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허울 좋은 프리랜서 반백수
이명옥/ 프리랜서 구직자
〈작은책〉과 처음 대면하던 시절 나는 백수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오락가락하는 여성 가장이었다.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 보습학원 강사, 보험 판매원, 저소득층 방과후 학습 도우미, 인터넷 방송 진행자, 출판사, 서울시의회 의정보좌관, 장애인복지신문 총무 등이 내가 거쳐 온 일자리다. 그 사이 중학생이던 아들은 서른 살 청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한 달에 네 꼭지의 탐방 기사를 쓰고 뉴딜 일자리를 찾아 수없이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IMF가 터지기 전 오전 보험회사와 오후 보습학원을 오가며 내가 받은 급여는 150여만 원이었다. 3년쯤 보험회사를 다니고 나니 영업 능력이 없는 나는 더 이상 보험을 들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이나 자녀 이름으로 넣은 보험도 서너 개나 됐다.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지는 식이었다. 나는 보습학원 강사만 하기로 했다. 보습학원은 장위동 시장 골목에 있었다.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 부모는 대부분 자영업자였다. IMF가 터지자 아이들은 학원부터 그만뒀다. 나는 초등학생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를 맡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줄어들자 학원을 그만두게 됐다.
보험회사 다니며 넣었던 연금과 교육 보험 등 2천만 원을 차례로 해약해 근저당 설정으로 담보 대출된 대출금 이자를 갚으며 악몽 같은 시절을 버텼다. 이후 2002년 여성신문사 마케팅 부서에 입사해 4대 보험을 제하고 80만 원 조금 넘게 받았다. 급여를 제때에 못 받고 절반씩 받기도 했을 만큼 여성신문사의 재정은 열악했다.
2003년 6월 28일 여성신문사에서 잘리고 7월 1일부터 상계역에서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 일을 3년 정도 했다. 처음엔 청소반장과 청소하는 분들의 텃세와 출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아침에 김밥을 싸 가지고 와 팔던 아주머니가 주신 김밥을 먹고 체하기도 했다. 비 오는 날 신문이 비에 젖을세라 비닐에 싸서 들고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 신세가 처량하고 서글펐다. 팀장의 갑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했다. 장마철 날씨처럼 수시로 성정이 바뀌고 잔소리도 심했다. 겨울철 계단을 오르내리면 사고가 날 수 있다며 일을 그만두라고 했을 때 난 끝까지 싸우며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를 했다.
무가지 신문 배달할 때 쓰던 카트. ⓒ이명옥.
무가지 신문을 배포하기 시작한 뒤 한 달쯤 지나 구리시의 입시 학원에 일자리가 생겼지만 나는 무가지 신문 배포를 그만두지 않았다.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 2시간 정도 일하고 꼬박꼬박 들어오는 30만 원에서 45만 원을 포기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를 그만둔 것은 아침에 출근하는 일자리가 생긴 후였다.
2009년 삼양빈민연대에서 3년 사업으로 따낸 노동부 방과후 학습 도우미 일자리는 최저 시급에 맞춰져 있었다. 일주일에 여섯 저소득층 가정을 한 가정당 두 번씩 찾아가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리에게 스폰서를 구하라는 요구가 덧붙여졌다. 형식상이긴 했지만 황당한 일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3년짜리 프로젝트를 2년 만에 해체시켜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일부는 당시 생긴 지역아동센터의 교사로 자리를 옮겼지만 나는 출판사를 다니기로 해서 지역아동센터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1인 출판사에 6개월 다니면서 보험 없이 150만 원을 받았다. 인터넷 방송 진행을 하면서는 첫 달은 150만 원, 이후는 4대 보험 떼고 130여만 원을 어렵게 받으며 2년 넘게 일했다. 서울시 의정 보조 3개월은 4대 보험 떼고 134만 원이었다. 장애인복지신문사는 하루에 4시간씩 주 5일을 나가기로 하고 50만 원씩 받았는데 워낙 재정이 열악해 그 돈마저 제때 못 받고 며칠이 지나서 받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19개월 정도 장애인복지신문사에서 알바로 일했고 이후 다시 실업자가 됐다.
선거철 선거 사무원, 학교도서관저널과 해피데이스에 자유기고가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등 닥치는 대로 살아오면서 주변에 수많은 빚을 지며 살았다. 때론 쌀을 보내 주는 이, 김치나 마늘, 고춧가루 등을 보내 준 지인도 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상차림에 보태라며 몇 년째 통장에 슬며시 돈을 넣어 주는 교수님도 계시다.
2020년엔 인청시청 객원기자로 한 달에 네 꼭지의 기사를 쓰기로 했다. 공공 일자리도 찾아보고 요즘 올라오는 ‘뉴딜일자리’에 부지런히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유엔이 정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아직 청년이다. 하지만 일자리센터 구직난을 보면 나는 고령자다. 고령자에, 여성에, 장애인인 내게 적합한 일자리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에 각자 도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나는 오늘도 서류를 넣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비정규직 천만 시대, 청년 실업이 넘쳐 나는 시대다. 당신의 일자리는 안전한가?
3년여 세월을 취준생으로 나의 가슴을 숯덩어리로 만들었던 아들은 올해 3월 11일자로 중소기업 공채로 입사했다. 150명 지원에 2명을 뽑았다고 한다. 대기업에 비해 연봉은 적지만 출근 자율제, 중소기업 세제 혜택, 청년키움 적금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팀의 분위기가 자율적이라고 만족해한다. 수천만 원의 빚이 아들의 몫으로 남아 있지만 취직 대란 시대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아들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