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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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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7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퇴직금 한푼 없이 쫓기듯 떠나기는 싫었다

 정숙영/ 코웨이 정수기 관리 코디

 

막내가 여섯 살이던 20049, 임상병리사로 경력 단절 상태였던 나는 세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생 집에 방문하던 코디가 자기가 하는 일이 일정 조정이 자유롭고, 열심히 하면 일정한 수입이 된다는 말을 듣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연체 고객 대면, 영업, 초보운전, 관리자들과의 관계 등이 쉽지는 않았지만, 비상금 털어 자동차까지 샀으니 버텨 보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된 17년의 코디 생활.

아침 아홉 시 첫 고객 방문부터 늦는 날은 밤 아홉 시까지, 공휴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일을 한다. 두 달이나 네 달에 한 번씩 정기 방문해서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 연수기 등을 점검하는 코디는 깐깐한 점검 서비스는 기본이고 자차를 갖고 운전도 잘해야 하며 50페이지가 넘는 상품 안내서의 상품을 판매하고 때로는 홀로 사시는 어르신의 심부름꾼과 말동무가 되어 드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국 관리자의 영업 목표를 맞춰야 한다는 잔소리에 시달리기도 하고 회사가 만들어 놓은 점검 시간과 한 달 내에 마쳐야 하는 계정이 있어 매일 종종거리며 이 집 저 집 방문하는 일개미이자 멀티플레이어이다. 고객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방문 점검이다 보니, 고객들의 상황이나 상태에 따라 욕설 등의 언어폭력은 물론이고 드물게는 신체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연락까지 안 되는 고객들의 행동은 나를 더 힘들게 한다. 고객의 코디 교체 요구가 있을 경우, 상처받은 코디를 생각하는 관리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위로는커녕 질책하고 사유서까지 쓰게 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소모되는 코디의 감정을 회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니, 동생, 회사 동료와 수다를 떨거나 혼자 삭인다. 게다가 요즘에는 판매 채널이 다양화되고 수수료 체계가 달라져서 제품 설명은 코디에게 듣고 상품 주문은 온라인이나 사업국의 고가 사은품과 현금 지원이 있는 곳에서 하는 고객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상실감이 크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하다 보면 영업이 부진하거나 관리자들과 불화가 있을 때도 있다. 점검 계정을 늘리거나 줄이면서 괴롭히는 경우도 있고, 지국의 영업 목표를 맞추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제품을 자가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 렌털 제도를 도입했던 전 회장의 경영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이다. ‘고객의 렌털 비용을 낮추기 위해 코디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줄였다. 자동차를 보유하고 자가운전이 가능한이들을 코디로 채용했다. 1만 명이 넘는 코디들이 타고 다닐 자동차를 회사에서 구입하고 유지비용을 댔다면 그 비용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렇게 렌털이라는 아이디어 덕분에 2008년 매출이 13000억 원에 달했다.’ 이처럼 회장 본인은 창조적 발상과 실천을 책으로 써서 코디들에게 한 권씩 나눠 주며 자랑했겠지만,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코디가 책임지게 하는 회사의 규정과 수천억의 영업 이익에도 노동환경에는 변화 없음에 울화가 치밀었다. 만약 권리 투쟁을 할 기회가 있다면 꼭 참여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중심에 서 있다.

17년 일한 지금도 신입 때랑 바뀐 게 거의 없다. 자차를 쓰는데도 유류비 지원은커녕 사고가 나면 모두가 코디의 책임이다. 점검 수수료도 오르지 않다가 노조가 생기면서 한 계정당 몇백 원 오른 게 전부이다. 고객의 단순 변심 반환 시 수당 되물림 제도가 지금은 일 년 내 반환 시 100퍼센트 되물림으로 바뀌었지만 MBK파트너스에서 관리할 당시에는 18개월 내 반환 시 100~150퍼센트까지 수당 되물림이었다. 영업을 하기 위해 썼던 시간과 판촉 비용은 코디가 손해 봐야 한다.

회사에서는 적정 계정을 200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영업이 안 되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당 150만 원 정도만을 받아가야 한다. 일하며 드는 비용을 코디가 전부 부담하면서 말이다.

201711월 코웨이를 떠나야겠다는 마음으로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공부가 끝나갈 즈음 뜻하지 않은 사고로 무릎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 달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고용보험이 있었더라면 두 달 더 쉬면서 전업을 맘 편히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늘 무거운 가방을 메고 계단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손과 발을 많이 쓰는 반복 작업을 하는 코디는 근골격계 질환으로 한의원과 통증의학과를 제집 드나들듯 한다.

지난 3월 16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노조 설립 필증 교부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정숙영 씨. 사진 제공_ 민주노총서비스연맹 가전통신서비스노조

퇴사할 때 퇴직금 한푼 없이 쫓기듯 떠나던 선배 코디들이 생각난다. 밥 한 끼 나눌 시간도 없이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사라져 간다. 나는 그렇게 떠나는 게 싫었다. 그런 내게 들어온 한 장의 노동조합 웹자보. 당장 설명회를 요청했고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가전통신서비스 노조의 양윤석 국장님, 이흥수 코웨이지부 지부장님과 우리 지국 코디들의 만남이 있었다. 우리 지국 코디들이 보낸 내용을 바탕으로 코디·코닥 지부의 홍보 웹자보가 만들어지면서 전국적으로 설명회가 시작되고 코디·코닥 지부는 2019112일 설립 총회를 하게 되었다. 평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나는 큰 용기를 내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며 상집위원이 되었다. 코디를 하면서 대의원대회, 간부수련회, 법률학교 등 조합 활동이 버거워 아프기도 했지만 집중했었던 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길이 열린 듯했지만 노동청에서는 특수고용 노동자라서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하여 노조 설립 필증을 내주지 않았고 노조 설립 필증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집간부들과 서비스가전 간부들의 릴레이 1인 시위가 시작된 지 103일째 되던 513일에 역사적인 특고직 최초의 설립 필증을 받게 되었고 우리의 권리 찾기는 시작되었다. 지금도 회사와 교섭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2019년 11월 26일 웅진코웨이 본사 17층 대표 이사실을 점거하고 대화를 요구하는 웅진코웨이지부. 사진 제공_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가전통신서비스노조

노조가 생기고 전국의 조합원들이 서로 소통하고 한길을 간다는 자체만으로도 벅찼던 순간,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함께할 동지들이 있어 좋았던 순간들을 늘 기억할 것이다. 코웨이가 없으면 코디도 없다. 회사와 대치가 아닌 상생하는 노조가 되었으면 좋겠다. 회사가 탄탄한 코디 조직을 믿고 지원해 준다면 정수기 업계 일등 기업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기 탄탄한 멀티플레이어인 코디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힘든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일하면서 만난 고객들 대부분은 호의적이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또또클럽(목표 실적을 달성하면 회사가 해당 코디·코닥 노동자들에게 식사나 여행을 보내주는 사업)을 통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행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성남 태평지국 가늘고 길게(장기 근속자 소모임) 팀 식구들이 있어 17년을 버틸 수 있었다. 나를 돌아볼 수 있게 귀한 지면을 내준 <작은책>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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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성주, 한반도의 최전선

나정(가명)/ 사드가 배치되어 있는 성주에 살고 있는 주민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시계를 보니 540. 이미 남편은 거실에서 비염에 좋다는 작두콩차를 마시고 있다. 몸이 무겁다. 누운 채 손가락을 차례로 꼽아 본다. 묵직하고 뻣뻣한 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오늘도 새벽에 두 차례 종아리에 쥐가 났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남편이 깨어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아프다. 허리를 시작으로 팔꿈치, 발목, 그리고 이제는 무릎. 아무래도 오른쪽 무릎은 이미 탈이 난 듯하다. 남편 나가는 소리에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세수는 고사하고 거울조차 보지 않고 남편을 뒤따른다. 마스크 한 장이면 족한 세상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집에서 밭까지는 걸어서 30분 걸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10, 차로 가면 5. 대부분 차로 다니지만, 가을철에는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허리와 무릎 근력을 위해 걸어서 간다. 걷다 보면 세상이 다가온다. 로드킬 당한 각종 동물의 사체, 물오른 배 롱나무, 겁 많은 이 집 저 집 개들. 어느 새 도착한 딸기밭. 오십 중반을 넘긴 나와 남편은 참외로 유명한 이곳 성주에서 5년 전 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하필이면 왜 딸기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이곳은 모든 것이 '참외'로 적정화 내지 표준화되어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라서. !

나는 경주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아 길렀다. 경주에서 평생 살 거라 믿었다. 그러나 15킬로미터 인근에 핵발전소가 있다는 사실, 아니 그 핵발전소가 상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주저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그다음 해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끔찍한 참사를 보며 우리의 결정이 옳았다 믿었다. 이런 우리의 귀농사를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웃었다. ‘경주나 성주나.’ 좁은 땅덩어리에서 피해 봐야 소용 없다는 말이지만, 그래도 성주는 100킬로미터 밖. 심리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거리였고, 그 사실만으로 족했다. 그렇게 핵발전소를 피해 온 성주에 2016년 사드(THAAD)가 들어왔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곳 성주가 한반도의 최전선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다시 성주를 떠날까?’

남편과 나는 500평 규모의 딸기 농사를 짓는다. 동수로 보면 세 동이지만, 면적으로 따지면 두 마지기 반의 크기. 수십 동씩 참외 농사, 상추 농사를 짓는 다른 농가들에게는 소꿉장난처럼 보일 것이다. 평생 농사라고는 구경도 하지 않은 우리는 심지어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유기 재배를 선택했다. 시원하게 약 한번 뿌리면 되는 일을 우리는 밤마다 랜턴을 쓰고 민달팽이를 잡았다. 응애가 오면 천적인 칠레이리응애를 넣고 매일 개체수를 살폈고, 진딧물이 보이면 난황유를 만들어 쳤다.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평화로웠고, 새롭게 만난 이웃들과의 풍성한 이야기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무엇보다 가야산으로 넘어가는 노을과 마주하며 돌아오는 시간은 감사의 기도가 절로 터진다. 그런데 이곳 성주에 사드가 웬 말인가!

수확한 딸기들. ⓒ나정

30분 걸어 도착한 딸기밭 주변은 이미 한낮처럼 분주하다. 농사 이웃인 옆 하우스의 K 아저씨는 참외를 따고 있다. 낡은 트럭 위 빨간 바구니에 노란 참외가 그득하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하우스 문을 민다. 딸기는 거짓말처럼 밤새 빨갛게 익어 있다. 순간 젖은 솜처럼 무겁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옆 동에서 남편의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애청하는 채널의 사회자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이 걱정이다. 집과 딸기밭만 오간 지 벌써 석 달. 사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소성리 집회도 멈춘 지 두어 달이다. 오늘은 수요일. 남편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소성리로 올라간다. 사드가 임시 배치된 소성리 미군기지 앞에서 매일 평화행동이 열린다. 남편은 수요일마다 올라간다. 다른 주민들도 참외밭, 고추밭, 마늘밭을 뒤로하고 허겁지겁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미군기지 앞에서 외칠 것이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2019년 10월 6일 성주 소성리 진밭교에 마련된 원불교 교당의 평화 기도가 1000일째 되는 날. 우리 모두 모여 서로에게 감사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사진 제공_ 나정

다시 돌아가서, ‘성주를 떠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싱겁게 정리되었다. 핵발전소가 무서워 떠나왔던 경주가 이미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들 그곳에 제2의 핵발전소, 2의 사드 기지가 들어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특히 사람 적고 힘없는 시골은 더더욱.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떠나고 버릴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곳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사드가 임시배치되어 있는 이곳 성주에서 그냥 살기로 했다. 아니,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사드 배치로 하루아침에 한반도의 최전선이 된 성주 소성리에서, 평생 살아온 터전을 하루아 침에 미군에게 빼앗긴 소성리 어머니들과 함께,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살아 낼 것이다.

미군은 미국으로, 평화는 이 땅으로!”

사드 가고 평화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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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여름철 긴팔 남방을 입은 까닭

 

권해진/ 래소한의원 원장

 

80대 아버님이 환자로 오셨습니다. 당뇨가 심해서 인슐린을 주사제로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팔에 상처가 나서 연고 바르고 반창고 붙이고 했는데, 자꾸만 상처가 커졌습니다. 당뇨합병증 중 하나가 상처 치유가 늦어지는 것이니 그러려니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여름이 되니 반창고 아래로 땀이 차고 농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피부과에 가셨다고 합니다. 이미 괴사가 진행되었고 의사가 열이 나거나 아프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따끔따끔이야 하지. 그래도 무릎이나 허리 아픈 것만 하겠어. 다른 데가 더 아프니 그러려니 했지.”

더 이상의 괴사를 막기 위해 한쪽 팔을 잘라야 했습니다. 처음 한의원에 오셨을 때는 이미 팔 수술을 하신 지 5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피부 상처 하나 잘못해서 이리 ○○이 되었지. 자식들이 팔 없이 옷만 덜렁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놀란다고 가짜 손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게 더 무섭게 생겼어. 원장 보기에는 어때요? 다른 환자 생각해서 가짜 손 달고 오라 하면 달고 올께.”

긴팔 남방 속 의수는 무섭지도 징그럽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 눈이 뭐가 중요합니까! 아버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렇게 말씀드리던 때는 겨울이었고, 옷 안에 팔이 있는지 없는지 누구도 알 수 없을 때였습니다. 점점 더워지는데 아버님은 여전히 긴팔 남방을 입고 오십니다.

당뇨가 있으셔서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도 안 좋아요.”

남방 사이로 바람이 술술 들어와. 반팔 입으면 길 다닐 때 지켜보는 눈 때문에 내가 귀찮아서 그래.”

팔 하나가 없으면 치료받을 때 옷을 입고 벗고 하는 것을 도와야 할 것 같지만 시간만 드리면 됩니다. 그렇게 혼자서 천천히 입고 벗고 하시는 데는 남방이 티셔츠나 다른 옷보다는 편하다고 하시더군요. 이미 생활과 마음의 정리가 이루어진 분입니다. 치료를 끝낸 후 남방 단추를 한 손으로 차례차례 잠그시고 펄럭이는 남방의 빈 팔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오셨습니다.


6학년 때 만난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느리지만 왼손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의 오른손 글씨보다 예뻤습니다.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오른팔의 화상 흔적.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화상이 있었는데 글을 배우던 유치원 때 생긴 상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왼손으로 글씨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졸업 후로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자주 볼일이 있었고 그녀의 여름옷은 항상 흰색 긴팔 남방이었습니다. 교복 세대였던 우리는 여름에는 반팔 교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여름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학교에서 허용해 준 유일한 학생이었습니다. 시원하면서도 얇지만 팔의 화상 흔적을 덮을 수 있는 옷은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제 옷을 사러 갈 때도 시원한 긴팔 남방이 보이면 그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괴사로 팔을 잃은 아버님과는 달리 회사 일을 하다가 손이 절단된 지 3년이 지난 여자분이 있었습니다. 항상 의수를 하고 오셨고 여름에도 긴팔 옷에 장갑까지 끼고 오셨습니다.

제가 장애인이지만 회사를 다녀요. 저희 회사에서 정상인보다 제가 일을 더 잘해요. 그래서 어깨랑 팔이 항상 아픕니다. 사장님이 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해서 휴가도 못 쉬어요.”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자신보다 일을 못 하는 비장애인을 타박하는 말투입니다. 어깨를 만져 보니 절단된 쪽 팔을 쓰지 않고 온전한 팔로만 일을 했다는 것이 보입니다. 어깨 등세모근의 크기가 다릅니다. 한쪽 팔뚝은 다른 쪽의 두 배 크기입니다. 당연히 아픈 쪽은 비정상적으로 일을 많이 한 정상 팔입니다. 2주 동안 매일 치료받으러 오셨습니다. 치료도 열심, 일도 열심인 분입니다. 그런데 치료 효과가 없습니다.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환자분!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언지 아세요? 쉬는 것입니다. 일을 좀 줄이시면 안 되나요?”

장애 있는 나를 써 준 사장인데 일반인보다 더 열심히 해야지요.”

그런데 치료받고 가시면 덜 아프시다가 다시 일을 너무 심하게 하시니 제가 느끼기에는 팔 상태가 매일 똑같아요. 그러면 팔이 남아나질 않아요.”

더 나이 들면 다닐 직장도 없을 거예요. 올해는 몸이 부셔져라 해 보려고요.”

사장님을 욕하는 거는 아닌데요. 회사는 장애인 고용으로 국가 보조를 받을 겁니다. 그래서 환자분이 천천히 몸 생각하면서 하셔도 회사에 손해는 안 갑니다. 정년도 보장이 되고요. 환자분 잃어버린 왼쪽 팔 때문에 열심히 사시는 건 저도 압니다만, 그럼 오른쪽 팔은 누가 돌봐 주나요? 오른팔이 안쓰럽지 않으세요?”

갑자기 그녀가 웁니다.

내 인생이 안쓰럽지. 그래요. 내 오른팔도 안쓰럽지. 없어진 왼팔보다 버티고 있는 내 오른팔이.”

할 말도 해 드릴 수 있는 일도 없어서 같이 울었습니다.

여름철 긴팔 남방 안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많습니다. 느리지만 천천히 시간만 있으면 우리는 모든 사연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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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걸어 다닐 권리! 걸어 다닐 자유!

 

최숙하/ 장애인 재택근무 사원

 

코로나19 때문에 외출이 더 힘들어졌다. 외출해도 음식을 포장해서 오기 때문에 활동지원사 선생님과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여유롭게 먹은 게 언젠지 모르겠다. 올해 봄엔 놀이공원의 튤립 축제에도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내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요즘은 마음 편하게 외출했을 때가 그립다.

내가 처음으로 외출하기 시작한 때는 지체 부자유 특수학교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기숙사 생활도 했고 기숙사 학생들을 위한 지역사회 적응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분위기 좋은 인도 음식점에 가서 인도 카레도 먹어 보고, 방송국에서 장애인 가요제를 관람하기도 했었다. 그 이후로도 전동 휠체어를 타면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왼손으로 운전하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래 봤자 고작 학교 근방에 있는 장소뿐이었다. 하지만 항상 몸에 힘이 들어가서였을까? 내 몸은 언제나 피곤했다.

스물두 살에야 국어국문학과의 학생이 된 나는 무엇이든 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 시뿐이었다. 수업 내용에 관한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학교 구석구석 다니고 싶어도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없어 휠체어로는 갈 수 없는 강의실이나 학생식당도 있어서 이동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필수 과목으로 홈페이지 제작 수업 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 기말시험으로 홈페이지 제작 실기시 험을 봐야 했는데, 시험이 치러질 강의실은 2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고 장애인 경사로가 있었지만, 경사로의 시멘트 가 깨지고 갈라진 데다가 경사가 가팔라 도저히 올라갈 수 없어서 1층에 계신 경비원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경사가 가팔라 가지고, 2층으로 갈 수가 없어서요.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엔 경비원 아저씨의 표정이 얼떨떨해 보였지만 재빨리 나를 쫓아와 내 휠체어를 조금씩 밀어 주었다. 나는 전동 휠체어 컨트롤러로 운전하고 아저씨가 뒤에서 밀어 주며 앞 으로 가 보려 했지만, 경사로에 금이 가서인지 바퀴만 헛돌고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기말 시험이라 시험을 치지 않으면 F학점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 다. 나는 걱정으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나를 보고, 경비원 아저씨가 난처한 듯 말했다.

학생, 조금만 더 속도를 빠르게 해 봐요. 이게 안 움직이네, 다른 학생 휠체어는 잘 가던데.”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시험 시간은 다가오고 움직이려고 한참 동안 노력해도 그대로였다. 그렇게, 시험을 보지 못하고 전동 휠체어를 운전하며 기숙사로 돌아와야 했다.

불편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한 채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 때문에 졸업 이후 사회에 나오면서 마음이 움츠러들었고 두려움만 앞섰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활동지원사 선생님께서 함께 외출을 자주 해 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 주셨다.

선생님과 함께 교통약자 차량을 이용해서 경전철을 타고 가까운 놀이공원에서 꽃도 보며 웃음을 되찾고 필요한 물건을 사러 대형 할인점도 가고, 영화관도 가고.

비장애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도 주어지는 듯했지만, 학교의 안이나 밖의 세상에서도 나에겐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가 없었다.

대형 할인점이나 놀이동산은 장애인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왜 그렇게 좁은지, 전동 휠체어를 운전해 억지로 욱여넣다시피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면 붙잡고 서는 안전 손잡이가 너무 낮게 설치되어 있거나 잡는 순간에 흔들려서 넘어질 뻔한 적도 많았다.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해 외출을 할 때면 콜택시에서 내려 휠체어를 운전해서 사람들이 다니는 보도블록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낮은 방지턱 앞에는 자동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나와 활동지원사 선생님은 낮은 방지 턱이 나올 때까지 멀리 둘러 가야 했다.

길에 시멘트가 깨져 있거나 갈라지고 떨어진 보도블록을 지날 때 전동 휠체어가 흔들리거나 크게 쿨렁댔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다리와 온몸에 더 힘이 들어갔다. 옆에서 활동지 원사 선생님이 운전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다음 날 몸살이 났을 것이었다.

그날 오후 선생님과의 외출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가는 장애인 콜택시 안에서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이 보도블록으 로 가지 않고 자동차들이 달리는 차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사람이 걱정되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언젠가의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행자가 다니는 길이 전동 휠체어로 이동하는 장애인들 에게 편리했다면 그 사람이 도로로 가지 않았을 텐데.’

모두에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듯 모두에게 걸어 다닐 권리가 있다. 그것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당장은 아니 더라도 장애인의 이동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posted by 작은책
2020. 6. 25. 15:22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박소영


발행인의 글

 

벌써 한여름입니다. 올해는 얼마나 더울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 감염증 기세는 꺾일 줄 모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불안하고 뒤숭숭한데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작자들이 참 많습니다. 무차별 의혹을 제기하는 일부 수구언론과 미통당 의원들입니다. 정의연(정의기억연대)을 파렴치한 집단으로 낙인찍고 과장, 왜곡 보도를 하는 수구언론은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정의연의 무차별 의혹 보도와 검찰의 압수 수색에 압박감을 느껴 위안부마포쉼터 소장 손영미 씨가 자살했습니다. 거기에 곽상도 미통당 의원은 타살 의혹이 있다며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곽상도 의원이 어떤 인물입니까. 199158일 당시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이 분신자살한 사건을, 김기설의 친구였던 강기훈 씨를 고문까지 해서 유서를 대필했다고 조작했던 담당 검사였지요. 강기훈 씨는 그 후 2015514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한 인간의 인생을 망치고 이 사회를 살벌한 공안정국으로 몰아갔던 곽상도는 국회의원이 돼 여전히 의혹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이런 사람을 안 보게 되는 세상이 될까요.

이달 특집은 전 국민 고용보험을 다뤘습니다. 본래 좋은 제도인 것은 분명한데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네 분은 전 국민 고용보험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독자님들은 또 어떠신가요.

 

4 책이 이끄는 여행

내 맘속의 첫 대통령, 여운형 - 이동수

12 발행인의 글

 

살아가는 이야기

14 바람이 불어오는 곳 정범구

18 걸어 다닐 권리! 걸어 다닐 자유! - 최숙하

22 성주, 한반도의 최전선 - 나정

27 초보 엄마의 꿈과 성장 - 김설민

31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매운두부덮밥 - 윤혜신

37 두꺼비 손글씨 - 김상화

38 살아온 이야기

힐링 라면과 동료들이 그리워요 - 김수련

44 시 읽고 감상하기

밥 먹고 합시다 - 신경현

47 교장 일기

너는 230이지? 나는 280이다 최관의

52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여름철 긴팔 남방을 입은 까닭 - 권해진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56 몽둥이로 때리면 맞고 있겠습니까? - 김영재

61 당신의 일터는 안전한가요? - 강석경

68 퇴직금 한푼 없이 쫓기듯 떠나기 싫었다 - 정숙영

73 작은책 법률 상담소

기간제 교사와 정규 교사가 뭐가 다른가 - 전다운

특집 _전 국민 고용보험

78 각자의 자리에서 외치는 전 국민 고용보험

- 오민규

83 한식에 죽나 청명에 죽나 - 유채림

87 전 국민 고용보험보다 시급한 것 - 신민주

92 예술인 고용보험,

전 국민 고용보험의 마중물 될 수 있을까? - 오경미

 

96 이동슈의 생활 만화 _ 삼삼한 삶

 

세상 보기

98 옛 그림 속 여성들

죽어야 사는 여자, 열녀 - 이종수

104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내 운동을 오인한 시대 - 고태경

110 어린이 해방과 평화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 이주영

116 생태 이야기

코로나19 원인을 묻는 무책임 - 박병상

122 존버 씨의 시간들

업종별 자살 실태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 김영선

128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민화, 욕망을 욕망하다 - 박찬희

134 독립영화 이야기

그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 류미례

140 책 읽고 딴 생각

누구나 편집을 하면서 산다 - 변정수

144 새로 나온 책 -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