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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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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9. 16:37 알림 / 엮은이의 글

시사in(662호)에 <작은책> 기사가 실렸습니다. ^^


노동자의 ‘생활글’ 300번의 큰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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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3월호

일터탐방_ 유성기업

 

내 동생 광호가 왜 그랬을까

정인열/ <작은책> 기자

 

일은 동료와, 잠은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 뭐! 잘못되었습니까?’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시위 현장에서 들고 있던 손팻말 문구다. 유성기업은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로 알려진 대표적 사업장이다. 2011년부터 시작된 투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투쟁을 이기는 중이라고 평한다. 유성기업 노동자 김성민 씨와 국석호 씨를 만나 그 이유를 들어 보았다.

 

우리는 올빼미가 아니다

유성기업은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해 현대·기아자동차에 납품하는 회사다. 충북 영동과 충남 아산에 공장이 있다. 김성민 씨는 1993년 병역특례로 입사했다. 지금 그는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이하 지회) 사무장이다. 노조파괴가 발생한 8년 동안 지회장만 두 차례 했다.

국석호 씨는 1994년에 입사했다. 아버지가 다른 동생인 한광호 씨는 이듬해에 형을 따라 입사했다.

▲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사진_영화 <사수> 스틸이미지.


노동자들은 1400도가 넘는 용탕에서 쇳물을 녹였다. 금속을 깎고 돌리고 주야 12시간 맞교대로 일했다. 밤샘 노동에 매일 잔업을 하고 휴일에도 일했다. 그러다 1999년 한 동료가 야간근무를 마친 후 통근버스 안에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2007년부터 2009년 사이에도 노동자 5명이 급작스런 죽음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회는 2009년 임금 및 단체협상에서 주간연속2교대제를 도입하여 201111일 시행하고 월급제로 전환하는 합의서를 작성한다. 시행 전까지 구체적인 내용은 회사와 협상하기로 했으나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지회는 합법적 절차를 거쳐 20115182시간 부분파업에 돌입했다. 회사는 즉시 직장폐쇄를 하고 용역 깡패 약 200명을 투입해 조합원들의 출입을 막았다. 조합원 500여 명이 아산공장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석 달을 노숙했다. 용역 깡패는 대포차로 조합원 13명을 치어 다치게 했다. 경찰은 대치 중이던 조합원들을 전원 연행했다. 조합원들은 다시 모여 622일 아산공장 진입을 시도했다. 용역은 돌을 던지고 소화기를 집어던졌다.

저쪽에서 서치라이트를 켜면 우리는 앞이 안 보이잖아요. 주먹만 한 돌이 슝슝 날아와요. 소화기 뿌리다가 막 집어던지니까 굉장히 무서웠죠. ‘소리 나면 거기 맞은 거거든.”

두개골이 함몰되고 광대뼈가 부서지는 등 심하게 다친 조합원만 6. 고작 2시간짜리 부분파업에 회사는 잔악하고 집요하게 대응했다. 창조컨설팅이 유성기업에 제출한 노사관계 안정화 컨설팅 제안서(2011428)’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연봉 7천만 원 근로자들이 불법 파업을 하고 있다고 대국민 연설을 했다. 이 원고는 창조컨설팅이 써 준 것이었다. (연봉 7천만 원은 입사 25~30년차 노동자가 주말, 휴일, 잔업, 밤샘 노동을 해야 받을 수 있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임금이다.)

 

가학적 노무관리

직장폐쇄 후 약 두 달 만인 20117, 사측은 제2노조 설립을 주도했다. 지회가 현장에 복귀하자 사측 직원들이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조합원들의 화장실 가는 시간, 전화 통화 시간, 커피 마시는 시간 등을 체크해 시급에서 제했다. 잔업과 특근에서 배제시키고 승진, 작업배치 등에서도 불이익을 주었다. 징계와 고소·고발도 끊임없이 했다. 가학적 노무관리였다. 지친 조합원들이 하나둘 제2노조로 빠져나갔다. 지회는 이에 반발해 2012~2014152일간 굴다리 농성, 259일간 22미터 높이 광고탑 농성을 벌였다. 유성기업 서울사무소를 오가며 천막농성을 하고 대전고법, 대전고용노동청 등 유관기관 앞에서 노숙 농성을 했다. 2노조로 넘어간 조합원 설득도 포기하지 않아, 2014년부터는 제2노조보다 지회 조합원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형, 동생하며 지내던 사람들이 분열되고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그 사람들 잘 먹고 잘살 때 우리는 가족이 고통받았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어요. 아내들끼리는 시장에서 마주치면 싸움 나고, 학교에서는 애들끼리 싸우고. 가정부터 이리 되니까 삶이 다 무너지는 거야.”

충남노동인권센터에서 조합원들의 심리 건강을 조사한 결과 43퍼센트가 우울증 고위험군으로 판명됐다. 일반인보다 6~7배 높은 수치였다. 국석호 씨와 한광호 씨도 포함됐다. 그리고 20163, 국석호 씨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저는 대전고법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어요. 누군가는 이리 될 줄 알았지만, 왜 내 동생 광호가 그랬을까? 멀쩡하던 놈이?”

 

한광호 열사

한광호 씨는 목을 맨 채 발견됐다. 평소 말수도 적고 힘든 기색을 비치지 않던 터라 국 씨는 믿을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장례 치르면 개죽음이라더라고. 노조파괴로 지금 조합원들이 다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결심을 했죠. 광호 문제를 이슈화시켜서 이 싸움 끝내야겠다고.”

한광호 열사 꽃상여를 메고 양재동을 향해 행진하는 모습. 영정을 들고 있는 이가 국석호씨다( 20166). 사진_영화 <사수> 스틸이미지.

지회는 열사 투쟁에 돌입했다. 회사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시신은 냉동고에 둔 채 서울시청으로 올라와 분향소를 차리고 100리터 종량제봉투에 들어가 노숙을 시작했다. 한광호 열사가 죽은 지 90일째 되는 날, 지회는 꽃상여를 메고 현대자동차그룹 본사가 있는 서울 양재동으로 분향소를 옮겼다.

 

왜 현대자동차인가?

노조파괴의 핵심에는 현대자동차가 있기 때문이다. 증거는 이미 한광호 열사가 죽음을 택하기 두 달 전인 20161월에 밝혀졌다. 당시 은수미 국회의원은 현대자동차 최○○ 이사대우가 부하 직원에게 보낸 메일을 공개했다. 현대자동차가 유성기업 제2노조 가입 인원 목표를 주고 이를 정기적으로 점검했으며, 매주 1회 유성기업과 창조컨설팅을 본사로 불러 합동 회의를 했음이 밝혀졌다. 현대자동차는 왜 그랬을까? 김성민 사무장은 말한다.

부품사들을 일률적으로 정리하고 나서 부품을 원활하게 공급받기 위해 한 거라고 보거든요. 왜냐면 부품사들은 파업을 통해 노동권을 쟁취하는데 이런 데를 없애 버리면 현대차 입장에선 조용하다 이거예요.”

국석호 씨는 현대자동차와 유성기업의 사과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했다. 지회는 청와대까지 오체투지를 했다. 한광호 열사는 노조탄압에 따른 중증 정신질환에 의한 사망으로 산재 인정을 받았다.

▲ 현재까지도 유성기업지회는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다작은책(정인열) 

 

내가 왜

국석호 씨가 서울사무소에서 노숙할 때였다. 하루는 내가 왜라는 노래가 나왔다. 자신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졌다.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인생도 시리고

도와주는 사람 함께하는 사람은 있지만 정말 추운 건 어쩔 수 없더라

내가 왜 세상에 농락당한 채 쌩쌩 달리는 차 소릴 들으며 잠을 자는지

내가 왜 세상에 버림받은 채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인생도 춥더라’ -꽃다지-

김성민 씨가 청와대 앞에서 노숙 농성할 때였다.

맨날 듣던 노랜데 그날따라 딱 그런 거예요. 저는 애들과 놀러 가고 싶고 가족과 저녁 먹고 싶은 평범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됐는가? 선택이었거든요. 자본에 굴복하고 살았으면 그걸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불응하고 살려니까 너무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런 생각 들 때면 힘들었어요.”

 

어우, 커피 드셔야죠

검찰, 청와대, 고용노동부, 경찰이 유성기업과 현대자동차그룹을 비호했지만 지회는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하나씩 이겨 나갔다. 2노조 무효 판결(20144), 유시영 대표 구속(20172, 노조파괴 혐의로 16개월 실형 선고), 창조컨설팅 심종두 전 대표와 김주목 전 전무 구속(20188, 노조파괴 혐의로 징역 12개월), 조합원 해고 무효 확정 판결(201810, 대법원), 한광호 열사를 포함한 사망 조합원 8명에 대한 보상.

임금도 일단 안 주고 보고, 해고도 일단 시키고 보고. 우리가 잘해서 이긴 게 아니라 당연한 거니까 이긴 거예요. 그냥 쌩으로 8년을 기다리라고 하면 저도 못 할 거 같아요. 우리가 뭉쳐서 하나하나 해 오다 보니 8년이 지난 거지.”

전에는 일하다 커피 한잔 먹는 거 가지고 잔소리해서 비참했어요. 지금은요, ‘어우, 커피 드셔야죠.’ 이래요. 우리가 이겨 가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 유성기업지회 김성민 사무장(왼쪽)과 한광호 열사의 형 국석호 씨(오른쪽). 작은책(정인열) 


간절한 바람

지회의 요구는 3가지다. 노조파괴 책임자 처벌, 어용노조 해체, 마지막으로 사태의 발단이 된 심야노동 철폐다. 그러기 위해서는 2009년 단체협약이 복원되어야 한다. 밤에는 가족과 함께 잠을 자고 싶다. 이들의 바람은 여전히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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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12월호

일터 탐방_ 삼성화재 애니카 사고조사 노동자

 

매우만족이 아니면 우린 끝이에요

정인열/ <작은책> 기자

 

 

삼성화재 애니카는 국내 자동차 보험 시장 점유율 1위다. 애니카에는 자동차 사고가 나면 즉시 사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사고조사 노동자들이 있다. 타 보험사는 위탁받은 정비 공업사 직원이 출동하지만 애니카만은 2009년부터 에이전트라 불리는 사고조사 전문 인력을 두고 출동시켰다. 사고조사 노동자들은 사고가 접수되면 고객과 통화 후 15분 내에 현장에 도착해 사건의 경위와 피해를 조사한다. 먼저 고객을 안심시키고 다친 곳이 있는지, 차량 상태는 어떤지, 사고는 어떻게 났는지, 차량 파손 부위, 고객의 요청, 고객 차와 상대 차의 주장, 블랙박스 확보 여부 등을 확인한다.

▲ 삼성화재 블로그에 소개 된 사고조사 에이전트 자료 화면.    사진_ 삼성화재 블로그 갈무리.


삼성화재의 자회사인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이하 애니카손사)이 설립한 전국 8개 센터에는 약 140여 명의 사고조사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각기 업무를 위탁받아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 왔다. 애니카손사는 이들과 사고출동서비스 대행계약을 맺고 이들을 서비스 대행업체라 칭한다. 이들은 애니카 명함을 사용하고, 이들의 차량에는 애니카 로고가 새겨진 스티커가 부착되어 있으며, 명찰에도 애니카 로고가 있고, 사번도 부여받았다. 임금은 출동 1건당 받는 수수료 23천 원이다.

애니카지부 노동자들의 명찰과 끈에 삼성화재 로고가 새겨져 있다.     작은책(정인열)


이 노동자들 80여 명이 지난 1023일 노동조합(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전국사무연대노동조합 삼성화재애니카지부, 이하 애니카지부)을 설립했다. 사고조사 노동자 박경재, 박성진, 정창연, 조상근, 진경균 씨를 만나 사연을 들었다.

이들의 휴대전화에는 삼성화재가 제공하는 전용 프로그램이 깔려 있어 출동이 접수되면 알림음이 울린다. 15분 내 현장에 도착하기 위해 사고가 많이 나는 곳 근처에 주차를 하고 겨울에는 지하주차장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대기한다. 시동은 꺼둔다. 기름값을 본인이 부담하기 때문이다. 통신비, 차량 관리비, 식대, 차량 외관의 애니카 로고까지 자기 부담이다. 4대보험도 없다. 한 달 유지비만 최소 80만 원에서 100만 원.

당직인 날은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17시간을 근무한다. 14시간을 쉬고 나면 다시 아침 10시부터 밤 9시까지 근무하고 또 당직을 선다. 쉬는 시간에도 고객으로부터 문의 전화가 오면 응대를 해야 한다. 밤에 자다가도 사고가 나면 출동해야 하기 때문에 24시간 대기나 마찬가지다. 박경재 씨가 11월에 주말, 휴일 구분 없이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 평균 12.7시간을 근무해서 번 돈은 250만 원. 여기서 유지비를 빼고 나면 150만 원가량 남는다. 다른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제가 지난달에 100건을 했어요. 하루도 안 쉬고. 예전에는 20일 일하고 100건 해서 350~400만 원을 받았어요.”

이들의 수입이 악화된 것은 2015년경부터. 회사는 노동자들의 서비스를 종합 평가해 등급을 매겨서 수수료를 차등 지급하는 등급 수수료2015년부터 2017년까지 적용했다. ~마의 5개 등급으로 나누어 하위 등급은 수수료를 건당 2천 원~4천 원 차감하고 출동 우선권 배제 등의 불이익을 주었다. 우수 등급에는 2천 원~4천 원을 추가 지급했다. 등급을 매기기 위해 출동 대기 시간과 출동 소요 시간 외에 고객 만족도, 수용률(출동 수행률), 이관률(호출을 받았으나 출동을 못하는 경우 타 대행업체로 이관), 입고율(사고 차량을 협력 정비업체로 입고), 출동 후 2시간 내 전산 입력 여부 등도 평가했다. 하지만 등급이 하락하기는 아주 쉽고 상위 등급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한 건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등급이 하락됐어요. 고객 만족 평가도 매우만족’(100)이 아닌 만족’(75)을 하나라도 받으면 끝입니다.”

폭우로 인한 침수 차량이 발생해도 등급이 하락했다. 대부분 사고조사 노동자들의 노력과 관계없는 일들이었지만 등급은 낮아졌고 1등급에게만 콜이 몰렸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3, 4등급 직원이 있어도 1등급한테 콜이 갑니다. 1등급 입장에선 멀어도 출동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늦게 도착하면 또 등급 떨어지죠, 그렇다고 다른 직원에게 이관해도 등급 떨어지죠. 고객도 손해를 보는 거예요.”

2016년부터는 대인 수수료가 없어져 수입이 더 줄었다. 대인 수수료는 가급적 고객을 병원에 안 가게 하고, 수리 차량은 협력 정비업체로 입고하고, 수리 기간 동안 렌트카를 사용하지 않도록 유도했을 때 주어지는 인센티브였다. 그러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았다. 사고조사 노동자들은 심리적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객이 어우~ 뒤에서 받았어요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거야. 이거 또 대인 발생되겠구나. 가면 이거 또 디메리트(불이익) 있겠구나 걱정하면서 현장 나가는데 그런 게 스트레스였어요.”

고객들의 폭언과 폭행 또한 스트레스였다. 모두 고객으로부터 욕설과 멱살은 기본, 폭행도 수차례 당했다고 답했다. 박성진 씨는 스트레스로 공황장애가 생겨 지난 8월부터 약물 치료를 받고 있다. 조상근 씨 역시 체중이 15킬로그램 감소했고 박경재 씨는 생체 리듬이 깨져 수면제를 복용해야 잠이 든다. 이들은 아파도 일을 쉴 수가 없다. 쉬는 날은 수입이 한 푼도 없기 때문이다. 다섯 명 모두 긴급 출동하거나 도로에서 사고조사를 하다가 다친 적이 있지만 회사로부터 병원비 한번 받아 본 적이 없다.

진경균 씨는 퇴직금 한 푼 못 받고 나가는 동료들이 안타까웠다. 뭔가 바꿔 보고 싶었다. 퇴직자들을 설득해 퇴직금 소송을 준비했다. 20177, 퇴직자 6명이 애니카손사를 상대로 법원에 퇴직금 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 823일 서울중앙지법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맞다고 선고했다.)

퇴직금 소송이 시작되자 회사는 몇 가지 조치들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2018년부터 그동안 사고조사 노동자들에게 약속했던 우선 출동권을 없앴다. 우선 출동권은 사고 발생 시 사고조사 노동자들이 타 공업사보다 우선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권리다. 이후 정창연 씨는 공업사와 비교해 공정하게 콜이 분배되지 않는 정황을 포착하고 20185월경 공업사 직원들과 전화기를 한자리에 모아 자체 테스트를 했다.

출동 건수가 너무 없으니 답답해서 테스트를 했어요. 출동 들어오는 순서를 봤더니 에이전트는 누락을 시키는 거죠. 공업사 먼저 다 나가고, 그 다음에 정 나갈 사람 없으면 에이전트한테 주는데, 만약 공업사 직원이 나갔다 들어오면 그 사람한테 다시 주는 거예요.”

조상근 씨도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공업사 직원과 실적을 비교했다. 지난 10월을 기준으로 조 씨는 하루 평균 2.3개를 처리한 반면 공업사 직원은 하루 평균 6건이었다.

애니카지부는 에이전트의 노동자성 인정 및 직접고용 논란을 피할 목적으로 회사가 우선 출동권을 없앴다고 보고 있다. 사고조사 노동자의 수입을 줄여 스스로 그만두게 한 후 개인사업자로 등록하게 하거나 정비 공업사로 이직시키기 위한 계획이라는 것이다. 5단계로 매겼던 등급수수료도 2018년부터 사라졌는데, 수시로 업무 지휘·감독을 했던 점을 인지하고 없앤 것으로 지부는 해석한다.

, 쓸개 다 빼놓고 일했는데 이제 와서는 직원이 아니라고 하니까 배신감이 드는 거죠.”

노동자들은 열악한 현장을 바꾸고 애니카손사 직원으로도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어 회사에 직접고용과 출동 차량, 유류비, 보험료, 통신비 지급 및 장시간 노동 근절을 위한 3교대 근무 실시, 10년간 동결된 수수료 인상 및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과의 싸움은 특히 쉽지 않을 텐데 두려움은 없을까? 정창연 씨가 말한다.

주변에서 다들 말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거라고. 그런데 저는요, 계란으로 바위가 더럽혀지는 거라도 봐야겠어요.”

삼성화재 애니카 사고조사 노동자 조상근, 진경균, 정창연, 박성진, 박경재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회사와 투쟁을 시작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프로다.

지금도 사고 현장에 나가면 당연히 고객은 내 가족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프로답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돼서 속상하고. 어떻게든 잘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먼저 고객을 안심시키고 고객의 보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고조사 노동자들. 이제는 이들의 피땀이 보상받을 차례다.

posted by 작은책
2011. 11. 24. 11:06 알림 / 엮은이의 글

 



■ 엮은이의 글

  나라 주권이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때 이 글을 쓰게 됩니다. 한미 FTA 이야기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과 맺은 한미 FTA 협상안을 국회에서 비준해 주면, 3개월 내 미국에 ISD 조항의 ‘재협상을 제안하겠다’고 꼼수를 부렸습니다. ISD는 ‘투자자-국가소송제’라는 뜻의 약자입니다. 간단하게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미국 기업이 우리나라에서 수돗물 장사를 합니다. 한 달 수돗물 값이 갑자기 올라 우리 월급의 반이 됩니다. 서민들은 수돗물 사 먹을 돈을 아끼느라 빗물을 받아 놓았다가 먹기도 하고, 빨래도 합니다. 미국 기업이 장사가 안 되겠죠? 당장 우리나라 정부에 항의를 합니다. 정부는 빗물을 못 받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기업은 우리나라에게 소송을 겁니다. 판단은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가 하지요. 그 센터가 누구 편을 들지는 불을 보듯 뻔하고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빗물조차 못 받아 쓰게 됩니다.

  소설 쓰지 말라고요? 지난 2000년에 볼리비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미국 기업은 벡텔이라는 기업이고요. 아, 그러면 그 ISD조항을 재협상하면 된다고요? 오바마가 총 맞았나요? 그걸 해 주게? 그런데도 이명박 ‘가카’가 국회에서 한미 FTA를 일단 비준해 달라는 겁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그걸 비꼬는 패러디가 쏟아졌습니다. “일단 김태희를 나와 혼인시켜 달라. 3개월 안에 김태희 씨에게 결혼 허락을 받겠다”는 말에 뒤집어졌습니다. 노회찬 전 의원은 “싫더라도 일단 당선시켜 주십시오. 대통령 취임하면 3개월 내에 재선거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비꼬았네요.

  독자님들, 가카가 하는 말은 꼼수가 아닙니다. 제가 바둑을 둬 봐서 좀 아는데, 바둑에서 나오는 꼼수는 정말 그럴듯하거든요. 가카가 하는 짓은 바둑 18급짜리가 9단한테 던지는 막수입니다. ‘씨바, 넘 유치해!’

                                                                                                                 2011년 11월 16일
                                                                                                                        안건모 올림


■ 차례


4 사진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12 작은책을 읽고

살아가는 이야기

14 재수 없는 날 _ 상희
18 본색을 드러낸 선생님 _ 김경희
22 회갑보다 중요한 날 _ 김현주
25 공무원이 봉이냐? _ 서애련
28 축구를 그만둔 한국의 메시 _ 고경은
32 쫄다구 형님! 제 말 좀 들으세요! _ 김영도
36 타조알 선생의 교단 일기 : 주먹이 운다│바담풍 _ 이성수
38 여성의 일과 삶 : 한 발을 디디고 거침없이 고고씽! _ 박미경
44 살아온 이야기(3) : 조금만 더 버티면 이긴다! _ 신혜진
50 와글와글 초딩 글
52 이야기가 있는 들녘 : 올해도 쌀 다 팔았습니다 _ 김성만
56 글쓰기 모임 뒷이야기

일터 이야기

58 일터 탐방 :
고기 280킬로그램 볶아 보셨어요? _ 정인열
64 일터에서 온 소식 : 3~4일 정도면 되겠지? _ 김정훈
68 일터에서 온 소식 : 용기 있는 대리운전기사 콜 ! _ 송재성
72 일터에서 온 소식 : KT를 바꿔라! _ 조태욱
76 실업 극복 희망 일기 : 난 유리 같은 여자예요 _ 최문정
80 현장 노동법 이야기 : ‘판례’를 무시하는 판사들 _ 변영철

기획 특집
혁명은 글쓰기와 함께 온다

83 강좌 _ 윤구병

103 뒷이야기 _ 이명옥

105 만화로 보는 세상 _ 이성열

세상 보기

106 생각해 봅시다 : 김진숙과 송경동 _ 박노자
110 교육 이야기 : 1정 연수 괴담기 _ 설은주
114 쉬운 경제 이야기 : 끝장토론 마지막 호소 _ 정태인
122 생태 이야기 : 우주여행은 그저 꿈일 때 아름답다 _ 박병상
126 인물 바로 보기 : 《실학파와 정다산》을 쓴 최익한 _ 송찬섭

쉬엄쉬엄 가요

131 일상 예찬 : 나는 이만하면 충분해 _ 김현진
134 영화 이야기 : 신비한 주술과 생생한 현실의 만남 _ 강성률
138 추억 따라 역사 따라 : 백두대간 완주보다 더 흐뭇한 것 _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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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새로 볼 책 : 싱싱한 유기농 만화 _ 윤지은
146 돌아볼 책 : 오타쿠와 레닌 사이 _ 곽일용
148 새로 나온 책 _ 편집부
151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정인열 / <작은책> 기자
 

  “저는 해고 2호, 여긴 해고 3호에요”

  좋은 일도 아닌데 밝게 웃으시며 자기소개를 하신다. 이분들은 청주시립노인전문병원에서 요양보호사(보통 간병인이라고 한다)를 하다 '짤렸다'는 권옥자(54세), 이선애(62세) 씨다. 어르신들 돌보는 게 업이라 그런가, 부드러운 인상과 말투 때문에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거리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청주노동인권센터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권옥자(왼쪽), 이선애(오른쪽) 씨 / 사진_안건모


  “노조 가입한 사람들은 재계약이 안 돼서 해고됐어요. 1년마다 근로계약을 하는 데 저(권옥자 씨)는 8월 6일자로, 여기 언니(이선애 씨)는 8월 16일자로 해고됐어요. 노조 탈퇴 못하겠다고 했거든요”

  2008년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됐다. 요양보호사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서, 여기저기 요양보호사 자격 취득 광고가 넘쳐 났다. 우리 엄마도 나에게 요양보호사 자격 따 놓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학원 광고마다 ‘주부 취업, 학력 불문, 퇴직 후 대비’ 등등 솔깃한 문구들로 적혀 있어 현재 자격증을 딴 사람이 100만 명이나 될 정도다. 권옥자 씨와 이선애 씨도 그중에 한 명. 하지만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은 25만 명 정도다. 왜 그럴까?

  “24시간 격일제로 일을 하는 데 세금 빼면 월급이 110만 원 밖에 안 돼요. 한 사람이 8명의 환자를 돌봐야 합니다. 쉬는 시간도 전혀 없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은 이 일 절대 못 해요. 젊은 애기 엄마가 일하는 걸 봤는데 밤새 애들이 울면서 전화하고, 애기 엄마도 울었어요. 그리고 하루 만에 그만뒀어요. 자격증 따 놓고 병원에 실습 왔다가 전부 다 떨어져 나갑니다. 하지만 저희같이 없는 사람들, 꼭 돈 벌어 가족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구요.”

  청주시에서 설립한 청주시립노인전문병원은 2009년에 개원해 병원 운영을 민간의료재단인 효성병원에 위탁했다. 그리고 효성병원은 요양보호사 인력을 하영테크에 또 위탁했다. 하지만 일자리 구하는 사람들이 그걸 알 리가 없다. 그이들은 파출부라도 나가야 하지만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게 필요했고, 작은 요양원보다 시립병원이 처우가 나을 것 같아 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청에 하청을 주니 당연히 중간에서 인건비 떼먹는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영테크는 1인당 월급을 157만 원으로 효성병원에 요청하고 실제 127만 원(세전)을 줬다. 시급으로 따지면 3천 원이 안 된다. 그리고 효성병원과 하영테크는 이윤을 내기 위해 60명을 투입해야 하는 인력에 24명으로 운영했다. 그러니 요양보호사 한 명당 환자 5~8명을 맡게 되고, 당연히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환자들은 대부분 치매, 반신불수, 석션(기도의 분비물을 제거하기 위해 흡입기를 대고 있는 환자), 화상을 입은 어르신들입니다. 기저귀를 채워야 하는 사람들이 4~5명 되지요. 그런데 그중 꼭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려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더 힘듭니다. 우리가 병실을 비우고 그분을 부축해서 볼일 보는 것을 다 도와줘야 하거든요. 옷을 다 입혀서 다시 침대에 눕히고 나면 다른 분들 기저귀를 갈아야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분이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고, 어떤 분은 아들네 집에 가야겠다며 일어나고. 그러다 넘어지면 엉덩뼈가 부서져요. 그래서 항상 간병인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붙어서 수발 들어야 하는 환자가 8명이다. 환자들에게서 잠깐만 눈을 뗐다간 사고가 난다. 그러니 5분도 쉴 새가 없다. 게다가 수시로 욕창이 생기지 않게 체위(자세를 바꾸어 주는 것)도 해 줘야 한다. 덩치가 큰 노인들에겐 온 힘을 다 써야 움직일 수 있다. 또 남성 노인들을 돌보면서 성추행도 발생하는데, 그럴 때는 모르는 척 교육받은 대로 대처해야 한다. 밥 먹는 시간에도 혼자 못 먹는 환자 때문에 밥을 먹여 주면서 자신도 같이 먹는다. 그러다 기침해서 가래가 밥에 들어가면 밥맛이 없어지고, 또 여기저기서 간병인을 불러 대니 도저히 맘 편히 먹을 수가 없다.

  그렇게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못 쉬어가며 일하다 ‘요양보호사 권리찾기 캠페인’을 추진하던 공공노조 충북지역 의료연대와 청주노동인권센터를 만나게 되었다. 최저임금이 얼마인지, 근로기준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2010년 8월에 노조에 가입했다. 임금체불진정서도 냈다. 그러자 하영테크는 근로계약서를 법에 맞게 위조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서명을 편법으로 받았다.

  “입사하고 3개월이 지나서야 근로계약서에 싸인했어요. 24시간 힘들게 일하고 퇴근 시간에 통근 버스 기다리는데 ‘선생님, 잠깐만요~. 싸인하고 가세요’ 하더라구요. 내용을 보려고 하면 ‘안 봐도 돼요. 그냥 싸인하세요’라고 해서 너무 피곤하고 바쁘니 별 생각 없이 싸인을 했죠. 게다가 우리는 나이가 많아서 돋보기가 없으면 글자가 안 보여요.”

  정말 얄밉다. 소송 때문에 나중에서야 근로계약서를 확인해 보니 월급 금액을 맞추려고 4시간마다 1시간씩 무급 휴게 시간을 주었다고 계산을 했고,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는 유급 휴게 시간을 주었다고 법적으로 하자가 없게 거짓 작성이 되어 있었다. 만약 근로계약서대로 요양보호사들이 쉬었다면 그 많은 환자는 누가 돌봤단 말인가? 권옥자 씨와 이선애 씨는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영테크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원청인 효성병원과 회의가 있을 때나 새로운 인력이 투입될 때만 관리팀장이 왔다. 모든 업무 지시는 효성병원 간호사들의 지시를 받았다. 하영테크 팀장은 노조가 생긴 뒤 노조 가입한 사람들은 모두 자르겠다고 협박해서 처음 37명이었던 조합원 수가 지금은 10명만 남게 되었다. 노조에 남은 사람들은 생계 위협에도 왜 탈퇴하지 않았을까 물어봤다.

비 오는 날 집회 중인 해고 간병인들 / 사진 제공_충북지역의료연대

  “생계가 걱정되지만 분한 생각이 더 들어요. 부당한 일이 있어서 호소하겠다는 데 왜 해고하나요? 노인요양보호서비스는 어느 가정이든지 다 접할 서비스입니다. 사람들이 간병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라요. 다른 간병사들도 이런 일을 당하면 안 됩니다. 용역업체 안 쓰고 체제만 바로 잡히면 일하는 우리도 조금 더 편하고, 우리가 안정되면 환자에게도 더 나은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노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환자가 저희를 인정해 줄 때 보람을 느낍니다. 자기 가족도 거부하고 우리 손길만을 기다리고, 고맙다고 할 때. 슬그머니 쵸코파이를 손에 쥐어 주고, 추운 날 출근해서 오면 춥지~ 하며 손을 잡아 주고 표졍이 밝아질 때. 말을 못해서 ‘아다다~’로 표현하는 분이 있는데 제가 한 달하고 다른 병실로 넘어가니까 그 다음부터 캔(식사 대용으로 먹는 환자식)을 안 드세요. 그러면서 보호자에게 이 사람 아니면 안된다고 ‘아아아~’ 하고 의사 표현을 하면 정말 보람을 느끼고 '얼른 다시 와서 저 환자분 돌봐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 얘기를 듣는데 가슴이 찡해진다. 우리 부모님도 늙어 곧 아프실 날이 오겠지. 우리 자식들도 부모님을 노인 병원에 모셔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때 우리 부모님을 돌봐 주실 그런 분들, 철없는 자식들보다 더 기댈 수 있는 그런 분들. 우리 부모님이 편해지려면 환자당 요양보호사 수가 훨씬 많아져야 하고, 충분한 휴식 시간이 보장되고, ‘목숨유지비’ 이상의 월급이 지급되어야 한다.

  “이 일은 우리가 잘할 수 있어요. 아무 희생자 없이 우리 요구가 들어져서 우리를 기다리는 환자에게 돌아가고 싶어요. 당당한 1급 국가자격증을 딴 사람들입니다. 노동자로 인정받아야 해요.”

  젊어서도 고생했는데 늙어서도 고생하고 있는 우리 시대 엄마들이 생각난다. 늙어서도 일할 수밖에 없는 우리 엄마들, 좀 편하게 일하게 해 주이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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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해고 모른 척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2억 8천 손해배상 청구냐!”
 
 “3억 손해배상 청구소송? 차라리 우리 노동자를 죽이시지요.”

  홍익대학교 정문 오른쪽에 이런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을 길러 낸다는 대학교에서 월급 89만 원 받는 청소 노동자들에게 3억을 손해배상 청구했다는 내용이다. 지난 1월에 청소 노동자 170명이 하루아침에 해고된 뒤 해고를 철회해 달라고 49일 동안 농성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손해배상 금액이란다.

홍익대학교 정문 옆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 / 사진_안건모

  거기에서 일하던 40대 후반에서 60대 여성 노동자들 사연을 들어 보면 하나같이 기가 막힌다. 그중에 한 분 김금옥 씨를 청소 노동자 대기실에서 만났다.

“비만 오면 여기 저기 새요.”

  청소 노동자 대기실 천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겉에서 보면 번듯한 이 홍익대 건물 안에 비가 새는 곳, 그곳이 청소 노동자 대기실 겸, 휴게실이다.

두 사람이 겨우 밥을 먹을 수 있는 대기실 / 사진_안건모

  김금옥 씨는 1953년 생. 고향은 전라남도 순창이다.

  “순창에서 20리 길 둑을 타고 나가면 우리 마을이었어요. 4녀 1남에 제가 둘짼데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죠. 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열여덟 살에 서울로 올라왔죠. 언니가 결혼한 뒤 상월곡동에 살았는데 형부가 요꼬(편직 기계) 짜는 분이라 종업원 몇 분 두고 공장을 운영했어요.”

  그 당시 옷은 그나마 잘 나가는 직종이었다. 하지만 수출이 막히면서 점점 어려워졌고, 설상가상으로 언니가 당시 20만 원 되는 계를 들었는데 계주가 도망가는 바람에 공장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논밭이었던 창동에 하꼬방(판잣집)을 지어 이사를 갔다.

  거기서 몇 개월 살다가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언니와 형부는 남원으로 내려갔다. 김금옥 씨는 메리야스 공장에 취직을 하고 친구들하고 기숙사에 살았다. 당숙이 중매를 해 줘서 공무원 직업을 갖고 있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말단 공무원 월급으로 살기가 어려워 김금옥 씨는 한 달에 10만 원을 버는 부업을 했다. 막내아들이 다섯 살 때부터 피죤, 물비누, 퐁퐁을 리어카에 싣고 다니면서 방문 판매하는 일을 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집을 방문하면, 새댁들이, 배추에 소금을 담가 놓는 분이 있어요. 그럼 내가 씻어서 담가주기도 하고, 뭐 좀 도와주고 하니까 그 분이 다른 손님을 소개해 주고 해서 영업을 잘했죠.”

  김금옥 씨는 그 뒤 라피네 화장품 판매, 보험 영업으로 생활을 꾸려갔다. 그 당시 보험 영업은 지금과 달랐다. 한 달에 한 번씩 보험료를 내는 게 아니라 일수 찍듯이 하루에 나눠서 받는 형식이었다. 용산전자상가 건물에서 남자만 상대하는 보험 영업이 쉬울 리 없었다.

  “처음에는 용기가 안 나서, 말도 못 했다니깐요. 오래된 언니 이틀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웠죠. 90도 각도로 인사하면서 ‘안녕하십니까?’ 하는 거 배우고 껌 하나, 볼펜 하나 주면서 가게마다 다 돌았어요.”

  날이 갈수록 보험 영업도 점점 힘들어졌다. 무엇보다 사람을 끌어오라는 ‘증원’ 압박에 시달렸다. 김금옥 씨는 힘든 보험 영업 일을 남한테 이 일이 힘들어 남한테 권유하지 못해 사람을 끌어오지 못했다. 결국 그 일도 그만두게 됐다.

  김금옥 씨가 처음 홍익대 청소 노동자로 온 것은 1999년이었다.

  “그땐 제가 힘이 장사였어요. 쓰레기 봉투가 100리터짜리 스물네 개에서 서른 몇 개가 나왔어요. 엘리베이터도 없었는데 7, 8층에서 그걸 힘든 줄 모르고 계단으로 내렸어요.”

  월급이 40만 원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음에 맞는 동료 언니들이 있어 그런 대로 재미가 있었다. 2년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마음에 맞지 않는 다른 청소노동자들과 같이 일하게 되면서 그만두게 됐다. 그리고 간 곳이 영등포에 있는 스크린 경마장이었다. 그곳도 청소하는 일이었다.

  “거긴 홍익대보다 월급은 많은데 손님들이 있는 데서 청소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담배 냄새가 심했어요.”

  그곳에서 6년을 일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버스에 치어 머리와 어깨, 다리를 다치고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동안 치료를 한 뒤 쉬고 있었는데 홍익대에서 정직원으로 청소일을 하는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일할 자리가 났으니 다시 올 수 있냐는 거였다. 사실 김금옥 씨는 노동조합(노조)이 있는 서강대에 이력서를 보내고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조가 있는 곳은 처우가 좀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강대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또 홍익대로 일을 하러 갔다. 60만 원밖에 되지 않는 월급 때문에 체육관 수영장 야간 일도 같이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월급이 80만 원은 됐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야간에 수영장 물일을 하니까. 락스 풀고 닦는데 공기 탁하고, 지하라. 하루에 몸무게가 1킬로씩 점점 빠졌어요.”

  자꾸 몸무게가 빠져 병원을 가니 갑상선에 종양이 생겼다고 했다. 수술을 하고 난 뒤 금방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8개월을 쉬고 홍익대에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청소하는 김금옥 씨 / 사진_정인열

  그런데 같이 일하는 동료 언니들이 불만들이 많았다. 노조가 있는 서강대, 연세대에 견줘, 똑같이 일하는데 홍익대는 월급이 더 적은 데다 일은 더 많이 해야 했다. 노조를 만들고 싶었지만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학생들이 와서 월급이 얼마인가, 하루 몇 시간 일하는지 설문 조사를 했다.

  “우리는 한 달에 75만 원 받고, 아침 8시 출근, 6시 퇴근 토요일도 한 달 두 번 정도 일한다고 얘기했죠. 우리가 있는 대기실을 두세 명이 세 번씩 방문했어요. 처음엔 노조 얘기 안 하고 설문 조사만 하다 두 번째 왔을 때 노조 얘기하는데 귀가 솔깃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도와주면 노조를 만들겠다 했죠.”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학교 밖 커피숍에서 처음 아홉 명이 모였다. 하지만 모두들 겁이 나 조합원 가입서를 쓰지 못했다. 김금옥 씨가 처음으로 가입원서를 쓰면서, 여덟 명이 가입서를 썼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청소노동자들 가운데 반 이상이 조합에 가입했다. 드디어 2010년 12월 2일에 노동조합이 출범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3일, 설날 휴가를 끝내고 출근했다. 출근 도장 찍으려는데 경비실에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 우리 경비 아저씨 휴가예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래요. 그래서 ‘출근도장이 없네요. 출근카드 주셔야죠’ 했더니 ‘몰랐어요? 아줌마들 이제 직원 아녜요 용역회사가 계약 만료되었다고 가 버렸어요.’”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용역회사와 계약이 만료됐다고 그날로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이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김금옥 씨와 청소노동자들은 모두 본관으로 모였다. 그것이 49일 동안 투쟁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싸움을 어찌 몇 마디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으랴. 김금옥 씨는 추운 시멘트 바닥에서 자느라 교통사고 났을 때 다친 어깨 통증이 재발했다.

  그렇게 49일 동안 투쟁한 결과 홍익대 청소노동자들 170여 명은 그대로 고용승계가 됐다. 그 싸움에서 ‘청소하는 아줌마’들은 당당한 노동자로 거듭났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가 아니라 정당한 노동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노동자였다. 김금옥 씨는 부분회장을 맡으면서 생각도 변하고 성격까지 달라졌다.

  “나이가 60이 넘은 분들이 많아요. 49일 농성하다 안 아픈 데가 없고, 중간에 언니들이 다 쓰러질 것 같고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할 때 용역업체와 교섭을 하고 타결됐어요. 그때 눈물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죠. 노조 가입하기 전에는 텔레비전에서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는 거 보면 이해가 안 가고 왜 싸움만 하느냐고 했어요. 근데 우리가 당하고 나니까 이해가 가는 거야. 오죽하면 싸우겠어요. 김진숙, 고공 농성 같은 거, 그것도 이젠 우리 다 이해해요. 몰랐을 땐 왜 저러나 했는데 지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금옥 씨는 둘레에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인터뷰 마지막에 이 말만은 꼭 써 달라고 했다.

  “김여진 씨와 ‘날라리 외부 세력’의 도움과 도와주는 단체들이 없었다면 우린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좌절하는 순간이 많았는데 ‘당신들이 정당하다. 이길 거니까 힘내라’고 말해 주는 사람들 때문에 힘이 나서 싸울 힘이 생겼죠. ‘이길 거니까 힘내’라는 말이 너무 고맙고……. 평생 이 은혜 잊지 않을 거예요.”

글_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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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은 끝나지 않았다(2009년 2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정인열/ 코스콤비정규지부 부지부장

2008년 12월 29일 파업은 475일 만에 끝이 났다. 조합원 76명 중 65명은 3개월 이내에 무기계약직 별도직군제로 고용하고, 그 밖에 11명의 고용 문제는 ‘추후’ 협의 후 합의하기로 했다.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회사의 직접 고용을 투쟁을 통해 얻어 낸 이례적인 성과라고 평할 수 있다. 물론 11명(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절반의 승리와 절반의 패배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결이 되면 그 긴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눈물이 나고 아주 감격해서 어찌할 줄 모를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많아서 일까? 아니면 그 이면에 있는 냉혹한 진실 때문일까?

우리가 길바닥에서 먹고 자고 한 여의도는 소돔과 고모라같이 의인하나 없는 곳이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한 가족처럼 일했던 연봉 9300만원의 정규직 동료의 외면과 계속되는 방해는 우리를 더욱더 뼈저리게 춥게 만들었다. 1800만 원 연봉의 비정규직들은 매일 아침 팔뚝질을 하면서, 눈인사도 피하며 출근하는 정규직 동료를 바라만 봐야 했다. 거기에다 타결 막판에 정규직 이기주의를 결국 드러낸 증권선물거래소(코스콤의 원청) 노조 간부들의 반대로 전원 직접 고용 합의가 무산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날은 거래소 앞마당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분신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분신도 못하고, 고공시위도 못하고, 어디 가서 한풀이도 못한 채 우리는 힘없이 그 자리를 떴다. 자기들만의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정규직 노동조합 운동이 결국 비정규직의 정당한 요구도 묵살해 버리는 현실을 겪으면서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이렇게 싸운다 한들 세상이 바뀌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노동자가 저 모양이라면……’ 하는 절망에 또 절망이었다.

그래도 거래소와 코스콤 밖을 돌아보면 우리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않은데 노동자들이 모아 주신 성금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앞으로 파업 투쟁 때보다 더 많은 과제들이 남았다. 합의서가 이행될 수 있게 11명을 포함한 전원이 하루라도 빨리 복직하게 하는 것, 임금과 업무 배치 등 노동조건을 협상하는 일, 노동조합 활동에 관한 일 등이다. 뉴스에는 타결되었다고 하나 우리는 언제 또 다시 거래소 앞에서 농성을 시작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지부에 바라는 게 있다면 상명하복 식으로 일방적 명령 전달을 받는 의사소통 구조가 아닌 모든 조합원이 자유롭게 토론하여 의사 결정을 하고, 지부장은 대장이 아닌 조합원을 대표하고 조합원과 평등한 위치에 있는 그야말로 민주적인 조합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기나긴 파업 기간 중에 깨달았고 그것이 지금도 가장 절실하다. 민주적인 절차 없이 얻은 성과는 한낱 거품에 불과하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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