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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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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6.30 여름철 긴팔 남방을 입은 까닭3
  2. 2020.06.30 걸어 다닐 권리! 걸어 다닐 자유!

<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여름철 긴팔 남방을 입은 까닭

 

권해진/ 래소한의원 원장

 

80대 아버님이 환자로 오셨습니다. 당뇨가 심해서 인슐린을 주사제로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팔에 상처가 나서 연고 바르고 반창고 붙이고 했는데, 자꾸만 상처가 커졌습니다. 당뇨합병증 중 하나가 상처 치유가 늦어지는 것이니 그러려니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여름이 되니 반창고 아래로 땀이 차고 농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피부과에 가셨다고 합니다. 이미 괴사가 진행되었고 의사가 열이 나거나 아프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따끔따끔이야 하지. 그래도 무릎이나 허리 아픈 것만 하겠어. 다른 데가 더 아프니 그러려니 했지.”

더 이상의 괴사를 막기 위해 한쪽 팔을 잘라야 했습니다. 처음 한의원에 오셨을 때는 이미 팔 수술을 하신 지 5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피부 상처 하나 잘못해서 이리 ○○이 되었지. 자식들이 팔 없이 옷만 덜렁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놀란다고 가짜 손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게 더 무섭게 생겼어. 원장 보기에는 어때요? 다른 환자 생각해서 가짜 손 달고 오라 하면 달고 올께.”

긴팔 남방 속 의수는 무섭지도 징그럽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 눈이 뭐가 중요합니까! 아버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렇게 말씀드리던 때는 겨울이었고, 옷 안에 팔이 있는지 없는지 누구도 알 수 없을 때였습니다. 점점 더워지는데 아버님은 여전히 긴팔 남방을 입고 오십니다.

당뇨가 있으셔서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도 안 좋아요.”

남방 사이로 바람이 술술 들어와. 반팔 입으면 길 다닐 때 지켜보는 눈 때문에 내가 귀찮아서 그래.”

팔 하나가 없으면 치료받을 때 옷을 입고 벗고 하는 것을 도와야 할 것 같지만 시간만 드리면 됩니다. 그렇게 혼자서 천천히 입고 벗고 하시는 데는 남방이 티셔츠나 다른 옷보다는 편하다고 하시더군요. 이미 생활과 마음의 정리가 이루어진 분입니다. 치료를 끝낸 후 남방 단추를 한 손으로 차례차례 잠그시고 펄럭이는 남방의 빈 팔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오셨습니다.


6학년 때 만난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느리지만 왼손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의 오른손 글씨보다 예뻤습니다.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오른팔의 화상 흔적.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화상이 있었는데 글을 배우던 유치원 때 생긴 상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왼손으로 글씨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졸업 후로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자주 볼일이 있었고 그녀의 여름옷은 항상 흰색 긴팔 남방이었습니다. 교복 세대였던 우리는 여름에는 반팔 교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여름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학교에서 허용해 준 유일한 학생이었습니다. 시원하면서도 얇지만 팔의 화상 흔적을 덮을 수 있는 옷은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제 옷을 사러 갈 때도 시원한 긴팔 남방이 보이면 그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괴사로 팔을 잃은 아버님과는 달리 회사 일을 하다가 손이 절단된 지 3년이 지난 여자분이 있었습니다. 항상 의수를 하고 오셨고 여름에도 긴팔 옷에 장갑까지 끼고 오셨습니다.

제가 장애인이지만 회사를 다녀요. 저희 회사에서 정상인보다 제가 일을 더 잘해요. 그래서 어깨랑 팔이 항상 아픕니다. 사장님이 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해서 휴가도 못 쉬어요.”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자신보다 일을 못 하는 비장애인을 타박하는 말투입니다. 어깨를 만져 보니 절단된 쪽 팔을 쓰지 않고 온전한 팔로만 일을 했다는 것이 보입니다. 어깨 등세모근의 크기가 다릅니다. 한쪽 팔뚝은 다른 쪽의 두 배 크기입니다. 당연히 아픈 쪽은 비정상적으로 일을 많이 한 정상 팔입니다. 2주 동안 매일 치료받으러 오셨습니다. 치료도 열심, 일도 열심인 분입니다. 그런데 치료 효과가 없습니다.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환자분!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언지 아세요? 쉬는 것입니다. 일을 좀 줄이시면 안 되나요?”

장애 있는 나를 써 준 사장인데 일반인보다 더 열심히 해야지요.”

그런데 치료받고 가시면 덜 아프시다가 다시 일을 너무 심하게 하시니 제가 느끼기에는 팔 상태가 매일 똑같아요. 그러면 팔이 남아나질 않아요.”

더 나이 들면 다닐 직장도 없을 거예요. 올해는 몸이 부셔져라 해 보려고요.”

사장님을 욕하는 거는 아닌데요. 회사는 장애인 고용으로 국가 보조를 받을 겁니다. 그래서 환자분이 천천히 몸 생각하면서 하셔도 회사에 손해는 안 갑니다. 정년도 보장이 되고요. 환자분 잃어버린 왼쪽 팔 때문에 열심히 사시는 건 저도 압니다만, 그럼 오른쪽 팔은 누가 돌봐 주나요? 오른팔이 안쓰럽지 않으세요?”

갑자기 그녀가 웁니다.

내 인생이 안쓰럽지. 그래요. 내 오른팔도 안쓰럽지. 없어진 왼팔보다 버티고 있는 내 오른팔이.”

할 말도 해 드릴 수 있는 일도 없어서 같이 울었습니다.

여름철 긴팔 남방 안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많습니다. 느리지만 천천히 시간만 있으면 우리는 모든 사연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걸어 다닐 권리! 걸어 다닐 자유!

 

최숙하/ 장애인 재택근무 사원

 

코로나19 때문에 외출이 더 힘들어졌다. 외출해도 음식을 포장해서 오기 때문에 활동지원사 선생님과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여유롭게 먹은 게 언젠지 모르겠다. 올해 봄엔 놀이공원의 튤립 축제에도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내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요즘은 마음 편하게 외출했을 때가 그립다.

내가 처음으로 외출하기 시작한 때는 지체 부자유 특수학교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기숙사 생활도 했고 기숙사 학생들을 위한 지역사회 적응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분위기 좋은 인도 음식점에 가서 인도 카레도 먹어 보고, 방송국에서 장애인 가요제를 관람하기도 했었다. 그 이후로도 전동 휠체어를 타면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왼손으로 운전하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래 봤자 고작 학교 근방에 있는 장소뿐이었다. 하지만 항상 몸에 힘이 들어가서였을까? 내 몸은 언제나 피곤했다.

스물두 살에야 국어국문학과의 학생이 된 나는 무엇이든 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 시뿐이었다. 수업 내용에 관한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학교 구석구석 다니고 싶어도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없어 휠체어로는 갈 수 없는 강의실이나 학생식당도 있어서 이동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필수 과목으로 홈페이지 제작 수업 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 기말시험으로 홈페이지 제작 실기시 험을 봐야 했는데, 시험이 치러질 강의실은 2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고 장애인 경사로가 있었지만, 경사로의 시멘트 가 깨지고 갈라진 데다가 경사가 가팔라 도저히 올라갈 수 없어서 1층에 계신 경비원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경사가 가팔라 가지고, 2층으로 갈 수가 없어서요.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엔 경비원 아저씨의 표정이 얼떨떨해 보였지만 재빨리 나를 쫓아와 내 휠체어를 조금씩 밀어 주었다. 나는 전동 휠체어 컨트롤러로 운전하고 아저씨가 뒤에서 밀어 주며 앞 으로 가 보려 했지만, 경사로에 금이 가서인지 바퀴만 헛돌고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기말 시험이라 시험을 치지 않으면 F학점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 다. 나는 걱정으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나를 보고, 경비원 아저씨가 난처한 듯 말했다.

학생, 조금만 더 속도를 빠르게 해 봐요. 이게 안 움직이네, 다른 학생 휠체어는 잘 가던데.”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시험 시간은 다가오고 움직이려고 한참 동안 노력해도 그대로였다. 그렇게, 시험을 보지 못하고 전동 휠체어를 운전하며 기숙사로 돌아와야 했다.

불편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한 채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 때문에 졸업 이후 사회에 나오면서 마음이 움츠러들었고 두려움만 앞섰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활동지원사 선생님께서 함께 외출을 자주 해 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 주셨다.

선생님과 함께 교통약자 차량을 이용해서 경전철을 타고 가까운 놀이공원에서 꽃도 보며 웃음을 되찾고 필요한 물건을 사러 대형 할인점도 가고, 영화관도 가고.

비장애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도 주어지는 듯했지만, 학교의 안이나 밖의 세상에서도 나에겐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가 없었다.

대형 할인점이나 놀이동산은 장애인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왜 그렇게 좁은지, 전동 휠체어를 운전해 억지로 욱여넣다시피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면 붙잡고 서는 안전 손잡이가 너무 낮게 설치되어 있거나 잡는 순간에 흔들려서 넘어질 뻔한 적도 많았다.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해 외출을 할 때면 콜택시에서 내려 휠체어를 운전해서 사람들이 다니는 보도블록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낮은 방지턱 앞에는 자동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나와 활동지원사 선생님은 낮은 방지 턱이 나올 때까지 멀리 둘러 가야 했다.

길에 시멘트가 깨져 있거나 갈라지고 떨어진 보도블록을 지날 때 전동 휠체어가 흔들리거나 크게 쿨렁댔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다리와 온몸에 더 힘이 들어갔다. 옆에서 활동지 원사 선생님이 운전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다음 날 몸살이 났을 것이었다.

그날 오후 선생님과의 외출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가는 장애인 콜택시 안에서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이 보도블록으 로 가지 않고 자동차들이 달리는 차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사람이 걱정되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언젠가의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행자가 다니는 길이 전동 휠체어로 이동하는 장애인들 에게 편리했다면 그 사람이 도로로 가지 않았을 텐데.’

모두에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듯 모두에게 걸어 다닐 권리가 있다. 그것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당장은 아니 더라도 장애인의 이동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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