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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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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4월호

독립영화 이야기_ 갈재민 감독의 <인투 더 나잇>


수많은 밤을 지나 닿은 곳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인투 더 나잇> 포스터 갈재민, 2016


저희 동네 대보름 행사에 작은책 식구들이 놀러 오셨어요. 달집태우기가 끝나고 저희 집으로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안건모 대표님이 독립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할 만한가?” 물어오셨어요. ‘혹시나 필자를 교체할 생각인가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개봉 영화 구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매번 꼴찌 아니면 끝에서 두 번째로 글을 보내는 것에 대한 변명이기도 했고 사실이기도 했어요. 유이분 편집장님이 그럼 콘셉트를 바꿀까요?”라는 의견을 냈지만 저는 힘들더라도 열심히 해 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2017년의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글을 보니 상업영화 제작과 유통에 필요한 자본 조달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독립·예술영화의 제작·유통은 여전히 어렵다는 문구가 있더라고요. 독립영화들은 극장 잡기도 힘들고 잡았다 하더라도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한 번 상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개봉 첫 주 주말 관객 수에 따라서 상영 목록에서 금세 사라지기도 합니다.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데도 독립영화 감독들은 꾸준히 극장 개봉을 추진하고 어렵게 극장을 잡았다가 스르르 사라집니다. 어떻게든 관객과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의 동료들이 있는데 어떻게든 이 소중한 지면에 그 소중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이 저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지면의 자취는 독립영화 감독들의 고군분투의 역사이자 제 동료들에 대한 저의 우정의 연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달 영화는 갈재민 감독의 <인투 더 나잇>입니다. 저는 음악에 문외한이라 다른 영화가 있었으면 그 영화를 선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4월호에 실을 수 있는 영화는 이 영화가 유일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시네마달 김일권 피디의 선택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일권 피디가 그동안 푸른영상 작품을 포함해서 수많은 독립영화들을 배급해 왔고 덕분에 블랙리스트에도 올랐는데, 이번 한 번쯤은 나도 김일권 피디의 취향을 이해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도시에 밤이 내리고 로큰롤 밴드의 음악이 흐릅니다. 그렇게 영화 제목이 뜨고 나면 연습하고 술 마시고 연습하고 술 마시는 장면들이 반복됩니다. 솔직히 초반엔 걱정이 앞섰습니다. 나는 로큰롤 음악을 모르는데 이 영화가 로큰롤 마니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라면 나는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아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2013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상을 받았던 배우 한주완이었습니다. 당시 한주완의 수상 소감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주었지요.


공공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요즘따라 애쓰고 있는 아버지들이 많이 계십니다. 노동자 최상남을 연기한 배우로서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힘내십시오.”


그가 아버지라고 칭한 사람들은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에 앞장섰던 철도 노동자들이었고 그 전날 저는 그분들을 지지하며 광화문 광장에 다녀왔었거든요. 그 한주완이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 음악을 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가 참 오래전부터 촬영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주완은 등장하자마자 리더 차승우를 매료시키더니 5분 만에 퇴장하고 맙니다. 성공한 배우가 되어 바빠져 버렸거든요.


영화에는 수많은 보컬들이 등장합니다. 한주완 이전에 조영빈이 있었고 그 후에는 김세영, 그리고 마지막엔 훈조가 나옵니다. 김세영과 훈조 사이에는 오디션을 보러 오는 또 다른 많은 보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등장과 퇴장을 보다 보면 영화의 주인공이자 팀의 리더인 차승우의 지치지 않는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장르는 다르지만 같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차승우에게 깊이 몰입되더군요.


영화 <인투 더 나잇> 스틸이미지


아무리 친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밴드 같이하면 스트레스를 주고받고, 싫더라구요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니 취향, 니 세계관을 반영하라며 김세영을 다그치는 장면에서는 살짝 숨이 막혔습니다. 처음 차승우는 나랑 비슷한 온도의 사람이라며 김세영에게 환호했었거든요. 형의 페르소나를 하면 되는 거죠?”라는 말을 던지며 생기발랄하게 무대를 휘젓던 김세영은 내가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퇴장해 버립니다. 형의 플로어를 침해하고 싶지 않다는 김세영에게는 침범이 아니라 부딪쳐야 하고 너만의 플로어를 내세워야 한다는 차승우의 요구가 버거웠던 것 같습니다. 보컬 김세영의 결합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더 모노톤즈는 그렇게 5번의 공연을 끝으로 긴 공백기에 접어듭니다. 보컬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후 어렵게 보컬을 구했지만 오랜 맏형이었던 베이시스트 박현준이 그만두는 등 더 많은 어려움들이 지나가고 결국 영화는 인투 더 나잇을 연주하는 더 모노톤즈의 모습과 2016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더 모노톤즈는 그해 최우수 록 음반 부문 상을 받게 되었거든요. 영화 덕분에 로큰롤에 익숙해져서인지 음악이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차승우의 수상 소감에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구요.


수많은 밤들이 지나갔어요. 적절한 가사나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아서 머리를 쥐어뜯던 밤, 갑자기 멤버가 탈퇴 선언을 해서 속이 썩었던 밤, 녹음실에서 지루했던 수많은 밤들. 그런 밤들이 의미가 있었던 시간들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아서 정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인투 더 나잇>을 보며 꿈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닿고 싶은 음악의 세계로 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걷고 있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인투 더 나잇>을 보며 성장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차승우는 초반에 보컬들에게 어떻게 발음하고 어떤 몸짓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를 조언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플로어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자라 온 것처럼요.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 기타리스트 차승우와 베이시스트 박현준은 노브레인과 삐삐밴드에서 일찍부터 자신의 기량을 뽐내왔던 유명 아티스트들이고 팬 층도 두껍더라구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검색해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인투 더 나잇>은 음악에 문외한인 저에게도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던져 준 아주 뜻깊은 영화였습니다. <인투 더 나잇>은 개봉해서 현재 극장 상영중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문의:시네마달 02-337-2135 http://cinemada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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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4월호

서울 여자 독일 아줌마로 살기


네가 그 일곱 개째 동양인이구나

조숙현/ 29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아줌마

 

 

창문을 열면 강 건너편 초등학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들립니다. 강 하나 사이에 두고 우리 집 바로 정면에 학교가 있어요. 제 아이들이 나온 초등학교입니다.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 과정이고 2년 지나 반이 갈려요. 1, 2학년이 같은 아이들이고 3학년 때 다른 아이들과 다시 섞어 반을 조성합니다. 담임 선생님도 2번 바뀌는 거죠. 큰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반에서 유일한 동양인 아이였거든요.


유치원을 같이 다닌 친구들과 같은 학교로 입학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싫어했어요. 씩씩하다 못해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인데 많이 울고 짜증도 내고 숫기도 없어지고. 어느 날 아이 노트를 보니 낙서를 했더라고요.

죽고 싶다. 엄마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다 같다고 했는데, 왜 아이들이 아이처럼 다 같이 놀지 못하나.”

ⒸPixabay

여덟 살짜리 아이 낙서가 이랬어요. 그 낙서를 본 저는 가슴이 백만 근짜리 무게로 짓눌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면담 약속을 잡고 낙서를 보여 줬습니다. 선생님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몰랐다니. 참 쉬운 대답입니다. 한 학급이 20명에서 22명입니다. 그리고 2년 동안 같은 반 아이들이죠. 그런데 모를까요? 외면한 거겠지요. 그동안 아이들은 큰애의 가방을 빼앗고 안경을 빼앗아 냇물에 던지고 침을 뱉고 칭챙총(동양인 비하 용어)이라는 놀림말을 등 뒤에서 불렀는데 담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놀린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 그러지 못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그 부모들 반응도 그랬습니다. 아이가 그런 건데 뭘 그렇게 난리냐고.


하지만 낙서를 본 순간 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시정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장은 제게 어머님은 너무 감정적이라며 진정하라고 하데요. 당한 사람은 감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한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행동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고나서 마을에 전단지를 돌리고 서명을 받고 학부모 회의를 요구했습니다. 마을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갔습니다. 유치원 학부모 회의도 갔습니다. 제발 집에서 다양성에 대해서 교육해 달라고. 독일인도 해외여행을 가면 외국인이 되는 거고 동네에 독일인만 사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유치원만 해도 여러 나라 아이들이 있는데 언제까지 아이가 그런 건데라는 대답을 할 거냐고.

ⒸPixabay


한 아버지가 그러더군요. 아이들은 안경 낀 아이도 브릴레 슐랑에(안경뱀)라고 놀리고 주근깨도 놀리고 뚱뚱한 아이도 놀리지 않냐고. 그건 결코 답이 아닙니다. 안경은 렌즈로 교정이 되고 주근깨도 없앨 수 있고 살도 뺄 수 있지만 동양인 엄마한테서 자신의 선택 없이 태어난 아이를 어떤 방법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세상의 다양함을 배우고 느껴야 차별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요. 제발 집에서 더러운 외국인이라든지 나쁜 외국인이라는 발언부터 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어른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단어를 아이들이 그대로 습득해 차별을 배운 거라고요.


시장님과도 면담을 했습니다. 시장은 자신이 그 학교의 교사로 근무를 했었는데 몰랐다고, 그런 문제는 없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동양인인 제 아이가 그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니까요. 동양인이 학교에 입학했고 그제서야 생기기 시작한 문제인데 시장인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습니다. 저는 그때 독일어를 잘하지 못했을 때였어요. 하지만 울고 다니는 제 아들이, 집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제 아들이, 저를 보고 있기에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니 느낄 수도 없었어요. 어찌 됐든 내 아이를 다시 세상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저희 집 가족 구성원은 다 외국인입니다. 보스니아 사람인 남편, 한국인인 저, 그리고 혼혈인 두 아이들. 독일 국적을 갖고 있어도 어차피 외모상 이방인인 우리들이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나부터 대항하고 문제 해결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처음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저보고 네가 그 일곱 개째 동양인이구나!”라고 말한 할머니께 ! 그래? 독일인은 몇 개가 사는데?”라고 대답했죠. 그리고 니 남편이 널 얼마 주고 샀냐?”고 묻는 어떤 남자에게 내가 내 남편을 샀다고, “체류 허가가 필요해서 내가 샀어. 넌 니 부인 얼마 주고 샀니?”라고 물었더니 자기 부인은 독일 여자라고 대답하더군요. 전 시치미를 뚝 떼고 ! 난 독일 남자는 다 부인을 돈 주고 사는 줄 알았네. 우리는 그냥 서로 좋으면 결혼 하는데!”라는 대답을 줬습니다.


그때는 독일에 매매혼이 한창 성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자국인과 결혼이 힘든 남자들이 매매혼을 참 많이 하던 시절이었어요. 카탈로그를 보고 여성을 고른 뒤에 돈을 지불하고 결혼하는 남자들이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지던 때였습니다. 덕분에 동양인 여성이나 피부색이 검은 여성들은 왠지 팔려 온 여자라는 이미지가 있었지요. 지금도 그리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대놓고 그러지는 않네요. 저부터 그런 모멸감을 느끼고 살았는데 아이들까지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싸웠고, 드디어 학교에서 아이들이 제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유치원에서 각 나라의 국기와 위치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유치원에 있는 아이들의 나라말로 인사말을 써서 벽에 붙이고 다문화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저는 인사하기를 가르쳤어요. 적어도 예의 없는 놈이라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서요. 길에서 사람을 보면 구텐 탁!”을 하게 하고 쓰레기가 있으면 줍게 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솔선수범을 보여 주며 길렀습니다. 제가 집에서 제 부모님께 배운 것처럼요. 빈 병에 동전을 모아서 병이 꽉 차면 기부를 하는 습관도 들여 줬습니다. 그 습관은 아이들이 성년이 된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시켰어요. 절대로 타인을 먼저 때리면 안 되지만 공격받았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속에 담은 화도 스스로 풀어 갈 수 있고 힘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도 배우기 때문에 아주 잘한 결정 같습니다. 그렇게 2년을 마을에서 외국인 차별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둘째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더군요. 이만하면 정말 큰일을 해 놨다! 싶었어요.


몇 년 후에 한국의 방송사에서 독일의 다문화 정책에 관한 방송 문의가 왔습니다. “옳다구나!” 싶어 우리 동네와 주변 학교를 텔레비전 방송 카메라와 함께 인터뷰하러 다녔습니다. 시장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우리 동네는 그런 차별 문제 없이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 눈치를 엄청 보셨지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맞은편 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습니다. 항상 저렇게, 아이들이 아이라는 가장 큰 공통점 하나로 즐겁게 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든 곳에 말간 얼굴의 반짝이는 눈동자로 살았던 아이들이 자라서 평화와 조화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공통분모를 가진 나뉨의 단어가 아닌 모두를 어우르는 교집합이길 바랍니다. 옛 생각을 하면서 두드리는 자판이 많이 떨렸습니다. 오래된 일이고 지금은 엄청난 친구들을 몰고 다니는 아이들인데도 어렸을 때 그 기억은 참 많이 아프네요. 글을 쓰는 엄마 손가락은 아직도 부르르 떨리는데 아이들 가슴은 그때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래도 모나지 않고 예의 바르고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커 준 아이들에게 참 감사하며 글을 마칩니다.

posted by 작은책
2018. 3. 27. 14:16 알림 / 엮은이의 글


차례


4 책이 이끄는 여행

제주 4·3항쟁과 순이 삼촌’    박준성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인생    김복순

14 촌 말 서울말    박소영

18 베트남의 기억과 손잡는 일    권현우

23 제주 4·3 기행에서 평화를 새기다    권미강

27 서울 여자 독일 아줌마로 살기

네가 그 일곱 개째 동양인이구나    조숙현

32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여보, 난 명품빽 안 살게    윤혜신

37 한일수의 유감천만

나 홀로 한의원을 꿈꾸며    한일수

42 청년으로 살아가기

미투 운동과 B급 며느리    진솔아

46 이야기가 있는 사진    신창범, 안석희

48 살아온 이야기(10)

혼자 중국에서 전환점을 돌다    이하나

54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평창을 떠나는 내 친구    안재성

59 교실 이야기

밥은 먹었냐?    최관의

63 이야기가 있는 들녘

땅끝에서 받은 위로    김진회

68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70 일터 탐방_ 태경산업

세 명이 조합원인 노조, 큰일합니다    정인열

76 일터에서 온 소식

36524시간 비상대기    백현철

81 작은책 법률 상담소

진실을 말해도 처벌을 받는다?    김묘희

 

작은책이 만난 사람_ 정병규

85 동화나라에서 사는 정병규    안건모

106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108 생각해 봅시다    시간이 약이 아닌 사람들    한채민

112 여성으로 살아가기    R과 나의 최선    홍승은

117 ‘그때 그 사건다시 보기

통일은 바라지도 않는다    김형민

122 생태 이야기

폭행당한 가리왕산은 방치되는가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7 책 읽고 딴 생각    혁명의 성자 호찌민    안건모

130 독립영화 이야기    수많은 밤을 지나 닿은 곳    류미례

135 우리 지역 깊은 역사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정종배

140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엮은이의 글

 

봄소식이 들려옵니다. 지난해 이맘때는 박근혜의 탄핵 인용 소식이 들리더니 올해는 이명박의 구속 영장 청구 소식이 전해집니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이 이렇게 심판을 받게 되다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세상이 더디지만 조금씩 바뀌긴 하나 봅니다.

얼마 전엔 독자 한 분이 전화를 해서 책을 그만 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정권이 바뀌었으면 <작은책>도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책 내용이 희망적이지 않다고요. 그 전화를 받고 나서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독자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부분이 뭘까 생각했어요.

새 정부가 들어서고 앞으로 우리 서민들의 삶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기대와 희망을 품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우리 삶터, 일터와는 무관한 그들만의 리그’, 각축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요. 우리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고 힘들기만 한데 말이죠. 하지만 아직은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라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믿어 보려고요. 그런 세상 만들기 위해 노력해 보려고 해요. <작은책>의 역할이 그런 거라고.

새해 들어 독자님들께, “<작은책>은 작고 낮은 곳에서, 소외된 사람, 일하는 사람, 서민들의 웃고 우는 삶을 오롯이 담아내겠다고 한 약속 지키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독자님들! <작은책>2018년도 우수콘텐츠잡지로 선정되었어요. 좋은 글 주신 필자님들과 <작은책>을 아껴 주신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응원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2018320

유이분 올림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3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인천광역시 남동구도시관리공단


정규직 되니 '아줌마'라고 안 불러요

정인열/작은책 기자


▲ 소래역사관 전경 ⓒ작은책(정인열)

어시장으로 유명한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소래포구. 이곳에는 소래 지역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설립한 소래역사관이 있다. 역사관 안내데스크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이정희 씨(53)와 황운숙 씨(50)를 비롯한 역사관 노동자는 모두 남동구도시관리공단(이하 공단) 소속 정규직원이다. 공단은 남동구의 체육 시설, 공공 청사 시설 관리, 공원, 주차 관리, 문화 복지 사업 등을 관리·운영하는 지방 공기업으로 약 17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남동구도시관리공단은 비정규직 없는 보기 드문 사업장이다. 무기 계약직이나 하청회사 정규직 같은 가짜 정규직이 아니다. 환경미화원까지 공단 시설 관리직으로 호봉제 및 8급 주임에서 5급 대리까지 근속 승진도 가능한 진짜 정규직원이다.

▲ 소래역사관 안내 직원 이정희 씨와 황운숙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다 우리가 파업하고 투쟁해서 일궈 낸 거예요.”

이정희 씨가 당당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정희 씨는 2011, 황운숙 씨는 2008년부터 공단 노상공영주차장 주차 정산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1년마다 고용 계약을 갱신하는 일용직(비정규직)이었다. 황은숙 씨가 당시 환경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는 부스도 휴게실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점심을 그냥 길바닥에서 먹는데 너무 창피했어요. 그래서 아예 안 먹고 일주일을 굶었어요. 비오는 날은 그대로 비 맞고, 추울 때는 바람 맞고 일했죠. 소지품도 둘 곳도 없어서 구두 수선이나 노점상 하는 사람 사귀어서 소지품 맡기고.”

황 씨는 도로 중앙선을 넘어 다니며 목숨의 위험을 느끼면서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주말에는 특근수당도 지급한다는 말에 한 달에 하루만 쉬고 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공단은 최저임금에 특근수당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황 씨가 손에 쥐는 월급은 120만 원이 채 안 됐다.

이 씨는 공단에 들어오기 전 도시가스 검침을 했다. 그 일 역시 임금이 너무 적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공단에 입사했다.

소래포구 주차장은 꽃게철이면 주말에 차량 1000여 대가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었다. 횟집에서 술 한잔 걸치며 서너 시간 주차장을 이용하는 손님들도 많아서, 요금을 정산할 때면 반말을 하며 화를 내는 취객들도 상대해야 했다.

▲ 소래포구 노상공영주차장에서 한 노동자가 주차 정산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_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


요금 7, 8천 원 나왔다고 사람을 팰 것처럼 행패 부려요. ‘왜 이렇게 비싸? 아줌마.’ 하고 따지고. 그런 일이 하루에 10건 이상이에요.”

뿐만 아니라 여자 혼자 사나? 그래서 길거리에 돈 벌러 나왔나 보네. 아줌마 시간 있어?’ 같은 성적인 농담을 듣는 것도 예사였다. 노동조합을 통해 환경이 개선된 것은 2012년 파업에서 승리해 정규직이 된 뒤였다. 이 씨가 말했다.

노조가 뭔지 민주노총이 뭔지 하나도 몰랐죠. 그런데 누가 회사에 노동조합이 있으니 가입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막연하게 그냥 우리는 노동자니까, 조합에 가입하면 좋지않을까 해서 입사 동기들과 같이 가입을 했죠.”

노조 지부장 강동배 씨는 남동국민체육센터 소장이었다.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아침 6시에 출근하는 안내 데스크 여성 직원이 아침 식사를 굶어 안내 데스크에서 빵을 먹었다. 한 이용객이 민원을 넣자 관리부장이 사실 확인서를 서너 차례 쓸 것을 강요했다. 확인서는 징계 또는 인사이동의 근거가 된다. 책임자로서 후배 하나 못 지켜 주는 내 역할에 회의가 들었다며 노조 설립을 결심한 계기를 밝혔다.

그렇게 200910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가 생겼다. 이듬해 취임한 김현익 당시 이사장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일용직 시설 관리, 환경미화 노동자들과 계약직 스포츠 강사를 해고하고 용역을 쓰려 했다.

김현익 이사장은 우리 필요 없다고, 용역 쓰면 된다고 무시했어요. 그리고 행정직들은 우리를 어이’, ‘아줌마라고 부르고 반말도 했고요. 무시하는 말투며, 태도며. 그런게 제일 속상하더라고요. 우리도 누군가의 딸이고 어머니인데.”

이에 반발해 환경미화, 시설 관리, 스포츠 강사 등 노동자 170여 명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셔틀버스 폐지 철회 등을 요구하며 2012216일 파업에 돌입했다.

전에는 파업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유, 저 빨갱이들 왜 저렇게 길거리에 나와서 난리야?’ 하고 비난했던 이정희 씨는 자신도 똑같이 겪어 보고 나서야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그리고 이 씨는 동료 황운숙, 강명자 씨와 몸짓패 우아해(우리 노동자들의 아름다운 해방을 위하여)’를 결성해 다른 투쟁사업장에 연대도 다니며 노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57일간의 파업 끝에 노조는 공단으로부터 요구 사항을 대부분 쟁취한다. 특히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비노조원까지 포함됐고 내용적인 면에서도 큰 성과를 냈다. 일용직일 때는 일한 시간대로만 임금을 지급해서 경조사가 생겨 휴가를 가면 무급이었고 병가도 마찬가지였다. 황 씨가 말했다.

파업 전에 허리 수술을 했어요. 두 달은 쉬어야 하는데 한 달밖에 못 쉬었어요. 무급인 데다 팀장은 빨리 복귀하라니 잘릴까 봐서 다시 출근했죠.”

▲ 2012년 파업 집회에서 노동가를 부르는 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진 제공_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


정규직이 된 후에는 병가는 물론 경조사 휴가도 유급으로 바뀌고 성과급, 자녀 학자금, 급식비, 교통비 등 복리후생도 정규직과 똑같이 적용됐다. 노상공영주차장 부스도 인별로 생기고 선풍기와 난방기도 공급됐다. 가장 좋아진 점으로는 인격적 대우를 꼽았다.

행정직들이 저희한테 아줌마하며 반말했던 건 싹 들어가고 이제는 주임님하며 예의를 갖춰요. 손님들도 대우가 달라졌어요. ‘정규직 됐다면서요? 거기는 어떻게 하면 들어가요?’ 하고 부러워하기도 해요(웃음).”

공영주차장에서 일하던 이들은 201411월 구청이 안전상의 이유로 소래포구 일부 주차장을 폐쇄하면서 지금의 업무로 변경됐다. 비정규직이었다면 해고됐을 테지만 정규직이고 노조가 있어서 해고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것이 좋아졌지만 아직 이들의 마음을 속상하게 하는 일은 있다. 바로 이들의 투쟁으로 공단 전체 노동자들의 처우가 좋아졌는데도 여전히 공단이 잘해 줘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가끔씩 속이 끓어오르지만, 이정희 씨와 황운숙 씨는 후회하지 않는다.

눈치 보지 않고 기죽지 않고 회사에 우리 권리 말할 수 있는 거. 그전에는 회사 눈 밖에 날까 봐 부당한 일 있어도 참고만 지냈죠.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노조 가입한 거예요.”

▲ 이정희, 황운숙, 강명자 씨는 몸짓패 우아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2017년 여름 동광기연 집회 공연 모습. 사진 제공_이정희


관람 시간이 끝나는 오후 5시가 되자 역사관은 한산해졌다. 이들은 사무실 직원과 잠시 담소를 나눴다. 영화 ‘1987’에 관해, 그때는 데모하는 학생들을 빨갱이라고만 생각했다면서. 1987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이어진 투쟁이 없었다면 이런 일상이 가능했을까, 상상해 보았다.

posted by 작은책
2018. 3. 7. 16:53 기획 특집

<작은책> 2018년 3월호

작은책이 만난 사람_ 구수정


미안해요 베트남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혹시나 한국인 여행자가, 베트남어를 잘 아는 한국 여행자가 저녁 무렵에 베트남 중부 지방에 있는 빈호아 마을을 지날 때면 이런 자장가를 들을지도 모른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한국군들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넌 커서도 이 말을 꼭 기억하거라.”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이사가 그랬다. 빈호아 마을을 지나가다가 이런 자장가를 들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한에 받쳤으면 이런 자장가를 불러 딸, 아들, 손주들에게 들려주고 있을까.

1993년에 무작정 베트남으로 유학을 떠난 구수정은 1999년에, 베트남전쟁 기간에 일어났던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학살의 진실을 마주하고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99년부터 <한겨레21>에 연재를 했다. 그 때문에 한국 참전군인들로부터 압박과 위협을 받기도 했다. 베트남 유학 1세대, 구수정 씨는 어떤 사람일까. 파란만장한 그이의 삶과 더불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문제를 되돌아본다.

 

노동자로 살려고 했다

구수정은 1985년에 한신대에 입학했다. 당시 한신대는 진보적인 교수들이 많았다. 전국의 수배자들이 이곳에 있었고 전국의 해고 교수들도 와 있었다. 정운영 교수, 김수행 교수, 조희연 교수 등이 있는 한신대에서 공부하면서 학보사 기자를 했던 구수정은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를 바로 보게 됐다.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그랬듯이 대학 3학년 때 노동 현장으로 갔다.

나는 납땜을 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브라운관이 떠내려오면 인두로 납땜을 하는 일이다. 내가 손이 느려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춰서 못했다. 그걸 못하면 선반에 올려야 된다. 근데 금방 선반에 쌓인다. 그럼 조장이 와서 엄청 혼을 낸다.”

그래도 잘 버티면서 납땜 일만 2년 넘게 했다. 어느 날 학생 출신이라는 게 들통이 났다. 회사는 구수정을 해고했다. 시대가 그랬다. 위장 취업 하면 감옥에도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구수정은 노조를 만들 생각도 못했고 그저 오로지 노동자로 살겠다는 마음이었다. 복직 투쟁을 며칠 하다가 포기했다.


구수정 씨 가족 1972년에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이 구수정 씨다. 사진 제공_구수정

▲ 구수정 씨 가족 1972년에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이 구수정 씨다. 사진 제공_구수정

 1986년 한신학보사 엠티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 사진 제공 - 구수정

▲  1986년 한신학보사 엠티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 사진 제공 - 구수정

 1987년 위장취업 시절 동료들과 나들이 갔을 때.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구수정

▲  1987년 위장취업 시절 동료들과 나들이 갔을 때.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구수정

그 무렵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된 강민호라는 친구가 감옥에서 나왔다. 강민호는 1986년 건국대 애학투(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2년으로 석방돼 학교로 돌아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부정 투표함으로 문제가 되었던 구로구청 점거 투쟁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실형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다음 해 10월 개천절 특사로 석방되어 1년 만에 학교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구수정과 강민호는 건국대와 구로구청 사건 때 함께 있었고 같이 붙잡혀 각기 징역을 살았다.

구수정은 다시 강민호와 만나 같이 들어갈 공장을 찾았다. 둘 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서 수원은 안 될 것 같아 안양공단으로 갔다.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 자전거를 타고 안양공단을 다녔지만 계속 거절을 당했다. 큰 공장에 취업 공고가 붙어 있어서 들어가도 면접을 하면 퇴짜당했다. 구수정은 걱정이 들었다. ‘쟤가 먼저 취직되고 나 혼자 남으면 어떻게 하지?’ 구수정은 강민호한테 신신당부했다. ‘절대 너 먼저 취직하면 안 된다. 알았지?’ 하고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걱정했던 일이 터졌다. 1990328일 강민호가 반월공단 내 대붕전선에 먼저 취직이 됐다. 강민호는 어렵게 된 취직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너도 곧 될 거야.” 하고 공장을 들어갔다. 구수정은 낙담했다. 혼자 취직 자리를 알아보기에는 너무 암담했다. 결국 취업을 포기하고 구수정은 집으로 들어갔다. 3년 만이었다.

그때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스스로 공장 가겠다고, 평생 노동자로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우습게 되더라. 그 비장한 각오가 너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인생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튿날 강민호가 집을 찾아왔다. 집 앞에서 전화로 나 배고파.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사줄게.” 하고 말했다. 화가 난 구수정은 나가지 않았다. 강민호는 그냥 돌아갔다. 구수정은 그날 일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강민호가 공장을 들어간 지 8일 만에 전선을 감는 커다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었다. 죄책감과 회한이 밀려왔다. 자기 때문에 죽은 것 같아 괴로웠다.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을걸.’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집 안에 처박혀 폐인처럼 살았다. 거의 반 년이 지났다.

그렇게 살던 구수정을 보고 안타까워하던 선배가 어느 날 술을 사 주겠다고 나오라고 했다. 그 선배는 돌베개 출판사를 다니고 있었다. 광화문 사무실 근처로 나갔다. 술이 몇 잔 들어가 알딸딸했다. 그런데 술을 먹다가 선배가 말했다.

, 수정아. 이 근처 사회평론이라는 잡지사가 있는데 기자를 모집하더라. 같이 한번 가 볼래? 너 글 잘 쓰잖아.”

그래? 가 보지. .”

구수정은 술 취한 김에 객기를 부렸다. 당시 <사회평론>은 꽤 신망이 있던 월간지였다. 마침 그날이 기자 면접 보는 날이었다. 사무실 밖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마지막 면접자를 내보낸 면접위원들이 밖이 시끌시끌하니까 나와 봤다. 그런데 구수정이라는 사람이 면접을 보겠다는 것이다.

입사 서류는 냈어요?”

그런 서류를 낼 턱이 없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면접위원들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면접이나 보고 가라고 했다. 구수정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 서강대 박호성 교수 등이 면접위원이었다.

아마 내가 굉장히 꼬장을 부렸을 거다. 교수들이 앉아 있는데 젊은 애가 와서 당신들이 내 절망을 알아? 당신들이 노동을 알아?’ 하고 소리 질렀으니.”

저런 배짱이라면하는 마음이었을까? 어처구니없게도(?) 구수정이 합격했다. 3개월 수습을 거쳐 정식 기자가 됐는데 오래지 않아 <사회평론> 잡지가 폐간 위기를 맞게 됐다. 하지만 구수정은 <사회평론> 덕에 피폐했던 삶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왔다.

때는 1992년 선거철. 구수정은 선배를 따라 김대중 선거 캠프로 들어갔다. 글을 잘 썼던 구수정은 연설 원고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구수정은 김대중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 당시엔 차선책으로 김대중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 떨어졌다. 구수정은 차선도 허락되지 않는 이 한국 사회가 너무 절망스러웠다. 게다가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구수정은 소비에트연방과 동구권이 연달아 무너지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절망했다. 구수정은 사회주의를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남들처럼 러시아나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무렵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챤딘반, 도서출판 친구, 1988)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사이공 괴뢰정권에게 총살을 당한 우옌 반 쵸이 이야기다. 우옌 반 쵸이의 처형 이후 해방구로 들어간 그의 젊은 부인 판 티 쿠옌이 그와 함께 보냈던 최후의 나날들을 진술했고, 남베트남의 작가 챤딘반이 글로 썼다. 하노이의 베트남 외문출판사가 출간한 책을 도서출판 친구1988년에 번역해 출간했다. 구수정은 사형을 당할 때 눈가리개를 벗어던진 우옌 반 쵸이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또 다른 책 한 권. 사이공의 흰옷(도서출판 친구, 1986)을 봤다. 이 책은 사이공(현 호치민)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투쟁에 참여한 베트남 고등학생들을 다룬 소설이다. 구수정은 책 두 권을 읽으면서 결심했다. 베트남으로 떠나자.

베트남은 80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당하다가 1945년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베트남을 재침략한 프랑스에 맞서 싸워야 했다. 1954년 베트남에서 완전히 프랑스를 몰아내는가 했더니 이후 독선과 오만에 찬 미국이 침략해 또다시 싸워야 했다. 결국 미국을 몰아내고 19767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한국의 박정희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전쟁에 보내 5만 명의 목숨을 잃게 했다.

구수정이 베트남을 간 때는 199312월이었다. 한국과 다시 수교를 한 지 겨우 1년 만이라 베트남에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었다. 당연히 구수정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무조건 베트남을 가서 베트남전쟁을 공부하겠다는 생각만 하고 그동안 벌어 놨던 돈을 몽땅 찾았다. 계획도 없이 비자를 받고 호치민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첫 인상, 택시가 없다. 마중 나온 사람도 없고, 연락할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낮에 도착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려올 때 아, 정말 덥구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혔다. 내가 여기서 살 수 있을까.”

공항은 한산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린 다른 외국인들도 별로 없었다. 일단 공항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타고 호텔을 가자고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돌아보니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영어를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외계어 같은 베트남어만 들렸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를 타고 떠나갔다. 그런데 자가용으로 보이는 차 몇 대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다가가 봤더니 유리창 위 조그만 종이에 택시라고 써 있었다. 무조건 탔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호텔, 호텔 했더니 운전사가 무슨 호텔이냐고 묻지도 않고 자신만만하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알고 봤더니 그 당시 호치민에서 외국인이 묵을 수 있는 호텔은 렉스호텔 하나였다. 모든 요금이 외국인 차등제였다. 사회주의 국가 특성인가? 생각했다. 구수정은 호텔 밖을 나갈 염도 내지 못했다. 말이 안 통하고 지리도 몰랐다.

호텔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데 카운터에서 올라왔다. 오늘이 음력 보름인데 절에 가면 볼거리가 많다고 했다. 가이드도 붙여 주겠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구수정은 용기를 내서 밖으로 한번 나갈 참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져온 돈이 문제였다. 그 돈을 호텔방에 두고 나가기가 겁이 났다. 5성급 호텔이라는 데가 문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는 주말이라 금고 담당자가 없어 맡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배낭에 담아 갖고 다니기로 했다.

호치민에서 가장 큰 절이라는 데를 갔다. 절에 들어가니까 천장에서부터 집채만 한 향을 태우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향들이 달려 있는데 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안 보였다. 연기 때문에 눈에서 눈물이 계속 나오고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발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은 북적댔다. 옆에 가이드 팔을 잡고서 도저히 숨도 못 쉬겠으니까 빨리 나가자고 해 다시 돌아서 겨우 나왔다. 목도 아프고 눈도 아파 길거리 카페를 가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 돈을 내려고 보니까 가방이 찢어져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전 재산을 다 잃어버렸다. 다시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모든 걸 정리해서 왔는데.

집에서도 베트남 간다는 걸 너무너무 반대했고 둘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무슨 유학을 베트남으로 가려고 하냐, 미쳤나, 여자 혼자서 거길 어떻게 가냐고 말리는 걸 뿌리치고 왔는데.”

구수정은 무작정 대한민국 총영사관을 찾아 나섰다. 그곳에서 만난 영사가 구수정의 손에 100달러를 쥐어 주며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지켜본 렉스호텔에서는 호텔비를 독촉하지 않고 숙소를 하나 소개해 줬다. 출장을 온 정부 관료들이 묶는 게스트하우스였다. 하루에 35달러였다. 수중에 100달러밖에 없는 구수정은 그것도 부담이 됐다. 그런데 다행히 숙박비를 채근하지 않았다.

처음에 거길 갔는데 문을 못 열었다. 도마뱀이 문 전체를 덮고 있었다. ‘까약!’ 비명을 질렀다.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누가 와서 문을 열어 주더라. 그런데 도마뱀은 재앙도 아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쥐들이 막 튀어나왔다. 베트남 쥐는 고양이만 한 것도 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구수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집에 연락을 해서 돈을 좀 받아야 했다. 해외 전화를 할 수 있는 곳은 중앙우체국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화요금이 너무 비쌌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빨리 전달할 수 있을까 연습까지 했는데도 86달러가 나왔다. 우체국까지 걷고 차비도 안 쓰고 밥도 물도 안 사 먹었다. 집에서 부치는 돈이 언제 올지 몰라 암담했다.

어떻게든 한국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청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한국 사람이 갈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학교도 가 봤다. 영사관 앞에 가서 하루 종일 서 있어 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한국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에 한 끼 정도 먹고 버텼지만 결국 돈이 다 떨어져 버렸다. 수중에 1달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사흘 정도 굶었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야 되나 보다. 내일은 가야겠다. 처음으로 짐을 풀어 봤다. 내가 가지고 온 게 영어사전 한 권 하고 운동가요 테이프 하나 가지고 왔더라. 그걸 왜 가져갔는지 잘 모르겠더라.”

처음으로 그 테이프를 들었는데 갑자기 통곡이 터졌다. 한국에서 부르던 운동가요를 들으니 울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나는 내 울음소리가 이렇게 무서운지 처음 알았다. 공명이 되면서 내 울음소리가 울음을 자극해 정말 세상이 떠나가라고 울었다.”

아래층 수위가 올라와서 문을 두드렸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 수위도 어떤 상황인지 한눈에 알아챈 듯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숙소에 있던 사람들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손에 먹을 걸 들고 왔다. 과일은 물론 심지어는 물, , 음식 같은 것도 가져왔다.

이 사람들은 4시면 일어나니까. 미리 오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아무나 와서 벨을 누르고 모든 사람들이 과일을 가져오고 뭘 가져오고. 한 달은 먹을 게 쌓였다.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데 와서 안아 주고 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끊임없이 베트남어로 위로하는 거 같았다. 그때 내가 더 있어 봐야겠다. 일주일만 더 버텨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정 상무님, 정 상무님!”

이게 꿈인가 싶었다. 어떤 한국 사람이 구수정 옆 방문을 두드리면서 부르는 소리였다. 꿈에 그리던 한국 사람이었다. 가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몸이 굳어 발이 안 떨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뛰쳐나갔는데 그 한국인은 이미 계단으로 내려간 뒤였다. 얼른 밖을 내다보니 차를 타려고 했다. 절박했다.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선생님! 아저씨! 기다려요!” 하고 소리친 뒤 계단을 내려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온통 뿌옜다. 염치도 없이 그 차를 타고는 눈물 콧물을 흘렸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어려 보였을 거다.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고 했다. 얼굴은 동글동글 몸은 너무 말랐고 키도 작았다. 거기서 엉엉 울고 말도 못하고. 그분이 괜찮다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한국인이 구수정을 렉스호텔로 데리고 갔다.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베트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너도나도 그 한국인한테 구수정이 당한 일을 설명했다. 한국인이 물었다. 집으로 돌아갈 거냐, 여기에 남을 거냐고. 구수정은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 한국인이 봉투를 놓고 갔다. 봉투에는 2천 달러가 들어 있었다. (구수정은 나중에 그분을 만나면 드리려고, 소매치기가 득시글거리는 호치민에서 옷 속에다 주머니를 만들어 늘 2천 달러를 품고 다녔다. 하지만 1년이 넘도록 그 한국인을 만나지 못했다. 이듬해 연말 영사관 한인의 밤행사에서 그분을 만났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구수정은 인사를 하고 돈을 건넸지만 그분은 끝내 받지 않았다.)

그 뒤 진짜 열심히 베트남어를 공부해서 그분의 모든 통역이며 계약이며 내가 다 발 벗고 나섰다. 생명의 은인 아닌가. 안타깝게도 그분은 사업이 망해 몇 년 뒤 베트남을 떠나게 된다.”

두 달 만에 한국에서 소포가 왔다. 상자에 나주 배라고 적혀 있었다. 그 한글을 보는데 또 눈물이 나왔다.

펑펑 울었다. 나는 문자 중독이었는데 베트남에 와서 처음으로 한글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어를 빨리 배우려고 일부러 한글로 된 책 한 권도 안 가져왔다.”

대학원을 들어가는 데 수많은 벽을 만났다. 먼저 베트남어를 배워야 했다. 호치민시 국립대학교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 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역사학과에서는 한국 유학생을 받아들인 경험이 없어서 절차를 아는 이도 없었다. 모두들 자기가 아는 대답만 했다.

“‘너는 역사학과를 졸업하지 않았으니까 보충 학습을 해야 할 거야.’ ‘그건 어떻게 해?’ ‘역사학과에서 보충 학습을 들어.’ 보충 학습을 들었다. 끝난 뒤 시험을 보려면 어떻게 해?’ 그럼 누가 과외를 해야 되지 않겠니?’ 그래서 또 과외를 했다.”

베트남에 간 지 3년째. 19956월 입학시험이 있었다. 입학 허가 구비 서류로 한국 거주지 관할 경찰서의 범죄경력조회서에서 한국 공관의 신원보증서는 물론 호치민시 외무청, ··동 인민위원회 및 공안을 돌며 신원보증서를 받아야 했다. 학교장 추천서, 어학당 수학 능력 인정서, 교수 2명의 추천서도 필요했다. 그래도 베트남 중앙인 하노이 교육부의 입학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구수정에게 우선 입시를 치르도록 허락해 줬다. 지원자 30명과 함께 역사학과 석사 과정 시험을 치렀다. 시험 과목은 전공이 베트남 역사 세 과목(현대사·당사·통사)이었다. 구수정은 평점 10점 만점에 9.2를 받아 수석 합격했다. 베트남어는 평점 9.9로 발군이었다. 구수정은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교육부 회신을 기다렸다. 2년 과정을 모두 수료했는데 하노이 교육부 회신은 입학을 허가할 수 없다였다.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구수정은 끈질겼다. 하노이 교육부를 여덟 번 찾아가 책임자를 면담했다. 결국 대학원 2년 과정을 끝내고 8개월 지난 뒤에야 입학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1997년 학기말 고사의 민속학 과목에서 10점 만점을 받았다. 역사학과 개설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일부 교수와 학생이 이의를 제기해 교수위원회 심의에 회부되었다. 담당 교수인 탄 판 교수는 위원회에서 진술했다. 구수정은 철자에 한 글자도 오자가 없었다. 구수정이 갖는 불리와 한계를 생각컨대 답안이 9.9라면 0.1을 가산해야 한다.”

구수정의 논문 주제도 벽을 만났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 연구라는 주제를 학교 당국이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신청한 지 2년 만인 19999월에야 허가되었다. 논문 쓸 자료도 구하기 힘들었다.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국립문서보관소, 국방부, 외무부 등의 자료에 접근하려면 재학증명서, 범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공안 서류부터 영사관, 베트남 외무부 허가서 등 구비 서류가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는 한국에 보내서 도장을 받아야 하는 서류도 있었다. 또다시 하노이를 여덟 번이나 다녀왔다. 쓰뜨 하동(베트남에서 가장 무섭다는 하동 사자)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그러나 쓰뜨 하동도 안 되는 건 있었다. 여덟 번째 하노이 방문에서 자료 접근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외무부 산하에 있는 직원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 다시 안 올 거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게하고 돌아나오는데 그 직원이 슬쩍 나를 잡았다. ‘자료를 사는 건 어때?’ 하고 묻더라.”

그런 방법이 다 있냐고 물었더니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20여 쪽 되는 복사물을 400달러 정도를 주고 매수했다.

자료를 받았는데 판독이 안 되는 거다. 무슨 학살이니 하는 낱말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 자료가 만들어진 게 1980년대 중후반으로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이걸 파는 사람이 겁이 나서 그랬는지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다 지워 버렸다."

친하게 지내던 베트남 친구한테 필사를 부탁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 뒤 나타난 친구는 아무 말도 없이 필사본을 던져 주고는 가 버렸다. 그 뒤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구수정은 자료를 펼쳐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왜 그러는지. 그 자료는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베트남 인민군대 정치국에서 나온 <전쟁범죄조사보고서-남부 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 세상에 이토록 잔인한 짓들을 했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카이! 카이! 외치는 피해자들

구수정은 학살 현장을 찾아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만나지?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인삼차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인삼차는 고급이었다. 한국으로 넘어와 경동시장을 가서 트럭 한 대 분량의 인삼차를 산 뒤 배편으로 베트남으로 보냈다.

다시 베트남에 돌아온 구수정은 뭐에 홀린 듯이 마을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그 당시엔 도로도 변변찮아 차로 들어갈 수 없는 마을도 많았는데 사진기에다 노트, 인삼차 등등 앞에도 배낭, 뒤에도 배낭을 메고 그 땡볕을 걸었다.

하루에 세 마을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외국인은 마을에서 못 자니까 마음이 급했다. 대도시에 숙소를 잡고 마을을 가려면 아침 4시에 호텔 문을 나서야 했다.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세 마을을 취재하고 마지막 마을을 나올 때쯤 되면 밤 열 시, 열한 시, 호텔 도착하면 새벽 한 시가 된다.”

구수정이 찾은 대부분의 마을에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30년 만에 처음 그 마을에 들어간 한국인이었다. 구수정이 마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카이! 카이! 카이!” 하며 손을 들고 외친다. 베트남어로 카이는 진술하겠다라는 뜻이다. 중부 지방의 사투리는 제주 방언만큼이나 어려워서 베트남 사람들끼리도 잘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구수정은 그 말이 다 들렸다고 한다. 그들의 눈빛이, 손짓, 발짓, 몸짓이 다 말하고 있었다.

차마 믿기 어려운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는다. 불교가 국민 종교인 이 나라에서 승려 4명이 학살당한 린선사 사건을 목격했던 노스님도 그랬다.

세숫대야에 물을 떠 오시길래 손을 씻으라고 하는 절 의식인가 했는데 그 다음부터 음식을 내오기 시작한다. 손을 씻으니 새하얀 손수건을 내주고 음식을 먹으면 또 입을 닦으라고 물수건을 주시고 다 먹고 나니까 또 손을 닦으라고 새 물을 갖다주셨다. 한국군 학살 이야기를 하면서 가해자의 나라에서 온 한국인을 이리 살뜰히 대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나 했다.”

가끔 술을 권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구수정은 그 술잔을 거절하지 못했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술이 눈물인 양 가슴에 슬픔이 가득 차오르곤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서로가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사람도 내가 울면 안 되지 하고, 나도 이분들 앞에서 어떻게 울어? 하며 입술을 앙다물고 울음을 참았다. 그런데 꼭 어느 대목에선가,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엄마가 이렇게 죽었어하고는 왈칵, 울음이 터진다. 근데 이분들이 하나같이 울면서 했던 얘기가 울어서 미안해였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리면 할머니들이 또 아가, 아가, 내가 안다. 내가 다 안다.’ 하면서 내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피해자들은 너무 많고 구수정은 혼자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줄 수 없었다. 그들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말을 아주 빨리, 최대한 짧게 한다.한국군이 들어왔어. 우리를 잡았어. 총 쏘고 수류탄 던졌어, 죽었어.” 그런 이야기를 수백 명 반복해서 듣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말을 축약할수록 눈빛이나 표정은 더 강렬해진다.

어느 순간 귀가 들리지 않았다. 마을을 돌아다닌 지 스무 날이 지났을 때였다. 이젠 더 이상 못 듣겠다, 정말로 못 듣겠다 구수정은 속으로만 고함을 쳐 대고 있던 차였다.

아마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귀가 안 들렸던 것 같다. 처음으로 쉬었다. 그 참에 빈딘성박물관에 갔는데 거기서 상세히 정리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자료를 만났다.”

그러고 나니 꾀가 났다. 맹호부대 주둔지였던 빈딘성의 성도 뀌년에서 가장 큰 학교 옆 문방구를 가서 노트를 수백 권 샀다. 다시 마을에 들어가 이번엔 노트를 나눠 주며 말하지 말고 적어 달라고 했다. 그들이 입을 달싹일 때마다 구수정은 겁이 났다.

연필심에 혀로 침을 묻혀서 글자 한 자 한 자를 꼭꼭 눌러쓰는 모습이 무슨 초등학생 시험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글을 모르는 이가 많았다. 글눈이 밝은 사람 앞에는 까막눈들이 길게 줄을 섰다. 나 좀 써 줘 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혹여 제 차례가 오지 않을까 초조하고 절박한 모습이었다.

한 시간 동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그 노인네들이 엉덩이를 하늘까지 올리고 글을 쓰는 모습을 보는데 아,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퍼지더라, 그래도 그때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몇 사람의 이야기는 직접 들어야 했다. 구수정은 대표로 딱 두 분의 이야기만 듣겠다고 했다. 다시 또 모든 사람이 카이, 카이 하며 손을 들었다. 그중에 누군가 우리 집은 일곱이 죽었어라고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우린 열 명, 우리 집은 열셋, 우린 열입곱이에요 하고 아우성을 쳐 댔다. 열일곱이요?” 열셋과 열일곱의 가족을 잃었다는 피해자를 지목해 이야기를 듣는데 한 할머니가 손도 못 들고 구수정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구수정은 애써 할머니의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는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그 할머니가 입을 삐죽삐죽하며 서성대고 있었다.

따라오시는 거 알았다. 봉고차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였는데 할머니가 그 먼 거리를 계속 따라오셨다. 나는 모른 척하고 걸음도 일부러 빨리 해서 막 갔는데 마음이 오죽했겠냐. 내가 종종걸음으로 빨리 걸으면 할머니도 빠르게 따라오다가 뒤돌아보면 할머니도 딱 멈춰. 이제 어떡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아, 몰라 그러고 막 가면 할머니가 또 막 쫓아와, 그러다가 봉고차까지 쫓아왔는데 아, 저 할머니 어떻게 돌아가시나 걱정이 됐다.”

봉고차에 올라탄 구수정은 빨리 출발하라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차가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하는데 할머니가 사력을 다해 뛰면서 차를 따라왔다. 기사한테 멈추라고 했다. 창문만 내리고 할머니 왜요?” 했더니 할머니가 홱, 뒤를 돌아서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할머니 말씀 안 하면 갈 거예요.” 하면서 또 출발했다. 그런데 차가 움직이면 할머니가 또 따라 뛰었다. 이렇게 서너 번 하다가 화가 난 구수정은 차에서 내려서 할머니한테 따졌다.

“‘할머니 말을 하라고요. 뭐하는 거냐고요.’ 왜 그렇게 머리꼭지까지 화가 치밀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 땡볕을 한정 없이 걷고 있는 거지? 언제까지 이 마을들을 돌고 돌아야 하는 거지? 내가 왜 수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미안해 해야 하는 거지? 가슴 한편에 이런 억하심정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삭이고 삭였던 울화가 터져 나왔다. ‘할머니 나 죽겠다고요. 돌겠다고요.’ 이러면서 막 터진 거다. ‘말을 해야지, 왜 말을 못해.’ 이러면서 엄청 다그쳤는데 할머니가 난 한 명만 죽었잖아.’ 이러는 거다. 근데 그 아이가 외아들이었어, 독자였어하는데 너무 기가 막혀 되레 소리를 질러 댔다. ‘한 명만 죽었다고 왜 말을 못해? 할머니한테는 그 한 명이 전부잖아!’”

구수정이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신발 한 짝을 벗어서 땅을 막 치면서 엉엉 한참을 울다가 갑자기 할머니는 어디 가셨지? 싶어 옆을 봤더니 할머니도 신발 한 짝을 벗어 들고는 땅을 내리치면서 울고 있었다.

저 할머니 뭐 하나 했더니 나를 따라서, 할머니도 갑자기 신발 한 짝을 벗어서 울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가 둘이 서로 마주보고서 웃음이 터졌다. 할머니 미안해, 너무 미안해.” 구수정은 웃다가 또 울음이 터졌다. 그때 할머니가 따뜻하게 구수정 등을 토닥거렸다. “‘내가 다 알아 내가 다 알아.’ 그 할머니 지금 살아계시는지 모르겠다. 아마 돌아가셨을 거다. 그때 연세가 많았는데.”

구수정은 그날이 가장 슬펐던 날이라고 했다.

 

학살 현장

구수정이 밝힌 한국 군인이 베트남 양민을 학살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여간 청룡·백마·맹호부대 등 총 312853명의 따이한이 베트남을 다녀갔다. 그중 4687명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 기간 중 한국군은 모두 1170회의 대대급 이상 대규모 작전과 556천 회의 소규모 부대 단위 작전을 수행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41400여 명의 적군을 사살했다. 그러나 이 밖에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공식적인 통계로는 집계된 적이 없는 베트남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었다. 베트남 문화통신부에서는 (아직 불완전한 통계라는 단서를 달고 있긴 하지만) 한국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양민의 수를 대략 5천 명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구수정에 따르면 정작 학살 현장의 주민들은 이 수치를 신뢰하지 않으며, 정부가 정확한 진상 조사에 소극적이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주장하는 숫자가 어떤 지역에서는 베트남 문화통신부가 공인한 수치의 배를 넘어서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믿기 어려운 증언이 이어졌다. 구수정이 그 당시 <한겨레21>에 전했던 한국군의 학살 만행 일부만 보면 이렇다.

“19651222, 한국군 작전 병력 2개 대대가 빈딘성, 뀌년시에 있는 몇 개 마을에서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들, 즉 민간인 중에서도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을 학살했다.”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홧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 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몸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 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한국군들이 마을에 들어가 주민을 체포하면 남자와 여자를 따로 나눴다. 남자는 총알받이로 데리고 나갔다. 여자는 군인들 노리갯감으로 썼다. 희롱하고 강간하는 것은 물론 여성들의 가장 신성한 부분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한국군들의 양민 학살 행위 유형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 살육, 임산부 난자 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 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었고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 넣,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홧발로 짓밟,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최루 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키는 것 등이었다."

 

창자는 밖으로 튀어나와 덜렁거렸고, 불에 타 누렇게 녹아내린 지방층에는 구더기들이 기어 다녔다.”, “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 버렸다.”, “1A국도를 따라 채반을 들고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구수정, <한겨레21> 273)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학살한 베트남 민간인은 모두 9천여 명으로 추정한다.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이런 사건은 멀리는 1947년 제주4·3항쟁 때 일어난 민간인 학살,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 때 이승만 군대의 보도연맹원 학살, 가깝게는 1980년 광주항쟁 때 되풀이됐다. 이 모든 학살에는 공통점이 있다. 빨갱이라는 이유였다. 빨갱이면 간난아이도, 임신한 여성도, 노인도, 그렇게 죽여도 되나? 아무나 죽인 뒤 빨갱이라고 한 건 아닌가? 아니 빨갱이면 그렇게 죽여도 되나?

 2005년 베트남 종전 30돌을 맞이해 베트남군 전 총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과 특별 인터뷰를 하는 구수정. 사진 제공_ 구수정

▲  2005년 베트남 종전 30돌을 맞이해 베트남군 전 총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과 특별 인터뷰를 하는 구수정. 사진 제공_ 구수정

구수정은 19995<한겨레21>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는 기사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처음 폭로했고 <한겨레21> 베트남 종단 특별 르포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등으로 한국군 학살 기사를 연이어 내보냈다. 20006272,400명의 베트남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한겨레신문사에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해서 신문사의 윤전기, 사무 집기, 16만 장에 이르는 서류를 불태우고, 간부들도 감금하고, 송전을 차단해 업무를 중단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구수정은 베트남에 있었는데, 그녀의 집 골목 담벼락마다 빨갱이라는 등 욕설을 스프레이로 뿌려놓고 집 앞에 염산 통을 갖다 놓기도 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한국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한국에 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키워 준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임종 전에 할머니를 뵈려고 귀국을 감행했다. 한겨레에서 신변 보호 요청을 했다. 공항에서는 가장 먼저 대통령이 나가는 출구로 빠져나갔고 집 입구에서부터 경찰 차벽 사이로 집에 들어갔다. 5분만 보고 나오라고 재촉해서 30분 정도 뵙고 나왔다.”

장례가 끝나고 한국 정부는 빨리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베트남에 있는 한국 공관은 여기 너무 위험하다고 오는 걸 꺼렸다. 국제 미아가 되는 듯했다. 그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연락이 왔다. ‘상황이 어려운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 수도원에 와 계시라고 했다. 구수정은 그곳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다.

  2013년 베트남전 피해자들의 지속 가능한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과 함께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_ 구수정

▲  2013년 베트남전 피해자들의 지속 가능한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과 함께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_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그 뒤 한국에서는 열네 개 시민단체가 모인다. 유시민, 한홍구, 차미경 등이 모여 베트남전진실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구수정은 베트남에 사회적 기업 아맙을 만들었고 한국에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함께하는 이들이 생겼지만 베트남 문제를 구수정 혼자 붙들고 있었던 시간이 많았다. 모든 이들이 베트남 문제를 껴안고 10, 20년 계속 갈 수 없었다. 구수정은 버거웠다. 앞으로 혼자서 이 문제를 지고 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장 이 문제에 손을 놔 버리면 2030년 묻혔다가 또 누군가가 다시 시작해야 될 거 같아서 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재단을 만들 때 맨손이었다. 구수정 자신도 재단이 쉽게 만들어질 거라고 믿지 않았다. 어쨌든 필요하니까 부닥쳐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100명을 적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명단에 적은 분들 얼굴도 본 적 없었지만 무턱대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여섯 번 전화 드리고 만날 준비도 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화를 걸자마자 그동안 참 많이 미안했는데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름이라도 걸어 달라고 했다. 감동이었다.”

누군가 시작하기만 바랐던 것일까. 대부분이 부채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한테는 일단 메일을 보냈다.

내가 정말 딱 할 얘기만 썼다. 왜냐면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저는 한베평화재단을 만들고 있고하는 정말 몇 줄 안 되는 딱 할 말만 요약한 아주 건조한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너무너무 부드러운 답장이 왔더라. 그때 그분은 외국에 나가 계셨는데 여기는 단풍이 지고 있습니다. 저를 만나시려면 며칠 날은 어디가 좋고 며칠 날은 어디가 좋고 그것도 안 되면 이렇게 하시면 되고.’ 나중에 한국에 오셨을 때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추진위원으로 동의를 해 주셨다.”

아맙,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그리고 한베평화재단을 만들 때 구수정 둘레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처음 아맙을 만들 때는 어쩌겠냐 니가 하겠다는데 하면서 천만 원을 바로 낸 사람도 있다. 일주일 만에 일 억을 만들었다. 아맙은 조금 쉽게 만들었다. 그런데 공정무역을 하려면 한국에 기업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한국 기업을 만들 때 또다시 7억을 모금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공동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가난한 분인데 2000만 원을 낸 분도 있다. 아시아공동네트워크는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 모두 동원해서 돈을 만든 거다. 그런데 또 한베평화재단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는 너무 부담이 됐다. 근데 어떻게 해? 돈 낸 사람한테 또 내라고 한 거지. 그분들이 또 내 주셨다.”

재단이 만들어지고 나서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한베평화재단과 <한겨레21>은 이번에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약 20개 마을을 직접 답사해, 한국군 학살 희생자 추모 위령비, 위령관, 묘지, 학살 현장들을 안내하는 구글 지도를 만들었다. 한국 군인이 민간인을 가장 많이 학살한 중부 지역 다낭, 호이안, 하미 마을, 퐁니 퐁넛 마을은 모두 한 시간 이내 거리에 있다. 꽝남순례길 1코스는 19681~2월 호이안 인근 마을에서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 청룡부대가 민간인들을 학살한 3개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길이다. 베트남 중부 5개성(꽝남성, 꽝응아이성, 빈딘성, 푸옌성, 카인호아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희생자 수는 약 9천 명 이상이며 이중 꽝남성에서만 약 4천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년이면 천만 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다낭을 간다는데 그들 중에서 몇 명이 30분 거리에 학살 지역이 있다는 걸 알겠는가. 그런데 요즘은 학살 현장에 있는 꽃집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꽃을 산다고 그러더라. 그리고 이렇게 찾아왔던 분들이 고맙다고, 우리가 이런 곳을 한번은 가 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너무 쉽게 잘 다녀왔다고 인사한다. 재단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지난 2월 2일 광화문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구수정과 한베평화재단 회원들. 사진_ 안건모

▲  지난 2월 2일 광화문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구수정과 한베평화재단 회원들. 사진_ 안건모


뒷이야기

한베평화재단은 옥수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건물 4층에 있다.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베평화재단은 작년에 만들었는데 워낙 활발하게 활동해서 그런지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구수정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만나면서 고충을 겪기도 했다.

한때 베트남에 진출한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는 삶을 살았다. 베트남에서 6층짜리 주택을 임대해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거두고 한국인 방문자들을 먹이고 재우고 지원도 하고 그랬는데 민간인 학살 문제가 터지자 일자리가 뚝 끊겼다. 임대료를 못 내다가 결국 전기, 수도가 다 끊어지고 집에서 쫓겨나는 경험도 했다. 한 달에 1달러도 벌지 못하는 세월이 제법 길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한평생 살면서 올바른 일로 인생을 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구수정 이사는 요즘 너무 바쁘다. 올해는 베트남에서 하미학살 50주기 위령제를 한다. 한베평화재단은 위령제 참배단을 모집하고 있다. 38일부터 13일까지 56일 일정이다. 하미에서만 한국군에 희생당한 민간인이 135명이나 된다. 하미학살, 빈안학살 등 해마다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한날한시에 죽은 이들을 기리는 따이한 제사를 지내는 곳들이 있다.(따이한한테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따이한 제사라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합동 제사를 지내고 마을 주민 전체가 음복을 하는 전통이 있지만 그동안 제사 비용과 음복연 비용이 없어 제사를 거르는 해가 많았다고 한다. 2018년에는 50주기 위령제를 맞는 지역들에 100만 원씩 지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1968년 꽝남대학살 지도 베트남전쟁 당시 꽝남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관련 위령비 안내 지도. 사진 - 구글지도

▲  1968년 꽝남대학살 지도 베트남전쟁 당시 꽝남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관련 위령비 안내 지도. 사진 - 구글지도

올해 421일부터 22일에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린다. 학살 피해자인 베트남인이 원고가 돼 한국 정부를 피고석에 앉히고, 학살의 책임을 묻는 법정이다. 현재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집하는 만만만캠페인을 하고 있다. ‘만만만이란 만 일의 전쟁, 만 인의 희생, 만 인의 연대라는 뜻이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한테 전쟁 범죄를 사죄하라고 요구한다. 미군의 노근리 학살,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모든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의 과오부터 돌아보고 베트남전의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인 한국 참전 군인들에게도 똑같이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 박정희가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 책임을 국가가 져야 한다. 그리고 전쟁 범죄는, 아니 앞으로 영원히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씨. 사진_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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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3월호

한일수의 유감천만


팔만 쓱 내밀면 허준도 모릅니다

한일수/ 두리 한의원 원장, 내편 들어줘 고마워요저자

 

1. 연재를 시작하며


그러니까 세상사, 알 수 없는 일이다. 작년 11월에 임상 에세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잡문집을 한 권 냈는데, 그 책은 세상에 나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속속 출판사 창고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원고가 매우 부족했구나! 자성 대신, 요즘 책 읽는 이가 참으로 드물구나, 따위 시건방진 탄식을 뱉고 있었다. 낙담은 스스로 증폭한다. 책 선전으로 도배하던 페이스북도 들여다보기 민망하여 문 닫아걸고 말았다. 그렇게 글 쓰는 일로 끈 떨어지고 날개 죽지 부러져 낙담 중인 한모(韓某)에게 작은책 편집장께서 무려 연재 칼럼을 부탁하실 줄이야.


고등학교 시절 문학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한모의 글쓰기는 그럭저럭 40년을 헤아린다. 비루한 글이지만 스스로 글쟁이란 자각은 하고 있고, 이런저런 지면에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기도 했다. 상업지도 있었고, 문예지도 있었으며, 종이 신문도 인터넷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매체에 글을 기고할 때보다 <작은책>에 기고하는 글쓰기가 어렵고 힘들다. 기왕에 이미 높은 수준의 글쓰기를 보여주신 선배 필진에게 필적할 만한 글이 나올까 걱정도 크고, 무엇보다 <작은책> 독자들의 선하고 맑은 얼굴이 두렵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께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숱한 세월이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갑자기 명치께가 뻐근하고 목덜미가 당겨온다. 대체 무슨 인연으로 이런 글빚을 지고야 말았는지.


대책이 서지 않을 땐 이실직고가 제일이다. 이미 앞선 두 단락으로 눈치를 채셨겠지만, 한모 글에는 무슨 심오한 의학 이론도 없고, 졸깃한 글맛도 없고, 서권기 문자향 따위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지리 궁상 같은 유감(遺憾)과 살면서 편편이 쏟아지는 유감(有感)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꼭지는 지방에 사는 중늙은이 한의사가 진료실에서 겪고 느낀 다양한 불평불만과 신변잡기로 채워질 예정이다. 어지신 독자께서 너그럽게 읽어주시길 빌고 또 빈다.


 

2.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2017년 현재 한의사 면허 소지자가 25천 명을 넘었음에도, 아직도 한의사라고 자기소개 하면 살짝 묘한 분위기가 있다. 호기심과 무례함이 넘치는 분들은 면전에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진맥해서 내가 어디가 아픈지 맞춰보라는 분도 계시다. 어디가 아픈지 진맥만으로 맞추는 분이 어딘가 계시긴 할 게다. 하지만 우선 내겐 그런 실력이 없고, 맥진은 한의학의 진단법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당장 환자에게 어디가 아픈지 묻고, 환자가 아프다는 곳을 직접 보고,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듣고, 어떤 동작이 안 되는지 시켜 보고, 그 다음에 진맥을 하면서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지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 그건 진맥 실력이 형편없는 한모 이야기고, 다른 한의사들은 진맥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진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진맥에 대해 말하자면, 양쪽 요골동맥의 맥동으로 대체 어떻게 환자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가. 비유하자면 큰비가 내린 뒤 강가에 나가보니 시뻘건 황토물이 콸콸 흐른다 치자. 그러면 , 옹백이골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돼지가 여러 마리 떠내려온다면 돼지 움막이 여러 채 있는 싸리골에 큰일이 난 거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황토가 옹백이골에만 있는 건 아니겠고, 돼지 움막 한두 채 없는 마을이 어디 있겠느냐만, 정황상 아무래도 더 의심이 가는 고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환자가 말하는 증상과 진맥으로 짚어낸 장부의 이상이 들어맞으면(이것을 맥중합참 脈證合參이라고 한다. 맥과 증상이 서로 들어맞으면 순증이고 치료도 잘 되지만, 맥과 증상이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역증이라 해서 난치인 경우가 많다. 임상에서는 맥을 버리고 증상을 따라야 하거나 그 반대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병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정하기가 쉬워진다. 진맥은 한의학의 소중한 진단법 중 하나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모든 병을 짚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도 내 앞에 앉는 초진 환자는 말 한마디 없이 손을 쑥 내민다. 그럼 한모는 열심히 점심 메뉴를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스트레스가 많고 피로가 쌓였군요. 회사 업무가 부담을 많이 주고 있나 봅니다. 식사는 어떠세요? 입맛도 별로 없으시군요. 그럴 수밖에 없죠. 블라블라블라.”


진맥 중에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은 농담이지만, 환자 진료는 엄밀해야 한다. 의사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환자 상태를 살피고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진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환자의 자발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아니 대체 어디가 아픈지 말씀도 하지 않고, 진맥만으로 그걸 맞히라고 하면, 제가 점쟁이도 아니고, 이게 될 일입니까? 그러니 어디가 아픈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진맥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다른 건 조금 하니까 말입니다.


 

3. 저도 잘 몰라요


말없이 팔만 쓱 내미는 진맥만큼 한의사를 당황하게 하는 게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체질 감별이다. 체질 의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가 많이 아는 사상 체질 의학은 동무 이제마의 독창적인 학문으로 우리나라만 전수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의사 권도원이 제창한 팔체질 의학도 주목받고 있다. 사상 의학은 한의대에서 가르치고 국가고시에도 출제되며 전문의가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깊이 연구되고 있는 게 사실인데, 애석하지만 체질 감별은 일반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쓱 쳐다보면 알게 되는 게 아니다. 한의사에 따라 골도법(骨度法)으로 감별하기도 하고, 설문지를 분석하기도 하며, 성격이나 고유한 기운을 파악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런 모든 노력 끝에 체질을 파악하고도 체질별 한약을 써서 증상이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보고서야 체질 판정이 끝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처음 진찰하고 말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제 체질은 뭐냐고 물으시면 답하기가 매우 곤란하지 않겠어요?


현대 의학이 기술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대단한 진단 장비와 정밀한 수술 요법이 도입되어 일반인에겐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에 비교해 한의학은 침이나 뜸, 심지어 처방까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과거에는 의료 인력이 부족해서 마을에 한문 좀 읽는 분이 방약합편같은 처방집을 읽고 처방을 내리기도 했고,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으로 침도 놓고 뜸을 뜨기도 했다. 실제로 중국에선 적각의(赤脚醫)라 해서 공장이나 농장에서 근무하는 자 중에 골라 3년 동안 의학교육을 받고 현장에서 일차 진료를 담당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의학은 기본적으로 고도의 집중 교육이 필요한 분야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Pixabay

사상 의학은 세상에 나온 지 백여 년에 불과한 신생 의학이다. 100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강점과 남북 전쟁, 산업화 과정 등으로 우리가 이 신생 의학을 정밀하게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더 많은 진단법과 처방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 분야이고 한마디로 갈 길이 먼 학문이다. 불우하게도 한모는 사상 체질을 전공하지 않았고, 전공자가 아주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한의사면 내 체질도 쉽게 판정해 주겠지라는 믿음은 거두시는 게 좋다. 저도 젊어서는 소양인이라고 믿었는데, 나중에야 태음인인 걸 알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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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7. 11:41 알림 / 엮은이의 글

월간 <작은책>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는 '2018년 우수콘텐츠잡지'에 선정되었습니다.

우수콘텐츠잡지에 선정되면 다달이 일정 부수를 문화 소외 지역 및 관련 시설에 배포한다고 합니다.

좋은 글 주신 필자님들, <작은책>을 아껴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참 고맙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2018. 3. 7. 11:16 알림 / 엮은이의 글


차례



책이 이끄는 여행

제주도를 아시나요? / 이동수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입양 가족은 예비 범죄자가 아니다 / 김지영

17 서울 여자 독일 아줌마로 살기 - 베를린 곰과 한국의 호랑이 /  조숙현

22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대만 시장 음식 / 윤혜신

27 한일수의 유감천만 - 팔만 쓱 내밀면 허준도 모릅니다 / 한일수

32 청년으로 살아가기 - 대관령을 넘었는데 빚이 3천만 원 / 진솔아

36 이야기가 있는 사진 / 박준성

38 살아온 이야기(9) - 교도소에서 나온 엄마는 장담했다 / 이하나

44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 팔불출 사랑 / 안재성

49 교실 이야기 - 아이들과 함께한 베트남 수업 이야기 / 예영주

53 이야기가 있는 들녘 - “전수 좋지?” “전수 좋다~!” / 김진회

58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0 일터 탐방_ 인천광역시 남동구도시관리공단

    - 정규직 되니 ‘아줌마’라고 안 불러요 / 정인열

66 일터에서 온 소식 - 슬픈 연구자들의 초상 / 이영이

71 작은책 법률 상담소 - 반려견 사건·사고 / 양성우


작은책이 만난 사람_ 구수정

75 미안해요 베트남 / 안건모

104 이동슈의 생활 만화 / 이동수


세상 보기

106 생각해 봅시다 - 개헌, 어떻게 봐야 할까? / 하승수

112 여성으로 살아가기 - 나는 아빠와 이별 중이다 / 홍승은

117 ‘그때 그 사건’ 다시 보기 - 이 착한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 김형민

122 생태 이야기 - 자율 주행이라는 신기루 /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7 책 읽고 딴 생각 - 평화의 꿈, 자본의 길 / 유동걸

130 독립영화 이야기 - 당신의 4년은 어땠나요? / 류미례

135 우리 지역 깊은 역사 - 유관순 열사의 고혼 / 정종배

140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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