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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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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0. 6. 16:17 둘레/글쓰기 모임

-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posted by 작은책

   사회 진보의 길을 찾는 진재연 씨
   안건모 글 · 사진


 

  올해 나이 서른세 살이 된 진재연 씨는 한탄강 근처 전곡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고등학교 때 전교조 선생님을 만나 영향을 받은 뒤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등 평범했던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중동에서 흔히 말하는, 배후인 전교조 선생님들은 늘 이렇게 평범한 아이들의 삶을 삐딱한(?) 길로 이끈다. 자기만 위해 사는 삶이 아니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말이다.
  진재연 씨는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자연스레 야학 동아리를 찾았다. 도원동 철거민 투쟁 현장에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때는 1997년 노동자대투쟁 때였다. 5월 1일 노동절 때부터 집회에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최류탄이 터지는 매캐한 길에서 경찰과 맞서 싸울 때 무서우면서도 짜릿했고 희열을 느꼈다. 진재연 씨는 그렇게 자연스레 사회에 대해서 배웠다. 졸업을 한 뒤 진재연 씨는 지하철 철도 용역 노동조합에서 비정규직 조직 활동가로 일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8개월 정도 일하고 나와 2004년 1월부터 사회진보연대라는 단체에서 상근을 한다.

△ 2008년 7월 10일 인터뷰 모습

  진재연 씨가 살아온 서른세 해 짧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2006년 1월부터 평택 대추리 지킴이로 들어가 살던 때부터였다. 그 당시 대추리는 전쟁 아닌 전쟁 중이었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평택을 주한미군의 중심 기지로 합의하고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  74만 평을 강제로 수용했다. 주민 100여 명은 강제 수용을 거부하며 그때까지 버텨오고 있었다. 여기에 평택 범대위를 비롯한 시민 사회단체와 학생, 노동자들이 그 대추리를 평화마을을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을 때였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남들은 무서워서 집회 한 번 참석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진재연 씨는 평택 ‘지킴이’로 가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대추리는 언론에서 늘 봐서 알고 있었어요. 폭력적인 진압이 있을 거라 말들이 많았어요. 그건 무섭지 않았는데 엄마한테 내가 평택 가서 산다고 했는데 그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엄마는 그곳이 어떤지 모르는 거죠. 그래서 평택을 들어갔는데 그곳의 삶은 제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의미가 있었어요”
  진재연 씨는 그곳에서 대추초등학교 안에 있던 도서관 관장 일을 맡는다. 아이들과 같이 책읽기 모임도 하고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 그곳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인터뷰해 한겨레 21에 연재를 하기도 했다. 2006년 5월 4일 노무현 정부는 군과 경찰을 동원해 강제로 철거를 하기 시작했다.
  “5월 4일 아이들 운동회 날이었어요. 아이들이 학교는 당연히 못 갔죠. 도서관이 초등학교 안에 있었는데 경찰이 대추초등학교를 무너뜨리면서 창문으로 포대 자루에 책을 막 담아서 밖으로 던질 때 경찰하고 싸우면서 울기만 했어요.”
  정부는 군과 경찰 병력 1만 5천 명을 투입해 마을을 강제로 철거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은 항의하던 시민들과 학생들을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짓밟으며 500여 명을 연행했고, 법원은 16명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다친 사람도 많았다. 강제 철거로 주민들은 결국 2007년 3월 29일부터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온동네가 눈물바다였어요. 이삿짐 싸면서 울고……. 3월 24일 935일째 마지막 촛불 집회 때는 사회자가 눈물을 터뜨렸어요. 그때 주민들이 전부 울었어요.”
  진재연 씨는 그때 생각이 나는지 목이 메어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2007년 4월, 진재연 씨는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진재연 씨는 ‘이랜드일반노조 월드컵분회지원대책위원회’로부터 이랜드 노동자들이 투쟁했던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받고 김순천 씨 외 12명과 인터뷰 형식으로 책을 내는데 함께한다. 그것이 지난 6월 나온《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후마니타스)라는 책이다.

△ 2008년 7월 11일 이랜드 상암점에서 열린 이랜드 일반노조 문화제에서 파업기금을 보태기 위해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책을 팔고 있는 진재연 씨(오른쪽)

  살아온 삶이 짧아 별로 할 말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진재연 씨. 노조활동가로서, 사회진보연대 회원으로서, 평택 지킴이로서 살았던 짧은 삶이었지만 사회 진보를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작은 발걸음이 모여 이 사회가 바뀌고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진재연 씨는 여전히 그 길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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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영화가 재미있다

   김미자/ 우리말 교사



  “한국 영화가 참 재미있고 좋아요. 난 스트레스가 쌓이면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봐요. 그러면 속이 푹 풀려서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일하자!는 그런 기분이 돼요” 하던 우리 한국어 수강생이 나한테 다가와 ‘한국 영화를 100배 즐기는 방법’이란 강연을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난 지난 6월 14일 토요일에 우메다 변두리에 있는 오사카 한국문화원까지 강연을 들으러 갔다. 강사는 일본 정부의 대신관방 심의관, 문화청 문화부 등을 역임하시고, 현재 교토조형예술대학교 교수이자 영화 평론가이신 데라와키 겐이란 분이었다.

  나는 그이를 교육 문제를 다룬 텔레비전 프로에서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어 낯익은 감이 들어 되게 흥미스러웠다. 보아 하니 한국 영화를 꽤 잘 아시지 않는가? 이분이 이렇게 한국 영화에 도통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강연을 들어 보니까 강사가 한국 영화를 보게 된 지 그리 오래 되진 않았다. 어느 날, 그이가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갔는데 몸짱 도둑이 현관에 서 있어 숨이 넘어 갈 정도로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조심스레 봤더니 다름 아니라 그게 바로 등신대 배용준 포스터였단다. 벌써부터 ‘한류’ 팬이 돼 정신이 빼 나간 그 집 사모님이 집 한 채를 온통 ‘한류 스타’ 사진과 포스터로 장식해 놓았단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일본 영화는 보되 한국 영화는커녕 헐리우드 영화도 보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아내가 하도 권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따라 보게 됐단다. 그런데 말이다. 남을 잡으려다 제가 잡힌 꼴로 푹 빠져 버려 한국 영화를 거슬러 보게 돼 불과 5년도 안 됐는데도 이젠 연간 300편을 본다는 당당한 광이 됐단다. 오죽 빠졌으면 이렇게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그는 주로 2000년 이후의 영화를 집중적으로 봤는데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커서 그랬다.

  그러던 2004년 1월, 역사적으로 의의 깊은 일본 문화 전면 개방을 맞이했다. 이걸 계기로 한국과 일본은 문화 레벨 교류를 통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듣건대 거기에는 한국 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이었던 이창동 감독과 일본 정부 문화청 장관 가와이 하야오 씨 들의 꾸준한 노력이 컸다고 한다. 당시 일본 정부 문화청 문화부장이었던 데라와키 씨도 문화청 장관 가와이 씨를 따라 적극적으로 문화 교류를 위하여 한몫을 하게 됐다. 모든 건 부산에서 시작됐단다. 처음 방문한 나라, 처음 걷는 부산의 거리, 시내가 온통 영화제로 들끓던 광경에 감격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건 일본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잖는가. 가뜩이나 도쿄국제영화제가 영향력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놀라움과 초조감에 빠진 그이 곁에서 한국 측은 영화제 운영에 관한 모든 프로세스를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때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찰한 게 큰 도움이 되었고, 계속 산더미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침이 됐다고 했으며, 지금도 우의 깊게 교류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이는 이번 강연에서 일본 사람들이 왜 한국 영화를 이처럼 보게 됐느냐를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강의를 끝맺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탄생하여 본격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져 단계적이나마 일본 문화가 개방됐다는 것에서 가장 좋은 조건이 마련됐다고 했다. 아울러 2002년에는 한일 공동 개최 월드컵을 대성공으로 끝내고, 2003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정권을 잡자 민주화가 성숙돼, 그것이 2004년 일본 문화 전면 개방으로 이어져 그 이후로 일본과 한국이 평화지향, 문화 존중, 인권 중시 같은 기본적 가치관을 거의 완전히 공유하게 된 데에 있다고 했다.

  강사는 그러니 두 나라 국민이 사회에 대한 같은 고민이나 같은 개혁의식을 가졌더라도 별로 이상한 현상이 아니잖는가, 더구나 몇천 년 전부터 자꾸 왕래를 해 온 이웃 나라인데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일본 영화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잖는가 하고 몇 번이나 거듭 말했다.

  나는 강연을 들으면서 우리나라 유구한 역사 가운데 고작 몇십 년 동안만이 이웃 나라 일본에 의해 잘못된 관계가 돼 버린 것임을 새삼스레 생각했다. 또한 정부 차원에서 여러모로 움직인 결과 오늘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강연회 강사가 선택한 한국 영화 상위 1위부터 5위까지를 참고로 적겠다.
 

  1. 박하사탕  2. 살인의 추억  3. 오아시스  4. 나쁜 남자  5. 괴물
  난 여기서 위에서 순위 매겨진 작품을 그가 어떻게 해설했는지는 아예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 사는 사람들 반응이 궁금하다.


  내가 고른 한국 영화 (2000년~2006년 작품)

  1.왕의 남자  2. 역도산  3. 웰컴투 동막골 4. 공동경비구역JSA 5. 오아시스 6. 너는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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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에 나오지 않는 노동자 이야기

   오도엽/ <작은책> 객원기자



  두 달이 넘도록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억수와 같이 비가 쏟아져도 촛불은 꺼지지가 않는다. 시청광장을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면 유모차를 탄 아이에서 허리가 굽은 할머니까지 만날 수 있다. 녹음기 마이크를 슬며시 들이대면 갖가지 사연이 흘러나온다. 서울광장은 서민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내고 달래는 공간이 되었다. 촛불 문화제에 가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런 저런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대전의 콜텍 조합원은 서울 본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이천의 테트라팩도 다국적 기업과 맞서 아직 싸우고 있다. 반가움은 잠깐이고 답답함이 가슴 가득 밀려든다. 촛불이 미처 비춰 줄 수 없는 설움과 눈물이 너무도 많아 속상할 뿐이다. 서울광장에 모인 기자들의 카메라를 보면서 참담해진 순간도 있었다. 1000일을 넘기며 싸우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단식이 이제 한 달을 앞두고 있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싸움도 1년을 훌쩍 넘었다. 지난 여름 비정규직법 시행으로 쫓겨난 이랜드 노동자들이 농성을 했던 홈에버 상암점에는 다시 농성 천막이 들어섰다.

  비정규직법 시행 1년을 앞둔 지난 6월 25일 남대문에 있는 한국주택금융공사 앞을 찾아갔다. 와이셔츠를 입은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가슴에 매단 천에는 하얀 구멍이 뻥 뚫려 있다. 그 밑에 자그마한 글씨로 ‘비정규직의 뻥 뚫린 가슴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한국주택금융공사는 공공 기관이다. 서민들의 전세 자금, 연금, 학자금 들을 대출해 주는 곳이다. 5백여 명의 직원이 일을 하고 있고, 이 가운데 백여 명은 계약직 직원이다. 지난해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 대책’이 만들어졌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이나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하라는 정책이다.

△ "사람은 일회용품이 아닙니다." 지난 6월 25일 한국주택금융공사 앞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

  계약직 직원은 보통 11개월에 한 번씩 재계약을 했다. 비정규직법 시행으로 2년이 넘은 비정규직은 이제 재계약을 하지 않고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공공 기관인 한국주택금융공사 계약직 직원들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비정규직법이 확대 시행되는 오는 7월에는 정규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무기 계약직이 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광주지사에서 근무하는 이재석 씨는 지난 3월에 익산센터로 옮기라는 제의를 받았다. 계약직인데 익산으로 옮겼다가 재계약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되었다. 아내도 광주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용이 안정되지 못한 이재석 씨에게 아내의 수입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전학시키는 일도 부담이었다.

  회사에서는 걱정할 게 없다고 했다. 계약직으로 2년 이상 근무했기 때문에 오는 7월에 당연히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될 테니 안심하라고 했다. 서른여덟 이재석 씨는 결심했다. 이제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데 뭐가 걱정이냐. 맞벌이를 하던 아내에게는 직장을 그만두라고 했다. 이제 갓 입학한 아들도 전학을 시켰다. 집도 팔고 익산으로 일터를 옮겼다. 익산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열심히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게 4월 3일이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이재석 씨는 어김없이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익산센터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늘 하던 대로 컴퓨터를 켜고 회사 전산망에 접속을 하였다. ‘계약 인력 운용’이라는 제목으로 부사장 이름의 공문이 올라와 있었다. 이재석 씨는 무기 계약직 전환에 대한 대책이 발표된 줄 알고 기뻐서 클릭을 했다. 한국주택금융공사 계약직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공문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채권추심에 근무하는 계약직 직원을 계약 해지를 한다는 공문이었다. 업무를 없애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직원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직원으로 충당한다는 것이다. 각 지사와 센터는 신규 직원에 대해서는 6개월 이하의 단기 계약직으로 뽑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주택금융공사 계약직 직원들은 말했다.

  “능력이 없어서 쫓겨나거나 성실하지 못해서 계약 해지되었다면 억울하지 않아요. 업무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상관없이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으로 2년 이상이 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 때문에 쫓겨나는 거잖아요.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불안해도 11개월에 한 번씩 자동으로 계약을 갱신했는데 이게 뭡니까.”

  또한 계약직 직원들은 공공 부문 개혁의 피해자라고 말했다.

  “공공 기관 개혁을 하라고 하니 계약직을 희생양으로 삼은 거예요. 정규직을 구조 조정할 수 없으니 계약직 직원들이 정규직이나 무기 계약으로 전환되는 걸 막아 개혁을 했다고 하려는 거 아닙니까. 저희들이 하던 업무는 계속 필요합니다. 저희가 나가는 자리를 단기 계약직으로 충원한다는 게 이명박 정부의 막무가내식 공공 기관 개혁의 실상이에요.” 6월 3일 공문에는 계약 해지자 명단이 없었다. 더는 계약 갱신 없이 모두 해고라는 통보였다. 그날 밤 퇴근을 한 이재석 씨는 차마 아내에게 이달 말로 계약 해지되어 실업자가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 "정규직화 실시하라." 노동자들의 바람을 담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여보, 직장에 다니지 않고 살림만 하는 것도 이제 몸에 익네.”

  아내가 된장찌개를 식탁에 올리며 말을 했다. 초등학생 아들과 다섯 살 난 딸아이가 식탁으로 달려와 숟가락을 들었다.

  “아빠 화났어?”

  딸이 아무런 말도 없이 밥만 먹는 아빠에게 물었다. 딸의 목소리에 이재석 씨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이재석 씨는 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아빠가 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이대우 씨는 계약직 직원을 일회용품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 행동이라고 분노를 했다.

  “계약직이라지만 회사에서 2년 넘게 근무해 온 직원들이 아닙니까. 최소한 한두 달 시간을 두고 해고 통보를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모두들 집안의 가장이고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6월 3일에 달랑 전산망에 공문 한 번 올리고 그달 말에 회사를 나가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어디 다른 일자리 알아볼 짬이라도 줘야 맞는 것 아니에요. 계약직 직원들이라지만 대부분 10년 이상 금융계에 근무한 베테랑이에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인데, 정말 자존심을 뭉개는 짓이에요.”

  이대우 씨는 평화은행에서 정규직으로 근무를 하다가 아이엠에프 때 은행들이 구조 조정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가로놓인 높은 벽을 하루에도 몇 차례 경험을 했다. 취재를 하고 돌아서는데 계약직 직원들이 물었다. 오늘 몇몇 기자들과 방송 카메라가 왔는데 언론에서 다뤄 주겠냐고 묻는다. 얼마 전에도 공중파 방송에서 취재를 해 갔는데 갑작스레 촛불 집회 관련 내용으로 바뀌어 방영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알 수 없다고 답을 했다. 해고를 앞둔 계약직 직원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날도, 그 다음날도 텔레비전에도 신문에도 한국주택금융공사 노동자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 "비정규직 법안을 악용하는 한국주택금융공사를 규탄한다."

  나흘 뒤, 세종로 프레스센터 앞에 전경차가 8차선 도로를 가로막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보 게재에 맞서 성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몰려 나온 날이다. 물대포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크레인까지 동원하여 경찰과 시민들의 대치 상황을 생중계하던 날이었다. 노란 비옷을 입고 물대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재석 씨로 보였다. 주홍빛 조끼를 입은 기륭전자 노동자도 보였다. 이랜드 노동자도 보였다.
 
얼굴에 맺힌 물기가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르겠다.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에 맞아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서울광장에는 한 많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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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30. 17:20 알림 / 엮은이의 글

<차례>

    4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8   엮은이가 독자에게
    9   원고를 기다립니다
   10  작은책을 읽고

살아가는 이야기
12  문제아는 문제 없다   박수주
16  돼지 잡기  박용섭
20  사랑인지 집착인지  김신애
25  풀베기   박준성
28  여성의 일과 삶  
      군식구  안미선
32  삶이 있는 만화  정재훈
34  살아온 이야기(10)  큰딸이 시집간다  김재영
39  오도엽의 일터 탐방  
      성신여대 청소 용역 엄마들    
45  일터에서 온 소식
      섹시스타 ‘이효리’가 입은 간호사복   이숙희    
49  세상의 중심에서 십대가 외친다
      성장통   김수민
53  농촌 들녘에서 보낸 편지  
      사람 냄새 나는 마을   김근희
기획 특집 _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재일 한국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김송이
57  강좌
74  질문과 답변
77  뒷이야기

79   만화로 보는 세상  이성열
우리 밖의 우리
  80  함께 읽는 북녘 글  동자삼  
  83  북녘 남새 요리  감자멸치국
  84  재일 조선인 이야기  꿈 같은 여름방학   김미자
  88  이주 노동자  잔인한 난민 입증 요구   이정원

세상 보기
   92 박종남 노무사의 현장 노동법 이야기  ‘빼앗긴 권리’와 ‘빼앗을 권리’
   94 국제중학교 문제   경쟁은 교육에 해롭다   강경구
   98 정태인의 쉬운 경제 이야기  박형준 홍보기획관에게

그때 거기, 지금 여기
  102  인물 바로 보기  깨물지 못한 혀  방학진
  106  여민락  토우  김산하
  112  그때 거기, 지금 여기  부마항쟁이 시작된 곳     김종세

쉬엄쉬엄 가요
  118  우리말 산책  뒤침과 옮김  김수업
  120  생명을 살리는 밥상  천사의 음식  윤혜신
  124  노동자 문화 산책  플라톤이라는 철학자  박홍규
  128  시사 풍자 음란 만담   청기와 주식회사
  130  함께 읽고 싶은 책  집 없는 사람이 사는 법    김승태
  132  새로 나온 책
  135  독자사업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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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

   최선희/ 부천실업고등학교 교사



  작년, 재작년 1학년 담임을 하면서 다음번에는 꼭 취업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아이를 바라보는 담임과 취업 교사의 차이를 느껴 보고 싶었고 내 스스로 좋은 조건의 회사를 발굴하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도 아이들을 취업시킨 적은 있으나 우리 반에 한정된 주먹구구식의 취업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올해는 1학년 전체를 취업시켜야하는, 말 그대로 취업 담당 교사였기 때문에 신입생이 들어오기 전인 2월 달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며 회사를 확보하려고 동분서주하였다.

마음이 급한 가운데에 생활정보신문, 기존에 재학생이 취업되어 있는 회사, 노동부 워크넷을 주로 이용하여 취업 회사를 발굴하였다. 취업 경험이 많지 않아, 일단 전화를 하여 우리 학교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들을 직원으로 써 준다고 하면 ‘아이고, 주여’ 하며 아이들을 취업시켰다. 학기 초라 취업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을 때여서 아이들을 써 주기만 한다면 너무나 고마운 그런 때였다.

  그러던 중에 생활정보신문을 보고 한 회사에 전화를 하니 흔쾌하게  여덟 명 정도를 고용하겠다고 하였다. “아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 회사를 확장하면서 한 라인을 우리 학교 학생으로만 돌리겠다는 거다. 그런데 아이들이 출근하고 이틀이 지나서 여자 아이 두 명을 해고했다. “한 명은 왼손잡이고 한 명은 손이 너무 느리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남학생 세 명과 여학생 한 명을 해고했다. “각자 제 몫을 하지 못한다.”

  마치 여덟 명을 데려다 놓고 경쟁하듯이 일을 시켜 놓고 그중에서 제일 잘 하는 놈, 돈이 되는 놈, 두 명만 남겨 놓은 듯한 생각이 들었다. 행위가 하도 괘씸해서 따졌다.

  “우리 아이들이 일한 경험이 없으니 처음부터 잘하리라는 기대는 안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일단 지각, 결근만 안 하게 지도해 주면 나머지는 자식 키우듯이 여유 있게 바라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설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한 달은 지켜보고 월급은 주고 자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니 그 회사에서는 “회사가 뭐냐, 돈을 바라보고 하는 데가 아니냐? 그날 생산량을 못 맞춰 주면 같이 갈 수가 없다. 이것저것 떠나서 돈이 되지 않는 애를 어떻게 데리고 있겠느냐?”는 것이다.

  워메, 열 받는 거… …. “아니, 그래서 면접 보기 전에 우리 아이들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지각, 결근하지 않고 성실하게 출퇴근 잘하고 어른들 말씀 잘 듣고 하면 미우나 고우나 아이들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적어도 한 달은 일해 보고 결정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했지만, 이미 상대는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굳은 표정이었다. 이어서 마지막 남은 에이스 두 명은 근근이 잘 버티더니 한 달 만에 그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로 이틀 만에 해고된 친구부터 한 달 만에 그만둔 친구들의 급여는 회사 측의 말도 안 되는 이유와 억지, 그리고 횡포로 그만둔 지 두 달이 다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다. 학기 초에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너무 순진하게 일 처리를 했나? 취업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너무 많으니 주면 주는 대로, 이게 쓴 건지 단 건지도 모르고 넙죽넙죽 받아먹지 않았나?’

  그래서 이제는 좀 냉철해지기로 하였다. 아이들을 회사에 데려가기 전에 먼저 회사를 탐방하는데, 이제는 좀 거리를 두고 생각하려고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라고 하면 좀 거창하겠지만 어쨌든 아이들을 고용하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일하는 아이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길고 느긋하게 봐 주기를 말씀드린다. 갈 때마다 “자식 하나 더 키운다고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린다.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자식이 내 마음대로만 되지 않고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한다’는 걸 알 테니까… ….

  요즘은 영화 제목 중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가 생각난다. 나는 취업부 일을 한 지 얼마 안 되고 1학년 아이들도 처음 일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서로 많이 얼었다. 일자리 찾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어떤 일에 관하여 깊고 넓게 보지 못한 면이 있을 것이고 아이들은 일을 해야 생활이 유지되는데도 정신 못 차리고 지각, 결근을 하여 어렵게 구한 회사를 하루 만에 잘린 놈, 월급 받고 바로 튀는 놈, 아예 우리 학교와 회사와의 연을 끊게 만든 놈들이 있고… …. 많은 것이 우리를 얼게 만들었다.

  그래서! 1학기 때 회사에서 두 번 이상 잘린 아그들에게 고함. 이제 우리 서로를 죽이지 말고 생기발랄하게 살아 보자. 한 학기 동안에 선생님 가슴에 못 박을 건 다 하지 않았니? 우리 2학기 때는 멋지게 부활하는 거야. 2학기 때도 1학기 때처럼 하루 만에, 일주일 만에 잘리고 온다면 선생님은 그냥 콱! 아우~. 생각만 해도 혈압 오른다. 그러니 우리 서로 웃으며 재미있게 살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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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22. 11:53 기획 특집

<혁명은 다가오는가> 9월 25일 손석춘 선생님 강연이 있습니다

작은책 강좌가 벌써 열한 번째를 맞이했습니다. 오는 9월 25일 목요일에 열리는 강좌는 <혁명은 다가오는가>라는 제목으로 손석춘 선생님이 하실 차례입니다. 손석춘 선생님은 현재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으로 계십니다. 

손석춘 선생님 약력

학력 : 연세대학교 철학과 - 고려대학교 정치학 대학원

"새사연 원장. 언론학 박사. 현재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손석춘의 주권학교> 강의를 맡고 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창립공동대표, 한겨레신문 노조위원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84년 한국경제신문

1987년 동아일보

1991년 한겨레신문 기자

1999년 한겨레신문 편집국 여론매체부 부장

2000년 방송위원회 보도교양 제1심의위원회 위원

2002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실 논설위원

EBS `월드 FM 손석춘입니다` 진행

저서 

신문 읽기의 혁명 (1994, 풀빛)

언론개혁의 무기 (1997, 개마고원)

여론읽기 혁명 (2000, 한겨레신문사)

아름다운 집 (2001, 들녘)

유령의 사랑 (2003, 들녘)

R통신 : 젊은 벗들에게 띄우는 손석춘의 러브레터 (2002, 한겨레신문사)

부자 신문 가난한 독자 : 한국의 친일 언론은 어떻게 부자신문이 되었는가? (2002, 한겨레신문사)

아직 오지 않은 혁명 : 손석춘의 시대, 청년, 종교, 교육 읽기 (2003, 월간말)

최근 저서 - <주권혁명>(시대의 창)

 

문의 : 작은책 02-323-5391

홈페이지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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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19. 11:00 기획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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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열 번째 강연 - 재일 한국인이 쓴 낫짱이야기

8월 21일 목요일 7시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 김송이 선생님 강연이 있습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는 한국은 어떤 사회일까요. 어릴 때부터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살아온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학교에서 '가난뱅이 센진'이라고 늘 놀림받고 차별을 받으면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온 김송이 선생님. 어릴 때 이야기를 《낫짱이 간다》《낫짱은 할 수 있어》(보리출판사)라는 책으로 냈습니다. 어릴 때 주눅 들어 있는 아이들이 이 책을 보면 자신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누구든지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녀를 씩씩하게 키우고 싶은 부모님들, 또 자신들도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은 분들, 그리고 우리 동포들이 멀리 떨어진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고 싶은 분들은 이번 주 목요일 작은책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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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송이 선생님은 194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일본 도쿄에 있는 조선 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오사카 조선 고등학교에서 28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일본 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면서, 두 나라이 작품을 번역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차별에 맞선 조선 아이 낫짱 이야기《낫짱이 간다》《낫짱은 할 수 있어》를 썼고, 일본의 전쟁 책임을 다룬 만화 《맨발의 겐》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권정생 선생님 동화《밥데기 죽데기》

박기범 동화집《문제아》같은 우리 아동 문학 작품을 번역해 일본에서 펴냈습니다. 

약력 

1959년 3월 오사카시립 후카에소학교 졸업

1962년 3월 오사카시립 도요중학교 졸업

1965년 3월 오사까조선고급학교 졸업

1969년 3월 조선대학교 문학부 졸업

1969년 4월 ~ 1996년 3월 오사까조선고급학교 교사

현재 일본 긴끼대학 등에서 강사로 일함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맹원

국제고려학계 회원

 

저서에 중편소설 <조청반장> 등

역서에 일본어를 한국어로 옮긴 <맨발의 겐>전 10권

한국어를 일본어로 옮긴 <밥데기 죽데기> , <문제아>,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우리들의 손>, <비밀의 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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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도 불온서적으로 선정하라

  아내와 가까운 곳에 여행을 다녀온 뒤 집에 와서 며칠 지난 한겨레를 펼쳤다. 오잉? 이게 뭐야? <국방부 ‘홍보’ 덕분에… ‘불온서적’ 판매 불티 나네>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불온서적? 별 웃기는 짬뽕들이 다 있군. 잃어버린 10년이니 어쩌구 하더니 정신을 잃어버렸나 보다.

  기사를 읽어봤다. 대중성 높은 인문교양서와 수십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까지 ‘불온도서’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서 다섯 배에서 일곱 배가 더 팔린다는 소식이다. 그 기사엔 장하준 교수가 쓴 <나쁜 사마리아인들> 책이 ‘불온도서’로 선정됐다고 나와 있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책은 나도 샀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다. 무척 많이 팔린 책으로 알고 있는데 불온도서라고? 정부 하는 짓들이 하도 그러니까 무덤덤하다. 그런가보다 하고 월요일 치 신문을 들췄는데 어라? <우석훈, 진중권 등, 국방부 조처에 익살․조롱>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기사에 정태인 선생 이름이 나온다. 정태인 교수가 지난 2일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에 올린 글에 “(여러 사람과 함께 쓴)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책도 불온서적 목록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아무래도 제목의 선정성이 선정 기준이었던 모양”이라고 비꼬았다.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책은 작은책 12주년 기념으로 내가 강연을 기획해서 정태인, 홍세화, 하종강, 이임하, 박준성 선생이 강연한 내용을 ‘철수와 영희’ 출판사에서 책으로 펴 낸 것이다. 강연한 사람 가운데 나도 물론 포함돼 있다. 그런데 그 책이 불온서적 목록에 들어갔다고? 천박한 천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온하다는 말을 들으니 이거 참 영광(?)이군 하면서도 은근히 열 받는다. 역사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에게 재단을 당하다니. 그런데 ‘불온’이라는 말이 뭘까?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온당하지 않음’이라는 뜻이고 두 번째는 ‘(일부 명사 앞에 쓰여)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음’이라는 뜻이란다. 아하, 그러니까 내용은 둘째치고 자기들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면 불온한 거군.

  8월 6일 휴가가 끝나고 회사로 나와 국방부 민원실에 전화를 했다. 내가 누구인지 자세히 밝히고 그 책이 불온도서 선정이 된 기준이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담당하는 부서 바꿔 드릴게요” 하면서 정보 본부 보안과라는 곳으로 전화를 돌려준다.

  “보안과 김○○입니다.”

  “김 뭐라고요?”

 나는 이름을 먼저 알고 싶어서 물었더니 대답은 안 하고 누구냐고 묻는다. 다시 설명했다. “이번에 국방부에서 불온서적 목록을 발표했는데 그 책 가운데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를 쓴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안, 건, 모입니다. 실례지만 전화 받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죠?”

  “아, 김 서기관이라고 아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어 하는 말이 그런 건 민원실을 통해서 하란다.

  “민원실을 통해서 거기를 바꿔준 겁니다. 전 단 한 가지, 불온도서 선정 기준이 뭔지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거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

  “아, 그 내용 홈페이지에 다 나와 있어요.”

  “내가 지금 국방부 홈페이지를 열어 놓고 있는데 어디에 나와 있지요?”

  “아, 제가 확인을 못했습니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건 확실한가요?”

  “그건 잘 모르고 대변인실에 확인을 한번 해 보세요.”

  “거기가 담당 부서라면서요?”

  “아, 저는 책임자가 아니라 실무자라서 잘 몰라요. 그리고 제가 지금 회의를 가야되거든요. 죄송한데 전화 끊겠습니다.”

  삐, 삐, 삐! 소리가 들렸다. 어? 전화를 끊어? 이 사람이 내가 얼마나 집요한지 모르는군. 다시 민원실로 전화를 했다. 이번엔 대변인실을 바꿔 달라고 했다.

다시 아까와 똑같이 물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하는 말이, 그건 정보본부 보안과가 담당이라고 했다.

  “거기서 대변인실로 전화하라고 해서 거기로 한 겁니다.”

  “아, 죄송합니다. 아마 직원 분이 아니라서 잘 모르고 그랬나 봅니다.”

아니, 직원이 아닌 사람이 왜 전화를 받아? 우리나라 국방부가 이 정도야? 불온도서 선정보다 내부 직원 선정이나 잘해라. 속으로 생각하면서 집요하게 물었다. 그랬더니 두 시간 안에 다시 전화를 드릴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도 전화가 안 온다. 세 시간이 넘었다. 다시 전화를 했다. 이번엔 공보 담당이라는 곳으로 전화번호를 알려 준다.

  “돌릴 테니 혹시 끊어지면 748-6728로 다시 하세요.”

  돌린다더니 삐, 삐, 삐 소리가 들린다. 다시 전화를 돌렸다. 똑같은 내 소개를 하고 똑같은 질문을 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화 받은 곳은 문화부란다.

  “이리로 하시면 안 돼요. 여긴 문화부입니다. 748-2340으로 하세요”

  “전화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네요. 속이는 거 같아 영 기분이 안 좋네요”

  ‘지금 장난하는 거야?’ 하는 말 대신에 부드럽게 말했다. 나이 드니까 성질 많이 죽었다. 역시 전화를 돌려준다고 하더니 삐, 삐, 삐 소리가 들려 온다. 또 전화를 끊었다. 허 이것 봐라. 일부러 그러는 거야, 시스템이 엿 같아서 그런 거야? 국방부 시스템이 이 정도야? 이래 가지고 나라 지키겠냐? 오기가 생긴다. 우리나라를 지키려면 내가 포기하면 안 될 듯싶다. 다시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네, 죄송합니다. 담당자가 전화 통화중이라서 좀 이따 하세요. 아, 잠깐만요. 전화 통화가 끝났네요. 바꿔 드릴게요”

  드디어 보안 정책 과장이라는 사람과 통화가 됐다. 이름을 알고 싶어서 물었지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켕기는 게 있나? 왜 자기 이름을 떳떳이 밝히지 못할까. 음, 이름이 알려지면 이북에서 테러 대상자로 찍힐까 봐 그런가 보다.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치면 안 되지. 내가 이해를 해야지. 다시 내 소개를 하고 불온도서 선정 기준을 물었다. 열심히 설명을 한다.

  “우리 군대에 세 가지 정도 근거가 있는데요. 대통령령으로 정한 군인 복무 규율이 있고 국방부 훈령으로 나온 병영 생활 규정이 있는데요…….”

  그러면서 ‘허가되지 않은 불온서적물은 반입을 금지하고 불온 표현물 소지와 전파를 할 수 없고 취득시에는 신고를 해야 하고 국방부 훈령으로 된 군사보안업무시행규칙에는 부대에 반입, 반출하는 모든 자료는 부서장이 보안상 검토를 실시하고…….’ 한참 설명하기에 잠자코 들었다.

  “네, 그건 알겠습니다. 당연히 부대에 그런 규칙이 있어야 하죠. 그런데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라는 책이 불온도서 목록에 올랐죠? 그 기준이 뭐죠?”

결국 정책 과장이라는 사람은 그 선정 기준을 말했다.

  “그 기준이라는 게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단체에서 군대에 도서보내기 운동을 한 책을 기준으로 한 겁니다.”

  “이적단체요? 한총련을 말하나요?”

  나는 한총련이 이적 단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들은 말이 있어서 넘겨짚었다.

  “그것도 포함합니다. 엄연히 93년도에 이적단체로 법원에서 판결이 났죠. 그런 책들이 장병들의 정신․전력을 약화, 저하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판단해서 불온도서 목록으로 선정한 거죠. 어느 부분이 그렇냐고 물으면, 그것이 몇 페이지 몇 줄에 나와 있는 게 아니고…….”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는 왜 불온도서 목록에 올랐죠?”

  “그게 전체로 보면 문제가 없습니다. 한두 줄 문장에 그런 게 나오죠.”

아니, 금방 몇 페이지 몇 줄에 나와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니 이번에 한두 줄 문장이 그렇단다. 이랬다 저랬다 도대체 논리가 없다. 말이 바뀌는 것도 우습지만 책을 전체로 봐야지 한두 줄 문장으로 판단한단 말인가? 이 사람도 조선일보 애독자인가 보다.

  “책은 읽고 하나요? 다 읽으셨습니까?”

  “선정한 곳에서 다 읽었습니다.”

  “그럼 한홍구 선생님이 쓴 <대한민국사>는 <한겨레 21>에 나온 글을 책으로 낸 건데 <한겨레 21>도 불온 도서 목록에 올라야 하겠네요. 그 책은 왜 오르지 않았지요?”

  “한겨레 21이요?”

  “네, 한겨레에서 나온 주간지 모르시나요? <대한민국사>는 그 책에 나온 글을 책으로 엮은 거죠.”

  “사실 불온도서가 더 많죠. 우리나라에 그것밖에 안 되겠습니까. 검토할 시간이 없었던 거죠. 그리고 이번에 불온도서 목록 발표는 언론에 저희가 고의적으로 낸 게 아닙니다. 비공개로 군내에서만 문서 작성을 해서 발표한 걸 한 신문사 기자가 공개한 거죠.”

  “불온도서가 더 많은데 찾아내지 않으면 직무 유기 아닌가요? 그리고 불온도서 선정이 정당하면 신문사에서 발표한 게 왜 문제가 되죠? 오히려 널리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만일 그게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불온도서 목록을 취소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할 생각은 없나요?”

  그 사람 대답은 ‘(사과할 생각이)없습니다’였다. 그러면서도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한다. 허허허 웃음이 나온다. 뭐가 죄송한 거지? 자기들이 올바로 판단했으면 죄송할 일이 없을 텐데. 오히려 정당한 판단이었다고 주장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경찰에 알려 불온 서적을 낸 출판사, 그 책을 파는 서점,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하는 거 아닌가? 알라딘이나 예스 24시 같은 인터넷 서점에서 국방부 추천도서, 아니 ‘불온서적’ 판매 이벤트를 하고 있는데 왜 안 잡아들이나? ‘철수와 영희’ 출판사는 책 주문이 들어와 인쇄를 또 하고 있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왜 안 잡아들이나? 하긴 그러려면 수십만 명을 잡아들여야 할 테니 아마 엄두가 나지 않을 거다.

  요즘 세간에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국방부 장관을 비웃는 글들이 엄청 떠돌아 다닌다. <88만원 세대>를 쓴 우석훈 씨는 “금서 목록에 내 책이 들어가지 않은 것을 보고 ‘이 시대착오의 세상에 너무 말랑말랑하게 쓴 것 아닌가’ 깊이 반성했다”고 비꼬았고 진중권 교수는 “내 책이 병영에 들어가 병사들의 정신세계를 감염시켜도 무방하다는 말이냐”며 조롱하고 있다. 어떤 이는 ‘머리 숱 없는 어느 대통령이 통치할 때 전형적인 친자본주의 이론가인 막스 베버의 책도 불온서적 목록에 올렸는데 그 사연인즉, 대머리 대통령의 검열관들이 '막스'를 '맑스'로 오인했던 것’이라는 보기를 들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함과 무식함의 내공을 어찌 따르랴.’고 했다. 덧붙여 ‘최소한 불온서적을 선정하겠다고 팔을 걷어부친 마당에 이 정도의 열정과 노력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고 웃겨 한여름 더위를 잠깐이나마 잊게 하고 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왜 우리 <작은책>은 불온서적 목록에 선정이 안 된 거야? 우리 <작은책>이 반정부, 반미제국주의, 반자본주의 책이라는 걸 정녕 모른다는 말인가?

  책 내용도 모르고 불온도서 목록을 선정하는 국방부. 내가 일하고 있는 작은책 사무실로 와 보면 입이 째지겠다. 작은책에는 국방부가 선정할 만한 불온도서 같은 책 말고는 없으니까 말이다.

  불온도서 목록에 올라도 항의를 받고, 안 오른 사람한테도 비꼬는 투의 항의(?)를 받는 짓을 벌인 국방부. 전라도 표준말로 으째야쓰까잉!

작은책 발행인 안건모

posted by 작은책
2008. 7. 30. 13:38 둘레/역사와 산
이번 주 8월 10일 일요일 홍천 팔봉산 산행

운영자


△ ⓒ팔봉산에서 바라본 홍천강


팔봉산에서 바라본 홍천강

8월 10일(일요일 하루)은 홍천 팔봉산입니다. 신청하실 분은 역사와 산 홈페이지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historymt.co.kr/

[169회정기산행] 팔봉산 (302m, 강원 홍천)
모이는시간:2008년 8월 10일(일) 오전 07:30

모이는장소:시청역 삼성본관앞

산 행 일정:팔봉산, 홍천강

준 비 물:등산복,등산화,물,행동식, 물놀이 준비

회 비:일반 30,000,중.고등학생 15,000, 초등 1만원
<
홍천강 안고도는 톱날 수석>
팔봉산은 산 같지도 않은, 300미터가 조금 넘는 동산이다. 그럼에도 같은 이름의 어떤 산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산이다. 여덟 봉우리가 모두 바위로 되어있어 하늘금이 둥근 톱날처럼 역동적이고 스릴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래 작은 산이지만 대개의 등산객들은 팔봉 넘기를 다 하지 못한다. 철계단과 쇠줄까지 쳐있는데도 마지막 봉우리는 포기하고 돌아서기 일쑤다. 작아도 강단(剛斷) 있는 산이다.

발치 3면은 홍천강이 싸고돈다. 강물은 깊푸르나 물가에는 모래벌이 펼쳐졌다. 그냥 모래 하얀 수반(水盤)에 물이 잘박거리는 수석(壽石)인 것이다. 요산요수를 겸하기에 이보다 나은 데가 있겠는가?

강 건너 서쪽의, 늪둔지라는 우각호(牛角湖) 가에는 밤나무숲이 울창하다. 근래 오토캠핑장을 만든다며 많이 베어버렸지만 아직도 옛모습이 꽤 남아있고 옛 강길도 띄엄띄엄 그대로 있다. 이런 명산(名山)영수(靈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교통이 불편한데도 사람들은 철을 가리지 않고 찾아든다.

추천코스
매표소 원점회귀 ▷ 총 3시간(8봉을 생략할 경우 2시간)
매표소-(40분)-1봉과 2봉 사이의 새목-(10분)-3봉-(30분)-4봉-(15분)-7봉과 8봉 사이의 새목-(1시간)-8봉 너머 강변-(25분)-매표소

산행포인트
산행은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있는 매표소에서 시작한다. 1봉과 2봉 사이의 새목으로 오르게 돼있는데 약간 가파른 등성이길이지만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새목에 올라서면 1봉을 다녀온다. 정상에 산신당 아닌 용신당(龍神堂)이 있다.

등산로는 2봉을 생략한 채 바로 3봉으로 가게 되어있다. 상봉이면서 전망 또한 최고인 봉우리다. 앞으로는 4·5·6·7봉의 연산(連山), 좌우로는 남북 강물을 다 내려다볼 수 있다.

4봉에 이르려면 ""산부인과 바위""라는 이름의 좁은 굴을 빠져나가야 한다. 일반인들에게는 산고(産苦)의 지점으로 여기서 혼쭐이 난 뒤 8봉 직전의 ""전문장비를 휴대하지 않은 등산객은 등반을 삼가라""는 안내판을 보고나면 미련없이 하산해버린다. 그렇지만 8봉이 안내문처럼 위험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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