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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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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3. 11:45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고창수


발행인의 글

 

당당합니다. 비장한 각오를 한 얼굴입니다. 극우단체 노인들이 기자회견을 빙자한 집회를 합니다. 초등학교 앞에 가서 초등 아이들이 왜 전두환 물러가라!” 소리쳤냐고 항의하는 집회를 연 겁니다. 초등학생들보다 역사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아주 당당합니다. 아니 독재자 전두환이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초등 아이들이 왜 몰라야 한단 말입니까.

이번 호 세상보기에는 이주영 선생님이 어린이가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글을 썼습니다. 먼저 18세 투표권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고, 16세 미만 국민도 선출 대상에 따라 투표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투표권이 없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민주시민 교육과 정치교육 차원에서 모의투표라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정치교육을 불순하다고 비난하면서 금지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라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생들 대상으로 집회를 하는 극우 단체 노인들보다 초등학생들이 오히려 판단을 잘 할 것 같기는 합니다. 너무 심한 말일까요?

독자님들, 완전 봄날이지요? 이번 특집은 남한강 끝자락에 있는 퇴촌면 관음리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작은 도서관을 꾸려 가는 박소영 씨를 만나 인터뷰했지요. 도서관이 꼭 책만 보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도 뛰어 놀고 동네 주민들 사랑방 구실도 한다는 걸 보여 줍니다. 책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밝아지지 않을까요?

 

2019320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매향리라는 이야기의 열린 결말최규화

10 발행인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의부증 청산 수업료 임전

16 안녕, 컵라면 김영호

20 오키나와 평화기행, 누가 평화를 말하나 조운주

24 부부 30년 맞짱일기

선녀인가 나무꾼인가 최해옥과 이동수

29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내가 차려 먹는 내 생일상 윤혜신

34 청년으로 살아가기

꿈 같은 100개 도시 여행 김치우

38 이야기가 있는 사진 이기범

40 살아온 이야기(10)

기념일을 기념하고 있으세요? 송추향

47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저는 실비보험이 없습니다 권해진

51 교실 이야기

극한직업, 초등 1학년 담임 박연미

55 산골부부의 시골살이

오매불망 그리던 건강한 똥간조혜원

59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2 일터 탐방_ 신영프레시젼

공포의 택배 상자 정인열

68 일터에서 온 소식

대법원장만을 섬겼던 법원 조석제

73 작은책 법률 상담소

임차인이 알아야 할 주택임대차보호법 양성우

 

작은책이 만난 사람_ 박소영

77 서재도서관을 꾸리는 베짱이 안건모

98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100 존버 씨의 시간들

과로자살의 반복성에 대하여 김영선

105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공정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고태경

110 어린이 해방과 평화 어린이가 정치에 참여할 권리 이주영

115 여성으로 살아가기 우연히, 축구 홍승은

120 생태 이야기 공주보 없어도 금강은 농사를 지었다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5 오앵의 일상의 온도 오앵

126 정작 모르는 유물이야기

어느 날, 갈돌과 갈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찬희

130 책 읽고 딴 생각 왜 다이어트에 실패할까 변정수

133 독립영화 이야기 슬픔을 견딘다는 것 류미례

138 우리말과 국어사전 짚어 보기 병아리콩과 호랑이콩 박일환

142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2019. 3. 6. 11:31 알림 / 엮은이의 글

저희 <작은책>이 문화체육관광부가 뽑은 2019년도 '우수콘텐츠잡지'에 선정되었습니다.

2018년도에 이어 2년 연속입니다.

<작은책> 독자 여러분과 도움주시는 필자분들이 계셔서 가능했습니다.

서로서로 축하를 나눠요! ^^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나는 그()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김경리/ 행복한책방 일산점 점장

 

 

또래에 비해 발육이 빠른 5학년이었다. 브래지어를 하는 초등학생이 아주 드문 때였기에 나는 노브라로 학교를 다녔다. 남들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서 그랬지만 오히려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담임이 내 가슴께를 흘끔거리는 걸 느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눈빛을 총애로 여겼던 것 같다.

어느 날 방과 후에 담임은 시험지를 채점해야 한다며 나만 교실에 남으라 했다. 채점을 마친 시험지 꾸러미를 들고 담임에게 다가가자 그놈은 나를 뒤에서 안더니 만져 보자, 만져 보자하면서 내 가슴을 한참 동안 주물거렸다. 그 행위가 어떤 의미인 줄은 몰랐지만 너무 무서워 눈물이 나려 했다. 그럼에도 울음을 꾹꾹 누르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후로 학교 가는 게 싫어진 나는 자주 배가 아팠다.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며 엄마가 일대일 수영 강습을 등록해 줬다. 수영 강사 그놈은 처음엔 소심하게 만졌다. ‘제대로 된 자세를 가르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우길 수 있을 만큼만 만지다가 내가 반항을 안 하자 점점 대범해졌다. 그 상황을 즐기는 듯 나만 보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구역질이 났다. 참다못한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대충만얘기했다. 그런데 펄펄 뛸 줄 알았던 엄마가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수영을 가르치다 보면 그 정도는 어쩔 수 없는데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것이다. 억울했다. 자세히얘기하려면 재연을 해야 했는데 그건 너무 수치스러웠다. 다시는 수영을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엄마는 돈이 아깝지도 않느냐며 등짝을 때렸다. 하지만 그놈 얼굴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아직도 수영을 못하는 건 순전히 그놈 탓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한 달 가까이 집수리를 하던 중이었다. 어른을 공경하는 착한 학생으로 교육받은 우리 형제들은 학교를 다녀오면 일하는 분들에게도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곤 했다. 하루는 그중 목수 아저씨 한 명이 오냐, 잘 갔다 왔냐하면서 내 엉덩이를 잠시 만졌다 놓았다. 툭 한 번 친 게 아니다. 잠깐이지만 분명히 움켜쥐었다’. 이번엔 내가 당한 일이 어떤 건지를 확실히 알 만한 나이였다. 너무 분한 나머지 경련이 일면서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결국 저녁 밥상에서 내가 당한 일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 편은 없었다. 딸 같아서, 이뻐서 그런 걸 가지고 계집애가 까탈맞게 군다.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놈보다 부모님이 더 미웠다.

스무 살 이후로도 여자로 태어난 죗값을 끊임없이 치러야 했다. 신체적 성희롱이 드문드문 겪는 일인 데 비해 언어폭력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일일이 맞서기도 피곤할 정도였다. 술 마시러 가자 할 때 볼일이 있어 빠진다고 하니 여자가 없으면 술맛이 나냐고 말하는 선배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항의하면 농담 가지고 뭘 그리 무섭게 덤비냐며 달래는 그들은 평소에 여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보통의 평범한 남자들이었다. 이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지만 매번 싸울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속에서는 천불이 났지만 번번이 쎄게대응하는 피곤한 여자로 살 용기도 없었다.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남자 선배가 여자 선배의 뺨을 때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남자 선배는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싸우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키가 작고 생김새도 순해 보이니까 나를 만만하게 보나 싶어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로 보이려고 애를 썼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면 단단해 보여야 했다. 그 대가로 턱관절장애를 얻었다. 강해 보이려고 이를 꽉 다물고 다닌 결과다.

▲ 사진_ Prentsa Aldundia

이런 얘기를 하면 두 가지 반응을 보게 된다. 여자들은 어쩜 너나없이 그렇게 비슷한 경험이 많으냐며 놀란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일들은 너무 흔해 새삼 얘깃거리도 안 될 정도라는 여자들의 말에 놀란다. 이런 경험이 얼마나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면 더 놀라겠군. 내 경우에는, 성적(性的)으로 결벽증이 생겼고 그로 인해 결혼 생활이 힘들었다.

오랫동안 혼자 담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 놓으니 새삼 분이 끓어오른다. 골목길에서 큰일 날 뻔했던 일, 전철에서 당했던 일 등 미처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떠올라 더 분하다. 이럴 땐 상상으로나마 복수를 한다. 죄질이 특히 나쁜 초등 담임을 불러내야겠다. 어떻게 복수하는지는 나만 아는 비밀이다.

posted by 작은책
2019. 2. 27. 12:03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고창수


발행인의 글

 

1970년대 국민학교반공 연설대회를 보는 줄 알았습니다. 김준교 자유한국당 청년최고위원 후보는 지난 14일 대전에서 열린 합동 연설회에서 신성하고 위대한 대한민국을 짓밟고 더럽히고, 북한 김정은의 노예로 팔아먹으려는 짐승만도 못한 저 종북 주사파 정권을 처단해야한다며 저딴 게 무슨 대통령이냐고 악을 바락바락 쓰고 있었습니다. 연설하는 이도 그렇지만, 거기에 태극기를 흔들면서 호응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친일파를 비롯한, 4·3항쟁, 5·18 광주항쟁 등의 가해자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결과가 이렇게 부끄럽고 참담한 세상을 불러왔습니다. 그런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면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세상을 바꾸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호 특집 작은책이 만난 사람의 주인공은 풀무질 책방 일꾼 은종복 씨입니다. 1993년부터 시대의 흐름과 함께 26년 운영하던 책방 이야기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책을 좋아했고, 오로지 세상을 맑고 밝게하려고 애쓴 사람인데 1997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지요. , 그러고 보니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도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아직도 감옥에 있군요.

이번 호에 책이 이끄는 여행을 쓴 김용심 씨가 마침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한 말을 인용했네요.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좋아지지 않는다.” 새겨들을 말입니다.

 

2019220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재즈, 축제, 그리고 김용심

10 발행인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나는 그()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김경리

15 슬픔의 무게는 같다 전영순

17 부부 30년 맞짱일기

부부싸움으로 이룬 부부산성 최해옥과 이동수

24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새로운 명절 윤혜신

30 청년으로 살아가기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유지향

34 이야기가 있는 사진 이기범

36 살아온 이야기(9)

2,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송추향

43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환자는 평등합니다 권해진

47 교실 이야기

슬픔을 아는 사람이 어른이 된다 박태찬

51 산골부부의 시골살이

노동자 시어머니와 산골 며느리 조혜원

55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58 일터 탐방_ 유성기업

내 동생 광호가 왜 그랬을까 정인열

64 일터에서 온 소식

얘들아, 오늘도 점심 라면이래 곽지현

70 일터에서 온 소식

용균이에게 미안하고 죄스럽다 이준석

75 작은책 법률 상담소

감정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이 있다고? 김묘희

 

작은책이 만난 사람_ 은종복

79 풀무질 책방 일꾼 은종복 안건모

100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102 존버 씨의 시간들

존버 씨의 시간들 김영선

108 어린이 해방과 평화 어린이 놀 권리 선언 이주영

113 여성으로 살아가기 이야기 안내자 홍승은

118 생태 이야기 이맘때 딸기는 외면하고 싶다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3 오앵의 일상의 온도 오앵

124 정작 모르는 유물이야기 주먹도끼의 또 다른 이름 박찬희

128 책 읽고 딴 생각

열등감이 만들어 낸 가짜 역사 변정수

131 독립영화 이야기

지금, 이곳에서 바라본 세계의 지도 류미례

137 우리말과 국어사전 짚어 보기 가여운 돼지들 박일환

142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년 2월호

년으로 살아가기

 

배달이요

야채죽(필명)/ 배달 대행 기사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곧이어 누구세요?” 하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대답을 합니다.

배달이요.”

저는 배달 대행 기사입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 기사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배달 대행은 도시빈민들이라는 말입니다. 돈이 없어서 빈민이 아닙니다. 보통은 400, 500만 원씩, 흔치는 않아도 1000만 원씩 가져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하는 노동자와 하나도 다를 것 없이, 그저 가게 밖에서 서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에는, 우리는 여전히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 없어서 오토바이나 타는, 안전을 위해 헬멧을 써도 보안상의 이유로 헬멧을 벗어야 하는, 배달시키는 사람들의 편의와 위생을 위해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하층민일 뿐인 듯합니다.

왜 배달을 하냐는 말에는 어쩌다 보니, 라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생이었다가, 직업 군인이었다가, 족발집 사장님이었다가, 배달 기사가 되었습니다.

스무살,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은 했지만, 12년 동안 죽어라 외우고 익혔던 교과서는 전공이라는 큰 벽을 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공부가 재미없고, 성적도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학업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부사관으로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스무살의 여름 훈련소에서부터 11월의 임관식, 이후 약 5년간 직업 군인으로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에 열심히, 묵묵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명감만으로는 평생 군인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4년간의 의무 복무가 끝나고, 장기 복무가 아닌 3년의 연장 복무가 결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진급할 수 있는 사람은 1명뿐이었지만, 나만큼 열심히, 나보다 더 오래 노력한 사람들은 7명이나 되었습니다. 평생 군대에 말뚝을 박고자 대학을 포기했던 저는, 다시금 군 생활을 포기하고 전역을 선택하여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5년간의 복무 끝에는 5년간 모인 적금과 퇴직금이 남았습니다. 전역 간부에게 주어진 취업의 기회도 있었지만, 사무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컴퓨터만 보는 업무에 적응할 수 없어 얼마 가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무작정 쉴 수만은 없어서 친구의 부모님이 하시는 족발집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직원 세 명이 삶고, 썰고, 배달까지 하는 작은 가게였지만 꾸준히 손님이 찾는 맛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친구와 함께 돈을 모으고 약간의 대출을 받아 신림동 어느 한 가게에서 족발집의 사장님으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사도 잘되고 배달 주문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매출이 높은 날엔 하루에 300만 원씩 팔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만 장사가 되면 아무 걱정 없이 대출금도 갚아 나가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장사는 쉽지 않았습니다. 점차 매출은 줄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돈은 겨우 2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동업을 제안했던 친구가 먼저 포기 선언을 하고, 혼자만으로는 역부족이었기에 아쉽지만 저 역시 족발집의 꿈은 그곳에서 내려놓았습니다.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것은 3000만 원 가까이 되는 대출과 작은 전세방, 오토바이 한 대 뿐이었습니다.

폐업 이후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25살이지만, 배운 것이라고는 총을 쏘거나, 병사들을 지휘하거나, 족발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고, 경력 또한 별거 없는 고졸 청년에게 선택지는 월급 150만 원 정도의 일자리뿐이었습니다. 보통의 직장으로는 대출을 갚으며 생활을 꾸려 갈 수 없다는 판단에, 결국 남아 있던 한 대의 오토바이로 장사할 때 함께했던 배달 대행업체의 기사로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햇수로 5년차, 전업 배달 기사로 4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걱정하던 3000만 원의 빚은 1년 만에 정리할 수 있었고, 아직 절반은 은행의 것이지만 작은 내 집도 마련했습니다. 중간에 잠시 위험 부담이 높은 배달 기사보다는 안전을 찾아 회사를 다닌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수입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근무가 그리워 어느새 배달 기사로 돌아왔습니다. 큰 사고를 겪어 후유증이 남아도 어느새 익숙해진 생활은 다시금 배달을 하게 합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가족, 여자 친구에게도 숨겼던 배달 기사라는 직업이, 이제는 어딜 가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천직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겪었던 실패들은 이제 다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이 경험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만나게 되는 다양한 손님과 상점 직원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여러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줍니다.

배달 기사로 첫 여름, 한 대학가에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학생들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학교 다닐 때 얼마나 놀았으면 저렇게 배달이나 하고 다닐까?”

제 딴에는 저에게 들리지 않게 친구 귓가에 작은 소리로 얘기했겠지만, 배달 기사라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당시의 저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소심하게 한마디 하는 것으로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여러분이 다니는 대학교보다 더 들어가기 힘든 대학교 다녔어요.”

그분들을 다시 만나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서 배달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직업을 선택해서 준비하고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처럼 저도 이 직업을 선택해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은 사회적인 인식이 부족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점차 나아지는 것을 체감합니다. 전에는 추운 날 음식이 식었다고 타박을 듣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꽤나 자주 추운 날씨에 배달하느라 고생하셨다는 한마디를 듣습니다. 전에는 빨리오세요라고 하시던 손님들이 이제는 안전 운전하세요라는 말을 건네줍니다. 2019년 새해를 맞아 아주 조금이지만 더 나아졌다는,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초인종을 누릅니다. 누구세요?”라는 질문에 수천 번, 수만 번 했던 대답을 다시 되풀이합니다.

배달이요.”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년 2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

 

국회 앞 작은 집

/ 사진_ 하명희


 ▲ 국회 앞 작은 집  작은책(하명희)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를 빠져나와 열한 걸음을 걸으면 3인용 텐트만 한 작은 집이 있다. 이 집의 벽면은 천막이 아니라 조각 천으로 이어져 있다. 왼쪽에는 세 개의 산등에 동이 터 오고, 오른쪽에는 조각배가 떠 있는 바다가 출렁인다. 사면의 조각보 위로 삼각 지붕이 얹혀 있는데 국회의사당 정문 쪽으로 살아남은 아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박음질되어 있다. 그 아래엔 바닷가 해당화일까, 커다란 꽃송이가 피어 있다. 이 집의 삼각 지붕에는 다른 집에는 없는, 매일 숫자가 바뀌는 칠판이 있다. 정문에는 머리를 빡빡 민 아이가 나는 도망가다가 잡혔습니다라는 글자가 박힌 붉은 티셔츠를 문패처럼 달고 있다. 그 옆에는 여름에도 이곳에 이 집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돌돌 말려 올라간 차양막이 있고 스티로폼으로 된 문이 있다. 문을 열면 방이다. 서너 명 앉을 수 있는 방. 그러니까 이 작은 집은 방이다. 이 방에 들어와 본 사람들은 알 수 있는 묘한 기운이 있는데, 그것은 방의 두 면에 있는 산과 바다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어서일 것이다. 산의 속, 지하철역 쪽으로는 지난가을에 입었을 법한 쑥색 점퍼가 걸려 있다. 바다의 속, 국회의사당 정면 쪽에는 형제복지원에는 3개의 병동이 있었다로 시작되는 어느 날의 신문 기사가 벽면 가득 붙어 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다른 이름 '살아남은 아이' 작은책(하명희)


앞머리가 눈을 덮고 찬기에 어깨를 웅크린 그가 허리를 구부려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신발을 벗고 바닥을 덮고 있던 이불 속으로 발을 뻗었다. 그가 미리 덥혀 놓은 주전자에서 캔 커피를 꺼냈다.

이거라도 들고 있으면 조금 나아요.”

이 방에서 캔 커피는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일한 온열기다. 이 이불 하나로 괜찮으냐고 물었다.

하도 길에서 살아서 이젠 뭐, 괜찮아요.”

그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왔다. 누구나 들어오라는 듯 입김이 열린 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누군가 고개를 들이밀고 손님이 있었네, 하고 끼어들었다. 그는 1인시위에서 했다던 몸에 익은 목례를 하며 내게 저기 민간인 학살 투쟁위원회의 어르신이에요 하고 말했다. 다른 농성장에서는 천막 안에 잠자는 텐트가 있던데 여긴 온열 기구도 없이 어떻게 견디느냐고 물었다.

천막 농성장이 커지면 더 추워요. 작은 게 좋아요. 여긴 사람들이 신발 벗고 들어와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힘든 얘기나 농담이나 그런 걸 나눌 수밖에 없죠. 방이니까. 사랑방이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었다. 그는 칠판에 날짜를 지우고 더하며 긴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 고맙죠. 저쪽 한국에서 제일 큰 집(국회)에서는 아무도 안 와요. 매일 이 앞을 지나가면서도 단 한 명도 안 들어오더라고요. 1인시위를 시작한 때가 2012년이니까 6년 지났고 올해 7년째인데, 작년 1226일에도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구요.”

그는 웅크린 어깨가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말했다. 나는 책을 보았다고 했다. 내가 책을 꺼내자 그는 첫 페이지를 손으로 짚었다.

  ▲ "이게 나예요팔사일공삼육일팔!"  작은책(하명희)

이게 나예요. 팔사일공삼육일팔! 아홉 살 때. 어릴 때 사진은 이것뿐이에요. 팔사일공삼육일칠은 작은누나고.”

그는 이빨이 시린지 얼굴을 찡그렸다. 책을 보고 알고 있었다. 그에게 추위는 공포라는 걸. 잠깐이라도 따뜻한 곳에서 밥을 나눠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대방의 생각을 미리 알아채는 법을 아홉 살 이후 몸에 익힌 듯 내게 먼저 밥 먹으러 가죠라고 말했다.

살아남은 아이. 우리는 그들 수용소의 생존자들을 이렇게 부른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대략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이것이 그들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리고 있는가. 그는 밥을 씹지 않고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이빨이 아파서요. 어릴 때니까 유치가 빠지고 어른 이빨이 나오는 때였어요, 형제복지원에 붙잡혀 들어갔을 때가. 그때 관리를 못한 것도 있고, 빨리 먹어야 하니까 급하게 삼키던 것이 버릇이 된 것도 있고, 또 어떻게든 거기서 나가야 사니까 이를 악물었던 게 이렇게 되어 버렸어요.”

내가 씹기에는 무른 밥이 그에게는 딱딱한 밥이었구나. 이 책에는 그가 왜 무른 밥을 씹지 못하고 삼켜야 하는지, 왜 찬 바닥에서 자는 것이 일상이면서도 그것이 공포인지, 왜 어깨를 움츠린 채 허리를 펴지 못하고 인사를 하는지, 그의 몸에 새겨진 폭력과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역사의 거대한 공백이 조각보의 박음질 글자처럼 새겨져 있다.

▲ 살아남은 아이-개정판,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 (전규찬, 박래군, 한종선/ 이리/ 2014)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개나 소나 다 글을 쓰는구먼.’ 그렇다.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 나는 지금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국가가 버렸고, 사회가 관심을 안 갖는데, 어찌 개인의 힘으로 쉽게 나올 수 있겠는가? 당신들은 진정으로 그들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길 원하는가?” 한종선, 살아남은 아이(이리, 2012) 134135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옥을 경험한 그가 형제복지원을 나와 생존자로서 살아야 했던 세월을 사회가 몸으로 받아 적는 일이다. 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이다. 안영춘은 어째서 소년은 그동안 우리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는 수용소와 연관된 모든 이들이 퇴소 후에도 여전히 비가시적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문맥과 행간에서 찾아야 한다(10)고 이 책의 발문에 적고 있다. 책이 나온 것이 2012년이니 벌써 7년이 지났다. 그사이 이 책의 소년이 던진 질문들은 그 거대한 공백을 어떻게 채웠을까. 이 책을 기획하고 생존자 한종선이 그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격려한 전규찬은 수용소의 생존자들에게는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의 의무, 수용소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그 증언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경청의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책 속의 아이가 있고, 생존자들이라 불리는 그들은 423일째 폭력의 날짜를 새기고 지우며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진심으로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가?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집인 국회 앞에 나는 도망가다가 잡혔습니다라는 문패를 단 작은 집이 있다. 작은 집에는 울타리가 없어 집 밖이 다 마당이다. 주소가 없어 우편물을 들고 직접 가야 한다. 작은 집은 지나는 사람이 들어와 인사를 건네거나 주변의 농성하는 사람들이 걱정을 풀어놓는 사랑방이 된다. 작은 집 마당의 큰 집에서는 작년에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특별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1인 시위를 시작한 지 7, 국회 앞에 작은 집이 들어선 지 423일이 지났다. 그동안 국회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이 작은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오지 않았다. 

* <작은책> 편집위원인 글쓴이는 2014나무에게서 온 편지로 제22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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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0월호

쉬엄쉬엄 가요

독립영화 이야기_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감독의 <사수>

 

우리가 없던 시간의 기록들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솔직한 고백을 드립니다. 유성기업에 대해서는 자주 들었습니다. ‘장기투쟁 사업장으로서 늘 이름이 나왔고 그래서 2014밀양·청도 72시간 송년회의 방문지이기도 했었죠. 하지만 저는 그동안 이름만 알고 있었어요. 2014년 그때에 밀양, 청도 주민들의 일정에 부분적으로 동행하기도 했으면서도 유성기업의 사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구미 스타케미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코오롱 해고 노동자, 씨앤앰 케이블 노동자, 기륭 노동자. 다 열거하기에도 숨이 찹니다. 너무 많은 곳에서 너무 긴 시간동안 절절한 사연을 안고 싸우는 분들이 너무나 많아서 각자의 차이는 뭉뚱그려진 채 이름으로만 구분될 뿐이었습니다, 제게는. 그러다가 이번에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만난 <사수>라는 영화 덕분에 이제야 그곳이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수>라는 영화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수>를 만든 생활공동체 공룡(이하 공룡)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공룡 사람들은 미디어교육 워크숍 같은 데 가면 만나는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청소년들과 교육 활동을 하면서 지역에서 함께 살아내고 성장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라 평소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거든요. 공룡이 만든 영화라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달 영화로 <사수>를 추천합니다.

2016년 여름,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유성기업 노동자 한광호 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011년부터 시작된 회사의 노조 파괴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키려 싸워 온 지 5년이 되어 갈 무렵이었습니다. 무장한 경비용역들로부터 무차별 폭력을 당하며 감시와 차별의 일상을 살아오던 일터 동료들에게 한광호 님의 죽음은 곧 자기 자신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또다시 동료를 잃을 수 없다는 각오로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은 노조 파괴를 끝내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웁니다. <사수>는 그 시간의 기록입니다.

영화 <사수스틸 이미지.


공룡 사람들이 유성기업을 만난 건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문이었습니다. 폭력의 기록이 담긴 피켓을 든 채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웃지 않았고 가만히 비를 맞고 서 있었다고 김설해 감독은 말합니다. 김설해 감독이 들려주는 유성기업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2011518일 그들의 회사는 야간노동을 없애기로 한 노조와의 약속을 어기고 교섭 도중 기습적으로 직장을 폐쇄합니다. 용역들이 공장 문을 막은 채 폭력을 행사하고 2000명의 경찰들이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렇게 기나긴 싸움은 이어집니다. 처음 보는, 하지만 낯설지 않은 화면들이 이어집니다. 투쟁의 일상 중 하루였을 어느 날, 노동자들이 천막을 철거합니다. 그중 한 노동자에게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라는 말을 하면서 인터뷰에 응해 줄 것을 청하지만 그 노동자는 나는 고생 안 했다고, 다른 사람 섭외해 주겠다고 쑥스럽게 웃으며 카메라를 피해 도망갑니다. ‘1994년 유성기업 입사라는 설명 자막과 이름이 떠도 저는 몰랐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에 돌입한 동료에 대해 마음이 아프고 안쓰럽다는 심정을 토로했던 그분의 얼굴이 장면이 바뀌면서 영정사진 속에서 웃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고 한광호 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생전의 한광호 님을 알고 있었던 거죠. 인형극을 준비하고 연습하며, 천막을 치고 걷으며, 용역의 폭력에 함께 맞서 싸우며,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내 온 겁니다. 그래서 영화를 두 번째로 볼 때에는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화면들을 보게 됩니다. 쑥스러워하던 한광호 님의 인터뷰가 끝난 후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하며 나무 그늘 밑에 모여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멀리서 찍은 화면이 보입니다. 보통은 씬의 마무리 화면으로 쓰이는 롱샷 안 그 어딘가에 한광호 님의 모습이 있는 겁니다. 어제와 다름없는 일상이라고 생각했을 그 순간들. 영화를 만들기 위해 화면을 고르며 떠올렸을 지나간 시간의 추억들. 그리고국석호, 김성민, 김수종, 김풍년. 지금은 함께 있지만 다가올 미래는 가늠이 안 되어서 불안한 이 관계들.

영화가 진행될수록 각자의 사연들이 하나 둘씩 펼쳐집니다. 그 사연들은 고 한광호 님의 시간과 겹쳐집니다.

떠나고 싶은 생각어떻게 하면 끝낼까 이런 생각. 심지어 극단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죠. 차로 밀어버릴까. 어디 숨어 있다가 오며는 급브레이크 잡아가지고 뭐 이런 생각. 확 들이받고 싶은(김수종)

▲ 영화 <사수스틸 이미지.


거기에 떠나간 동료에 대한 미안함까지 겹칩니다.

나 때문에 죽은 것 같고 내가 더 나서지 못해서 죽은 것 같고. 내가 좀 더 그 자리에 서서 그 형(고 한광호 님)보다 좀더 한발 더 앞서서 아니면 옆에서 왜 못해 줬을까.”(김풍년)

김풍년 님이 들려주는 그다음 얘기에 또 충격을 받습니다. 세 살, 네 살, 많아야 여섯 살 되는 자신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목을 조르고, 아이가 피가 나는데 피 난다고 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갔다는 김풍년 님.

영화를 보고 유성기업에 대해서 찾아보면서 참 많이 놀랬습니다. 현대와 기아자동차에 피스톤링, 실린더사이더와 같은 핵심 엔진 부품을 납품하던 이 기업의 2012년 말 기록을 보면 매출액, 당기순이익, 직원 평균 연봉 등이 대기업에 밀리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고 창조컨설팅이라는 낯설지만 끔찍한 기업의 이름도 알게 되었습니다. 노조파괴 전문기업이래요. 이 기업이 망가뜨린 건 유성기업 만이 아니더군요. 상신브레이크, 발레오만도, 보쉬전장, 에스제이엠(SJM). 악명높은 이 기업의 배후에 현대차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한숨 밖에 안 나옵니다. ‘창조컨설팅의 그 비인간적인 창조성이 노동자들의 삶을, 그 가족들의 평화를 어떻게 깨뜨리는지 영화는 속속들이 보여 줍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무릎 꿇지 않습니다. 길거리에 비닐 천막을 치고 고공농성을 하며 유시영 대표이사의 법정구속까지 이끌어냅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고 한광호 님의 장례는 치러집니다. 싸움은 진행 중이고 이분들의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거기 늘 공룡의 카메라가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 영화 <사수스틸 이미지.


동료로서 <사수>가 지켜낸 자리에 경의를 표합니다. 사용자 측 직원에게 멱살을 잡힐 뻔하는 조영은 감독의 모습이 화면에 언뜻 비칩니다. 청소년기에 보았었는데 이제 성인이 되어 공룡의 정회원으로서 여전히 삶의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대화하던 회사측 직원이 갑자기 카메라에 달려들 때 노동자들은 얼른 몸으로 막아서며 말합니다. 우리 카메라한테 왜 그러느냐고. 노동자들의 카메라로 지내온 세월. <사수>에는 2011년부터의 그 모든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시간을 꼭 한 번 만나 보세요. (문의: 생활공동체 공룡 043-266-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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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19. 14:47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정용연


발행인의

  

이달 첫 꼭지 책이 이끄는 여행은 국회 앞이네요. 소설가 하명희 씨가 살아남은 아이책을 보고 국회 앞 농성 텐트를 찾았습니다. 아담하고 예쁜 그 텐트엔 생지옥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아이한종선 씨(44)가 진상을 규명해 달라며 7년째 살고 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1987년 폐쇄될 때까지 12년 동안 500여 명이 사망했던, 한국판 아우슈비츠 사건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그런 형제복지원에 해마다 운영비를 10~20억 원씩 지원했고 두 번이나 훈·포장을 수여합니다. 한종선 씨는 2008, 광우병 촛불집회를 계기로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1인시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는 빨리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

독자님들,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하는 송추향 씨가 드디어 한사람연구소가 뭐하는 데인지 밝혔습니다. 아하! 하고 머리를 끄덕이게 합니다. 그리고 특성화고등학교로 노동인권 수업을 나가는 유내영 씨의 글은 요즘 학교 분위기를 실감케 합니다. 그런 경험을 겪고 나서 글쓴이는 더욱 겸손해졌다네요. 이달 정인열 기자의 일터탐방20186월에 노동조합을 만든 한국와이퍼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현장을 탐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달에 <작은책>이 만난 사람은, 사회 정의를 찾다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내내 56개월 동안 독방에서 징역을 살았던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입니다. 만나 보니 참으로 유쾌한 분이었습니다. 독자님들, 까치 까치 설날 말고 우리 설날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9118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국회 앞 작은 집 하명희

10 발행인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선배와 결혼해서 후배와 살고 있다 이동수

15 딱 죽을 것 같았는데 지나가더라 류미례

19 선물 공세하는 남편, 알고 보니최해옥

22 조폭 출신들의 뮤지컬 김호균

26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어부와 결혼은 못 했지만윤혜신

32 청년으로 살아가기 배달이요 야채죽

38 이야기가 있는 사진 장영식

40 살아온 이야기(8)

한사람연구소가 뭐 하는 뎁니까? 송추향

46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아토피 치료도 연대가 필요하다 권해진

49 교실 이야기

그날 경험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유내영

54 산골부부의 시골살이

속풀이 동치미로 행복한 상상을 조혜원

58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2 일터 탐방_ 한국와이퍼

급똥을 참느라고 불량 내지 마세요 정인열

68 일터에서 온 소식

내가 보육 교사를 할 줄 꿈에도 몰랐다 이현림

73 일터에서 온 소식

기아차의 이상한 신규 채용 신산

77 작은책 법률 상담소

말도 안 되는 월세 연체료, 내야 하나요? 박시진

 

작은책이 만난 사람_ 한상균

81 본래 순둥이가 무서운 거예요 안건모

106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108 생각해 봅시다

공유경제라는 가면과 호출형 노동의 등장 고태경

113 어린이 해방과 평화 어린이 행복 선언 이주영

118 여성으로 살아가기 치마와 나의 역사 홍승은

123 생태 이야기 예타필요충분조건 박병상

128 오앵의 일상의 온도 오앵

 

쉬엄쉬엄 가요

129 책 읽고 딴 생각

말이 칼이 될 때 변정수

132 독립영화 이야기

가장 먼 데 있는 영화 류미례

138 우리말과 국어사전 짚어 보기

찻사발과 놋사발 박일환

142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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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1월호

세상 보기

생각해 봅시다


그 몸으로 임신할 수 있니?

박지주/ 장애여성자립생활센터 파란대표

 

 

나는 올해 48살이 되었다. 나의 장애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초등학교 때부터 척수염을 앓았고 신경마비가 와서 중학교 2학년 중퇴의 학력으로 21살까지 재가 장애인으로 살았다. 재가 장애인이란 일 년에 집 밖을 한두 번 나갈까 말까 할 정도로 외출이 없는 장애인을 말한다. 외출하더라도 주기적이고 주도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하루를 주로 집에서 보내며 사회 참여에 원활하지 못한 장애인이다.

우리 엄마는 부잣집의 막내딸이었지만 모든 재산은 남자 형제에게만 상속되었고, 가난한 아버지와 결혼하여 우리는 가난을 물려받았다. 가난한 집이 그러하듯 의료·교육 환경은 열악하여 나의 장애는 잘 치료되지 못하고 휠체어에 의존한 삶이 이어졌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왜 집에만 있나?’ 하는 의문을 안고, 텔레비전과 음악, 자연, 책을 친구 삼아 지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늘 사람이 그립고 친구가 그리웠다. 사람은 사회 안에서 살며 인간됨을 완성하는데, 나의 사춘기는 친구다운 친구 한 명 만들지 못한 채 흘러갔다. 그러던 중 장애인 단체의 회원 방문을 받아 운전을 배웠고, 차를 몰고 다니며 사회와 교류하고 꿈을 키워 22살의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연애를 통해 장애가 있는 내 몸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지 경험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하고 본능적으로 성관계에 대한 열망이 일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시도하면서 나는 가슴 아픈 수치심을 맛보았다. 척수장애인이 성관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방광을 비우는 일이다. 그런 교육이나 지원을 받아 본 적 없이 장애가 있는 몸으로 사랑을 할 때 어려움이 발생한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의식과 욕망의 실현체인 몸이, 개인적·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때 장애를 가진 몸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경우 몸의 통로가 제대로 가동할 수 없다. 장애로 인한 실패의 아픔을 겪은 충격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자연 안에서 깨달은 나는, 나처럼 상처받은 장애 여성들을 위한 인권 운동을 해야겠다는 의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독학으로 대학교 문을 두드려 드디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가난의 근본, 자본과 노동에 관한 공부를 하며 숭실대학교를 상대로 중증 장애인 교육권 투쟁도 이어 갔다. 3년여간의 소송에서 승소하여, 힘들고 어려웠지만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장애인에게도 있다는 판결에 기뻐하며, 존엄한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사회적 변화를 꾀하려 노력하였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가 있는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존재도 부정당하기 일쑤이다. 나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생물학적 여성성을 의심받았고, 심지어 고착화된 성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여성이란 이유로 결혼 제도 진입과 임신·출산도 부정당했다. 장애 여성의 재생산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질문들 앞에서 좌절하기도 했다. ‘그 몸으로 임신할 수 있니?’, ‘생리는 하니?’라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더 아이를 낳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은, 장애 여성에게는 단순히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넘어 큰 삶의 선택이자 기회이며 실현이 어려운 소망을 깨고 싶은 도전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금기의 영역처럼 존재하는 장애 여성에게 대한 편견을 깨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 셋을 낳아 키우고 있다. 살면서 참 잘한 선택이고 행복한 선택이다. 그러나 아이 셋을 키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엄마의 피와 살과 영혼이 담긴 삶을 통째로 아이를 키우는데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피눈물 나는 삶의 현장이다. 장애가 있는 몸은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일에서부터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 그지없지만 육아는 90퍼센트 이상이 육체노동이다. 육아의 현장에서 나의 장애가 더욱 심한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육체라는 도구가 또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자아실현의 통로이나, 장애가 있는 엄마는 아이를 맘껏 안거나 업을 수가 없다. 아이를 업지 못한다는 것은, 수시로 아이를 안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가?

넘어진 아이를 두 손으로 안지 못하고, 놀이터에서 우는 아이의 안전을 지키려다가 전동휠체어가 구르고,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아이와 함께 타고 갈 구급차가 없다. 아이는 아프다고 목 놓아 울고, 엄마는 그걸 보고도 함께 병원에 가지 못하는 현실이 과연 옳은가. 장애 엄마의 장애가 장애로 다가오는 것이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유지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장애인도 사람이다. 사람은 자연스러운 본능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아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존엄함이 유지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장애 부모의 입장에서 사회적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애를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사회가 함께 이해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장애 엄마의 모성권은 양육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실현 가능한 것이다. 비장애인의 모성권 개념에 추가적으로 반드시 들어가서 확대된 모성권 범주의 실현이 필요한 것이다. 육체노동이 90퍼센트가 넘는 육아를 장애 엄마가 홀로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장애를 최소화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고, 그것은 동정이나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 비장애인에게 주어지는 아이돌보미 제도는 장애 부모에게 진입 기회만 제공하고 있고, 장애 부모의 특수성을 반영한 시간 확대, 자부담 폐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장애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때는 반드시 사회권적 양육받을 권리가 실현되기 위해 한걸음 나아간 장애 부모 입장의 제도적 지원과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 장애인 활동지원제도에도 아이가 태어나는 6개월간은 양육 활동 지원이 가능하나 그 이후에는 전무한 상황이다. 각 지자체에서 실시하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양육 관련 서비스도 낮은 수혜율과 시간을 보이고 있다.

장애 엄마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이다. 내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부정적인 장애가 있는 엄마가 아니라, 그냥 현상으로서 장애가 있는 엄마이고 싶고, 최대한 아이를 잘 키우고 행복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를 최소화할 수 있는 양육받을 권리가 장애인의 특수성을 반영한 보편적 권리로 실현되어야 한다.

장애 부모와 그 자녀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편견과 사회적 시선의 개선도 필요하다. 그냥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로 돌아봐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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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시래기 만찬

윤혜신/ 밥 짓고 꽃밭 가꾸는 시골밥집 미당주방장, 착한 밥상 이야기저자

 

 

먹고, 입고, 자는 것 중에 (이게 살림살이인데)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 보면 단연코 먹는 일이 우선이다. 옷이야 서너 벌로도 살 수 있고 집이야 내 몸 눕힐 한 평만 있으면 되지만 먹는 일은 하루 세끼 꼬박꼬박 안 먹어 주면 살 수가 없다. 내가 학창 시절에 종교적인 이유로 금식이라는 걸 몇 번 해 봐서 잘 아는데 하루, 이틀, 사흘···. 이 사흘째가 되면 아주 죽을 맛이다. 살맛이 안 나면서 기운은 기운대로 쪽 빠지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첩에 금식이 끝나면 먹어야 할 음식 목록을 적는 일이다. 그러다 금식이 풀리면 보식이라고 멀건 풀띠죽 한 그릇에 동치미 한 보시기를 먹는데, 그게 뭐라고 먹고 나면 어디서 그런 힘이 샘솟는지, 기어갔다가 뛰어온다. 밥 아니 죽 한 그릇에 사람이 죽었다 살았다 한다. 올해는 그래서 먹는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한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푸성귀들은 비실거리고(온실 재배) 비싸지고 제맛도 안 나니, 나는 봄부터 가으내 잘 갈무리해 두었던 먹거리 주머니들을 슬슬 풀어 본다. 마른 채소들, 마른 나물들이 제일 많다. 그중에서도 김장 때 빨랫줄에 척척 널어 말린 무청 시래기가 많으니 그걸로 별미를 만들어 보려고 가져와 삶기 시작한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무기질과 비타민, 5대 영양소까지 배웠고, 요즘은 하나 더해서 6대 영양소가 섬유질이다. 시래기는 그야말로 별 영양가가 없는 거렁뱅이 음식으로 취급되다가 요즘처럼 생활습관병이 젊어서부터 생기는 영양 과잉 시대에 꼭 필요한 필수 영양 식품이 되었다. 그러니 겨우내 이 시래기를 맛나게 먹고 내장과 혈관의 나쁜 기름을 쭉쭉 씻어 내자.

정월 대보름에 먹는 나물에 시래기나물이 빠지지 않는다. 나물로 볶아 먹어도 맛나지만 나는 요즘 뻑하면 시래기를 푹 지져 먹는다. 시래기에 된장을 넉넉히 풀고 멸치와 다시마도 한쪽 넣어 물을 넉넉히 잡고 한 시간 뭉근히 끓이면 국물이 잘박하게 졸아든다. 이때 파, 마늘, 고추 같은 양념을 더하고 마지막에 들깨 가루와 들기름을 넣어 간을 맞춘다. 시래기지짐 한 냄비 끓여 놓으면 당분간 반찬 걱정이 없다. 갑작스레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들에게도 뚝배기에 바글바글 데워 주면 게눈 감추듯이 뚝딱 먹어 치운다. ‘밥 한공기 더!’를 외치며, 어디서 이런 맛난 시래기를 먹느냐면서.

이 시래기가 또 효자인 게, 어디에 넣어도 순둥순둥 잘 어울린다. 딱히 반찬이 없을 때 숭숭 썰어 된장, 들기름, 마늘, 국간장에 주물주물 무쳐서 밥할 때 얹어 밥을 지으면 시래기밥이 된다. 여유가 있으면 그 안에 홍합도 넣고 조갯살도 굴도 넣는다. 나는 입맛이 워낙 촌스러워서 해산물보다는 멸치 서너 마리 넣고 시래기 듬뿍 올려 밥을 지어 먹는 걸 더 좋아한다. 간이 조금 싱겁다면 양념간장을 살짝 넣고 비벼도 좋다. 겨울이라 미나리를 종종 썰어 미나리양념장을 만들면 향긋하니 입맛이 돈다. 우리 집 개골창에 요즘 미나리가 한창이다. 신기하게도 날이 추워지면 미나리가 더 파랗게 올라온다. 겨울엔 상록수 빼고 파란 건 보리와 미나리다. 식당 일은 보통 2시가 넘어야 끝나니까 우리 일꾼들과는 2시에서 3시 사이에 점심을 먹는데, 그즈음엔 배가 한창 고플 때라 뭔들 맛있지 않겠냐 마는, 뜨끈하게 시래기지짐이나 시래기밥을 해서 둘러앉아 먹으면 일하면서 생기는 작은 불만들이 다 녹아 버린다.

내가 시골에서 밥집을 15년 하면서 밥집 운영의 철칙 중 하나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다이다. 그러니 우리 일꾼들의 밥 한 끼는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같이 먹자는 거다. 그래서 손님 찬보다 일꾼들 밥을 뭐 해 먹일까가 그날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다. 매일 음식을 만들어 서비스하는 일꾼들인데 스스로가 남은 거, 식은 거, 맛없는 거, 싸구려를 먹는다면 어찌 맛난 음식을 만들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해 준 점심을 다들 기다리고 좋아한다. 정성껏 지은 밥을 먹고 나면 시시콜콜한 불만들이 사라지고 섭섭함도 사라진다.

나도 조금 힘들었다가 일꾼들이 맛있게 먹어 주면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 밥집 일꾼들은 14, 10, 6년씩 오래 일하는 편인데,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하면 아마도 점심이 맛있어서가 아닐까 한다. 맛있게 먹다 보면 이런저런 얘기가 자연스레 나오고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바쁜 여름에는 아르바이트학생을 쓰는데, 학생들 말이 여기는 밥이 맛있어서 자꾸 일하고 싶어요.’ 한다. 내 계획이 딱 맞았다!

모두들 이 시래기지짐을 먹으면서 어지간한 고기반찬보다 낫다고 한다. 시래기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음식 중에 시래기부침개가 있다. 시래기를 무르게 잘 삶아 밑간을 하고 거기에 밀가루를 넣어 반죽을 하는데, 국간장과 들기름을 약간 넣어 지지면 구수한 별미전이 된다. 생선을 조릴 때에도 밑에 시래기를 깔고 고기찜을 할 때도 시래기를 밑에 깔면 먼저 손이 가게 된다. 맛이 하나도 없는 시래기가 요리의 주인공이 된다.

여기 충청도에서는 무청을 안 버리고 그대로 소금과 고추씨를 넣어 비벼서는 아주 짜게 강짠지식으로 김치를 담갔다가 5월이 되면 꺼내서 하루 이틀 짠 기를 빼고 쌀뜨물에 들기름을 넣고 푹 지져 먹는 꺼먹지라는 게 있다. 올겨울엔 시래기 많이 말리느라 꺼먹지까지는 못했는데 돌아오는 겨울에는 꺼먹지도 한 항아리 담가 날이 더워질 때 꺼내 먹어야겠다. 나이 드니 이런 짠지같이 오래된 반찬이 좋아진다. 사람도 음식도 은근히 오래 묵은 게 구수하고 소화가 잘된다.

 

 

 

* 시래기지짐

재료: 삶은 시래기 600그램

양념: 멸치 10마리, 다시마 10x10센티미터, 된장 3큰술, 대파 1, 마늘 1큰술, 들깨 가루 3큰술, 들기름 1큰술, 고추씨 1/2큰술(청양고추 1~2)

 

만들기

1. 삶은 시래기를 깨끗이 씻어 5센티미터 길이로 잘라 냄비에 넣는다.

2. 물을 넉넉히 붓고 멸치, 다시마, 된장을 풀어 넣고 중약불에서 40분 정도 푹 끓인다.

3. , 마늘, 고추씨(고추), 들깨 가루 넣고 잘 섞어서 다시 한소끔 끓인다.

 그림_ 이동수


* 시래기밥

재료: 삶은 시래기 200그램, 3

양념: 된장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들기름 1큰술,

국간장 1큰술

양념장: 간장 2큰술, 2큰술, 다진미나리 2큰술, 고춧가루 1작은술, 들기름 1작은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만들기

1. 쌀 위에 양념에 무친 시래기를 올려서 밥을 짓는다.

2. 뜸을 잘 들이고 풀 때 고루 섞는다.

3. 양념장과 곁들인다.

 

 

* 시래기전

재료: 삶은 시래기 200그램, 통밀가루 2, 11/2, 통들깨 3큰술

양념: 국간장 1큰술, 들기름 1큰술

 

만들기

1. 삶은 시래기는 종종 썰어 밑간을 한다.(국간장 1큰술, 들기름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2. 밀가루에 물과 통들깨, 국간장과 들기름을 넣고 부침개 반죽을 고루 섞은 다음 밑간한 시래기를 넣고 고루 섞는다.

3. 식용유와 들기름을 반반 섞은 기름을 팬에 두르고 한 장씩 노릇하게 지져 낸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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