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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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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9. 16:37 알림 / 엮은이의 글

시사in(662호)에 <작은책> 기사가 실렸습니다. ^^


노동자의 ‘생활글’ 300번의 큰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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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책

서로 안고 크니까 그렇지(작은책 엮음, 작은책 펴냄, 2020)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서영란(가명)/ 서울 글쓰기 모임 회원

 

 

 

네가 지금 세금 받아 처먹고 앉아서 하는 일이 대체 뭐야! ? 여기 책임자 나오라 그래!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선생님, 죄송합니다. 지금 동장님이 안 계셔서요. 일단 여기 좀 앉으시고 고정하세요.”

, 됐어! 넌 됐고 동장 나오라 그래! 동장!”

내 일터인 주민센터 민원실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속사정은 이렇다. 신분증 없이 서류를 발급해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도 통사정을 하면 본인 확인을 철저히 한 후에 서류를 떼어 준다. 그런데 인감은 얘기가 다르다. 인감이라는 서류 자체가 워낙 재산 문제와 관련해서 많이 쓰인다. 함부로 발급했다가 사고 터져서 구상권 청구(다른 이의 빚을 갚게 된 사람이 그이에게 반환 청구를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연대 책임이 있는 공무원에게도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다.)가 들어오면 공무원은 그야말로 인생 조지는 거다. 보험에 들었다 한들 보상 금액이 얼마 안 되니 나머지는 월급에서 까 나가야 한다. 퇴직할 때까지 갚아도 못 갚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도 그렇지만 민원인은 민원인대로 다른 사람이 인감 도용을 해서 사고가 터지면 그거 해결하느라고 생난리가 난다. 있는 사람이야 덜하겠지만 가뜩이나 없이 사는 사람들한테 돈 몇백, 몇천만 원은 엄청난 금액이다.

상황이 이러니 인감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발급한다. 본인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해도 신분증 없이는 절대 안 되고 남의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하면 반드시 위임자 신분증이 필요하다. 이건 뭐 예외고 뭐고 없다. 간혹 가다가 도장만 가지고 와서 가족이나 다른 사람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래저래 해서 안 된다고 안내를 한다. 그러면 알았다고 하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생짜로 우기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들은 우기는 공식이 있다. 처음엔 웃으면서 한 번만 봐 달라고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슬슬 언성을 높인다. 그것도 안 되면 회유를 한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누구누구고 내가 어떤 사람이니 이번 한 번만 해 달라. 참 웃기지도 않는다. 아니, 지금 지가 누구인지가 왜 나오고 지가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또 왜 갖다 붙여.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이제는 완전히 본색을 드러낸다.

! 민원인 편의를 봐주는 게 공무원이지 네가 거기 앉아 있다고 공무원인 줄 알아? 세금으로 월급 받아먹는 주제에! 여기 책임자 누구야! !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도저히 이해를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저럴까 싶다. 속이 터져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인간이 왜 저러는지 알 것도 같다. 소리 지르고 높은 사람을 찾고 해서 안 되는 걸 되게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인 거다. 처음엔 안 된다고 해도 누구 이름 대면 다 되더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더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사회적으로 통하니까 그러는 거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앞뒤 가려서 융통성 있게 해도 되는 경우도 있지만 엄격히 지켜야 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지켜야 하는 거. 이런 사회적 합의가 없으니 저 지랄 아닌가 말이다. 올바른 사회라면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 그 원칙을 준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각자 손해를 좀 볼지라도 말이다.

머릿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간신히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고 있는데 이놈의 인간이 아주 끝까지 간다. 때마침 등장하신 동장님한테 가서 직원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아주 큰소리다. 그러면서 또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한다. 참 대단하다, 대단해. 으이구… ….

동장님이 부르신다. 인감을 다른 사람이 발급할 수 있냐고 물어보신다. 신분증하고 도장 지참하고 위임장 쓰시면 발급 가능하다고 수십 번도 더한 안내를 또다시 한다. 신분증 없이는 절대 안 되냐고 하신다. 당연히 안 되지. 될 거 같았으면 이 난리 피우기 전에 얼른 발급해 줘 버리지 뭐하러 이러고 있었을까. 관련 법을 가지고 오라고 하셔서 얼른 가지고 갔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 하니 동장님도 나랑 한통속이라 생각했는지, 길길이 날뛰던 민원인은 이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법이 꼭 그렇게 하라고 있는 거냐고 한다. 참 나 무슨 소리냐. 법이 그럼 지키라고 있는 거지 어기라고 있는 것인감? 물론 거지 같은 법도 많지만 인감제도는 인감 관련 사기가 하도 많아서 선량한 시민들 재산 지켜 주려고 점점 더 보호되고 강화되는 쪽으로 개정되고 있다. 사실 인감 제도가 없어져도 좋으련만 없어질 때까지는 인감 사고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대체 당신은 어찌하여 이러시는 게요. 이보시오. 제발 좀 그만하시고 돌아가시오!

결국 그 민원인은 화를 내 봤자 본인 목만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끝까지 협박하며 대한민국 공무원들을 싸잡아 성토한 후 쿵쾅쿵쾅거리면서 주민센터를 떠났다.

워메, 정신없는 거. 맞아 본 적도 없는 폭격을 맞은 거 같다.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저런 사람들은 평소 복식 호흡에 발성 연습을 하나 보다. 무슨 연극배우 같다. 귀가 왕왕 울린다. 둘레에선 그래도 위로랍시고 저 정도 민원은 아무것도 아니야. 몇 날 며칠을 찾아오는 민원인도 있고 앞으로 공무원 생활하다 보면 더 심한 사람도 많이 만나니까 잊어버려 하고 한 술 더 뜬다. 저 정도는 애교라 이거지. 으이구, 내 팔자야. 아무래도 도를 닦든지 해야 쓰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민원인들은 하나둘 찾아오고 주민센터는 다시 북적댄다.

우라질 놈의 인감. 없어진다더니 그게 대체 언제냐고.’

괜히 애꿎은 인감한테 구시렁거리면서 마음을 다잡고 일에 몰두하려고 하는데 뉴스에서 공무원들이 저지른 비리 소식이 흘러나온다. 자기네끼리 몇 년 간 뇌물을 얼마를 받아먹었고 그 대가로 누구를 봐주고 관련 사업은 부실이 되고 어쩌고저쩌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도 줄줄 푸념과 욕지거리가 새어 나온다.

도대체 저런 인간들은 뭐하는 인간들이냐. 확 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돼. 삼대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해야 된다니깐. 나라가 어찌 되려고 공무원들이 저 모냥인지. 아주 내가 낯 뜨거워서 어디 가서 공무원이라고 하고 다니지를 못하겠다. 몽땅 감옥에 처넣고 재산 환수를 해야 돼. 아니지, 먹은 돈의 세 배를 갚게 해야 된다니깐. 근데 뭐가 어쩌고저째? 고작 구속 수사? 씨발, 대통령 나오라 그래!”

 

<서로 안고 크니까 그렇지 본문 , 작은책 2011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작은책
2020. 5. 13. 15:11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허울 좋은 프리랜서 반백수

이명옥/ 프리랜서 구직자

 

 

작은책과 처음 대면하던 시절 나는 백수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오락가락하는 여성 가장이었다.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 보습학원 강사, 보험 판매원, 저소득층 방과후 학습 도우미, 인터넷 방송 진행자, 출판사, 서울시의회 의정보좌관, 장애인복지신문 총무 등이 내가 거쳐 온 일자리다. 그 사이 중학생이던 아들은 서른 살 청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한 달에 네 꼭지의 탐방 기사를 쓰고 뉴딜 일자리를 찾아 수없이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IMF가 터지기 전 오전 보험회사와 오후 보습학원을 오가며 내가 받은 급여는 150여만 원이었다. 3년쯤 보험회사를 다니고 나니 영업 능력이 없는 나는 더 이상 보험을 들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이나 자녀 이름으로 넣은 보험도 서너 개나 됐다.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지는 식이었다. 나는 보습학원 강사만 하기로 했다. 보습학원은 장위동 시장 골목에 있었다.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 부모는 대부분 자영업자였다. IMF가 터지자 아이들은 학원부터 그만뒀다. 나는 초등학생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를 맡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줄어들자 학원을 그만두게 됐다.

보험회사 다니며 넣었던 연금과 교육 보험 등 2천만 원을 차례로 해약해 근저당 설정으로 담보 대출된 대출금 이자를 갚으며 악몽 같은 시절을 버텼다. 이후 2002년 여성신문사 마케팅 부서에 입사해 4대 보험을 제하고 80만 원 조금 넘게 받았다. 급여를 제때에 못 받고 절반씩 받기도 했을 만큼 여성신문사의 재정은 열악했다.

2003628일 여성신문사에서 잘리고 71일부터 상계역에서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 일을 3년 정도 했다. 처음엔 청소반장과 청소하는 분들의 텃세와 출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아침에 김밥을 싸 가지고 와 팔던 아주머니가 주신 김밥을 먹고 체하기도 했다. 비 오는 날 신문이 비에 젖을세라 비닐에 싸서 들고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 신세가 처량하고 서글펐다. 팀장의 갑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했다. 장마철 날씨처럼 수시로 성정이 바뀌고 잔소리도 심했다. 겨울철 계단을 오르내리면 사고가 날 수 있다며 일을 그만두라고 했을 때 난 끝까지 싸우며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를 했다.

무가지 신문 배달할 때 쓰던 카트. ⓒ이명옥.


무가지 신문을 배포하기 시작한 뒤 한 달쯤 지나 구리시의 입시 학원에 일자리가 생겼지만 나는 무가지 신문 배포를 그만두지 않았다.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 2시간 정도 일하고 꼬박꼬박 들어오는 30만 원에서 45만 원을 포기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를 그만둔 것은 아침에 출근하는 일자리가 생긴 후였다.

2009년 삼양빈민연대에서 3년 사업으로 따낸 노동부 방과후 학습 도우미 일자리는 최저 시급에 맞춰져 있었다. 일주일에 여섯 저소득층 가정을 한 가정당 두 번씩 찾아가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리에게 스폰서를 구하라는 요구가 덧붙여졌다. 형식상이긴 했지만 황당한 일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3년짜리 프로젝트를 2년 만에 해체시켜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일부는 당시 생긴 지역아동센터의 교사로 자리를 옮겼지만 나는 출판사를 다니기로 해서 지역아동센터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1인 출판사에 6개월 다니면서 보험 없이 150만 원을 받았다. 인터넷 방송 진행을 하면서는 첫 달은 150만 원, 이후는 4대 보험 떼고 130여만 원을 어렵게 받으며 2년 넘게 일했다. 서울시 의정 보조 3개월은 4대 보험 떼고 134만 원이었다. 장애인복지신문사는 하루에 4시간씩 주 5일을 나가기로 하고 50만 원씩 받았는데 워낙 재정이 열악해 그 돈마저 제때 못 받고 며칠이 지나서 받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19개월 정도 장애인복지신문사에서 알바로 일했고 이후 다시 실업자가 됐다.

선거철 선거 사무원, 학교도서관저널과 해피데이스에 자유기고가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등 닥치는 대로 살아오면서 주변에 수많은 빚을 지며 살았다. 때론 쌀을 보내 주는 이, 김치나 마늘, 고춧가루 등을 보내 준 지인도 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상차림에 보태라며 몇 년째 통장에 슬며시 돈을 넣어 주는 교수님도 계시다.

2020년엔 인청시청 객원기자로 한 달에 네 꼭지의 기사를 쓰기로 했다. 공공 일자리도 찾아보고 요즘 올라오는 뉴딜일자리에 부지런히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유엔이 정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아직 청년이다. 하지만 일자리센터 구직난을 보면 나는 고령자다. 고령자에, 여성에, 장애인인 내게 적합한 일자리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에 각자 도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나는 오늘도 서류를 넣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비정규직 천만 시대, 청년 실업이 넘쳐 나는 시대다. 당신의 일자리는 안전한가?

3년여 세월을 취준생으로 나의 가슴을 숯덩어리로 만들었던 아들은 올해 311일자로 중소기업 공채로 입사했다. 150명 지원에 2명을 뽑았다고 한다. 대기업에 비해 연봉은 적지만 출근 자율제, 중소기업 세제 혜택, 청년키움 적금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팀의 분위기가 자율적이라고 만족해한다. 수천만 원의 빚이 아들의 몫으로 남아 있지만 취직 대란 시대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아들이 고맙다.

posted by 작은책
2020. 5. 13. 14:10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온라인 개학이면 점심도 온라인으로 나오냐?”

안미선/ 작가

  


내일이면 이사를 한다. 묵은 살림을 정리하니 쓸데없는 것을 많이도 끼고 살았구나 싶다. 버릴 건 버려 널찍해진 베란다를 보며, 화분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뒤늦게 생각한다. 비우지 못해 새것이 들어갈 수 없는 건 집이나 마음이나 같다. 이사 갈 집은 지금 집보다 좁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책도 많이 처분했다. 하지만 몇 장 끄적이다 만 일기장을 뒤적이기도 하고, 오래된 노동자협회 소식지를 넘겨 보기도 한다. 망설이다가 그건 가져가기로 한다.

앨범은 들춰 보다가 괜히 보았다 싶다. 헤어진 사람들과 세상을 떠난 사람들, 그때는 좋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결혼식 때 내 얼굴을 보니 곱다는 생각이 들면서 왜 더 즐겁게 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피부염을 앓은 아이의 얼굴에 새삼 안타까워하고, 갓 목욕한 아기의 맨살에서 살 냄새를 떠올리기도 한다. 오래전에 쓴 글을 읽을 때처럼 기쁨과 슬픔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지난 일은 다 잊었다고 여겼는데 묵은 상처만 들쑤신 것 같다.

나는 스무 살 때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그동안 이사를 여덟 번 했다. 학교를 다닌다고, 취업을 했다고, 결혼을 했다고 다른 동네를 전전했다. 보통 몇 년씩만 살다 이사를 했는데 지금 집에서는 8년째 살았다. 가장 오래 산 집이다. 그래서 셋집인데도 정이 들었다. 이 집에 이사 올 때 아이는 취학 전이었다. 이 집에서 초등학교 6년 시간을 보냈고,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작은책아기 낳는 날이라는 제목을 시작으로 글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 아기가 열다섯 살이 되었다. 엄마로서 절반의 시간을 이 집에서 보냈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아이가 좀 더 자랐으니, 이제 내 일도 찾고 돈도 벌어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글을 쓰고 살고 싶었다.

책꽂이가 둘러싼 작은방에 틀어박혀 밤낮으로 글을 썼다. 강의가 있다면 달려갔고, 예술인 지원사업에도 참여했다. 아이는 쑥쑥 자라고 난 앞만 보고 달렸다. 이젠 책도 몇 권 펴냈고 글을 써서 산다는 이름을 그런대로 달 수 있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작가가 되었다. 물론 내년에도 일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은 여전하지만.

나는 집에서 주로 일한다. 식사를 차리면서 집안일을 하면서 전화며 택배를 받으면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다른 많은 여성들도 그렇겠지. 떠맡겨진 가사와 육아일을 해내고, 일도 척척 해치우기 위해 피나게 발버둥을 칠 것이다. 때로 엄마가 되었다가 작가가 되었다가, 누군가 나를 부를 때 순간순간 역할을 바꾸게 되지만, 나를 지켜 내고, 아이를 지켜 내고, 내 일을 지켜 내었다.

내가 글을 쓸 때, 아이는 심심하다고 소리쳐 나를 불렀다. 엄마 없다고 느닷없이 울기도 했다. 저녁에 강의를 할 땐 아이를 맡길 곳을 찾아 이웃집을 전전했다. 연말이면 몰려오는 피로와 압박에 소리를 꽥 지를 때도 있었다. 생일날, 약속 하나 없다고 내가 징징대자, 보다 못한 아이가 용돈으로 케이크를 사 와서 같이 즐겁게 박수쳤다. 가끔 친구들을 초대해 같이 밥을 먹었다. 모든 악다구니와 웃음과 부대낌이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분주한 손을 놓고 집을 물끄러미 보게 된다. 기억은 이렇게 생생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자리는 상상이 안 된다.


코로나19 사태로 아이의 방학은 길어졌다. 내 인생에 이런 때가 또 있을까?” 학교에 안 가는 게 마냥 좋은 아이는 알사탕을 문 것처럼 즐거워한다. 온라인 개학이면 점심도 온라인으로 나오냐?” 내가 쏘아붙이자 아이가 놀란 표정이다. 난 입을 꾹 다문다. 집에 있어도 엄마가 일을 해야 하고 들어오는 수입이 줄고 지출은 많아져 골치를 앓는다는 걸 아이는 모른다. 그래, 몰라도 된다. 그냥 농담으로 맞장구치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집안의 엄마들이 얼마나 힘들까, 일하는 엄마들이 얼마나 답답할까. 여자들이 집에서 하는 노동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배경처럼 취급되는 게 불편하다. 이러니까 앞으로도 여성의 목소리를 계속 써 내야 할 것 같다.

작은책이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나는 스물다섯 살에 무얼 했던가 생각해 봤다. 글을 쓰고 살겠다고 결심했고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작은책은 그때 운 좋게 만난 친구였다. 글쓰기 모임에도 갔다. ‘정직하고 소박한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의 길을 따라갔다. 실은 소설가가 되고 싶어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문학을 꿈꾸었는데, 그건 다른 길이었다. 난 그 샛길로 들어가 지금까지 쭉 걸어왔다. 내 이야기나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들을 쓰면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고 쓸 수 있다작은책의 가르침을 잊은 적 없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라는 책을 최근에 냈는데, 작은책은 나에게 말을 들려준 또 다른 당신이기도 했다.

처음 글쓰기 모임에 가서 글을 꾸며 쓰면 안 된다고 구박을 듣던 사회 초년생이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여성과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며 작은 결심을 지켰다. 작은책은 아프고 억압받는 목소리에 주목하며, 글을 쓰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의 힘을 믿었다. 글 쓰는 노동자들을 키워 내었다. 스물다섯 해 동안이나 그 약속을 지켰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어렵고 애썼을 것이다. 축하한다, 좀 더 이 길을 가 달라고 친구로서 부탁하고 싶다

posted by 작은책
2020. 5. 13. 14:00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일자리는 너무 많은데

제희덕/ 정년퇴직 문화재 관리자

 

 

나는 2012년 초 정년퇴직 후 과거 일하던 일들은 생각하지 않고 일하기로 했다. 상가건물 관리인, 수제품 생산업체, 김치 배달 및 방문 소독업체, 사설 미술관 주택 경비, 왕릉 안전관리원, 방문요양보호사, 장례지도사, 전통결혼예식장, 문화재 관리인 등 여러 곳에서 일을 했다.

30개 점포의 상가건물 관리인을 3년여 할 때는 4대 보험도 없고 연월차도 없고 월급 인상도 없었다. 퇴직금도 없기에 매 1년 경과 시 1개월 봉급이 없는 경우가 발생했다. 상가관리인을 하며 신문 광고를 보고 야간에 장례지도사교육원에서 3개월 이론 교육과 장례예식장 현장 실습을 하고 장례지도사 자격을 취득했다.

5인 이상이면 장례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학원 측의 권유로, 학원의 무상임대 계약서를 지원받고 관련 기관에서 수차례 협동조합 설립 교육을 받았다. 조합원 가입신청서, 이사들의 인감증명서, 총회 회의록, 서류 등을 준비하여 변호사 사무소에서 공증을 받았다. 공증 비용, 등기 비용, 구청 등록 비용, 등기상 변동 사항 발생마다 상당한 등록 비용들을 부담하고 세무서에서 법인 사업자등록증을 받았다.

조합의 복식 회계 사용에 따라 전산 회계 프로그램 사용료, 법인 세무 신고에 따른 세무사 위탁 비용 등이 발생했다. 과정마다 부담스러운 비용 발생에 대해서는 협동조합 교육 시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강사들도 직접 조합을 설립한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협동조합도 영리를 추구하는 일반 회사와 같다. 조합원과 임원들은 명칭만 있을 뿐 소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관련 지방자치단체에서 사회적기업으로 지원금을 받더라도 회계 절차와 사용 규정을 지키지 못하면 지원 기관 감사 후 지원 비용을 반납하여야 한다. 조합이 부실해지는 경우 폐업을 위한 청산과 해산 절차가 법인 설립 때만큼 까다롭다. 장례 행사 수입이 입금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장례 행사 수요 부족, 운영비와 전담 인력 인건비 부족 등으로 총회에서 후임자를 선출한 뒤 인계했다.

김치공장에서도 일했다. 하나로마트나 동네 큰 마트에 가서 배추, , 당근, 고춧가루, 젓갈 등의 원료들을 원산지와 구입 가격이 김치 매출 가격에 적절하게 맞도록 구입했다. 김치는 주문에 따라 서울 시내 어린이집, 요양 시설, 복지관 등에 차로 배달했다. 소독 업무도 했다. 장애인 친구들과 어린이집, 초등학교, 사회복지 시설들을 방문하여 소독 장비를 메고 작업을 했다.

요양보호사 자격으로 방문요양보호사 일도 했다. 뇌졸중 환자, 루게릭 환자 등 1~3등급 중환자들을 보호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환자를 휠체어 의자에 태우고 인근 개천으로 1시간씩 산책도 했다. 환자와 동네 병원을 가거나 외출할 때 난간이 없는 통행로에 오가는 자전거와 충돌 우려 등 안전상의 어려움이 많았다. 방문요양보호사 일은 환자가 대부분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체력이 중요하다. 노인 세대가 증가하기 때문에 수시로 방문요양센터에서 소개하는 일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왕릉 안전관리원으로 야간에 손전등을 켜고 혼자 숲길을 순찰할 때는 멧돼지도 만나고 고라니도 만났다. 멧돼지를 만나 방어 자세로 한참 바라보다 헤어지기도 했다. 야간에 폭우가 쏟아질 때는 왕릉 봉분 잔디가 무너질까 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대형 비닐 커버를 덮어 보호했다.

문화재 관리 야간 순환 근무도 했다. 주간과 휴무일에 지하철 3호선 안국역 부근에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 부설 서울어르신취업지원센터에서 교육을 받았다. 장년 취업 기본교육, 스마트폰 교육, 지하철 택배 교육, 환경관리자 교육, 가사관리원 교육, 일반경비원 신임 교육, 반려동물 돌보미 교육, 무인주유소관리원 교육, 도슨트 교육, 치매 예방 운동 및 관리 교육 등을 수강했다. 이러한 교육들은 기간제 계약을 마치고 일자리 취업 때 도움이 됐다.

현재는 2019년 초 소방관리자 자격으로 문화재 관리인으로 1년간 기간제 근무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근무 기간이 1개월씩 연장되고 있다. 월수입은 정부에서 정해 주는 시간급으로 결정되는 최하위 임금 수준이다.

과거 부모님들이 가족들 부양과 교육을 걱정하던 때를 생각하면 건강을 유지하고 현재와 같이 일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하고 일할 의지가 있으면 일자리 소개 기관에 인터넷이나 직접 방문 시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최대한 소개해 준다.

군 복무 후 직장을 다니는 두 아들은 코로나19 감염 사태로 직장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다. 청년이 된 자식들은 자립과 결혼이 늦어지고 있다.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자식 세대들도 어려움이 많다. 코로나19 감염 사태를 극복하고 우리 세대보다 좋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갈 것으로 믿는다.

나이가 들수록 치아와 신체 여러 곳에 신호가 온다. 동네 병원과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와 치료를 받아야 할 곳이 많아지고 있다. 진료비도 증가하고 있다. 건강 조심하고 몸에 무리가지 않도록 일을 조절하라는 신호로 생각한다.

인생 후반 일터에서 일하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나는 일하면서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어려운 일들을 이겨 나갈 것이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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