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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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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19 작은책 열 번째 강연 - 재일 한국인이 쓴 낫짱이야기
  2. 2008.07.24 박노자 강연
  3. 2008.07.24 6월 특집_ 배경내 강연
2008. 8. 19. 11:00 기획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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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열 번째 강연 - 재일 한국인이 쓴 낫짱이야기

8월 21일 목요일 7시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 김송이 선생님 강연이 있습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는 한국은 어떤 사회일까요. 어릴 때부터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살아온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학교에서 '가난뱅이 센진'이라고 늘 놀림받고 차별을 받으면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온 김송이 선생님. 어릴 때 이야기를 《낫짱이 간다》《낫짱은 할 수 있어》(보리출판사)라는 책으로 냈습니다. 어릴 때 주눅 들어 있는 아이들이 이 책을 보면 자신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누구든지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녀를 씩씩하게 키우고 싶은 부모님들, 또 자신들도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은 분들, 그리고 우리 동포들이 멀리 떨어진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고 싶은 분들은 이번 주 목요일 작은책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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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송이 선생님은 194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일본 도쿄에 있는 조선 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오사카 조선 고등학교에서 28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일본 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면서, 두 나라이 작품을 번역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차별에 맞선 조선 아이 낫짱 이야기《낫짱이 간다》《낫짱은 할 수 있어》를 썼고, 일본의 전쟁 책임을 다룬 만화 《맨발의 겐》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권정생 선생님 동화《밥데기 죽데기》

박기범 동화집《문제아》같은 우리 아동 문학 작품을 번역해 일본에서 펴냈습니다. 

약력 

1959년 3월 오사카시립 후카에소학교 졸업

1962년 3월 오사카시립 도요중학교 졸업

1965년 3월 오사까조선고급학교 졸업

1969년 3월 조선대학교 문학부 졸업

1969년 4월 ~ 1996년 3월 오사까조선고급학교 교사

현재 일본 긴끼대학 등에서 강사로 일함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맹원

국제고려학계 회원

 

저서에 중편소설 <조청반장> 등

역서에 일본어를 한국어로 옮긴 <맨발의 겐>전 10권

한국어를 일본어로 옮긴 <밥데기 죽데기> , <문제아>,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우리들의 손>, <비밀의 섬> 등

posted by 작은책
2008. 7. 24. 11:57 기획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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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선생님 강연이 7월 24일 작은책 사무실에서 열립니다.
'대한민국 주식회사'라는 제목으로 박노자 선생님이 한국을 보는 눈을 독자님들에게 보여드립니다.

박노자(朴露子, 러시아어: Владимир Тихонов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1973년 ~ )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진보주의자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의 동방학부 조선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대한민국으로 귀화했으며,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의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아웃사이더의 편집위원 중 한명 이다.

한국어로 쓴 여러 책이나 기고문 등을 통해 토종 한국 사람보다 날카롭게 한국 사회 각분야의 모순점을 진보주의적 관점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한겨레 21에 컬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당신들의 대한민국》
《당신들의 대한민국2》
《나를 배반한 역사》
《우승열패의 신화》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하얀 가면의 제국》
《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과 공저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허동현과 공저
《박노자의 만감일기》
posted by 작은책
2008. 7. 24. 08:58 기획 특집

0123
기획 특집 -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자본주의와 청소년 인권_ 배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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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서 여행을 한번 떠나 보실 거예요. 한 분은 눈을 감고, 출발점에서 펜을 들고 여기 도착점까지 와 주시면 되거든요. 동글동글 이 복잡한 길을 따라서 여기 도착하실 건데요. 옆에 계신 분은 절대로 손을 잡거나 하시면 안 되고 다만 말로만 눈을 감은 분이 잘 도착할 수 있게끔 설명을 해 주시면 돼요. 눈을 감으신 분은 절대 중간에 눈을 뜨시면 안 됩니다. 자, 시작해 볼까요?

쭉 살펴보니 비교적 둥글둥글 그려진 길도 있고 삐뚤빼뚤 그려진 길도 있네요. 다른 데서 해 보면 이렇게 계단을 그리듯이 그려지는 길도 있고 밖으로 빠졌다가 이렇게 다시 찾아오는 길도 나옵니다. 요 모양의 차이가 왜 생겨날까? 눈을 감으셨던 분, 잠깐 손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짧은 시간인데 왜 이렇게 길이 멀게 느껴지는지, 그렇죠? 눈을 감고 길을 찾아가시는 동안 자기한테 편했던 이야기, 찾아가는데 힘이 됐다 싶은 이야기가 혹시 기억나시나요?

“잘하고 있어요. 조금 남았어요. 왼쪽, 오른쪽. 잘하고 있으니까 쭉 가라.”

아, 그러셨군요. 그러면 이번엔 안내를 해 주셨던 분. 내가 이 말 하니까 이 사람이 좀 잘하는 것 같더라 싶은 말은 뭐였나요?

“지금처럼만 하세요.”

아, 지금껏 잘해 왔다는 말, 신뢰를 보여 주는 그런 말들이었군요. 그럼 이번엔 내가 이 말을 해서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렸다거나 듣기에 불편했을 것 같다 싶은 말이 있었나요? 서로 방향이 달라서 오른쪽, 왼쪽이 서로 다른 경우, 안내해 주는 사람이 너무 다급하게 상대방을 제지하는 경우. 걱정되는 마음에서 멈추라고 한 건데 갑자기 스톱하니까 눈을 감은 사람이 당황해서 자기 속도나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경우도 있죠. 또 왼쪽으로 1센티미터, 오른쪽으로 1센티미터,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정확하게 설명해 준 것처럼 들리잖아요. 그런데 이런 말은 동그라미의 느낌을 잃어버리게 만들지요. 내가 원의 어디쯤을 돌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말인 거지요.

우리가 주어진 그림처럼 길을 비교적 원만하게 돌 수 있으려면, 설령 이렇게 길을 잠깐 벗어나더라도 다시 길을 찾아서 오도록 하려면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해요. 길을 가는 사람이 자기를 믿고 갈 수 있게끔 신뢰를 보여 주는 말, 그리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 예를 들면 두 사람이 방향이 달라서 서로 헷갈린다 싶으면 빨리 자리를 옮겨 방향을 맞춘다거나 제가 왼쪽 오른쪽이라고 할 때 당신 처지에서 하는 말이라고 빨리 이야기를 해 주는 것. 혹은 눈을 감은 사람이 처음 이미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를테면 지금 원의 윗부분을 통과하고 있어요, 자 슬슬 내려가시면 됩니다, 이런 식의 말들 있잖아요.

이 짤막한 활동으로도 우리가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가 드러나지요. 우리가 소통이라고 믿는 것들이 굉장히 지시적이고 권위적인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눈을 감고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어쩌면 어린이 청소년들일 수 있겠다, 그리고 안내하는 사람이 보여 주는 태도는 우리 사회가 어린이 청소년을 양육하는 하나의 방식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라고 말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는 어린이 청소년에 대해 굉장히 많은 기대와 관심을 보내지요. 그러나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이 청소년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과연 존중하는 것과 일치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증거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여기에서 하는 말이 모든 사람은 타고난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는 거예요. 이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굉장히 혁명적인 힘을 갖고 있지요. 왜냐? 자본주의는 결코 인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할 수 없는 사회니까, 이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 주고 그 잃어 버린 권리를 찾기 위한 당사자들의 투쟁에 굉장히 힘을 주는 말이 바로 인권이지요. 근데 그만큼이나 인권은 정치적 수사로 많이 사용돼죠. 때문에 인권을 보장한다는 게 과연 뭔가에 대한 고민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는 인권은 보편적이다라는 말이 현실에선 거짓말인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죠. 여성은 남성보다 미성숙하다,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 이런 이야기들을 오늘날 공적인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얘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적어도 그게 정치적 교양으로는 안 되는 얘기라는 건 알아요. 마음으로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러나 “애들은 좀 모자라잖아”라는 얘기는 어떻습니까? 여기 청소년들도 와 계시는데, 이 얘기는요 집에서나 거리에서나 학교에서나 방송에서 위엄을 잡고 토론하시는 분이나 국회의원 나으리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대놓고 거리낌없이 하는 얘기에요. 청소년들 얼마나 억울한 존재들입니까? 그래서 오늘날 청소년들이 이렇게 얘기하죠. 청소년도 인간이다, 학생도 인간이다.

가정 폭력, 장애인 차별, 아동 학대, 체벌 따위 가운데 폭력이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 없지요. 그런데 모양새가 다른 게 하나 있어요. 바로 체벌이지요. 가정 폭력, 장애인 차별 같은 이런 것들은 이름만 보더라도 자기가 나쁜 녀석이라는 걸 다 얘기해 줘요. 또 이 녀석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법령이 마련되어 있죠. 근데 체벌은 어떻습니까? 이름부터가 나쁜 녀석인지 좋은 녀석인지 헷갈리게 만들고 있어요. 그리고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교육적 체벌은 허용이 되어 있거든요. 뭐가 교육적 체벌이냐, 이게 힘센 사람의 마음이라는 거죠. 인생에서 어린이기와 청소년기를 통과하는 동안 체벌에 안 노출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길거리에서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맞고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 드럽게 안 듣는 녀석이구나.) 그렇죠. 저 아이한테 뭔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죠. 그렇게 생각하도록 훈련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반면에 청소년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가? 때로는 맞을 각오를 하고 얘기를 해야 되는 거거든요. 청소년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좀 많이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적 긴장이 만만치 않아요. 실제로 제 주위에 있는 청소년들 보면 머리카락 하나, 자기가 달고 있는 버튼 하나를 가지고 자기 인생을 건 투쟁을 해요. 사실은 그럴 만한 일이 아닌데 말이에요. 자기 양심으론 ‘버튼을 떼면 안 되는데 내일 또 달고 가면 학생부장한테 개 맞듯이 맞겠지’ 이런 생각으로 버튼을 뗄 때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내가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조건에 날마다 놓여있다는 거죠.

아는 선배가 영국에서 몇 년 살다가 들어왔어요. 영국에서 유치원 다니던 둘째 아이가 들어와서 우리 유치원에 다녔는데 6개월 동안 유치원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대요. 이 선배가 너무 걱정이 돼서 왜 그랬는지 물어봤대요. 선생님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못 알아듣겠느냐고. 여섯 살 꼬마가 하는 말이 “유치원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야. 선생님들만 얘기하는 곳이야.”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들은 아이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그만큼 인권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어요. 아이들은 좀 뭔가 미성숙하고, 아직은 배워야 될 때라고 생각하죠. 미성숙하면 어떻습니까? 실수를 많이 하고 많이 다칠 것 같아요. 위험한 일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보호와 통제를 위한 제도나 관행이 발전을 하죠. 그러면 아이들이 다양한 삶의 경험, 이런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는 거죠. 그러다 보면 사람이 무기력해지는 거예요. 무력화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봐, 애들은 모자라잖아. 이렇게 해서 다시 미성숙하다는 기존 관념을 정당화해 주는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필요합니다. 어린이 청소년은 원래 부족한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 사람들을 미성숙하게 무력하게 기르고 있는 건가?

20세기는 아동관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 시기예요. 아이들이 너무 학대나 착취에 방치되어 있다, 그래서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데 눈뜬 게 20세기 초반이에요. 이를테면 19세기 영국에서 어머니가 아이를 때려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이 어머니를 처벌할 근거 법령이 없어서 동물학대금지법을 적용했어요. 이런 현실 때문에 아동의 보호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어요. 20세기 중반에 또 한 번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제 더는 보살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자기 결정과 참여의 기회를 어떻게 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 시기에 프랑스나 영국 이런 나라에서는 중요한 도전이 일어나요. 청소년 당사자들에 의해서. 60년대 말 영국에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인가 그런 조직이 생겨요. 이 학생들이 권위주의적인 교육에 도전하기 시작했죠. 학교는 감옥과 다름없다, 교육에서도 민주주의가 필요해, 왜 그 우리 의사가 아니라 부모의 동의를 묻느냐, 두려움 없이 불만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양심에 반하는 종교 교육이나 예배는 거부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는 거죠. 이런 도전의 결과로 여러 가지 변화들이 일어나요. 이를테면 엄마아빠가 이혼할 때 누구랑 함께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부터 법정에서 어린이, 청소년들이 직접 소송의 당사자가 될 수 있게끔 하는 그런 보완책들이 마련되거나 선거 연령이 낮아지거나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로 유엔에서 1989년에 아동권리협약이 채택돼요. 우리나라도 이 협약에 가입이 되어 있어요. 이 협약의 정신을 기억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요. 첫째 아동은 사람이다. 아동도 인권의 주인이라는 이런 얘기지요. 두 번째는, 아동기는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시기로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오늘 그 아동기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얘기를 하거든요. 놀 권리, 아동은 놀이를 통해서도 배운다, 이런 얘기들을 여기서도 같이 하고 있는 거죠. 그 다음에 아이들은 누군가의 소유물이나 도구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이다라는 정신. 그래서 아동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아동 자신의 최상의 이익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근데 우리는 그게 다 아이들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대신 결정해 주죠. 그래서 네 번째 정신이 이거예요. 최상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때 아동 자신의 의사를 존중하라. 여기서 아동은 18세 미만의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거지요. 여러분은 양심의 자유가 있습니까. 있죠. 두 살짜리 아이에게 양심의 자유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낯선 질문이죠. 하지만 생각을 해 봐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럼 유아 세례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거예요. 일단 청소년 인권을 얘기할 때 학교부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여기 오신 청소년들 보면 교복을 입고 오셨지요. 이름표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박음질이 되어 있죠. 청소년들에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2월 광명에 있는 진성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옥상에 올라가서 종이비행기 시위를 해요. 학교가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아서. 학생들이 직접 동영상을 만들었는데 꼭 보세요. 학생들이 종이비행기 시위를 하고 난 다음날 학생부장 선생님이 방송을 합니다. “여러분, 어제 종이비행기 시위 잘봤습니다” 하고 시작하는 방송. “선생님들 바보 아닙니다, 노력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비판적인 사고 부정적인 사고 방식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대학생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진성고 파이팅!”으로 끝나는 이 방송. 가장 끔찍했던 말이 “여러분 사랑합니다” 하는 말이에요. 명문대 입학해 줄 여러분, 너무 사랑한다는 겁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보면 교육에 대한 장이 있어요. 이 책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법을 다룬 책이잖아요. 이 책에서 이 얘기를 하거든요. ‘하층민을 교육시키면 정부 정책에 대해 방지하거나 불필요한 반항을 더 적게 하게 될 것’이다. 브레히트도 이렇게 얘기해요.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 교육이다. 복종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 사실 학교가 하는 역할은 여러 가지지만, 저는 통제 기관으로서의 본질, 이거를 잘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강의석 씨, 이 사람 기억하실 겁니다. 2004년 학생의 종교 자유 얘기를 꺼내 기독교 사학 자본을 깜짝 놀라게 한 사람이지요. 이 사람이 종교 자유 얘기를 꺼내 가지고 퇴학을 당했는데요. 퇴학 이유를 보면 네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 조용한 학교에 괜히 종교 자유 어쩌구 저쩌구 얘기를 꺼내가지고 주위 학생들을 선동하고 질서를 교란했다. 두 번째는 안에서 조용히 얘기하면 될 것을 괜히 밖에다가 언론에다가 떠들어 가지고 대광고등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세 번째는, 이 학생이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방과 후에 1인시위를 했는데 학생이 어떻게 감히 시위를 하느냐였어요. 학생 신분에서 벗어났다. 네 번째는, 첫날 시위를 하고 다시 시위를 하러 나가려니까 이 학교 선생님이 막았죠. 하루는 봐 줘도 두 번은 못 봐 준다 나가지마. 근데 이 학생이 “선생님 제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겠습니다” 하면서 나간 거예요. 그래서 교사의 정당한 지도에 불응한 게 되었지요. 이 모든 걸 한마디로 정리하면 닥치고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어라 이런 얘기잖아요. 지금은 그런 일이 없느냐? 저희한테 계속 제보 들어오는 사건들을 보면 그런 일들이 여전한 학교의 일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거든요.

학교는 또 거짓말도 굉장히 잘 포장을 하죠. 점점 더 집의 경제 수준이 학업의 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이 높아지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어요. 부모의 교육 수준에 따라서, 소득 수준에 따라서 실업계로 가느냐, 일반계로 가느냐가 결정되지요. 그런데 학교는 마치 열심히 하면 누구나 성취가 가능한 것처럼 포장을 해요. 교복 문제만 봐도 그래요. 학생들이 교복을 편하다고 얘기해요. 편하다, 신경 안 써도 된다, 안 꿀려도 된다, 이렇게. 그런데 교복의 사회적, 정치적 기능이 뭐냐에 대한 질문이 필요해요. 이 시기에 똑같이 해 놓는 이유가 뭘까? 저는 이게 계급 갈등을 관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두 번째는, 어린이 청소년 인권과 관련해서는 가족 체계 문제를 들여다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동학대를 금지하는 법도 마련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래요. 당장 우리 옆집에서 그 집 부모가 아이를 엄청나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양육한다고 할 때 어떻게 합니까? 그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 행동을 제지하나요? 이게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 같이 인식되지요. 아이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를 그 부모의 권한으로만 보는데 익숙한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인 거죠. 그러다 보니까 이 아동 학대를 예방하기 위한 캠페인 이런 것들을 하는 사람들이 학대받은 아동의 몸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호소를 하는 거예요. 아동을 대하는 사회 방식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지요. 가족 체계와 관련해서 저는 여기 자녀 분과 함께 오신 어머님도 계시지만, 그런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의 운명이 얼마나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는가. 아르헨티나에 있는 ‘5월 광장 어머니회’라는 조직이 있어요. 이 어머님들이 군부독재에 저항하다 실종된 반체제인사들을 자녀로 둔 사람들이거든요. 군부가 사람들을 막 잡아다가 수용소 같은 데 가두고 있다가 나중에는 바다에 던지고 정글 같은 데 버려 동물의 밥이 되게 하고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의 어린 자녀를 군부가 체제 협력자들에게 선물로 주거든요. 입양을 보내는 거죠. 왜 그랬을까? 정보기관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체제의 협력자로 자라날 가능성이 높은 거죠. 기독교에서 가장 효과적인 선교 방식 중 하나로 택하고 있는 게 입양 선교라는 거거든요. 아프리카나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가서 부모가 없는 아이를 입양을 해 와요. 그래서 이 아이를 선교사로 길러서 그 지역에 다시 보내요. 아이를 선교사로 만들 목적으로 입양을 하는 것, 이것이 어린이 청소년들이 가족 안에서 길러지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지요. 이렇게 가족 단위로 아이들의 삶이 쪼개져 있고 그 가족 안에서 부모의 가치관에 따라서 그대로 영향을 받는 게 아이들의 삶이지요. 또 하나 가족 단위로 가족의 생계가 연계되면서 청소년들이 하는 노동, 알바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사회에서 평가가 절하가 되는 거죠. 이들이 실제로 동일한 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 아이들의 노동은 보조하는 노동이라는 거잖아요? 보조하는 노동이기 때문에 적게 주는 게 당연한 거라는 거죠. 지금도 청소년 노동, 알바 조사를 해 보면은 최저 임금보다 훨씬 더 안 되는 돈을 받고 일하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과거와 달리 근대사회에 굉장히 중요한 특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의존적인 아동기를 보낸다는 거고, 그 아동기는 학교 교육 기간이 연장됨에 따라 갈수록 더 길어지고 있다는 거죠. 그만큼 사람들은 더 미성숙해지더라는 거예요. 이 역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해결책을 마련해야 해요. 칠레에서 고교생 7천여 명이 나와서 교육 재정을 확보하라는 시위를 했지요. 프랑스에서도 청소년들이 나와서 최초고용계약 이런 문제 있는 법안을 철회시켜 냅니다. 사회적 주체로서 이 사람들이 거리로 많이 나온다는 거예요. 반면에 우리 청소년들 같은 경우에는 자기 문제를 얘기하면서도 얼굴에 가면을 쓰고 나오거든요. 엄마 아빠한테 걸리면 죽어요, 이렇게 얘기해요. 실제로 걸려 가지고 다시는 인권 운동 판에 못 오는 친구들이 여럿 돼요. 자기 양심에 따라 학교와 한번 맞짱을 떠보겠다 이렇게 한 친구들이 그 다음 날 보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요. 왜? 엄마 아빠가 돈 끊는데요. 이러면 끝이에요. 얼마 전 학교자율화 조치를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를 했잖아요. 이게 미칠 사회적 영향이 굉장히 클 텐데, 아침밥도 못 먹고 0교시 강제 보충 이런 게 보편화되는 게 아니냐, 우리 애들 체력도 나쁜데 완전 골병 들겠다 이러면서 반대 운동이 일어나거든요. 저는 정말 우리가 걱정할 게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말 가장 큰 문제는 청소년들이 생각할 시간, 사회에 한 번이라도 참여해 볼 시간, 그런 걸 통째 빼앗기는 거. 그 동기마저 꺾어 버리는 것, 이게 학교 자율화 조치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청소년을 사랑할 것인가? 이 질문이 필요합니다. 랭스턴 휴즈라고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시인이 있어요. 이 사람이 쓴 ‘민주주의’라는 시를 봤을 때 청소년들을 많이 생각했거든요. 이 사람은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했던 분인데, 이 양반이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나는 저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 신물이 난다, 내일이 되면 좋아진다는 따위의 말, 내 자유는 내가 죽은 뒤에는 필요없다. 나 또한 여기에 살아있으니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요구한다. 백인들이 흑인의 권리를 유예시키는 방식이 바로 내일이 되면 좋아진다는 말이었지요. 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려, 권리는 졸업한 후에나 찾아라, 이런 이야기를 청소년들이 듣고 있어요. 청소년들에게 바로 지금을 되찾아 주지 않으면, 청소년들이 당장 골병들고 상처받고 이런 문제뿐 아니라 이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균열을 내는 게 불가능해요. 저항할 동기를 잃고 그 동기를 계속해서 꺾어버리는 사회, 한번 얘기를 했다가 이거 피 보는 일라는 걸 뼈저리게 배우고 순응하는 거를 일찌감치 깨닫도록 만드는 이 사회, 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사회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두발 자유를 가지고 목숨을 거는 한 친구는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아니 도대체 학교에서 이 말도 안 되는 두발 규정 하나 못 바꾸는데, 사회 나가서 저 억압적인 구조들을 어떻게 바꿀 거냐고. 자기 머리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삶을 자주적으로 관리하겠냐고. 저는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해요.

코르착이라는 분이 어린이 청소년 권리에 있어서는 굉장히 선구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 사람인데, 이 양반이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어린이를 대할 때는 진지하게 부드러움과 존경을 담아야 한다고. 그냥 부드럽게 대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존경을 담아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우리는 아이들의 몸을 함부로 대해요. 전철에서 처음 보는 아이를 보면 ‘아이고 고 녀석 예쁘게 생겼네’ 하면서 막 만지지요. 이 아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러다가 애가 자지러지게 놀라서 울면 ‘애가 성격이 까칠하네’ 이렇게 얘기하는. 이게 우리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인 거예요. 한 초등 대안학교 선생님이 자기들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도 자기 몸을 소중하게 대하는 거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면 낯선 사람들이 함부로 몸을 보거나 만지는 거에 대해 저항할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하셨대요. 이 학교는 교사가 아이들을 자주 안아 주고 신체적인 접촉이 많은 곳이에요. 어느날 시냇가에 가서 아이들과 같이 놀다가 이 선생님이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야 너네들 너무 너무 예쁜데 내가 껴안아도 돼?” 이렇게 한번 물어 보셨어요. 애들이 다들 황당한 얼굴로 보더래요.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응, 좋아 하면서 안긴 아이들도 있지만 오늘은 싫어 이렇게 얘기하는 아이들도 있었대요.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동의를 받는 것이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존경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거죠.

이제 우리는 인권의 세포를 되살리면서 아이들의 삶을 다시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두발 자유 문제만 하더라도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요. 집이 잘살고 부모가 많이 배운 아이들은 두 가지 장점이 있죠. 얘들은 공부도 잘하고 자신감도 있고 교양도 있고 논술도 잘하고 뭐든 다 잘해요. 또 자율, 창의성, 이런 것들을 그 집안, 그 계급의 교양으로서 선사받고 길러지고 끊임없이 격려받아요. 만약 부모와 사이가 안 좋으면 서울로 유학을 가든 외국으로 유학을 가면 되거든요. 그런데 가난한 집 아이들은 어떻게 크느냐? 엄마 아빠랑 정말 안 맞고, 엄마 아빠가 맨날 지지고 볶고 싸워도 이 친구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가출말고는. 그냥 견디는 거예요. 자율성, 창의성 같은 것들은 선사받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두발 자유는 학생들이 보편적으로 획득해야 할 권리임과 동시에 자기 삶을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을 잘 못 갖고 있는 학생들에게 더더군다나 중요한 권리라는 거죠. 저 박음질된 이름표를 탈부착이 가능한 이름표로 바꾸는 문제, 혹은 이름표 없이도 학교 다녀도 되는 문제, 이런 것들이 중요한 정치의 문제가 되어야 하는 거죠. 이런 거 하나 바꾸는 게 청소년들을 사회적인 주체로 대하는 방식을 바꾸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를 해야 될 텐데요. 식탁에 방금 막 불에서 꺼내 온 찌개가 놓여 있어요. 소주 생각부터 나시는 분 있으시죠?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가 식탁으로 다가옵니다. 그 시기가 숟가락으로 이것저것 다 헤집어 보고 막 이럴 때잖아요 그걸 통해서 세상을 탐색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때지요. 이 아이가 이 뜨거운 찌개가 너무너무 궁금해서 손을 갖다 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일단 잡아야죠.) 아 네, 손을 딱 잡는다. 또요? (아니 손을 잡아서 그 손을 갖다 이렇게 대 줘야죠.) 네, 자기도 인간인데 뜨거우면 떼겠지요? 대응 방식이 다양해요. 아이 손을 낚아채면서 위협, 공포를 주는 방식이 있겠죠. 어떤 분들은 아예 관심사를 다른 데로 돌리죠. 딸랑딸랑 여길 봐 장난감 주면서 이렇게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분. 또 어떤 분은 찌개를 아예 치워 버리죠. 애 앞에서 뭐 하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겠네 하면서요. 이런 분도 계시지요. 아이가 찌개 안에 손을 집어넣으면 큰일이 나잖아요. 대신 이게 뭔지 궁금하니 하면서 살짝 대 보게 하는 거죠. 아이가 뜨거우니까 손을 떼겠지요? 이렇게 김이 나는 것은 뜨거운 거니까 조심해야 한단다 이렇게 얘기해주면 되지요. 이렇게 아이의 호기심을 꺾지 않으면서도 아이를 보살피는 그런 방식도 있잖아요. 이 네 가지 대응 방식의 차이가 사실은 어린이기 청소년기를 통틀어서 이들을 대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가 혹은 나는, 우리 자녀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이런 질문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청소년들이 청소년기에 두려움 없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도록 격려받는 사회를 만들어야지만 불의를 보면 성급히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청소년들의 저항을 격려하는 사회를 만드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게 이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는 힘을 또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들만 해도 그렇게 자란 게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런 새로운 만남을 기대를 해 보면서 제가 준비해 온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박수)

질문과 답변

한윤기(직장인) _ 안녕하세요. 직장인인데요, 한국에서 양심적인 사람, 진보적인 사람조차도 청소년 인권 문제에 대해서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자기 삶과 머리가 분리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이런 게 저는 극복되기 힘든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답변-그렇죠. 그거는 진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생각하는 대로 안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린 시절에 오늘 지금 내가 행복한 길을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격려받는 것, 저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얘기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제 생각은 그래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지금 청소년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자기 느낌에 확신을 갖고 작은 것부터 도전하는 그런 것 없이는 이 사회가 안 움직인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선생님들은 입시 문제가 풀리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을 한다거나 이 문제는 너무나 주변적인 문제로 생각을 하는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서 전체 운동 차원에서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구륜휘(학생) _ 사회 속에서 가정이나 아니면 학교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사회가 학생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학생들은 그 무기력함에 빠지지 않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답변-어떻게 해야 됩니까? 청소년 인권 운동의 역사가 한국 사회에 한 10년, 조금 기록할 만한 역사라고 하면 그런 정도 되는데요. 그 10년 동안 청소년 인권 운동이 발전해 왔느냐? 아니거든요. 청소년 인권 운동에서 여러 가지 암초가 있죠. 가장 큰 암초는 이들이 청소년기를 졸업함과 동시에 중요한 문제로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도 자신들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청소년들이 많이 늘었다는 것, 그건 굉장히 주목할 만한 변화다,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혼자서 하기 어려우면 친구들이라도 모아서 학교 안의 동아리로 거점을 만들어라, 인터넷에 청소년 인권을 가지고 모이는 공간들이 몇 군데 있거든요. 거기라도 모여라, 그래서 뭐라도 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보라고 해요. 예전엔, 우리 선배들은 귀 밑 3센티미터였는데 내가 그래도 살짝 머리를 더 기를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건 선배들이 그만큼 애써서 투쟁한 대가고, 옆에 있는 학교에서 친구들이 막 짤리면서까지 투쟁한 결과인데, 그런 거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내 권리 문제뿐만이 아니라, 그런 역사적인 사명 의식을 갖는 것도 중요한 것 같고, 그런 사명감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오래 버텨요. 실제로. 그런 것들을 어떻게 잘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끔 할 것인가, 그게 중요하고, 많은 분들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박병학(학생) _ 강의하시느라 수고하셨고, 짤막한 질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요, 언급된 청소년과 아이들이 대한민국 국적의 공교육 궤도에서 공부하고 있는 정상적인 학생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있는 것 같고요, 이를테면 학교 공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나 외국인 국적 아이들이나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나 혹은 대안학교에서 있는 아이들이나 혹은 새터민 청소년들을 위한 인권 운동이 있는지 궁금하고요, 두 번째는 인권 활동가들이 하는 인권 운동과 선생님들끼리 모여서 하는 인권 운동이 맞닿을 수 있는 지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드리면 전교조 내부, 교육 운동 안에서 청소년 인권, 학생 인권에 대한 주장은 여전히 소수의 주장이에요. 체벌에 대해서 합의를 못해요. 두발 자유에 대해서 합의를 못하거든요. 이게 정말 저는 참 안타까운 거예요. 지금 학생들은 교사들을, 혹은 교육 운동을 별로 신뢰를 안 해요. 어떤 선생님 한 분이 그런 얘기를 하시죠. 사실 두발 자유 하나만 전교조가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고 학교를 바꾸면 학생들 80퍼센트가 우리 편이 되는데, 왜 우리가 힘도 없는 학생들 80퍼센트를 대상으로 싸움을 하고 있냐고. 이런 얘기를 하세요. 처음에 전교조가 불법 단체로 법외 단체로 출발했을 때 그 조직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이 바로 거기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막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선생님을 돌려 달라고 엄청나게 시위를 했거든요. 근데 지금 선생님들이 만약 그런 처지에 놓였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올까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 자신 있게 대답하는 교사를 한 분도 못 뵈었어요. 지금 우리 운동의 연대가, 교육이 얼마나 신뢰가 없는지, 운동에서 교사 학생의 연대가 깨지는게 뭔지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사 운동이 저는 먼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육 운동과 인권 운동이 만나는 접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학생 인권을 핵심적인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먼저 해 주셨던 질문은 맞습니다. 그런 한계가 있고, 제가 그런 한계를 갖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제가 접한 경험, 제가 처리해 본 경험의 한계 때문에 그렇거든요. 말씀해 주셨듯이 이주민 자녀들에 대한 노동 착취 문제도 굉장히 심각해요.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 내부에서 또 다른 소수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죠. 그 문제들이 정말 본격적으로 제기가 돼야 되고. 저는 학생들 인권 문제, 이거 이 고비를 잘 넘지 않으면 다른 문제도 참 풀기 힘들다라고 생각해요. 그게 순서가 있다는 건 아니고, 두루두루 청소년 일반 거대한 연대를 만들어서 잘 펴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해요.(강의 끝)

뒷 이야기 _ 김남미(학생)

어른도 아이도 동등한 인간이다

둘씩 짝을 지어 눈 감고 길 가기 게임(종이로)할 때부터 예감했다. 아, 이번 건 절대 안 졸겠구나. 실제로 안 졸았다. 한 시간 반 동안 두 눈 똑바로 뜨고 들었다. 뒤풀이 갈 적에 안건모 편집장님께 이 얘기를 했다. 그때 편집장님이 웃으며 답하신 말이 기억에 남는다. “당연하지, 너희 얘긴데.” 실은, 너희 얘기가 아니었다. 남의 얘기였다. 자신의 일, 자신이 처한 현실임에도 무관심한 아이들을 숱하게 봐 왔고 나 역시 그랬다. 필요 혹은 무난한 일상을 위해 현실의 부당함을 눈감았다.

두발 자유화나 핸드폰 수거 반대 건은 입시 제도 폐지나 대학 평준화 같은 정치적 사안보다 주변적인 것이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지 않나 생각했다. 그동안 학교 문제를 덜 떨어진 교육과 학생에 대한 일상적인 통제,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서 더 비중을 두고 생각했던 것도 첫 번째였다. 강의를 듣고 난 뒤 생긴 큰 변화가 있으니, 두 번째의 비중이 첫 번째 것만큼이나 늘어났다. 배경내 씨가 어떤 학생이 그러더라며 들려주신 말이 너무 와 닿았다. ‘내 머리 하나 관리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주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겠냐’. 내 머리카락을 내 맘대로 하는 것은 권리라 하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당연한 건데, 내 머리에 대고 자르라 마라 남이 명령한다는 것 자체가 실은 참 말도 안 되는 일인데도, 나는 그동안 왜 이토록 맥없이 내 권리를 포기해 왔을까. 하다 하다 이젠 신체의 자유까지 간섭하는 이 어이없는 억압에 왜 이상하다는 감정 한 번 느껴 보지 못하고 5년여를 순응해 왔을까. 확실히 마음속에 심어 둔다. 잘못된 규칙은 지켜선 안 된다. ‘귀찮은데, 대충’ 이 아니다. 내 자주성을 포기하느냐, 지키느냐의 문제다. 타인의 의사와 강요에 내 의사를 포기하고 복종하는 순간, 나는 내 자주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머리 길이’라는 성인들이라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는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한 두발 문제는 내 자주성과 연결 짓는 순간 절대로 사소할 수 없게 된다. 학생들의 두발 자유화 운동은 단순히 더 멋을 부리고 싶다는 욕구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부당한 억압에 굴복해 내 자주성(내 신체를 내 맘대로 하고, 개성을 표현할 당연한 권리)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강의에서 온몸에 학대받은 자국이 있는 아이의 사진을 보여 주며, 이런 식으로 전신이 노출된 어른 사진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데 순간 멍해졌다. ‘보호’라는 개념에는 ‘존중’이 결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보호를 제공받는 대가로 동등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는 박탈당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러고 보니 아이와 어른이 맺는 관계는 언제나 수평이 아닌 수직이었다. 아이는 그저 아이로 취급받을 뿐, 나와 같은 인간으로써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인격체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이번 강의를 통해 청소년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문제의 원인으로 입시 체제보다도 더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선생(어른)이 학생(아이)에게 가지는 권위와 그것 때문에 허용되는 억압, 넓게는 아이와 어른의 수직적인 관계와 아이를 보호 혹은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였다.

다들 그리 여기고 있다고 해서 무작정 관습에 물들어 있어선 안 된다. 청소년들 스스로가 약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른이 권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아이가 어른의 권위와 통제를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약자의 위치에 서지 않을 권리, 보호를 핑계로 통제를 거부할 권리, 그것이 청소년 인권이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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