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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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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0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죽비 같은 인연

김수련/ 항공사 객실승무원

 

항공사 객실승무원으로 일하는 하루하루는 늘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하늘을 건너 온 세상 도시들을 오가며 다양한 국적의 승객들을 대하는 일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지구라는 열린 도서관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객실승무원으로 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전혀 알지도 못했을 나라와 사람들, 그들에 대해 새로운 걸 깨닫고 이해하게 해 주는 내 일이 나는 너무나 고맙다. 피부색, 언어, 종교에 상관없이 이 시대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런 교감과 공감 덕분에 길고 고된 하늘길에서의 노동을 견디며 오랜 시간 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행기라는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밀폐와 제한이다. 이 꽉 막힌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다 보면, 그 부대낌의 피로 탓일까. 이미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던 상황들을 그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극성수기가 지나고 나면 항공요금이 조금 싸진다. 휴가를 가는 여행객들은 줄어들고, 사업이나 고향 방문 목적의 승객들이 많아진다. 성수기가 끝났음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승무원들 앞에 또 다른 종류의 일이 들이닥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다. 그래서 미국을 오가는 승객들 중에는 고국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 특히 우리 항공사를 많이 이용하는 승객은 인도인이다.

인도처럼 식민지를 오래 겪은 나라들은 이민이 많다. 인도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로 계급간의 갈등이 꽤나 심각하며, 우리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지만 이름과 성만 보아도 그들끼리는 상대가 어떤 계급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신분이 낮은 이들은 자국기인 인디안항공 이용을 꺼리고 신분 계급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 외국 항공사들을 애용한다는 것.

그 얘기를 처음 듣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인도인 승객들을 만나면 무작정 연민의 마음부터 일곤 했다. 하지만 신분이 철저하게 구분된 사회에 오래 살았던 이들이라 그럴까. 그들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행동으로 우리를 당혹하게 했다. 나의 연민과 공감 능력으로는 그들을 다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들 인도인 승객의 특징 중 하나는 타국적의 승객들에 비해 휠체어 신청이 유독 많다는 점이다. 인천공항에서 인도 뭄바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모인 인도인들이 한 비행기에서 주문한 휠체어가 무려 50개가 넘을 때도 있다. 휠체어 승객이 몇십 명이 넘어가면 승무원이 할 일은 몇 곱절로 늘어난다. 달리 보상이 없으면서 챙기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부쩍 많아지니, 일하는 승무원 입장에서는 불평이 쌓이기 십상이다.

휠체어로 탑승하는 인도인들은 물론 대부분 노약자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충분히 걸어 다닐 나이 같은데도 제대로 못 걷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느 날 인도 뭄바이에서 현지 직원에게 물었다. 유독 많은 뭄바이행 휠체어 승객들에 대한 불평은 그 질문 하나로 자취를 감췄다.

직원은 답은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무 가난하여 자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미국으로 간 그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부실한 영양 공급 탓에 다리근육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며 가족을 부양하느라 자신을 챙길 여유가 없어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그들. 휠체어에 의지해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들. 어쩌면 미국 이민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고향 방문일 수도 있는 그들의 여정.

그들을 그렇게 휠체어 안에 주저앉게 만든 사정을 헤아리려 들지도 않은 채, 그저 고단한 업무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으려 했던 내가 얼마나 낯 뜨거웠는지 모른다. 그저 내가 할 일이 늘어나는구나, 더 고단해지겠구나, 아 힘들어, 그런 푸념만 연발하며 그 상황을 불편해하고 불평하다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늙고 병들어 혼자서는 잘 움직일 수도 없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인 인도로 가는 모자 승객이 우리 비행기에 탔다. 어머니의 좌석은 비즈니스였고 아들은 이코노미였다. 아들은 탑승하며 내게 부탁했다. 자주 와서 어머니를 돌보고 싶으니 사정을 봐 달라고. 비행기는 클래스별로 좌석이 나눠져, 다른 칸의 승객이 상위 좌석으로 맘껏 다니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탑승 과정 중 보았던 아들의 표정과 태도에 감동받아 그날 담당 팀장에게 사정을 설명해 잠시 오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그날도 승객이 많았던 날이라, 내 일이 한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 모자 승객이 자꾸 눈에 밟혀, 아들이 어머니의 식사 시중을 들고 화장실 방문을 돕는 모습을 틈틈이 지켜보았다. 할머니는 생각보다 자주 화장실을 가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나도 부지런히 다른 칸으로 오가며 아들 승객을 불러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잠도 못자는 그 승객이 안쓰러워, 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 서울 도착할 때까지 내가 돌봐 드릴 테니, 아드님은 조금 쉬시라고. 할머니는 평소 잘 못 움직이신 탓에 몸이 불어 있었고 인도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고 있어서 부축하고 화장실로 모셔 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를 도와드릴 때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깊이 감사하는 맘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눈길. 비록 능숙한 영어는 아니지만 넌 참 좋은 사람이야를 연발하던 할머니의 목소리. 그런데 식사 때면 식욕이 없으신지 거의 안 드셔서 마음이 아팠다. 더 드시라며, 다른 거라도 챙겨 드릴까 여쭈었더니, 맙소사! 자꾸 먹고서 화장실을 자주 가면 아들과 당신을 힘들게 해서 안 된다는 게 아닌가. 마음이 풀썩 주저앉은 나는 더 권할 수도 없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모자 승객은 다른 일반 승객들이 다 내리길 기다린 후에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를 꼭 안아 드리며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또 만나자고 인사했다. 할머니가 허리춤의 쌈지를 뒤져 꼬깃꼬깃 접은 5달러 지폐를 내 손에 꼭 쥐어 주셨다. 승무원의 업무 특성상 팁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난 괜찮다며 사양했으나 할머니는 절대 돌려받지 않을 기세셨다. 옆에 있던 아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맙다 인사를 드리고 손을 꼭 잡았다.

동료들은 그날, “왜 굳이 나서서 할머니를 돌보느라 더 힘들게 일했냐며 나를 책망하듯 칭찬했다. 아들과 늙은 어머니가 서로를 살뜰히 돌보고 위하는 마음을 어찌 외면한단 말인가. 서로를 위하는 애틋한 마음은 고단함도 잊게 만든다.

나는 잘 몰랐다. 아니 안 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엄격한 신분사회, 오랜 영국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 미국 이민자로 살면서 자신의 권리주장에만 몰입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편견만 쌓으며 내 업무의 어려움만 증폭시켜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만났던 모자 승객은 자꾸 편협해지려는 나를 번쩍 일깨워 준 죽비 같은 인연이었다. 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책도 뒤적이고 영화도 찾아보곤 하면서, 정작 그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들을 보는 일엔 게을렀던 게 아닐까.

지난달 광화문에서 열린 갑질격파 시민행동집회에서 나는 조합원의 편지로 발언대에 섰다. 항공기가 날아올라 움직이는 원리를 항공역학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난 항공기를 움직이는 진짜 힘은 항공기 안팎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협력과 조화에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뭄바이로 가는 모자 승객 같은 수많은 죽비 같은 인연들이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리고 난 그들과의 사연을 나의 세상 도서관 책장에서 항상 다시 꺼내 읽고 감동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니까

▲ 항공사 객실 승무원 김수련 씨. 사진제공_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posted by 작은책
2018. 10. 2. 14:07 알림 / 엮은이의 글

▲ 표지 그림_ 김종도


엮은이의 글

 

이번 호를 꾸리는 중에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9년 동안 30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수많은 노동자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쌍용자동차 해고 사태가 마무리되었다고 해요. 해고자 119명을 내년 상반기까지 모두 복직시키기로 노사가 합의했답니다. 타결 소식에 반갑고 마음 기쁜 한편 동시에 분하고 착잡한 마음도 드네요. ‘공장으로 돌아가 일하고 싶다는 이들의 소박한 요구가 그렇게 오랜 시간 싸워야만 얻어질 것이었나 싶어서요.

KTX 해고 여승무원들에 이어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까지 복직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수많은 노동자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차별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75미터 높이의 굴뚝에서는 파인텍 노동자들이 310일째 고공농성을 하고 있고요, 광화문 세종로 공원 농성장에서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12년째 복직을 위한 노숙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님들, 곳곳에서 싸우고 있는 이분들이 지치지 않게, 질기게 싸워서 이길 수 있게, 지지와 연대 부탁드립니다.

이달에 일터에서 온 소식꼭지에는 항공사에서 일하는 분들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용기 내어 가면을 벗어 던지고 당당히 싸우는 그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갑질 항공사가 아니라 국민의 항공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싸우겠다는 항공사 노동자들에게 관심과 응원 보내 주세요.

독자님들, 늘 고맙습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2018918

유이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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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9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여보, 한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태윤호/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 쌍용양회지부 사무국장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분이라면 쌍용양회 시멘트회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단일 공장 중 세계 최대 규모 쌍용양회공업()은 시멘트업계 1위로 연간 300~400만 톤의 시멘트를 미국, 칠레, 말레이시아 등 전 세계 8곳에 수출하는 회사다.

2007년 스물일곱 살이던 나는 그해 결혼하고 겨울에 쌍용동해중기()에 입사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 지인분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나 역시 그랬다. 청년실업률이 점점 높아지는 시기에 젊은 나이에 지방에서 좋은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동해는 평생직장으로 삼을 만한 일터가 별로 없다. 지방에서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젊은 친구들은 서울이나 경기권, 대도시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쌍용양회에 들어간 나는 내가 자란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제2의 인생, 나의 새 둥지를 꾸려 갔다. 어느덧 내 나이 서른여덟. 결혼하고 입사한 지 12년 차. 토끼 같은 두 딸의 아빠가 되었다. 정말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IMF 이후 쌍용양회는 쌍용중기 부서를 포함한 기계, 정비, 유통 등 여러 개의 부서를 도급으로 전환시켰다. 이 내용을 입사 면접에서 알게 되었는데, 회사가 다시 안정화되면 합병될 거라고 기대하였고 다른 타 회사의 대우를 봤을 때 비교적 안정적이라 생각했다. 처음 원청 직원과 월급 차이는 78퍼센트 수준이었고 성과급 및 복리후생도 쌍용양회의 지침 그대로 적용되었다. 분사되었을 때 양회 직원으로 일하다가 넘어온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원청에서도 신경을 많이 써 주는 것 같았다.

입사 후 한 4년쯤 지났을 때 바지사장이 갑자기 원청에서 퇴직 통보가 왔다고 했다. 왜 바지사장인가 하면 연 35~40억 원의 경상 도급을 받아 오는 회사의 사장 자리에 주주총회도 거치지 않고 원청이 보내는 사람을 앉혀 처우, 복지나 직원들의 급여 및 발령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쌍용양회 북평공장 공장장(부장이사)이 중기 바지사장으로 온다고 했다. 좀 얼떨떨했다. 그전에도 이상한 점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회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얼마 후 중기 반장이 도급계약에도 없는 A광산에서 비 오는 날 원청 관리자의 요청으로 작업자 두 명과 중장비를 가지고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낙석 사고로 억울하게 운명하셨다. 우린 원청의 작업 지시를 당연시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 달이 흐르고 쌍용양회에 계시다 넘어오신 퇴직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분들은 쌍용양회의 입사 동기들과 퇴직금 차이가 크다는 걸 알고 소송을 했다. 한평생을 다 바치고 억울하게 회사의 고통을 공동 분담 하였는데도 그들과 평등한 대우는커녕 물질적으로 보상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송은 1심에서 지게 된다. 원청에서 도급으로 넘어올 때 아무런 서명계약서 없이 구두로만 이어져 넘어온 것이 실수였다.

그 후폭풍이 결국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닥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또 바지사장은 원청에 의해 잘려 나가고 그보다 더한 바지사장(북평공장 공장장)이 발령을 받아서 왔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한번은 원청 관리자가 자신들의 작업 지시를 묵살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하여 바지사장이 동료에게 징계를 내렸다. 그분은 한 달 무급과 출입 정지 공문을 받고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사장, 밤에는 대리운전을 해야만 했다.

또 외부 운송업체 기사가, 우리가 하역을 제때 안 해 준다고 쌍용양회에 본사에 투서를 보내 본사에서 감사조사원이 내려와서 그 시간대 근무였던 장비 운전원을 불러 감사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말에 원청 노조가 임금 협상을 하여 임금이 인상되면 우리도 똑같이 올려 줬는데, 도급이라고 끊기고 소급분도 안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다.

겨울에는 동해시의 도로 일대, 공장 주변, 시내, 공장 안, 원청 사원아파트 앞까지 요청 오는 제설 작업은 다 했고 여름에는 원청 직원의 피서를 위한 천막과 의자 운반까지 했다. 동해시의 초··고등학교 운동장과 바닷가 모래사장 평탄 작업 등 쌍용양회의 중장비 관련 대외 업무는 우리가 도맡아 했다. 억울한 건, 우리가 알면서도 모든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에서 발급한 건설기계 조종면허를 8개씩 가지고 있으며, 실제 그 면허에 해당하는 운전을 할 수 있는 기능직 사원들이다.

정말 역겹고 구역질이 난다. 이 악질 같은 놈들은 조금 더 벌어먹으려고 직원들 임금 줄여 지네 배 불리고, 원청에 잘 보여 어떡하면 안 잘릴까 온통 그 생각뿐인가 보다. 누군가 그랬다. 아인슈타인은 머리를 열어 연구해야 하는데 저것들은 머리를 깨 봐야 알 것 같다고.

우리는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자본에 맞서기 위해 SNS를 뒤져 우리랑 유사한 회사를 찾아보았다. 바로 옆 동네 동양시멘트(현 삼표시멘트)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승리한 사례를 보았다. 동해삼척지역에는 노동운동에 앞장서 그 중심에 서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많았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지난 110일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쌍용양회지부를 결성하고 자본의 반대편에 섰다. 노조가 결성되기 전 가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걱정했다. 어느 날 집사람이 내가 몇 날 며칠 고민하느라 잠 못 들고 밤잠을 설치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이 그렇게 억울하고 직원들의 한마음 한뜻이면 한 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이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다들 이런 마음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이런 일들이 생기면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나 위로가 그렇게 따뜻하고 위대할 순 없을 것 같다.

▲ 쌍용양회 비정규직 노동자 태윤호 씨.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지금 우리는 쌍용양회의 불법파견 및 위장도급,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투쟁 중이다. 노동운동의 선전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고 투쟁은 싸움이 아니라 노동자의 몸부림이며 파업은 노동자가 노동의 일손을 놓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 이 글을 보는 전국의 동지들에게 우리의 진실이 전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다 한마음 한뜻으로 후회 없이 투쟁하길 바란다.

▲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하는 쌍용양회지부와 강원지역 노동자들.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9월호

일터 이야기

 

바다의 삼성뉴텍이 그러면 쓰나

정인열/ <작은책> 기자

 

 

해남지역 해안가부터 노화도, 청산도, 보길도, 신안의 이름 없는 섬까지. 이곳 어촌 지역에는 전복 양식장 같은 수산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이 많다. 어민들이 소유한 작은 어선에는 집게가 달린 크레인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어민들은 이 크레인으로 전복 먹이인 다시마를 집어 양식장으로 투하하거나 무거운 가두리를 이동한다.

해남, 완도에 떠 있는 배에 달린 크레인들, 그거 다 뉴텍 거라 보시면 돼요.”

▲ 전복관리기 모형도. 사진제공_뉴텍분회

해남군청 앞 뉴텍 분회(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 전남중소사업장연대노조 뉴텍분회) 천막농성장에서 김영식 씨가 말했다. 뉴텍 노동자들은 70일이 넘게 파업 중이다. 김 씨는 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 조직국장으로 뉴텍 투쟁에 결합하고 있다.

▲ 해남 옥천농공단에 있는 (주)뉴텍 전경. 작은책(정인열)

뉴텍은 1992년 광주정밀로 시작, 2004년 기업을 확장해 뉴텍을 설립하고 2005년 옥천농공단지에 입주했다. 수산물 양식장에 필요한 다목적 인양기와 전복 관리기를 개발해 관련 특허 기술들을 보유했고, 기술·경영혁신형 중소기업 인증을 받아 정부로부터 지원도 받는 유망 중소기업이다.

“‘바다의 삼성이라고 어떤 분들은 말해요.”

111년 만에 유례 없던 폭염이 찾아왔던 올여름, 노동자 7명은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파업투쟁을 했다. 조합원은 12명이지만, 이중 병역특례 복무자 5명은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위험이 있어 참여하지 못했다.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체 직원 38명 중 실제 현장노동자는 23~24. 이 중 병역특례자와 외국인노동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표이사의 가족이거나 친인척이라 파업에서 빠졌다. 파업 노동자들은 금속 자재를 가공, 조립, 용접하고 도색해 크레인을 완제품으로 만든 후 양식장 어선에 설치하고 A/S를 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왜 이 뜨거운 여름에 파업을 선택했을까. 노조는 노동강도에 비해 낮은 임금, 불합리한 임금체계, 일방적인 상여금 삭감을 이유로 들었다.

12년 차 조립 업무를 하는 김광진 씨(44)가 받는 월급은 식대를 포함해 213만 원. 여기에 매일 1시간씩 발생하는 연장근로수당을 포함하면 244만 원인데, 각종 세금을 떼고 나면 실수령액은 약 204만 원뿐이다. A/S 업무를 하는 입사 8년 차 김승규 씨(38)가 받는 월급도 실수령액 179만 원으로 적기는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은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을 일하는데, 이들은 임금체계도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입사 2년 차인 윤정균 씨(47)의 임금은 8년 차 김승규 씨와 10만 원도 차이 나지 않는다. 윤 씨는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책정한 임금인데, 괜히 연차 높은 동료들에게 미안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들은 조립식 건물에서 에어컨도 없이 폭염과 싸우며 일해 왔다. 절단, 용접 등 위험에 노출된 환경에서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한다. 김광진 씨가 설명한다.

쇠가 녹잖아요. 그게 1600도예요. 앉아서 용접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 회사는 안전 장비가 없어요. 그냥 앞치마예요. 용접, 그라인더(조립) 해 보면 사람이 인이 배기잖아요. 그라인더도 안 하던 사람이 하면 그 다음 날 손이 덜덜덜 떨려요. 육체적 노동이 사무직의 10배는 더 될걸요? 용접도 마찬가지고, 선반(금속 가공)은 엄청 정밀하게 쇠를 깎는데 100분의 1콤마까지 맞춰야 하는 작업을 해요. 집중력과 정밀함을 요하는 기술이 필요한 거죠.”

A/S 업무를 하는 김승규 씨는 아침 회의 후 830분에 고객이 있는 섬으로 출발한다. 그는 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속 100킬로미터로 운전한다. 1건이라도 더 하기 위해서다.

노화도에서만 하루 4, 5건이에요. 일주일에 4번은 점심밥을 못 먹어요. 1건이라도 더 하는 게 점심밥 먹는 것보다 나아요. 한여름에 기관방(엔진룸) 들어가서 허리도 못 펴고 작업을 하는데 쇳덩어리에 몸이 닿으면 살이 익는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거예요.”

하지만 노동자들은 회사가 자신들의 노고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느꼈다. 김승규 씨가 전무이사를 찾아가 업무량에 비해 임금이 너무 적다고 호소했을 때 돌아온 답변은 황당했다.

“‘야근도 안 하면서 돈이 적다고 하면 쓰나?’면서 야근을 하라는 식이었어요. 땀 흘려 일하고 회사 들어왔는데 그 상태에서 야근을 어떻게 해요? 절대 못해요.”

사실상 임금이 동결되어 온 상황에서 2017년 추석부터 상여금이 줄었다. 노동자들은 사측으로부터 사전 고지나 설명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동안 상여금 200퍼센트를 설과 추석, 여름휴가 세 번에 나누어 받았는데, 추석에 70퍼센트 받던 상여금이 50퍼센트만 지급됐다. 경영상의 이유였다는 걸 안 것은 쟁의가 벌어지자 사측이 내놓은 자료를 접한 뒤였다. 뉴텍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매출 213798만 원에서 709983만 원으로, 영업이익은 5262만 원에서 67281만 원으로 4년 연속 성장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201712, 노동자들은 일방적 상여금 삭감과 임금 문제에 대해 회사에 어떤 방식으로 요청할 것인지 논의했다. 이전에도 직원 대표로 일부 노동자들이 수차례 회사에 임금인상을 요구했지만 회사의 태도는 바뀌지 않아 불만이 많이 쌓인 터였다.

“‘그냥 노조로 갑시다했어요.”

그리고 지난 124, 노조가 설립됐다. 노조는 임금단체협상 및 노조 인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설 상여금을 20퍼센트만 지급했다. 실무 교섭에서 노조는 상여금 400퍼센트 지급을 제시했으나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회사의 입장을 받아들여 임금인상도 보류하고 상여금도 40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기존 수준으로 양보했다. , 일방적 상여금 삭감을 막기 위해 상여금 200퍼센트 지급을 문서에 명시하도록 요구했다. 그러자 회사는 지금까지 준 것은 상여금이 아니라 성과급이었다고 주장하며 문서화를 거부했다. 성과급은 회사 임의대로 주는 비정기적인 돈이다. 뉴텍이 취업 사이트에 올린 입사 공고를 보면 성과급이 아닌 상여금 200퍼센트로 명시되어 있다.

▲ 온라인 구인구직 공고 사이트에 올라온 뉴텍 구인 공고.


봉투에 현금으로 받았어요. 우리는 입사할 때부터 10년을 200퍼센트로 받았는데. 노동청에 임금 체불 진정을 넣었지만 근거 자료가 없어서 하루아침에 성과급이라고 판단이 났죠.”

꿈쩍도 않는 사측의 태도에 교섭은 결렬됐고 결국 지난 64일 노조는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이 있는 옥천농공단지에서 농성하다 사태가 길어지자 지자체가 나서서 중재할 것을 요구하며 지난 86일부터는 해남군청 앞에도 천막농성장을 설치했다.

▲ 해남군청 앞 뉴텍분회 천막 농성장. 작은책(정인열)

회사가 해남군수와의 면담에도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해남 지역사회는 뉴텍 노동자들을 위해 행동에 나서고 있다. 뉴텍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가 나서 대책위를 꾸렸고 뉴텍 제품을 이용하는 고객들도 응원에 나섰다. 해남 전복협회장을 비롯해 한국수산업경영인 화산지회, 송호리·갈두리·화산면·현산면·송지면 어촌계의 지지 방문이 이어졌고, 이들은 직접 회사로 가서 항의도 했다.

고객분들이 너희들 대변해서 말할란다하시면서 회사로 가서 기계가 좋아서 쓴 게 아니라 직원들이 좋아서, 직원들이 잘해서 이 기계를 쓴 거다라고 해 주셨어요.”

응원해 주는 시민들을 보면서 뉴텍 노동자들은 크게 힘을 얻는다. 이번 파업으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것도 알았다. 상여금마저 성과급이라고 주장하고 삭감한 뉴텍을 상대로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파업뿐이었다

▲ 추성화,김영식 민주노총전남지역본부 조직국장,김승규,윤정균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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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8월호

독립영화 이야기_ 이마리오 감독의 <더블랙>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영화 <더블랙> 스틸컷. 


<더블랙>이 드디어 개봉합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본 건 3월 말이었습니다. 영화에 반한 저는 <작은책>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내내 개봉일을 기다려 왔습니다. 영화 보던 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연출자 이마리오 감독이 영화가 곧 개봉할 거라고 했거든요. 그동안 저는 매달 마감 무렵이면 감독에게 개봉일을 묻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마냥 흐르고 기약없이 미뤄지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긴 걱정을 하던 중에 8월말 개봉 소식을 들었습니다. 드디어 소개글을 쓰게 되어서 기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실 즐겁게 볼 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 <더블랙> 스틸컷. 


영화는 흑백 재연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선한 눈매의 한 남자가 서울역 고가도로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손에서 켜지는 라이터. 라이터에 불이 켜지는 순간 빨간 불꽃이 켜지며 화면은 컬러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뉴스는 그 남자가 특검 수사를 요구하며 분신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고 이남종 열사의 이야기입니다. 서울 활동을 접고 강릉으로 이주하여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마리오 감독의 마음에 이 사건은 깊은 상흔을 남깁니다. 언론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이의 기억에서 그의 죽음은 지워져 갔지만 이마리오 감독은 끝내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를 알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고 우리는 이제 4년 만에 그의 영화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마리오 감독에게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나이도 같고 데뷔년도도 같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있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저야 생활고에 치여 아르바이트와 교육에 전념하느라 영화를 못 만들고 있지만 이마리오감독은 강릉에서 미디어 활동가로, 후배 감독들의 프로듀서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제가 그의 행보에서 감동했던 순간이 있습니다. 상업적 논리에서 벗어나 있는 독립영화는 공적 지원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해의 독립영화 제작 지원 면접 심사장에서 이마리오 감독을 만났습니다. 당시 이 영화는 메멘토 모리라는 가제를 달고 제작 중이었는데 뜻밖에도 그날 이마리오 감독은 자기 영화가 아닌 후배들 영화의 프로듀서로 면접을 보러 왔더군요.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어 가는, 갓 영화를 시작하는, 어쩌면 제자였다가 이제는 동료가 된 후배 감독들을 위해 이마리오 감독은 성심성의껏 면접을 보고 강릉으로 돌아갔습니다. 마흔에서 쉰이 되어 가는 나이. 원치 않아도 중견이라 분류되고 그래서 작품을 만들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시기에 후배들의 출발을 위해 자신에게 있는 가능성을 과감히 버리는 그 모습에서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그리고 2018, 동갑이자 데뷔 동기인 이마리오 감독의 이 신작을 저는 감격해 가며 만났습니다. 빼어난 영상미와 꽉 짜인 구성이 놀랍기만 합니다. 다섯 개의 챕터, 그러니까 오피스텔 607’, ‘디지털포렌식’, ‘검찰특별수사팀’, ‘더블랙’, ‘이남종이라는 소제목 아래 국정원 댓글사건부터 촛불항쟁까지를 일목요연하게 펼쳐내는 유려한 이야기 솜씨에 또 반하게 됩니다. 챕터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화면, 자막 하나하나마다 공들인 흔적들을 보다 보면 그 꼼꼼함에 한숨이 나올 정도입니다. 또한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김 아무개 오피스텔 앞의 생생했던 현장 상황과 디지털포렌식이 진행되던 경찰서 내 CCTV 화면, 김 아무개의 휴대전화에 전송되던 국정원 심리전단 동료들의 문자 같은 것들은 이마리오 감독의 지난 4년간의 치열함을 짐작하게 합니다.

영화 <더블랙> 스틸컷.


개인적으로는 진실을 대면한 경찰들이 어떻게 할지를 두고 토론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대선이 사흘밖에 안 남았기에 댓글사건의 수사 결과가 대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은 경찰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방금 찾아낸 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결국 그렇게 사건은 무마되고 박근혜는 대통령에 당선되지요. 출구조사가 발표되던 순간, 광화문에 모여 있던 관중들은 퀭한 표정으로 침묵합니다. 그 장면은 우리가 지나왔던 시간을 몸서리치며 떠올리게 해줍니다.

제목 더블랙은 블랙요원을 의미합니다. 블랙요원이란 정보기관 소속 요원 중 신분을 밝히거나 내세우지 않고 은밀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흔히 스파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세계평화나 적국의 정보 수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더블랙>의 스파이들은 댓글 다는 것이 일입니다. 오피스텔 607호에 거주하던 블랙요원 김 아무개의 행보에서부터 경찰과 검찰 수뇌부의 은폐 노력까지를 치밀하게 담아 내던 영화는 갑자기 재연배우의 입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촛불이 그 이남종이라는 분하고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이마리오 감독이 고 이남종 님의 유서를 읽습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으나 체감되는 공포와 결핍을 제가 가져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다큐멘터리 감독은 영매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나의 주인공이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나의 주인공이 기쁘면 나도 기쁩니다. 그리고 나의 주인공이 죽어서라도 하고 싶었던 말을 나는 나의 입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들려줍니다. 고 이남종 님의 마음이 되어 그분의 말을 대신 전해 주는 감독의 목소리는 그래서 특별하고 깊습니다. 최근 기무사 쿠데타에 대한 문건이 등장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시간을 거쳐 왔는지를 새삼 압니다.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하지만 사실 134일의 촛불항쟁동안 우리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고 이남종 님의 마지막 유언은 약간의 시차를 두긴 했지만 뒤늦게 실현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두려움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촛불로 부패한 정권을 몰아냈기에 공포정치를 끝낼 수 있었고 비로소 우리들은 이 영화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블랙>8월말에 개봉합니다. 기억하는 마음으로 반갑게 맞아 주세요. (문의: 이상욱PD 010-5364-9885) 

※ 이 글이 쓰여진 시점에는 8월말 개봉예정이었으나 이마리오 감독은 8월 28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개봉 시기를 9월 중순으로 밝혔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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