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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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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13. 15:57 기획 특집

<작은책> 202011월호

특집_ 전태일 열사 50주기, 아동·청소년 노동

 

 

열세 살 때 나는 7번 시다였다

신순애/ 열세 살 여공의 삶저자

 

 우리 아버지는 1919년 남원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죽지 않기 위해 산속에서 약 6개월을 살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을 하셨다. 오빠들은 한국전쟁 때문에 생긴 장애로 모두가 불편한 몸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어머니는 삯바느질 혹은 품팔이 등으로 겨우겨우 먹고살아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나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포기하고 살았다.

우리 가족은 1965년에 서울로 상경하였고 중랑교 무허가촌에서 살았다. 나는 당시 중랑교 휘경동에 있는 PAT 공장을 찾아갔다. 공장장은 면접에서 "꼬마야, 몇 살이야?" 하고 물었다. 나는 "열두 살이요." 했더니 공장장은 "집에 가서 엄마 젖 더 먹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집에 계신 엄마를 돕고 싶었다. 주인집 언니는 평화시장의 미싱사였다. 나에게 평화시장에서 재봉틀 기술을 배워 보라고 권유했다.

1966년 봄, 나는 평화시장 3층 삼양사 아동복 블라우스 만드는 공장에서 7번 시다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시다들은 다락방 마룻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일을 해야 했다. 그곳에선 옷 라벨 뒤에 번호를 꼭 써야 했다. 왜냐하면 혹시 잘못된 옷이 만들어지면 수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7번 시다였다. 내 옆에는 1번 미싱사와 1번 시다가 있었고, 3, 5, 2번 미싱사와 시다가 함께 있었다. 당시에 S, M, L, XL, XXL, 이렇게 다섯 가지 사이즈가 있었다. 시다들은 일감을 받으려면 다락방에서 내려가서 받아 와야 했다. 여름에는 하루에 9~10번 정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고, 겨울철에는 두꺼운 잠바를 만들기 때문에 서너 번으로 줄어들었다.

1960~70년대 당시 여공들은 열세 살 아동이었다. 사진_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출근 시간은 아침 8시였는데 퇴근 시간은 각자 조금씩 달랐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남에서 다니는 노동자들은 밤 1030분 퇴근, 창동에서 다니는 노동자들은 11시 퇴근, 나는 1120분에 퇴근을 하는데 통금에 걸리지 않으려고 평화시장에서 동대문까지 달려가야 했다. 당시 사장들은 창신동, 신당동 주변에서 다니는 노동자들은 제일 좋아했다. 집이 가까우니까 밤 1130분까지 일을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다들은 점심을 먹고 바로 또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 점심때 도시락 먹고 또다시 일을 했고,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밤 1120분까지 일을 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척추가 바로 서지 못해 건강하지 못하다.

나는 삼양사에서 약 4년 일을 했지만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 7번 미싱사 언니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얼굴은 계란형이었고, 오뚝한 코에 눈이 아주 빛이 났고, 머리는 양쪽으로 늘 따고, 앉아서 미싱을 했다. 약간 여드름도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모른다. 한 번도 이름을 불러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알게 된 1번 시다는 윤자이다. 윤자는 옷을 만들기 위해서 다락방에서 내려가 일감을 받아 온다. 시다들은 쭉 붙어 있는 라벨을 하나하나 쪽가위로 잘라서 미싱사에게 줘야 한다. 1번 시다 윤자는 M자를 자르는데 잘못 잘라 W로 나올 때가 많았다. 1번 시다는 다시 다락방에서 사다리로 내려가서 받아 오는데 미싱사들은 절대 그냥 주지 않고 혼을 냈다. 1번 시다는 혼이 났고 울면서 일을 했었다. 이런 일은 반복되었다. 하루는 내가 "1번 시다, 왜 매번 혼이 나야?" 물었더니 1번 시다가 ", 내가 한글도 모르는데 영어를 어떻게 알아?" 했다. 영어 M자와 W자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1번 시다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하느님, 부처님, 오늘 M자 일감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출근을 한다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M자 사이즈 라벨을 잘라 주는 것을 도와주었다. 라벨 10개 자르는 시간은 약 10초면 충분했기에 나는 그 일을 도와주면서 윤자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삼양사에서 나와 진선미공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윤자는 정전되면 나를 꼭 찾아와 나를 보고 싶어 했다. 윤자와 나는 그 인연으로 1978년에 노조에서 한글반 공부를 조합원들과 함께 배우기도 하였다.

나는 하루 14~15시간 일을 하면서도 기술자만 되면 당시 가장 높은 삼일 빌딩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꾸면서 열심히 배웠다. 첫 월급으로 700원 받았는데, 미싱사는 1만 원~12천 원 정도 받았다. 나는 1만 원만 받으면 우리 가족 생활비를 하고도 저축할 수 있을 거라고 계산을 하였다. 공장에서는 물 한 모금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물 먹고 싶은 것, 배고픈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 참는 것은 미치도록 힘들었다. 화장실 한 번 가면 20~30명이 줄을 서 있어 기다려야 했다.

당시에는 한 달에 두 번, 첫째 셋째 일요일이 쉬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일이 바쁘면 토요일 아침에 출근해서 일요일 아침까지 24시간 꼬박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시다들은 월급을 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추석과 설 명절에 설탕 3킬로그램, 혹은 식용류 1.8리터 받은 기억이 있다.

나는 미싱사가 되어서도 열심히 일을 하였다. 한 달 동안 지각이나 결근을 하지 않아서 가끔 사장님이 가게로 내려오라고 해서 500원을 특별히 받기도 했다.

사춘기가 되면서 생리를 하게 되었다. 생리를 하면 생리대를 자주 갈아 줘야 했다. 재단사는 하루에 한두 번 가는 화장실을 자주 가면 생리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은 하지 않고 화장실만 갔다고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현대판 성희롱이다. 나는 도시락 가방에 천연 생리대를 챙겨 갔지만 장시간 일을 하다 보니 늘 부족했고, 그럴 때마다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속으로 삭이면서 일을 했었다.

1960년대는 밀가루, 우유 가루를 외국에서 지원받았다. 그 밀가루 자루는 잠바 주머니 속으로 재활되었다. 당시에는 약국에서 생리대를 팔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내 주머니에는 교통비 10원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2018년 어느 방송에서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이 생리대 구입할 돈이 없어서 운동화 깔창으로 생리대를 대신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날 밀가루 자루로 생리대를 대신했던 과거로 돌아가니, 내 몸에 진동이 오는 느낌을 받으면서 허탈하기도 했고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19701113일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하며 분신자살을 하였고, 분신 이후 청계노조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잘 알지 못했다.

당시에 나는 진선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공장장은 "평화시장 구름다리 밑에 깡패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어 놨으니 그곳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 나 역시 알지 못했다. 훗날 노조를 알게 되면서 나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 오열하는 사람들과 전태일의 운구를 운반하는 모습. 사진_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우리나라는 2020년 현재 GDP 세계 10위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에 허덕이는 청소년이 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 항거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1960년대 열심히 일을 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2020년의 청소년들은 희망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빈부 격차 때문이다.

1998IMF 사태가 터졌을 때 정부는 공적 자금을 기업에 한없이 지원을 했다. 이제 공적 자금을 사람에게 투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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