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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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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26. 10:24 알림 / 엮은이의 글

 

4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10 엮은이가 독자에게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12 작은책을 읽고

13 따르릉! 작은책입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4 불쌍한 친구  장남길

18 미안합니다  오정현

21 3년 만에 당선된 ‘운동권’ 총학생회  박재균

23 까칠한 아들 키우기  이남옥

28 나를 채찍질하는 수업  이혜숙

33 여성의 일과 삶

전화기 켜 놓으세요  유이분

38 타조알 선생의 교단 일기  이성수

40 살아온 이야기 (1) 탄광촌을 떠돌며 자란 어린 시절  황인오

46 오도엽의 일터 탐방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고

52 일터에서 온 소식 (1)

법원, 너마저도 우리를  김은경

58 일터에서 온 소식 (2)

선생님, 우리랑 같이 졸업 못해요?  정상용

62 세상의 중심에서 십대가 외친다

서울은 마을이 없다  김수민

66 이야기가 있는 들녘

난, 착하게 살고 싶을 뿐이고  이진천

 

기획 특집 _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박정희와 이명박  진중권

 

72 강좌

86 질문과 답변

92 뒷이야기  정지선

95 만화로 보는 세상  이성열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96 안건모의 삐딱한 글쓰기

100 깐깐선생의 글 뜯어보기

104 개구리박사의 다시 읽은 좋은 글

 

세상 보기

 

108 최영주 노무사의 현장 노동법 이야기  아기도 소중했고 돈도 벌고 싶었다

111 생각해 봅시다(1)  택시 운전사가 살길  기우석

115 생각해 봅시다(2)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민경우

119 나라 밖 소식  카슈미르분쟁, 인도와 파키스탄 갈등  김재명

123 정태인의 쉬운 경제 이야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127 ㅋㅋㅋ 누리꾼 세상

128 우리 밖의 우리  또 다시 희망의 땅을 찾아서  최금희

133 인물 바로 보기  곽태영과 권중희  방학진

 

쉬엄쉬엄 가요

 

137 여민락  저 가마가 식을 때까지  김산하

143 추억 따라 역사 따라  붕어빵과 풀빵  박준성

149 노동자 문화 산책  도스토예프스키  박홍규

153 영화 이야기  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 위의 포뇨>  강성률

156 생태 이야기  우주복 입고 살까?  박병상

160 함께 읽고 싶은 책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김승태

162 한 뼘 책 소개  그래도 열여덟은 아름답다  유혜림

163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67 독자사업부에서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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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병원, 노동자는 파리 목숨
오도엽의 일터 탐방

오도엽/ <작은책> 객원기자

추석을 앞둔 9월 10일 강남고속터미널 너머에 있는 강남성모병원을 찾았다. 터미널과 병원을 잇는 육교에 올라서자 웅장한 글씨가 눈을 가로막는다. ‘2009년 5월, 생명을 존중하는 첨단 병원이 개원합니다.’ 이천억 원을 들여 짓는다는 가톨릭 대학교 서울성모병원.

강남성모병원에서 간호사와 호흡을 맞춰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파견업체를 통해서 고용된 사람들이다. 2년을 계약하고 들어왔고, 계약 기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가야 한다. 계약을 그리하고 일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해고에 아무 문제가 없다. 2006년 10월 1일에 파견업체에 고용되어 2년을 강남성모병원에서 일했으니 2008년 9월 30일에는 계약대로 집에 가서 푹 쉬면 그만이다. 법을 기계처럼 적용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법이란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 그것도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일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파리 목숨으로 여기면 안 된다.

홍석. 그는 서른일곱이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홍석 씨는 5년 전 자신이 다니던 성당을 통해 강남성모병원에 취직을 했다. 이때는 강남성모병원과 근로계약을 맺었다. 홍석 씨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돈보다는 환자들에게 봉사도 하고 사랑을 나눈다는 마음으로 고된 일도 흥겹게 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2006년 9월 28일, 낡아서 잘 굴러가지도 않는 침대를 힘겹게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으며 침대에 누운 환자를 검사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호출기가 울렸다.

“파견업체로 가라는 거예요. 더는 병원에서 직접 고용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딱 3일 남겨 두고 파견업체로 가든지 아니면 출근을 하지 말든지 선택을 하라는 거예요. 정말 얼떨결에 파견업체로 간 거예요. 별 수 없잖아요. 파견업체로 가지 않으면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판인데, 그것도 3일 남겨 놓고 통보를 하는데 어쩌겠어요.”


△ 9월 9일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항의집회를 하고 있는 조합원들. <비정규직 철폐하라>를 외치고 있다. ⓒ 작은책


홍석 씨만이 아니었다. 간호 보조 업무는 2002년 이전에는 모두 정규직이 담당하던 일이었다. 이 업무를 비정규직으로 고용 형태를 바꾸더니 2006년에는 파견업체로 떠민 것이다. 노동자들은 선택을 할 생각은커녕 시간의 여유도 가질 수 없었다. 시장에서 파는 채소와 다를 바 없다. 천 원에 팔리다가 해질녘에는 오백 원에 막판 떨이 신세가 되어도 그냥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팔려 나가면 그만인 존재다.

올해 서른둘인 이미경 씨도 마찬가지다. 다니던 회사가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하자 이미경 씨는 새 직장을 찾아 나섰다. 그때 강남성모병원에서 사람을 뽑고 있었다. 3교대로 일을 한다지만 하루 8시간 근무니 해 볼 만했다. 물론 강남성모병원과 근로계약서를 썼다. 이리 큰 병원이면 안정되게 일을 할 수 있으니라 생각했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장난이 아니다. 말이 8시간 근무지, 잠시도 숨 돌릴 겨를이 없다. 꼬박 8시간을 잔걸음으로 쉴 새 없이 뛰면서 근무를 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겨우 짬을 내서 식당으로 가 식판에 밥을 푸는 순간 호출기가 울린다. 호출기가 울리면 허기졌던 뱃속과는 달리 입맛이 싹 사라진다. 식판의 밥은 고스란히 잔반통으로 들어가기가 일쑤다. 제 시간에 근무가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늘 30분에서 한 시간은 잔업을 해야 한다. 수당도 없는데 말이다.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다가 퇴근시간이라고 나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자신이 담당한 환자의 일은 교대 근무자가 오더라도 자신이 끝내는 것이 마음이 놓인다. 보조 업무라 하지만 사람을, 그것도 아픈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이고, 생명을 다루는 일이 아닌가.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된다. 하루 8시간 넘게 병원 복도와 층계를 오르내리며 뛰어다녔으니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그리고 몸이 아픈 환자를 상대하다 보니 그 긴장은 육체의 피로를 몇 곱으로 가중시킨다.


△ 9월 9일 강남성모병원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조합원들. ⓒ 작은책


물론 이미경 씨도 홍석 씨가 있던 자리에 2년 전에 함께 있었다.

“너무 억울했어요. 찍소리도 못하고 파견업체로 팔려 간 거잖아요. 배추 시래기처럼 버려진 느낌이었어요. 그날 황당하게 파견업체로 버려진 사람들이 터미널 앞 호프집에 모여서 술을 한잔했어요. 울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러면서 다짐을 했죠. 이건 아니다. 다음에는 이렇게 당하지 말자.”

그리고 두 해가 지나고 9월이 왔다. 홍석 씨와 이미경 씨와 배추 시래기가 된 간호 보조 업무를 하던 파견사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한참을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했다.

홍석 씨와 이미경 씨에게, 강남성모병원 간호 보조 업무 파견 직원들에게 “2년 계약하고 들어왔으면서 이제 와서 못 나가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하며 손가락질할 사람 있습니까? 이들이 파견업체에 고용된 직원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강남성모병원에 고용된 사람입니까? 이들이 파견업체에서 일했습니까, 강남성모병원에서 일했습니까? 이들이 찍소리 하지 않고 나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가라사대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나무를 만들고 꽃을 만들었듯이, 강남성모병원 가라사대 간호 보조 업무가 정규직이 되라 하고 비정규직이 되라 하고 파견직이 되라 하면, 그 가라사대에 따라 고용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가톨릭의 정신입니까? 그게 생명 존중입니까? 수천억을 들여 짓는 새 병원 담벼락에 자랑스럽게 써 둔 ‘생명을 존중하는 첨단 병원’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인가요? 새 병원에는 70평짜리 초호화 병실을 만든다고 하는데요, 기업 CEO들이 입원을 해서도 회의를 할 수 있는 초특급 병실을 갖춘다고 하는데요, 가톨릭에서는 돈 있는 사람만 받아들이고, 돈 없는 이들은 2년마다 해고를 묵묵히 감수하며 일하는 세상이 옳은가요?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이들이 강남성모병원 간호부 소속 사원으로 되어있던데, 간호부의 부장님 과장님들이 수녀님이시던데, 수녀님! 당신 부서의 사원들이 시장판 배추 시래기 취급을 받고 있는데 침묵하거나 동조하거나 심지어 앞장서시는 것이 당신이 믿는 신앙에 따른 행동이신가요?

그리고 추석이 지났다. 강남성모병원에 비정규노동자들이 천막을 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천막이 세워진 몇 시간 뒤 강남성모병원이 용역업체 직원들을 동원해 천막을 철거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천막을 철거하는 과정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들려왔다.


△ 농성장 천막에 내걸린 현수막. ⓒ 작은책


9월 30일.

홍석 씨와 이미경 씨의 강남성모병원 마지막 근무하는 날 찾아갔다. 스무날 전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이미경 씨의 눈이 탱탱 부어 있었다. 웃을 때마다 콧잔등에 주름을 가득 지으며 까르르 자지러지던 이미경 씨는 보이지 않았다. 분홍 근무복 위에는 가을 하늘 빛깔을 가득 담은 조끼를 입었다. 결국 조끼를 입고 마는 구나. 칙칙한 청색도 뜨겁게 달궈진 붉은색도 아닌 가을 하늘빛 조끼라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설마 저 푸른 가을 하늘이 이들의 소박한 소망을 저버리겠는가 하는 위안을 했다.

“언제부터 로비에서 연좌 농성을 들어가셨어요?”

“연좌 농성 아니에요. 아침부터 병원 돌며 저희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 로비에서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왜 저희가 이런지 호소를 하는데 무릎이 팍 꺾여 이 자리에 주저앉은 거예요. 그동안 설움이 복받쳐 올라 주저앉아 있는 거예요.”

인사팀 직원들이 다가와 설움에 복받쳐 주저앉은 이들에게 나가라며 협박을 하였고, 병원의 연락을 받은 서초경찰서는 정보과 형사를 보내 연행을 하겠다고 통보를 한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 노동자들은 연행을 하든 말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투석을 받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병원을 온다는, 자신도 아이엠에프 때 정리해고를 당했다는 아저씨 한 분은 꼭 강남성모병원에서 계속 일을 하라며 요구르트를 건넨다. 휠체어에 링거를 달고 온 한 환자 분은 바나나 우유와 빵을 담은 하얀 비닐봉지 2개를 건네고 사라진다. 비닐봉지를 열던 박정화 조합원이 갑자기 굵은 눈물을 쏟아 내며 병원 로비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갔더니 손에 자그마한 쪽지 하나를 보여준다. 방금 전 우유를 건넨 환자가 봉지 안에 담아둔 쪽지다.

“힘내세요.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하며 응원합니다.^^”


△ 어느 환자가 투쟁 중인 조합원에게 건넨 음료수와 <힘내세요.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하며 응원합니다.>가 적힌 쪽지를 보고 있다. ⓒ 작은책


이미경 씨 병동에 있던 분이라고 한다. 환자들은 안다. 이들이 얼마나 병원에서 소중한 사람인지를. 아픈 자신들에게 이들이 보여 준 헌신과 애정을 환자들은 안다. 함께 일한 간호사들도 알고, 병원 청소를 하는 용역 아줌마들도 알고, 주차 관리를 하는 용역 아저씨들도 안다. 파견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이들이 강남성모병원 직원임을 알고, 반드시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 정말 환자들의 생명 존중만큼 노동자의 생명도 존중받아야 함을 세상은 알고 있다.

약물로도 수술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 2009년 광우병, 멜라민과 함께 온 사회를 엄습하고 있다. 비정규직,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사회가 무섭다. 가톨릭에서조차.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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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인지 집착인지
   김신애/ 가사 노동자


언젠가 어머님 일로 신랑과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시부모님이 서울에 오신 어느 날 저녁. 반찬으로 된장국을 끓여 놓았는데 외출하고 들어오신 시부모님이 동태찌개가 드시고 싶다고 했다. 시간이 벌써 6시가 가까워져 “내일 끓여 드릴게요” 했는데 싫다고 하시며 지금 끓이라고 하셨다.

주섬주섬 챙겨서 집을 나섰는데 눈물이 흘렀다. 동태를 사다가 다시 저녁을 지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신랑을 마중 나갔다.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다른 말은 필요없다. 그저 “수고했어” 한마디면 모든 것이 평화로우련만, 이 바보 같은 신랑은 여자 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래서? 해 드렸으면 된 거 아니야? 그 정도도 못해? ”

위로받고 싶은 나의 마음에 독침을 꽂는다.

“뭐야?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

그렇게 몇마디 주고받는데 어느 순간 스스로 감정이 격해진 신랑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내게 말했다.

“너한테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굶더라도 우리 부모님께는 제일 좋은걸루 해 드리고 싶어.”

여기서 너희들은 나와, 아이들 즉 처자식이다.

그 깊었던 절망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저렇게 절절한데, 저토록 눈물겨운데, 그곳에다 한마디 더 하면 한 대 칠 기세다. 단언하건대, 위의 언쟁에서 부모님에 대해 막말하고 큰소리치지 않았다. 아마 그랬다면 그렇게 말싸움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터. 남편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에 대한 좋지 않은 소리는 단, 한마디도.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분들께는 반쯤 닫아 버렸다.

낼모레면 40인 아들인데, 그 아들을 일곱 살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마스크 하고 다녀라, 찬물 절대 먹지 말고 미지근하게 해서 먹어라, 머리 스타일은 이렇게 해라, 옷 색깔 맘에 안 든다, 누가 고른 거냐, 라면은 절대 먹지 말아라, 오늘 저녁에는 뭐 해 먹였느냐… …. 이젠 나에게 맡겨도 될 일들을 수시로 체크하시는 어머님. 참 힘들다.   

사랑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는 둘 사이의 묘한 감정. 그 사이에서 상처받고 아파했다가 마음을 닫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홀시어머니도 아니다. 버젓이 아버님도 곁에 계시는데, 왜 그토록 아들에게 집착하는지 그 까닭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제주도 토박이인 시부모님은 내가 결혼을 할 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단다. 첫째, 자신의 아들이 키가 작기 때문에 커야 하고 둘째, 반드시 제주도 여자이어야 하며 셋째, 예수쟁이는 죽 ,어 ,도 싫다고 하셨다고 한다. 어쩜 그렇게 세 가지 조건에 딱 들어맞지 않는 며느리감을 구했는지 우리 신랑 재주도 참 용타. 하지만 어떻게 허락을 받아 왔다. 그때 내 나이 스물셋. 어린 거 하나는 맘에 쏙 들었다는 어머님.

첫 대면은 종로의 어느 커피숍이었다고 기억한다.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어머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으셨다. 첫눈에 탐탁지 않음을 느꼈지만 난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나만 잘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건강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허나 돌이켜 보니 철없던 마음이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출산을 하고, 장손을 낳았다.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큰아들에게서 얻은 손자이기에 각별하셨으리라, 이해해 보려 했지만, 그랬지만… ….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데 손주가 너무나 궁금하신 어머님은 15일 만에 불러들이셨다. 너무나 어렸던 24살의 초보엄마의 막막함을 다시 떠올리니 에효… ….

“찬물에 손 담그면 안 되니, 설거지는 고무장갑 꼭 끼고 해라.”

허걱! 여하튼 이런저런 모든 말씀에 군소리 없이 순종하고 밤에는 어머님 몰래 훌쩍이는 날이 잦아졌다. 그 끔찍한 신랑이 그때는 어린 아내가 안쓰러웠나 보다. 어느 날 어머님이 잔소리하실 때 약간의 눈짓을 내게 보낸 적이 있다. 니가 이해하라는 듯한 눈빛. 어머님 상처받으실까 봐 아무 말 안 하고 보낸 살짝의 눈빛. 그 효자의 맘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 작은 눈짓에 배신감을 느끼셨던 것 같다. “니들 눈에는 나는 보이지 않느냐”며 호통 치신 후 그 길로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석 달 동안 우리의 전화도 받지 않으셨다. 결국 뚜렷한 영문도 모르고 나와 신랑은 빌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유가 그 눈짓 때문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짐작만 할 뿐 신랑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이것이 정상적인 관계일까. 어쩜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가 답답했다.

친정은 기독교 집안이다. 어릴 적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결혼 후에도 신랑은 흔쾌히 니가 원하는 것이니 다니라고 전혀 제지하지 않는다고 약속을 했다. 허나, 어머님이 오시면 갈 수가 없다. 신랑이 결혼 허락을 받을 때, 못 다니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미칠 것 같았다. 가고 가지 않고를 떠나서, 이런 조건이 말이 되는가? 일방적으로 어머님께 맞추고, 눈치 보고, 비밀스러워야 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단 한마디도 부모님께 아쉬운 소리 못하는 그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결국, 그렇게 깊게 집착하는 어머님께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다. 며느리에게 던지시는 인신 공격, ‘뚱뚱하다, 제주도 여자가 아니어서 알뜰하지 못하다, 좋은 대학이 아니다’ 등등 앞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했다. 그저 내 눈치만을 살피며 나보고만 참으라 했다. 그 깊은 상처는 아직 남아서 날 힘들게 한다. 어느 날, 그 상처 때문에 너무 아파서 내가 진지하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자기야, 내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자기한테 미안하지만 당신은 부모에게서 정상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거 같아. 어떻게 생각해?”

그 물음에 그는 시인했다. 그리고 오히려 물었다. “그러는 너는 독립했냐?” 하하. 한국의 여자들은 내 부모의 품을 떠나, 호적을 파서, 그놈(?) 하나 믿고 시집을 온다. 과감히 내가 살던 환경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감히 그가 내게, 부모에게서 독립했느냐고 묻는다. 우습다. 우스워 죽겠다.

아들. 내게도 있다. 여덟 살. 그 꼬맹이었던 것이, 성장하고 있음이 보인다. 그 마음은 부쩍 자랐다. 대화를 해 보니 알겠다. 나는 아들과 많은 대화를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친구 문제, 학교 문제, 고민되는 것은 없는지, 학원은 힘들지 않은지. 그렇게 대화가 쌓이니 우리 아이는 생각보다 마음이 깊고 생각이 많은 아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어느 날 길을 걸으며 “엄마가, 할머니를 싫어하는 것 같니?” 하고 물었다.

“싫어한다기보다 음… … 좋아하는 거 같지는 않아. 외할머니한테는 잘 웃는데, 할머니한테는 잘 안 웃잖아.”

후후. 아이의 마음을 짐작했기에 물었던 것인데, 그랬는데도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키워야 할까. 두렵다. 내가 위에서 열거한 집착. 그 과정을 나도 밟을까 두렵다.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내 모습에서, 믿지 못하고 조마조마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과연 그것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을까. 큰아이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 나는 그래도 버젓한 직장을 갖고 있었다. 큰아이 때문에 공부도 더 할 수 없었다. 큰아이 때문에, 큰아이 때문에… …. 갑자기 섬뜩해진다.

시어머니는,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는 것밖에 모르고 살았기에 자식들을 다 결혼시키고 나니 허무했을지도 모르겠다. 허망했을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걸고 했던 일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이젠 뭘 하고 살아야 하나, 암담했을 수도 있겠다.

이쯤 되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가장 큰 사랑은, 성장해서 성인이 되면 정신적으로 놓아주는 것이라 한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그 사랑을 나는 베풀 수 있을까. 놓아주는 연습을 해야 할 듯싶다. 또한 자식만을 바라보며 시간 보내지 않도록 뭔가를 배워야 하겠다. 나 스스로를 위해 투자를 해야겠다. 약간의 시간, 약간의 비용이 들더라도. 내 아이들을 온전히 놓아주고, 그저 뒤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내려놓는 준비를, 나를 위한 투자를 부지런히 해야 할 듯싶다.

비가 온다. 늦게까지 이불에서 부비대며 깔깔거리는 두 아이의 웃음 속에서, 오늘도 이쪽의 아들, 손주 소식이 궁금해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실 시부모님을 떠올리며 갈등한다.

전화를 할까, 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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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10. 14:42 기획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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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대표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안건모




지난 6월 10일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가 하얗고 양복을 반듯하게 차려 입은 사람이었다. 그이가 들고 있는 피켓에는 ‘한겨레 구독, 조중동 박멸’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이는 표명렬 씨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정훈감을 역임한 표명렬 예비역 장군은 군 개혁을 주장하는 별난 예비역 장군이다.

9월 4일 용산역 근처에 있는 평화재향군인회를 찾았다. 현 ‘재향군인회’에 반대해 2005년에 만든 단체인데 표명렬 씨는 이 단체 상임대표다. 현 재향군인회처럼 상투적인 한미동맹 강화와, 북녘을 불신하고 공격의 대상으로 보는 단체가 아닌 자주국방과 평화통일을 위하여 북녘과 대화와 협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민주적인 군대 문화를 정착하는 데 주요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리나라 군대는 극우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이 그 원인이다. 그런 군대에서 장군 출신인 표명렬 씨가 군 개혁을 외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또 작전통수권을 되돌려 받자고 주장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 6월 10일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표명렬 예비역 장군 ⓒ 안건모


표명렬 씨 고향은 전남 완도. 어릴 때는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았고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 6.25전쟁이 터졌으니 얼마나 어려운 시기를 보냈는지 알 수 있다. 중학교를 겨우 나온 뒤 돈이 없어서 1년 쉬고 머슴살이와 가정교사를 하면서 광주고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표명렬 씨는 육군사관학교 18기로 입학했다. 학비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그곳은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표명렬 씨는 간부 생도로서 원칙과 정의를 앞세워 한 치 어긋남이 없이 간부 교육을 받았다. 모두들 지독하다고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하지만 표명렬 씨는 육군사관학교가 이 나라를 이끄는 단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우리 국군이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를 거쳐 오면서 친일 세력들에게 장악당해 비뚤어진 군대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울분을 토한다.

“민족 교육을 일부러 안 시킨 거야. 민족의식 하면 빨갱이 소리를 들었으니까. 이승만이 권력 기반이 없으니까 물리적인 폭력의 힘을 가진 경찰과 군대를 자기 사람 만들어야 되겠는데 개처럼 말 잘 들을 놈들, 친일을 한 약점 있는 놈들 살려준 거야. 우리 군대를 일본 군대 출신들이 장악한 거야. 21대 육군참모총장까지 일본 육사 출신이었으니까 그 군대가 제대로 되겠어요?”

표명렬 씨는 맹호부대 소총 부중대장으로 월남전에 다녀온 뒤 뜻한 바가 있어 정훈병과로 옮겼다. 그이를 아끼는 사람들이 말렸지만 우리 군대의 가치관과 정통성을 찾고 군대를 개혁하려는 그이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1973년에는 대만 정치심리전학교에 유학을 갔다. 그곳 대만 군대에 있던, 이른바 권력기관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 겸손하고 사려가 깊고 온유한 성품을 지닌 것을 보고 또 한번 크게 깨달았다.


△ 평화재향군인회 사무실에서 이야기 중인 표명렬 예비역 장군 ⓒ 안건모


군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때 월권으로 부대원들에게 정훈 교육을 시키라는 육군본부 보안 부대장에게 “야, 이 새끼야! 육군의 정신교육 책임자는 정훈감인 나야! 너는 보안대 일이나 잘해!”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광주항쟁 당시에는 군대가 어떻게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을 쏠 수 있느냐고 바른말을 한 죄로 강원도 홍천 골짜기에 있는 부대로 귀양 아닌 귀양살이까지 했다.
표명렬 씨는 1987년 군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군 개혁을 위해 평화재향군인회를 만들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 첫째, 민족ㆍ민주 군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군대, 그래서 스스로 움직이는 군대, 리더쉽을 기르는 군대를 만드는 거예요. 일본은 침략을 위해서, 미국은 석유 때문에 이라크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지만 우리는 방어를 위한 전쟁이에요. 방어 전쟁 사상을 정립해 놓은 건 재향군인회밖에 없어요.”

이렇게 자신감을 드러내는 표명렬 예비역 장군은, 아직까지 냉전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수구 세력들이 안타깝다. 또 ‘우리 민족이 화해와 평화의 길에 들어서는데 사사건건 발목을 잡으려는 일부 언론들의 훼방이 이제는 제발 그쳤으면’ 하고 바란다.


△ 표명렬(오른쪽) 예비역 장군과 최사묵(왼쪽) 평화재향군인회 공동대표 ⓒ 안건모


표명렬 씨는 우리 국군의 시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다”하고 잘라 말한다. 또한 육군사관학교의 전신도 ‘화랑의 후예’가 아니라 일제시대 때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라고 주장한다. 광복의 역사를 싸그리 부정하고 건국 60년이라고 우기는 이명박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듯 표명렬 씨 열변은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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