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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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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28. 13:13 알림 / 엮은이의 글

▲ 표지 그림_ 김정렬


엮은이의 글

 

2018년 마지막 호를 만듭니다월간지를 만들다 보니 남들보다 한 달을 앞서 살아 그런지 세월이 더 빠르게 가는 것 같네요.

12월호 특집은 작은책 올해의 인물입니다. 2015년부터 작은책 올해의 인물을 뽑았습니다옳은 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오롯이 내어놓고힘든 상황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가는 분들 중에 한 분을 올해의 인물로 모셔서그런 분들의 삶을 배우고 따라 살려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 시작한 거지요.

올해는 전 케이티엑스(KTX) 철도노조 열차승무지부장 김승하 씨를 뽑았습니다. (함께 싸운 케이티엑스(KTX) 동료들도 모두 작은책 올해의 인물입니다.) “데모 한번 하지 않고 대학 시절을 보냈다는 김승하 씨가 케이티엑스(KTX) 승무원을 직접고용하지 않는 코레일을 상대로 지난 12년을 싸웠습니다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싸우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복직이 결정되어 지난 11월 12일 첫 출근을 시작한 김승하 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우리가 연대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청년으로 살아가기’ 꼭지의 진솔아 님, ‘이야기가 있는 들녘’ 꼭지의 김진회 님의 연재를 마칩니다. ‘이재관의 그림일기’,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김형민 님의 그때 그 사건 다시 보기도 연재가 끝납니다 그동안 귀한 글 나눠 주신 필자님들참 고맙습니다다음에 새로운 기획으로 다시 뵐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독자님들새해 새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함께해 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2018년 11월 16

유이분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바다, ,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 이동수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내 둘레에 있는 소중한 자산, 이백 박소영

16 말로만 듣던 출근전쟁 강정민

20 영등포산업선교회 다시 길을 묻다송기훈

2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과 이주영 선생님 정병규

29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한 해가 지나가네 윤혜신

33 청년으로 살아가기 낯선 동네 여행 강릉 진솔아

38 이야기가 있는 사진 변백선

40 살아온 이야기(6)

내가 불쌍해 보입니까? 송추향

46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오지랖은 그만 안재성

51 교실 이야기 전담시간 가기 싫어요 윤일호

57 이야기가 있는 들녘

나도 풍구에 들어가고 싶었다 김진회

61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4 일터 탐방_ 손말이음센터

믹스커피 하나에 울음이 터졌다 정인열

70 일터에서 온 소식

우리에게 내려진 마지막 낙인 양해준

75 작은책 법률 상담소

디지털 성범죄, 당연히 범죄입니다 김묘희

 

작은책이 만난 사람_ 김승하

79 우리가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안건모

100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102 생각해 봅시다

서유럽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어요 문정주

107 어린이 해방과 평화

점심을 굶는 아이가 있다고! 이주영

114 여성으로 살아가기

거품이 되지 않고 사랑하기 홍승은

119 ‘그때 그 사건다시 보기

조선인들에게 던진 나석주의 폭탄 김형민

124 생태 이야기

새만금은 생명 품는 바다로 돌아가야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9 책 읽고 딴 생각

단일민족국가라는 판타지 변정수

132 독립영화 이야기

함께하는 삶, 어렵지만 신비로운 길 류미례

137 우리말과 국어사전 짚어 보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말 박일환

142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2011. 11. 24. 11:06 알림 / 엮은이의 글

 



■ 엮은이의 글

  나라 주권이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때 이 글을 쓰게 됩니다. 한미 FTA 이야기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과 맺은 한미 FTA 협상안을 국회에서 비준해 주면, 3개월 내 미국에 ISD 조항의 ‘재협상을 제안하겠다’고 꼼수를 부렸습니다. ISD는 ‘투자자-국가소송제’라는 뜻의 약자입니다. 간단하게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미국 기업이 우리나라에서 수돗물 장사를 합니다. 한 달 수돗물 값이 갑자기 올라 우리 월급의 반이 됩니다. 서민들은 수돗물 사 먹을 돈을 아끼느라 빗물을 받아 놓았다가 먹기도 하고, 빨래도 합니다. 미국 기업이 장사가 안 되겠죠? 당장 우리나라 정부에 항의를 합니다. 정부는 빗물을 못 받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기업은 우리나라에게 소송을 겁니다. 판단은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가 하지요. 그 센터가 누구 편을 들지는 불을 보듯 뻔하고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빗물조차 못 받아 쓰게 됩니다.

  소설 쓰지 말라고요? 지난 2000년에 볼리비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미국 기업은 벡텔이라는 기업이고요. 아, 그러면 그 ISD조항을 재협상하면 된다고요? 오바마가 총 맞았나요? 그걸 해 주게? 그런데도 이명박 ‘가카’가 국회에서 한미 FTA를 일단 비준해 달라는 겁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그걸 비꼬는 패러디가 쏟아졌습니다. “일단 김태희를 나와 혼인시켜 달라. 3개월 안에 김태희 씨에게 결혼 허락을 받겠다”는 말에 뒤집어졌습니다. 노회찬 전 의원은 “싫더라도 일단 당선시켜 주십시오. 대통령 취임하면 3개월 내에 재선거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비꼬았네요.

  독자님들, 가카가 하는 말은 꼼수가 아닙니다. 제가 바둑을 둬 봐서 좀 아는데, 바둑에서 나오는 꼼수는 정말 그럴듯하거든요. 가카가 하는 짓은 바둑 18급짜리가 9단한테 던지는 막수입니다. ‘씨바, 넘 유치해!’

                                                                                                                 2011년 11월 16일
                                                                                                                        안건모 올림


■ 차례


4 사진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12 작은책을 읽고

살아가는 이야기

14 재수 없는 날 _ 상희
18 본색을 드러낸 선생님 _ 김경희
22 회갑보다 중요한 날 _ 김현주
25 공무원이 봉이냐? _ 서애련
28 축구를 그만둔 한국의 메시 _ 고경은
32 쫄다구 형님! 제 말 좀 들으세요! _ 김영도
36 타조알 선생의 교단 일기 : 주먹이 운다│바담풍 _ 이성수
38 여성의 일과 삶 : 한 발을 디디고 거침없이 고고씽! _ 박미경
44 살아온 이야기(3) : 조금만 더 버티면 이긴다! _ 신혜진
50 와글와글 초딩 글
52 이야기가 있는 들녘 : 올해도 쌀 다 팔았습니다 _ 김성만
56 글쓰기 모임 뒷이야기

일터 이야기

58 일터 탐방 :
고기 280킬로그램 볶아 보셨어요? _ 정인열
64 일터에서 온 소식 : 3~4일 정도면 되겠지? _ 김정훈
68 일터에서 온 소식 : 용기 있는 대리운전기사 콜 ! _ 송재성
72 일터에서 온 소식 : KT를 바꿔라! _ 조태욱
76 실업 극복 희망 일기 : 난 유리 같은 여자예요 _ 최문정
80 현장 노동법 이야기 : ‘판례’를 무시하는 판사들 _ 변영철

기획 특집
혁명은 글쓰기와 함께 온다

83 강좌 _ 윤구병

103 뒷이야기 _ 이명옥

105 만화로 보는 세상 _ 이성열

세상 보기

106 생각해 봅시다 : 김진숙과 송경동 _ 박노자
110 교육 이야기 : 1정 연수 괴담기 _ 설은주
114 쉬운 경제 이야기 : 끝장토론 마지막 호소 _ 정태인
122 생태 이야기 : 우주여행은 그저 꿈일 때 아름답다 _ 박병상
126 인물 바로 보기 : 《실학파와 정다산》을 쓴 최익한 _ 송찬섭

쉬엄쉬엄 가요

131 일상 예찬 : 나는 이만하면 충분해 _ 김현진
134 영화 이야기 : 신비한 주술과 생생한 현실의 만남 _ 강성률
138 추억 따라 역사 따라 : 백두대간 완주보다 더 흐뭇한 것 _ 박준성
142 아, 이 시! : 밤새 잘 기셨소 _ 오도엽
144 새로 볼 책 : 싱싱한 유기농 만화 _ 윤지은
146 돌아볼 책 : 오타쿠와 레닌 사이 _ 곽일용
148 새로 나온 책 _ 편집부
151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2011. 10. 19. 09:57 알림 / 엮은이의 글


엮은이의 글

  독자님, 벌써 11월입니다. 〈작은책〉에서는 다달이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16년째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어가고 있으니 대단한 모임이지요.

  얼마 전부터 늘 모임에 나오시던 분이 안 나옵니다. 전화로 대화를 하다 보니 그 까닭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극우 성향이 있는 분인데 작은책 모임에 나오는 분들과 성향이 안 맞았던 거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를 끔찍이 싫어하는 나와 대화가 안 통했던 겁니다. 그분은 박정희가 우리 서민을 위해서 헌신한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와 작은책 글쓰기 모임 회원들은 박정희를 안 좋게 평가하니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요.

  그분은 오로지 자기 경험과 이웃에서 들은 이야기로 박정희를 평가합니다. “난 농촌에서 살아 봐서 알아. 박정희가 농촌 마을을 다 근대화시켰잖아. 내가 얼마 전 법조계에서 은퇴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박정희는 말 많은 지식인들 몇 명에게는 탄압을 했지만 농촌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한테는 잘해 주었다고.” 또 “박정희가 잘못했으면 지금 딸 박근혜가 어떻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당의 대표가 됐겠느냐”고 흥분합니다. 말꼬리가 이어져 “지금 김진숙하고 몇몇 노동자들이 농성하고 있는데 세상이 그런다고 바뀌는 게 아니야” 하고 남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 머리를 세뇌시켰으니 박정희가 대단한 놈이긴 합니다. 자신이 무지하면 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독자님들, 여전히 지배세력들은 미디어를 이용해 시민들을 세뇌합니다. 미 의회에서 한미FTA가 통과됐습니다. 수구 ‘찌라시’와 텔레비전에서는, 한미FTA가 발효되면 기술이 혁신하고 기업 환경이 개선되고 외국인 투자자가 증대한다는 거짓말로 세뇌하면서 국회 비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한미FTA가 재벌 외에,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피해가 오는지 그자들이 정말 몰라서 그럴까요? 아, 욕 나옵니다. ×××들.

2011년 10월 15일
안건모 올림
 



차례


4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12 작은책을 읽고

살아가는 이야기

14 외박 투쟁을 못하는 이유 _ 이동호
17 모니터 없는 소프트웨어 회사도 있다_ 김정호
20 무덤에서 나온 국가보안법 _ 최수인
24 도배하고 싶어욧! _ 김영도
29 전혀 나이스하지 않은 나이스 _ 제갈은숙
32 오만 사람 오만 가지 이야기 _ 장예진
36 엄마 생각 _ 선경숙
38 타조알 선생의 교단 일기
한글날 백일장│말! 말! 말! _ 이성수
40 여성의 일과 삶  마흔두 살 아줌마의 재취업 성공기 _ 고희라
44 살아온 이야기(2)  사춘기 _ 신혜진
50 와글와글 초딩 글
52 이야기가 있는 들녘 고추 농사 김영숙
56 글쓰기 모임 뒷이야기
58 사진 한 장 느낌 한 줄

일터 이야기

59 일터 탐방  서울시에서 하는 게 그렇잖아? _ 정인열
66 일터에서 온 소식  저는 회사를 옮겨 다닌 적이 없어요 _ 조봉환
70 일터에서 온 소식  사람이 기계를 보조하고 있다 _ 김재홍
74 일터 한 뼘 소식
76 실업 극복 희망 일기  나가서는 말도 못하는 집안 똑똑이 _ 최문정
80 현장 노동법 이야기  위원장 선거 공탁금이 700만원? _ 변영철

기획 특집

소설 《파업》에서 《박헌영 평전》까지
83 강좌 _ 안재성
103 뒷이야기 _ 정소영
105 만화로 보는 세상 _ 이성열

세상 보기

106 생각해 봅시다  ‘자유민주주의’에 숨겨진 음모 _ 이신철
110 교육 이야기  삶을 가꾸는 배움터 만들기_ 김영주
114 쉬운 경제 이야기  공공요금의 경제학 _ 정태인
118 생태 이야기  누구를 위한 핵 잔치인가 _ 박병상
122 인물 바로 보기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선생 _ 김삼웅
126 세상의 중심에서 십 대가 외친다  대학에 합격하는 순간 아찔해졌다 _ 혜원

쉬엄쉬엄 가요

131 일상 예찬  쪼개기 투쟁 _ 김현진
134 영화 이야기  도가니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나? _ 강성률
138 추억 따라 역사 따라  환등기 시대가 막을 내린다 _ 박준성
142 아, 이 시!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반 _ 서정홍
144 새로 볼 책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_ 윤지은
146 돌아볼 책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그림자 정부 _ 안건모
148 새로 나온 책 _ 편집부
151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집단해고 모른 척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2억 8천 손해배상 청구냐!”
 
 “3억 손해배상 청구소송? 차라리 우리 노동자를 죽이시지요.”

  홍익대학교 정문 오른쪽에 이런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을 길러 낸다는 대학교에서 월급 89만 원 받는 청소 노동자들에게 3억을 손해배상 청구했다는 내용이다. 지난 1월에 청소 노동자 170명이 하루아침에 해고된 뒤 해고를 철회해 달라고 49일 동안 농성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손해배상 금액이란다.

홍익대학교 정문 옆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 / 사진_안건모

  거기에서 일하던 40대 후반에서 60대 여성 노동자들 사연을 들어 보면 하나같이 기가 막힌다. 그중에 한 분 김금옥 씨를 청소 노동자 대기실에서 만났다.

“비만 오면 여기 저기 새요.”

  청소 노동자 대기실 천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겉에서 보면 번듯한 이 홍익대 건물 안에 비가 새는 곳, 그곳이 청소 노동자 대기실 겸, 휴게실이다.

두 사람이 겨우 밥을 먹을 수 있는 대기실 / 사진_안건모

  김금옥 씨는 1953년 생. 고향은 전라남도 순창이다.

  “순창에서 20리 길 둑을 타고 나가면 우리 마을이었어요. 4녀 1남에 제가 둘짼데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죠. 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열여덟 살에 서울로 올라왔죠. 언니가 결혼한 뒤 상월곡동에 살았는데 형부가 요꼬(편직 기계) 짜는 분이라 종업원 몇 분 두고 공장을 운영했어요.”

  그 당시 옷은 그나마 잘 나가는 직종이었다. 하지만 수출이 막히면서 점점 어려워졌고, 설상가상으로 언니가 당시 20만 원 되는 계를 들었는데 계주가 도망가는 바람에 공장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논밭이었던 창동에 하꼬방(판잣집)을 지어 이사를 갔다.

  거기서 몇 개월 살다가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언니와 형부는 남원으로 내려갔다. 김금옥 씨는 메리야스 공장에 취직을 하고 친구들하고 기숙사에 살았다. 당숙이 중매를 해 줘서 공무원 직업을 갖고 있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말단 공무원 월급으로 살기가 어려워 김금옥 씨는 한 달에 10만 원을 버는 부업을 했다. 막내아들이 다섯 살 때부터 피죤, 물비누, 퐁퐁을 리어카에 싣고 다니면서 방문 판매하는 일을 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집을 방문하면, 새댁들이, 배추에 소금을 담가 놓는 분이 있어요. 그럼 내가 씻어서 담가주기도 하고, 뭐 좀 도와주고 하니까 그 분이 다른 손님을 소개해 주고 해서 영업을 잘했죠.”

  김금옥 씨는 그 뒤 라피네 화장품 판매, 보험 영업으로 생활을 꾸려갔다. 그 당시 보험 영업은 지금과 달랐다. 한 달에 한 번씩 보험료를 내는 게 아니라 일수 찍듯이 하루에 나눠서 받는 형식이었다. 용산전자상가 건물에서 남자만 상대하는 보험 영업이 쉬울 리 없었다.

  “처음에는 용기가 안 나서, 말도 못 했다니깐요. 오래된 언니 이틀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웠죠. 90도 각도로 인사하면서 ‘안녕하십니까?’ 하는 거 배우고 껌 하나, 볼펜 하나 주면서 가게마다 다 돌았어요.”

  날이 갈수록 보험 영업도 점점 힘들어졌다. 무엇보다 사람을 끌어오라는 ‘증원’ 압박에 시달렸다. 김금옥 씨는 힘든 보험 영업 일을 남한테 이 일이 힘들어 남한테 권유하지 못해 사람을 끌어오지 못했다. 결국 그 일도 그만두게 됐다.

  김금옥 씨가 처음 홍익대 청소 노동자로 온 것은 1999년이었다.

  “그땐 제가 힘이 장사였어요. 쓰레기 봉투가 100리터짜리 스물네 개에서 서른 몇 개가 나왔어요. 엘리베이터도 없었는데 7, 8층에서 그걸 힘든 줄 모르고 계단으로 내렸어요.”

  월급이 40만 원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음에 맞는 동료 언니들이 있어 그런 대로 재미가 있었다. 2년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마음에 맞지 않는 다른 청소노동자들과 같이 일하게 되면서 그만두게 됐다. 그리고 간 곳이 영등포에 있는 스크린 경마장이었다. 그곳도 청소하는 일이었다.

  “거긴 홍익대보다 월급은 많은데 손님들이 있는 데서 청소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담배 냄새가 심했어요.”

  그곳에서 6년을 일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버스에 치어 머리와 어깨, 다리를 다치고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동안 치료를 한 뒤 쉬고 있었는데 홍익대에서 정직원으로 청소일을 하는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일할 자리가 났으니 다시 올 수 있냐는 거였다. 사실 김금옥 씨는 노동조합(노조)이 있는 서강대에 이력서를 보내고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조가 있는 곳은 처우가 좀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강대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또 홍익대로 일을 하러 갔다. 60만 원밖에 되지 않는 월급 때문에 체육관 수영장 야간 일도 같이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월급이 80만 원은 됐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야간에 수영장 물일을 하니까. 락스 풀고 닦는데 공기 탁하고, 지하라. 하루에 몸무게가 1킬로씩 점점 빠졌어요.”

  자꾸 몸무게가 빠져 병원을 가니 갑상선에 종양이 생겼다고 했다. 수술을 하고 난 뒤 금방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8개월을 쉬고 홍익대에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청소하는 김금옥 씨 / 사진_정인열

  그런데 같이 일하는 동료 언니들이 불만들이 많았다. 노조가 있는 서강대, 연세대에 견줘, 똑같이 일하는데 홍익대는 월급이 더 적은 데다 일은 더 많이 해야 했다. 노조를 만들고 싶었지만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학생들이 와서 월급이 얼마인가, 하루 몇 시간 일하는지 설문 조사를 했다.

  “우리는 한 달에 75만 원 받고, 아침 8시 출근, 6시 퇴근 토요일도 한 달 두 번 정도 일한다고 얘기했죠. 우리가 있는 대기실을 두세 명이 세 번씩 방문했어요. 처음엔 노조 얘기 안 하고 설문 조사만 하다 두 번째 왔을 때 노조 얘기하는데 귀가 솔깃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도와주면 노조를 만들겠다 했죠.”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학교 밖 커피숍에서 처음 아홉 명이 모였다. 하지만 모두들 겁이 나 조합원 가입서를 쓰지 못했다. 김금옥 씨가 처음으로 가입원서를 쓰면서, 여덟 명이 가입서를 썼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청소노동자들 가운데 반 이상이 조합에 가입했다. 드디어 2010년 12월 2일에 노동조합이 출범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3일, 설날 휴가를 끝내고 출근했다. 출근 도장 찍으려는데 경비실에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 우리 경비 아저씨 휴가예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래요. 그래서 ‘출근도장이 없네요. 출근카드 주셔야죠’ 했더니 ‘몰랐어요? 아줌마들 이제 직원 아녜요 용역회사가 계약 만료되었다고 가 버렸어요.’”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용역회사와 계약이 만료됐다고 그날로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이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김금옥 씨와 청소노동자들은 모두 본관으로 모였다. 그것이 49일 동안 투쟁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싸움을 어찌 몇 마디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으랴. 김금옥 씨는 추운 시멘트 바닥에서 자느라 교통사고 났을 때 다친 어깨 통증이 재발했다.

  그렇게 49일 동안 투쟁한 결과 홍익대 청소노동자들 170여 명은 그대로 고용승계가 됐다. 그 싸움에서 ‘청소하는 아줌마’들은 당당한 노동자로 거듭났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가 아니라 정당한 노동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노동자였다. 김금옥 씨는 부분회장을 맡으면서 생각도 변하고 성격까지 달라졌다.

  “나이가 60이 넘은 분들이 많아요. 49일 농성하다 안 아픈 데가 없고, 중간에 언니들이 다 쓰러질 것 같고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할 때 용역업체와 교섭을 하고 타결됐어요. 그때 눈물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죠. 노조 가입하기 전에는 텔레비전에서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는 거 보면 이해가 안 가고 왜 싸움만 하느냐고 했어요. 근데 우리가 당하고 나니까 이해가 가는 거야. 오죽하면 싸우겠어요. 김진숙, 고공 농성 같은 거, 그것도 이젠 우리 다 이해해요. 몰랐을 땐 왜 저러나 했는데 지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금옥 씨는 둘레에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인터뷰 마지막에 이 말만은 꼭 써 달라고 했다.

  “김여진 씨와 ‘날라리 외부 세력’의 도움과 도와주는 단체들이 없었다면 우린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좌절하는 순간이 많았는데 ‘당신들이 정당하다. 이길 거니까 힘내라’고 말해 주는 사람들 때문에 힘이 나서 싸울 힘이 생겼죠. ‘이길 거니까 힘내’라는 말이 너무 고맙고……. 평생 이 은혜 잊지 않을 거예요.”

글_안건모 

posted by 작은책
2011. 9. 22. 10:25 태복빌딩 꼭대기

일단 배부터 채워야겠죠?
강연에 오신 분들과 함께 맛있는 칼국수와 전을 먹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강연 시작에 앞서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열강 중이신 안건모 대표님.

이날 스물 다섯분이 강연을 들으러 오셨는데, 그 중에서 열두 분이 정기구독을 신청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독자님들과의 인연, 소중히 하겠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안건모 / <작은책> 발행인


  삼화고속노동조합이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총 26개 노선 광역버스 328대 가운데 20개 노선 242대의 운행을, 날마다 2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중단하는 부분 파업을 하고 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삼화고속버스 회사를 가려고 합정동 버스정류장을 갔다. 노동조합이 있는 곳을 가려면 1601번을 타야 한다. 정류장에 있는 전광판을 보니 55분 뒤에 차가 온다고 나온다. 파업 때문인가? 나중에 알았지만 준법운행 때문이었다. 신호를 지키고 난폭 운전을 하지 않는 준법운행만 해도 이렇게 운행 시간 간격이 뜨게 되는 게 버스 운행 현실이다.

  노동조합 사무실엔 최용환 총무부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용환 씨는 삼화고속에서 18년 동안 근무하다 작년에 사표를 썼다. 삼화고속에서 오랫동안 투쟁해 왔는데 회사가 인천에서 대구까지 발령을 낸데다 투쟁 중에 아내의 지병이 악화되어 사표를 썼단다. 먼저 삼화고속 조합원들이 파업을 하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물었다. 최용환 총무부장은 한 치 망설임 없이 말한다.

  “월급이죠. 월급이 너무 적으니까.”

  도대체 월급이 얼마나 될까. 광역버스 시급은 4,727원이다. 고속 부문 5,010원보다 터무니없이 적다(서울시내버스 시급은 1년 근무자 8,027원, 8년 근무자 8,703원이다). 인천광역버스는 월 시급 대비 만근 일수에 따라 임금이 정해지는데 연봉으로 하면 광역은 한 달 13일(26일) 만근에 1일 19시간씩 247시간이지만 연 2,800만 원, 고속은 연3,000여만 원이다. 다른 사업장보다 턱없이 적다. 광역버스 부분은 지난 10년 동안 임금이 동결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급은 해마다 올라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루는 교통신문에서 전화가 왔어요. 기자가 하는 말이 ‘회사가 준 자료를 보니 시급은 계속 올라갔다, 그런데 왜 임금이 동결됐다고 하냐?’는 거예요. 제가 한번 오라고 했어요. 회사 쪽만 찾아가서 취재하지 말고 노조도 취재해 달라고 얘기했죠. 맞아요. 시급은 올라갔어요. 근데 왜 깎였을까요? 상여금에서 잘라먹은 거예요.”

  광역버스는 2005년도에 상여금이 임금 총액의 670퍼센트였다. 하지만 시급이 올라가면서 상여금이 계속 깎였다. 임금 총액의 670퍼센트가 아니라 기본급에 야간 수당만으로 상여금이 지급됐다. 2008년도에는 야간 수당을 시급대비 30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삭감했다. 복잡하게 계산할 것 없다. 임금이 10만 원 올라가면 상여금에서 10만원 깎였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10년 동안 시급은 올라갔어도 받는 임금이 그대로였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근무 시간이다.

  “지난 10년 동안 법정근로시간이 주 48시간에서 44시간, 40시간으로 줄었는데 우리 광역버스 근무 시간은 오히려 계속 늘어났어요."

  광역버스 기사들은 서울시내버스처럼 1일 2교대제가 아니라 격일제이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제도다. ‘괜찮네’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정을 들어 보면 이렇다.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와 5시에 일을 시작한다. 하루 종일 일하고 서울역에서 막차가 새벽 1시에 인천으로 출발한다. 그러면 종점에 빨리 들어와 봐야 새벽 2시나 2시 반이다. 집에 들어가면 세 시가 넘어 네 시쯤에 잠을 잘 수 있다. 그러면 그 다음날 쉬는 날은 오전 내내 잠을 자야 된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에 일하러 가야 하니 일찍 자야 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물론 심야수당을 받기는 하지만 23시 이후는 8천 원, 24시 이후는 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심야 수당 안 받고 심야 근무 2시간에서 3시간 안 나가는 게 오히려 낫다.

  사실 고속버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임금이 10년째 동결이다. 아이엠에프 터지고 나서 임금이 그대로인 셈이란다.

  다섯 시가 되니 나대진 지회장이 들어왔다. 나대진 씨는 지난 1월 6일 조합 선거에서 지회장으로 당선된 사람이다. 3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한 나대진 지회장은 지난 5월 18일에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한국노총 자동차연맹 산하였던 삼화고속버스 노조를 민주노총 민주버스 소속으로 상급단체를 변경했다. 아마 서울 경기 지역에서 최초로 조직 형태 변경을 하지 않았나싶다.

  지회가 민주버스로 조직 형태를 변경한 뒤 회사는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대진 지회장이 이끄는 삼화고속지회는 지난 6월 8일 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신청을 했다. 6월 22일 조정 중지가 결정됐다. 그리고 6월 25일, 26일에 시한부 경고 파업을 했다.

삼화고속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대진 씨

  “7월 7일이 급여 지급일이에요. 사측은 ‘파업해서 수익금이 줄어서 급여를 못 주겠다’ 공고를 붙였어요. 7월 8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죠. 인천시에서 중재를 서서 7월 10일 기본합의서를 작성해서 파업을 푼 거죠. 그런데 회사가 합의서 이행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7월 22일부터 심야운행 거부 투쟁에 돌입했죠.”

  기본합의서 내용은 ‘노사 간에 자율적으로 교섭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재 삼화고속 노조는 겉으로 보면 모두 세 개다. 올해 초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변경한 현 지회와 전 ‘어용조합’이 한국노총을 상급단체로 해 새로 설립한 노조, 또 일부 조합원이 만든 제3노조이다. 사측은 ‘관련법에 따라 3개 노조가 교섭 창구를 단일화하기 전엔 교섭하기 곤란하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교섭대표권을 놓고 노노 갈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대진 지회장 말은 달랐다.

  “현재까지 지회에서 탈퇴한 조합원이 없어요. 2노조는 노동청에 28명으로 신고돼 있고, 3노조는 7명인데 우리 조합에서 탈퇴하지 않고 이중 가입을 하고 있어요. 사측의 회유와 압력에 의해서 복수노조를 만들었다고 보는데, 그래도 전체 조합원의 10분의 1이 돼야 공동교섭권이 있잖아요. 그런데 결국 10분의 1을 확보하지 못한 거예요.”

  결국 교섭대표권이 단일화되지 않아서 교섭을 하지 않는다는 건 회사의 핑계일 뿐이라는 말이다.

  나대진 지회장한테 월급에 대해 다시 물었다. 지회장은 오늘 인천시에 갖고 간 간담회 자료를 보여 준다. 그 자료를 보니 인천을 운행하는 시내버스보다 급여가 적다.

  “전국 6대도시 중에서 인천이 임금이 제일 낮은 수준입니다. 삼화고속 광역버스는 인천시내버스 급여보다 월 50만 원 정도 더 적어요. 고속부분은 금호고속보다 연봉 천만 원 정도가 적습니다. 조합원들이 임금과 근로 조건에 대해 한이 맺힌 거죠.”

  정태수 씨가 들어왔다. 정태수 씨는 지금 준법운행 투쟁 중이다.

  “힘들어요. 어용하고 싸워야죠, 사측하고 투쟁해야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굴엔 웃음기가 떠 있다. 힘들어도 보람이 있어 보였다.

  “어젠 앞차하고 1시간 정도 간격이 벌어져서 다녔어요. 여유 있게 다니니까 스트레스도 안 받고……. 요즘에는 노선에서 사고도 없어요.”

  옆에 있던 나대진 지회장이 거들었다.

  “한 달에 사고가 평균 100건, 하루에 세 건은 나는 거죠.”

  처음 파업하는 날 어땠을까. 1987년 서울시내버스 기사들이 파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관리자들이 기사들한테 차를 운행하지 않으면 해고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기사들은 하나둘씩 그 협박에 굴복해 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집행부에서도 불안했어요. 45년 동안 한 번도 파업한 적 없었으니까. 쟁의 행위 조합원 찬반 투표에서 85.3퍼센트가 파업 찬성했어요. 파업 투쟁에 돌입하니까 조합원들이 열정적으로 호응하고 참여하는 거예요. 집행부도 놀랬죠. 간부 파업할 때는 ‘즉시 운행 중지하고 파업 투쟁에 돌입합니다’ 하고 문자를 발송했더니 영업소가 대전인데 울산에다 차 세워 놓고 인천 농성장으로 상경한 거예요. 확대간부 80퍼센트가 참여했어요. 45년 동안 한이 맺힌 거죠. 워낙 근로 조건이 안 좋으니까. 바닥까지 온 거예요. 한이 맺혀 있었던 거예요.”

  나대진 지회장은 그동안 조합원들이 얼마나 쌓인 게 많았겠냐며 ‘한이 맺혀 있었던 거예요’를 자꾸 되풀이한다.

  그동안 사측은 ‘튀는’ 조합원들에게 탄압을 가했다. 어용조합도 나대진 지회장을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거나 제명까지 했다.

  “지노위에 부당 징계로 민사 소송 넣어서 해결하고……. 시내버스 어용조합의 기본이잖아요. 버스 해 보셔서 알잖아요. 배차시간에 쫓겨 밥 먹다 말고 나가라면 나갔잖아요. 거의 서서 김치 쪼가리하고 먹고 나갔잖아요. 배차 담당이 기사에게 ‘내일 일 나왓! 안 나와?’ 노예 부리듯 했는데 이젠 ‘일 좀 해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요. 불과 두 달 만에 상황이 바뀐 거죠. 의식이 바뀐 거예요. 파업은 학습이잖아요.”

  이번 파업이 그냥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나대진 씨는 1990년대부터 민주버스노조협의회를 다녔고, 99년 7월 1일에 삼화고속에 입사한 뒤 2005년부터 ‘참노동조합 만들기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민주버스지회로 변경 후 규약도 민주적으로 모두 바꿔 버리고 조합원 교육도 많이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몰랐으니까. 처음에 대의원대회할 때 벽에 가사를 쓴 종이를 붙여 놓고 했죠. 조합원 교육 때는 하종강 선생님이 강연하는데 조합원이 눈물 흘리고 그랬어요. 그게 다 파업 동력이 된 거예요.”

  이렇게 되기까지는 나대진 지회장을 비롯한 현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희생이 컸다. 활동을 하느라 잠도 못 자고, 일을 많이 하지 못해 월급이 적을 수밖에 없다. 아내와 아이들이 얼마나 걱정할까.

  “그래도 요즘엔 집에서 응원해요. 아내가 ‘힘내세요. 당신에게는 우리 가족이 있잖아요.’ 애들한테도 ‘아빠가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지 몰랐어요. 아빠가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문자가 와요.”

  나대진 지회장은 “삼화고속 사정이 다른 버스사업장하고 똑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사실 지방 버스 현실이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전북고속버스도 지금까지 파업을 이어 가고 있다. 전국의 버스노동자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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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10. 16:47 알림 / 엮은이의 글



엮은이의 글


  비가 줄기차게 내립니다. 이 비가 끝나면 또다시 숨막히는 더위가 오겠지요.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가 타워 크레인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이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현장으로 돌아갔다는 시원한 소식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이달 〈작은책〉에는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 소식이 많이 있네요. 페이스북에서는 파업을 하고 있는 전북고속버스 운전사들이 자기들 소식도 알려 달라는 글이 올라옵니다. 버스 노동자들, 그동안 많이 참고 살았지요. 우리 독자님들은 그이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달 〈작은책〉은 대박이었죠. 서애련 씨가 쓴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이서분 씨가 쓴 ‘엄마는 아빠가 몇 번째 남자야?’를 본 사람들은 버스에서든 지하철에서 폭소가 터졌다고 합니다. 힘들어도 이렇게 웃음이 담긴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제가 타워크레인에 직접 올라가 보고 쓴 ‘일터 탐방’도 현장감이 있어서 좋았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인쇄소 실수로 지난 호에 몇 쪽이 빠진 채 나간 〈작은책〉이 있었나 봅니다. 혹시 그런 책을 받은 독자님들은 귀찮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연락을 꼭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은책〉 독자 모임이 제주도에서도 생겨날 듯합니다. 지난 7월 8일 제주도에 내려가 독자님들을 만났는데 몇몇 분들이 독자 모임을 만들기로 약속했습니다. 전국에 독자 모임이 더 많이 생겨 〈작은책〉을 보면서 사회를 들여다보고,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더욱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독자님들, 다음 달에 황인오 씨가 쓰는 ‘살아온 이야기’ 연재가 끝납니다. 아직 다음 필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하고 싶으신 분은 연락 바랍니다. 독자님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바로 역사입니다.

                                                                                                                   2011년 7월 15일
                                                                                                                        안건모 올림



차례

4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12 엮은이의 글
13 원고를 기다립니다
14 작은책을 읽고

살아가는 이야기

16 미용실이 싫다 /윤순정
19 촛불이 쥐약이다! /지윤종
22 생일 치르기 /김은경
26 나쁜 엄마 /고경은
30 노동 문제 이야기 하지 마세요 /오세연
34 개수대에서 물 버리는 소리도 반갑다 /김진숙
37 펜글씨 연습 /조상연
38 타조알 선생의 교단 일기
시험│그 아이 /이성수
40 여성의 일과 삶 꿈같은 이야기 /박미경
46 살아온 이야기(32) 뒤늦은 아쉬움 / 황인오
52 와글와글 초딩 글
54 이야기가 있는 들녘 벼도, 닭도 괜찮겠지요 /최용혁
58 글쓰기 모임 뒷이야기
60 사진 한 장 느낌 한 줄

일터 이야기

61 일터 탐방 무료 서비스 /안건모
66 일터에서 온 소식
노동자가 세상의 빛이다 / 한종일
70 희망버스 이야기 이게 뭐야! /강정민
74 일터 한 뼘 소식
76 실업 극복 희망 일기 그럼, 굶냐? /최문정
80 현장 노동법 이야기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변영철

기획 특집

83 강좌 글쓰기는 정치다 /오도엽
103 뒷이야기 /정인곤
105 만화로 보는 세상 /이성열

세상 보기

106 생각해 봅시다 제주 해군 기지가 위험한 이유 /정욱식
110 교육 이야기 그쪽 학생들은 울면서 공부하지 않습니까? /김형태
114 쉬운 경제 이야기 방송, 광고, 민주주의의 삼각 함수(1) /정태인
118 생태 이야기 보호대상종은 개발의 걸림돌인가 /박병상
122 인물 바로 보기 이승만의 ‘정적 1호’ 최능진 /정지환
126 세상의 중심에서 십 대가 외친다 나는 자유인이다 /새봄

쉬엄쉬엄 가요

131 일상 예찬 ‘건당’ 인간들 /김현진
134 영화 이야기 이 영화의 흥행이 궁금하다 /강성률
138 추억 따라 역사 따라 기지촌의 외딴방 /안미선
142 아, 이 시! /오도엽
144 새로 볼 책 함정을 피하는 방법 /곽일용
146 돌아볼 책 대대로 물려주고 싶은 약손문고 /서정홍
148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51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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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순이 아버지를 만났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연속극에서 삼순이 아버지로 나온 맹봉학 씨다. <작은책>에서 연예인을 인터뷰하기는 처음이다. 전화를 했더니 “요즘, 본의 아니게 내가 유명 인사가 됐네요” 하고 껄껄껄 웃는다.

대학로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성균관대 앞에 있는 풀무질 책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맹봉학 씨가 풀무질 책방 주인인 은종복 씨하고도 친하니 잘됐다 싶었다. 정확히 두 시에 책방으로 들어온 맹봉학 씨가 은종복 씨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맹봉학 씨는 요즘 더 바빠졌다. 어제도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에서 인터뷰를 했고 오늘도 이 인터뷰가 끝나면 이 근처에서 다른 매체와 또 인터뷰가 있단다. 이렇게 바쁜 까닭이 연기자로서 스타가 됐기 때문이 아니다. 가슴 아픈 얘기지만, 배우인데 사회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 여러 매체에서 취재당하는(?) 수준을 보면 거의 사회운동가가 다 됐다. 연기를 해야 먹고사는 배우가 그러기가 쉽지 않다.

“전에 경찰에 소환당해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벌금 맞으셨어요?”

“두 번 다 안 맞았어요. 뭐, 죄가 있어야죠.”

맹봉학 씨는 유일하게 연예인으로서 집회에 관련해 경찰에 소환을 두 번 당한 사람이다. 한 번은 2008년 촛불 집회 때, 두 번째는 지난해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 때였다.

“영결식 때 도로로 차를 따라 갔는데 사진이 찍혔더군요.”

연예인이 경찰에 출두하면 금방 소문이 나기 때문에 스스로 몸을 낮출 만도 한데 맹봉학 씨는 당당하다. 하지만 역시 그 사건 이후로 영화 섭외가 전혀 안 들어온단다.

“전혀 연락이 없어요. 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사실 영화 하는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거든요. 근데 촛불 집회 이후로 한 편도 못했어요. 단편 영화는 숱하게 했지만. 하 참 나, 하하하!”

촛불 집회 때 기억나는 게 있냐고 물었다.

“촛불 집회 때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먹을 걸 갖다 줘요, 고맙다고. 나 하나 나온 게 자기들 백 명 천 명 나온 것보다 더 힘 되니까 고맙다는 거죠. ‘아, 이분들이 지켜보고 있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맹봉학 씨는 푸근한 아버지 역할로 많이 나왔지만 아직 미혼이다. 올해 마흔여덟 살. 왜 결혼을 안 했느냐고 물었더니 “못했다고 봐야죠.” 하고 또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웃는 모습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다.

얼굴이 밝지만 맹봉학 씨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열두 살 때부터 일을 했단다. 7남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맹봉학 씨는 6ㆍ25 때 남쪽으로 넘어온 아버지가 수원에 자리를 잡은 뒤 태어났다. 친척이 없어 명절 때마다 우울했다. 맹봉학 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혼자 살아 나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걸 느꼈단다. 닭을 몇 마리 키웠는데 달걀 한 개를 공책이나 학용품으로 바꿀 만큼 어렵게 살았다. 학교에서 준비물을 사 오라고 하면 집에 돈이 없어 못 사줄 게 뻔해 아예 이야기를 안 했다.

그래도 맹봉학 씨는 늘 희망을 갖고 살았다. 그때 만화를 많이 봤단다.

“만화를 보면, 처음엔 고생하다가 나중에 다 성공하더라고요. 하하하.”

참 잘 웃는다. 꾸밈이 없다. 맹봉학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야간 학교인 산업체 특별 학교를 다녔다. 낮에는 구로공단에 있는 병 공장에서 일했다. 일하다가 손을 다치기도 했다. 다니던 산업체 특별 학교가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맹봉학 씨는 영등포공고 전기과로 들어갔다. 연극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우리 집이 가톨릭 집안이에요. 성당 학생회에서 문학의 밤을 했어요. 그런데 연출가 형이 딴죽을 거는 거예요. 연기를 그거밖에 못하냐고.”

맹봉학 씨는 오기가 생겼다. 가톨릭 학교를 다녀 수사가 되려고 했지만 자기 길이 아니라고 깨닫고는 연극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연극은 재미가 있었다. 첫 작품은 전주 지방연극제에서 한 〈멀고 긴 터널>이었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독립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때 출연한 작품은 영화아카데미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김진성 감독(<서프라이즈>, <거칠마루>)의 <환생>이었다. 그이가 맡은 역은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태어나는 두 명의 사형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밖에 <2001 이매진>, <수사반장 트위스트 김>, <트라이앵글 메모리즈>, <잘돼가? 무엇이든>, <바이칼>, <아버지 어금니 꽉 깨무세요> 등 수백 편에 출연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최원석 감독의 단편 영화 <트라이앵글 메모리즈>라고 한다. 맞고 다니는 아들한테 레슬링을 전수하는, 재미있는 역할을 맡았다.

“내가 코믹 배우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하하하.”

맹봉학 씨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삼순이 아버지 역할이었다. 2005년에 방영했던 그 연속극은 시청률이 50퍼센트 가까이 됐다고 하니, 우리 국민들은 다 봤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한다.

“대사가 좋았어요.”

가장 깊이 기억에 남는 대사는 삼순이가 사랑에 지쳐 혼자 소주를 마시면서 상상 속의 아버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한 대사였다.

“미안해, 아부지. (줄임) 끔찍해. 그렇게 겪고 또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내가 너무너무 끔찍해 죽겠어… …. 아주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그때 삼순이 아버지가 한 말이 시청자들을 울렸다.

“삼순아, 아버지는 가슴이 딱딱해져서 죽었잖아.”

맹봉학 씨는 이 사회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을까. 1987년, 거리에는 짱돌과 최루탄이 날아다니고 데모가 한창이었는데 맹봉학 씨는 연극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얼마 뒤 절차상으로나마 직선제 민주주의로 바뀌었는데 자신은 무임승차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밑바닥에 늘 미안함이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뭔가 할 거다’ 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씨앗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발아할 거’라고 했죠. 그럴 때 광우병 소 수입 반대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어요. 어른들이 막았어야 하는 일인데 아이들이 자기 먹을거리 때문에 싸우는 걸 보고, 이번에 안 하면 더 큰 죄의식을 느낄 것 같아 참여하게 된 거예요. 이왕 참여한 거 열심히 해 보자… ….”

맹봉학 씨는 현재 강동촛불, 참여연대, 언론행동모임, 강동중증장애인, 강동청소년공부방, 백혈병 단체, 제주도 다니엘, 동자동사랑방 등 일일이 외우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곳에 후원 회비를 내고 있다. 은평시립병원, 아산병원에서는 18년째 중증 환자들과 함께 사이코드라마를 하면서 자원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참여연대에서 주관한 ‘최저 생계비 하루 체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보다 앞서 그 하루 체험을 하고는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았다”고 허풍을 친 차명진 의원에게 ‘체험’과 ‘삶’도 구분 못하느냐고 쓴소리도 했다.

맹복학 씨가 이렇게 사회에 관심을 두고 촛불 집회까지 나와 경찰에 두 번 연행되면서 현실은 우울해졌다. 영화 섭외가 뚝 그친 것이다. 후회 안 하느냐고 물었다. 그이는 일분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후회했다면 이런 인터뷰 안 하죠.”

맹봉학 씨는 이어 말한다.

“사람이 영원히 권력을 잡을 수 없는 거고, 언젠가는 죽잖아요. 반성하면서 좀 더 착하게 살다 보면 죽을 때 덜 후회하고 죽을 텐데… …. 이명박, 자기는 안 죽나? 당장 2년 뒤에 청문회 하고 그럴 텐데. ‘버티면 전두환처럼 살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 가질 수 있겠죠. 세상이 잘못 됐지. 잘못을 저지른 전직 대통령들을 너무 빨리 사면해 줘서 그래요. 망명을 가게 하든지 종신형을 때리든지 해야 돼요.”

이렇게 용기 있는 연예인은 처음 만났다. 왜 이런 분이 아직까지 결혼을 못하고 있을까. 마음에 있는 분들은 용기를 내서 <작은책>으로 연락하시라. ‘소개팅’도 사양하지 않겠단다. 맹봉학 씨는 갑자기 배가 고프다면서 떡볶이를 사 왔다. <작은책> 일꾼 최규화가 연예인이 사 준 떡볶이는 처음 먹는다며 입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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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 10. 09:57 둘레/글쓰기 모임
춥지는 않지만 바람이 거세게 붑니다. 조그만 회오리바람이 일어 나뭇잎들이 빙빙 돕니다. 이제 낼 모레면 수능인데 그날 추우려고 그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수능 시험. 모두 시험 잘 보라고 응원하고 난리도 아닐 텐데  다른 친구를 누르고 올라야 하는 상대평가에서 그 응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경쟁을 하지 않고 서로 돕고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그런 세상이 얼른 오면 좋겠습니다.


작은책 전국 글쓰기 모임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경남에 이어 부산도 이제 자리를 잡았습니다. 11월 글쓰기 모임 날짜를 알려 드립니다. 글을 쓰고 싶은 분, 사람을 만나고 싶은 분들 누구나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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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해고 노동자 류승택 씨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안건모




류승택 씨는 대한항공 소속 김해공장에서 일하다 2005년 9월 14일 해고됐다. 해고 사유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터넷 언론 기사, 즉 민중의소리에 난 기사를 사내 홈피에 유포했다는 거 하나고, 또 하나는 제 개인 홈피에 회사 문서를 올렸다는 게 이유죠.”

문제가 된 민중의소리 기사는, 2005년 대한항공조종사 노조가 쟁의행위와 관련 준법투쟁을 위해 준비한 리본을, 사측이 ‘절도’한 사실을 보도한 기사이다. 회사는 그것이 회사의 기물이기 때문에 ‘수거해 간 거지 절도가 아니’라고 명예 훼손으로 고발까지 했다. 또 하나는 류 씨의 개인 홈페이지에 ‘대외비입니다’라는 제목의 글, 회사 인사 정책(C-Player, HR Bank 등) 관련 문서를 올렸다는 이유와 개인 홈페이지에 회사로고 무단 사용 및 회사 문서 무단 게재, 위규 사실 시정 상사 지시 불이행 등이다. ‘C-플레이어’는 회사가 ‘3년 동안 가장 일을 못하는 사람을 저 평가자로 분류하는 것이고, 'HR-뱅크'는 대기 발령을 말한다. 인간으로서 모멸감을 받아 스스로 나가게끔 하는 것이다.

“사내 게시판에 보면 조종사는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억지 파업이니 하는 온갖 걸 다 실어 놨거든요 그렇다면 왜 파업을 하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다른 직원들이 조종사노조를 비판하고 조선일보 기사를 퍼올렸듯이 저도 민중의소리 기사를 퍼 올린 거거든요.”

△ 2006년 1월, 단식 투쟁하는 류승택 씨 ⓒ 안건모


류승택 씨는 2005년 10월 5일에 서울로 올라와 해고자 동지회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일인시위를 하면서 법정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류승택 씨는 1심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조정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판사가 정말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무조건 돈을 받고 정리하라는 거예요. 돈은 많이 받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난 못한다 했지요. 왜 심리도 안 해 보고 그렇게 판단하냐고 했지요.”

류승택 씨는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패소했다. 맨 처음 회사가 자신을 해고했던 이유는 2심에서는 아예 다뤄지지도 않았다. 류승택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류승택 씨는 경남 하동 골짜기에서 태어났다. 나무껍질 벗겨 먹고 살 정도로 어려운 할아버지 세대와 같은 삶을 살았다. 한반에 1, 2, 3학년이 같이 있는 분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했다. 중학교 때 신문을 배달하기도 했다. 공고를 졸업하고 1989년도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대한항공에 들어갔다고 부모님들은 기뻐했다.

류승택 씨는 군대 갔다 와서 복직해 2005년에 해고당하기 전까지 정말 평범하게 살았다. 1995년 회사가 3조 2교대라는 근무 제도를, 스윙 제도라는 맞교대 형태로 개악하려고 했다. 부산지부 대의원이나 조합원들의 의견은 전혀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조합원이었던 류승택 씨는 부당한 회사의 행태에 삭발까지 하면서 항의했다.

△ 대한항공 정문에서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주고 있는 류승택 씨 ⓒ 안건모


“제가 좀 앞섰던 거 같아요. 정직 2개월 징계를 당했지요. 그때 이후로 지금껏 이렇게 살아오고 있지만 지금 생각해도 후회는 안 해요. 오히려 빨리 알아야 할 걸 뒤늦게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년이면 해결된다고 믿었다. 아내한테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3년이 넘어서는 지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류승택 씨는 가족들한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싸움은 개인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가 아프고, 어머니는 아직도 새벽에 청소일 나가시는데, 힘들고 안타까운 거는 있지만 제가 어차피 시작한 일이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싸움이기 때문에 그냥 멈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오히려 복직한 뒤에도 노조 민주화 같은 이 사업들은 고스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조조정이 들어오더라도 누군가는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함께 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류승택 씨는, 자본의 탄압도 있지만 어용 노동조합의 행태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본들도 그 썩은 노조를 이용해야 노동자를 쉽게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대한항공 건물 전경 ⓒ 안건모


“단순한 해고자의 복직 문제가 아니라. 대한항공 노동자들이 새롭게 바로 서는 것은 주체가 서야 할 문제도 있지만 어용노조의 썩은 부분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노조가 변하는 계기가 되고 또 세상이 변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우리 안의 적이 가장 무섭다는 말과 통하는 건지도 모른다. 마치 이명박을 찍어 준 사람들처럼 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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