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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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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4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 태경산업


세 명이 조합원인 노조, 큰일합니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환갑을 바라보는 세 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검버섯과 깊게 팬 주름, 고단함이 밴 표정으로 그들은 긴 장화와 안전화를 신고 대구 성서공단(성서산업단지)을 다닌다. 이들의 일터인 태경산업()2016년 기준 당기순이익 약 7억 원, 이익잉여금 약 80억 원을 보유한 중소기업으로, 포클레인과 지게차 등 중장비에 들어가는 고무호스를 제조한다.

▲ 대구 성서공단에 있는 고무호스 생산업체 태경산업(주) 작은책(정인열)


  ▲ 조재식 씨와 이병철 씨가 안전화와 고무장화를 신고 성서공단을 걷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젊은 친구들은 한 시간 일하고는 다 집에 가 버립니다. 우리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이주노동자들은 힘들어도 참아야 하는 형편이라.”

이병철 씨와 조재식 씨가 작업 내용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말한다. 이들은 아침 8시부터 저녁 630분까지 종일 서서 일한다(작업 준비를 위해 아침 720분에 출근하지만 회사는 노동시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고무호스 제조는 먼저 금속 형틀에 호스를 끼우고 솥에 넣어 150고열로 30분간 가열해 성형을 한다. 이 과정에서 금속 형틀로부터 고무를 분리하기 위해 이형제를 사용하는데, 고무 탈형 후에는 기름기 있는 이형제를 없애기 위해 세척제를 섞은 뜨거운 물에 깨끗이 씻어 내고 건조시켜야 한다. 고무호스 모양도 다양한 데다 기계 한 대에 호스 60~70개를 꽂아서 넣고 빼는 작업이 반복되고,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에 세척한 고무를 넣었다 빼는 작업도 반복된다. 세척파트에서 일하는 이 씨의 말이다.

박스를 하루에 700번 정도 넣었다 뺐다 합니다. 3분 타이머를 맞춰 놔서 끄집어내면 다시 넣고. 그러니까 마디마디 전부 손목 터널증후군이 생겼어요.”

성형파트에서 일하는 조 씨는 오른쪽 손과 팔 전체에 3도와 2도 화상을 입었다.

▲ 고무 성형 작업 중 고온에 화상을 입은 조재식 씨의 손. 작은책(정인열)


고무가 쪄 가지고 단단하니 잘 안 빠집니다. 모양도 구불구불, 형태가 다양해요. 두 사람이 붙어서 와이어() 같은 걸로 빼다 뜨거운 솥에 팔이 다 닿으니 화상 입는 건 일상이에요.”

가장 버티기 힘든 때는 여름이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45~50됩니다. 솥을 찌고 뜨거운 물을 사용하니까. 3월 말부터 덥기 시작해서 10월까지는 지옥생활이라고 보면 됩니다. 작업복이 땀으로 젖어서 물이 줄줄줄 떨어지고 몰골은 완전히 쥐새끼가 됩니다.”

냉방기기도 없다. 대형 가마솥 6개에서 나오는 열기를 이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형제와 고무가 가열되면서 악취가 발생하고, 뜨거운 물에 세척제와 이형제가 섞일 때도 악취가 난다. 특히 이형제에는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이 사용되는데, 노동자들은 이 증기를 그대로 들이마시기도 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작업환경을 측정하러 왔을 때 노동자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마스크를 할 수가 없다.

사우나 들어가서 마스크 쓰라고 해 보세요. 숨쉬기가 힘들어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형제를 취급할 때는 실외에서 작업해야 하고 실내에서 작업할 경우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국소 배기장치가 필요하다.

냄새도 아주 지독합니다.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데 세척한 물을 한 달, 두 달, 석 달을 계속 쓰니 머리가 아파 죽겠는 거예요. 나 도저히 이거 못 하겠다 하고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했습니다.”

회사는 폐수를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오염수를 재사용했다. 이 씨는 제품 불량도 양심에 걸렸지만 악취 때문에 더 죽을 것 같았다. 하루 10시간을 휴게 시간도 없이 종일 서서 토요일까지 주 6일을 일해도 월급은 15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동료와 불만을 토로하다 사장실로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임금도 적고 이런 환경에서 일하기가 어렵다, 임금 좀 올려 주시오했더니 사장이 해 주겠다 카데요. 그런데 세월만 가고 안 해 주데요. 그래서 , 이거는 아이다생각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됐습니다.”

조 씨는 2공장에서 일을 했다. 지금은 2공장이 폐쇄됐지만 당시 김동열 대표이사는 2공장 노동자들에게 욕설과 막말을 일삼았다. 김 대표는 설립자인 김동찬 사장의 동생으로 조 씨를 비롯한 장년층 노동자들보다 한참 나이도 어렸다.

“‘어이, 이래 하라켔자나? 뭐 이씨~’ 욕하고. 김 대표 사촌동생도 있었어요. 더 어리니까 저희 아들뻘 정도 됐겠죠. 그 사람도 아이씨, 니 뭐 하는데?’ 이카는 식으로 말을 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았던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는지 말을 하는 조 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속상한 노동자들 5명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다 자연스럽게 노조를 추진하게 됐다.

노조 만들려면 우예되나 찾아봐라, 하는데 노조에 대해 아무도 몰라요. 그냥 하면 되겠지 싶어 가지고 인터넷 사이트 찾아보다 민주노총 성서공단노조로 안내받아 가입을 했어요.”

20142, 생산직 노동자 28명이 노조에 가입을 했고 성서공단노동조합 태경산업현장위원회를 만들어 투쟁 선포식도 했다. 그러나 며칠 뒤 대표이사를 비롯한 관리자들은 조합원들에게 탈퇴할 것을 회유하거나 강요했다. 거의 다 탈퇴하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전체 노동자 50여 명 중 조재식, 이병철, 박동숙 세 사람만이 노조원으로 남았다. 대표이사와 사장은 노동자들에게 노조원들과는 같이 대화도 술도 하지 말라며 탄압을 했다. 그리고 2017년 생산직 노동자 대부분의 고용계약을 도급업체 두 곳으로 변경했다. 도급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업무 내용과 처우는 기존과 같다. 노조는 이에 대해 노조 확산을 차단시키기 위해 도급업체를 들여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회사로부터 은밀한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대표하고 사장이 그러데요. ‘직원들 돈 다 줄 필요 뭐 있노? 당신들이 힘들게 교섭해서 따 내는데. 그 돈 가지고 너희 서이 나눠 쓰면 안 되나?’ 노조 탈퇴한 사람들한테 섭섭한 마음에 그래 버릴까 하는 심정도 있었지만 또 사람이 막상 그렇게 몬 합니다.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살아야지.”

3명밖에 안 되는 노조지만 이들이 이뤄 낸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 첫째, 토요 근무를 폐기하고 유급 휴일로 바꾼 것, 둘째, 공장 내 설치된 감시용 CCTV 18대 중 6대 폐쇄, 셋째, 4회 상여금 규정 도입 및 임금 인상이다.

▲ 태경산업 및 대구지역 노동자들이 2017년 9월 CCTV 철거를 요구하며 공장 안에서 시위를 했다. 이후 CCTV 18대 중 6대가 철거되었다. 사진제공_민주노총대구지역본부


명절 때 사장이 기분 좋으면 20만 원 주고, 기분 나쁘면 10만 원 주고. 그러니까 명절 전날 사람들이 사장 눈치만 보고 있었죠. 노조 생기고 나서는 정기 상여금 30만 원씩 4번으로 늘렸어요. 임금 협상해서 기본급도 올리고.”

현장이 개선되자 비조합원들은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마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당신 덕분에 우리 임금도 많이 오르고, CCTV도 그래 많이 있고 할 때 없애 주고 고맙다그리 말해 줄 때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4년 넘게 투쟁해 조금씩 현장을 개선하고 있지만 이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인격적 대우다.

인간 대접은 받고 일해야죠. 전에는 우리 호칭이 !, 어이~!’ 카는 소리였어요. 지금은 ○○○ 씨 이름을 부르죠. 공단 식당 같은 데 가 보면 자기 혼자서 울분 토하는 사람들 꽤 보거든요? 노동조합이 있으면 그런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참 안타깝죠.”

▲ 태경산업 노동자 이병철, 박동숙, 조재식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청년보다 육체는 늙었지만 정신은 더 끈질긴 사람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들. 최악의 환경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사람다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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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4월호

독립영화 이야기_ 갈재민 감독의 <인투 더 나잇>


수많은 밤을 지나 닿은 곳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인투 더 나잇> 포스터 갈재민, 2016


저희 동네 대보름 행사에 작은책 식구들이 놀러 오셨어요. 달집태우기가 끝나고 저희 집으로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안건모 대표님이 독립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할 만한가?” 물어오셨어요. ‘혹시나 필자를 교체할 생각인가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개봉 영화 구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매번 꼴찌 아니면 끝에서 두 번째로 글을 보내는 것에 대한 변명이기도 했고 사실이기도 했어요. 유이분 편집장님이 그럼 콘셉트를 바꿀까요?”라는 의견을 냈지만 저는 힘들더라도 열심히 해 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2017년의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글을 보니 상업영화 제작과 유통에 필요한 자본 조달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독립·예술영화의 제작·유통은 여전히 어렵다는 문구가 있더라고요. 독립영화들은 극장 잡기도 힘들고 잡았다 하더라도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한 번 상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개봉 첫 주 주말 관객 수에 따라서 상영 목록에서 금세 사라지기도 합니다.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데도 독립영화 감독들은 꾸준히 극장 개봉을 추진하고 어렵게 극장을 잡았다가 스르르 사라집니다. 어떻게든 관객과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의 동료들이 있는데 어떻게든 이 소중한 지면에 그 소중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이 저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지면의 자취는 독립영화 감독들의 고군분투의 역사이자 제 동료들에 대한 저의 우정의 연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달 영화는 갈재민 감독의 <인투 더 나잇>입니다. 저는 음악에 문외한이라 다른 영화가 있었으면 그 영화를 선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4월호에 실을 수 있는 영화는 이 영화가 유일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시네마달 김일권 피디의 선택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일권 피디가 그동안 푸른영상 작품을 포함해서 수많은 독립영화들을 배급해 왔고 덕분에 블랙리스트에도 올랐는데, 이번 한 번쯤은 나도 김일권 피디의 취향을 이해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도시에 밤이 내리고 로큰롤 밴드의 음악이 흐릅니다. 그렇게 영화 제목이 뜨고 나면 연습하고 술 마시고 연습하고 술 마시는 장면들이 반복됩니다. 솔직히 초반엔 걱정이 앞섰습니다. 나는 로큰롤 음악을 모르는데 이 영화가 로큰롤 마니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라면 나는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아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2013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상을 받았던 배우 한주완이었습니다. 당시 한주완의 수상 소감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주었지요.


공공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요즘따라 애쓰고 있는 아버지들이 많이 계십니다. 노동자 최상남을 연기한 배우로서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힘내십시오.”


그가 아버지라고 칭한 사람들은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에 앞장섰던 철도 노동자들이었고 그 전날 저는 그분들을 지지하며 광화문 광장에 다녀왔었거든요. 그 한주완이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 음악을 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가 참 오래전부터 촬영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주완은 등장하자마자 리더 차승우를 매료시키더니 5분 만에 퇴장하고 맙니다. 성공한 배우가 되어 바빠져 버렸거든요.


영화에는 수많은 보컬들이 등장합니다. 한주완 이전에 조영빈이 있었고 그 후에는 김세영, 그리고 마지막엔 훈조가 나옵니다. 김세영과 훈조 사이에는 오디션을 보러 오는 또 다른 많은 보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등장과 퇴장을 보다 보면 영화의 주인공이자 팀의 리더인 차승우의 지치지 않는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장르는 다르지만 같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차승우에게 깊이 몰입되더군요.


영화 <인투 더 나잇> 스틸이미지


아무리 친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밴드 같이하면 스트레스를 주고받고, 싫더라구요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니 취향, 니 세계관을 반영하라며 김세영을 다그치는 장면에서는 살짝 숨이 막혔습니다. 처음 차승우는 나랑 비슷한 온도의 사람이라며 김세영에게 환호했었거든요. 형의 페르소나를 하면 되는 거죠?”라는 말을 던지며 생기발랄하게 무대를 휘젓던 김세영은 내가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퇴장해 버립니다. 형의 플로어를 침해하고 싶지 않다는 김세영에게는 침범이 아니라 부딪쳐야 하고 너만의 플로어를 내세워야 한다는 차승우의 요구가 버거웠던 것 같습니다. 보컬 김세영의 결합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더 모노톤즈는 그렇게 5번의 공연을 끝으로 긴 공백기에 접어듭니다. 보컬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후 어렵게 보컬을 구했지만 오랜 맏형이었던 베이시스트 박현준이 그만두는 등 더 많은 어려움들이 지나가고 결국 영화는 인투 더 나잇을 연주하는 더 모노톤즈의 모습과 2016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더 모노톤즈는 그해 최우수 록 음반 부문 상을 받게 되었거든요. 영화 덕분에 로큰롤에 익숙해져서인지 음악이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차승우의 수상 소감에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구요.


수많은 밤들이 지나갔어요. 적절한 가사나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아서 머리를 쥐어뜯던 밤, 갑자기 멤버가 탈퇴 선언을 해서 속이 썩었던 밤, 녹음실에서 지루했던 수많은 밤들. 그런 밤들이 의미가 있었던 시간들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아서 정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인투 더 나잇>을 보며 꿈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닿고 싶은 음악의 세계로 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걷고 있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인투 더 나잇>을 보며 성장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차승우는 초반에 보컬들에게 어떻게 발음하고 어떤 몸짓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를 조언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플로어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자라 온 것처럼요.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 기타리스트 차승우와 베이시스트 박현준은 노브레인과 삐삐밴드에서 일찍부터 자신의 기량을 뽐내왔던 유명 아티스트들이고 팬 층도 두껍더라구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검색해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인투 더 나잇>은 음악에 문외한인 저에게도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던져 준 아주 뜻깊은 영화였습니다. <인투 더 나잇>은 개봉해서 현재 극장 상영중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문의:시네마달 02-337-2135 http://cinemada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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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4월호

서울 여자 독일 아줌마로 살기


네가 그 일곱 개째 동양인이구나

조숙현/ 29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아줌마

 

 

창문을 열면 강 건너편 초등학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들립니다. 강 하나 사이에 두고 우리 집 바로 정면에 학교가 있어요. 제 아이들이 나온 초등학교입니다.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 과정이고 2년 지나 반이 갈려요. 1, 2학년이 같은 아이들이고 3학년 때 다른 아이들과 다시 섞어 반을 조성합니다. 담임 선생님도 2번 바뀌는 거죠. 큰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반에서 유일한 동양인 아이였거든요.


유치원을 같이 다닌 친구들과 같은 학교로 입학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싫어했어요. 씩씩하다 못해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인데 많이 울고 짜증도 내고 숫기도 없어지고. 어느 날 아이 노트를 보니 낙서를 했더라고요.

죽고 싶다. 엄마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다 같다고 했는데, 왜 아이들이 아이처럼 다 같이 놀지 못하나.”

ⒸPixabay

여덟 살짜리 아이 낙서가 이랬어요. 그 낙서를 본 저는 가슴이 백만 근짜리 무게로 짓눌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면담 약속을 잡고 낙서를 보여 줬습니다. 선생님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몰랐다니. 참 쉬운 대답입니다. 한 학급이 20명에서 22명입니다. 그리고 2년 동안 같은 반 아이들이죠. 그런데 모를까요? 외면한 거겠지요. 그동안 아이들은 큰애의 가방을 빼앗고 안경을 빼앗아 냇물에 던지고 침을 뱉고 칭챙총(동양인 비하 용어)이라는 놀림말을 등 뒤에서 불렀는데 담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놀린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 그러지 못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그 부모들 반응도 그랬습니다. 아이가 그런 건데 뭘 그렇게 난리냐고.


하지만 낙서를 본 순간 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시정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장은 제게 어머님은 너무 감정적이라며 진정하라고 하데요. 당한 사람은 감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한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행동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고나서 마을에 전단지를 돌리고 서명을 받고 학부모 회의를 요구했습니다. 마을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갔습니다. 유치원 학부모 회의도 갔습니다. 제발 집에서 다양성에 대해서 교육해 달라고. 독일인도 해외여행을 가면 외국인이 되는 거고 동네에 독일인만 사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유치원만 해도 여러 나라 아이들이 있는데 언제까지 아이가 그런 건데라는 대답을 할 거냐고.

ⒸPixabay


한 아버지가 그러더군요. 아이들은 안경 낀 아이도 브릴레 슐랑에(안경뱀)라고 놀리고 주근깨도 놀리고 뚱뚱한 아이도 놀리지 않냐고. 그건 결코 답이 아닙니다. 안경은 렌즈로 교정이 되고 주근깨도 없앨 수 있고 살도 뺄 수 있지만 동양인 엄마한테서 자신의 선택 없이 태어난 아이를 어떤 방법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세상의 다양함을 배우고 느껴야 차별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요. 제발 집에서 더러운 외국인이라든지 나쁜 외국인이라는 발언부터 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어른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단어를 아이들이 그대로 습득해 차별을 배운 거라고요.


시장님과도 면담을 했습니다. 시장은 자신이 그 학교의 교사로 근무를 했었는데 몰랐다고, 그런 문제는 없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동양인인 제 아이가 그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니까요. 동양인이 학교에 입학했고 그제서야 생기기 시작한 문제인데 시장인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습니다. 저는 그때 독일어를 잘하지 못했을 때였어요. 하지만 울고 다니는 제 아들이, 집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제 아들이, 저를 보고 있기에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니 느낄 수도 없었어요. 어찌 됐든 내 아이를 다시 세상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저희 집 가족 구성원은 다 외국인입니다. 보스니아 사람인 남편, 한국인인 저, 그리고 혼혈인 두 아이들. 독일 국적을 갖고 있어도 어차피 외모상 이방인인 우리들이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나부터 대항하고 문제 해결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처음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저보고 네가 그 일곱 개째 동양인이구나!”라고 말한 할머니께 ! 그래? 독일인은 몇 개가 사는데?”라고 대답했죠. 그리고 니 남편이 널 얼마 주고 샀냐?”고 묻는 어떤 남자에게 내가 내 남편을 샀다고, “체류 허가가 필요해서 내가 샀어. 넌 니 부인 얼마 주고 샀니?”라고 물었더니 자기 부인은 독일 여자라고 대답하더군요. 전 시치미를 뚝 떼고 ! 난 독일 남자는 다 부인을 돈 주고 사는 줄 알았네. 우리는 그냥 서로 좋으면 결혼 하는데!”라는 대답을 줬습니다.


그때는 독일에 매매혼이 한창 성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자국인과 결혼이 힘든 남자들이 매매혼을 참 많이 하던 시절이었어요. 카탈로그를 보고 여성을 고른 뒤에 돈을 지불하고 결혼하는 남자들이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지던 때였습니다. 덕분에 동양인 여성이나 피부색이 검은 여성들은 왠지 팔려 온 여자라는 이미지가 있었지요. 지금도 그리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대놓고 그러지는 않네요. 저부터 그런 모멸감을 느끼고 살았는데 아이들까지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싸웠고, 드디어 학교에서 아이들이 제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유치원에서 각 나라의 국기와 위치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유치원에 있는 아이들의 나라말로 인사말을 써서 벽에 붙이고 다문화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저는 인사하기를 가르쳤어요. 적어도 예의 없는 놈이라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서요. 길에서 사람을 보면 구텐 탁!”을 하게 하고 쓰레기가 있으면 줍게 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솔선수범을 보여 주며 길렀습니다. 제가 집에서 제 부모님께 배운 것처럼요. 빈 병에 동전을 모아서 병이 꽉 차면 기부를 하는 습관도 들여 줬습니다. 그 습관은 아이들이 성년이 된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시켰어요. 절대로 타인을 먼저 때리면 안 되지만 공격받았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속에 담은 화도 스스로 풀어 갈 수 있고 힘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도 배우기 때문에 아주 잘한 결정 같습니다. 그렇게 2년을 마을에서 외국인 차별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둘째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더군요. 이만하면 정말 큰일을 해 놨다! 싶었어요.


몇 년 후에 한국의 방송사에서 독일의 다문화 정책에 관한 방송 문의가 왔습니다. “옳다구나!” 싶어 우리 동네와 주변 학교를 텔레비전 방송 카메라와 함께 인터뷰하러 다녔습니다. 시장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우리 동네는 그런 차별 문제 없이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 눈치를 엄청 보셨지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맞은편 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습니다. 항상 저렇게, 아이들이 아이라는 가장 큰 공통점 하나로 즐겁게 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든 곳에 말간 얼굴의 반짝이는 눈동자로 살았던 아이들이 자라서 평화와 조화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공통분모를 가진 나뉨의 단어가 아닌 모두를 어우르는 교집합이길 바랍니다. 옛 생각을 하면서 두드리는 자판이 많이 떨렸습니다. 오래된 일이고 지금은 엄청난 친구들을 몰고 다니는 아이들인데도 어렸을 때 그 기억은 참 많이 아프네요. 글을 쓰는 엄마 손가락은 아직도 부르르 떨리는데 아이들 가슴은 그때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래도 모나지 않고 예의 바르고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커 준 아이들에게 참 감사하며 글을 마칩니다.

posted by 작은책
2018. 3. 27. 14:16 알림 / 엮은이의 글


차례


4 책이 이끄는 여행

제주 4·3항쟁과 순이 삼촌’    박준성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인생    김복순

14 촌 말 서울말    박소영

18 베트남의 기억과 손잡는 일    권현우

23 제주 4·3 기행에서 평화를 새기다    권미강

27 서울 여자 독일 아줌마로 살기

네가 그 일곱 개째 동양인이구나    조숙현

32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여보, 난 명품빽 안 살게    윤혜신

37 한일수의 유감천만

나 홀로 한의원을 꿈꾸며    한일수

42 청년으로 살아가기

미투 운동과 B급 며느리    진솔아

46 이야기가 있는 사진    신창범, 안석희

48 살아온 이야기(10)

혼자 중국에서 전환점을 돌다    이하나

54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평창을 떠나는 내 친구    안재성

59 교실 이야기

밥은 먹었냐?    최관의

63 이야기가 있는 들녘

땅끝에서 받은 위로    김진회

68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70 일터 탐방_ 태경산업

세 명이 조합원인 노조, 큰일합니다    정인열

76 일터에서 온 소식

36524시간 비상대기    백현철

81 작은책 법률 상담소

진실을 말해도 처벌을 받는다?    김묘희

 

작은책이 만난 사람_ 정병규

85 동화나라에서 사는 정병규    안건모

106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108 생각해 봅시다    시간이 약이 아닌 사람들    한채민

112 여성으로 살아가기    R과 나의 최선    홍승은

117 ‘그때 그 사건다시 보기

통일은 바라지도 않는다    김형민

122 생태 이야기

폭행당한 가리왕산은 방치되는가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7 책 읽고 딴 생각    혁명의 성자 호찌민    안건모

130 독립영화 이야기    수많은 밤을 지나 닿은 곳    류미례

135 우리 지역 깊은 역사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정종배

140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엮은이의 글

 

봄소식이 들려옵니다. 지난해 이맘때는 박근혜의 탄핵 인용 소식이 들리더니 올해는 이명박의 구속 영장 청구 소식이 전해집니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이 이렇게 심판을 받게 되다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세상이 더디지만 조금씩 바뀌긴 하나 봅니다.

얼마 전엔 독자 한 분이 전화를 해서 책을 그만 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정권이 바뀌었으면 <작은책>도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책 내용이 희망적이지 않다고요. 그 전화를 받고 나서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독자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부분이 뭘까 생각했어요.

새 정부가 들어서고 앞으로 우리 서민들의 삶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기대와 희망을 품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우리 삶터, 일터와는 무관한 그들만의 리그’, 각축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요. 우리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고 힘들기만 한데 말이죠. 하지만 아직은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라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믿어 보려고요. 그런 세상 만들기 위해 노력해 보려고 해요. <작은책>의 역할이 그런 거라고.

새해 들어 독자님들께, “<작은책>은 작고 낮은 곳에서, 소외된 사람, 일하는 사람, 서민들의 웃고 우는 삶을 오롯이 담아내겠다고 한 약속 지키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독자님들! <작은책>2018년도 우수콘텐츠잡지로 선정되었어요. 좋은 글 주신 필자님들과 <작은책>을 아껴 주신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응원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2018320

유이분 올림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3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인천광역시 남동구도시관리공단


정규직 되니 '아줌마'라고 안 불러요

정인열/작은책 기자


▲ 소래역사관 전경 ⓒ작은책(정인열)

어시장으로 유명한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소래포구. 이곳에는 소래 지역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설립한 소래역사관이 있다. 역사관 안내데스크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이정희 씨(53)와 황운숙 씨(50)를 비롯한 역사관 노동자는 모두 남동구도시관리공단(이하 공단) 소속 정규직원이다. 공단은 남동구의 체육 시설, 공공 청사 시설 관리, 공원, 주차 관리, 문화 복지 사업 등을 관리·운영하는 지방 공기업으로 약 17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남동구도시관리공단은 비정규직 없는 보기 드문 사업장이다. 무기 계약직이나 하청회사 정규직 같은 가짜 정규직이 아니다. 환경미화원까지 공단 시설 관리직으로 호봉제 및 8급 주임에서 5급 대리까지 근속 승진도 가능한 진짜 정규직원이다.

▲ 소래역사관 안내 직원 이정희 씨와 황운숙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다 우리가 파업하고 투쟁해서 일궈 낸 거예요.”

이정희 씨가 당당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정희 씨는 2011, 황운숙 씨는 2008년부터 공단 노상공영주차장 주차 정산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1년마다 고용 계약을 갱신하는 일용직(비정규직)이었다. 황은숙 씨가 당시 환경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는 부스도 휴게실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점심을 그냥 길바닥에서 먹는데 너무 창피했어요. 그래서 아예 안 먹고 일주일을 굶었어요. 비오는 날은 그대로 비 맞고, 추울 때는 바람 맞고 일했죠. 소지품도 둘 곳도 없어서 구두 수선이나 노점상 하는 사람 사귀어서 소지품 맡기고.”

황 씨는 도로 중앙선을 넘어 다니며 목숨의 위험을 느끼면서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주말에는 특근수당도 지급한다는 말에 한 달에 하루만 쉬고 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공단은 최저임금에 특근수당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황 씨가 손에 쥐는 월급은 120만 원이 채 안 됐다.

이 씨는 공단에 들어오기 전 도시가스 검침을 했다. 그 일 역시 임금이 너무 적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공단에 입사했다.

소래포구 주차장은 꽃게철이면 주말에 차량 1000여 대가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었다. 횟집에서 술 한잔 걸치며 서너 시간 주차장을 이용하는 손님들도 많아서, 요금을 정산할 때면 반말을 하며 화를 내는 취객들도 상대해야 했다.

▲ 소래포구 노상공영주차장에서 한 노동자가 주차 정산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_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


요금 7, 8천 원 나왔다고 사람을 팰 것처럼 행패 부려요. ‘왜 이렇게 비싸? 아줌마.’ 하고 따지고. 그런 일이 하루에 10건 이상이에요.”

뿐만 아니라 여자 혼자 사나? 그래서 길거리에 돈 벌러 나왔나 보네. 아줌마 시간 있어?’ 같은 성적인 농담을 듣는 것도 예사였다. 노동조합을 통해 환경이 개선된 것은 2012년 파업에서 승리해 정규직이 된 뒤였다. 이 씨가 말했다.

노조가 뭔지 민주노총이 뭔지 하나도 몰랐죠. 그런데 누가 회사에 노동조합이 있으니 가입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막연하게 그냥 우리는 노동자니까, 조합에 가입하면 좋지않을까 해서 입사 동기들과 같이 가입을 했죠.”

노조 지부장 강동배 씨는 남동국민체육센터 소장이었다.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아침 6시에 출근하는 안내 데스크 여성 직원이 아침 식사를 굶어 안내 데스크에서 빵을 먹었다. 한 이용객이 민원을 넣자 관리부장이 사실 확인서를 서너 차례 쓸 것을 강요했다. 확인서는 징계 또는 인사이동의 근거가 된다. 책임자로서 후배 하나 못 지켜 주는 내 역할에 회의가 들었다며 노조 설립을 결심한 계기를 밝혔다.

그렇게 200910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가 생겼다. 이듬해 취임한 김현익 당시 이사장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일용직 시설 관리, 환경미화 노동자들과 계약직 스포츠 강사를 해고하고 용역을 쓰려 했다.

김현익 이사장은 우리 필요 없다고, 용역 쓰면 된다고 무시했어요. 그리고 행정직들은 우리를 어이’, ‘아줌마라고 부르고 반말도 했고요. 무시하는 말투며, 태도며. 그런게 제일 속상하더라고요. 우리도 누군가의 딸이고 어머니인데.”

이에 반발해 환경미화, 시설 관리, 스포츠 강사 등 노동자 170여 명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셔틀버스 폐지 철회 등을 요구하며 2012216일 파업에 돌입했다.

전에는 파업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유, 저 빨갱이들 왜 저렇게 길거리에 나와서 난리야?’ 하고 비난했던 이정희 씨는 자신도 똑같이 겪어 보고 나서야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그리고 이 씨는 동료 황운숙, 강명자 씨와 몸짓패 우아해(우리 노동자들의 아름다운 해방을 위하여)’를 결성해 다른 투쟁사업장에 연대도 다니며 노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57일간의 파업 끝에 노조는 공단으로부터 요구 사항을 대부분 쟁취한다. 특히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비노조원까지 포함됐고 내용적인 면에서도 큰 성과를 냈다. 일용직일 때는 일한 시간대로만 임금을 지급해서 경조사가 생겨 휴가를 가면 무급이었고 병가도 마찬가지였다. 황 씨가 말했다.

파업 전에 허리 수술을 했어요. 두 달은 쉬어야 하는데 한 달밖에 못 쉬었어요. 무급인 데다 팀장은 빨리 복귀하라니 잘릴까 봐서 다시 출근했죠.”

▲ 2012년 파업 집회에서 노동가를 부르는 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진 제공_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


정규직이 된 후에는 병가는 물론 경조사 휴가도 유급으로 바뀌고 성과급, 자녀 학자금, 급식비, 교통비 등 복리후생도 정규직과 똑같이 적용됐다. 노상공영주차장 부스도 인별로 생기고 선풍기와 난방기도 공급됐다. 가장 좋아진 점으로는 인격적 대우를 꼽았다.

행정직들이 저희한테 아줌마하며 반말했던 건 싹 들어가고 이제는 주임님하며 예의를 갖춰요. 손님들도 대우가 달라졌어요. ‘정규직 됐다면서요? 거기는 어떻게 하면 들어가요?’ 하고 부러워하기도 해요(웃음).”

공영주차장에서 일하던 이들은 201411월 구청이 안전상의 이유로 소래포구 일부 주차장을 폐쇄하면서 지금의 업무로 변경됐다. 비정규직이었다면 해고됐을 테지만 정규직이고 노조가 있어서 해고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것이 좋아졌지만 아직 이들의 마음을 속상하게 하는 일은 있다. 바로 이들의 투쟁으로 공단 전체 노동자들의 처우가 좋아졌는데도 여전히 공단이 잘해 줘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가끔씩 속이 끓어오르지만, 이정희 씨와 황운숙 씨는 후회하지 않는다.

눈치 보지 않고 기죽지 않고 회사에 우리 권리 말할 수 있는 거. 그전에는 회사 눈 밖에 날까 봐 부당한 일 있어도 참고만 지냈죠.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노조 가입한 거예요.”

▲ 이정희, 황운숙, 강명자 씨는 몸짓패 우아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2017년 여름 동광기연 집회 공연 모습. 사진 제공_이정희


관람 시간이 끝나는 오후 5시가 되자 역사관은 한산해졌다. 이들은 사무실 직원과 잠시 담소를 나눴다. 영화 ‘1987’에 관해, 그때는 데모하는 학생들을 빨갱이라고만 생각했다면서. 1987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이어진 투쟁이 없었다면 이런 일상이 가능했을까, 상상해 보았다.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