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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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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용준 한 명만도 못하냐!(2009년 2월호)
오도엽의 일터 탐방

오도엽/ <작은책> 객원기자

‘여성 크로커다일’을 아십니까? 악어 그림의 상표가 붙은 여성 캐주얼. 이 옷을 만들어 파는 ‘(주)형지어패럴’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날도 바시니’라는 남성 브랜드를 만들어 한국 최고 연기자 배용준을 전속 모델로 계약한 회사이기도 합니다. 이 회사의 최병오 회장은 패션 업계의 신화로 불리기도 합니다. 나이 서른에 동대문에서 허름한 옷 가게를 열어 사업을 시작했고, 25년 만에 여성 캐주얼 시장의 선두에 섰습니다. 샤트렌, 올리비아 허슬러, 라젤로……. 새로 시장에 선보인 브랜드마다 소비자의 호응이 좋았습니다. 2007년도 우리나라 매출 순위 821위, 순이익은 481위를 차지한 알짜 기업입니다. 전해 대비 매출 성장률이 30퍼센트가 넘더군요. 2008년에는 매출이 5천억을 넘어섰습니다. 2011년에는 매출 1조 원 규모의 종합 패션 전문 기업이 되겠다고 야심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에 최병오 회장이 한 모임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을 들은 한 참석자는 ‘이론으로만 떠드는 강사와 달리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배려, 그리고 나눔 경영의 철학을 지닌 분’으로 ‘존경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인간 존중, 나눔 경영.’ 얼마나 우리 사회가 바라는 경영자의 모습입니까.

존경해야 할 최병오 회장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한 기사가 지난해 12월 9일 언론에 나왔습니다. 한 경제 전문 언론에는 사업 수익의 일부를 교육 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한 후원금으로 쓰겠다면서 국제 구호 단체 유니세프와 나눔 파트너십을 체결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같은 날, 이 아름다운 행사장 바깥 풍경을 다룬 인터넷 언론의 기사도 있네요. 앗,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지어패럴 직원이 피켓을 들고, ‘5년 동안 야근하고 일요일 특근한 대가가 해고라니……’ 하면서 울부짖고 있지 않습니까. 설마, 존경스러운 경영자가 있는 회사에서…….

무엇인가 사연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형지어패럴을 찾아갔습니다. 올해 쉰셋인 이재석 씨는 형지어패럴 샘플실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앉으라고 하더니 취재수첩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쏟아 냅니다.


△ 오도엽 기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이재석 씨 ⓒ 작은책


“제가 이 분야에서 30년 넘게 일했습니다. 본래 형지어패럴에는 샘플실이 없었어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알았던 분이 이곳에서 개발실 부서장으로 있었어요. 저보고 샘플실을 만들려고 하는데 와서 일을 해 달라는 거예요. 5년 전 일이죠. 샘플실은 매장에 내놓을 상품을 미리 만드는 일을 해요. 여기서 만든 샘플 옷을 가지고 품평회를 거쳐 제품을 선정하죠. 옷 패턴이 결정되면 재단도 하고 미싱도 하고 다 해요. 이 작업이 혼자서는 힘들거든요. 보통 둘이 짝이 되어 일을 하는데, 저는 아내와 함께 일했어요. 한 사람 월급만 받으면서 둘이 일을 시작한 거죠.”

이재석 씨는 얼마나 가슴에 맺힌 이야기가 많은지 지난 5년의 이야기를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계속 이어갑니다.

“하루 평균 열두 시간씩 회사에서 살며 날마다 잔업을 했어요. 토요일 격주 휴무가 된 지도 한 1년밖에 안 돼요. 명절 휴무 전에는 대체근무도 하고, 공휴일에도 특근을 했어요. 이제껏 근로자의 날에 쉬어 본 적도 없어요. 품평회가 끝나면 보통 샘플실은 잠깐 여유가 있는데, 저희는 그 다음날로 다른 브랜드 샘플 작업을 해야 했어요. 일요일에는 대리점을 방문해 상품 실태 조사를 해요. 제주도만 빼놓고 전국을 다 돌아다녀요. 저는 자가용이 없어 버스나 전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요. 약도 하나 가지고 구석구석에 있는 대리점을 찾아다니려고 하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대리점을 못 찾으면 전화를 해서 길을 물어보면 되는데 회사에서 그걸 못하게 해요. 대리점에 찾아간다는 정보가 새면 안 된다고요.”

대리점을 방문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이재석 씨 목소리가 커집니다.

“이 계통, 봉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많이 배우지 못해 학벌이 낮아요. 경력은 수십 년 되지만 직책은 사원이죠. 대리점을 찾아가 명함을 내밀면 점주들이 깔보기도 합니다. 찾아가면 무척 싫어해요. 본사에서 조사를 나오니 좋아할 리가 없죠. 옷 팔기 바쁜데 왜 찾아오냐, 내가 회장하고 친군데 니가 뭐냐, 뭐 이런 모욕을 받기도 해요. 샘플실 업무도 아닌데, 쉬는 날 나가서 욕만 얻어먹는 셈이죠. 내가 나이가 오십인데……(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소처럼 일만 했어요.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참고 일만 했어요.”

최병오 회장이 샘플실에 들어오면 이재석 부부에게 미안해 하더랍니다. 두 사람이 일하는데 제대로 임금을 챙겨 주지 못한 걸 안타까워 하며 말을 건넸고요. 이재석 씨 부부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았던지, 앞으로 샘플실은 부부 사원으로 채용하라고 했습니다. 회사가 새 브랜드를 출시하며 샘플실 직원을 늘여 갈 때 실제로 부부를 함께 채용했습니다.

지난해에 이재석 씨 부부는 모범 사원으로 뽑혀 사이판으로 해외 연수를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출국에 필요한 서류도 다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1월 12일, 점심을 먹고 작업실에 들어오니 12월 12일 자 해고 통지서가 놓여 있는 것 아닙니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해고를 받아들이죠. 해마다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고, 거액을 쏟아부어 우리나라 최고 연기자를 전속 모델로 쓰면서, 5년 동안 야간에 특근해 가며 죽도록 일한 저희들을 해고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우수 사원은 뭐 하러 선정합니까? 일을 못한 것도, 회사가 무너질 위기도 아닌데 말입니다. 지난해 가을에 주거래 은행이 바뀌면서 새로 선정된 은행이 무료로 경영 컨설팅인가 뭔가를 했어요. 불필요한 인력이 많다고, 한 100여 명인가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나. 그때부터 이유도 모르고 해고 통지가 날아오기 시작했어요. 500명이던 직원이 지금은 400명 정도예요. 불필요한 존재였다면 왜 야근에 특근은 시킵니까? 이렇게 회사 키운 게 누군데요.”

△ 이재석 씨 차영미 씨 부부와 한수자 씨 이광년 씨 부부. 갑작스런 해고 통보에 웃음을 잃었다. ⓒ 작은책


잘나가던 회사를 컨설팅 한답시고 며칠 오가던 사람의 한마디에 백여 명의 직원이 밥줄을 잃었습니다. 꽥 소리 한 번 못하고 나간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해고 통보를 받은 샘플실 직원 여섯 명만이 회사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모두 부부 사원입니다. 여성들은 십대부터 이 계통에서 일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수십 년 동안 쌓은 경력이, 배운 사람들의 세치 혀에 ‘불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재석 씨는 받아들일 수 없어 거대한 기업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선 그래요.‘어디 해 봐라. 오륙 년 걸릴 텐데 법적으로 가 봐라. 버틸 수 있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알고 있어요. 큰 회사에 맞서는 게 어렵다는 거 알아요. 이제 와서 슬그머니 돈 좀 줄 테니 나가서 아웃소싱 받아 일하래요. 저희는 다른 거 필요 없다. 첫째도 둘째도 복직이다. 정말 회사가 어렵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미련 없이 나갈 수 있지만 지금 이거는 아니다. 이랬어요. 제 말이 틀렸나요? 이해가 됩니까?”

틀린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직원을 해고하면서, 수십 명의 기자를 호텔로 불러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사업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최병오 회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강연장에서 ‘인간 존중과 배려’를 강조하시던 최병오 회장은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나눔 경영’ 기업 이미지만 좋게 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쇼’를 하신 건가요? 최병오 회장님, 혹 실수였다면 하루 빨리 해고자를 복직시켜 주십시오.

이재석 씨의 부인 차영미 씨는 해고 통보를 받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눈물만 펑펑 흘렸답니다. 하나뿐인 아들은 군 입대 자원 신청을 했습니다. 한 명의 입이라도 줄여야 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벌다가 한날한시에 쫓겨났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함께 샘플실에서 일하던 한수자, 이광년 부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수자 씨는 손이 덜덜덜 떨려 일이 안 되더랍니다. 해고를 당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자신이 해고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머리가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다가 가끔 현실로 돌아오면 미쳐 버릴 것 같답니다. 정신병자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답니다.

새 옷을 만들 때마다 어떻게 하면 입는 사람이 더욱 편하고 예쁠까만을 생각하며 장인 정신으로 일했던 형지어패럴 샘플실의 세 쌍의 부부. 평생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이들은 오십이 넘어 처음으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여성 크로커다일’이라는 유명 브랜드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형지어패럴이라는 큰 회사에 있으면 수입은 적더라도 좀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한순간에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배용준을 전속 모델로 계약했다는 사실을 앞 다퉈 다루던 언론들,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사랑의 손길을 대대적으로 떠벌리던 기자님들, 여기 한겨울 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겁니까?

더 큰 추위가 노동자를 덮칠까, 무척 두려운 2009년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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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은 끝나지 않았다(2009년 2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정인열/ 코스콤비정규지부 부지부장

2008년 12월 29일 파업은 475일 만에 끝이 났다. 조합원 76명 중 65명은 3개월 이내에 무기계약직 별도직군제로 고용하고, 그 밖에 11명의 고용 문제는 ‘추후’ 협의 후 합의하기로 했다.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회사의 직접 고용을 투쟁을 통해 얻어 낸 이례적인 성과라고 평할 수 있다. 물론 11명(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절반의 승리와 절반의 패배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결이 되면 그 긴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눈물이 나고 아주 감격해서 어찌할 줄 모를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많아서 일까? 아니면 그 이면에 있는 냉혹한 진실 때문일까?

우리가 길바닥에서 먹고 자고 한 여의도는 소돔과 고모라같이 의인하나 없는 곳이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한 가족처럼 일했던 연봉 9300만원의 정규직 동료의 외면과 계속되는 방해는 우리를 더욱더 뼈저리게 춥게 만들었다. 1800만 원 연봉의 비정규직들은 매일 아침 팔뚝질을 하면서, 눈인사도 피하며 출근하는 정규직 동료를 바라만 봐야 했다. 거기에다 타결 막판에 정규직 이기주의를 결국 드러낸 증권선물거래소(코스콤의 원청) 노조 간부들의 반대로 전원 직접 고용 합의가 무산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날은 거래소 앞마당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분신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분신도 못하고, 고공시위도 못하고, 어디 가서 한풀이도 못한 채 우리는 힘없이 그 자리를 떴다. 자기들만의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정규직 노동조합 운동이 결국 비정규직의 정당한 요구도 묵살해 버리는 현실을 겪으면서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이렇게 싸운다 한들 세상이 바뀌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노동자가 저 모양이라면……’ 하는 절망에 또 절망이었다.

그래도 거래소와 코스콤 밖을 돌아보면 우리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않은데 노동자들이 모아 주신 성금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앞으로 파업 투쟁 때보다 더 많은 과제들이 남았다. 합의서가 이행될 수 있게 11명을 포함한 전원이 하루라도 빨리 복직하게 하는 것, 임금과 업무 배치 등 노동조건을 협상하는 일, 노동조합 활동에 관한 일 등이다. 뉴스에는 타결되었다고 하나 우리는 언제 또 다시 거래소 앞에서 농성을 시작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지부에 바라는 게 있다면 상명하복 식으로 일방적 명령 전달을 받는 의사소통 구조가 아닌 모든 조합원이 자유롭게 토론하여 의사 결정을 하고, 지부장은 대장이 아닌 조합원을 대표하고 조합원과 평등한 위치에 있는 그야말로 민주적인 조합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기나긴 파업 기간 중에 깨달았고 그것이 지금도 가장 절실하다. 민주적인 절차 없이 얻은 성과는 한낱 거품에 불과하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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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24. 15:30 알림 / 엮은이의 글




4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8 엮은이가 독자에게
9 원고를 기다립니다
10 작은책을 읽고
11 따르릉! 작은책입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농사꾼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네 전상순
15 이슬 먹고 살 수는 없다 신혜진
19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자 마일주
23 역사 속의 이소선 어머니는 살아 계셨다 김혜영
26 여성의 일과 삶
남자가 사람으로 보일 때 유이분
30 타조알 선생의 교단 일기 이성수
32 살아온 이야기(4) 내가 꿈꿨던 서울이 아니었다 황인오
38 오도엽의 일터 탐방
살고 싶어 철탑에 다시 올라왔다
44 사진 한 장, 느낌 한 줄
45 일터에서 온 소식
여보, 당신은 아직 죽지도 못했습니다 이명숙(가명)
48 세상의 중심에서 십 대가 외친다
언제 꿈 꿀 시간이나 줬나요? 김건방
52 이야기가 있는 들녘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김형주

기획 특집 _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금융 공황과 흔들리는 서민의 삶 박하순
58 강좌
77 뒷이야기 이세경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80 안건모의 삐딱한 글쓰기 내 글이 책에 실렸다
84 깐깐선생의 글 뜯어보기 주어와 술어가 호응해야
88 개구리박사의 다시 보는 좋은 글 멋 부리지 않고 쓰는 글

세상 보기

91 최영주 노무사의 현장 노동법 이야기 희망(?)퇴직한 부부의 산재 신청
93 생각해 봅시다 (1) 이명박과 오바마 사이에 낀 한반도 강정구
98 생각해 봅시다 (2) 청년 실업의 황당한 원인 조석진
101 나라 밖 소식 미국의 경제 위기와 오바마 박경순
105 정태인의 쉬운 경제 이야기 녹색경제학1
109 우리 밖의 우리 사람 인연만 는다 최금희
113 인물 바로 보기 친일인명사전 발목 잡은 장우성 재판 방학진
117 ㅋㅋㅋ 누리꾼 세상 원망소리
118 하종강의 숙제 검사 노동조합은 정치화돼야 한다

쉬엄쉬엄 가요

123 여민락 봉황과 기린과 원앙이 김산하
129 추억 따라 역사 따라 짱돌의 역사 박준성
133 노동자 문화 산책 사랑하라, 봄이다, 사랑하라 박홍규
137 영화 이야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 강성률
140 생태 이야기 고향의 뿌리를 흔드는 골프장 박병상
144 함께 읽고 싶은 책 사람은 밥만 먹고 살순 없다 김승태
146 한 뼘 전시회 감상 임영선 개인전 ‘지상에서(ON THE EARTH)’ 최규화
147 한 뼘 책 소개 아미코의 지구별 환경탐사 보고서 유혜림
148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51 독자사업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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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책
2009. 3. 13. 13:17 기획 특집


[강사 소개]

박홍규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서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공뿐만 아니라 인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를 조명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베토벤평전: 갈등의 삶, 초원의 예술》, 오페라를 그 시대 정치와 사회의 관점에서 살펴본 《비바 오페라》,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 세계를 그린 《내 친구 빈센트》 루쉰의 사상과 문학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자유인 루쉰》, 자유 학교를 위한 순교자로 알려진 페레의 생애를 쓴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 등의 책들을 집필하였으며,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대상 저작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을 국내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2호선 - 첫 번째 방법: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왼쪽으로 도세요. 빵 가게와 정비공장 사이 '마포만두' 골목으로 10분만 쭉 가시면(중간에 부동산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버스 다니는 큰 길이 나옵니다. 큰 길에서 오른쪽으로('HP컴퓨터' 가게를 끼고) 3분 가다 보면 '기분좋은 가게'가 나옵니다. '문턱없는 밥집' 사이에 있는 문으로 들어오세요. (전체시간 13분)

2호선- 두 번째 방법(길을 잘 못 찾으시는 분은)-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똑바로 5분 정도 가시면 '우리은행' 사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왼쪽으로 7분 정도 가다가 큰 사거리 '서교가든'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서교교회'가 나오고 교회 오른쪽에 있는 건물입니다.(이렇게 오실 때는 조금 돌지만 헤맬 걱정이 없습니다) 큰 길가에 있습니다. 1층엔 '문턱없는 밥집'과 '기분좋은 가게'가 있습니다. (전체시간 15분)

6호선 - 망원역 1번 출구로 나오세요. 왼쪽으로 4분 가시다 보면 '성산초교사거리'가 나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5분 가세요. 'HP컴퓨터' 가게 지나 '기분좋은 가게'가 나옵니다.(전체시간 10분)

작은책 전화 (02)323-5391
주소-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5층
작은책 사무실은 5층이지만 겉에서 보면 4층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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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을 굽는 예수' 이적 목사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안건모




민통선에서 공부방을 하는 목사? 밤에는 횟집 주인, 낮에는 횟집에서 독거 노인 밥 주는 목사? 붕어빵을 파는 목사? 들으면 들을 수록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분일까. 12월 11일 5시, 횟집을 찾아갔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불광천 옆 주택가에 자리잡은 조그만 횟집, <이적 시인의 -‘바다가 된 그대에게’ 사량도 세꼬시>라는 이름으로 된 간판이 보였다.

8평 정도 되는 가게에 탁자가 네 개,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책을 보던 이적 목사가 반겨 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적 목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한국의 근본주의 교회를 비판했다.

언제 목사님이 되셨냐고 물었다.

“80년 대에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묘한 이유로’ 쫓겨나게 되죠.”

1980년 2월 무렵, 전두환이 집권하고 계엄 때였다고 한다.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전두환의 안녕과 무궁한 발전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적 목사는 그 조찬기도회가 잘못됐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담임 목사한테 지적을 받았다. 그 길로 이적 목사는 “다시는 교회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고는 전도사 생활을 접었다.
그 뒤 이적 목사는 지방 일간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 그러다가 1980년 10월 느닷없이 삼청교육대로 억울하게 끌려 들어간다.

“산꼭대기 동네에 수돗물이 잘 안 나온다, 공원에 깡패들 득실거려 경찰 단속 손길 아쉽다” 하는 시민들 편을 드는 기사를 좀 썼을 뿐이었다.

이적 목사는 삼청교육대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면서 ‘하나님은 왜 정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가’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이는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붕어빵을 굽고 있는 이적 목사 ⓒ 안건모


그리고 악몽 같은 4주를 보냈다. 풀려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자들은 성적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삼청근로봉사대 6개월 언도(?)를 내린다. “삼청근로봉사대를 갔는데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더라고. 밤이 되면 눈보라 몰아치고 영하 15도 회오리 바람 몰아치는 야밤중에, 팬티만 달랑 입혀 놓고, 연병장에 세워 둬, 거기다가 두 팔 두 다리 벌려 세워 놓고, 그마저도 부족해서 세숫대야에다 물을 퍼 가지고 와 몸에다 물을 뿌리는 거야, 물방울이 탁탁 튐과 동시에 물방울이 몸에 얼어 붙어 와, 그런 살인적 추위 상상도 못해 봤어.”

임근실이라는 사람이 2소대에서 이적 목사가 있던 3소대로 옮겨 왔다. 임근실 씨는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바른 소리를 잘 하던 사람이었다. 전두환 욕도 막 했다. 불침번 서라 하면 “민간인인 내가 왜 불침번을 서냐 ”하며 반항하고 대들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들인 악질 조교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이 친구는 매일 개 맞듯이 맞는 거야. 이 친구 밤마다 불려 나가서 그 겨울에 물고문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 얼굴이 아니야. 나도 같이 물고문을 받았는데 조교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한테 ‘당신은 글쟁이라는 걸 안다. 여기서 개죽음 당하지 말고 살아나가서 글을 써서 자기 죽음과 삼청을 폭로해 달라’ 그러는 거야.”

그날 임근실 씨는 쏟아지는 몽둥이 세례를 견딜 수 없어 개집 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러자 조교들은 개집 구멍을 하늘로 올려놓고 찬 물을 퍼부어 댔다. 임근실 씨는 개집 안에서 요동을 쳤다. 그 뒷날 임근실 씨는 시체로 들려 나갔다.

이적 목사는 꼭 살아 나가서 삼청교육대의 만행과 그이의 죽음을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은 ‘사회보호법’을 만들어 이적 목사를 군 감호소로, 또 청송 감호소로 이감을 보내면서 삼청 최장기수로 만들었다. 이적 목사는 84년 4월 3년여 만에 이른바 모범수로 가출옥을 해 살아나오게 된다.
하지만 바깥도 감옥이었다. 사기꾼, 빨갱이, 깡패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살아야 했다. 이적 목사는 임근실의 유언을 되새기면서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삼청폭로 미수 사건인 양곡상 침투사건으로 공무원자격 사칭, 공갈 등의 파렴치 죄로 조작되어 다시 8개월, 10개월, 두 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 이적 목사가 운영하는 횟집 ⓒ 안건모


이적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인 민족문학에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는 10편의 연작시를 발표하고 뒤이어 11월 삼청 실록수기《삼청교육대 정화 작전》(도서출판 전예원)을 출간한다. 국민들은 독재정권의 잔혹성에 몸서리를 쳤다. 심지어 군사정권에 아부했던 조중동까지 ‘삼청교육대 사망자 사인 의혹 많다’, ‘생체실험의 수기다’, ‘한국판 수용소 군도의 인권 유린과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 보내면서 군사정권을 비판했다.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은 그이를 만난 뒤 당내에 ‘삼청교육대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군사정권을 압박한다.

이적 목사는 김대중을 대통령 만드는 데도 한몫을 했다. 대변인, 지역선거대책위원장, 중앙당 부위원장, 선거 연설원을 지내며 김대중을 도왔다. 결국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 길이 보장될 수도 있었다.

“김대중 정권 때 바다살리기 국민운동본부라는 관변단체가 하나 생겼어, 월급은 없었는데 거기 본부장을 맡으라 그러더라고.”

취임식을 하는 날 친인척한테 받은 단체 후원금 때문에 문제 아닌 문제가 생겼다. 법원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싸우면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적은 민통선에 자신이 건립했던 통일 문학관으로 머리도 식힐 겸 잠시 글 쓰러 들어갔다가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 먹는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통선에 들어간 날 느닷없이 청빈한 참예수를 떠올렸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때 내가 신학교 출신이라는 게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거야. 기독교가 망하기만 바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들어가서 그들과 싸우며 참예수의 변혁 운동을 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니냐. 내가 욕했던 거는 여의도 ㅈ목사와 같은, 한국의 잘못된 기독교 지도자들이 미웠지,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니냐. 귀신 예수가 아닌, 평화와 사랑의 예수, 그 거룩한 삶을 본받아서 실천해 나간다면 나야말로 참예수의 그림자라도 되는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자, 이렇게 판단한 거지.”

△ 민통선공부방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사랑의 붕어빵 봉사회 ⓒ 안건모


이적 목사는 신학대를 편입했다.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 민통선 마을에 빈민 운동을 자원한다. 그리고 알콜중독자 자녀를 위한 아동공동체와 민통선 공부방을 만들었다. 2002년 11월이었다. 그리고 마을회관을 고쳐 민통선 평화교회도 설립했다. 신자는 해병대 군인들이었다. 헌금이 없으니 아동공동체와 공부방 운영하기가 벅찼다. 무료급식과 아동장학사업, 보육사업, 차상위계층자녀발굴보호사업, 체험학습 등 많은 사업을 벌려 놓았는데 후원금 들어오는 곳은 적었다. 그래서 이적 목사는 공동체 운영하기 위해 불광천에 횟집을 차렸다.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도 공동체와 공부방을 운영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더구나 불광천 근처에 사는 독거 노인들에게까지 무료 식사를 대접하는 독거노인급식소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그이의 목회를 좋아하는 서울 교인들과 사랑의 붕어빵 봉사회를 만들어 가게 앞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교인들한테 십일조 헌금 받아서 사랑을 실천했나? 그분 스스로 대중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전도하며 평화를 외치며 박애와 사랑을 실천했단 말이야, 목사의 삶이 예수의 삶처럼 그렇게 돼야 하는 거 아녀? 그래서 내가 만분의 일이라도 그분 흉내라도 내 보려고 이렇게 사는 거지.”

그렇구나. 예수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구나. 한국의 기독교를 싫어하면서 예수가 어디 있나 하고 생각하던 필자는 이적 목사를 보고 예수는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적 목사가 이번에 운영비 마련을 위해 다시 책을 낸다. 《민통선 예수》라는 책이 현재 인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땅에 사는 민중들을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 이명박 장로를 비롯해 그 하수인들, 부디 그 책을 읽고 회개를 좀 했으면 좋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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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