동인권센터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권옥자(왼쪽), 이선애(오른쪽) 씨 / 사진_안건모


  “노조 가입한 사람들은 재계약이 안 돼서 해고됐어요. 1년마다 근로계약을 하는 데 저(권옥자 씨)는 8월 6일자로, 여기 언니(이선애 씨)는 8월 16일자로 해고됐어요. 노조 탈퇴 못하겠다고 했거든요”

  2008년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됐다. 요양보호사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서, 여기저기 요양보호사 자격 취득 광고가 넘쳐 났다. 우리 엄마도 나에게 요양보호사 자격 따 놓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학원 광고마다 ‘주부 취업, 학력 불문, 퇴직 후 대비’ 등등 솔깃한 문구들로 적혀 있어 현재 자격증을 딴 사람이 100만 명이나 될 정도다. 권옥자 씨와 이선애 씨도 그중에 한 명. 하지만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은 25만 명 정도다. 왜 그럴까?

  “24시간 격일제로 일을 하는 데 세금 빼면 월급이 110만 원 밖에 안 돼요. 한 사람이 8명의 환자를 돌봐야 합니다. 쉬는 시간도 전혀 없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은 이 일 절대 못 해요. 젊은 애기 엄마가 일하는 걸 봤는데 밤새 애들이 울면서 전화하고, 애기 엄마도 울었어요. 그리고 하루 만에 그만뒀어요. 자격증 따 놓고 병원에 실습 왔다가 전부 다 떨어져 나갑니다. 하지만 저희같이 없는 사람들, 꼭 돈 벌어 가족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구요.”

  청주시에서 설립한 청주시립노인전문병원은 2009년에 개원해 병원 운영을 민간의료재단인 효성병원에 위탁했다. 그리고 효성병원은 요양보호사 인력을 하영테크에 또 위탁했다. 하지만 일자리 구하는 사람들이 그걸 알 리가 없다. 그이들은 파출부라도 나가야 하지만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게 필요했고, 작은 요양원보다 시립병원이 처우가 나을 것 같아 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청에 하청을 주니 당연히 중간에서 인건비 떼먹는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영테크는 1인당 월급을 157만 원으로 효성병원에 요청하고 실제 127만 원(세전)을 줬다. 시급으로 따지면 3천 원이 안 된다. 그리고 효성병원과 하영테크는 이윤을 내기 위해 60명을 투입해야 하는 인력에 24명으로 운영했다. 그러니 요양보호사 한 명당 환자 5~8명을 맡게 되고, 당연히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환자들은 대부분 치매, 반신불수, 석션(기도의 분비물을 제거하기 위해 흡입기를 대고 있는 환자), 화상을 입은 어르신들입니다. 기저귀를 채워야 하는 사람들이 4~5명 되지요. 그런데 그중 꼭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려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더 힘듭니다. 우리가 병실을 비우고 그분을 부축해서 볼일 보는 것을 다 도와줘야 하거든요. 옷을 다 입혀서 다시 침대에 눕히고 나면 다른 분들 기저귀를 갈아야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분이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고, 어떤 분은 아들네 집에 가야겠다며 일어나고. 그러다 넘어지면 엉덩뼈가 부서져요. 그래서 항상 간병인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붙어서 수발 들어야 하는 환자가 8명이다. 환자들에게서 잠깐만 눈을 뗐다간 사고가 난다. 그러니 5분도 쉴 새가 없다. 게다가 수시로 욕창이 생기지 않게 체위(자세를 바꾸어 주는 것)도 해 줘야 한다. 덩치가 큰 노인들에겐 온 힘을 다 써야 움직일 수 있다. 또 남성 노인들을 돌보면서 성추행도 발생하는데, 그럴 때는 모르는 척 교육받은 대로 대처해야 한다. 밥 먹는 시간에도 혼자 못 먹는 환자 때문에 밥을 먹여 주면서 자신도 같이 먹는다. 그러다 기침해서 가래가 밥에 들어가면 밥맛이 없어지고, 또 여기저기서 간병인을 불러 대니 도저히 맘 편히 먹을 수가 없다.

  그렇게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못 쉬어가며 일하다 ‘요양보호사 권리찾기 캠페인’을 추진하던 공공노조 충북지역 의료연대와 청주노동인권센터를 만나게 되었다. 최저임금이 얼마인지, 근로기준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2010년 8월에 노조에 가입했다. 임금체불진정서도 냈다. 그러자 하영테크는 근로계약서를 법에 맞게 위조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서명을 편법으로 받았다.

  “입사하고 3개월이 지나서야 근로계약서에 싸인했어요. 24시간 힘들게 일하고 퇴근 시간에 통근 버스 기다리는데 ‘선생님, 잠깐만요~. 싸인하고 가세요’ 하더라구요. 내용을 보려고 하면 ‘안 봐도 돼요. 그냥 싸인하세요’라고 해서 너무 피곤하고 바쁘니 별 생각 없이 싸인을 했죠. 게다가 우리는 나이가 많아서 돋보기가 없으면 글자가 안 보여요.”

  정말 얄밉다. 소송 때문에 나중에서야 근로계약서를 확인해 보니 월급 금액을 맞추려고 4시간마다 1시간씩 무급 휴게 시간을 주었다고 계산을 했고,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는 유급 휴게 시간을 주었다고 법적으로 하자가 없게 거짓 작성이 되어 있었다. 만약 근로계약서대로 요양보호사들이 쉬었다면 그 많은 환자는 누가 돌봤단 말인가? 권옥자 씨와 이선애 씨는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영테크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원청인 효성병원과 회의가 있을 때나 새로운 인력이 투입될 때만 관리팀장이 왔다. 모든 업무 지시는 효성병원 간호사들의 지시를 받았다. 하영테크 팀장은 노조가 생긴 뒤 노조 가입한 사람들은 모두 자르겠다고 협박해서 처음 37명이었던 조합원 수가 지금은 10명만 남게 되었다. 노조에 남은 사람들은 생계 위협에도 왜 탈퇴하지 않았을까 물어봤다.

비 오는 날 집회 중인 해고 간병인들 / 사진 제공_충북지역의료연대

  “생계가 걱정되지만 분한 생각이 더 들어요. 부당한 일이 있어서 호소하겠다는 데 왜 해고하나요? 노인요양보호서비스는 어느 가정이든지 다 접할 서비스입니다. 사람들이 간병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라요. 다른 간병사들도 이런 일을 당하면 안 됩니다. 용역업체 안 쓰고 체제만 바로 잡히면 일하는 우리도 조금 더 편하고, 우리가 안정되면 환자에게도 더 나은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노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환자가 저희를 인정해 줄 때 보람을 느낍니다. 자기 가족도 거부하고 우리 손길만을 기다리고, 고맙다고 할 때. 슬그머니 쵸코파이를 손에 쥐어 주고, 추운 날 출근해서 오면 춥지~ 하며 손을 잡아 주고 표졍이 밝아질 때. 말을 못해서 ‘아다다~’로 표현하는 분이 있는데 제가 한 달하고 다른 병실로 넘어가니까 그 다음부터 캔(식사 대용으로 먹는 환자식)을 안 드세요. 그러면서 보호자에게 이 사람 아니면 안된다고 ‘아아아~’ 하고 의사 표현을 하면 정말 보람을 느끼고 '얼른 다시 와서 저 환자분 돌봐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 얘기를 듣는데 가슴이 찡해진다. 우리 부모님도 늙어 곧 아프실 날이 오겠지. 우리 자식들도 부모님을 노인 병원에 모셔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때 우리 부모님을 돌봐 주실 그런 분들, 철없는 자식들보다 더 기댈 수 있는 그런 분들. 우리 부모님이 편해지려면 환자당 요양보호사 수가 훨씬 많아져야 하고, 충분한 휴식 시간이 보장되고, ‘목숨유지비’ 이상의 월급이 지급되어야 한다.

  “이 일은 우리가 잘할 수 있어요. 아무 희생자 없이 우리 요구가 들어져서 우리를 기다리는 환자에게 돌아가고 싶어요. 당당한 1급 국가자격증을 딴 사람들입니다. 노동자로 인정받아야 해요.”

  젊어서도 고생했는데 늙어서도 고생하고 있는 우리 시대 엄마들이 생각난다. 늙어서도 일할 수밖에 없는 우리 엄마들, 좀 편하게 일하게 해 주이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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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건모 / <작은책> 발행인


  삼화고속노동조합이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총 26개 노선 광역버스 328대 가운데 20개 노선 242대의 운행을, 날마다 2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중단하는 부분 파업을 하고 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삼화고속버스 회사를 가려고 합정동 버스정류장을 갔다. 노동조합이 있는 곳을 가려면 1601번을 타야 한다. 정류장에 있는 전광판을 보니 55분 뒤에 차가 온다고 나온다. 파업 때문인가? 나중에 알았지만 준법운행 때문이었다. 신호를 지키고 난폭 운전을 하지 않는 준법운행만 해도 이렇게 운행 시간 간격이 뜨게 되는 게 버스 운행 현실이다.

  노동조합 사무실엔 최용환 총무부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용환 씨는 삼화고속에서 18년 동안 근무하다 작년에 사표를 썼다. 삼화고속에서 오랫동안 투쟁해 왔는데 회사가 인천에서 대구까지 발령을 낸데다 투쟁 중에 아내의 지병이 악화되어 사표를 썼단다. 먼저 삼화고속 조합원들이 파업을 하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물었다. 최용환 총무부장은 한 치 망설임 없이 말한다.

  “월급이죠. 월급이 너무 적으니까.”

  도대체 월급이 얼마나 될까. 광역버스 시급은 4,727원이다. 고속 부문 5,010원보다 터무니없이 적다(서울시내버스 시급은 1년 근무자 8,027원, 8년 근무자 8,703원이다). 인천광역버스는 월 시급 대비 만근 일수에 따라 임금이 정해지는데 연봉으로 하면 광역은 한 달 13일(26일) 만근에 1일 19시간씩 247시간이지만 연 2,800만 원, 고속은 연3,000여만 원이다. 다른 사업장보다 턱없이 적다. 광역버스 부분은 지난 10년 동안 임금이 동결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급은 해마다 올라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루는 교통신문에서 전화가 왔어요. 기자가 하는 말이 ‘회사가 준 자료를 보니 시급은 계속 올라갔다, 그런데 왜 임금이 동결됐다고 하냐?’는 거예요. 제가 한번 오라고 했어요. 회사 쪽만 찾아가서 취재하지 말고 노조도 취재해 달라고 얘기했죠. 맞아요. 시급은 올라갔어요. 근데 왜 깎였을까요? 상여금에서 잘라먹은 거예요.”

  광역버스는 2005년도에 상여금이 임금 총액의 670퍼센트였다. 하지만 시급이 올라가면서 상여금이 계속 깎였다. 임금 총액의 670퍼센트가 아니라 기본급에 야간 수당만으로 상여금이 지급됐다. 2008년도에는 야간 수당을 시급대비 30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삭감했다. 복잡하게 계산할 것 없다. 임금이 10만 원 올라가면 상여금에서 10만원 깎였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10년 동안 시급은 올라갔어도 받는 임금이 그대로였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근무 시간이다.

  “지난 10년 동안 법정근로시간이 주 48시간에서 44시간, 40시간으로 줄었는데 우리 광역버스 근무 시간은 오히려 계속 늘어났어요."

  광역버스 기사들은 서울시내버스처럼 1일 2교대제가 아니라 격일제이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제도다. ‘괜찮네’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정을 들어 보면 이렇다.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와 5시에 일을 시작한다. 하루 종일 일하고 서울역에서 막차가 새벽 1시에 인천으로 출발한다. 그러면 종점에 빨리 들어와 봐야 새벽 2시나 2시 반이다. 집에 들어가면 세 시가 넘어 네 시쯤에 잠을 잘 수 있다. 그러면 그 다음날 쉬는 날은 오전 내내 잠을 자야 된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에 일하러 가야 하니 일찍 자야 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물론 심야수당을 받기는 하지만 23시 이후는 8천 원, 24시 이후는 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심야 수당 안 받고 심야 근무 2시간에서 3시간 안 나가는 게 오히려 낫다.

  사실 고속버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임금이 10년째 동결이다. 아이엠에프 터지고 나서 임금이 그대로인 셈이란다.

  다섯 시가 되니 나대진 지회장이 들어왔다. 나대진 씨는 지난 1월 6일 조합 선거에서 지회장으로 당선된 사람이다. 3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한 나대진 지회장은 지난 5월 18일에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한국노총 자동차연맹 산하였던 삼화고속버스 노조를 민주노총 민주버스 소속으로 상급단체를 변경했다. 아마 서울 경기 지역에서 최초로 조직 형태 변경을 하지 않았나싶다.

  지회가 민주버스로 조직 형태를 변경한 뒤 회사는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대진 지회장이 이끄는 삼화고속지회는 지난 6월 8일 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신청을 했다. 6월 22일 조정 중지가 결정됐다. 그리고 6월 25일, 26일에 시한부 경고 파업을 했다.

삼화고속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대진 씨

  “7월 7일이 급여 지급일이에요. 사측은 ‘파업해서 수익금이 줄어서 급여를 못 주겠다’ 공고를 붙였어요. 7월 8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죠. 인천시에서 중재를 서서 7월 10일 기본합의서를 작성해서 파업을 푼 거죠. 그런데 회사가 합의서 이행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7월 22일부터 심야운행 거부 투쟁에 돌입했죠.”

  기본합의서 내용은 ‘노사 간에 자율적으로 교섭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재 삼화고속 노조는 겉으로 보면 모두 세 개다. 올해 초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변경한 현 지회와 전 ‘어용조합’이 한국노총을 상급단체로 해 새로 설립한 노조, 또 일부 조합원이 만든 제3노조이다. 사측은 ‘관련법에 따라 3개 노조가 교섭 창구를 단일화하기 전엔 교섭하기 곤란하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교섭대표권을 놓고 노노 갈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대진 지회장 말은 달랐다.

  “현재까지 지회에서 탈퇴한 조합원이 없어요. 2노조는 노동청에 28명으로 신고돼 있고, 3노조는 7명인데 우리 조합에서 탈퇴하지 않고 이중 가입을 하고 있어요. 사측의 회유와 압력에 의해서 복수노조를 만들었다고 보는데, 그래도 전체 조합원의 10분의 1이 돼야 공동교섭권이 있잖아요. 그런데 결국 10분의 1을 확보하지 못한 거예요.”

  결국 교섭대표권이 단일화되지 않아서 교섭을 하지 않는다는 건 회사의 핑계일 뿐이라는 말이다.

  나대진 지회장한테 월급에 대해 다시 물었다. 지회장은 오늘 인천시에 갖고 간 간담회 자료를 보여 준다. 그 자료를 보니 인천을 운행하는 시내버스보다 급여가 적다.

  “전국 6대도시 중에서 인천이 임금이 제일 낮은 수준입니다. 삼화고속 광역버스는 인천시내버스 급여보다 월 50만 원 정도 더 적어요. 고속부분은 금호고속보다 연봉 천만 원 정도가 적습니다. 조합원들이 임금과 근로 조건에 대해 한이 맺힌 거죠.”

  정태수 씨가 들어왔다. 정태수 씨는 지금 준법운행 투쟁 중이다.

  “힘들어요. 어용하고 싸워야죠, 사측하고 투쟁해야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굴엔 웃음기가 떠 있다. 힘들어도 보람이 있어 보였다.

  “어젠 앞차하고 1시간 정도 간격이 벌어져서 다녔어요. 여유 있게 다니니까 스트레스도 안 받고……. 요즘에는 노선에서 사고도 없어요.”

  옆에 있던 나대진 지회장이 거들었다.

  “한 달에 사고가 평균 100건, 하루에 세 건은 나는 거죠.”

  처음 파업하는 날 어땠을까. 1987년 서울시내버스 기사들이 파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관리자들이 기사들한테 차를 운행하지 않으면 해고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기사들은 하나둘씩 그 협박에 굴복해 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집행부에서도 불안했어요. 45년 동안 한 번도 파업한 적 없었으니까. 쟁의 행위 조합원 찬반 투표에서 85.3퍼센트가 파업 찬성했어요. 파업 투쟁에 돌입하니까 조합원들이 열정적으로 호응하고 참여하는 거예요. 집행부도 놀랬죠. 간부 파업할 때는 ‘즉시 운행 중지하고 파업 투쟁에 돌입합니다’ 하고 문자를 발송했더니 영업소가 대전인데 울산에다 차 세워 놓고 인천 농성장으로 상경한 거예요. 확대간부 80퍼센트가 참여했어요. 45년 동안 한이 맺힌 거죠. 워낙 근로 조건이 안 좋으니까. 바닥까지 온 거예요. 한이 맺혀 있었던 거예요.”

  나대진 지회장은 그동안 조합원들이 얼마나 쌓인 게 많았겠냐며 ‘한이 맺혀 있었던 거예요’를 자꾸 되풀이한다.

  그동안 사측은 ‘튀는’ 조합원들에게 탄압을 가했다. 어용조합도 나대진 지회장을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거나 제명까지 했다.

  “지노위에 부당 징계로 민사 소송 넣어서 해결하고……. 시내버스 어용조합의 기본이잖아요. 버스 해 보셔서 알잖아요. 배차시간에 쫓겨 밥 먹다 말고 나가라면 나갔잖아요. 거의 서서 김치 쪼가리하고 먹고 나갔잖아요. 배차 담당이 기사에게 ‘내일 일 나왓! 안 나와?’ 노예 부리듯 했는데 이젠 ‘일 좀 해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요. 불과 두 달 만에 상황이 바뀐 거죠. 의식이 바뀐 거예요. 파업은 학습이잖아요.”

  이번 파업이 그냥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나대진 씨는 1990년대부터 민주버스노조협의회를 다녔고, 99년 7월 1일에 삼화고속에 입사한 뒤 2005년부터 ‘참노동조합 만들기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민주버스지회로 변경 후 규약도 민주적으로 모두 바꿔 버리고 조합원 교육도 많이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몰랐으니까. 처음에 대의원대회할 때 벽에 가사를 쓴 종이를 붙여 놓고 했죠. 조합원 교육 때는 하종강 선생님이 강연하는데 조합원이 눈물 흘리고 그랬어요. 그게 다 파업 동력이 된 거예요.”

  이렇게 되기까지는 나대진 지회장을 비롯한 현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희생이 컸다. 활동을 하느라 잠도 못 자고, 일을 많이 하지 못해 월급이 적을 수밖에 없다. 아내와 아이들이 얼마나 걱정할까.

  “그래도 요즘엔 집에서 응원해요. 아내가 ‘힘내세요. 당신에게는 우리 가족이 있잖아요.’ 애들한테도 ‘아빠가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지 몰랐어요. 아빠가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문자가 와요.”

  나대진 지회장은 “삼화고속 사정이 다른 버스사업장하고 똑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사실 지방 버스 현실이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전북고속버스도 지금까지 파업을 이어 가고 있다. 전국의 버스노동자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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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화/ <작은책> 편집부


  “용역 깡패가 공장에도 있어요? 난 철거촌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출판사 일꾼들과 저녁을 먹다가 이번에 취재한 곳의 이야기를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놀랄 수도 있겠다. 요즘은 파업 현장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용역 깡패들이 동원되지만, 뉴스에는 용역 깡패가 아니라 ‘경비 업체 직원’이라고 나오니까. 사실 나도 취재를 하면서 놀라긴 했다. 왜냐하면 이번에 찾아간 일터가 ‘풀무원’이었기 때문이다.

  풀무원은 회사 이미지가 꽤 좋다. 친환경, 유기농 식품 브랜드라서 그렇기도 하고, 원혜영 의원과 그이의 아버지인 원경선 목사의 이름값 때문이기도 하다. 원경선 목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기농을 시작했다는 ‘착한 농부’고, 아버지가 키운 농산물을 팔기 위해서 1981년에 풀무원을 만든 이가 운동권 출신으로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원혜영 의원이다. 그런 ‘착한’ 회사에서 ‘못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9월 6일 강원도 춘천에 있는 풀무원 춘천공장을 찾았다. 두부를 만드는 이 공장에는 백 명 남짓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노동조합을 만든 것은 2000년 8월, 전체 노동자 130여 명 가운데 104명이 조합원이었다. 사무직 20여 명을 빼면 생산직은 거의 다 가입한 셈이다.

  “57퍼센트가 비정규직이었고 체불 임금이 2,800만 원 정도 됐어요. 잔업 시키고 돈 안 주고, 특근 시키고 돈 안 주고, 예비군 훈련 간 날 월급 빼 버리고 한 돈이에요. 그래서 노조 설립하기 직전에 체불 임금을 다 받아 냈고, 노조 설립하고 첫 단체 협약에서 비정규직들을 다 정규직으로 바꿨어요.”

  수처리 일을 하다 지금은 노조 지회장을 맡고 있는 박엄선 씨의 이야기다. 평소에도 일주일에 사나흘은 잔업을 하는데, 성수기인 7, 8월이면 다음 날 새벽 대여섯 시까지 일하거나 집에도 못 가서 탈의장에서 잠깐 눈만 붙이고 다시 일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점심 먹을 시간도 없다. 뛰어 가서 밥을 먹고 얼른 교대해 줘야 하기 때문에 내내 소화제를 달고 살아야 했다. 단순 반복 작업을 하며 무거운 물건을 계속 들다 보니 손가락, 어깨, 목, 허리가 남아나지를 않았다. 또 성희롱 사건도 비일비재했고……,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그런데 노조가 만들어지자마자 체불 임금과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고 거침없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하니까, 노동자들은 ‘아, 이래도 되는 거였구나. 이게 우리 권리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됐다. 생산직 대부분이 노조에 가입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동자들의 호응이 높아지자 회사의 탄압도 시작됐다. 2001년에는 아웃소싱을 추진하다 노조에서 반대 농성을 시작하자 슬그머니 ‘없던 얘기’로 만들어 버렸고, 2002년 임단협 때는 용역 깡패를 등장시켰다. 한 50명 되는 용역 깡패들이 석 달 가까이 공장 안에 상주했다. 그자들은 하루 종일 제식 훈련을 하고 공장을 뱅글뱅글 돌면서 대부분이 여성인 조합원들한테 겁을 줬다. 다행히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그때부터 회사는 단협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4년 노조는 단협을 더 보완하려고 했다. 11개의 개정안을 올렸는데 회사는 한국경영자총협회에 있던 ‘노조 깨기 기술자’를 앞세워 54개 개악안을 들고 나왔다. 고용과 노조 활동 부분에서는 건드리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30번이 넘게 교섭을 했지만 결국 합의를 못했고, 춘천공장 노동자들은 의령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에 들어갔다.

  “그때 원혜영이 나선 거죠. 의령공장으로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대요.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힘을 못 쓰니까 의령 쪽부터 정리한 거예요. 그래서 의령공장이 파업을 접고 현장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이렇게 하면 둘 다 죽는다’고 말렸지만 별 수 없었어요. 저희도 한 40일 더 버티다가 163일로 파업을 끝냈죠.”

  이듬해인 2005년 3월, 회사는 부서 재배치를 하면서 노조 임원들을 엉뚱한 자리로 보내 버렸다. 면 공장 라인에 있던 사람을 기계 고치는 곳으로 보내거나, 물류에 있던 사람을 두부 공장 라인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노조 임원들을 재배치할 때는 노조와 미리 합의한다는 단협 조항까지 무시한 거였다. 재배치를 받아들이지 않자, 회사는 노조의 수석부위원장이던 송석호 씨와 부위원장이던 이창규 씨를 해고해 버렸다.

  부당 해고는 이어졌다. 노조 위원장이던 박엄선 씨는 2007년에 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석 달 동안 교육을 받았다. 교육이 끝나면 원래 일하던 수처리 일을 하기로 돼 있었는데, 복귀를 며칠 앞두고 회사에서는 아예 그 자리를 없애 버리고 생산 부서로 보냈다. 박엄선 씨는 원래의 부서로 계속 출근하며 대화를 요구했고, 회사는 계속 대화를 피하다가 석 달 뒤에 해고를 통보했다.

  하지만 상식과 약속을 저버린 해고의 부당성은 법정에서도 밝혀졌다. 지난해 11월, 법원의 부당 해고 판결에 따라 박엄선 씨가 복직했다. 그리고 올해 7월 송석호 씨와 이창규 씨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부당 해고라 판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회사는 두 사람을 아직 복직시키지 않고 다시 9월 17일에 있을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해고된 지는 이미 햇수로 6년째다.

  그동안 일반 조합원들이 겪은 괴롭힘도 상당했다. 관리자들이 비조합원들만 데리고 회식을 하거나 야유회를 가는 것은 어찌 보면 좀 사소한 축에 든다. 가장 큰 괴로움은 경제적인 압박이었다.

  “승진에서 누락되죠, 조합원들한테는 잔업도 안 시킵니다. 기본급이 최저 임금 수준입니다. 제가 여기 15년 있었는데 이제 130만 원 받아요. 잔업 해야 먹고살아요. 근데 웃긴 건 물류 쪽은 조합원이라도 잔업을 시켜요. 그래야 물량이 나가니까. 완전 엿장수 마음대로에요.”

  2006년 회사는 노동자들한테 잔업 동의서를 내밀었다. 그런데 시간과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회사는 제 마음대로 잔업을 시키고 나중에 노동자들이 항의할 때 “그때 니들이 동의서 썼잖아” 하고 나올 것이 뻔했다. 조합원들은 선택권을 달라고 하면서 동의서를 쓰지 않았고, 그 뒤로 회사는 조합원들에게 잔업을 시키지 않았다.

  몇 년 동안 그렇게 해고와 회유, 경제적인 압박을 당하면서 100여 명이던 조합원 수는 지금 30여 명으로 줄었다. 안타깝지만 이해는 된다. 이런저런 수당을 받아도 맞벌이를 안 하면 먹고살기 어려울 텐데, 5년째 잔업도 못하고 크고 작은 차별을 당하면서 버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남아 있는 조합원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었죠. 제가 1급 되는 데 10년 걸렸어요. 이건 노동 탄압을 넘어서 형벌이라니까요. 돈으로 죽이겠다는 거죠. 그래도 노조가 생겼으니까 제가 여기 10년을 다녔지, 안 그랬으면 그렇게 못했어요. 저는 일용직으로 들어왔거든요. 한 달에 한 번씩 계약 연장했는데 노조 생기면서 정규직 되고 정말 좋았어요.”

  두유(콩물) 만드는 일을 하면서 노조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인숙 씨의 이야기다. 사무국장이 된 지는 2년쯤 됐는데, 앞서서 노조 임원들이 줄줄이 해고되는 것을 봤지만 부당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두렵지 않단다. 조합원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씩 ‘하루 파업’을 하며 서울에 있는 풀무원 본사에 가서 해고자 복직과 노조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를 한다. 지난 8월에는 풀무원의 계열사가 외주 운영을 하고 있는 대구 동산병원 영양실 노동자들과 함께 집회를 열기도 했다.

  뉴스를 보면 노동자들은 흡사 싸움꾼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평화를 가장 바라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다. 싸움이 끝나기를 바라는 쪽은 원래 ‘때리는 쪽’이 아니라 ‘맞는 쪽’ 아닌가. 하지만 이들이 바라는 평화는 단순히 ‘싸우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복종이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는 노동자와 회사가 각자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풀무원 누리집에 가 보니 풀무원 정신이라는 꼭지에 “이웃 사랑과 생명 존중”이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풀무원이 지켜야 할 ‘제자리’는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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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용준 한 명만도 못하냐!(2009년 2월호)
오도엽의 일터 탐방

오도엽/ <작은책> 객원기자

‘여성 크로커다일’을 아십니까? 악어 그림의 상표가 붙은 여성 캐주얼. 이 옷을 만들어 파는 ‘(주)형지어패럴’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날도 바시니’라는 남성 브랜드를 만들어 한국 최고 연기자 배용준을 전속 모델로 계약한 회사이기도 합니다. 이 회사의 최병오 회장은 패션 업계의 신화로 불리기도 합니다. 나이 서른에 동대문에서 허름한 옷 가게를 열어 사업을 시작했고, 25년 만에 여성 캐주얼 시장의 선두에 섰습니다. 샤트렌, 올리비아 허슬러, 라젤로……. 새로 시장에 선보인 브랜드마다 소비자의 호응이 좋았습니다. 2007년도 우리나라 매출 순위 821위, 순이익은 481위를 차지한 알짜 기업입니다. 전해 대비 매출 성장률이 30퍼센트가 넘더군요. 2008년에는 매출이 5천억을 넘어섰습니다. 2011년에는 매출 1조 원 규모의 종합 패션 전문 기업이 되겠다고 야심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에 최병오 회장이 한 모임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을 들은 한 참석자는 ‘이론으로만 떠드는 강사와 달리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배려, 그리고 나눔 경영의 철학을 지닌 분’으로 ‘존경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인간 존중, 나눔 경영.’ 얼마나 우리 사회가 바라는 경영자의 모습입니까.

존경해야 할 최병오 회장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한 기사가 지난해 12월 9일 언론에 나왔습니다. 한 경제 전문 언론에는 사업 수익의 일부를 교육 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한 후원금으로 쓰겠다면서 국제 구호 단체 유니세프와 나눔 파트너십을 체결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같은 날, 이 아름다운 행사장 바깥 풍경을 다룬 인터넷 언론의 기사도 있네요. 앗,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지어패럴 직원이 피켓을 들고, ‘5년 동안 야근하고 일요일 특근한 대가가 해고라니……’ 하면서 울부짖고 있지 않습니까. 설마, 존경스러운 경영자가 있는 회사에서…….

무엇인가 사연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형지어패럴을 찾아갔습니다. 올해 쉰셋인 이재석 씨는 형지어패럴 샘플실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앉으라고 하더니 취재수첩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쏟아 냅니다.


△ 오도엽 기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이재석 씨 ⓒ 작은책


“제가 이 분야에서 30년 넘게 일했습니다. 본래 형지어패럴에는 샘플실이 없었어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알았던 분이 이곳에서 개발실 부서장으로 있었어요. 저보고 샘플실을 만들려고 하는데 와서 일을 해 달라는 거예요. 5년 전 일이죠. 샘플실은 매장에 내놓을 상품을 미리 만드는 일을 해요. 여기서 만든 샘플 옷을 가지고 품평회를 거쳐 제품을 선정하죠. 옷 패턴이 결정되면 재단도 하고 미싱도 하고 다 해요. 이 작업이 혼자서는 힘들거든요. 보통 둘이 짝이 되어 일을 하는데, 저는 아내와 함께 일했어요. 한 사람 월급만 받으면서 둘이 일을 시작한 거죠.”

이재석 씨는 얼마나 가슴에 맺힌 이야기가 많은지 지난 5년의 이야기를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계속 이어갑니다.

“하루 평균 열두 시간씩 회사에서 살며 날마다 잔업을 했어요. 토요일 격주 휴무가 된 지도 한 1년밖에 안 돼요. 명절 휴무 전에는 대체근무도 하고, 공휴일에도 특근을 했어요. 이제껏 근로자의 날에 쉬어 본 적도 없어요. 품평회가 끝나면 보통 샘플실은 잠깐 여유가 있는데, 저희는 그 다음날로 다른 브랜드 샘플 작업을 해야 했어요. 일요일에는 대리점을 방문해 상품 실태 조사를 해요. 제주도만 빼놓고 전국을 다 돌아다녀요. 저는 자가용이 없어 버스나 전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요. 약도 하나 가지고 구석구석에 있는 대리점을 찾아다니려고 하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대리점을 못 찾으면 전화를 해서 길을 물어보면 되는데 회사에서 그걸 못하게 해요. 대리점에 찾아간다는 정보가 새면 안 된다고요.”

대리점을 방문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이재석 씨 목소리가 커집니다.

“이 계통, 봉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많이 배우지 못해 학벌이 낮아요. 경력은 수십 년 되지만 직책은 사원이죠. 대리점을 찾아가 명함을 내밀면 점주들이 깔보기도 합니다. 찾아가면 무척 싫어해요. 본사에서 조사를 나오니 좋아할 리가 없죠. 옷 팔기 바쁜데 왜 찾아오냐, 내가 회장하고 친군데 니가 뭐냐, 뭐 이런 모욕을 받기도 해요. 샘플실 업무도 아닌데, 쉬는 날 나가서 욕만 얻어먹는 셈이죠. 내가 나이가 오십인데……(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소처럼 일만 했어요.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참고 일만 했어요.”

최병오 회장이 샘플실에 들어오면 이재석 부부에게 미안해 하더랍니다. 두 사람이 일하는데 제대로 임금을 챙겨 주지 못한 걸 안타까워 하며 말을 건넸고요. 이재석 씨 부부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았던지, 앞으로 샘플실은 부부 사원으로 채용하라고 했습니다. 회사가 새 브랜드를 출시하며 샘플실 직원을 늘여 갈 때 실제로 부부를 함께 채용했습니다.

지난해에 이재석 씨 부부는 모범 사원으로 뽑혀 사이판으로 해외 연수를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출국에 필요한 서류도 다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1월 12일, 점심을 먹고 작업실에 들어오니 12월 12일 자 해고 통지서가 놓여 있는 것 아닙니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해고를 받아들이죠. 해마다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고, 거액을 쏟아부어 우리나라 최고 연기자를 전속 모델로 쓰면서, 5년 동안 야간에 특근해 가며 죽도록 일한 저희들을 해고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우수 사원은 뭐 하러 선정합니까? 일을 못한 것도, 회사가 무너질 위기도 아닌데 말입니다. 지난해 가을에 주거래 은행이 바뀌면서 새로 선정된 은행이 무료로 경영 컨설팅인가 뭔가를 했어요. 불필요한 인력이 많다고, 한 100여 명인가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나. 그때부터 이유도 모르고 해고 통지가 날아오기 시작했어요. 500명이던 직원이 지금은 400명 정도예요. 불필요한 존재였다면 왜 야근에 특근은 시킵니까? 이렇게 회사 키운 게 누군데요.”

△ 이재석 씨 차영미 씨 부부와 한수자 씨 이광년 씨 부부. 갑작스런 해고 통보에 웃음을 잃었다. ⓒ 작은책


잘나가던 회사를 컨설팅 한답시고 며칠 오가던 사람의 한마디에 백여 명의 직원이 밥줄을 잃었습니다. 꽥 소리 한 번 못하고 나간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해고 통보를 받은 샘플실 직원 여섯 명만이 회사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모두 부부 사원입니다. 여성들은 십대부터 이 계통에서 일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수십 년 동안 쌓은 경력이, 배운 사람들의 세치 혀에 ‘불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재석 씨는 받아들일 수 없어 거대한 기업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선 그래요.‘어디 해 봐라. 오륙 년 걸릴 텐데 법적으로 가 봐라. 버틸 수 있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알고 있어요. 큰 회사에 맞서는 게 어렵다는 거 알아요. 이제 와서 슬그머니 돈 좀 줄 테니 나가서 아웃소싱 받아 일하래요. 저희는 다른 거 필요 없다. 첫째도 둘째도 복직이다. 정말 회사가 어렵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미련 없이 나갈 수 있지만 지금 이거는 아니다. 이랬어요. 제 말이 틀렸나요? 이해가 됩니까?”

틀린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직원을 해고하면서, 수십 명의 기자를 호텔로 불러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사업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최병오 회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강연장에서 ‘인간 존중과 배려’를 강조하시던 최병오 회장은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나눔 경영’ 기업 이미지만 좋게 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쇼’를 하신 건가요? 최병오 회장님, 혹 실수였다면 하루 빨리 해고자를 복직시켜 주십시오.

이재석 씨의 부인 차영미 씨는 해고 통보를 받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눈물만 펑펑 흘렸답니다. 하나뿐인 아들은 군 입대 자원 신청을 했습니다. 한 명의 입이라도 줄여야 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벌다가 한날한시에 쫓겨났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함께 샘플실에서 일하던 한수자, 이광년 부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수자 씨는 손이 덜덜덜 떨려 일이 안 되더랍니다. 해고를 당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자신이 해고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머리가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다가 가끔 현실로 돌아오면 미쳐 버릴 것 같답니다. 정신병자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답니다.

새 옷을 만들 때마다 어떻게 하면 입는 사람이 더욱 편하고 예쁠까만을 생각하며 장인 정신으로 일했던 형지어패럴 샘플실의 세 쌍의 부부. 평생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이들은 오십이 넘어 처음으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여성 크로커다일’이라는 유명 브랜드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형지어패럴이라는 큰 회사에 있으면 수입은 적더라도 좀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한순간에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배용준을 전속 모델로 계약했다는 사실을 앞 다퉈 다루던 언론들,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사랑의 손길을 대대적으로 떠벌리던 기자님들, 여기 한겨울 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겁니까?

더 큰 추위가 노동자를 덮칠까, 무척 두려운 2009년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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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병원, 노동자는 파리 목숨
오도엽의 일터 탐방

오도엽/ <작은책> 객원기자

추석을 앞둔 9월 10일 강남고속터미널 너머에 있는 강남성모병원을 찾았다. 터미널과 병원을 잇는 육교에 올라서자 웅장한 글씨가 눈을 가로막는다. ‘2009년 5월, 생명을 존중하는 첨단 병원이 개원합니다.’ 이천억 원을 들여 짓는다는 가톨릭 대학교 서울성모병원.

강남성모병원에서 간호사와 호흡을 맞춰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파견업체를 통해서 고용된 사람들이다. 2년을 계약하고 들어왔고, 계약 기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가야 한다. 계약을 그리하고 일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해고에 아무 문제가 없다. 2006년 10월 1일에 파견업체에 고용되어 2년을 강남성모병원에서 일했으니 2008년 9월 30일에는 계약대로 집에 가서 푹 쉬면 그만이다. 법을 기계처럼 적용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법이란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 그것도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일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파리 목숨으로 여기면 안 된다.

홍석. 그는 서른일곱이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홍석 씨는 5년 전 자신이 다니던 성당을 통해 강남성모병원에 취직을 했다. 이때는 강남성모병원과 근로계약을 맺었다. 홍석 씨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돈보다는 환자들에게 봉사도 하고 사랑을 나눈다는 마음으로 고된 일도 흥겹게 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2006년 9월 28일, 낡아서 잘 굴러가지도 않는 침대를 힘겹게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으며 침대에 누운 환자를 검사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호출기가 울렸다.

“파견업체로 가라는 거예요. 더는 병원에서 직접 고용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딱 3일 남겨 두고 파견업체로 가든지 아니면 출근을 하지 말든지 선택을 하라는 거예요. 정말 얼떨결에 파견업체로 간 거예요. 별 수 없잖아요. 파견업체로 가지 않으면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판인데, 그것도 3일 남겨 놓고 통보를 하는데 어쩌겠어요.”


△ 9월 9일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항의집회를 하고 있는 조합원들. <비정규직 철폐하라>를 외치고 있다. ⓒ 작은책


홍석 씨만이 아니었다. 간호 보조 업무는 2002년 이전에는 모두 정규직이 담당하던 일이었다. 이 업무를 비정규직으로 고용 형태를 바꾸더니 2006년에는 파견업체로 떠민 것이다. 노동자들은 선택을 할 생각은커녕 시간의 여유도 가질 수 없었다. 시장에서 파는 채소와 다를 바 없다. 천 원에 팔리다가 해질녘에는 오백 원에 막판 떨이 신세가 되어도 그냥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팔려 나가면 그만인 존재다.

올해 서른둘인 이미경 씨도 마찬가지다. 다니던 회사가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하자 이미경 씨는 새 직장을 찾아 나섰다. 그때 강남성모병원에서 사람을 뽑고 있었다. 3교대로 일을 한다지만 하루 8시간 근무니 해 볼 만했다. 물론 강남성모병원과 근로계약서를 썼다. 이리 큰 병원이면 안정되게 일을 할 수 있으니라 생각했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장난이 아니다. 말이 8시간 근무지, 잠시도 숨 돌릴 겨를이 없다. 꼬박 8시간을 잔걸음으로 쉴 새 없이 뛰면서 근무를 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겨우 짬을 내서 식당으로 가 식판에 밥을 푸는 순간 호출기가 울린다. 호출기가 울리면 허기졌던 뱃속과는 달리 입맛이 싹 사라진다. 식판의 밥은 고스란히 잔반통으로 들어가기가 일쑤다. 제 시간에 근무가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늘 30분에서 한 시간은 잔업을 해야 한다. 수당도 없는데 말이다.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다가 퇴근시간이라고 나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자신이 담당한 환자의 일은 교대 근무자가 오더라도 자신이 끝내는 것이 마음이 놓인다. 보조 업무라 하지만 사람을, 그것도 아픈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이고, 생명을 다루는 일이 아닌가.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된다. 하루 8시간 넘게 병원 복도와 층계를 오르내리며 뛰어다녔으니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그리고 몸이 아픈 환자를 상대하다 보니 그 긴장은 육체의 피로를 몇 곱으로 가중시킨다.


△ 9월 9일 강남성모병원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조합원들. ⓒ 작은책


물론 이미경 씨도 홍석 씨가 있던 자리에 2년 전에 함께 있었다.

“너무 억울했어요. 찍소리도 못하고 파견업체로 팔려 간 거잖아요. 배추 시래기처럼 버려진 느낌이었어요. 그날 황당하게 파견업체로 버려진 사람들이 터미널 앞 호프집에 모여서 술을 한잔했어요. 울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러면서 다짐을 했죠. 이건 아니다. 다음에는 이렇게 당하지 말자.”

그리고 두 해가 지나고 9월이 왔다. 홍석 씨와 이미경 씨와 배추 시래기가 된 간호 보조 업무를 하던 파견사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한참을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했다.

홍석 씨와 이미경 씨에게, 강남성모병원 간호 보조 업무 파견 직원들에게 “2년 계약하고 들어왔으면서 이제 와서 못 나가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하며 손가락질할 사람 있습니까? 이들이 파견업체에 고용된 직원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강남성모병원에 고용된 사람입니까? 이들이 파견업체에서 일했습니까, 강남성모병원에서 일했습니까? 이들이 찍소리 하지 않고 나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가라사대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나무를 만들고 꽃을 만들었듯이, 강남성모병원 가라사대 간호 보조 업무가 정규직이 되라 하고 비정규직이 되라 하고 파견직이 되라 하면, 그 가라사대에 따라 고용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가톨릭의 정신입니까? 그게 생명 존중입니까? 수천억을 들여 짓는 새 병원 담벼락에 자랑스럽게 써 둔 ‘생명을 존중하는 첨단 병원’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인가요? 새 병원에는 70평짜리 초호화 병실을 만든다고 하는데요, 기업 CEO들이 입원을 해서도 회의를 할 수 있는 초특급 병실을 갖춘다고 하는데요, 가톨릭에서는 돈 있는 사람만 받아들이고, 돈 없는 이들은 2년마다 해고를 묵묵히 감수하며 일하는 세상이 옳은가요?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이들이 강남성모병원 간호부 소속 사원으로 되어있던데, 간호부의 부장님 과장님들이 수녀님이시던데, 수녀님! 당신 부서의 사원들이 시장판 배추 시래기 취급을 받고 있는데 침묵하거나 동조하거나 심지어 앞장서시는 것이 당신이 믿는 신앙에 따른 행동이신가요?

그리고 추석이 지났다. 강남성모병원에 비정규노동자들이 천막을 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천막이 세워진 몇 시간 뒤 강남성모병원이 용역업체 직원들을 동원해 천막을 철거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천막을 철거하는 과정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들려왔다.


△ 농성장 천막에 내걸린 현수막. ⓒ 작은책


9월 30일.

홍석 씨와 이미경 씨의 강남성모병원 마지막 근무하는 날 찾아갔다. 스무날 전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이미경 씨의 눈이 탱탱 부어 있었다. 웃을 때마다 콧잔등에 주름을 가득 지으며 까르르 자지러지던 이미경 씨는 보이지 않았다. 분홍 근무복 위에는 가을 하늘 빛깔을 가득 담은 조끼를 입었다. 결국 조끼를 입고 마는 구나. 칙칙한 청색도 뜨겁게 달궈진 붉은색도 아닌 가을 하늘빛 조끼라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설마 저 푸른 가을 하늘이 이들의 소박한 소망을 저버리겠는가 하는 위안을 했다.

“언제부터 로비에서 연좌 농성을 들어가셨어요?”

“연좌 농성 아니에요. 아침부터 병원 돌며 저희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 로비에서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왜 저희가 이런지 호소를 하는데 무릎이 팍 꺾여 이 자리에 주저앉은 거예요. 그동안 설움이 복받쳐 올라 주저앉아 있는 거예요.”

인사팀 직원들이 다가와 설움에 복받쳐 주저앉은 이들에게 나가라며 협박을 하였고, 병원의 연락을 받은 서초경찰서는 정보과 형사를 보내 연행을 하겠다고 통보를 한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 노동자들은 연행을 하든 말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투석을 받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병원을 온다는, 자신도 아이엠에프 때 정리해고를 당했다는 아저씨 한 분은 꼭 강남성모병원에서 계속 일을 하라며 요구르트를 건넨다. 휠체어에 링거를 달고 온 한 환자 분은 바나나 우유와 빵을 담은 하얀 비닐봉지 2개를 건네고 사라진다. 비닐봉지를 열던 박정화 조합원이 갑자기 굵은 눈물을 쏟아 내며 병원 로비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갔더니 손에 자그마한 쪽지 하나를 보여준다. 방금 전 우유를 건넨 환자가 봉지 안에 담아둔 쪽지다.

“힘내세요.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하며 응원합니다.^^”


△ 어느 환자가 투쟁 중인 조합원에게 건넨 음료수와 <힘내세요.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하며 응원합니다.>가 적힌 쪽지를 보고 있다. ⓒ 작은책


이미경 씨 병동에 있던 분이라고 한다. 환자들은 안다. 이들이 얼마나 병원에서 소중한 사람인지를. 아픈 자신들에게 이들이 보여 준 헌신과 애정을 환자들은 안다. 함께 일한 간호사들도 알고, 병원 청소를 하는 용역 아줌마들도 알고, 주차 관리를 하는 용역 아저씨들도 안다. 파견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이들이 강남성모병원 직원임을 알고, 반드시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 정말 환자들의 생명 존중만큼 노동자의 생명도 존중받아야 함을 세상은 알고 있다.

약물로도 수술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 2009년 광우병, 멜라민과 함께 온 사회를 엄습하고 있다. 비정규직,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사회가 무섭다. 가톨릭에서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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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 콜텍, 하이텍 노동자들 송전탑 위 고공농성
대법원 판결마저 무시한 정리해고와 위장폐업에 맞선 목숨을 건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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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만 볼트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위, 그저 바라보기에도 아찔한 그 곳에서 두 지회장들은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 작은책


지난 10월 15일,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의 콜텍지회와 서울지부 하이텍알씨디코리아지회의 두 지회장들이 서울 양화대교 옆 한강시민공원의 송전탑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기타를 만드는 회사인 콜트악기와 그 자회사인 콜텍의 박영호 사장은 노동자들에게는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을 강요하고, 자신은 해마다 15~42억 원의 배당금을 챙겨왔다. 현재 확인된 그의 재산만 1,191억 원. 그는 우리나라 부자순위 120위까지 올라 있다. 콜트악기는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연속으로 흑자를 내서, 누적흑자가 191억 원에 달하는 회사다. 콜텍도 1996년부터 2007년까지 기록한 누적흑자가 878억 원에 이른다. 그런데도 회사는 1996년보다 세 배 이상 매출액이 증가한 2006년과 2007년, ‘주문량이 없어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며 노동자들을 협박했다. 결국 박영호 사장은 ‘날조된 경영상의 위기’를 빌미로 2007년 충남 계룡의 콜텍 공장을 폐업하였고, 이어 인천의 콜트 공장마저 위장폐업하여 국내의 생산물량을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해외 공장으로 빼돌리고 있다.




△ 노동자들이 만든 선전 현수막에 콜트-콜텍의 박영호 사장과 하이텍알씨디코리아의 박천서 사장의 얼굴이 보인다. 노동자들의 눈물로 저들은 저 웃음을 샀겠지. ⓒ 작은책


무선조종기를 만드는 회사인 하이텍알씨디코리아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된 2002년부터 노동부와 법원 등으로부터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시정명령, 시정권고, 유죄판결, 해고자 복직판결 등을 받아왔다. 지난 2008년 1월, 2003년에 부당해고된 조합원 5인에 대한 대법원의 복직 판결이 나자, 회사는 법인분리를 통해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고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자본금 5천만 원짜리 분할회사로 옮기지 않으면 조합원들을 모두 정리해고 하겠다는 것이었다. 13인의 조합원 전원이 2004년에 ‘우울증을 수반한 만성 적응장애’라는 판정을 받은 산재환자들인 하이텍알씨디코리아의 노동자들은 안 해본 것 없는 8년간의 싸움 끝에 고공농성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피땀으로 만들던 기타 위에 쓰인 <위장폐업 분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일터로 돌아가는 것이다. ⓒ 작은책


두 지회장이 올라가 있는 송전탑에는 지금도 15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고 있다. 게다가 다음 주부터는 단식까지 시작할 예정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싸워야만 언론의 주목을 받고, 사회의 관심을 받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10년, 20년씩 겨우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받고 일하며 수백억 원대의 흑자를 회사에 안겨주고도, 하루아침에 서러운 해고자의 신분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 그들 앞에서 과연 누가 "근로기준법이 근로자를 과보호하고 있다."는 따위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양화대교 위로 보일 듯 말 듯 펄럭거리는 ‘생존권 쟁취’ 플래카드를 보며, 누구나 자신이 흘린 땀의 가치만큼 인정받고 행복해질 수 있는 날을 간절히 소망해 본다.

△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시민이 둔치를 따라 메달아 둔 선전물을 읽어보고 있다. 죄 없이 죄인이 된 당신 이웃들의 이야기를 보며 무엇을 느끼실지. ⓒ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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