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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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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베테랑 월급이 50만 원 적다

한영미/ 마트 시식 코너 노동자

 

 

아무도 몰랐다. 코로나가 덮칠 줄은. 전염병 때문에 지형 구도가 이렇게 달라지는 걸 보는 건 내 평생 처음이다. 마트에서 시식 알바를 하던 나는 오늘 갑자기 실업 상태가 됐다. 서울시에서 코로나 때문에 시식을 금지하라는 공문이 내려와서란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데 난들 목숨 걸고 시식 일하고 싶었을까? 그렇지만 코로나는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고 밥은 안 먹으면 확실히 죽는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귀한 내 목숨을 최저임금에 걸었었다. 그런데 오늘 출근하자 시식을 금지한다고 내일부터 나오지 말란다.

사실 세상이 이럴 때 마트에서 시식하는 것도 웃기는 얘기다. 그러나 아무리 파리 목숨이라도, 내일 먹을 밥그릇은 빼앗더라도, 숟가락까지 빼앗지는 말아야 한다. 마트 담당자에게 걱정되어 물었더니 자기들은 서울시 공문을 이행할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하니 너희들은 회사에서 알아서 하겠지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마트에서 근무하는 수많은 사원들은 마트에 물건을 대는 각자의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파견직 사원이므로 이럴 때 마트는 간단하게 사람을 정리할 수 있다.



기분이 더러웠다. 나와 자매처럼 지낸 고정 사원에게 회사에서는 어떤 입장인가를 물었다. 고정 사원 역시 나와 같은 회사에서 파견된 최저임금자이지만 마트에 물건을 진열하는 사원이므로 마트 입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또 고정 사원은 회사와 나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그는 곧 나오게 되겠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코로나가 기승인데 아무 대책 없이 무조건 기다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동안 월급 주는 것도 아니고. 상황 변화 없이 일을 다시 하게 되기는 쉽지 않을 거 같았다. 나는 회사에서 파견된 고정 사원에게 나도 생활하는 사람이니 차라리 해고해서 고용보험을 타게 해 달라고 했다. 나와 친구처럼 자매처럼 지냈던 회사 고정 사원은 이상한 논리를 폈다. ‘회사에서 나오지 말라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회사는 관계없다는 이야기다. 나로선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없어지고 생계 수단이 사라지는 것이 심각한 일인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없었다. 즉 고용보험도 뭣도 없이 손가락 빨고 기다리면 자기들 필요할 때 부른다는 이야기다. 나는 마음이 많이 상했다. 오늘 아침 때려잡은 바퀴벌레랑 내가 뭐가 다른가 말이다. 그날 그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와 표정이, 그리고 회사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듯한 태도가 서운했다. 나는 고정 사원에게 내 상한 심정을 퍼부었다.

마음대로 해. 회사가 월급 줄 돈이 없으면 내 4대 보험 내 주겠니? 그때 되면 해고가 되든 어떤 조치가 취해지겠지. 회사에서 일당 짜게 줘서 다른 사람과 돈 차이가 한 달에 몇십만 원 날 때도 난 바보같이 나 없으면 네가 꾸려 갈 이 살림 걱정해서 의리로 참았어. 어쩌면 너는 내가 백수가 될지 모를 이 마당에 회사 입장만 얘기하고 나에 대한 걱정은 없냐.”

우리 회사에서는 최저임금이 오를 때마다 내 근무 일수를 줄였고, 다음 해에는 시간을 줄였고, 또 다음 해에는 일급도 줄였다. 그래서 나는 삼 년째 같은 일당을 받고 있다. 일하는 날만 줄어 월급은 이십여만 원이 줄었다. 모든 회사들은 편법으로 돈을 줄여 나갔는데, 버젓이 내놓고 하는 일을 나라에서는 모르는 것일까? 나는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는 베테랑이다. 그러나 회사의 편법 때문에 최저임금이나마 대우해 주는 회사보다 월급이 50만 원 차이가 났다.

더러워진 기분으로 나는 계속 고정 사원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이어 갔다. ‘만일 네가 회사에 얘기해서 내가 고용보험을 타게 해 준다면 다시 나오는 날 내가 이곳으로 복귀할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봐야겠다.’라고.

고정 사원은 사과했지만 고용보험과 관련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부터 당장 백수가 되었다. 그깟 일 뭐를 하면 이보다 못하랴 싶었지만 내 의사와 관계없이 보장 없는 백수가 되고 나니 참으로 허탈하다. 이놈의 사회에서는 잘 조직되고 복지 혜택 많이 받는 제도권 국민에게만 주고 주고 또 준다.

오늘 오랜만에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정수기 청소하러 온 아줌마와 이야기했다. 자기들도 복지의 사각지대에 내몰려 있다고 한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회사의 노예라면서. 그런데도 프리랜서로 등록돼 4대 보험 혜택도 못 받고 해고돼도 고용보험도 못 탄다고 했다. 이참에 복지의 사각지대에 몰린 직업군을 찾아내어 노동조합 결성하는 일에 동참해 볼까?

일주일 뒤, 시식 행사가 재개되고 나는 기약 없는 백수에서 다시 언제 잘릴지 모르는 행사 알바로 복귀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회사 소속임을 잊고 있었다. 그저 내 일이려니 생각해서 참 우직하니 열심히 일했다. 다시 일하게 된 지금 별로 기쁘지가 않다. 그나마 일할 곳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한 번씩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존재에 대한 미미함을 깨닫게 되어 기가 죽는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회는 이루지 못할 정의일까?

posted by 작은책
2020. 7. 23. 14:34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박소영


발행인의 글

 

영웅이냐, 악랄한 친일파냐? 미래통합당과 수구 언론이 고 백선엽 씨를 영웅이라고 호칭하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광복회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는 백선엽 씨를 친일파 중 악랄한 친일파로 분류해 대전현충원에도 안장하는 걸 반대하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백선엽 씨가 복무했던 간도특설대는 사병까지 전원 친일파로 분류돼 있습니다. 독립군 토벌에 가장 적극적이고 잔혹하고 악랄했기 때문이지요. 백선엽 씨는 6·25전쟁이 끝난 뒤, 동생 백인엽 씨와 사상 최악의 선인학원 비리를 저지르고, 부동산 투자로 현 시세로 2천억이 넘는 덕흥빌딩을 소유하고, 50억이 넘는 자택에서 아주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친일파를 옹호하는 수구 정당은 촛불 이후로 조금씩 역사가 바로 잡혀가면서 점점 소수 정당이 돼 가고 있다는 걸 자신들만 모르고 있지요.

작은책 8월호 특집은 작업중지권입니다. 4년 전 구의역 사고, 2년 전 태안 화력발전소 사고 등 하루에 7, 1년에 2400여 명이 산재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이들이 작업중지권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있었더라면 허망하게 사망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이 이른바 한국판 뉴딜을 포스트코로나 시대 새로운 성장 전략으로 내세웠습니다. 김경수 경남 지사는 격차 해소’,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기본소득이 진짜 뉴딜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저는 작업중지권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진짜 뉴딜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님들은 어떠신가요?

2020716

발행인 안건모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다시 왕십리에서 -하명희

12 발행인의 글

 

살아가는 이야기

14 그 쌤 빨리 해고시켜 버렸어야 했는데 -이율현

17 그래서 성공을 못했구나 -최은영

21 베테랑 월급이 50만 원 적다 -한영미

25 코로나19 덕분에 텔레비전을 없앴다 -임지현

28 경비과장이 가슴이 아픈 사연 -손소희

32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가지가지주먹밥 -윤혜신

37 두꺼비 손글씨 -김상화

38 살아온 이야기

늙은 암소도 챙겨 주었다 -김수련

44 시 읽고 감상하기

시를 보면 시인을 안다 -조기현

47 교장 일기

첫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주는 입학 선물 -최관의

52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혼인 신고를 막는 조건들 -권해진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57 노조를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김나영

63 직위 해제 당하고 진짜 교사가 됐다 -김석현

69 9개월 만에 강제 퇴사, 입사 반복, 뭔가 이상하다 -김경학

75 작은책 법률 상담소

대여금이냐, 투자금이냐 -김예지

특집_ 작업중지권

80 작업중지권? 2004년이 마지막이었다 -김진영

84 구의역 사고 4주기,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임선재

88 작업중지권 없는 안전한 일터? -서현수

92 오늘은 배달 불가능합니다.”

이럴 때 당신은? -손진우

 

96 이동슈의 생활 만화 _ 삼삼한 삶

 

세상 보기

98 옛 그림 속 여성들

우리 안에, 그대는 없다 - 이종수

104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탈진실인국공사태 -고태경

110 어린이 해방과 평화

이발이나 목욕을 때맞춰 해 주시오 -이주영

116 생태 이야기

에어컨으로 식힐 수 없는 더위 -박병상

122 존버 씨의 시간들

신자유주의 시대의 근면 규범 -김영선

128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정신을 담은 얼굴, 초상화 -박찬희

134 독립영화 이야기

잊을 수 없는 그 순간 -류미례

140 책 읽고 딴 생각

통찰의 실마리를 주는 실험들 -변정수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7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몽둥이로 때리면 맞고 있겠습니까?

 김영재/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인천공항지역지부 카트분회 조직부장

 

저는 중소기업만 다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에 걸쳐 IT 관련 회사를 경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경영자의 땀과 열정과 어려움도 어느 정도는 압니다. 첫 번째 회사는 IMF 시기를 못 넘기고 폐업하고, 다시 3년 뒤에 100퍼센트 해외 수출하는 회사를 창업했는데 세계 금융 위기 때 환율의 벽으로 폐업했습니다. 개인 파산도 하고요. 가족과도 단절돼 보았습니다. 사람 데리고 하는 사업을 하기가 겁이 나서 택배, 운전, 건설 현장도 나가고 했지만, 50대 중반이 넘자 체력도 달리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젊을 때는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녀 공항이 친근하기도 해서 그곳에서 일자리를 알아 보다 인천공항에서 카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항공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은 여객이 이용하는 여객터미널과 화물이 세계로 유통되는 화물터미널로 구분되고, 여객터미널은 다시 각 항공사별로 제1여객터미널과 제2여객터미널로 나누어집니다. 또한 여객터미널에는 간단하게 랜드사이드(입국·출국 시 사용하는 구역)와 에어사이드(면세점 탑승동의 구역) 및 단기/장기 주차장이 있으며,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의 일일 이용자가 각자의 사용 목적으로 소정의 장소에 비치된 카트를 이용합니다.

저희 카트 노동자들은 약 13000대의 비치된 카트를 24시간 수거하고 필요한 곳에 재배치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터미널별로 주간조/야간조가 있습니다. 주간조는 랜드조, 교통조, 면세조, 단기조, 유지보수조의 형태로 구분되며, 주간조는 조출/만출의 시간대로 운용됩니다. 단순한 카트 수거 업무에서 1층과 3층간의 수직 이동, 동편과 서편의 수평 이동, 청결 작업, 광고 교체 작업, 카트 수리 등을 담당하며 한 번에 많은 수량의 카트를 이동하기 위하여 카트를 밀어 주는 로보카라는 장비를 사용합니다.

인천공항 여객터미널에서 로보카를 이용해 카트를 운반하는 노동자. 사진 제공_ 인천공항지역지부 카트분회

인천국제공항공사로부터 카트에 광고를 하는 명목으로 ()전홍과 1차 계약을 하고 ()전홍은 ACS()에게 카트 관리를 전담하도록 2차 하청 계약을 하여 운영 중에 있습니다.

저는 제1여객터미널의 랜드사이드 업무를 담당하며 3일 근무 1일 휴무의 365일 근무 형태로 201811월에 입사하였습니다. 광범위한 면적을 커버하고 이용객의 수요에 따라 하루에 3만 보 이상의 많은 움직임이 필요하고 몸의 거의 모든 근골격을 사용해야 하는 높은 수준의 노동 강도를 감내해야 합니다.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어깨, 허리, 무릎, 발목의 관절과 발바닥의 통증을 갖고 있습니다. 이용객들이 기물과 접촉 사고가 많이 발생합니다. 카트와 로보카가 무거운 쇠붙이이라 접촉 사고가 나서 사람이 다치면 기본적으로 회사에서 개인에게 변상을 시키고 있습니다.

최근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 여름 휴가철에 로보카가 카트를 달지 않은 상태에서 회전 중에 초등학교 여아의 발목 아킬레스건에 접촉해 아이가 중상을 입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가족 여행이 취소되고, 집도 지방인지라 서울에서 수술하고 입원 치료를 받으려면 많은 보상이 필요했지요. 그 뒤 회사의 공식적인 지침은 개인 변상을 원칙으로 하고 해당 직원은 퇴직 처리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여행객이 두렵습니다. 넓은 공항에서 어린아이들이 마구 뛰어 다니기도 하고 시간에 늦은 여행객들도 뛰어다닙니다. 카트와 로보카가 정지 상태에서 접촉을 해도 무조건 저희가 책임져야 합니다.

점심시간이 40분입니다. 근무지에서 구내식당까지 멀어서 항상 허겁지겁 달려가야 합니다. 휴게 시간과 휴식 공간 물론 없었고요. 노조가 만들어지고 MBC 방송국에서 취재하여 알려지고 청와대에 민원 넣고 고용노동부에 진정한 결과 사무실 안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평상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또 조출자들은 오전에 휴게 시간 20분을 보장받게 되는 등 조금 개선이 되었습니다.

화장실은 2분 안에 해결, 출퇴근 지문 누락 시 1시간 공제, 그것도 나중에 1일 공제하겠다더군요. 근무 시간 중 잠깐 쉰다고 앉아 있으면 사진 찍어 공개하고 얼마 전부터 근무 평가를 한다며 현장의 주임들은 노조를 말살하고자 열심입니다.

부당 노동 사례와 노조 말살에 대하여 적어 보겠습니다. 202042일 노조 집행위원들이 모두 참석해 회사와 교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사측 관리자들이 노조 측과 사전 협의도 없이 조합원들에게 위임장을 돌렸습니다. 유급 휴가에 대한 모든 것을 회사에 일임하고, 고용 유지 지원금을 타서 휴직할 것을 위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위임장은 향후 회사의 입맛대로 가는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업 참여 시 징계하겠다고 위협하고, 회사의 명예 실추, 유언비어 유포라며 경고장도 보내옵니다. 노조를 탈퇴해야 90퍼센트의 유급 휴직을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행한 적도 없는 근무 평가를 한다고 합니다. 예의, 언행, 모욕, 유언비어, 선동, 분위기 저해 같은 항목을 보면 근로 능력 평가가 아닌 복종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작년 11월 노조를 설립할 당시 노조가 싫다, 노조가 도깨비 방망이냐, 그렇게 탄압하더니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대립 노조를 만들고 현재는 타 노조원이 되어 타 노조의 근무 평가를 한다니 코미디 극장도 아니고 말이 됩니까.

현재 위탁 계약 기간은 2018년부터 금년 말까지 3년입니다. 그전에는 1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비정규직의 근로 계약 때문에 저런 많은 부당 노동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안과 불평등을 호소하면서도 어떤 해결책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작년 여름부터 다른 조에서 노조 설립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미약하지만 힘을 합하자고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5월 21일 카트 노동자 파업 결의 대회에서 조합원들이 서로 몸 벽보를 붙여주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처음 인천공항지역지부에서도 긴가민가했을 것으로 봅니다. 노조 상담하러 갔더니 카트 쪽에서 매년 와서 노조 만들려고 하다가 회사 때문에 깨지고, 20명까지도 모였었는데 회사가 압박해서 깨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에 갔을 때 걱정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우리가 해 보렵니다, 믿어주세요 했습니다. 저희 회사의 평균 연령은 50대 중반이 넘습니다. 두려워하는 직원들을 설득하고 그 나이에 무슨 노동조합이냐 조용히 살다 퇴직하자, 몇 년만 더 근무하자고 반대하는 부인과 자식들을 설득하고,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며 극복하였습니다.

회사의 업종과 색깔에 따라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가족 같다 하면서 뒤에서는 신다 버린 헌신짝 취급을 한다면 어느 누가 애사심이 생기며 고객을 웃음으로 대하고 세계 제일의 공항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생기겠습니까. 스스로 우러나오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몽둥이로 때린다고 맞고 있겠습니까.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7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퇴직금 한푼 없이 쫓기듯 떠나기는 싫었다

 정숙영/ 코웨이 정수기 관리 코디

 

막내가 여섯 살이던 20049, 임상병리사로 경력 단절 상태였던 나는 세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생 집에 방문하던 코디가 자기가 하는 일이 일정 조정이 자유롭고, 열심히 하면 일정한 수입이 된다는 말을 듣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연체 고객 대면, 영업, 초보운전, 관리자들과의 관계 등이 쉽지는 않았지만, 비상금 털어 자동차까지 샀으니 버텨 보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된 17년의 코디 생활.

아침 아홉 시 첫 고객 방문부터 늦는 날은 밤 아홉 시까지, 공휴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일을 한다. 두 달이나 네 달에 한 번씩 정기 방문해서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 연수기 등을 점검하는 코디는 깐깐한 점검 서비스는 기본이고 자차를 갖고 운전도 잘해야 하며 50페이지가 넘는 상품 안내서의 상품을 판매하고 때로는 홀로 사시는 어르신의 심부름꾼과 말동무가 되어 드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국 관리자의 영업 목표를 맞춰야 한다는 잔소리에 시달리기도 하고 회사가 만들어 놓은 점검 시간과 한 달 내에 마쳐야 하는 계정이 있어 매일 종종거리며 이 집 저 집 방문하는 일개미이자 멀티플레이어이다. 고객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방문 점검이다 보니, 고객들의 상황이나 상태에 따라 욕설 등의 언어폭력은 물론이고 드물게는 신체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연락까지 안 되는 고객들의 행동은 나를 더 힘들게 한다. 고객의 코디 교체 요구가 있을 경우, 상처받은 코디를 생각하는 관리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위로는커녕 질책하고 사유서까지 쓰게 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소모되는 코디의 감정을 회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니, 동생, 회사 동료와 수다를 떨거나 혼자 삭인다. 게다가 요즘에는 판매 채널이 다양화되고 수수료 체계가 달라져서 제품 설명은 코디에게 듣고 상품 주문은 온라인이나 사업국의 고가 사은품과 현금 지원이 있는 곳에서 하는 고객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상실감이 크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하다 보면 영업이 부진하거나 관리자들과 불화가 있을 때도 있다. 점검 계정을 늘리거나 줄이면서 괴롭히는 경우도 있고, 지국의 영업 목표를 맞추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제품을 자가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 렌털 제도를 도입했던 전 회장의 경영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이다. ‘고객의 렌털 비용을 낮추기 위해 코디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줄였다. 자동차를 보유하고 자가운전이 가능한이들을 코디로 채용했다. 1만 명이 넘는 코디들이 타고 다닐 자동차를 회사에서 구입하고 유지비용을 댔다면 그 비용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렇게 렌털이라는 아이디어 덕분에 2008년 매출이 13000억 원에 달했다.’ 이처럼 회장 본인은 창조적 발상과 실천을 책으로 써서 코디들에게 한 권씩 나눠 주며 자랑했겠지만,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코디가 책임지게 하는 회사의 규정과 수천억의 영업 이익에도 노동환경에는 변화 없음에 울화가 치밀었다. 만약 권리 투쟁을 할 기회가 있다면 꼭 참여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중심에 서 있다.

17년 일한 지금도 신입 때랑 바뀐 게 거의 없다. 자차를 쓰는데도 유류비 지원은커녕 사고가 나면 모두가 코디의 책임이다. 점검 수수료도 오르지 않다가 노조가 생기면서 한 계정당 몇백 원 오른 게 전부이다. 고객의 단순 변심 반환 시 수당 되물림 제도가 지금은 일 년 내 반환 시 100퍼센트 되물림으로 바뀌었지만 MBK파트너스에서 관리할 당시에는 18개월 내 반환 시 100~150퍼센트까지 수당 되물림이었다. 영업을 하기 위해 썼던 시간과 판촉 비용은 코디가 손해 봐야 한다.

회사에서는 적정 계정을 200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영업이 안 되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당 150만 원 정도만을 받아가야 한다. 일하며 드는 비용을 코디가 전부 부담하면서 말이다.

201711월 코웨이를 떠나야겠다는 마음으로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공부가 끝나갈 즈음 뜻하지 않은 사고로 무릎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 달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고용보험이 있었더라면 두 달 더 쉬면서 전업을 맘 편히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늘 무거운 가방을 메고 계단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손과 발을 많이 쓰는 반복 작업을 하는 코디는 근골격계 질환으로 한의원과 통증의학과를 제집 드나들듯 한다.

지난 3월 16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노조 설립 필증 교부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정숙영 씨. 사진 제공_ 민주노총서비스연맹 가전통신서비스노조

퇴사할 때 퇴직금 한푼 없이 쫓기듯 떠나던 선배 코디들이 생각난다. 밥 한 끼 나눌 시간도 없이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사라져 간다. 나는 그렇게 떠나는 게 싫었다. 그런 내게 들어온 한 장의 노동조합 웹자보. 당장 설명회를 요청했고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가전통신서비스 노조의 양윤석 국장님, 이흥수 코웨이지부 지부장님과 우리 지국 코디들의 만남이 있었다. 우리 지국 코디들이 보낸 내용을 바탕으로 코디·코닥 지부의 홍보 웹자보가 만들어지면서 전국적으로 설명회가 시작되고 코디·코닥 지부는 2019112일 설립 총회를 하게 되었다. 평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나는 큰 용기를 내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며 상집위원이 되었다. 코디를 하면서 대의원대회, 간부수련회, 법률학교 등 조합 활동이 버거워 아프기도 했지만 집중했었던 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길이 열린 듯했지만 노동청에서는 특수고용 노동자라서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하여 노조 설립 필증을 내주지 않았고 노조 설립 필증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집간부들과 서비스가전 간부들의 릴레이 1인 시위가 시작된 지 103일째 되던 513일에 역사적인 특고직 최초의 설립 필증을 받게 되었고 우리의 권리 찾기는 시작되었다. 지금도 회사와 교섭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2019년 11월 26일 웅진코웨이 본사 17층 대표 이사실을 점거하고 대화를 요구하는 웅진코웨이지부. 사진 제공_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가전통신서비스노조

노조가 생기고 전국의 조합원들이 서로 소통하고 한길을 간다는 자체만으로도 벅찼던 순간,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함께할 동지들이 있어 좋았던 순간들을 늘 기억할 것이다. 코웨이가 없으면 코디도 없다. 회사와 대치가 아닌 상생하는 노조가 되었으면 좋겠다. 회사가 탄탄한 코디 조직을 믿고 지원해 준다면 정수기 업계 일등 기업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기 탄탄한 멀티플레이어인 코디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힘든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일하면서 만난 고객들 대부분은 호의적이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또또클럽(목표 실적을 달성하면 회사가 해당 코디·코닥 노동자들에게 식사나 여행을 보내주는 사업)을 통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행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성남 태평지국 가늘고 길게(장기 근속자 소모임) 팀 식구들이 있어 17년을 버틸 수 있었다. 나를 돌아볼 수 있게 귀한 지면을 내준 <작은책>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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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성주, 한반도의 최전선

나정(가명)/ 사드가 배치되어 있는 성주에 살고 있는 주민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시계를 보니 540. 이미 남편은 거실에서 비염에 좋다는 작두콩차를 마시고 있다. 몸이 무겁다. 누운 채 손가락을 차례로 꼽아 본다. 묵직하고 뻣뻣한 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오늘도 새벽에 두 차례 종아리에 쥐가 났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남편이 깨어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아프다. 허리를 시작으로 팔꿈치, 발목, 그리고 이제는 무릎. 아무래도 오른쪽 무릎은 이미 탈이 난 듯하다. 남편 나가는 소리에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세수는 고사하고 거울조차 보지 않고 남편을 뒤따른다. 마스크 한 장이면 족한 세상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집에서 밭까지는 걸어서 30분 걸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10, 차로 가면 5. 대부분 차로 다니지만, 가을철에는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허리와 무릎 근력을 위해 걸어서 간다. 걷다 보면 세상이 다가온다. 로드킬 당한 각종 동물의 사체, 물오른 배 롱나무, 겁 많은 이 집 저 집 개들. 어느 새 도착한 딸기밭. 오십 중반을 넘긴 나와 남편은 참외로 유명한 이곳 성주에서 5년 전 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하필이면 왜 딸기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이곳은 모든 것이 '참외'로 적정화 내지 표준화되어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라서. !

나는 경주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아 길렀다. 경주에서 평생 살 거라 믿었다. 그러나 15킬로미터 인근에 핵발전소가 있다는 사실, 아니 그 핵발전소가 상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주저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그다음 해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끔찍한 참사를 보며 우리의 결정이 옳았다 믿었다. 이런 우리의 귀농사를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웃었다. ‘경주나 성주나.’ 좁은 땅덩어리에서 피해 봐야 소용 없다는 말이지만, 그래도 성주는 100킬로미터 밖. 심리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거리였고, 그 사실만으로 족했다. 그렇게 핵발전소를 피해 온 성주에 2016년 사드(THAAD)가 들어왔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곳 성주가 한반도의 최전선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다시 성주를 떠날까?’

남편과 나는 500평 규모의 딸기 농사를 짓는다. 동수로 보면 세 동이지만, 면적으로 따지면 두 마지기 반의 크기. 수십 동씩 참외 농사, 상추 농사를 짓는 다른 농가들에게는 소꿉장난처럼 보일 것이다. 평생 농사라고는 구경도 하지 않은 우리는 심지어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유기 재배를 선택했다. 시원하게 약 한번 뿌리면 되는 일을 우리는 밤마다 랜턴을 쓰고 민달팽이를 잡았다. 응애가 오면 천적인 칠레이리응애를 넣고 매일 개체수를 살폈고, 진딧물이 보이면 난황유를 만들어 쳤다.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평화로웠고, 새롭게 만난 이웃들과의 풍성한 이야기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무엇보다 가야산으로 넘어가는 노을과 마주하며 돌아오는 시간은 감사의 기도가 절로 터진다. 그런데 이곳 성주에 사드가 웬 말인가!

수확한 딸기들. ⓒ나정

30분 걸어 도착한 딸기밭 주변은 이미 한낮처럼 분주하다. 농사 이웃인 옆 하우스의 K 아저씨는 참외를 따고 있다. 낡은 트럭 위 빨간 바구니에 노란 참외가 그득하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하우스 문을 민다. 딸기는 거짓말처럼 밤새 빨갛게 익어 있다. 순간 젖은 솜처럼 무겁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옆 동에서 남편의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애청하는 채널의 사회자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이 걱정이다. 집과 딸기밭만 오간 지 벌써 석 달. 사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소성리 집회도 멈춘 지 두어 달이다. 오늘은 수요일. 남편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소성리로 올라간다. 사드가 임시 배치된 소성리 미군기지 앞에서 매일 평화행동이 열린다. 남편은 수요일마다 올라간다. 다른 주민들도 참외밭, 고추밭, 마늘밭을 뒤로하고 허겁지겁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미군기지 앞에서 외칠 것이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2019년 10월 6일 성주 소성리 진밭교에 마련된 원불교 교당의 평화 기도가 1000일째 되는 날. 우리 모두 모여 서로에게 감사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사진 제공_ 나정

다시 돌아가서, ‘성주를 떠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싱겁게 정리되었다. 핵발전소가 무서워 떠나왔던 경주가 이미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들 그곳에 제2의 핵발전소, 2의 사드 기지가 들어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특히 사람 적고 힘없는 시골은 더더욱.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떠나고 버릴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곳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사드가 임시배치되어 있는 이곳 성주에서 그냥 살기로 했다. 아니,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사드 배치로 하루아침에 한반도의 최전선이 된 성주 소성리에서, 평생 살아온 터전을 하루아 침에 미군에게 빼앗긴 소성리 어머니들과 함께,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살아 낼 것이다.

미군은 미국으로, 평화는 이 땅으로!”

사드 가고 평화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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