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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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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코로나19! 에잇! 코로나18!

신혜진/ 시간제 댄스 강사

 

  

나는 방송 댄스, 줌바 댄스, 키즈 댄스 등등 수업을 진행하는 시간제 강사이다.

오전 수업 한 곳만 더 뚫었으면 좋겠다.’ 하는 찰나에 설날 즈음 아파트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줌바 댄스 수업을 맡게 되었다. 새해부터 이게 웬일이냐며 올해 운수가 좋음을 느끼는 하루하루였다. 아직 신규 수업이라 회원은 별로 없었지만 서서히 늘려 가리라 열정을 다해 열심히 했다. 하지만 2월 초부터 기존에 하던 수업들이 하나하나 중단이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그저 손 잘 씻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면 마스크를 꼭 쓰자 뿐이었다. 코로나19를 그냥 무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점점 확진자, 격리자 심지어 사망자가 늘어 가면서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수업을 진행하는 센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종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따른 주민자치 프로그램 수강료 일시적 환불 규정을 안내 드립니다라는 문자로 시작해 하루 사이에 주민센터, 문화센터가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천시, 구에 해당하는 곳들이다. 그러다 또 며칠 뒤 개인사업자인 피트니스센터도 영업을 중지했다.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신천지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수업이 중단되었다. 솔직히 신천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종교에 있어서 누구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조금 신경이 쏠렸다. 보는 뉴스마다 신천지 이야기가 나오고 단체 카톡에는 코로나 확진자 그리고 신천지 이야기뿐이었다. 신천지 31번 확진자가 나온 후로는 위에서 지령이 내려와 그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반 교회에 가서 코로나를 전파하라, 그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아무 집이나 가서 구하기 힘든 마스크를 무료 나눔을 한다 하고 바이러스를 옮겨라 등등 너무 소름이 끼쳤다. 물론 그게 실화라면 말이다. 정말 재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또 사건이 터졌다. 천안 줌바 강사가 확진자로 나온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포인트는 줌바 강사라는 것이다. 그냥 댄스 강사라고 해도 되는 것을 줌바 강사라고 기사가 뜬 것이다.


그래서 줌바 강사들 모임에도 비상이 걸렸다. 회원들은 천안 모임에 갔었냐 물어보기 일쑤였다. 천안에서 교육을 받았던 강사들의 명단을 보건당국에 넘기고 모두 검사를 받았단다. 확진자가 많은 대구 쪽 강사들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그 외 모든 강사들은 음성으로 나왔단다.

기자들은 기사를 올려 이슈화를 시켜야 하므로 자꾸 줌바를 엮어 글을 올리는 것 같다. 그래서 다수의 선생님들이 방송사에 항의 전화를 했다. 완전히 다 고쳐지지는 않았지만 줌바 강사에서 에어로빅 강사, 댄스 강사라고 바꾼 곳이 있었다. 아니 그런데 왜 또 에어로빅이냐! 한숨만 나온다. 확진자 강사도 많이 힘들 것이다. 너무 속상하다.

코로나19 때문에 가장 큰 일은 백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시간제 강사들은 지금 모두 강제 백수가 되었다. 우리들은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파트타임 운동 강사들도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으면 합니다.”

주민자치센터 외 공공 기관에서 수업하는 모든 강사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거 없이 서로 공유를 하며 동의를 받아 냈다. 현재는 동의자가 만 명이 훌쩍 넘어 청원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인천평생학습강사회에서도 인천시청에 휴업수당 지급요청 면담도 신청했다고 한다.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한다. 단기 알바라도 하고 싶지만 요즘 상황이 그런지라 선뜻 잡히는 곳이 없다. 내가 벌어 쓰던 용돈이 있기에 더 간절하다. 전에 일했던 피자집에 전화를 해 볼까 한다.

수업을 못 하니 몸도 굳는다. 운동을 하고 싶다. 춤을 추고 싶다. 며칠 전에는 아직 수업을 진행하는 주변 선생님 수업에 가서 돈을 내고 하루 청강을 하기도 했다. 땀도 많이 안 나고 돈이 아까웠다. 내가 수업을 하면 돈도 벌고 더욱 상쾌할 텐데 말이다. 살이 찐다. 움직임이 덜 하니 진짜 뱃살이 늘어난다. 입이 늘 심심하다. 몸도 늘어진다. 방학 중인 학생처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매일 출근하는 남편에게 괜히 미안하다. 눈치가 보여서 뭐 하나라도 더 챙겨 주게 된다.

문득 생각이 난다. 매일 아침 반가운 회원들이 있는 센터에 가서 맛있는 모닝 율무차 한 잔. 힘들다고 하면서 수업 시간 50분을 잘 버텨 주던 그들. 서로의 모습을 보며 깔깔대고. 수업이 끝나면 점심 먹고 차 마시며 수다 떨자는 그들. 생각이 난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듯 평범했던 일상들이 지금은 특별한 일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리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19, 어서 없어져라.

에잇! 코로나 18! 꺼져

posted by 작은책
2020. 3. 25. 15:49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박소영



발행인의 글

코로나19 확산 속도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지난 314, ‘신규 확진자가 107, 완치된 사람들이 204이라는 뉴스가 나옵니다. 완치자가 확진자 수를 넘어서 조금 안정이 되는 것 아니냐는 희망이 보이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 정부의 감염병 대처 방식은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잘 하는 편입니다. 신천지 신도 일부를 제외한 성숙한 시민들도 외출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구 언론은 코로나19 때문에 대구나 인천 송도가 유령도시가 돼 가고 있다는 등 과장된 뉴스를 쏟아내며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번 <작은책> 4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에는 김용심 작가가 조선 시대에 돌던 갖가지 전염병, 역병에 관련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흉년과 역병이 한참이던 때 연산군은 구휼미를 내줘도 모자랄 쌀을 왕실에 바치라고 하는 등 고통받는 백성들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지 3년 만에 역질에 걸려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 역사를 보면서 수구보수당 황교안 대표나 심재철 원내대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코로나19 대책 긴급 추경 예산을 가지고 현금 살포 포퓰리즘이라는 등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딴죽을 걸고 있기 때문일까요?

415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코로나19 소식에 묻혀 후보가 누군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어떻게 되는지, 깜깜이 선거가 되지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못된 정치가들은 코로나19 못지않게 위험합니다. 누가 정말 나라를 위하고, 서민을 위하는 국회의원인지 잘 뽑아야 합니다.

 

2020317

발행인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조선왕조실록의 전염병과 코로나19 김용심

12 발행인의 글

13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4 코로나19! 에잇! 코로나18! 신혜진

18 예약 말고 즉시콜? 최숙하

22 누가 쪼잔한 건지 모르겠다 이근제

26 인도 델리 버스의 커튼 신혜정

31 부억때기 송필경

34 뱃살의 원흉 이동수와 최해옥

40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코로나19 집밥 윤혜신

46 살아온 이야기

4, 누구나 상처는 있다 김수련

52 두꺼비 손글씨 김상화

53 시 읽고 감상하기 박영수

56 교장 일기

늦고 싶어 늦는 아이는 없다 최관의

61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코로나19 덕분입니다 권해진

 

일터 이야기

65 일터 탐방_ 서울대병원

병원의 공공성을 높이는 방법 명숙

71 일터에서 온 소식

번드르르한 방송사, 속은 썩었다 김기영

77 작은책 법률 상담소

실업급여, 나도 받을 수 있다 양성우

 

작은책이 만난 사람_ 문지영

81 분리수거하면 세상이 바뀌나? 지금은유지향

 

96 이동슈의 생활 만화 _ 삼삼한 삶

 

세상 보기

98 옛 그림 속 여성들

이토록 장엄한 아름다움 이종수

104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거리두기, 최선입니까? 고태경

110 어린이 해방과 평화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올려 보아 주시오 이주영

116 생태 이야기

올해 4월은 잔인할까? 박병상

122 존버 씨의 시간들

성과 장치는 죽음조차 개인화한다 김영선

128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조선의 타임캡슐, 백자 박찬희

134 독립영화 이야기

가정사에 스며 있는 베트남전쟁 류미례

140 책 읽고 딴 생각

물신 전체주의 사회 변정수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19월호

세상보기

인물 바로 보기

 

이승만은 누구인가

이이화/ 역사학자

 

 

 

올해 광복절 66주년을 맞이해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새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이승만의 공과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독립운동가 유족들과 한국전쟁 피해자 유족,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자들이 이 방송 계획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면서 한국방송공사 앞에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승만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또는 정부 수립의 첫째 공로자로 추앙하면서, 독재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유린한 그를 미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정 선거에 항거해 일어난 419혁명을 부정하면서 공영방송이 이런 일을 벌이는 의도가 어디에 있나?

그동안 이승만의 평가는 거의 부정적으로 흘러왔다. 하지만 일부 세력은 그를 옹호하면서 그를 국부(國父)로 받드는 의식을 보여 주었고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주장도 펴 왔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이승만의 행적을 간단하게 더듬어 보기로 하자. 이승만의 생애는 대체로 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겠다.

첫 시기는 청년 시절이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 사는 몰락한 전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경선은 양녕대군 후손이라는 이름을 달고 서울로 와서 전주 이씨 문중을 기웃거리면서 낙백의 생활을 했고 이승만도 그런 연줄로 전주 이씨들이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이승만은 20세 때 배재학당에 입학해 영어와 성경 공부를 하고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청년 시절 이상재, 서재필 등이 벌인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 참여해 열렬히 자주 운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황제 폐위를 주동하는 세력과 결합한 탓으로 체포되어 종신형 또는 사형 언도를 받았다. 마침내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둘째 시기는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외교운동을 벌이던 시절이다. 그는 미국으로 가서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학위를 그는 별처럼 평생 달고 다녔다. 그 뒤 미국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벌였는데 열렬한 미국 추종자가 되었다. 그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교 전문가라는 것, 영어를 잘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것, 언변이 좋고 미국 동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따위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재정 압박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자 안전지대인 미국으로 돌아가서 구미위원부 대표를 맡았다.

마지막으로는 해방이 된 뒤 고국으로 돌아와서 정부 수립운동을 벌이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 벌인 정치 활동기이다. 그는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해 끝내 이를 실현시키고 반공정부를 수립한 뒤 불법으로 3선 개헌을 단행하고 이어 315부정선거를 하다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재자로 군림했고 반공의 화신이라 불릴 정도로 공산당 박멸을 외치고 끊임없이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그리고 친일파를 등장시켜 무수히 독립지사를 탄압하고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 나는 역사학자로서 위에서 밝힌 이승만의 삶과 행동을 평가해 보기로 한다. 그의 청년 시절은 한학을 배운 소년이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고 급진적 엘리트 청년으로 성장한 모습일 것이다. 그는 충군(忠君)이라는 왕조 의식에서 벗어나 서구의 입헌군주제 또는 대통령 중심의 공화제에 눈을 떴다. 그리해 청나라에 맞서 자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행동 의식을 보였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미국에서 유럽 사조와 제도를 배우면서 장년 시절을 보내고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극단적 인 이론을 냈다. 일본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한국을 미국의 위임 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고, 무력 투쟁 노선을 비판하면서 박용만 등이 벌인 군사 양성을 방해하기도 했다. 또한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독립 자금을 받으면서 외교관이란 이름으로 호텔에 거처하는 따위 호화 생활을 했으며, 전주 이씨 왕자라는 이미지를 조작하여 품위를 유지하려는 천박한 행동을 보였다. 상하이를 떠난 뒤 위험 지역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아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늘 손가락이 마비된 것은 일제의 고문 탓이라고 말했는데 한 번도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신채호는 이승만을 두고 이완용이나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비난했는데 정작 신채호는 일제에 잡혀 감옥에서 옥사했던 것이다. 또 국제연합이 조직될 무렵 그는 철저하게 공산주의자들과 대화를 거부하면서 한국 독립에 대한 그쪽의 협조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해방 공간에서 그의 행동 노선은 타협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반공을 표방한 단독 정부 수립에만 매달렸다. 그리해 미국의 환심을 사서 정권의 수장이 되었다. 단독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친일파 출신의 경찰 군인 판검사를 끌어들여 정권의 하수인으로 부려먹었다. 그런 과정에서 온갖 불법 탈법의 독재 수법을 쓰면서 반대파 국회의원을 연금하는 따위로 민주주의 절차를 왜곡시켰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 한강을 폭파하고 남쪽으로 몰래 도망치면서 군사작전권을 미군에게 넘겨 자주 국가의 면모를 잃게 했으며, 휴전을 반대하면서 공허한 북진 통일만을 외쳐 냉전 체제를 공고하게 했다. 그리해 남북 관계는 극단적 대결로 치달았다.

419이후 이승만은 학생들이 반대하면…… 또는 국민이 반대하면……이라는 언사를 늘어놓으면서 마치 민주주의 왜곡이 자신의 책임이 아닌 듯이 말하고 하야했다. 그러고 나서 밤을 틈타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진정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다면 이화장에서 반성의 나날을 보내면서 참회의 회고록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의 인간성은 허위와 사술로 점철되어 있으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음모꾼의 모습을 보였다. 또 그의 통치술은 철저하게 독선적이고 전제적인 수법을 구사해서 독재 체제를 구축해 정부 수립 초기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미국의 국부인 조지 워싱턴이나 중화민국의 국부인 손문의 행적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충분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기초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지만 그를 반공의 화신이란 이름으로 국부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공로자가 아니라 오히려 통일을 방해하는 인물로 앞으로 기억해야 하고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승만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의도는 새 정권의 창출을 앞두고 반통일적 보수 세력이나 친일파 잔존 세력을 결집시켜 통일 지향의 민주 세력을 꺾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런 의도를 냉철하게 간파하면서 이승만 띄우기의 음모를 직시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은 아직도 이승만의 실체를 잘 몰라 휩쓸리기 쉬울 것이다. 바른 역사 인식은 냉철한 비판 의식이 따라야 한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094월호

쉬엄쉬엄 가요

추억따라 역사따라

 

짱돌의 역사

박준성/ 작은책 편집위원, 역사학자

 

 

 

나뭇가지에 잎눈 꽃눈이 터질 듯 커졌다. 빨리 자란 냉이는 벌써 하얀 꽃이 피었다. 둘째 아이 학교 가는 길가 밭 군데군데 퇴비 푸대가 늘어져 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농사를 좀 거들어 보았다고 봄이 되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학부모들이 학교 학습장 귀퉁이를 얻어 텃밭 농사를 짓는 데 끼었다. 산자락을 일군 땅이라 잔돌이 많다. 어렸을 때 생각이 나서 산 쪽으로 집어 던져 보려고 서너 개를 집어 들었다. ‘도룡농이나 겨울잠에서 깨어 나오는 개구리 맞을라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새싹이 맞을까 미안해서 밭둑으로 옮겼다.

지금도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는 시골 우리 집은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있다. 뒷문을 열면 바로 산으로 올라갈 수 있다. 집 둘레 밭은 오랫 동안 농사를 지어온 땅이라고는 하지만 때마다 잔돌을 주어 내도 계속 나왔다. 아버지는 그 돌을 가지고 밭 건너편 산으로 멀리 던지기 시합을 시켰다. 돌팔매질 놀이와 돌 치우는 일을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 잔돌 던지며 배웠던 실력이 체력장 멀리 던지기를 할 때 제대로 드러났다.

체력장을 끝으로 돌팔매질을 써 먹을 일이 별로 없을 줄 알았다. 시대가 짱돌을 들게 만들었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은 19876월항쟁 이후 어떤 모임에서든 나를 소개할 때마다 퇴계로 거리에서 짱돌 들고 앞뒤로 오가던 내 모습을 이야기하셨다. 열심히 싸웠던 선수들 보기가 민망스러워 낯이 뜨거웠다.

1986년인가 1985년이었던가. 규장각에서 조교를 하고 있을 때다. 퇴근을 하는데 교문 쪽에 최루탄 가스가 자욱하다. 앞에서 조그만 여학생 둘이 작은 손으로 보도블록을 열심히 깨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안쓰러웠다. 마침 농구선수처럼 키가 장대 같은 남학생들이 옆으로 지나가다 손가락질을 하며 낄낄거렸다. 눈앞에 불이 확 붙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은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노태우보다 그 남학생들이 더 미웠다. 땅바닥에다 패대기를 치고 싶었다. 국립대학 조교는 공무원 신분이라 화는 나도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정신없이 보도블록을 깨었다. 손이 얼얼해서 며칠 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뒤에서 보도블록을 깨서 앞으로 나르면 용감한 선수들이 앞에서 던졌다. 창원에서 강의를 하다가 최루탄을 쏘아 대도 30미터 앞에까지 다가가 물러서지 않고 던지는 선수들이 있었지요 했다. 마침 <작은책>법보다 사람을 연재하던 박훈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30미터가 아니고 5미터요!”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짱돌을 던지다 보면 우리 편 뒤통수 맞히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앞에서 싸우던 선수들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어정쩡하게라도 서 있는 사람들이 보여야 힘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6월항쟁 때 한편에서 지식인으로서 역사학자로서 이 상황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전망을 모색하여 알리는 것이 우리 몫이니 어쩌고 할 때 거리에 나가 짱돌을 들어야 한다고 맞섰다. 목소리는 컸어도 뜻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될수록 현장 가까이 가서 구경해야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촛불항쟁 때 밤을 새고 명박산성에 깃발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명박산성 가까이 있던 시위대 속에서 뒤를 보면서 놀러 왔나. 놀려면 놀이터에 가서 놀든지, 씨발 하는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앞쪽으로 다가오지 않고 뒤에서 노래를 부르고, 영상물을 보고, 모여 앉아 토론하는 무리가 못마땅했나 보다. 앞쪽에 있다고 해도 깃발 들고 나서는 사람 있고, 전경차에 밧줄 걸고 당기는 사람 있고, 나처럼 사진 찍는다고 밧줄 한 번 당기지 않은 사람도 있고, 밧줄 당기는 사람 등 밀어 주는 사람도 있고, 목소리로 응원하는 사람도 있듯이, 뒤쪽에서 갖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참가하지 않는다면 앞에 있다고 힘이 날까? 강의도 버릇이 된다고 한마디 해주고 싶은 걸 참았다.

시간이 지나 6월항쟁 때 이이화 선생님 비슷한 나이가 되고 보니 선생님이 하고 싶었던 말을 짐작할 수 있겠다. 22년 전 일이니까 내가 30대 초반, 선생님이 50대 초반이었다. 이이화 선생님은 짱돌은 들지는 않았어도 빠짐없이 6월항쟁 거리에 나섰고, 깨진 보도블록 조각을 시위대 쪽으로 밀어 넣어 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런 말을 하면 남들 앞에서 자랑하는 것 같으니까 나를 만났다는 말로 대신했던 것 아닐까. 제 말이 맞지 않으냐고 여쭤 보고 싶다가도 그냥 지나간다. 그런 것까지 확인하다 보면 세상사 재미가 떨어지지 않겠나.

6월항쟁 때는 보도블록을 깨서 짱돌을 만들어 썼고, 촛불항쟁 때는 짱돌 대신 촛불을 들었다면, 1960‘4월혁명시위대가 들었던 짱돌은 진짜 돌이었다. 4월혁명 때 경무대로 향하는 보도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짱돌에 총으로 대응하였다. 경무대 쪽에서만 21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4월혁명의 직접 계기가 된 315부정 선거 반대 시위를 공산당의 배후 조종에 의한 좌익 폭동으로 몰아갔고, 심지어는 시위대가 던진 돌을 북괴에서 가져온 돌이라는 기발한보고서를 작성했다.

짱돌은 오랫동안 민중의 무기였고 놀잇감이었다. 마을 어귀나 고개 마루에 있는 성황당가에는 돌무더기가 있다. 그런 곳은 초기 부족국가 시대나 통일신라 하대 호족이 곳곳에서 세력을 떨칠 때 방어하기 요긴한 길목이었다. 그냥 걷고 넘기도 힘든데 돌 가져다 쌓아 두라고 하면 모두들 입이 댓 발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돌을 던지며 치성을 드리면 부귀다남하고 무병장수한다니까 오갈 때마다 하나씩 가져다 던진 돌들이 쌓여 돌무더기가 되었다. 그렇게 쌓은 돌멩이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무기가 되었다. 사람 손때를 타야 던지기도 좋다.

홍명희가 쓴 소설 임꺽정에 돌팔매질하는 재주가 귀신 같은 석전군(石戰軍) 배돌석이가 나온다. 돌멩이로 호랑이를 때려잡기 전 배돌석이가 며칠이나 돌멩이를 던져 가며 길을 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배돌석이는 소설 쓰느라 꾸며 낸 인물만은 아니었다. 돌팔매질 잘하는 고수들은 마을과 마을 사이에 석전놀이를 할 때 영웅이었다. ‘임진왜란때는 그런 평민들로 구성된 짱돌부대가 있었고, 1894년 농민전쟁 때도 돌팔매질 잘하는 농민들을 따로 모아 만든 부대가 있었다.

짱돌에 담긴 역사와 전통은 오래되었고 책으로 써도 될 만큼 푸짐하다. 지배층이 칼과 총으로 가로막아 온 역사보다는 민중이 짱돌로 만들어 온 길이 제대로 된 역사의 길이었다. 그 길을 일이관지하며 걷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비록 역사의 장면마다 이름 석 자 뚜렷하게 남기지 못했으나 제 길을 버리지 않고 걸어온 분들이 존경스럽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2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북상댁 할매가 돌아가셨습니다

김훈규 / 거창 농부


 

북상댁 할매가 돌아가셨다

몇 년을 병원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할매 수십 년 농민 데모판을 따라나섰던 할매다

여성 농민들 행사나 데모하러 가도 착실히 참석했던 할매다

농민회 하는 자식 도와주는 거는 이것밖에 없다며 자식보다 더 열심히 데모하러 다닌 할매다

자식이 데모 못 가면 자식 대신 해서라도 참석하신 할매다

예비군 훈련 대신 참석했다는 노모 이야기는 많이 들어 봤어도 자식 대신 데모하러 가는 할매는 처음 봤다

그 할매가 북상댁 할매다

 

한칠레 FTA 싸울 때 1년에 서울을 100번도 더 오르락거릴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국회의원 사무실 점거 농성, 단식 농성 제일 많을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농민회 제일 살판나게 잘 돌아갈 때 제일 신명나게 싸울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북상댁 할매는 그럴 때마다 회원들 만날 때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많이 도와주소. 우리 아들.

단디 하소. 단디 하소. 자식 같은 농민회 회원들아, 단디 하소.”

야무치게도 당부를 하셨다

회원도 간부도 아닌 할매는 세상 돌아가는 처지를 더 빤히 알고 있었다

농민들이 농사 포기하고 자꾸 서울로 올라가는 이유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북상댁 할매 앓아눕고 나서 그 농민회장도 바깥출입을 끊었다

몇 년이 지나서

아직도 누워 계시려니 했는데

어제 세상을 버렸다 연락이 왔다

 

문상객도 파하고 상주도 한잔 술에 노곤한 야심한 시간에 장례식장을 찾았다

우리 엄마… 우리 엄마… 내 총각 때부터 자식 도와주는 짓이라고 데모하는 데 다 따라나서 준 우리 엄마. 도와주는 것보단 자식 걱정이 앞서 내보다 데모 더 많이 다닌 우리 엄마. 한미 FTA 싸움도 내보다 더 할 말이 많았던 우리 엄마. 그런 우리 엄마가 이제는 없소.”

 

소주잔을 사이에 두고

옛날 농민회장이 지금 농민회장 앞에서 반술 취한 넋두리를 한다

지금 농민회장은 옛날 농민회장 앞에서 고개만 끄덕인다

 

버스 타고 지독히도 서울을 오르락거리던 할매 할배들이

문디 같은 세상!”

외마디 부르짖고는 그냥… 자… 세상을 버린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농사일이 없어서

꿈적거릴 일이 없어서

그냥 방 안에서

보일러 끄고 전기장판만 켜고 자다가

세상을 버리는 할배 할매들이 너무 많다

기껏해야 대통령하고 비슷한 나이인데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