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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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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해고 모른 척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2억 8천 손해배상 청구냐!”
 
 “3억 손해배상 청구소송? 차라리 우리 노동자를 죽이시지요.”

  홍익대학교 정문 오른쪽에 이런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을 길러 낸다는 대학교에서 월급 89만 원 받는 청소 노동자들에게 3억을 손해배상 청구했다는 내용이다. 지난 1월에 청소 노동자 170명이 하루아침에 해고된 뒤 해고를 철회해 달라고 49일 동안 농성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손해배상 금액이란다.

홍익대학교 정문 옆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 / 사진_안건모

  거기에서 일하던 40대 후반에서 60대 여성 노동자들 사연을 들어 보면 하나같이 기가 막힌다. 그중에 한 분 김금옥 씨를 청소 노동자 대기실에서 만났다.

“비만 오면 여기 저기 새요.”

  청소 노동자 대기실 천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겉에서 보면 번듯한 이 홍익대 건물 안에 비가 새는 곳, 그곳이 청소 노동자 대기실 겸, 휴게실이다.

두 사람이 겨우 밥을 먹을 수 있는 대기실 / 사진_안건모

  김금옥 씨는 1953년 생. 고향은 전라남도 순창이다.

  “순창에서 20리 길 둑을 타고 나가면 우리 마을이었어요. 4녀 1남에 제가 둘짼데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죠. 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열여덟 살에 서울로 올라왔죠. 언니가 결혼한 뒤 상월곡동에 살았는데 형부가 요꼬(편직 기계) 짜는 분이라 종업원 몇 분 두고 공장을 운영했어요.”

  그 당시 옷은 그나마 잘 나가는 직종이었다. 하지만 수출이 막히면서 점점 어려워졌고, 설상가상으로 언니가 당시 20만 원 되는 계를 들었는데 계주가 도망가는 바람에 공장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논밭이었던 창동에 하꼬방(판잣집)을 지어 이사를 갔다.

  거기서 몇 개월 살다가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언니와 형부는 남원으로 내려갔다. 김금옥 씨는 메리야스 공장에 취직을 하고 친구들하고 기숙사에 살았다. 당숙이 중매를 해 줘서 공무원 직업을 갖고 있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말단 공무원 월급으로 살기가 어려워 김금옥 씨는 한 달에 10만 원을 버는 부업을 했다. 막내아들이 다섯 살 때부터 피죤, 물비누, 퐁퐁을 리어카에 싣고 다니면서 방문 판매하는 일을 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집을 방문하면, 새댁들이, 배추에 소금을 담가 놓는 분이 있어요. 그럼 내가 씻어서 담가주기도 하고, 뭐 좀 도와주고 하니까 그 분이 다른 손님을 소개해 주고 해서 영업을 잘했죠.”

  김금옥 씨는 그 뒤 라피네 화장품 판매, 보험 영업으로 생활을 꾸려갔다. 그 당시 보험 영업은 지금과 달랐다. 한 달에 한 번씩 보험료를 내는 게 아니라 일수 찍듯이 하루에 나눠서 받는 형식이었다. 용산전자상가 건물에서 남자만 상대하는 보험 영업이 쉬울 리 없었다.

  “처음에는 용기가 안 나서, 말도 못 했다니깐요. 오래된 언니 이틀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웠죠. 90도 각도로 인사하면서 ‘안녕하십니까?’ 하는 거 배우고 껌 하나, 볼펜 하나 주면서 가게마다 다 돌았어요.”

  날이 갈수록 보험 영업도 점점 힘들어졌다. 무엇보다 사람을 끌어오라는 ‘증원’ 압박에 시달렸다. 김금옥 씨는 힘든 보험 영업 일을 남한테 이 일이 힘들어 남한테 권유하지 못해 사람을 끌어오지 못했다. 결국 그 일도 그만두게 됐다.

  김금옥 씨가 처음 홍익대 청소 노동자로 온 것은 1999년이었다.

  “그땐 제가 힘이 장사였어요. 쓰레기 봉투가 100리터짜리 스물네 개에서 서른 몇 개가 나왔어요. 엘리베이터도 없었는데 7, 8층에서 그걸 힘든 줄 모르고 계단으로 내렸어요.”

  월급이 40만 원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음에 맞는 동료 언니들이 있어 그런 대로 재미가 있었다. 2년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마음에 맞지 않는 다른 청소노동자들과 같이 일하게 되면서 그만두게 됐다. 그리고 간 곳이 영등포에 있는 스크린 경마장이었다. 그곳도 청소하는 일이었다.

  “거긴 홍익대보다 월급은 많은데 손님들이 있는 데서 청소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담배 냄새가 심했어요.”

  그곳에서 6년을 일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버스에 치어 머리와 어깨, 다리를 다치고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동안 치료를 한 뒤 쉬고 있었는데 홍익대에서 정직원으로 청소일을 하는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일할 자리가 났으니 다시 올 수 있냐는 거였다. 사실 김금옥 씨는 노동조합(노조)이 있는 서강대에 이력서를 보내고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조가 있는 곳은 처우가 좀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강대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또 홍익대로 일을 하러 갔다. 60만 원밖에 되지 않는 월급 때문에 체육관 수영장 야간 일도 같이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월급이 80만 원은 됐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야간에 수영장 물일을 하니까. 락스 풀고 닦는데 공기 탁하고, 지하라. 하루에 몸무게가 1킬로씩 점점 빠졌어요.”

  자꾸 몸무게가 빠져 병원을 가니 갑상선에 종양이 생겼다고 했다. 수술을 하고 난 뒤 금방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8개월을 쉬고 홍익대에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청소하는 김금옥 씨 / 사진_정인열

  그런데 같이 일하는 동료 언니들이 불만들이 많았다. 노조가 있는 서강대, 연세대에 견줘, 똑같이 일하는데 홍익대는 월급이 더 적은 데다 일은 더 많이 해야 했다. 노조를 만들고 싶었지만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학생들이 와서 월급이 얼마인가, 하루 몇 시간 일하는지 설문 조사를 했다.

  “우리는 한 달에 75만 원 받고, 아침 8시 출근, 6시 퇴근 토요일도 한 달 두 번 정도 일한다고 얘기했죠. 우리가 있는 대기실을 두세 명이 세 번씩 방문했어요. 처음엔 노조 얘기 안 하고 설문 조사만 하다 두 번째 왔을 때 노조 얘기하는데 귀가 솔깃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도와주면 노조를 만들겠다 했죠.”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학교 밖 커피숍에서 처음 아홉 명이 모였다. 하지만 모두들 겁이 나 조합원 가입서를 쓰지 못했다. 김금옥 씨가 처음으로 가입원서를 쓰면서, 여덟 명이 가입서를 썼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청소노동자들 가운데 반 이상이 조합에 가입했다. 드디어 2010년 12월 2일에 노동조합이 출범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3일, 설날 휴가를 끝내고 출근했다. 출근 도장 찍으려는데 경비실에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 우리 경비 아저씨 휴가예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래요. 그래서 ‘출근도장이 없네요. 출근카드 주셔야죠’ 했더니 ‘몰랐어요? 아줌마들 이제 직원 아녜요 용역회사가 계약 만료되었다고 가 버렸어요.’”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용역회사와 계약이 만료됐다고 그날로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이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김금옥 씨와 청소노동자들은 모두 본관으로 모였다. 그것이 49일 동안 투쟁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싸움을 어찌 몇 마디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으랴. 김금옥 씨는 추운 시멘트 바닥에서 자느라 교통사고 났을 때 다친 어깨 통증이 재발했다.

  그렇게 49일 동안 투쟁한 결과 홍익대 청소노동자들 170여 명은 그대로 고용승계가 됐다. 그 싸움에서 ‘청소하는 아줌마’들은 당당한 노동자로 거듭났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가 아니라 정당한 노동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노동자였다. 김금옥 씨는 부분회장을 맡으면서 생각도 변하고 성격까지 달라졌다.

  “나이가 60이 넘은 분들이 많아요. 49일 농성하다 안 아픈 데가 없고, 중간에 언니들이 다 쓰러질 것 같고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할 때 용역업체와 교섭을 하고 타결됐어요. 그때 눈물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죠. 노조 가입하기 전에는 텔레비전에서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는 거 보면 이해가 안 가고 왜 싸움만 하느냐고 했어요. 근데 우리가 당하고 나니까 이해가 가는 거야. 오죽하면 싸우겠어요. 김진숙, 고공 농성 같은 거, 그것도 이젠 우리 다 이해해요. 몰랐을 땐 왜 저러나 했는데 지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금옥 씨는 둘레에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인터뷰 마지막에 이 말만은 꼭 써 달라고 했다.

  “김여진 씨와 ‘날라리 외부 세력’의 도움과 도와주는 단체들이 없었다면 우린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좌절하는 순간이 많았는데 ‘당신들이 정당하다. 이길 거니까 힘내라’고 말해 주는 사람들 때문에 힘이 나서 싸울 힘이 생겼죠. ‘이길 거니까 힘내’라는 말이 너무 고맙고……. 평생 이 은혜 잊지 않을 거예요.”

글_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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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순이 아버지를 만났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연속극에서 삼순이 아버지로 나온 맹봉학 씨다. <작은책>에서 연예인을 인터뷰하기는 처음이다. 전화를 했더니 “요즘, 본의 아니게 내가 유명 인사가 됐네요” 하고 껄껄껄 웃는다.

대학로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성균관대 앞에 있는 풀무질 책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맹봉학 씨가 풀무질 책방 주인인 은종복 씨하고도 친하니 잘됐다 싶었다. 정확히 두 시에 책방으로 들어온 맹봉학 씨가 은종복 씨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맹봉학 씨는 요즘 더 바빠졌다. 어제도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에서 인터뷰를 했고 오늘도 이 인터뷰가 끝나면 이 근처에서 다른 매체와 또 인터뷰가 있단다. 이렇게 바쁜 까닭이 연기자로서 스타가 됐기 때문이 아니다. 가슴 아픈 얘기지만, 배우인데 사회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 여러 매체에서 취재당하는(?) 수준을 보면 거의 사회운동가가 다 됐다. 연기를 해야 먹고사는 배우가 그러기가 쉽지 않다.

“전에 경찰에 소환당해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벌금 맞으셨어요?”

“두 번 다 안 맞았어요. 뭐, 죄가 있어야죠.”

맹봉학 씨는 유일하게 연예인으로서 집회에 관련해 경찰에 소환을 두 번 당한 사람이다. 한 번은 2008년 촛불 집회 때, 두 번째는 지난해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 때였다.

“영결식 때 도로로 차를 따라 갔는데 사진이 찍혔더군요.”

연예인이 경찰에 출두하면 금방 소문이 나기 때문에 스스로 몸을 낮출 만도 한데 맹봉학 씨는 당당하다. 하지만 역시 그 사건 이후로 영화 섭외가 전혀 안 들어온단다.

“전혀 연락이 없어요. 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사실 영화 하는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거든요. 근데 촛불 집회 이후로 한 편도 못했어요. 단편 영화는 숱하게 했지만. 하 참 나, 하하하!”

촛불 집회 때 기억나는 게 있냐고 물었다.

“촛불 집회 때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먹을 걸 갖다 줘요, 고맙다고. 나 하나 나온 게 자기들 백 명 천 명 나온 것보다 더 힘 되니까 고맙다는 거죠. ‘아, 이분들이 지켜보고 있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맹봉학 씨는 푸근한 아버지 역할로 많이 나왔지만 아직 미혼이다. 올해 마흔여덟 살. 왜 결혼을 안 했느냐고 물었더니 “못했다고 봐야죠.” 하고 또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웃는 모습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다.

얼굴이 밝지만 맹봉학 씨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열두 살 때부터 일을 했단다. 7남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맹봉학 씨는 6ㆍ25 때 남쪽으로 넘어온 아버지가 수원에 자리를 잡은 뒤 태어났다. 친척이 없어 명절 때마다 우울했다. 맹봉학 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혼자 살아 나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걸 느꼈단다. 닭을 몇 마리 키웠는데 달걀 한 개를 공책이나 학용품으로 바꿀 만큼 어렵게 살았다. 학교에서 준비물을 사 오라고 하면 집에 돈이 없어 못 사줄 게 뻔해 아예 이야기를 안 했다.

그래도 맹봉학 씨는 늘 희망을 갖고 살았다. 그때 만화를 많이 봤단다.

“만화를 보면, 처음엔 고생하다가 나중에 다 성공하더라고요. 하하하.”

참 잘 웃는다. 꾸밈이 없다. 맹봉학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야간 학교인 산업체 특별 학교를 다녔다. 낮에는 구로공단에 있는 병 공장에서 일했다. 일하다가 손을 다치기도 했다. 다니던 산업체 특별 학교가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맹봉학 씨는 영등포공고 전기과로 들어갔다. 연극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우리 집이 가톨릭 집안이에요. 성당 학생회에서 문학의 밤을 했어요. 그런데 연출가 형이 딴죽을 거는 거예요. 연기를 그거밖에 못하냐고.”

맹봉학 씨는 오기가 생겼다. 가톨릭 학교를 다녀 수사가 되려고 했지만 자기 길이 아니라고 깨닫고는 연극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연극은 재미가 있었다. 첫 작품은 전주 지방연극제에서 한 〈멀고 긴 터널>이었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독립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때 출연한 작품은 영화아카데미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김진성 감독(<서프라이즈>, <거칠마루>)의 <환생>이었다. 그이가 맡은 역은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태어나는 두 명의 사형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밖에 <2001 이매진>, <수사반장 트위스트 김>, <트라이앵글 메모리즈>, <잘돼가? 무엇이든>, <바이칼>, <아버지 어금니 꽉 깨무세요> 등 수백 편에 출연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최원석 감독의 단편 영화 <트라이앵글 메모리즈>라고 한다. 맞고 다니는 아들한테 레슬링을 전수하는, 재미있는 역할을 맡았다.

“내가 코믹 배우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하하하.”

맹봉학 씨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삼순이 아버지 역할이었다. 2005년에 방영했던 그 연속극은 시청률이 50퍼센트 가까이 됐다고 하니, 우리 국민들은 다 봤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한다.

“대사가 좋았어요.”

가장 깊이 기억에 남는 대사는 삼순이가 사랑에 지쳐 혼자 소주를 마시면서 상상 속의 아버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한 대사였다.

“미안해, 아부지. (줄임) 끔찍해. 그렇게 겪고 또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내가 너무너무 끔찍해 죽겠어… …. 아주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그때 삼순이 아버지가 한 말이 시청자들을 울렸다.

“삼순아, 아버지는 가슴이 딱딱해져서 죽었잖아.”

맹봉학 씨는 이 사회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을까. 1987년, 거리에는 짱돌과 최루탄이 날아다니고 데모가 한창이었는데 맹봉학 씨는 연극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얼마 뒤 절차상으로나마 직선제 민주주의로 바뀌었는데 자신은 무임승차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밑바닥에 늘 미안함이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뭔가 할 거다’ 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씨앗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발아할 거’라고 했죠. 그럴 때 광우병 소 수입 반대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어요. 어른들이 막았어야 하는 일인데 아이들이 자기 먹을거리 때문에 싸우는 걸 보고, 이번에 안 하면 더 큰 죄의식을 느낄 것 같아 참여하게 된 거예요. 이왕 참여한 거 열심히 해 보자… ….”

맹봉학 씨는 현재 강동촛불, 참여연대, 언론행동모임, 강동중증장애인, 강동청소년공부방, 백혈병 단체, 제주도 다니엘, 동자동사랑방 등 일일이 외우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곳에 후원 회비를 내고 있다. 은평시립병원, 아산병원에서는 18년째 중증 환자들과 함께 사이코드라마를 하면서 자원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참여연대에서 주관한 ‘최저 생계비 하루 체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보다 앞서 그 하루 체험을 하고는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았다”고 허풍을 친 차명진 의원에게 ‘체험’과 ‘삶’도 구분 못하느냐고 쓴소리도 했다.

맹복학 씨가 이렇게 사회에 관심을 두고 촛불 집회까지 나와 경찰에 두 번 연행되면서 현실은 우울해졌다. 영화 섭외가 뚝 그친 것이다. 후회 안 하느냐고 물었다. 그이는 일분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후회했다면 이런 인터뷰 안 하죠.”

맹봉학 씨는 이어 말한다.

“사람이 영원히 권력을 잡을 수 없는 거고, 언젠가는 죽잖아요. 반성하면서 좀 더 착하게 살다 보면 죽을 때 덜 후회하고 죽을 텐데… …. 이명박, 자기는 안 죽나? 당장 2년 뒤에 청문회 하고 그럴 텐데. ‘버티면 전두환처럼 살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 가질 수 있겠죠. 세상이 잘못 됐지. 잘못을 저지른 전직 대통령들을 너무 빨리 사면해 줘서 그래요. 망명을 가게 하든지 종신형을 때리든지 해야 돼요.”

이렇게 용기 있는 연예인은 처음 만났다. 왜 이런 분이 아직까지 결혼을 못하고 있을까. 마음에 있는 분들은 용기를 내서 <작은책>으로 연락하시라. ‘소개팅’도 사양하지 않겠단다. 맹봉학 씨는 갑자기 배가 고프다면서 떡볶이를 사 왔다. <작은책> 일꾼 최규화가 연예인이 사 준 떡볶이는 처음 먹는다며 입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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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해고 노동자 류승택 씨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안건모




류승택 씨는 대한항공 소속 김해공장에서 일하다 2005년 9월 14일 해고됐다. 해고 사유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터넷 언론 기사, 즉 민중의소리에 난 기사를 사내 홈피에 유포했다는 거 하나고, 또 하나는 제 개인 홈피에 회사 문서를 올렸다는 게 이유죠.”

문제가 된 민중의소리 기사는, 2005년 대한항공조종사 노조가 쟁의행위와 관련 준법투쟁을 위해 준비한 리본을, 사측이 ‘절도’한 사실을 보도한 기사이다. 회사는 그것이 회사의 기물이기 때문에 ‘수거해 간 거지 절도가 아니’라고 명예 훼손으로 고발까지 했다. 또 하나는 류 씨의 개인 홈페이지에 ‘대외비입니다’라는 제목의 글, 회사 인사 정책(C-Player, HR Bank 등) 관련 문서를 올렸다는 이유와 개인 홈페이지에 회사로고 무단 사용 및 회사 문서 무단 게재, 위규 사실 시정 상사 지시 불이행 등이다. ‘C-플레이어’는 회사가 ‘3년 동안 가장 일을 못하는 사람을 저 평가자로 분류하는 것이고, 'HR-뱅크'는 대기 발령을 말한다. 인간으로서 모멸감을 받아 스스로 나가게끔 하는 것이다.

“사내 게시판에 보면 조종사는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억지 파업이니 하는 온갖 걸 다 실어 놨거든요 그렇다면 왜 파업을 하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다른 직원들이 조종사노조를 비판하고 조선일보 기사를 퍼올렸듯이 저도 민중의소리 기사를 퍼 올린 거거든요.”

△ 2006년 1월, 단식 투쟁하는 류승택 씨 ⓒ 안건모


류승택 씨는 2005년 10월 5일에 서울로 올라와 해고자 동지회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일인시위를 하면서 법정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류승택 씨는 1심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조정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판사가 정말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무조건 돈을 받고 정리하라는 거예요. 돈은 많이 받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난 못한다 했지요. 왜 심리도 안 해 보고 그렇게 판단하냐고 했지요.”

류승택 씨는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패소했다. 맨 처음 회사가 자신을 해고했던 이유는 2심에서는 아예 다뤄지지도 않았다. 류승택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류승택 씨는 경남 하동 골짜기에서 태어났다. 나무껍질 벗겨 먹고 살 정도로 어려운 할아버지 세대와 같은 삶을 살았다. 한반에 1, 2, 3학년이 같이 있는 분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했다. 중학교 때 신문을 배달하기도 했다. 공고를 졸업하고 1989년도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대한항공에 들어갔다고 부모님들은 기뻐했다.

류승택 씨는 군대 갔다 와서 복직해 2005년에 해고당하기 전까지 정말 평범하게 살았다. 1995년 회사가 3조 2교대라는 근무 제도를, 스윙 제도라는 맞교대 형태로 개악하려고 했다. 부산지부 대의원이나 조합원들의 의견은 전혀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조합원이었던 류승택 씨는 부당한 회사의 행태에 삭발까지 하면서 항의했다.

△ 대한항공 정문에서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주고 있는 류승택 씨 ⓒ 안건모


“제가 좀 앞섰던 거 같아요. 정직 2개월 징계를 당했지요. 그때 이후로 지금껏 이렇게 살아오고 있지만 지금 생각해도 후회는 안 해요. 오히려 빨리 알아야 할 걸 뒤늦게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년이면 해결된다고 믿었다. 아내한테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3년이 넘어서는 지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류승택 씨는 가족들한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싸움은 개인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가 아프고, 어머니는 아직도 새벽에 청소일 나가시는데, 힘들고 안타까운 거는 있지만 제가 어차피 시작한 일이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싸움이기 때문에 그냥 멈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오히려 복직한 뒤에도 노조 민주화 같은 이 사업들은 고스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조조정이 들어오더라도 누군가는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함께 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류승택 씨는, 자본의 탄압도 있지만 어용 노동조합의 행태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본들도 그 썩은 노조를 이용해야 노동자를 쉽게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대한항공 건물 전경 ⓒ 안건모


“단순한 해고자의 복직 문제가 아니라. 대한항공 노동자들이 새롭게 바로 서는 것은 주체가 서야 할 문제도 있지만 어용노조의 썩은 부분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노조가 변하는 계기가 되고 또 세상이 변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우리 안의 적이 가장 무섭다는 말과 통하는 건지도 모른다. 마치 이명박을 찍어 준 사람들처럼 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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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을 굽는 예수' 이적 목사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안건모




민통선에서 공부방을 하는 목사? 밤에는 횟집 주인, 낮에는 횟집에서 독거 노인 밥 주는 목사? 붕어빵을 파는 목사? 들으면 들을 수록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분일까. 12월 11일 5시, 횟집을 찾아갔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불광천 옆 주택가에 자리잡은 조그만 횟집, <이적 시인의 -‘바다가 된 그대에게’ 사량도 세꼬시>라는 이름으로 된 간판이 보였다.

8평 정도 되는 가게에 탁자가 네 개,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책을 보던 이적 목사가 반겨 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적 목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한국의 근본주의 교회를 비판했다.

언제 목사님이 되셨냐고 물었다.

“80년 대에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묘한 이유로’ 쫓겨나게 되죠.”

1980년 2월 무렵, 전두환이 집권하고 계엄 때였다고 한다.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전두환의 안녕과 무궁한 발전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적 목사는 그 조찬기도회가 잘못됐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담임 목사한테 지적을 받았다. 그 길로 이적 목사는 “다시는 교회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고는 전도사 생활을 접었다.
그 뒤 이적 목사는 지방 일간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 그러다가 1980년 10월 느닷없이 삼청교육대로 억울하게 끌려 들어간다.

“산꼭대기 동네에 수돗물이 잘 안 나온다, 공원에 깡패들 득실거려 경찰 단속 손길 아쉽다” 하는 시민들 편을 드는 기사를 좀 썼을 뿐이었다.

이적 목사는 삼청교육대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면서 ‘하나님은 왜 정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가’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이는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붕어빵을 굽고 있는 이적 목사 ⓒ 안건모


그리고 악몽 같은 4주를 보냈다. 풀려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자들은 성적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삼청근로봉사대 6개월 언도(?)를 내린다. “삼청근로봉사대를 갔는데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더라고. 밤이 되면 눈보라 몰아치고 영하 15도 회오리 바람 몰아치는 야밤중에, 팬티만 달랑 입혀 놓고, 연병장에 세워 둬, 거기다가 두 팔 두 다리 벌려 세워 놓고, 그마저도 부족해서 세숫대야에다 물을 퍼 가지고 와 몸에다 물을 뿌리는 거야, 물방울이 탁탁 튐과 동시에 물방울이 몸에 얼어 붙어 와, 그런 살인적 추위 상상도 못해 봤어.”

임근실이라는 사람이 2소대에서 이적 목사가 있던 3소대로 옮겨 왔다. 임근실 씨는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바른 소리를 잘 하던 사람이었다. 전두환 욕도 막 했다. 불침번 서라 하면 “민간인인 내가 왜 불침번을 서냐 ”하며 반항하고 대들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들인 악질 조교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이 친구는 매일 개 맞듯이 맞는 거야. 이 친구 밤마다 불려 나가서 그 겨울에 물고문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 얼굴이 아니야. 나도 같이 물고문을 받았는데 조교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한테 ‘당신은 글쟁이라는 걸 안다. 여기서 개죽음 당하지 말고 살아나가서 글을 써서 자기 죽음과 삼청을 폭로해 달라’ 그러는 거야.”

그날 임근실 씨는 쏟아지는 몽둥이 세례를 견딜 수 없어 개집 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러자 조교들은 개집 구멍을 하늘로 올려놓고 찬 물을 퍼부어 댔다. 임근실 씨는 개집 안에서 요동을 쳤다. 그 뒷날 임근실 씨는 시체로 들려 나갔다.

이적 목사는 꼭 살아 나가서 삼청교육대의 만행과 그이의 죽음을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은 ‘사회보호법’을 만들어 이적 목사를 군 감호소로, 또 청송 감호소로 이감을 보내면서 삼청 최장기수로 만들었다. 이적 목사는 84년 4월 3년여 만에 이른바 모범수로 가출옥을 해 살아나오게 된다.
하지만 바깥도 감옥이었다. 사기꾼, 빨갱이, 깡패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살아야 했다. 이적 목사는 임근실의 유언을 되새기면서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삼청폭로 미수 사건인 양곡상 침투사건으로 공무원자격 사칭, 공갈 등의 파렴치 죄로 조작되어 다시 8개월, 10개월, 두 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 이적 목사가 운영하는 횟집 ⓒ 안건모


이적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인 민족문학에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는 10편의 연작시를 발표하고 뒤이어 11월 삼청 실록수기《삼청교육대 정화 작전》(도서출판 전예원)을 출간한다. 국민들은 독재정권의 잔혹성에 몸서리를 쳤다. 심지어 군사정권에 아부했던 조중동까지 ‘삼청교육대 사망자 사인 의혹 많다’, ‘생체실험의 수기다’, ‘한국판 수용소 군도의 인권 유린과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 보내면서 군사정권을 비판했다.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은 그이를 만난 뒤 당내에 ‘삼청교육대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군사정권을 압박한다.

이적 목사는 김대중을 대통령 만드는 데도 한몫을 했다. 대변인, 지역선거대책위원장, 중앙당 부위원장, 선거 연설원을 지내며 김대중을 도왔다. 결국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 길이 보장될 수도 있었다.

“김대중 정권 때 바다살리기 국민운동본부라는 관변단체가 하나 생겼어, 월급은 없었는데 거기 본부장을 맡으라 그러더라고.”

취임식을 하는 날 친인척한테 받은 단체 후원금 때문에 문제 아닌 문제가 생겼다. 법원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싸우면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적은 민통선에 자신이 건립했던 통일 문학관으로 머리도 식힐 겸 잠시 글 쓰러 들어갔다가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 먹는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통선에 들어간 날 느닷없이 청빈한 참예수를 떠올렸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때 내가 신학교 출신이라는 게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거야. 기독교가 망하기만 바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들어가서 그들과 싸우며 참예수의 변혁 운동을 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니냐. 내가 욕했던 거는 여의도 ㅈ목사와 같은, 한국의 잘못된 기독교 지도자들이 미웠지,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니냐. 귀신 예수가 아닌, 평화와 사랑의 예수, 그 거룩한 삶을 본받아서 실천해 나간다면 나야말로 참예수의 그림자라도 되는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자, 이렇게 판단한 거지.”

△ 민통선공부방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사랑의 붕어빵 봉사회 ⓒ 안건모


이적 목사는 신학대를 편입했다.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 민통선 마을에 빈민 운동을 자원한다. 그리고 알콜중독자 자녀를 위한 아동공동체와 민통선 공부방을 만들었다. 2002년 11월이었다. 그리고 마을회관을 고쳐 민통선 평화교회도 설립했다. 신자는 해병대 군인들이었다. 헌금이 없으니 아동공동체와 공부방 운영하기가 벅찼다. 무료급식과 아동장학사업, 보육사업, 차상위계층자녀발굴보호사업, 체험학습 등 많은 사업을 벌려 놓았는데 후원금 들어오는 곳은 적었다. 그래서 이적 목사는 공동체 운영하기 위해 불광천에 횟집을 차렸다.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도 공동체와 공부방을 운영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더구나 불광천 근처에 사는 독거 노인들에게까지 무료 식사를 대접하는 독거노인급식소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그이의 목회를 좋아하는 서울 교인들과 사랑의 붕어빵 봉사회를 만들어 가게 앞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교인들한테 십일조 헌금 받아서 사랑을 실천했나? 그분 스스로 대중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전도하며 평화를 외치며 박애와 사랑을 실천했단 말이야, 목사의 삶이 예수의 삶처럼 그렇게 돼야 하는 거 아녀? 그래서 내가 만분의 일이라도 그분 흉내라도 내 보려고 이렇게 사는 거지.”

그렇구나. 예수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구나. 한국의 기독교를 싫어하면서 예수가 어디 있나 하고 생각하던 필자는 이적 목사를 보고 예수는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적 목사가 이번에 운영비 마련을 위해 다시 책을 낸다. 《민통선 예수》라는 책이 현재 인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땅에 사는 민중들을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 이명박 장로를 비롯해 그 하수인들, 부디 그 책을 읽고 회개를 좀 했으면 좋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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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대표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안건모




지난 6월 10일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가 하얗고 양복을 반듯하게 차려 입은 사람이었다. 그이가 들고 있는 피켓에는 ‘한겨레 구독, 조중동 박멸’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이는 표명렬 씨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정훈감을 역임한 표명렬 예비역 장군은 군 개혁을 주장하는 별난 예비역 장군이다.

9월 4일 용산역 근처에 있는 평화재향군인회를 찾았다. 현 ‘재향군인회’에 반대해 2005년에 만든 단체인데 표명렬 씨는 이 단체 상임대표다. 현 재향군인회처럼 상투적인 한미동맹 강화와, 북녘을 불신하고 공격의 대상으로 보는 단체가 아닌 자주국방과 평화통일을 위하여 북녘과 대화와 협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민주적인 군대 문화를 정착하는 데 주요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리나라 군대는 극우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이 그 원인이다. 그런 군대에서 장군 출신인 표명렬 씨가 군 개혁을 외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또 작전통수권을 되돌려 받자고 주장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 6월 10일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표명렬 예비역 장군 ⓒ 안건모


표명렬 씨 고향은 전남 완도. 어릴 때는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았고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 6.25전쟁이 터졌으니 얼마나 어려운 시기를 보냈는지 알 수 있다. 중학교를 겨우 나온 뒤 돈이 없어서 1년 쉬고 머슴살이와 가정교사를 하면서 광주고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표명렬 씨는 육군사관학교 18기로 입학했다. 학비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그곳은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표명렬 씨는 간부 생도로서 원칙과 정의를 앞세워 한 치 어긋남이 없이 간부 교육을 받았다. 모두들 지독하다고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하지만 표명렬 씨는 육군사관학교가 이 나라를 이끄는 단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우리 국군이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를 거쳐 오면서 친일 세력들에게 장악당해 비뚤어진 군대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울분을 토한다.

“민족 교육을 일부러 안 시킨 거야. 민족의식 하면 빨갱이 소리를 들었으니까. 이승만이 권력 기반이 없으니까 물리적인 폭력의 힘을 가진 경찰과 군대를 자기 사람 만들어야 되겠는데 개처럼 말 잘 들을 놈들, 친일을 한 약점 있는 놈들 살려준 거야. 우리 군대를 일본 군대 출신들이 장악한 거야. 21대 육군참모총장까지 일본 육사 출신이었으니까 그 군대가 제대로 되겠어요?”

표명렬 씨는 맹호부대 소총 부중대장으로 월남전에 다녀온 뒤 뜻한 바가 있어 정훈병과로 옮겼다. 그이를 아끼는 사람들이 말렸지만 우리 군대의 가치관과 정통성을 찾고 군대를 개혁하려는 그이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1973년에는 대만 정치심리전학교에 유학을 갔다. 그곳 대만 군대에 있던, 이른바 권력기관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 겸손하고 사려가 깊고 온유한 성품을 지닌 것을 보고 또 한번 크게 깨달았다.


△ 평화재향군인회 사무실에서 이야기 중인 표명렬 예비역 장군 ⓒ 안건모


군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때 월권으로 부대원들에게 정훈 교육을 시키라는 육군본부 보안 부대장에게 “야, 이 새끼야! 육군의 정신교육 책임자는 정훈감인 나야! 너는 보안대 일이나 잘해!”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광주항쟁 당시에는 군대가 어떻게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을 쏠 수 있느냐고 바른말을 한 죄로 강원도 홍천 골짜기에 있는 부대로 귀양 아닌 귀양살이까지 했다.
표명렬 씨는 1987년 군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군 개혁을 위해 평화재향군인회를 만들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 첫째, 민족ㆍ민주 군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군대, 그래서 스스로 움직이는 군대, 리더쉽을 기르는 군대를 만드는 거예요. 일본은 침략을 위해서, 미국은 석유 때문에 이라크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지만 우리는 방어를 위한 전쟁이에요. 방어 전쟁 사상을 정립해 놓은 건 재향군인회밖에 없어요.”

이렇게 자신감을 드러내는 표명렬 예비역 장군은, 아직까지 냉전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수구 세력들이 안타깝다. 또 ‘우리 민족이 화해와 평화의 길에 들어서는데 사사건건 발목을 잡으려는 일부 언론들의 훼방이 이제는 제발 그쳤으면’ 하고 바란다.


△ 표명렬(오른쪽) 예비역 장군과 최사묵(왼쪽) 평화재향군인회 공동대표 ⓒ 안건모


표명렬 씨는 우리 국군의 시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다”하고 잘라 말한다. 또한 육군사관학교의 전신도 ‘화랑의 후예’가 아니라 일제시대 때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라고 주장한다. 광복의 역사를 싸그리 부정하고 건국 60년이라고 우기는 이명박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듯 표명렬 씨 열변은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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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진보의 길을 찾는 진재연 씨
   안건모 글 · 사진


 

  올해 나이 서른세 살이 된 진재연 씨는 한탄강 근처 전곡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고등학교 때 전교조 선생님을 만나 영향을 받은 뒤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등 평범했던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중동에서 흔히 말하는, 배후인 전교조 선생님들은 늘 이렇게 평범한 아이들의 삶을 삐딱한(?) 길로 이끈다. 자기만 위해 사는 삶이 아니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말이다.
  진재연 씨는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자연스레 야학 동아리를 찾았다. 도원동 철거민 투쟁 현장에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때는 1997년 노동자대투쟁 때였다. 5월 1일 노동절 때부터 집회에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최류탄이 터지는 매캐한 길에서 경찰과 맞서 싸울 때 무서우면서도 짜릿했고 희열을 느꼈다. 진재연 씨는 그렇게 자연스레 사회에 대해서 배웠다. 졸업을 한 뒤 진재연 씨는 지하철 철도 용역 노동조합에서 비정규직 조직 활동가로 일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8개월 정도 일하고 나와 2004년 1월부터 사회진보연대라는 단체에서 상근을 한다.

△ 2008년 7월 10일 인터뷰 모습

  진재연 씨가 살아온 서른세 해 짧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2006년 1월부터 평택 대추리 지킴이로 들어가 살던 때부터였다. 그 당시 대추리는 전쟁 아닌 전쟁 중이었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평택을 주한미군의 중심 기지로 합의하고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  74만 평을 강제로 수용했다. 주민 100여 명은 강제 수용을 거부하며 그때까지 버텨오고 있었다. 여기에 평택 범대위를 비롯한 시민 사회단체와 학생, 노동자들이 그 대추리를 평화마을을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을 때였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남들은 무서워서 집회 한 번 참석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진재연 씨는 평택 ‘지킴이’로 가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대추리는 언론에서 늘 봐서 알고 있었어요. 폭력적인 진압이 있을 거라 말들이 많았어요. 그건 무섭지 않았는데 엄마한테 내가 평택 가서 산다고 했는데 그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엄마는 그곳이 어떤지 모르는 거죠. 그래서 평택을 들어갔는데 그곳의 삶은 제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의미가 있었어요”
  진재연 씨는 그곳에서 대추초등학교 안에 있던 도서관 관장 일을 맡는다. 아이들과 같이 책읽기 모임도 하고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 그곳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인터뷰해 한겨레 21에 연재를 하기도 했다. 2006년 5월 4일 노무현 정부는 군과 경찰을 동원해 강제로 철거를 하기 시작했다.
  “5월 4일 아이들 운동회 날이었어요. 아이들이 학교는 당연히 못 갔죠. 도서관이 초등학교 안에 있었는데 경찰이 대추초등학교를 무너뜨리면서 창문으로 포대 자루에 책을 막 담아서 밖으로 던질 때 경찰하고 싸우면서 울기만 했어요.”
  정부는 군과 경찰 병력 1만 5천 명을 투입해 마을을 강제로 철거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은 항의하던 시민들과 학생들을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짓밟으며 500여 명을 연행했고, 법원은 16명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다친 사람도 많았다. 강제 철거로 주민들은 결국 2007년 3월 29일부터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온동네가 눈물바다였어요. 이삿짐 싸면서 울고……. 3월 24일 935일째 마지막 촛불 집회 때는 사회자가 눈물을 터뜨렸어요. 그때 주민들이 전부 울었어요.”
  진재연 씨는 그때 생각이 나는지 목이 메어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2007년 4월, 진재연 씨는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진재연 씨는 ‘이랜드일반노조 월드컵분회지원대책위원회’로부터 이랜드 노동자들이 투쟁했던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받고 김순천 씨 외 12명과 인터뷰 형식으로 책을 내는데 함께한다. 그것이 지난 6월 나온《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후마니타스)라는 책이다.

△ 2008년 7월 11일 이랜드 상암점에서 열린 이랜드 일반노조 문화제에서 파업기금을 보태기 위해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책을 팔고 있는 진재연 씨(오른쪽)

  살아온 삶이 짧아 별로 할 말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진재연 씨. 노조활동가로서, 사회진보연대 회원으로서, 평택 지킴이로서 살았던 짧은 삶이었지만 사회 진보를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작은 발걸음이 모여 이 사회가 바뀌고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진재연 씨는 여전히 그 길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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