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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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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1.09 대법원장만을 섬겼던 법원1
  2. 2019.12.31 파업 투쟁의 기술2
  3. 2019.07.24 변기 26개 닦고 엉엉 울었다1

<작은책> 20194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대법원장만을 섬겼던 법원

조석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장

 

 

양승태를 구속하라! 양승태를 구속하라!”

지난 111일 아침 8시 무렵부터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대법원 안에서 정문을 막고 구호를 외쳤다. 이들 중 몇몇은 양승태 구속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대법원 담벼락에, 일부는 피의자 양승태는 검찰 포토라인에 서라는 현수막을 들고 대법원 정문 지붕 위로 올라가기도 하였다.

법원노조가 검찰 소환을 앞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기자회견을 저지하고 있다(2019111). 사진 제공_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오전 9시경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 앞에 나타나자 양승태를 구속하라는 구호는 더욱 크게 울려 퍼졌으며, ‘피의자 양승태에게 경고합니다로 시작하는 규탄 방송은 기자회견을 하는 양승태의 목소리를 덮어 버렸다. 결국 현장 소식을 중계하던 방송국에서는 양승태의 발언을 자막으로 처리하였으며, 각종 언론사의 현장취재 사진에 나온 배경은 대법원 건물이 아니라 양승태 구속 현수막과 손피켓이 차지해 버렸다.

당일 전국으로 생중계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기자회견을 방해한 장본인은 바로 법원공무원노동자들이다. 필자는 전국의 법원공무원들이 자주적으로 조직한 노동조합인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이하 법원본부)의 본부장을 맡고 있다. 왜 법원공무원들은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구속을 목놓아 외쳤을까?

먼저 양승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삼권분리를 뒤흔들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사법농단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재작년 2월 이탄희 판사에 의해 법원행정처의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이 불거지면서부터 법원본부는 이를 사법농단으로 규정하고 그 주범으로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을 지목하며 투쟁을 전개하였다. 법원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양승태 대법원장의 지시나 보고 없이 하급자들이 재판 거래와 같은 어마어마한 일을 알아서 진행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만큼, 그가 제왕적 권력을 휘둘렀던 사실을 알고 있다.

재판과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야 하는 가장 막중한 사명을 지닌 대법원장이라는 인물이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서 청와대와 재판 결과를 거래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용납할 수 없는 반헌법적인 범죄행위이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재판 결과가 일부 적폐 법관들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극도의 사법 불신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 피해는 민원현장의 최일선에서 근무하고 있는 법원공무원들이 고스란히 감당하게 되었다. 실례로 형식이 잘못된 재판 서류의 보완을 요구하는 담당 직원에게 법원이 상대편 당사자와 한통속이 되어 나를 해코지하려는 것 아니냐며 폭언을 일삼는 일이 급증하였으며, 작년 11월에는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법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민원인을 제지하던 법원공무원이 폭행을 당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법원본부가 사법농단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공개된 사법농단 관련 문건들을 보면 양승태 시절 법원행정처는 상당히 공격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 행동이 우려된다는 식으로 노조 집행부의 성향을 파악하고, 각종 회의, 내부게시판 글 게시, 집회 참석 등 노조활동을 지속적으로 사찰했으며, 이를 통해 신규 직원 조합 가입 위축 등 노조 와해 공작을 벌였다.

또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반민주적이고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독선적인 사법 정책이 법원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국민을 섬기는 법원이라는 모토를 걸고 출발한 양승태 대법원은 실제로는 대법원장 1인만을 섬기는 법원이 되었고, 대법원장 치적 쌓기를 위한 각종 전시성 행사와 사법 정책이 물적, 인적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졸속으로 집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기간 6년 동안 판사를 포함한 법원 구성원 70여 명이 사망하였으며, 그중에 약 20명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법원본부는 2014년 당시 법원 구성원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법원행정처와 공동으로 외부 전문기관에 법원공무원 근무 환경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근무 인원을 대폭 증원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효과는 1~2년 이상을 가지 못하고 다시 직원들이 쓰러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법원 구성원들의 죽음은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가 만들어 낸 비극이었던 것이다.

법원본부는 20173월부터 사법부 적폐청산을 위한 투쟁본부를 구성하고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를 끝장내고 사법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투쟁을 본격적으로 진행해 왔다.

그리고 드디어 124일 새벽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서울구치소에 구속되었다.

돌이켜 보면 2017년 대법원 앞 촛불문화제 개최, 민주적 대법원장 선출 투쟁, 2018년 양승태 대법원장 처벌을 위한 전 조합원 서명운동 및 형사 고발, 전 지부 1인 시위 및 현수막 게시 투쟁, 각종 기자회견, 대법원 앞 단식농성 투쟁, 119일 대법원 앞 연가투쟁, 1119일 적폐법관 업무배제 및 특별재판부 설치 촉구 법원본부장 삭발투쟁, 128일 사법적폐 청산을 위한 청와대 앞 결의대회, 2019111일 양승태 대법원 앞 기자회견 저지 투쟁, 양승태 구속 촉구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및 123일 영장실질심사 담당 재판부에 의견서 제출을 위한 기자회견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의 많은 투쟁들을 전개해 왔다.

글쓴이 조석제 씨를 비롯한 법원본부 지부장들은 법원 청사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다(2018.6.15.) 사진 제공_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법원본부가 흔들림 없이 양승태 구속 및 사법적폐 청산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법원 구성원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근무할 수 있도록 인권수호의 최후 보루로서 사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과 법원공무원노동자들의 노동이 존중받는 일터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승태는 구속되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법농단 관련 판사들이 여전히 법복을 입고 재판업무를 수행하고 있기에 사법농단으로 기소된 양승태, 임종헌 등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 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 해방 이후 70년 역사 이래 단 한번도 교체되지 않고 법원 구석구석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사법적폐 세력들은 호시탐탐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1만여 법원본부 조합원들은 사법개혁을 완수하고 사법부가 국민의 법원으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사법적폐 세력들과의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국민의 공무원이니까.

양승태 구속 촉구 기자회견 중인 법원노동자들(2019.1.23). 가운데가 조석제 씨. 사진 제공_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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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1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파업 투쟁의 기술

이철의/ 정년을 앞둔 철도노조 조합원

 

 

1125, 철도노조의 파업이 6일 만에 끝났다. 이전의 경고 파업까지 더하면 올해 9일간 파업한 셈이다. 올해 파업은 유난히 여론이 좋지 않았다. 수험생을 볼모로 파업을 하냐?” “다 잘라 버려라. 일할 사람 많다.” 파업 기사에 달린 댓글이 한심했다. 수서발 고속철도 통합이나 안전 인력 충원,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처우 개선 등 조합의 요구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MB나 박근혜 정부 때는 파업을 응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철도노조 힘내라. 불편해도 괜찮아.” 응원을 하고 10만 명이 모이는 연대 집회까지 열릴 정도였다. 박근혜 정부 말기 촛불 시위 때는 무려 74일이나 파업을 벌였다. 처음에는 연봉제에 반대해서 파업에 나섰는데 나중에 촛불 선봉대가 되었다. 조합원들은 신이 나서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하지만 파업이 끝나고 보니 후유증도 컸다. 파업 조합원들은 두 달 넘는 기간 무노동 무임금 신세가 되었다. 필수유지 업무 조합원들은 17개월이나 무노동 무임금에 대한 고통 분담금을 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지? 착한 정권에 반항해서 그런가? 우리는 시민들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20191122일 철도노조 파업 집회. 우리는 비정규직과 함께 철도 공공성과 사회성 강화, 임금인상을 걸고 당당히 파업했다. 사진제공_ 이철의


철도노조는 조합원 2만 명이 넘는 큰 노조이다. 파업도 차근차근 체계적으로 진행한다. 복귀 후 징계 대응이나 법정다툼도 침착하기 이를 데 없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초기, 철도노조는 24일간 파업을 벌였는데 사장이 정말로 화가 났다. 사장보다 대통령이 더 화가 났겠지, 노조 위원장이 숨어 있는 경향신문사에 경찰이 쳐들어간 것을 보면 대통령의 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정부의 태도가 그러니 회사도 강경 일변도였다. 파업 참여자 12천 명을 전원 징계에 회부한 것이다. 받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징계에는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하다. 관리자 7명 정도가 위원이 되어 나름 그럴듯한 심문 절차도 밟는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을 징계하려니 시간과 인력이 허락하지 않았다. 회사는 삼십 분에 한 명씩 속전속결로 해치우려고 하였다. 철도노조 단체협약에 따르면 노동조합 측 인사가 진술인이나 의견 대리인으로 참석한다. 반론권을 행사할 수 있고 징계위원을 기피할 수도 있다. 부당하다고 생각한 징계에 노동조합은 지연 전술로 맞섰다. 절차나 태도를 시비 걸어 징계위원을 기피하거나 진술을 한없이 길게 하여 질질 끌었다. 조합원들은 겁도 없이 징계장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관리자들을 골리기도 하였다. 회사는 징계를 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나중에 조합원들 수백 명이 집단 삭발하며 재파업 분위기가 무르익자 탄압이 수그러들었다.

처음 파업했을 때가 생각난다. 1988726, 올림픽을 50여 일 앞둔 때였다. 그때 한 달 300시간에 가까운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참다못한 철도 기관사들이 파업을 벌였다. 기관사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쉬자.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기관사 부인들 수백 명이 철도청 청사 앞에서 농성을 벌이며 내 남편을 돌려 달라고 호소했다. 조합은 지독한 어용노조여서 조합원들의 권리는 관심 밖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농성에 쓴 장구와 북을 모두 찢고 농성 주동자들을 경찰에 제보했다고 한다. 위원장은 텔레비전에 나와 불법 파업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파업은 열네 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백골단이 쳐들어와 농성하던 기관사들을 몽땅 잡아갔던 것이다. 기관사들은 경찰, 노동부, 안기부 조사를 차례로 받고 개전의 정을 보인 끝에 석방되었다. 가슴에는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라고 쓴 깃을 달고 기관차에 올랐다.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1994년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 연대파업 전 결의대회 사진. 사진제공_ 이철의.


1994년 철도 지하철 연대 파업은 말 그대로 교통대란을 만들었다. 그때 나는 주동자로 구속되어 있었는데 아내가 늘 오후에 면회를 왔다. 왜 하필 운동할 때 오냐? 오전에 오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차가 막혀 면회 오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비록 강경 탄압으로 패배했지만 우리는 원없이 싸웠다. 조합원들은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경찰을 피해 흩어졌다. 노장들은 지금도 계곡에 숨어 밥해 먹던 이야기들을 하곤 한다.

2006KTX 승무원과 함께 철도공사 사옥에서 농성하다 연행되는 모습. 사진제공_이철의.


2002, 2003, 2006, 2009, 2013, 2016. 숨가쁜 파업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구속자와 해고자가 탄생하고 징계와 손해배상 등 탄압이 뒤따랐지만 노동자들은 싸움의 고수가 되어 갔다. 회사 쪽 관리자들은 때가 되면 보직을 바꾼다. 하지만 노동조합 투사들은 파업 때마다 싸움의 기술을 익힌다. 갓 입사한 신입들은 선배들이 싸우는 것을 보며 잔뼈가 굵어 간다. 정의감이 유달리 강하거나 인간성이 좋은 후배들은 파업 끝에 자연스럽게 노조 간부의 길로 들어섰다. 그 결과 민영화 법안을 철회시키고 외주 위탁을 멈추게 하였다. 노동시간도 점점 단축되었으며 직장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 문제를 일으킨 관리자들을 반드시 혼내 주니 성희롱이나 폭언·폭행, 갑질이 사라져 갔다. 민주노조 20년에 철도 현장은 몰라보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에게 이번 파업은 마지막이자 송별 파업이 되었다. 파업으로 송별회를 대신해 주니 후배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번 파업은 특히 자회사 조합원들 수천 명이 함께하였다. KTX 승무원, SRT 승무원, 고객 센터 조합원, 그리고 역무 위탁 조합원들은 파업 기간 동안 대전 철도공사 본사 앞에서 농성을 하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 비정규직과 함께하려는 노동조합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앞으로도 철도노조는 철도 공공성과 사람다운 삶을 위한 분투를 계속해 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한국 사회 모든 노동자들과 연대에도 앞장서기를 기대한다.

▲ 2019년 1230일 마지막 근무날왼쪽 붉은 게시판에 ‘0’ 표시는 정지 위치를 10센티미터도 안 틀리게 딱 맞췄다는 뜻이다. 철도공사는 이런 나를 평생 징계만 했다. 사진제공_ 이철의


*글쓴이는 2019년 12월 30일 근무를 끝으로 정년퇴직을 하였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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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변기 26개 닦고 엉엉 울었다

허지희/ 세종호텔에서 일하고 농성하고 애도 키우는 아줌마

 

 

명동역 10번 출구 세종호텔. 이 출근길을 25년째 다닙니다. 대표전화를 받는 전화교환원으로 20, 호텔방을 청소하는 룸어텐던트로 5년 동안 근무하고 있습니다.

▲ 객실을 정돈하는 세종호텔 룸어텐던트 노동자. ⓒ작은책(정인열)


세종대학교 재단에서 113억 회계 비리로 퇴출되었던 주명건 전 이사장이 세종호텔 회장에 복귀하면서 복수노조, 전환배치, 구조조정, 해고 등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우리 회사에서 벌어졌습니다. 전화 통화량을 조사하는 회사의 행동으로 이미 교환실이 아웃소싱되거나 해체될 수 있다는 예감에 2012년 세종호텔 노동조합의 파업과 로비 점거에 참가했습니다만, 내 일자리를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20년 근속상을 받은 201412195, 타월을 개고 침대 시트를 갈고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룸어텐던트로 발령이 났습니다. 호텔에서 장기 근속한 여직원을 청소 노동자로 발령 내는 것은 흔히 쓰는 퇴출 방법입니다. 둘째 아이의 육아휴직이 남아 있어 고민도 했지만 사표는 내일 써도 되고 다음달에 써도 되니 함께 싸우자는, 지금은 해고된 세종호텔노조 김상진 전 위원장의 말씀에 용기를 내 보기로 했습니다.

발령이 나고 처음 한 일은 교환실 유니폼을 입은 내 마지막 모습을 셀카로 찍는 일이었습니다. ‘20년을 입어 왔지만 다시는 입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었으나 막상 룸어텐던트의 유니폼과 앞치마를 입었을 때는 서러워 눈물도 나고 타인이 사용한 변기를 닦으려니 장갑을 껴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2주간의 청소 교육은 타월 개는 법부터 시작했고 단 한 번 욕실 청소하는 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날에 13, 둘째 날까지 26개의 변기와 욕조, 세면대를 닦았습니다. 청소 교육 이틀 만에 어깨와 허리에 파스가 덕지덕지 붙었습니다. 퇴근길에 만난 남편과 순댓국집에서 소주만 퍼붓고 가게가 떠나가도록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 객실 내 화장실을 청소하는 세종호텔 룸어텐던트 노동자. ⓒ작은책(정인열)


이걸 왜 해야 되는데. 흑흑. 울엄마는 이럴 줄 모르고 대학 보내고. 엉엉.”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은행 계좌에 월급이 입금된 걸 보는 순간, 돈이다. 난 돈 벌러 회사 다니는 사람이다.”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돈이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혼자라면 오래 버틸 수 없었겠지만, 우리 팀에는 노동조합 조합원이 있어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청소 노하우도 공유하며 중고 신입 막내를 살뜰히 챙겨 주셔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도 힘드신 거 뻔히 아는데, 내게 배정된 층에 오셔서 나 몰래 베드도 갈아 놓고 가시고, 그분들이 내게는 엄마였고 천사였습니다.

초보 룸어텐던트는 객실 타입도 잘 모르고 린넨을 봐도 싱글인지 더블인지 구분을 못해 정리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복도에서 우왕좌왕하는 시간이 청소 시간보다 더 많았습니다. 사드 배치 이전의 명동은 중국인 물결이었는데, 화장품을 사서 알맹이만 슈트 케이스에 담고 제품 케이스로 방마다 두세 곳의 쓰레기 언덕을 만들었고 쓰레기통을 제외한 모든 곳에 쓰레기를 버려 댔습니다. 바닥에 던져진 콘돔을 모르고 집었다가 장갑이 엉망이 되기도 하고 얇은 와인 글라스와 8온스 컵을 씻다가 금이 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전환배치된 날 어용노조 전화교환 직원도 함께 발령이 났는데 팀장은 세종호텔 노동조합원인 내게만 이런저런 이유로 수시로 경위서를 요구했습니다. 20년 동안 교환실에서 써 본 적 없는 경위서를 룸어텐던트가 된 후에는 매달 썼을 정도였습니다. 전 직원 성과연봉제가 어용노조 위원장과 대의원 3명의 직권 조인으로 통과된 후 룸어텐던트 파트는 전에 없던 인스펙터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인스펙터는 룸어텐던트가 청소한 객실을 점검하는 사람인데 원래 인스펙터 업무는 룸어텐던트가 실수로 빠뜨린 것을 채워 주고 보완하는 일이지만 세종호텔 인스펙터의 업무는 사진과 채점입니다. 청소한 객실에서 흠을 찾아 증거로 사진을 찍어 팀장에게 매일 전송하고 객실 청소 상태를 등급으로 매겼고 팀장은 사진과 등급으로 성과연봉제 임금 삭감의 사유를 준비했습니다. 마음은 그러지 말자 생각했지만 인스펙터에게 지적당하거나 사진을 찍히고 나면 더 치밀하고 꼼꼼히 일하게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병들어 갔습니다. 테니스엘보와 손목터널증후군은 룸어텐던트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병명이고, 내 경우엔 디스크가 약해 2017년에는 목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는 허리디스크도 함께 왔으며 어깨회전근 미세 파열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채점된 성과연봉제 첫해 저의 임금은 9퍼센트 삭감. 오랫동안 임금이 동결되었기에 9퍼센트 삭감된 후 월급은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습니다. 삭감 사유는 딥클리닝 개수 부족. 딥클리닝이란 욕실 천장 곰팡이부터 타일 줄눈까지 락스 작업을 하고, 사다리로 올라가 천장 먼지를 제거하고, 침대를 들거나 밀어 침대 아래 먼지도 제거하고, TV장과 걸레받이를 청소하는 일 등입니다. 타 호텔에서는 딥클리닝 전문 직원을 둔다는데 세종호텔에서는 룸어텐던트에게 시켰습니다.

그 딥클리닝을 하루에 한 방씩 점검받아야 하는데 내 경우는 대학 입학시험문제 출제 교수가 체크인 한 적이 4번이나 있었습니다. 대입 출제 교수가 묵는 방은 가벽을 만들어 직원조차 못 들어가는 출입금지 구역이 됩니다. 딥클리닝 자체가 불가능했음에도 회사는 그걸 임금 삭감 사유라고 내밀었습니다.

반면 어용노조 조합원 중에는 단 한 명이 3퍼센트 삭감되고 나머지는 전원 동결되어 세종호텔 노동조합과 형평성도 없고 차이가 심하게 났습니다. 타 회사의 성과연봉제는 인상되는 연봉제지만 세종호텔의 성과연봉제는, 사원은 최대 10퍼센트까지 계장 이상은 30퍼센트까지 삭감할 수 있는 악법 중의 악법입니다. 그 기준으로 세종노조 계장님 몇 분은 2년 연속 삭감당해 월급이 반토막 난 분도 있습니다.

호텔 직원들은 구조조정으로 퇴사해 나가고 팀장들의 회유와 협박에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로 빠져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이제 15명의 소수 노조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오전, 오후 선전전과 매주 목요일의 집회로 9년째 투쟁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내며 회사의 부당함을 당당히 말하는 힘이 세종노조의 저력입니다. 그 힘으로 특별감독관이 나오기도 하고 작년에는 잠시나마 교섭이 이뤄지기도 해 일부 조합원이 전환배치에서 복직하는 성과도 이뤄 낼 수 있었습니다.

사법 적폐 임종헌과 사돈이며 친이명박 적폐 판사 박성준이 사위고, 전 외교부 장관 유명환을 재단 이사장에 세워 놓은 주명건 회장의 힘은 영원할 듯했습니다. 그러나 임종헌이 구속된 이후 교육부의 세종대 감사가 실시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시기라 판단하고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호텔 정문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김상진 전 위원장의 해고자 복직과 나의 전환배치에 대한 원직 복직과 성과연봉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도 힘들고 농성도 힘들지만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뷔페 설거지와 고기 굽기도 했고, 전화교환이든 룸어텐던트든 내 일, 나 자신의 일이기에 나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세종호텔에서 또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으나 노조와 함께 회사에 할 말 하며 당당하게 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 세종호텔과 서비스연맹 노동자들이 지난 5월 세종호텔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_세종호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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