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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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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9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여보, 한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태윤호/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 쌍용양회지부 사무국장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분이라면 쌍용양회 시멘트회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단일 공장 중 세계 최대 규모 쌍용양회공업()은 시멘트업계 1위로 연간 300~400만 톤의 시멘트를 미국, 칠레, 말레이시아 등 전 세계 8곳에 수출하는 회사다.

2007년 스물일곱 살이던 나는 그해 결혼하고 겨울에 쌍용동해중기()에 입사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 지인분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나 역시 그랬다. 청년실업률이 점점 높아지는 시기에 젊은 나이에 지방에서 좋은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동해는 평생직장으로 삼을 만한 일터가 별로 없다. 지방에서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젊은 친구들은 서울이나 경기권, 대도시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쌍용양회에 들어간 나는 내가 자란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제2의 인생, 나의 새 둥지를 꾸려 갔다. 어느덧 내 나이 서른여덟. 결혼하고 입사한 지 12년 차. 토끼 같은 두 딸의 아빠가 되었다. 정말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IMF 이후 쌍용양회는 쌍용중기 부서를 포함한 기계, 정비, 유통 등 여러 개의 부서를 도급으로 전환시켰다. 이 내용을 입사 면접에서 알게 되었는데, 회사가 다시 안정화되면 합병될 거라고 기대하였고 다른 타 회사의 대우를 봤을 때 비교적 안정적이라 생각했다. 처음 원청 직원과 월급 차이는 78퍼센트 수준이었고 성과급 및 복리후생도 쌍용양회의 지침 그대로 적용되었다. 분사되었을 때 양회 직원으로 일하다가 넘어온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원청에서도 신경을 많이 써 주는 것 같았다.

입사 후 한 4년쯤 지났을 때 바지사장이 갑자기 원청에서 퇴직 통보가 왔다고 했다. 왜 바지사장인가 하면 연 35~40억 원의 경상 도급을 받아 오는 회사의 사장 자리에 주주총회도 거치지 않고 원청이 보내는 사람을 앉혀 처우, 복지나 직원들의 급여 및 발령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쌍용양회 북평공장 공장장(부장이사)이 중기 바지사장으로 온다고 했다. 좀 얼떨떨했다. 그전에도 이상한 점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회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얼마 후 중기 반장이 도급계약에도 없는 A광산에서 비 오는 날 원청 관리자의 요청으로 작업자 두 명과 중장비를 가지고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낙석 사고로 억울하게 운명하셨다. 우린 원청의 작업 지시를 당연시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 달이 흐르고 쌍용양회에 계시다 넘어오신 퇴직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분들은 쌍용양회의 입사 동기들과 퇴직금 차이가 크다는 걸 알고 소송을 했다. 한평생을 다 바치고 억울하게 회사의 고통을 공동 분담 하였는데도 그들과 평등한 대우는커녕 물질적으로 보상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송은 1심에서 지게 된다. 원청에서 도급으로 넘어올 때 아무런 서명계약서 없이 구두로만 이어져 넘어온 것이 실수였다.

그 후폭풍이 결국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닥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또 바지사장은 원청에 의해 잘려 나가고 그보다 더한 바지사장(북평공장 공장장)이 발령을 받아서 왔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한번은 원청 관리자가 자신들의 작업 지시를 묵살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하여 바지사장이 동료에게 징계를 내렸다. 그분은 한 달 무급과 출입 정지 공문을 받고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사장, 밤에는 대리운전을 해야만 했다.

또 외부 운송업체 기사가, 우리가 하역을 제때 안 해 준다고 쌍용양회에 본사에 투서를 보내 본사에서 감사조사원이 내려와서 그 시간대 근무였던 장비 운전원을 불러 감사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말에 원청 노조가 임금 협상을 하여 임금이 인상되면 우리도 똑같이 올려 줬는데, 도급이라고 끊기고 소급분도 안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다.

겨울에는 동해시의 도로 일대, 공장 주변, 시내, 공장 안, 원청 사원아파트 앞까지 요청 오는 제설 작업은 다 했고 여름에는 원청 직원의 피서를 위한 천막과 의자 운반까지 했다. 동해시의 초··고등학교 운동장과 바닷가 모래사장 평탄 작업 등 쌍용양회의 중장비 관련 대외 업무는 우리가 도맡아 했다. 억울한 건, 우리가 알면서도 모든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에서 발급한 건설기계 조종면허를 8개씩 가지고 있으며, 실제 그 면허에 해당하는 운전을 할 수 있는 기능직 사원들이다.

정말 역겹고 구역질이 난다. 이 악질 같은 놈들은 조금 더 벌어먹으려고 직원들 임금 줄여 지네 배 불리고, 원청에 잘 보여 어떡하면 안 잘릴까 온통 그 생각뿐인가 보다. 누군가 그랬다. 아인슈타인은 머리를 열어 연구해야 하는데 저것들은 머리를 깨 봐야 알 것 같다고.

우리는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자본에 맞서기 위해 SNS를 뒤져 우리랑 유사한 회사를 찾아보았다. 바로 옆 동네 동양시멘트(현 삼표시멘트)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승리한 사례를 보았다. 동해삼척지역에는 노동운동에 앞장서 그 중심에 서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많았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지난 110일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쌍용양회지부를 결성하고 자본의 반대편에 섰다. 노조가 결성되기 전 가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걱정했다. 어느 날 집사람이 내가 몇 날 며칠 고민하느라 잠 못 들고 밤잠을 설치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이 그렇게 억울하고 직원들의 한마음 한뜻이면 한 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이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다들 이런 마음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이런 일들이 생기면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나 위로가 그렇게 따뜻하고 위대할 순 없을 것 같다.

▲ 쌍용양회 비정규직 노동자 태윤호 씨.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지금 우리는 쌍용양회의 불법파견 및 위장도급,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투쟁 중이다. 노동운동의 선전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고 투쟁은 싸움이 아니라 노동자의 몸부림이며 파업은 노동자가 노동의 일손을 놓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 이 글을 보는 전국의 동지들에게 우리의 진실이 전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다 한마음 한뜻으로 후회 없이 투쟁하길 바란다.

▲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하는 쌍용양회지부와 강원지역 노동자들.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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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9월호

일터 이야기

 

바다의 삼성뉴텍이 그러면 쓰나

정인열/ <작은책> 기자

 

 

해남지역 해안가부터 노화도, 청산도, 보길도, 신안의 이름 없는 섬까지. 이곳 어촌 지역에는 전복 양식장 같은 수산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이 많다. 어민들이 소유한 작은 어선에는 집게가 달린 크레인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어민들은 이 크레인으로 전복 먹이인 다시마를 집어 양식장으로 투하하거나 무거운 가두리를 이동한다.

해남, 완도에 떠 있는 배에 달린 크레인들, 그거 다 뉴텍 거라 보시면 돼요.”

▲ 전복관리기 모형도. 사진제공_뉴텍분회

해남군청 앞 뉴텍 분회(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 전남중소사업장연대노조 뉴텍분회) 천막농성장에서 김영식 씨가 말했다. 뉴텍 노동자들은 70일이 넘게 파업 중이다. 김 씨는 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 조직국장으로 뉴텍 투쟁에 결합하고 있다.

▲ 해남 옥천농공단에 있는 (주)뉴텍 전경. 작은책(정인열)

뉴텍은 1992년 광주정밀로 시작, 2004년 기업을 확장해 뉴텍을 설립하고 2005년 옥천농공단지에 입주했다. 수산물 양식장에 필요한 다목적 인양기와 전복 관리기를 개발해 관련 특허 기술들을 보유했고, 기술·경영혁신형 중소기업 인증을 받아 정부로부터 지원도 받는 유망 중소기업이다.

“‘바다의 삼성이라고 어떤 분들은 말해요.”

111년 만에 유례 없던 폭염이 찾아왔던 올여름, 노동자 7명은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파업투쟁을 했다. 조합원은 12명이지만, 이중 병역특례 복무자 5명은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위험이 있어 참여하지 못했다.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체 직원 38명 중 실제 현장노동자는 23~24. 이 중 병역특례자와 외국인노동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표이사의 가족이거나 친인척이라 파업에서 빠졌다. 파업 노동자들은 금속 자재를 가공, 조립, 용접하고 도색해 크레인을 완제품으로 만든 후 양식장 어선에 설치하고 A/S를 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왜 이 뜨거운 여름에 파업을 선택했을까. 노조는 노동강도에 비해 낮은 임금, 불합리한 임금체계, 일방적인 상여금 삭감을 이유로 들었다.

12년 차 조립 업무를 하는 김광진 씨(44)가 받는 월급은 식대를 포함해 213만 원. 여기에 매일 1시간씩 발생하는 연장근로수당을 포함하면 244만 원인데, 각종 세금을 떼고 나면 실수령액은 약 204만 원뿐이다. A/S 업무를 하는 입사 8년 차 김승규 씨(38)가 받는 월급도 실수령액 179만 원으로 적기는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은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을 일하는데, 이들은 임금체계도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입사 2년 차인 윤정균 씨(47)의 임금은 8년 차 김승규 씨와 10만 원도 차이 나지 않는다. 윤 씨는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책정한 임금인데, 괜히 연차 높은 동료들에게 미안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들은 조립식 건물에서 에어컨도 없이 폭염과 싸우며 일해 왔다. 절단, 용접 등 위험에 노출된 환경에서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한다. 김광진 씨가 설명한다.

쇠가 녹잖아요. 그게 1600도예요. 앉아서 용접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 회사는 안전 장비가 없어요. 그냥 앞치마예요. 용접, 그라인더(조립) 해 보면 사람이 인이 배기잖아요. 그라인더도 안 하던 사람이 하면 그 다음 날 손이 덜덜덜 떨려요. 육체적 노동이 사무직의 10배는 더 될걸요? 용접도 마찬가지고, 선반(금속 가공)은 엄청 정밀하게 쇠를 깎는데 100분의 1콤마까지 맞춰야 하는 작업을 해요. 집중력과 정밀함을 요하는 기술이 필요한 거죠.”

A/S 업무를 하는 김승규 씨는 아침 회의 후 830분에 고객이 있는 섬으로 출발한다. 그는 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속 100킬로미터로 운전한다. 1건이라도 더 하기 위해서다.

노화도에서만 하루 4, 5건이에요. 일주일에 4번은 점심밥을 못 먹어요. 1건이라도 더 하는 게 점심밥 먹는 것보다 나아요. 한여름에 기관방(엔진룸) 들어가서 허리도 못 펴고 작업을 하는데 쇳덩어리에 몸이 닿으면 살이 익는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거예요.”

하지만 노동자들은 회사가 자신들의 노고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느꼈다. 김승규 씨가 전무이사를 찾아가 업무량에 비해 임금이 너무 적다고 호소했을 때 돌아온 답변은 황당했다.

“‘야근도 안 하면서 돈이 적다고 하면 쓰나?’면서 야근을 하라는 식이었어요. 땀 흘려 일하고 회사 들어왔는데 그 상태에서 야근을 어떻게 해요? 절대 못해요.”

사실상 임금이 동결되어 온 상황에서 2017년 추석부터 상여금이 줄었다. 노동자들은 사측으로부터 사전 고지나 설명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동안 상여금 200퍼센트를 설과 추석, 여름휴가 세 번에 나누어 받았는데, 추석에 70퍼센트 받던 상여금이 50퍼센트만 지급됐다. 경영상의 이유였다는 걸 안 것은 쟁의가 벌어지자 사측이 내놓은 자료를 접한 뒤였다. 뉴텍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매출 213798만 원에서 709983만 원으로, 영업이익은 5262만 원에서 67281만 원으로 4년 연속 성장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201712, 노동자들은 일방적 상여금 삭감과 임금 문제에 대해 회사에 어떤 방식으로 요청할 것인지 논의했다. 이전에도 직원 대표로 일부 노동자들이 수차례 회사에 임금인상을 요구했지만 회사의 태도는 바뀌지 않아 불만이 많이 쌓인 터였다.

“‘그냥 노조로 갑시다했어요.”

그리고 지난 124, 노조가 설립됐다. 노조는 임금단체협상 및 노조 인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설 상여금을 20퍼센트만 지급했다. 실무 교섭에서 노조는 상여금 400퍼센트 지급을 제시했으나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회사의 입장을 받아들여 임금인상도 보류하고 상여금도 40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기존 수준으로 양보했다. , 일방적 상여금 삭감을 막기 위해 상여금 200퍼센트 지급을 문서에 명시하도록 요구했다. 그러자 회사는 지금까지 준 것은 상여금이 아니라 성과급이었다고 주장하며 문서화를 거부했다. 성과급은 회사 임의대로 주는 비정기적인 돈이다. 뉴텍이 취업 사이트에 올린 입사 공고를 보면 성과급이 아닌 상여금 200퍼센트로 명시되어 있다.

▲ 온라인 구인구직 공고 사이트에 올라온 뉴텍 구인 공고.


봉투에 현금으로 받았어요. 우리는 입사할 때부터 10년을 200퍼센트로 받았는데. 노동청에 임금 체불 진정을 넣었지만 근거 자료가 없어서 하루아침에 성과급이라고 판단이 났죠.”

꿈쩍도 않는 사측의 태도에 교섭은 결렬됐고 결국 지난 64일 노조는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이 있는 옥천농공단지에서 농성하다 사태가 길어지자 지자체가 나서서 중재할 것을 요구하며 지난 86일부터는 해남군청 앞에도 천막농성장을 설치했다.

▲ 해남군청 앞 뉴텍분회 천막 농성장. 작은책(정인열)

회사가 해남군수와의 면담에도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해남 지역사회는 뉴텍 노동자들을 위해 행동에 나서고 있다. 뉴텍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가 나서 대책위를 꾸렸고 뉴텍 제품을 이용하는 고객들도 응원에 나섰다. 해남 전복협회장을 비롯해 한국수산업경영인 화산지회, 송호리·갈두리·화산면·현산면·송지면 어촌계의 지지 방문이 이어졌고, 이들은 직접 회사로 가서 항의도 했다.

고객분들이 너희들 대변해서 말할란다하시면서 회사로 가서 기계가 좋아서 쓴 게 아니라 직원들이 좋아서, 직원들이 잘해서 이 기계를 쓴 거다라고 해 주셨어요.”

응원해 주는 시민들을 보면서 뉴텍 노동자들은 크게 힘을 얻는다. 이번 파업으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것도 알았다. 상여금마저 성과급이라고 주장하고 삭감한 뉴텍을 상대로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파업뿐이었다

▲ 추성화,김영식 민주노총전남지역본부 조직국장,김승규,윤정균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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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7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에서 온 소식


간호사는 천사로 인증받기 싫습니다

홍슬아/ 경희의료원 간호사

 

 

저는 경희의료원 호흡기, 신장내과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최근에는 안과, 비뇨기과에서 근무한 13년차 간호사로 현재 노동조합에서 근무한 지 2개월이 되었습니다. 10년을 넘게 데이, 이브닝, 나이트라는 불규칙한 생활 패턴을 유지해 왔던지라 교대 근무를 벗어난 지 2개월이 된 지금도 잠이 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교대 근무를 하는 대부분의 간호사가 경미하게 혹은 수면제를 복용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수면장애를 앓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직종들의 특수성을 제가 다 알지 못하지만 일주일 동안 데이, 이브닝, 나이트라는 3교대 스케줄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직종은 간호사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호 업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밤에 환자들이 자면 너네도 좀 잘 수 있지 않니? 밤에는 앉아서 일하니 좀 낫지 않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간호사들은 나이트라는 야간 근무제 때문에 현장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간호사의 나이트 근무는 당직의 개념이 아닙니다. 주간에 이뤄지는 모든 업무가 간호사의 나이트에도 동일하게 이뤄집니다. 나이트 근무 때는 간호사 수를 줄여서 간호사 1인이 보는 환자의 수가 늘어납니다. 한 예로 일부 병동은 야간에 간호사 2명으로 근무를 돌립니다. 그렇게 되면 간호사 1명당 20명 이상의 환자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트 근무 동안 간호사들은 시간에 쫓기듯 일을 합니다. 의사 처방 확인, 잘못된 처방들을 걸러서 처방 낸 의사 및 당직의에게 재확인하기, 하루 동안 시행 예정인 검사 및 수술 준비하기, 하루 동안 사용할 수액 준비하기, 경구약 챙기기, 퇴원 예정인 환자 정리하기, 밤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신환(새로운 환자) 받기, 이브닝 때 수술 갔다 리턴 오는 환자 수술 후 처치하기, 어두운 곳에서 작은 불빛만 비추고 수차례 다니는 라운딩, 의사가 병동에 상주하지 않는 야간에 발생하는 CPR(심폐소생술) 등등 대기하는 의미의 당직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나이트 근무로 심지어 병실 물품 정리와 청소까지 해야 상황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인력을 뺀 채 근무하는 밤번 간호사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신입 때 새벽 5시가 다가오는 게 두려웠습니다. 5시부터는 병실을 돌며 활력 징후 측정하기, 섭취량·배설량 체크하기, 가래 흡인하기, 무균적 소변검체 받기, 주사 처치, 모든 환자들이 깨면서 파도같이 몰려오는 컴플레인을 해결해야 하는데 5시에 처치를 나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을 미처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간호사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희 병원의 식대는 2500원입니다. 13년간 근무하면서 한 달 동안 식대가 25천 원을 넘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간호사들이 병동에서 나와서부터 밥 먹고 다시 병동에 올라가고 양치까지 걸리는 시간은 20분입니다. 어느 날은 밥을 먹고, 아니 마시고 있는 제게 조무사가 말하더군요. 밥을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 같다며 같이 식사를 하면 그 속도에 맞추려다 보니 본인이 체할 것 같다고요.

병동에 아직 해결 못해 밀려 있는 일들과 앞으로 쏟아져 올 신환과 수술 리턴 나올 환자들, 2차 식사 당번을 식사하러 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있는 우리 간호사들은 밥을 편하고 여유롭게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간호사들은 직장에서 다른 직종에는 보장되어 있는 인간생활의 기본 요소 중 하나인 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이팅게일 선언을 시작으로 다니기 시작한 학교에서 희생정신과 소명 의식을 배우고 현장으로 나왔습니다. 간호사는 당연히 힘들 것이며 아프고 약한 환자들 앞에서는 참아 내라고 배웠습니다. 학교 때 해야 할 공부나 레포트가 남아 있으면 학교에 남아서 하듯이, 일을 다 끝내지 못하면 당연하게 병원에 남아서 일을 하는 거라고 알고, 공짜 노동인 줄도 모르고 공짜 노동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남들처럼 공부해서는 잘 못 따라가겠다 싶으면 예습하듯이, 당연히 일찍 출근해서 일을 미리 시작했습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와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무직과는 다르게 간호사 업무는 인계 전에 환자를 파악하고 오더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최소 30~40분 전에서 2시간까지 일찍 와서 일을 합니다.

부서장들 또한 그건 누가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일 못해서 하는 자율적인 업무니 시간 외 수당 신청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일찍 나와서 환자를 파악하는 경우 출근 펀치는 출근 시간 30분 전에 찍으라고까지 요청하는 실정입니다. 병원과 부서장들은 별 보고 출근하고 별 보고 퇴근하는 간호사들에게 공짜 노동을 시키는 것에 너무 익숙하고 당당합니다. 개인이 일을 못해 오버타임을 하는 것이라는 묵시적인 압력과 당연한 인식, 시간 외 근무를 신청하면 시간 내에 근무를 왜 못했는지 이해 못하는 부서장들의 공개적인 또는 비공개적인 압박, 근무 전에도 근무 후에도 이어지는 카톡 업무와 쉬는 날도 상관없이 이어지는 이른바 교육이라는 이름의 워크숍, 친절 교육, 병동 컨퍼런스 참여, 매년마다 QI(의료 질 향상, quality improvement), 논문, CS(고객서비스, customer service) 등을 간호사들에게 제출하도록 부서장과 병원은 강요합니다. QI, 논문, CS, 컨퍼런스는 근무시간에 이루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근무 외 시간인 오프 때 간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매년 빠지지 않고 하고 있는 공짜 노동의 결과물들입니다.

공짜 노동과 장시간 노동이 극에 달하는 시기는 바로 의료기관 평가인증 기간입니다. 간호사는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사직을 생각하고 실제로 많은 간호사들이 사직하고 있습니다. 데이 업무를 마친 간호사나 오프번 간호사는 본인의 병동에서 청소를 하는 미화원도 되어야 하고 2명씩 짝을 이룬 사람들끼리 수시로 만나서 인증 내용을 철자 하나 안 틀리고 대답할 있도록 외우거나 서로 질문을 던지고 인증내용을 외우지 않았으면 기한 내에 외우도록 하는 감시자가 되어야 합니다. 간호사가 대답을 못해서 인증 평가에 문제가 생기면 그 간호사는 병원의 대역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의료기관 평가인증은 병원 현장의 간호사에게만 해당되는 인증이며 간호사만 죽이는 제도입니다. 간호사들만 괴롭혀 인증에 통과해서 병원이 득을 얻게 되는, 인증에 뒷짐만 지고 있던 타 직종들에게 그 공이 돌아가는 제도입니다.

현재 현장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은 일한 만큼 대우도 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힘든 교대근무를 하면서 공짜 노동과 장시간의 노동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저는 간호사 업무를 할 때 제가 제일 힘든 줄 알았습니다. 노동조합에 와서 여러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전국에 있는 모든 간호사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그게 열악한지도 모르고 묵묵히 본인들의 주어진 업무를 하느라 몸도 돌보지 않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고, 간호사들의 대변인이 되어 열악한 근무 환경과 처우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간호사들의 교대근무로 인한 업무 과중과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며, 이는 간호사의 인력 확충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모든 간호사들이 간호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간호사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간호사를 위한 좋은 제도와 정책이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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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7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탐방_ 한국잡월드

 

직접고용 원하는 사람은 양심이 없다?


어린이·청소년 진로 길잡이 역할 할 한국잡월드,

상시·핵심업무 맡은 체험관 비정규직 강사 직접고용은 외면


정인열/ <작은책> 기자

 

 

죄송해요. 저희는 비정규직이라 명함도 없어요.”

지난 64일 청와대 앞. 이곳에서 피켓 시위 중이던 한국잡월드 직업 체험강사(이하 체험강사)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명함을 건네자 이재희 강사가 던진 말이었다.

한국잡월드(이하 잡월드)2012어린이와 청소년의 건전한 직업관 형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설립된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잡월드는 국내외 최대 규모의 종합직업체험관으로, 청소년체험관은 42개 체험실에 66개 직업을, 어린이체험관은 41개 체험실을 갖추고 54개 직업을 소개하고 있다. 얼마 전 관람객 500만 명을 돌파했는데 이 중 어린이체험관과 청소년체험관 관람객만 472만 명으로, 잡월드의 핵심은 바로 체험관이다.

▲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한국잡월드 내 어린이체험관 ⓒ작은책(정인열)


그런데 아이들의 체험을 이끄는 강사 275명은 모두 1년마다 근로계약서를 쓰는 위탁업체 직원이다. 잡월드가 체험관 운영을 민간기업에 위탁했기 때문이다. 잡월드는 2년마다 업체를 바꾸었고, 이 때문에 체험관 노동자들은 업무는 그대로 하면서 소속 업체만 4차례 바뀌었다. 상시 지속 업무임에도 2년 이상 계약 시에는 해당 위탁업체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현재 이들의 소속은 서울랜드.

“2년 후면 떠날 회사니 명함 요구도 안 하게 됐죠. 진정한 우리 회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어린이들이 체험강사의 안내에 따라 피자게게 체험을 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매일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을 상대로 수업을 하는 체험강사들은 수업 외에도 체험실 기기 점검청소비품 관리까지 도맡아 한다직접 체험관을 관람해 보니 이들이 없다면 체험관 운영은 전면 불가능할 정도로 체험강사에게 의존하는 업무는 95퍼센트 이상으로 보였다.

청소년체험관의 경우 1시간짜리 체험을 하루 5회 진행하는데수업 사이사이 20분간의 준비 및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하루 종일 서서 일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앉아서 쉬고 싶지만 화장실만 겨우 다녀오는 실정이다메이크업숍·화장품 연구소 안미경 강사가 말했다.

수업 마치고 나서 체험실 다시 세팅하고, 다음 수업 10분 전에 스탠바이하고 5분 전에는 학생들 입장을 받으니까 쉬는 시간이 부족해요. 그러니 하지정맥류나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 피자가게 체험강사들이 다음 수업준비를 하고 있다(수업 전·후 뒷정리와 준비를 해야하므로 쉬는 시간은 사실상 없다) ⓒ작은책(정인열)


대부분의 강사들은 한국잡월드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입사 지원을 했다청소년체험단 패션디자인실 이효진 강사는 해외 유명 화장품 브랜드 직원이었다안미경 강사 역시 대학에서 관련 전공을 하고 직업상담 자격을 취득했다각자 자신만의 전문성도 살리면서 공공기관에서 진로 교육을 하고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일을 시작했다그런데 잡월드와는 업무 연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위탁업체가 있었고 업체도 2년마다 바뀌었다가장 크게 실망한 점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임금이었다.

월급명세서를 보고 기가 막혔어요금액이 어이가 없어서요.”

최저임금 수준이었다법정 최저시급보다 100원에서 200원 많았고 최저임금에 맞춰 임금이 올라갔다기본급에 식대 84,000원과 휴일 근무 시 발생하는 약간의 수당이 전부였다복리후생도 없었다체험강사들의 평균 월급은 식대와 휴일 근무(월 4회 기준수당을 포함해도 약 182만 원이마저도 입사 1년차나 6년차나 똑같다반면 잡월드 전체 인력 중 약 13퍼센트를 차지하는 정규직의 평균 월급은 약 456만 원(잡월드가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에 보고한 자료).

이렇게 체험강사들이 최저임금에 고용불안 및 소속감도 없는 환경에 처하다 보니 회의감이 들고 의욕도 저하되는 것은 사실이다특히 청소년체험관 수술실 이재희 강사는 낮아지는 자존감을 가장 힘든 점으로 꼽았다.

처음에는 정말 사명감을 갖고 아이들의 좋은 미래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의지로 시작했어요진로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도 많이 했고요그런데 직접고용돼서 일하는 형태도 아니고콘텐츠를 내가 주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자꾸 자존감이 떨어졌어요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가장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아이들을 대할 때면 흔들리던 마음이 다시 사라진다고 체험강사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내가 왜 힘들게 이 짓을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학생들 보면 다시 잘해 주고 싶고반갑고요반복이죠하하하.”

▲ 어린이체험관 이진형 강사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2017년 7월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정부는 체험강사처럼 상시·지속적 업무는 정규직 전환을 하도록 했다이 소식을 들은 체험강사들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직접고용 또는 자회사 설립도 포함되어 있었다잡월드는 직접고용 방식을 제외한 채 자회사 설립을 결정했다이를 위해 가이드라인에 따라 노·사 및 전문가 컨설팅의 협의회(이하 노사전협의회)를 꾸리고 의결 절차를 밟았다그런데 체험강사들은 실제 내용면에서 당사자를 배제한 형식적인 협의와 의결 절차였다고 주장한다.

“10여 차례 정규직 전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1, 2, 3차 회의에 저희는 끼지도 못했고 자기들끼리 하다가 결정적으로 우리가 필요할 때만 끼워 준 거예요.”

협의회에는 전문가 컨설팅업체로 G경영컨설팅 회사가 들어왔다그리고 올 3월 초 체험강사 단체 교육에 G업체 관계자가 등장해 이런 말을 했다.

“‘직접고용 원하는 사람은 양심이 없어요여러분들 말고도 밖에서 취업 준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 정규직 들어오려고 하는데 여러분들 때문에 못하고 있다면 사회적 공감 얻으시겠어요?’ 하고 말하는데 굉장히 모멸감을 느꼈어요저 사람이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직접고용은 안 된다고 해우리를 무시하네?”

체험강사들은 직접고용이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나 잡월드 사측 인사와 전문가 컨설팅 인사들은 수적 우세로 또 다른 간접고용 형태인 자회사 설립을 추진하고 기존 외주 용역인 미화주차시설관리 노동자들에게 자회사 전환 동의서를 받았다이 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체험강사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묵살되자 모여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서명을 거부하고 4월 1일 노조(공공운수노조 한국잡월드분회)를 설립했다.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어요막다른 길에 몰려서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겠다 해서.”

▲ 6월 4일 청와대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이재희 강사와 강선경 강사(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이후 전체 체험강사 257명 중 153명이 가입했고 강사들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잡월드 앞에서 집회와 피켓 시위를 시작했다그리고 휴관하는 월요일에는 관계부처인 고용노동부청와대총리관저고용노동부 성남지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잡월드는 체험강사는 잡월드 직원이 아니라는 공문을 냈다청소년체험관 모터스포츠실 강선경 강사가 말한다.

최근에 노조 설명회 때문에 늦게까지 회사에 남은 적이 있었거든요체험실 입구 대기석에 모여 있었는데 잡월드에서 업무 끝나고 나서는 사용하지 말라는 거예요이유를 물었더니 우리는 서울랜드 직원이지 잡월드 직원은 아니니까 사용하지 말라는 공문이 내려왔어요기분 되게 나빴어요.”

2012년 설립부터 지금까지 잡월드의 핵심 업무는 직업체험관이다. 500만 관람객 중 체험강사의 지도를 받지 않은 어린이·청소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꿈한국잡월드에서 찾으세요’ 라며 홍보하는 잡월드는 체험강사들이 쌓아 온 업적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 청소년체험관 이재희 강사와 안미경 강사(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직접고용이 왜 필요하냐고요내 일이니까책임감과 애정을 갖게 되잖아요이게 잡월드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니까 좋은 세상 만들어 줘야죠.”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 줘야 할 건전한 직업관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그렇기에 이들은 누구보다 잡월드의 일꾼으로 나무랄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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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6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 통학 셔틀버스 기사 

 

도망치듯 운전하고 싶지 않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아침 730, 어느 중학교 등교 시간. 15인승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백용진 씨(가명)가 여느 때처럼 학생 십여 명을 학교 앞에 막 내려 주었을 때였다. 명찰을 단 사람이 백 씨의 차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서울시 교통지도과에서 나온 단속반입니다.”

20155월 서울시는 현행법(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제81-자가용 자동차의 유상운송 금지)을 근거로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다. 백 씨는 잠복해 있던 단속반에 걸려 6개월 운행정지 처분을 받고 100만 원가량의 범칙금을 냈다. 왜 노란 셔틀버스는 불법인가? 또 왜 백 씨는 불법인 것을 알면서도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백 씨의 차량에 동승해 사정을 들어 보았다.

 서울의 한 학원 앞에 정차 중인 셔틀버스들 작은책(정인열)


2015년 도로교통법이 개정되기 이전에는 시설장이 소유한 26인승 이상 차량만 통학버스로 허용됐다. 그러나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영세한 학원이나 어린이집은 좁은 골목을 다닐 수 있는 소형 승합차를 소유한 지입 기사를 필요로 했고, 합법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2016년 발표한 셔틀버스 기사의 노동실태와 개선방안에 따르면 전국 통학버스가 약 30만 대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으며, 한국학원총연합회는 그중 약 70퍼센트가 지입 차량을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승용차 운전면허만 있으면 당장 시작할 수 있고 노동강도가 높지 않아 장년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셔틀버스 기사의 평균 연령은 60.8.

백 씨도 여기에 뛰어든 사람 중 하나다. 현재 백 씨의 고정 일감은 전국 지점까지 갖춘 A학원이다. 이 일감을 따내기 위해 백 씨는 2005년 차량값 1000만 원에 권리금 300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구입했다. 오후 430분부터 1030분까지 일하고 받는 용역비는 월 170만 원. 여기서 연료비, 보험료, 수리비 등을 빼고 남는 돈은 100만 원 남짓이다.

한 가지 일 가지고는 도저히 생계가 안 돼요. 그래서 땜빵을 계속 찾아서 하는 거죠.”

비고정 일감을 현장에서는 땜빵또는 쪽탕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셔틀버스 기사 역시 사정은 비슷해 두세 가지 쪽탕을 뛴다. 백 씨는 중학교 등교 차량과 유치원, 수학학원 등 세 가지를 더 했다. 아침 7시에 시작해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집에 오면 밤 11시다. 비는 시간에는 주차 단속을 피해 차에서 대기한다.

 주차 단속을 피해 대기 중인 셔틀버스 작은책(정인열)


대기시간을 제외하고 백 씨가 일하는 시간만 계산하면 하루 10~11시간. 토요일 근무까지 해서 버는 돈이 290만 원, 차량 유지비 등으로 약 70만 원을 뺀 순수입은 220만 원이다. 이를 시급으로 계산하니 최저임금 수준인데,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 적용도 받지 못한다.

우리는 고용보험, 산재보험도 안 돼요. 일 그만두면 퇴직금도 없이 빈손으로 나오는 거예요.”

기사들 중 절반은 불법 소개업체를 통해 일감을 구하는데, 업체는 소개비 명목으로 과다한 금액을 요구한다.

지금 하는 170만 원짜리도 첫 달은 50~60만 원 줬어요. 한 달 월급을 뜯기는 거예요.”

국토교통부는 2013년 청주에서 발생한 유아 통학차량 사망사고를 계기로 2015년 어린이 통학차량 운행 요건을 강화하는 도로교통법을 개정했다. 9인승 이상 소형 자가용 승합차 운행을 허가하되, 13세 미만의 어린이만 운송하고 경광등과 발판 등 안전요건을 갖추고 시설장과 기사가 차량을 공동명의로 소유한 후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는 조건 등이었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 맞지 않는 탁상행정이라고 백 씨는 비판한다.

중학생부터는 여전히 불법이에요. 그런데 학부모들은 셔틀을 요구하고 우리도 그 일을 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시설장과 차량 지분을 공동소유하게 하는 것도 문제다. 한군데 학원에 전속해 안전을 도모한다는 것인데, 책임은 99퍼센트 기사가 지면서 열 가지나 되는 서류를 준비해 신고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다.

기사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도 더 많아졌다. 유상운송 특약에 가입해야 해서 자동차 보험료가 30만 원가량 올랐고, 전체 도색 및 경광등, 발판 같은 안전장치를 설치하느라 200만 원을 썼다. 정부 지원금은 한 푼도 없다. 그러니 쪽탕을 많이 뛰어야 한다. 셔틀 기사들이 불법 통학버스를 계속 운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서울시는 학생들의 안전을 이유로 2015년 대대적인 중고생 셔틀버스 단속에 나섰고 백 씨를 포함해 많은 기사들이 범칙금과 운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제대로 된 정책도 없이 단속만 하니 사력을 다해 도망가다 사고가 나고.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데 당장 그만두라고 하니 어떻게 살겠어요?”

백 씨는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하소연이라도 해 보려고 동료 기사들과 의논을 했다. 그 자리에는 1987년부터 버스 노동운동을 한 박사훈 씨도 있었다. 박 씨는 민주노총 민주버스본부장에서 물러나고 201210월부터 25인승 셔틀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찾아가려면 글귀라도 하나 만들어서 찾아가야 할 거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 수 있을지를 박사훈 씨에게 써 달라고 부탁했죠.”

박 씨가 준비한 자료를 보고 동료 기사들은 감탄했다. 기사들의 현실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정책 대안까지 완벽했던 것이다. 박 씨가 버스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함께 노동조합 설립을 추진하여, 2015427전국셔틀버스노동자연대’(이하 셔틀연대) 결성을 언론에 알리고 행동에 나섰다. 박 씨는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노조의 주요 요구 사항은 전용차량등록제도입과 서울시 통학버스지원센터설치다. ‘전용차량등록제는 어린이에 국한된 수송을 중고생까지 확대하되 등·하원과 통학 업무만 수행토록 하고, 차주 기사를 관할 지자체에 등록해 교통안전교육등을 이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차량 운행 및 안전 실태와 기사의 안전교육 이수 여부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어 통학생 교통안전이 강화되고 공동 소유제로 인한 불편도 해소된다고 노조는 밝히고 있다.

통학버스지원센터는 셔틀버스를 필요로 하는 학부모나 시설이 무상으로 이용하는 제도다. 통학버스 지원 조례를 제정해 셔틀버스 사업을 공적인 지자체 사업으로 가져오면 안정적인 일자리와 급여를 보장받게 된다. 또 소개업자들이 중간에서 착취하는 일도 사라지고 영세한 학원과 어린이집, 유치원 등도 안정적인 재정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셔틀연대 결성 이후 셔틀버스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투쟁했다. 셔틀버스 50여 대가 국회 주변을 도는 시위도 하고, 지난해 121일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천막농성 및 삭발, 19일간 위원장 단식투쟁도 했다. 마침내 지난 321, 서울시와 노조는 관련 조례를 제정하고 올해 안에 통학버스지원센터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2016년 3월 셔틀버스 50여대가 전용차량등록제를 요구하며 국회 주변을 운행했다. ⓒ전국셔틀버스연대노조(홍정순)

 박사훈 전국셔틀버스노조 위원장은 통학버스지원센터 설치를 요구하며 삭발과 19일 동안 단식을 했다. ⓒ전국셔틀버스연대노조


백 씨의 차량에 동승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스름한 저녁이 되었다. 백 씨가 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차를 멈추고 뒷좌석의 학생에게 주의를 주었다.

“OO, 여기서 내려서 저 앞에 차 지나가면 길 건너가, 알았지?”

백 씨는 아이가 길을 건너는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다음 행선지로 출발했다. 단속반을 피해 도망치듯 운행하던 백 씨, 이제 떳떳하게 아이들 통학 안전을 책임지는 노동자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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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4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 태경산업


세 명이 조합원인 노조, 큰일합니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환갑을 바라보는 세 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검버섯과 깊게 팬 주름, 고단함이 밴 표정으로 그들은 긴 장화와 안전화를 신고 대구 성서공단(성서산업단지)을 다닌다. 이들의 일터인 태경산업()2016년 기준 당기순이익 약 7억 원, 이익잉여금 약 80억 원을 보유한 중소기업으로, 포클레인과 지게차 등 중장비에 들어가는 고무호스를 제조한다.

▲ 대구 성서공단에 있는 고무호스 생산업체 태경산업(주) 작은책(정인열)


  ▲ 조재식 씨와 이병철 씨가 안전화와 고무장화를 신고 성서공단을 걷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젊은 친구들은 한 시간 일하고는 다 집에 가 버립니다. 우리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이주노동자들은 힘들어도 참아야 하는 형편이라.”

이병철 씨와 조재식 씨가 작업 내용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말한다. 이들은 아침 8시부터 저녁 630분까지 종일 서서 일한다(작업 준비를 위해 아침 720분에 출근하지만 회사는 노동시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고무호스 제조는 먼저 금속 형틀에 호스를 끼우고 솥에 넣어 150고열로 30분간 가열해 성형을 한다. 이 과정에서 금속 형틀로부터 고무를 분리하기 위해 이형제를 사용하는데, 고무 탈형 후에는 기름기 있는 이형제를 없애기 위해 세척제를 섞은 뜨거운 물에 깨끗이 씻어 내고 건조시켜야 한다. 고무호스 모양도 다양한 데다 기계 한 대에 호스 60~70개를 꽂아서 넣고 빼는 작업이 반복되고,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에 세척한 고무를 넣었다 빼는 작업도 반복된다. 세척파트에서 일하는 이 씨의 말이다.

박스를 하루에 700번 정도 넣었다 뺐다 합니다. 3분 타이머를 맞춰 놔서 끄집어내면 다시 넣고. 그러니까 마디마디 전부 손목 터널증후군이 생겼어요.”

성형파트에서 일하는 조 씨는 오른쪽 손과 팔 전체에 3도와 2도 화상을 입었다.

▲ 고무 성형 작업 중 고온에 화상을 입은 조재식 씨의 손. 작은책(정인열)


고무가 쪄 가지고 단단하니 잘 안 빠집니다. 모양도 구불구불, 형태가 다양해요. 두 사람이 붙어서 와이어() 같은 걸로 빼다 뜨거운 솥에 팔이 다 닿으니 화상 입는 건 일상이에요.”

가장 버티기 힘든 때는 여름이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45~50됩니다. 솥을 찌고 뜨거운 물을 사용하니까. 3월 말부터 덥기 시작해서 10월까지는 지옥생활이라고 보면 됩니다. 작업복이 땀으로 젖어서 물이 줄줄줄 떨어지고 몰골은 완전히 쥐새끼가 됩니다.”

냉방기기도 없다. 대형 가마솥 6개에서 나오는 열기를 이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형제와 고무가 가열되면서 악취가 발생하고, 뜨거운 물에 세척제와 이형제가 섞일 때도 악취가 난다. 특히 이형제에는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이 사용되는데, 노동자들은 이 증기를 그대로 들이마시기도 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작업환경을 측정하러 왔을 때 노동자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마스크를 할 수가 없다.

사우나 들어가서 마스크 쓰라고 해 보세요. 숨쉬기가 힘들어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형제를 취급할 때는 실외에서 작업해야 하고 실내에서 작업할 경우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국소 배기장치가 필요하다.

냄새도 아주 지독합니다.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데 세척한 물을 한 달, 두 달, 석 달을 계속 쓰니 머리가 아파 죽겠는 거예요. 나 도저히 이거 못 하겠다 하고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했습니다.”

회사는 폐수를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오염수를 재사용했다. 이 씨는 제품 불량도 양심에 걸렸지만 악취 때문에 더 죽을 것 같았다. 하루 10시간을 휴게 시간도 없이 종일 서서 토요일까지 주 6일을 일해도 월급은 15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동료와 불만을 토로하다 사장실로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임금도 적고 이런 환경에서 일하기가 어렵다, 임금 좀 올려 주시오했더니 사장이 해 주겠다 카데요. 그런데 세월만 가고 안 해 주데요. 그래서 , 이거는 아이다생각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됐습니다.”

조 씨는 2공장에서 일을 했다. 지금은 2공장이 폐쇄됐지만 당시 김동열 대표이사는 2공장 노동자들에게 욕설과 막말을 일삼았다. 김 대표는 설립자인 김동찬 사장의 동생으로 조 씨를 비롯한 장년층 노동자들보다 한참 나이도 어렸다.

“‘어이, 이래 하라켔자나? 뭐 이씨~’ 욕하고. 김 대표 사촌동생도 있었어요. 더 어리니까 저희 아들뻘 정도 됐겠죠. 그 사람도 아이씨, 니 뭐 하는데?’ 이카는 식으로 말을 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았던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는지 말을 하는 조 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속상한 노동자들 5명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다 자연스럽게 노조를 추진하게 됐다.

노조 만들려면 우예되나 찾아봐라, 하는데 노조에 대해 아무도 몰라요. 그냥 하면 되겠지 싶어 가지고 인터넷 사이트 찾아보다 민주노총 성서공단노조로 안내받아 가입을 했어요.”

20142, 생산직 노동자 28명이 노조에 가입을 했고 성서공단노동조합 태경산업현장위원회를 만들어 투쟁 선포식도 했다. 그러나 며칠 뒤 대표이사를 비롯한 관리자들은 조합원들에게 탈퇴할 것을 회유하거나 강요했다. 거의 다 탈퇴하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전체 노동자 50여 명 중 조재식, 이병철, 박동숙 세 사람만이 노조원으로 남았다. 대표이사와 사장은 노동자들에게 노조원들과는 같이 대화도 술도 하지 말라며 탄압을 했다. 그리고 2017년 생산직 노동자 대부분의 고용계약을 도급업체 두 곳으로 변경했다. 도급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업무 내용과 처우는 기존과 같다. 노조는 이에 대해 노조 확산을 차단시키기 위해 도급업체를 들여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회사로부터 은밀한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대표하고 사장이 그러데요. ‘직원들 돈 다 줄 필요 뭐 있노? 당신들이 힘들게 교섭해서 따 내는데. 그 돈 가지고 너희 서이 나눠 쓰면 안 되나?’ 노조 탈퇴한 사람들한테 섭섭한 마음에 그래 버릴까 하는 심정도 있었지만 또 사람이 막상 그렇게 몬 합니다.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살아야지.”

3명밖에 안 되는 노조지만 이들이 이뤄 낸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 첫째, 토요 근무를 폐기하고 유급 휴일로 바꾼 것, 둘째, 공장 내 설치된 감시용 CCTV 18대 중 6대 폐쇄, 셋째, 4회 상여금 규정 도입 및 임금 인상이다.

▲ 태경산업 및 대구지역 노동자들이 2017년 9월 CCTV 철거를 요구하며 공장 안에서 시위를 했다. 이후 CCTV 18대 중 6대가 철거되었다. 사진제공_민주노총대구지역본부


명절 때 사장이 기분 좋으면 20만 원 주고, 기분 나쁘면 10만 원 주고. 그러니까 명절 전날 사람들이 사장 눈치만 보고 있었죠. 노조 생기고 나서는 정기 상여금 30만 원씩 4번으로 늘렸어요. 임금 협상해서 기본급도 올리고.”

현장이 개선되자 비조합원들은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마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당신 덕분에 우리 임금도 많이 오르고, CCTV도 그래 많이 있고 할 때 없애 주고 고맙다그리 말해 줄 때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4년 넘게 투쟁해 조금씩 현장을 개선하고 있지만 이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인격적 대우다.

인간 대접은 받고 일해야죠. 전에는 우리 호칭이 !, 어이~!’ 카는 소리였어요. 지금은 ○○○ 씨 이름을 부르죠. 공단 식당 같은 데 가 보면 자기 혼자서 울분 토하는 사람들 꽤 보거든요? 노동조합이 있으면 그런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참 안타깝죠.”

▲ 태경산업 노동자 이병철, 박동숙, 조재식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청년보다 육체는 늙었지만 정신은 더 끈질긴 사람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들. 최악의 환경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사람다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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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3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인천광역시 남동구도시관리공단


정규직 되니 '아줌마'라고 안 불러요

정인열/작은책 기자


▲ 소래역사관 전경 ⓒ작은책(정인열)

어시장으로 유명한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소래포구. 이곳에는 소래 지역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설립한 소래역사관이 있다. 역사관 안내데스크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이정희 씨(53)와 황운숙 씨(50)를 비롯한 역사관 노동자는 모두 남동구도시관리공단(이하 공단) 소속 정규직원이다. 공단은 남동구의 체육 시설, 공공 청사 시설 관리, 공원, 주차 관리, 문화 복지 사업 등을 관리·운영하는 지방 공기업으로 약 17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남동구도시관리공단은 비정규직 없는 보기 드문 사업장이다. 무기 계약직이나 하청회사 정규직 같은 가짜 정규직이 아니다. 환경미화원까지 공단 시설 관리직으로 호봉제 및 8급 주임에서 5급 대리까지 근속 승진도 가능한 진짜 정규직원이다.

▲ 소래역사관 안내 직원 이정희 씨와 황운숙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다 우리가 파업하고 투쟁해서 일궈 낸 거예요.”

이정희 씨가 당당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정희 씨는 2011, 황운숙 씨는 2008년부터 공단 노상공영주차장 주차 정산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1년마다 고용 계약을 갱신하는 일용직(비정규직)이었다. 황은숙 씨가 당시 환경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는 부스도 휴게실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점심을 그냥 길바닥에서 먹는데 너무 창피했어요. 그래서 아예 안 먹고 일주일을 굶었어요. 비오는 날은 그대로 비 맞고, 추울 때는 바람 맞고 일했죠. 소지품도 둘 곳도 없어서 구두 수선이나 노점상 하는 사람 사귀어서 소지품 맡기고.”

황 씨는 도로 중앙선을 넘어 다니며 목숨의 위험을 느끼면서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주말에는 특근수당도 지급한다는 말에 한 달에 하루만 쉬고 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공단은 최저임금에 특근수당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황 씨가 손에 쥐는 월급은 120만 원이 채 안 됐다.

이 씨는 공단에 들어오기 전 도시가스 검침을 했다. 그 일 역시 임금이 너무 적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공단에 입사했다.

소래포구 주차장은 꽃게철이면 주말에 차량 1000여 대가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었다. 횟집에서 술 한잔 걸치며 서너 시간 주차장을 이용하는 손님들도 많아서, 요금을 정산할 때면 반말을 하며 화를 내는 취객들도 상대해야 했다.

▲ 소래포구 노상공영주차장에서 한 노동자가 주차 정산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_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


요금 7, 8천 원 나왔다고 사람을 팰 것처럼 행패 부려요. ‘왜 이렇게 비싸? 아줌마.’ 하고 따지고. 그런 일이 하루에 10건 이상이에요.”

뿐만 아니라 여자 혼자 사나? 그래서 길거리에 돈 벌러 나왔나 보네. 아줌마 시간 있어?’ 같은 성적인 농담을 듣는 것도 예사였다. 노동조합을 통해 환경이 개선된 것은 2012년 파업에서 승리해 정규직이 된 뒤였다. 이 씨가 말했다.

노조가 뭔지 민주노총이 뭔지 하나도 몰랐죠. 그런데 누가 회사에 노동조합이 있으니 가입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막연하게 그냥 우리는 노동자니까, 조합에 가입하면 좋지않을까 해서 입사 동기들과 같이 가입을 했죠.”

노조 지부장 강동배 씨는 남동국민체육센터 소장이었다.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아침 6시에 출근하는 안내 데스크 여성 직원이 아침 식사를 굶어 안내 데스크에서 빵을 먹었다. 한 이용객이 민원을 넣자 관리부장이 사실 확인서를 서너 차례 쓸 것을 강요했다. 확인서는 징계 또는 인사이동의 근거가 된다. 책임자로서 후배 하나 못 지켜 주는 내 역할에 회의가 들었다며 노조 설립을 결심한 계기를 밝혔다.

그렇게 200910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가 생겼다. 이듬해 취임한 김현익 당시 이사장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일용직 시설 관리, 환경미화 노동자들과 계약직 스포츠 강사를 해고하고 용역을 쓰려 했다.

김현익 이사장은 우리 필요 없다고, 용역 쓰면 된다고 무시했어요. 그리고 행정직들은 우리를 어이’, ‘아줌마라고 부르고 반말도 했고요. 무시하는 말투며, 태도며. 그런게 제일 속상하더라고요. 우리도 누군가의 딸이고 어머니인데.”

이에 반발해 환경미화, 시설 관리, 스포츠 강사 등 노동자 170여 명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셔틀버스 폐지 철회 등을 요구하며 2012216일 파업에 돌입했다.

전에는 파업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유, 저 빨갱이들 왜 저렇게 길거리에 나와서 난리야?’ 하고 비난했던 이정희 씨는 자신도 똑같이 겪어 보고 나서야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그리고 이 씨는 동료 황운숙, 강명자 씨와 몸짓패 우아해(우리 노동자들의 아름다운 해방을 위하여)’를 결성해 다른 투쟁사업장에 연대도 다니며 노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57일간의 파업 끝에 노조는 공단으로부터 요구 사항을 대부분 쟁취한다. 특히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비노조원까지 포함됐고 내용적인 면에서도 큰 성과를 냈다. 일용직일 때는 일한 시간대로만 임금을 지급해서 경조사가 생겨 휴가를 가면 무급이었고 병가도 마찬가지였다. 황 씨가 말했다.

파업 전에 허리 수술을 했어요. 두 달은 쉬어야 하는데 한 달밖에 못 쉬었어요. 무급인 데다 팀장은 빨리 복귀하라니 잘릴까 봐서 다시 출근했죠.”

▲ 2012년 파업 집회에서 노동가를 부르는 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진 제공_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


정규직이 된 후에는 병가는 물론 경조사 휴가도 유급으로 바뀌고 성과급, 자녀 학자금, 급식비, 교통비 등 복리후생도 정규직과 똑같이 적용됐다. 노상공영주차장 부스도 인별로 생기고 선풍기와 난방기도 공급됐다. 가장 좋아진 점으로는 인격적 대우를 꼽았다.

행정직들이 저희한테 아줌마하며 반말했던 건 싹 들어가고 이제는 주임님하며 예의를 갖춰요. 손님들도 대우가 달라졌어요. ‘정규직 됐다면서요? 거기는 어떻게 하면 들어가요?’ 하고 부러워하기도 해요(웃음).”

공영주차장에서 일하던 이들은 201411월 구청이 안전상의 이유로 소래포구 일부 주차장을 폐쇄하면서 지금의 업무로 변경됐다. 비정규직이었다면 해고됐을 테지만 정규직이고 노조가 있어서 해고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것이 좋아졌지만 아직 이들의 마음을 속상하게 하는 일은 있다. 바로 이들의 투쟁으로 공단 전체 노동자들의 처우가 좋아졌는데도 여전히 공단이 잘해 줘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가끔씩 속이 끓어오르지만, 이정희 씨와 황운숙 씨는 후회하지 않는다.

눈치 보지 않고 기죽지 않고 회사에 우리 권리 말할 수 있는 거. 그전에는 회사 눈 밖에 날까 봐 부당한 일 있어도 참고만 지냈죠.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노조 가입한 거예요.”

▲ 이정희, 황운숙, 강명자 씨는 몸짓패 우아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2017년 여름 동광기연 집회 공연 모습. 사진 제공_이정희


관람 시간이 끝나는 오후 5시가 되자 역사관은 한산해졌다. 이들은 사무실 직원과 잠시 담소를 나눴다. 영화 ‘1987’에 관해, 그때는 데모하는 학생들을 빨갱이라고만 생각했다면서. 1987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이어진 투쟁이 없었다면 이런 일상이 가능했을까, 상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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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2년 4월호

일터 이야기


* 편집자 주 :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57일간의 파업 끝에 이 글을 쓴 송근영 님을 비롯한 비정규직은 완전한 정규직 전환(직접고용 및 직군 설립)을 이끌어 냈고 모두 현장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_^


수영 강사들의 요구

송근영/ 인천 남동구도시관리공단 국민체육센터 수영 강사


여성 수영 강사로서 어느덧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처음 수영 강습을 시작했을 땐 느끼지 못했던 증상들이 몸에 느껴진다. 몸이 자꾸 차가워져 생리통이 점점 심해지고 생리하는 날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지만 템포를 끼고 입수를 한다. 그러고도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짬짬이 화장실에 가서 확인을 한다. 한여름에도 추워서 강습을 끝내고 나가도 에어컨은 틀지 않아도 되고, 피부는 점점 건조해진다. 여름에는 수영장 내 유해 가스가 심해져 집에 가선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처럼 눈알이 튀어나오게 기침을 해 댄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장이 바뀌면서 강습 중에 입는 슈트(몸을 덮는 두터운 수영복)에 대한 지원이 끊겼다. 강습할 때 수영복만 입으면 됐지 무슨 슈트까지 입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슈트는 수영 강사의 필수품이다. 우리는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설명을 하며 회원들의 자세를 잡아 주기 때문에 활동량이 적다. 수영장의 수온은 운동하는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27~28도 사이로 유지된다. 따라서 활동량이 적은 강사들은 저체온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온을 위해 슈트를 입는다. 슈트는 또한 회원들과의 신체 접촉을 어느 정도 막아 준다. 수영의 특성상 몸에 걸치는 것이 별로 없고, 팔을 휘저으며 하고, 물속에서 이뤄지는 일은 타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가끔 불쾌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슈트 예산을 삭감해 버린 것이다.

오후 근무인 나는 어린이 수업을 두 시간 연속으로 하고 저녁 식사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두 시간 동안 수업에 들어간다. 수업 중간에 한 시간의 저녁 식사 시간이 있지만 실질적인 휴식 시간을 한 시간으로 보긴 어렵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대충 털고 보면 어느덧 20분이 흘러 있다. 급하게 밥을 먹고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없이 50분이 되면 다시 옷을 갈아입고 수업을 준비한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안전 근무를 한 시간 서고, 회원 상담에, 인포메이션 센터 지원에 각자 정해진 부수적인 업무와 수영장 청소 등을 한다. 그 시간을 쉬는 시간이라 생각하는 이사장은 수업 4시간에 안전 근무 2시간을 강요한다. 안전 근무 한 시간 늘어나는 것이 별일이냐 하지만 체감되는 타격은 굉장히 크게 느껴진다.

강사들에게는 1인당 일 년에 15일의 연차가 있어 매달 돌아가며 연차를 쓰고 있다. 남자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예비군 훈련 등에 참가해야 한다. 빠진 사람의 안전 근무에 대체해서 근무에 들어가야 하고 강습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미안해 연차를 못 쓰고 있다. 연말이 되면 3일만 연가 보상비가 나오고 나머지 남은 날에 대해서는 보상비가 안 나오니 빨리 연차를 쓰라고 압박이 들어온다.

대우가 좋지 않으니 강사들이 줄질이 퇴사했을 경우엔 어떠했는가. 공단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채용 공고를 내고 면접을 보고 하는 기간 동안은 퇴직자가 담당했던 수업과 안전 근무를 들어가느라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다 지나간다. 대타를 많이 뛰는 선생님은 하루에 6시간까지도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안전 근무까지 서다 보면 꼬박 하루를 수영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원 관리와 상담을 위해 불가피하게 퇴근 시간을 넘기는 것이 다반사다.

안전 근무 때는 단순히 수영장에서 한 시간을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응급 상황을 대처하고 수영장 내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민원들을 처리해야 한다. 우리 센터에는 유난히 어르신들이 많이 계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한번은 어르신이 가슴 정도의 높이의 물에서 빠져서 구하러 들어가기도 했다.

2012년부터 규정이 바뀌어 자유 수영 때 안전 근무자가 2명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인원 충원을 요구했으나 이사장은 기존 강사들이 한 시간씩 더 들어가면 되는 걸 쓸데없이 요구한다며 수업 4시간에 안전 근무 2시간을 강요한다. 노동의 강도를 높일 수 없는 정당한 이유들을 대고 대직 근무의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이사장은 우리에게 노동 강도가 높아짐에 따른 건강원의 문제는 말도 안 된다며 입도 못 떼게 한다.

강사들이 이를 거부하자 이런 식이라면 최후통첩을 할 수밖에 없다며 센터로 직접 찾아왔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어떤 식으로 해결해 줄 것인지 우리가 물어도 단칼에 무시하며 해고 통보를 한다. 실질적인 업무 파악과 실태도 모른 채 수익에 눈이 멀어 거짓말만 일삼고 약속도 지키지 않고 노동 강도를 높일 것을 강요하는 이사장의 경영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파업을 했다.

우리의 요구는, 수익성과 맞지 않는다며 일방적으로 폐지한 회원 셔틀버스를 다시 운영하는 것, 센터 내 환경미화 직원을 직접고용하는 것,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동구 구민들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만들어진 센터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수익성과는 무슨 관련이 있으며 왜 그것을 수익성의 논리로 따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 간접고용이라는 이유만으로 새해 첫날 출근하여 센터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환경미화원들도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분들을 직접고용해 용역회사가 중간에서 떼어먹는 돈 없이 월급을 고스란히 주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정규직화하라는 것은 임금을 올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대우받으며 일을 하고자 위함이다. 우리는 임금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이사장은 교섭 때마다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 파업 전 오고 갔던 말들은 들어 본 적도 없다고 하며, 직원들에게 강요하거나 몰래 카메라를 찍은 것도 발뺌한다. 이러한 상황에 분개하여 이사장을 찾아간 회원에게는 여편네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며 막말을 했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제출한 성명은 진짜 본인 의지로 한 것이냐며 확인 전화를 했고, 노조원들의 집에는 우리가 불법 파업을 하고 있다며 등기 우편물을 보내 가정 내 불안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다른 두 가지 합의 사항에 대해서는 이견을 좁혀 가는데 강사들의 정규직 전환 문제는 절대 물러서지 않고 있다. 우리 센터 소장님이 노조를 만들었고,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노조 활동을 한 것이 괘씸하기 때문인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구청장이 직접 불러 합의를 보라고 했고, 우리의 요구가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뿐인데도 우리가 결코 넘봐서는 안 될 불가침의 영역을 침범이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는 이사장의 행동을 참을 수가 없다.

앞도 뒤도 없이 무조건 강사들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이사장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점점 수위를 높여 우리의 의지와 요구를 알릴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 승리는 우리의 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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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2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 삼성웰스토리


출퇴근 거리만 200킬로미터, 심장이 뛴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그날은 식품위생 교육이 있던 날이었다. 식음서비스 기업 삼성웰스토리()의 직원 김창오 씨(45)는 용인시청에서 교육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가던 중 고객사로부터 온 전화를 받으려고 근처 식당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런데 통화를 마치려던 즈음, 불법 좌회전 차량이 그의 차를 들이받았다. 그는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쳤고 즉시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회사는 그에게 치료를 위한 조치를 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고 발생 해인 2015년부터 그는 인사고과 최저등급인 ‘NI’ 등급을 받았고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그리고 보험 사기꾼이라는 소문이 회사에 돌았다.


퇴사하라는 신호였습니다. 일하다 다쳤는데 구해 주지는 않고 필요 없으니 죽으라고 밟는 꼴이죠. 저는 퇴사를 거부했고요.”


그는 회사에 병가를 요청했으나 연차휴가를 먼저 소진하라는 답변만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진통제로 버티며 출근했다. 성수기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수술 일정도 11월로 미뤘다. 보험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고 발생 두 달여 만에 보험금 지급을 중단했다. 회사에 산재 협조를 요청했지만, 사고 발생 5개월이 다 되어서야 책임자로부터 산재 신청을 하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114일 그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애초 간단한 수술로 예견되었지만 시기를 놓친 탓에 세균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이 왔고 그는 38일간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갔다.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재해 사실 및 요양급여 신청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냈다.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은 김 씨의 산재 승인을 거절했다. 다친 부위가 사고로 인한 것이 아닌 기존 만성 변병’, 즉 퇴행성 질환이라는 것이었다. 2012년 경력직 입사 시 받았던 신체검사 때도 없던 질병이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보험사를 상대로 민사소송도 진행하고 있다.


삼성웰스토리는 위탁급식과 식자재 유통 등 식음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급식 부문 업계 1위다. 전국 6개 물류센터를 통해 6천여 개 거래처에 식자재를 공급한다. 201312월 삼성에버랜드 FC사업부에서 분사된 후에도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해마다 성장했다. 2016년도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17260억 원, 1082억 원으로 최근 3년 연속 영업이익 1000억 원을 돌파했다. 이 영업이익은 오로지 인건비 및 경비 절약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한다고 임원위 씨(37)는 말한다. 그는 2008년 삼성에버랜드 공채로 입사한 조리사다.


경쟁 업체 중 저희 삼성만 식품공장이 없습니다. 신규 사업을 벌이거나 설비 투자를 하지 않는데 어디서 이익을 내겠습니까?”


경영진은 수익 목표를 무조건 전년도보다 높게 잡았다. 그리고 해마다 오르는 물가와 인건비를 감당하며 이익을 내기 위해 저성과자를 일정 숫자 이상 보유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예를 들어 전체 직원이 3천 명이라고 하면 해마다 그중 10퍼센트는 무조건 NI 등급을 받습니다.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정말 피땀 흘려 노력해도 NI를 못 벗어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NI는 임금도 동결된다. 퇴사시키기 위한 계획들도 실행된다.


한 사람을 타깃으로 정하면 꼬투리를 잡아서 그 사람 주변 동료들부터 포섭합니다.”


실제 영양사 A씨의 경우, 인사담당자가 동료들에게서 A 직원이 실수한 정보를 수집해 자료를 만든 후 고위직 상사가 해당 자료를 들고 A씨를 만나 퇴사를 종용했다.


“‘인사팀에서 널 자른다는 걸 내가 말렸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3개월 치 급여야. 서명해라고 말합니다.”


 ▲ 삼성웰스토리 김창오 씨와 임원위 씨 작은책(정인열)


이렇게 해서 인력을 줄이면 남아 있는 노동자들에게 노동강도가 전가된다. 임 씨의 경우 혼자 세 사람 몫의 일을 했고 결국 허리디스크 수술까지 받았다. 그리고 맛이 조금 떨어지거나 서비스가 나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업을 하는 김 씨가 말했다.


고객들은 바로 알죠. 실제로 고객사와 재계약율이 재작년까지만 해도 90퍼센트였지만 지금은 70퍼센트로 떨어졌습니다.”


회사는 반가공 제품이나 완제품 비율도 높였다. 조리 공정을 줄이기 위해서다. 임 씨는 전문 조리사의 입장에서 재료 본연의 맛이 사라지는 급식이 안타깝다.


옛날에 비하면 음식의 질이 많이 떨어졌죠. 혼이 없어요. 예를 들어 요즘은 바로 구울 수 있는 소포장 냉동 생선을 사용해 냉동-해동-재냉동-해동을 거치죠. 그러다 보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지 못하고 조미료로 맛을 채우게 돼요. 고객들은 조미료의 맛에 익숙해지고 그게 맛있다고 기억을 하죠. 조리사들도 예전에 했던 공정을 잊어버려요. ‘이게 더 편하네, 이 정도 맛에도 고객들이 불만 없는데 뭐.’ 하는 거죠.”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저희 회사는 일반 기업과 비교도 안 되게 인사과 조직이 방대합니다. 사수-부사수-그룹장-지원그룹-신문화그룹, 노사협의회까지. 현장으로 투입돼야 할 경비들이 다 간접비로 빠지는 겁니다.”


그 결과 업계 1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노동자들의 처우는 열악해졌다. 전체 12천여 명 직원 중 9천여 명의 파견, 무기계약 노동자들이 최저시급을 받고 있다. 정규직 입사 10년 차 임 씨의 임금은 3300만 원, 경력 20년 차 김창오 씨의 임금도 4300만 원으로 경력에 비해 낮은 편이다. 에버랜드에서 삼성웰스토리로 분사하면서 경영진이 임금과 처우는 에버랜드 이상으로 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과는 너무 다른 결과였다. 에버랜드 우리사주 미배정 사건도 그랬다. 삼성웰스토리로 전적하면서 직원들이 보유했던 에버랜드 우리사주를 포기하게 됐는데, 임 씨 등 일부 직원들이 전적 동의를 거부하자 당시 지사장이 ‘5년 이내에 절대 주식 상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약속했다. 직원들 전적이 완료 되자 회사는 약속과 달리 약 1년 후에 주식 상장하였고, 그 차익으로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일가는 58999억 원의 차익을 보았다. 이와 관련해 임 씨를 비롯한 웰스토리 노동자 611명이 우리사주를 배정받을 수 있는 권리를 침해당했다며 892천여만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노사협의회는 꼭두각시 역할만 하고, 동료들이 억울하게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노동조합을 떠올린 것은 2016년 말 촛불항쟁 때였다.


우리한테는 주식도 안 주고 상여금도 안 주고 임금도 깎으면서 어떻게 정유라한테는 돈을 줄 수가 있지?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동료 조리사 몇 명을 설득해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가입, 2017412일 삼성웰스토리지회를 설립했다. 그러자 임 씨에 대한 유언비어가 돌고 따돌림이 벌어졌다.


제가 소송비를 횡령했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직원들이 익명으로 소통하는 앱이 있는데 거기에 누가 ‘1인당 30만 원 걷어 인지대, 송달비 하고 5만 원이 남았는데 그걸 횡령했다고 쓴 거죠.”


소송 대표단으로 연차와 시간을 쪼개 법원을 드나든 건 임 씨였다. 패소 후에 회사가 막대한 소송비용을 물겠다고 하자 항소 포기를 조건으로 협상한 것도 임 씨였다. 임 씨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치료 중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김 씨도 용인 골프장에서 대구로, 다시 경기도 성남 본사로 강제 발령을 받았다. 출퇴근 거리만 왕복 200킬로미터. 운전을 할 때면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나지만 자신을 응원해 주는 가족들을 떠올렸다. 노조에 가입하고 나서는 그의 말을 믿어 주는 동지가 생겨서 더욱 힘이 났다. 조합원 수는 이제 64명으로 늘었다. 한국노총 산하 노조보다 조합원 수가 많아 교섭 주도권에서 유리한 상황이다.

지난 4월 17일 삼성웰스토리 노동자들이 노조설립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_ 삼성웰스토리지회


임 씨와 김 씨는 매일 요리를 찾아 주는 고객들이 가장 고맙다. 그래서 고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파업 문화를 만들고 싶다.


그럼에도 만약 파업을 해야 한다면, 하루 8시간 파업 중 4시간은 장애인 시설이나 보육원 같은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거죠.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잘하는 음식을 제공하고 싶어요. 누군가는 쇼하는 거라고 우리를 손가락질하겠지요. 하지만 지속적으로 한다면, ‘삼성이 하니까 파업도 다르네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을 겁니다.”


삼성은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들을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퇴사하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답했다.


회사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우리가 퇴사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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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1월호

일터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신호등이 안 보였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토요일 아침, 일어나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눈도 침침했다. 단순한 몸살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출근해야 한다. 남들은 주 5일 근무라고 토요일에 쉰다지만, 그에게는 평생 남 얘기였다. 그래도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날이니까 몇 시간만 일하고 오면 된다는 생각에 출근을 했다. 점심때가 되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살이 심해졌다. 조퇴를 신청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런데 신호등이 안 보인다. 색깔도, 형체도. 집에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전정훈 씨. 2016116일 토요일, 그렇게 쓰러진 그 날 이후로 그는 영영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의사는 시신경염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시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휴대폰 문자를 크게 확대하고 눈에 가까이 가져가면 흐릿하게 보인다. 발병 전 그의 시력은 두 눈 모두 1.0이었다. 그는 이제 서른여섯 살이다. 


"의사가 메탄올 중독이 의심된다고,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봤대요. 회사는 사용한 적 없다고 했고요." 


그러나 회사의 대답과 달리 원인은 메탄올 중독이었다. 메탄올(또는 메틸알코올)은 증기 흡입 및 섭취, 피부 접촉 등 기준치 이상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실명되거나 뇌 손상 및 사망에까지 이르는 독성 물질이다. 


전 씨와 담당 의사가 원인을 알게 된 것은 8개월이 지난 뒤였다. 전 씨의 친척이 언론 보도를 보고 직업병이 의심된다며 노동 상담을 권유했다. 알고 보니, 그 말고도 비슷한 작업 환경에서 똑같은 증상으로 실명되고 뇌 손상을 입은 사람이 다섯 명이나 더 있었다.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이미 언론 보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전 씨는 이조차도 몰랐다.


"의사가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했어요. 원인을 알았으면 치료 방법도 달랐을 거라고."

 

 

전정훈 씨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작은책(정인열)

 

그는 인천의 남동공단에 있는 'BK테크'에서 일했다. 삼성·엘지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3차 하청업체였다. 컴퓨터 수치제어 기계(CNC)가 금속을 깎으면 그 부위를 세척하고 열을 식히기 위해 메탄올이 대량 분사됐다. 그는 하루 12시간 7~10대의 CNC를 동시에 작동시켰고, 바로 앞에서 작업했다. 부품이 다 절삭되면 에어건으로 메탄올을 말렸다. 메탄올이 바닥나면 커다란 드럼통에 담긴 메탄올을 말통에 옮겨 담아 기계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넉 달 만에 실명됐다. 전 씨를 포함한 실명 피해자들의 작업 환경은 모두 같았고, 법정 노출 기준의 최소 5.5~10배 이상에 노출됐다. 회사는 그 액체가 메탄올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유해성과 위험성을 알려 줘야 하는데 지키지 않았고 안전교육도 하지 않았다. 송기 마스크를 지급해야 하는데, 일회용 마스크를 지급했다. 보호 장갑이 아닌 목장갑을 지급했다. 환기구는 없었고 보안경, 보호복, 보호 장화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법 위반인지 전 씨는 알 길이 없었다. 1차 책임자인 사장을 그는 일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파견업체와 근로 계약을 맺은 비정규직이다. 생산직은 파견이 금지된 업무다. 이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파견업체와 사장은 말하지 않았다. 그가 불법 파견 비정규직으로 일한 회사는 BK테크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산직으로만 일했다. 그동안 8개의 직장을 다녔고, 직접고용 정규직인 경우는 단 한 번이었으며, 4대 보험에 가입된 적도 단 한 번뿐이었다. 늘 최저임금을 받았으며, 임금을 보전하기 위해 하루 12시간 넘게 일을 했고, 토요일에도 일했다.

 

 

현장에서 사용된 메탄올이 담긴 통. 노동건강연대

 

그는 왜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까? 왜 산재까지 당했을까?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었을까? 그가 살아온 삶을 들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부모는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이혼했다. 어머니는 아무 예고 없이 사라졌다.

 

"가장 예민하던 때였어요. 그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아요. 딱히 별로 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그와 남동생을 양육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사정에 돈을 버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학교에서 용접과 배관 기술을 배웠지만 막상 그 기술로는 취업할 곳이 없었다. 초보자는 받아 주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집안 경제가 빠듯했다. 특별한 기술 없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생산직 일자리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 후 대우냉장고 압축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조금 규모가 큰 자동차 부품회사에 들어갔다. 쇠파이프를 밴딩 기계 넣어서 구부리는 일이었다. 파견 비정규직이었고 3~4년을 근무했지만, 회사가 부도나서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친구 소개로 선박 엔진 공장에 들어갔다. 엔진을 닦고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여전히 최저임금이었지만 정규직이었고 4대 보험도 가입됐다. 1~2년 일했지만, 회사가 먼 곳으로 이전해서 출퇴근이 불가능했다. 다시 파견업체를 통해 휴대폰 부품 생산업체로 이직했다. 9개월을 일하다 사람 관계가 힘들어 통신 케이블 제조 공장으로 옮겼다. 역시 파견 비정규직이었다.

 

2013년경에는 화장품 포장업체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후 '대성컴퍼니'라는 파견업체를 통해 핸드폰 염료 공장을 들어갔다. 핸드폰 케이스를 염색통에 넣었다 빼는 작업이었다. 일한 지 7~8개월 즈음 회사는 일이 없다며 잔업부터 없애더니 결국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2015년 가을, 구직 중이던 그에게 대성컴퍼니에서 '괜찮은' 일자리가 나왔다며 연락이 왔다. 그의 시력을 앗아간 BK테크였다.

 

산업재해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그의 아버지 역시 남동공단 노동자였다. 철근 공장에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10년 전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옷이 절단기에 말려 들어가면서 팔목이 잘렸고 경추도 부러졌다. 그러나 응급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대에서 산재가 끝날 줄 알았죠. 그게 저한테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얼굴도 몰랐던 사장은 그의 동생을 만나 합의를 종용했다.

 

"산재보험도 가입이 안 되어 있으니 합의금밖에 없다고, 자기도 피해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350만 원에 합의했다. 다행히 이후 노동건강연대를 만나 도움을 받아 산재 승인은 받았다. 피해자들은 사장을 파견법 위반으로 고소했지만, 사장은 벌금 100만 원 처벌에 그쳤다. 법정 구속도 없었다. 사장은 아직도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도 진심을 담은 사죄도 하지 않았다.

 

메탄올을 사용한 휴대폰 부품 업체. 노동건강연대

  

그에게 왜 다른 직업을 알아보거나 직업 훈련을 받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면 실명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저임금이 지금처럼 많이 올랐더라면,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받은 최저임금으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잠자고 나면 출근해야 하니까. 계속 일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학교에서 교육을 제대로 했다면 어땠을까. 학교는 어떤 것을 가르쳐 주었고 어떤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나.

 

"오로지 실습만 가르쳤어요. 파견업체니, 비정규직이니, 산업재해니 아무 교육이 없었죠."

 

산업안전보건법도, 산업재해와 체불임금 대처법도, 사회보험 가입 의무도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보가 없던 그는 아는 한도 내에서 스스로 판단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생산직, 비정규직, 최저임금, 장시간 노동, 사회보험 미가입. 그는 여가 생활도 없이 최선을 다해 일만 하며 살았다. 일요일이 되어서야 밀린 잠을 잤다. 그가 실명 전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것은 2004년이다.

 

시력을 잃은 후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상황은 바로 신호등 앞에서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쳐다보는지 알 수는 없어요. 그런데 초록불일 때도 제가 그대로 서 있으면 쳐다보겠죠. 그냥 못 본 척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이번이 마지막 인터뷰라고 했다. 인천지법 판결을 보고 언론에 나가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빵사가 되고 싶었어요. 공장 그만두고 나면 제빵 기술을 배우려고 했는데. 이제 다 소용없는 일이죠."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일까, 한 번 더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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