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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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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2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은수미 시장님, 약속을 지키세요

유미라/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성남시의료원 지부장

 

 

성남시의료원에서 일하기 전 21년 동안 종합 병원에서 3교대 근무를 하는 간호사로 일했고 노동조합 활동도 꽤나 열심히 했었다. 탈퇴하면 승진을 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몇 차례 받긴 했지만 탈퇴를 해서 부끄러운 관리자가 되는 것보다 당당한 조합원으로 남는 것이 더 좋았고, 간호사로 일하는 동안 내가 일하는 시간에는 안심이 된다며 출근하기를 기다려 주는 환자들이 있어 행복했다. 직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병원을 그만두었고 4년 전부터 성남시의료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성남시의료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3년부터이다. 인하병원과 같은 산별 노조인 보건의료노조의 조합원이었던 나는 2003년 인하병원이 폐업한 후 그 조합원들이 퇴직금을 모아 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의료원이 건립되기까지 13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켜보며 함께 해 왔다. 오랜 기간 시립 병원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하느라 경력이 단절되고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인하병원 조합원들과, 시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남시의료원은 없었을 것이다. 주민 발의로 시립 병원을 만들기 위해 골목길들을 누비며 가가호호 방문 서명을 받으러 다녔는데 시립병원을 만들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낯선 사람에게 선뜻 문을 열어 주며 서명에 동참해 준 시민들이 성남시의료원의 진정한 주인이다.

성남시의료원은 2004년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사진 제공_ 공공의료성남시민행동


오늘은 2019116, 국내 최초로 주민 발의에 의해 세워지는 공공 병원인 성남시의료원의 개원 준비 일을 시작한 지 4년째가 되는 날이다. 이제 개원 준비가 아닌, 개원한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로 일하고 싶다. 그런데 나는 지금 성남시청 앞 파란 천막에서 78일째 농성을 하고 있다. 농성을 시작하면서 나의 일상은 천막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출근 전에는 시청 앞에서 비정규직을 채용하지 말라는 요구를 담은 피케팅을 하고 병원으로 출근해서 병동 분야의 개원 준비를 하고 있다. 병원에서 일이 끝나면 천막으로 퇴근을 한다.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귀가하는 시간은 자정을 넘기는 날이 많고 일주일에 하루는 천막에서 숙박을 한다. 당연히 주말도 천막에서 지낸다.

성남시의료원에 노동조합이 생기면 첫 번째로 가입하겠지만 내가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노동조합 집행부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왔었다. 10년 남짓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시간들이 소중하고 자랑스럽지만 개인적인 일상을 많이 내려놓아야 하는 일임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고 마흔 중반을 넘기면서는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나는 성남시의료원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부장이 되었다.

법인이 설립되고 2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인사 보수 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아 직원들의 임금이 천차만별이었다. 의료원에 입사해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전에 다니던 직장의 연봉을 기준으로 급여를 지급했기 때문에 천만 원 이상 차이가 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당시 병원장은 80퍼센트 이상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칙도 기준도 없는 무늬만 직무급인 임금 체계를 도입하려 했다. 차별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임금 체계였다. 논란이 되자 외부에서 의료원의 임금 체계에 대한 토론회가 진행되었다. 다양한 단체와 참가자들이 의료원에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할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정작 노동조합의 설립 주체이고 임금 체계 합의 당사자인 직원으로서 외부의 결정에만 의지한 채 침묵하고 있는 상황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개원도 하기 전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렸지만 개원을 하려면 직원을 뽑아야 하고 직원을 뽑으려면 인사 보수 체계가 있어야 하는데 2년이 넘도록 만들지도 못하고 있으니 노동조합을 만들어 제대로 된 인사 보수 체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개원을 앞둔 성남시의료원 조감도. (성남시의료원 홈페이지 갈무리)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시민들이 16년을 기다려 온 의료원의 정상적인 개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개원 준비를 최우선에 두고 활동하겠다고 조합원들과도 다짐했었다. 그래서 단체협약 요구안도 일반적인 신규 지부 요구안의 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축소하여 요구했다. 직원들의 복지 혜택에 대한 요구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빨리 마무리하고 개원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첫 교섭 상견례를 시작한 후 사측의 교섭 대표가 4번 교체되었고 교섭 대표가 바뀔 때마다 기존의 합의 사항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의료원장의 공백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섭도 장기화되었다. 현 의료원장이 취임하기 전까지 교섭 대표들은 합의서를 쓰지 않았어도 교섭 내용이 녹음되고 있으니 합의서와 다름없다고 기존의 합의 내용들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성남시의료원에 비정규직을 채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성남시와 성남시의료원이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한 약속이고 노사가 이미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런데 성남시와 성남시의료원의 경영진은 약속도 합의 사항도 모두 뒤집었다. 교섭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개원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조합원들에게 불리한 경력 산정 기준도 수용했고 개원 준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일부 분야에 한시적으로 비정규직을 채용하되 기간 만료 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잠정 합의했었다. 그러한 잠정 합의안을 사측이 하루 만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더니 급식, 청소 미화, 보안, 진료 보조, 환자 이송, 약무 보조, 콜센터, 운전원 등 9개 분야 238명에 대한 비정규직 채용 계획을 노동조합과 협의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238명이면 비정규직으로 채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해당한다.

글쓴이 유미라 지부장이 성남시청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_ 성남시의료원지부.


잠정 합의안도 파기하고 국가 기관인 노동위원회의 조정 권고안까지 거부하면서 그동안 합의했던 노동조합 가입 범위, 인사 보수 체계도 모두 뒤집었다. 비정규직 문제는 경영권이고 인사 보수 체계는 인사권이라며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도 했다. 1년에 걸쳐 노사가 합의한 내용들을 파기하고 사측이 일방적으로 만든 인사 보수 체계를 취업 규칙에 담아 개별 직원들에게 강제 동의나 다름없는 공개 서명을 받았다. 이로 인해 3년 동안 개원 준비를 위해 고생해 온 직원들이 입사 당시 인정받았던 경력을 삭감당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노조 가입 범위에 대해 법대로 하자는데 그것도 합의 못하겠다며 조합 가입 범위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려는 것은 헌법으로 보장하는 노동 기본권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시장 임기 내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모두 전환하겠다고 하면서도 합의서는 쓸 수 없다는 것은 정규직으로 전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 기본권조차 인정하지 않고 비정규직 없는 병원을 만들겠다던 시민과의 약속을 너무 쉽게 뒤집어 버리는 성남시와 성남시의료원 경영진의 행태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성남시청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는 이유이다.

무더운 여름에 시작해서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고 이제 곧 겨울이 되겠지만 오늘도 천막으로 퇴근을 한다. 세상에 비정규직으로 채용해도 괜찮은 일자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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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2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남해화학 비정규직

 

표적 해고당한 민주노총 조합원들

정인열/ <작은책> 기자

 

 

거북선표 비료로 농민들에게 잘 알려진 남해화학()1974년 설립된 비료 생산 기업이다. 농협 계열사로 연 매출 1조 원이 넘으며(2017~2018년 사업 보고서), 시장 점유율 50퍼센트에 달하는 업계 1위 업체다. 정규직 평균 급여도 1억 원에 이르고(2018년 사업 보고서, 평균 근속 17) 우수한 복지 제도도 많다.

남해화학 여수공장. 작은책(정인열)


하지만 이런 남해화학의 위상 뒤에는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업무를 맡아 최저시급을 받으며 밤새워 일하는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2015년부터 2년마다 고용 불안에 떨고 있다. 남해화학이 하청업체와 2년마다 신규 계약할 때 기존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 조건을 없애고, 사실상 최저가 낙찰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낙찰한 신규 업체 새한이 한국노총(하이팩노조·여수종합항운노조) 조합원만 고용 승계 하고 민주노총 조합원은 거부한 일이 발생했다. 더군다나 이를 원청인 남해화학이 배후에서 지시한 정황도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지난 10월 1일부터 해고 노동자 29명이 고용 및 단체 협약 승계를 요구하며 여수 공장 안에서 옥쇄 투쟁을 시작했다이들은 모두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남해화학비정규직지회(이하 지회) 조합원으로길게는 30년 넘게 제품팀에서 비료 포장과 설비 정비를 해 왔다.

공장 내 직원 대기실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투쟁가를 부르며 옥쇄투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남해화학비정규직지회


지난 1031, 장비팀 조합원 김중민 씨의 안내로 여수 공장 접견실에서 해고자 구성길, 이완규, 김만수 씨를 만났다. 제품팀과 장비팀은 모두 하이팩 소속이었으나 최근 입찰에서 제품팀은 새한과, 장비팀은 기존 업체인 하이팩과 계약했다. 장비팀 조합원들은 연차 휴가를 내고 공장 밖에서 함께 투쟁하고 있다.

남해화학 접견실에서 이인규, 구성길, 김만수, 김중만 씨(왼쪽부터)를 만났다. 작은책(이동수)


남해화학이 새한, 한국노총 간부들하고 모여서 민주노총 조합원은 완전히 들어내고, 나머지는 단기 계약직으로 채워서 최대한 이윤을 가져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완규 씨의 말이다. 지난 1017남해화학 비정규직 집단 해고 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전남대책위원회(이하 전남대책위)는 기자 회견을 열어 이를 뒷받침하는 녹취록을 공개했다. 이 녹취록은 지난 105일 한국노총 고용과 단협 승계를 합의하는 자리에서 남해화학 제품팀장과 차장, 새한 총괄부사장, 한국노총 하이팩노조 위원장이 나눈 대화로, 남해화학 측이 민주노총 고용 승계 거부를 지시하고 인사 개입까지 한 정황이 담겨 있다. 공장 안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헌신하던 이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친 것이다. 구성길 씨와 이완규 씨의 말이다.

남해화학에서 잡일은 다 하는 잡부죠. 주 업무가 성수기 때는 포장, 비수기 때는 설비 청소하고 쓰레기 치우고. 남해화학에서 제일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최고 장시간 합니다.”

비료 원료들은 해외에서 수입해 대형 선박에 실어 부두에 하역한다. 김중민 씨 같은 장비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중장비로 원료를 운반하고 컨베이어 벨트 등 생산 라인에 투입하는 일을 한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공장 내로 운반된 원료들은 화학 가공 되어 비료로 만들어지고 다시 포장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손을 거쳐 완제품이 된다.

정량보다 적거나 많거나 포장이 불량한 것은 파대(포장을 터트림) 작업을 해요. 20킬로그램짜리를 깡통에다 붓고 들었다 놨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제품에 하자가 생기면 전부 다 사람 손으로 골라내고 까대기질(제품을 분류하고 적재) 합니다.”

24시간 가동되는 공정에서 이들은 43교대로 근무한다. 성수기에는 16시간 연속 근무하는 경우도 잦다. 비수기인 7~12월에는 사고 위험이 높은 작업에 투입된다. 이들은 컨베이어 벨트에 직접 올라가 투입구 밖으로 떨어진 비료를 치우거나 유해 물질이 저장된 창고나 대형 선박의 탱크 안에 들어가 청소를 한다. 주로 다루는 물질은 비료 제조에 쓰이는 질소, 인산, 칼륨, , 석고 등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료 공급 시설로 직접 들어가 공급 라인 밖으로 넘친 비료를 청소하고 있다. 사진 제공_ 남해화학비정규직지회


사다리를 타고 몇만 톤짜리 배 밑바닥으로 10미터 넘게 내려가서 삽 하나 들고 방진 마스크 쓰고 청소하고요, 황산 탱크에 들어가서 굳은 황산을 손 드릴로 파기도 하고요.”

산업의학 전문의 공유정옥 씨는 남해화학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에 대해 모두 매우 위험한 유독 물질이다. 특히 탱크 청소할 때 산소 농도가 너무 낮거나 독성 물질 농도가 너무 높으면 질식이나 중독으로 갑자기 사망에 이를 위험이 크다. 피부에 노출되면 화상이나 피부염을 입게 되고, 만성적으로 분진을 마시면 특정 장기가 손상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소 농도를 체크한 후 작업 여부를 결정하고 투입 시에는 산소가 공급되는 송기 마스크와 작업복을 착용하고 작업복 품질 관리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현장은 산업 안전 기준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김만수 씨의 증언이다.

주로 방진 마스크를 많이 사용했고 사전 산소 농도 측정 여부는 저희가 알 길이 없습니다. 안전 교육은 전무하고요. 원청은 우리가 작업 허가서에 서명을 했는지만 확인합니다.”

현장에는 냉방 장치도 없어 여름이면 땀범벅이 되어 일한다. 야간 노동으로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30년을 일해도 신입 직원과 똑같이 최저 시급을 받는다. 이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건 희망이 없다는 점이다. 이완규 씨의 말이다.

한 달에 100~150시간 잔업을 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애들 뒷바라지하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제 나이도 50대 중반이 넘어서 노후 자금도 준비해야 하는데.”

100시간 이상 잔업 및 야간 노동에 상여금 600퍼센트를 합쳐도 정규직 임금의 30~4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복지도 크게 차이가 나는데, 대표적으로 정규직은 모든 자녀의 대학 학자금 전액을 지원받지만 비정규직은 1년에 60만 원이 고작이다. 이런 현상은 자연스레 여수 지역 계층 간 격차로 이어진다. 구성길 씨가 말한다.

공단 정규직 자녀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이렇게 따로 다녀요. 회사 버스가 등하교 시켜 줘요. 어릴 때부터 분리되죠.”

이완규 씨는 자녀들에게까지 빈곤이 대물림되는 현실을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솔직히 공부를 좀 못해서, 빽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고생하는 건 숙명으로 알랍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가족들은 무슨 죄가 있냐는 말이에요. 가족들만 생각하면 정말 피눈물이 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년마다 하청 업체와 근로 계약을 맺었지만 고용 불안에 대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남해화학이 입찰 조건으로 고용 조건 저하 없는 고용 승계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5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고용 승계 조건을 없앴고 최저가 입찰로 유진피엘에스와 계약을 맺었다. 유진피엘에스는 교섭 해태, 임금 체불, 부당 노동 행위를 일삼고 어용 노조인 제2노조를 설립해 기존 비정규직 노조를 탄압했다. 정규직 노조와 당시 상급 단체였던 한국노총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남해화학 생산 라인 현장에 피켓이 걸려있다. 사진 제공_ 남해화학비정규직지회


지회는 한국노총의 한계를 느끼고 2016년 민주노총으로 조직을 변경했다. 2017년 여름, 지회는 농협 본사와 청와대를 오가며 53일간 파업했고 결국 유진피엘에스를 입찰에서 탈락시켰다. 그런데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민주노총 조합원만 표적 해고됐다. 지회는 2년마다 고용 불안이 재발하지 않도록 이번 투쟁에서 확실하게 매듭짓고 싶다. 전국농민회총연맹도 남해화학의 행태를 규탄하며 불매 운동도 불사하겠다는 성명서를 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 등 관련 정부 부처는 팔짱만 끼고 있다. 김만수 씨가 말한다.우리한테 양보하라고만 해요. 최저 시급 받는 사람이 양보할 게 어디 있습니까?”

연 매출 1조 원이 넘고 이익 잉여금 33백억 원을 보유한 남해화학이 양보해야 할까, 아니면 최저 시급 노동자가 양보해야 할까. 상시적이고 꼭 필요한 업무인데 왜 비정규직을 쓰는 걸까. 근본적인 물음들이 떠오른다.

* 12월호 인쇄 직전, 지회는 해고자 전원 고용 및 단협 승계 타결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1119, 옥쇄투쟁 51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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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18)

 

이만큼 했으면 다 한 거지 뭐!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오늘 딸아이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면접을 다녀왔습니다. 고등학교라니! 써 놓고 보니 더 낯섭니다. 아이가 가고 싶은 학교는 본인뿐 아니라 학부모도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도 봐야 하는 곳입니다. 면접에 임한 선생님들이 어찌나 푸근한지 하마터면 퍼질러 앉아서 푸념을 늘어놓을 뻔했습니다. 들어갈 때 사교육 포기 각서를 쓰게 하는 고마운 학교라서 꼭 붙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자소서에 면접까지 마치고 나니, 할 일을 다한 기분입니다. 붙으면 너무 좋겠지만, 떨어져도 이제부터는 뭐 자기 인생이지요. 좀 더 건강한 환경에서 입시 준비 따위 말고 정말 배움이 있는 공부 시키고 싶어서 부린 욕심은 딱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혼자 키우는 동안 아이는 내게 늘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갓난쟁이일 때는 젖 물리고 똥오줌 닦아 주며 생존시키는 그 자체가 하루하루 도전이었지요. 제 발로 걷고 밥 먹고 할 때부터는 먹고사는 일, 집안 살림, 육아를 동시에 해내야 하는 것이 도전 과제였습니다.

미션클리어해 가면서 레벨 업되었던 시간을 가만 돌아봅니다.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다 하려면 다른 사람하고 연결될 여력이 없어지는 게 당연한데요. 내 경우엔,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그리고 방학이라는, 어쩔 수 없는 엄마 부재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늘 누군가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딸아이 말마따나, 엄마가 없으면 아무도 없는 거니까, 민폐를 끼치고 은혜를 갚고 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어떤 때는 끼친 폐가 많아 약소한 은혜 갚음으로는 갚아지지 않기도 했고, 어떤 때는 작은 민폐에 너무 많은 죄책감으로 자폐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그 균형이 잘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마는, 덕분에 혼자 고립되지 않을 수 있었고, 뜨겁고 진한 관계망들이 도처에 생긴 것 같습니다.

딸아이 레벨도 많이 높아졌는데요. 첫째로, 아기 때는 어린이집에 가장 먼저 가서 가장 늦게 나오는 신세다 보니 감기며 중이염이며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감기 한번 심하게 앓지 않으니 몸이 많이 좋아졌지요. 둘째로, 터진 입으로 못하는 말이 없고, 튀어 오르기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다가 말도 제법 가려 하게 되고, 문도 살살 닫고, 화도 덜 내고, 급기야 좋은 마음이 들 때는 좋은 이야기를 꺼내 놓기도 합니다. 이 녀석이 한번 구기면 너덜너덜해지는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생긴 모습 그대로 다시 튀어 오르는 용수철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레벨 업 되는 과정을 쓰다 보니 어느새 이번이 마지막 연재 글입니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면 몇 날 며칠은 떠들 수 있지, 책이 몇 권은 나오지 싶었는데, 실은 <작은책>에 한두 번 말하고 나니 당장 밑천이 바닥이 났더랬습니다. 이 앙상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송추향 씨는 우리 나이로 마흔두 살이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동생이 둘 있고, 집이 너무 못살았다. 송추향 씨 어머니는 남해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역시 못살았지만 자기 아버지 몫으로만 올랐던 쌀밥을 받아먹을 수 있을 만큼 귀하게 자랐다. 그러다 결혼해서 송추향 씨를 임신했을 때 밀감이 먹고 싶었는데 살 돈이 없어서 밀감 껍데기를 씹어 먹었다고 했다.

송추향 씨 아버지 또한 남해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집이 못살았다. 장남이지만 공부가 싫어서 집을 뛰쳐나가 부산에서 노가다를 하며 살다가 결혼해서 송추향 씨를 가졌다. 여전히 너무 못살아서 그 고단함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아내와 자식에게 풀고 살았다. 그러다 2002년 암에 걸려 비로소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송추향 씨 아버지의 노동 해방은 어머니의 노동 굴레로 넘겨졌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건물 청소를 하고, 낮에는 아이나 어르신을 돌보고, 보육 교사를 하고, 간간이 이삿짐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러다 콩팥에 병을 얻어 일주일에 이틀 투석하는 동안, 비로소 쉰다. 아직 노동에서 해방되지는 못하고 여전히 새벽에는 건물 청소를 하고, 주말에는 아이 돌봄을 한다.

송추향 씨는 부모가 아직 젊을 때에 독립을 해서 식구들하고 크게 상관없이 살다가 18년 전에 아이를 가져 이듬해에 낳았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법을 몰라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가 대학생은 육아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길로 송추향 씨의 수정란에서 정자의 지분을 갖고 있는 한 남자를 불러다가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그 남자가 아팠다. 몸이 아프자 정신도 황폐해져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 송추향 씨는 어느 날 1년 남짓한 결혼 생활을 접고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그동안 안중에 없었던 부모님 집에 아이를 맡기고 날마다 서울로 출근하고 부산으로 퇴근하며 살았다. 송추향 씨 전남편이 불쑥 부산 집에 나타나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송추향 씨 부모님은 군말 없이 손녀를 보내 주었다.

송추향 씨가 다시 아이를 되찾아올 때까지는 5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싸우고 어르고, 법정 다툼까지 한 뒤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송추향 씨 딸은 아빠한테 많이 시달리며 살았다. 다시 돌아온 딸은 욕도 잘하고 화도 잘 내고 무엇보다 슬픔이 컸다. 그 쏟아 내는 것들 앞에서 쩔쩔매면서 송추향 씨는 다 받아 줄 거야라고 허풍을 떨었다. 그것이 허풍이었다는 것은 급격히 하얗게 센 머리칼 때문에 다들 눈치챌 수 있었다. 송추향 씨는 딸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건너온 표식을 달아 주고 싶었다. 딸의 성을 송추향 씨 성으로 바꾸었다.

송추향 씨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적은 없다. 하지만 스무 살이면 사람은 자기 밥벌이하며 스스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기 몸에 아기가 생겼을 때, 그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온전히 자기 혼자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니, 다시. 아이는 생긴 이상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잘 태어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라고 생각했다. 생물학적 지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송추향 씨가 여자니, 아이는 당연히 딸이라고 생각했다. 생리 기간에 수영장에 오지도 말라고 하고, 돈도 환불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남녀 차별이라고 인권위에 제소했다. 엄마가 키우면 자식은 엄마 성을 붙이는 것이 맞다고 믿고, 나중에 그 자식이 크면 자기 스스로 이름을 붙여 살기를 바란다.

그 딸이 지금까지는 엄마가 자기 눈치를 200만큼 보다가 이제는 자기 눈치를 100밖에 안 본다며 불만을 표시할 때, 송추향 씨는 자기가 딸 눈치를 200만큼 보는 줄을 알아줘서 고마워했다. 또 자기가 딸 눈치 보는 일이 100으로 줄었을 때, 나머지 100은 딸이 자기 눈치를 보아 주는 거라고 여겨서 고마워했다.

혼자 날아다니며 살 것 같았던 송추향 씨는, 상태가 좀 괜찮아진 사춘기 딸과 이제는 늙고 병든 부모님이 안중에 들어왔다. 그래서 더는 날아다니지 못하고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산다고 생각하는데, 엊그제 딸한테서 엄마는 혼자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상실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날씨가 흐린 것 같다고 하더니, 오늘 고등학교 면접 자리에서 면접관이 딸아이한테 너에게 엄마란?’ 하고 물었는데 고마운 존재라고 답했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듣고, 날씨가 참 좋다고 했다.

 

A4 용지 달랑 한 장이면 끝날 이 얄팍한 삶을 열여덟 번에 걸쳐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하찮은 이야기에도 두 눈을 반짝, 두 귀를 활짝 해 주는 <작은책> 독자님들 덕분이었습니다. 맨날 마감이 늦어 이쁜 이분 언니, 분이 나게 만들어서 미안했어요. 의식에 흐름에 따라 늘어놓는 구멍 숭숭 난 이야기에 늘 안성맞춤의 그림으로 단단히 메꾸어 주신 최정규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림_ 최정규


내가 열여덟 번에 걸쳐서 쓴 것들은, 모두 그냥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책> 독자님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쓰는 일의 무거움이 사라졌으니, 듣고 나누러 다니겠습니다. 특히 나에게 힘껏 말을 걸어 주신 해옥님, 대구여자님, 채민님, 정희님, 은숙님, 서해님. 아직도 괜찮다면, 늦더라도 꼭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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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독서 모임과 페미니즘

김병수/ 회사원

 

 

아니 왜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항상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해?

아내가 못마땅해하며 소리 질렀다.

나 락스 세제로 청소하라는 말 못 들었어. 언제 그런 말 했어?”

나도 아내에게 화를 냈다.

내가 세 번씩이나 락스 세제를 묻혀 수세미로 닦으라고 했잖아.”

아내는 쏘아붙였다. 생각해 보니 아내가 한 번쯤 이야기 한 것 같았다. 아내는 매사에 내가 허술하고 자기 말에 전혀 집중을 하지 않는다고 누누이 지적해 왔다. 결혼 후 줄곧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도 직장을 다니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고등학생 아들과 딸에게 밥 챙겨 주고 부랴부랴 출근한다. 저녁때는 급히 퇴근하자마자 음식 장만을 한다. 자기 시간이 없다. 내가 늦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내는 지친 몸을 소파에 의지하고 있거나 피곤에 지쳐 자고 있다. 반복이다. 왜 나만 밥을 하고 반찬을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냐고 아내는 투덜투덜한다. 반면 나는 설거지, 빨래 개기, 화분에 물 주기 등 집안일을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책 읽기, 독서 모임, 영화 모임 등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애써 찾아 하는 내가 밉다고 했다. 그럴 때는 내가 너무 하나, 아내를 도와줘야 되는데후회를 하곤 한다. 그때 뿐이다. 계속 이 생활은 반복이 되고 있다. 왜 여자만 일하고 남자는 시간이 남으면 집안일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페미니즘 독서 모임에 참석한다. 일상에서 나타나는 남성 중심 생각과 행동에 대해 책 내용과 견주어 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그동안 대여섯 권의 책을 읽었다. 여자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차별을 받고 있고, 사회가 여자를 낮게 보는 현상이 난무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 것들이 여자의 시각으로 보면 차별로 인식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까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남자의 시각에 사로잡혀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을 것이다. 집에서 일어나는 아내의 짜증은 남자의 가부장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페미니즘 모임에서 지적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이다. 공부 따로 생활 따로다.


토론한 책 중에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맞벌이 남편은 청소를 하고 아내는 요리를 하는 것으로 평등하게 가사 분담을 한다. 문제는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 청소를 하지만, 매일 아침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빨래, 화장실 청소, 설거지를 한다. 그런데 아내가 더 많이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책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일정한 폭력의 감각은 내 일상을 채운다. (중략) 가장 빈번한 폭력과 착취는 일상 속에 존재한다.”라고 강조한다. 일상에서 내가 은연 중 내뱉은 말과 행동이 성적 학대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끔찍하다.

페미니즘 모임은 고정 참석자가 세 명이다. 모임을 주관하는 리더()와 나머지 둘(남과 여)이다. 한 번은 태풍이 온다는 뉴스에 모임을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토론할 내용을 많이 준비해서 다음으로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리더와 나는 다음에 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리더의 권한으로 다음에 하자고 카톡에 선언을 했다. 그 이후에 그녀는 모임에 탈퇴했다. 남성의 힘으로 여성의 의견을 묵살한 형태가 되었다. 그 이후 결국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이론적인 페미니즘을 외쳐 봤자, 생활에서 내 행동이 변하지 않았다. 페미니즘에 대해 모르는 대부분의 남자는 오죽할까? 지금도 탈퇴한 그분을 생각하면 미안하다.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다.

양성 평등에 반대한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성별 이데올로그는 남녀 모두 깊이 내면화되어 있어서 여성주의자조차 반박하기 쉽지 않다.” 이는 너무 내면화되어 있어서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내면화되어 있는 육체와 정신을 깨는 작업은 어렵다. 그러나 어렵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의도적으로 일상에서 실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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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0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강사법 적용 이후에 생긴 일

김어진/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서울경기인천강원지역 분회장

 

 

2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이맘 때쯤이면 한 학기 강의 줄거리의 서론이 지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얼굴도 조금씩 익어 가고 학생들의 표정도 마음에 담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대학 시간강사를 시작했을 때는 늦은 결혼에, 아이까지 낳고 나서였다. 8년 동안 다섯 개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일명 보따리 장사를 전전했지만 그래도 학생들하고 강의실에서 호흡했던 그 순간은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학생들의 밝아지는 표정과 함께 느낌표가 공중에서 떠다니는 것 같은 순간들이었다. 그 시간을 위해 강의 준비에 몸과 마음을 다했다.

다음 학기에도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조교에게 연락이 올까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던 순간들이기도 했다. 대학 강의의 절반을 담당하면서도 연구와 강의를 안정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그 어떤 권리 주장도 할 수 없었다. 연구실은커녕 휴게실조차 없어서 창고에서 대기해야 했다는 얘기, 대형 강의의 경우 채점하느라 졸도 직전까지 갔다는 얘기, 부당한 것 따지면 곧바로 강의 못 받을 것이 뻔해 숨죽여 왔던 대학 시간강사들의 얘기들은 12권 전집으로도 모자라다.


강사법 적용 이후로 1년마다 계약을 하고 3년 보장이라 하니 이번 학기부터야 이런 불안감은 좀 덜해질지 모른다. ‘교원지위 보장이 대학 시간강사 신분의 안정성을 보장해 줄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그러나 지난 여름 공개채용 과정에서 많은 대학 시간강사들이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전임 수준의 연구 경력을 요구하는 학교가 적지 않았다. 생계형 시간강사들은 제대로 논문 쓸 시간도 여유도 없다. 대학에서 부교수가 된 친구는 최근 학기당 18학점 이상을 강의해야 했는데 그조차 논문은 방학에야 겨우 한 편 쓸까 말까 할 정도라고 한다. 자기 연구실도 있고 연구비도 쓸 수 있는 전임교원조차도 논문 쓰는 시간과 여유가 팍팍한데 생계형 대학 시간강사들은 오죽할까. 교육부가 해고 강사들을 지원하겠다며 추경예산으로 편성한 연구 지원 사업에 얼마나 많은 해고 강사들이 지원했을지도 걱정이다(교육부 통계로 해고 강사가 7500명이라는데 지원 대상은 2000명에 불과). 그런데 한 대학은 최근 3년간 등재지 논문 3편을 요구했다! 추천서를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학교도 있었다.

4대 보험이 되는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어 대학들이 좋아라 하는 겸임초빙 교수를 미리 왕창 뽑아 놓는 경우도 많았다. 아예 겸임초빙을 빙자하라며 여전히 건강보험 되는지를 묻는 경우도 많았다. 공정성의 모양새를 취했지만 말이 공채지 내정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대학이 물갈이를 하려 했는지 반백 살 넘어간 선생님들은, 특히 인문 사회 쪽에서는 낙방(공채 탈락)되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힘든 여름이었다.

강의를 잡은 선생님들은 한숨을 돌렸지만, 3년 뒤에는 또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대학 시간강사들이 모이면 다들 하는 얘기지만, 10년 가까이 대학 강의를 하면 강의 기술이나 경험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강의실에서 학생들 눈빛을 보면 우리는 대번에 안다. ‘, 내 말이 좀 어려웠구나!’ ‘! 이제는 알아들었다는 얘기구나!’ 그래서 한국 대학생들의 강점과 약점, 그들의 고민, 그들의 마음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들의 마음 문을 열어야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전송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새로운 연구 동향, 국제 비교 사례, 서점에서 20대들이 많이 보는 책 동향, 심지어는 청춘 개그감 등을 익히면서 스스로를 단련시켜 왔다. 박봉에, 그것도 1회용 휴지 취급해 왔던 대학이 이제는 우리에게 높은 진입 장벽을 치는 것을 우리는 지난여름에 똑똑히 목도했다. 예순이 다 된 한 대학 시간강사 대선배님은 면접까지 보라는 말에 깊은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고 토로했다.

낙방한 선생님들은 왜 낙방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수시에 탈락한 수험생들과 그 부모님들의 마음을 정말 뼈저리게 공감하게 됐다는 시간강사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들이 빼곡이 적어 놓은, 우리들의 노하우가 담긴 강의계획서들을 만끽한 대학들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우리를 내쳐 놓았어도 제대로 학생들을 성심껏 가르치며 교육기관으로서 본분을 다한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개강 후 서울의 한 대학에서 문학 관련 과목을 가르치는 한 대학 시간강사 선생님은 너무 놀랐다며 다음의 얘기를 들려주셨다. ‘그 동안 오랫동안 그 대학에서 강의해 온 50대 선생님들은 다 잘리셨다’(나이 많은 강사들에게 적은 강사료 주고 부리는 게 마음에 걸려서), ‘전공선택 과목이었고 정원이 20명인데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교양 과목이 대폭 줄어들어서 생긴 현상), ‘한 교양 과목은 수강 인원이 300명이라고 한다’(그래서 학생들은 학기 초에 방트-방귀 터도 되냐- 인사를 한다).

나는 지난 3월 한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잉여인간이 아니다’. 이런 외침은 2학기에도 유효하다. 맞다. 우리는 쓸모없는 퇴물이 아니다. 우리가 힘써 만들었던 그 느낌표들이 살아 숨쉬는 그런 대학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필요한 대한민국의 대학 시간강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원이고 분노의 강사들이기를 원한다. 지금 돈벌이가 우선인 대학을 초4인 내 딸이, 우리의 아이들이 있어도 괜찮을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절망과 낙담보다 분노와 투쟁에 동그라미를 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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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1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웹툰·웹소설 작가)

 


내 몸값의 두 배를 팔아도 빚이 쌓인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2011년 죽기 전 이웃집에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 내용이다. 고인의 죽음으로 프리랜서 예술인들의 실태가 알려지자 그해 예술인들의 처우개선을 담은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대다수 예술인 노동자들은 여전히 고 최고은 작가처럼 상시적인 생계 곤란에 처한다. <작은책>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 노동자 중 웹툰·웹소설 작가 조승우, 하신아 씨를 만나 이들이 처한 구체적 어려움에 대해 들었다. 이들은 여성 웹툰·웹소설·일러스트레이트 작가로 구성된 여성노조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이하 디콘지회) 임원이기도 하다.

웹툰 작가 하신아 씨(왼쪽)와 조승우 씨(오른쪽). 김재형


일감이 없다고 잘렸어요. 월세, 생활비를 갑자기 감당하기가 어려워지는 거죠. 실업급여라도 받으면 몇 달간은 걱정하지 않고 다음 작품 준비할 수 있는데 수입이 딱 끊겨 버리니까 너무 막막한 거예요.”

조 씨는 어시스턴트로 2년간 그림을 그리다 지난 8월 에이전시(콘텐츠 유통·기획사)로부터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았다. 예술인의 70퍼센트 이상이 조 씨와 같은 프리랜서로, 이들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 고용보험이 없어 실업급여 혜택을 못 받고 있다. 퇴직금은 물론 해고 예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잘리는 신세가 된다. 문재인 정부는 특고(특수고용노동자)·예술인 고용보험 적용을 국정운영 과제 중 하나로 선정했고 국회는 고용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법안은 아직 계류 중이다. 이와 관련, 12개 예술인 노동조합 및 예술노동단체들로 구성된 문화예술노동연대는 지난 923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고·예술인 고용보험 적용을 촉구했다.

예술인 노동자들은 수입도 적은 편이다. 조 씨의 지난 2년간 월평균 수입은 120만 원.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개한 ‘2018 예술인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예술 활동으로 벌어들인 1년 수입이 평균 1281만 원, 저임금과 고용불안 등으로 투잡을 뛰는 예술인은 42.6퍼센트에 달했다. 조 씨 역시 자신이 구상하는 작품에 몰두하고 싶지만 생계가 여의치 않다 보니 어시스턴트 일을 놓지 못한 상태다. 하신아 씨는 열일곱 살에 만화 스토리작가(줄거리 구상 및 그림 연출)로 데뷔했다가 잡지 및 대여점 시장이 붕괴되자 작가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창작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낮에는 생계를 위한 일을 하고, 밤에는 작가 데뷔를 위해 준비했다. 그동안 인터넷, 태블릿 등 스마트 기기들의 발전으로 웹툰 시장이 급격히 성장했고 하 씨는 2013년 한 언론사의 웹툰 공모전을 통해 재데뷔했다. 하 씨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은 여전히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다. 복잡다단한 유통 구조 속에서 웹툰 사업체들이 작가에게 불공정한 수익 분배 계약을 하기 때문이다.

웹툰 사업체는 플랫폼과 에이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작가는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작품을 공급하며, 에이전시는 네이버웹툰, 카카오페이지, 레진코믹스 같은 플랫폼들과 계약을 맺고 플랫폼은 작품을 중개한다. (예전에는 작가플랫폼 직접 계약이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작가에이전시플랫폼 계약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웹툰 사업체와 계약에서 인지도가 낮은 작가와 데뷔를 바라는 신인 작가들은 의 입장이 된다. 제도적 뒷받침도 없는 상황에서 뜯기고 또 뜯긴다. 가령 한 달 1천만 원의 매출이 났다면 작가에게 최종 지급되는 돈은 350만 원. 적지 않은 금액처럼 보이지만 작가들은 자영업자처럼 작품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실제 수입은 훨씬 적다. 하 씨가 예를 들어 설명한다.

내 작품이 지난달에 1천만 원 매출이 났다고 쳐요. 30퍼센트는 플랫폼에서 가져가고 남은 700만 원을 에이전시와 작가가 5 5로 나눠요. 남은 350만 원에서 스토리작가, 그림작가가 3 7로 나눕니다. 저한테는 105만 원이 떨어지는 거죠.”

그림작가는 채색 어시스턴트, 배경 프로그램(또는 어시스턴트) 등 기타 프로그램 사용료, 작업실 사용료 등 부대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실제 수입은 월 100~180만 원(작업 난이도 및 지출비에 따라 다름) 수준이다. 어시스턴트를 두지 않으면 기한 내 작품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추가 지출이 생긴다. 웹툰 시장이 무한 경쟁 체제에 놓이며 분량이 한정 없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신아 씨의 말이다.

“70컷은 만화책으로 12~20페이지(작가에 따라 다름)입니다. 만화책 시절에는 주간 연재를 하게 되면 12~16페이지로 정해 줬어요. 지금은 주간 12~20페이지를 풀컬러(완전 채색)로 해야 합니다. 60, 70컷 끝도 없이 요구해요. 지금은 한 회당 100컷까지도 올라갔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몸이 아파도 해야 합니다.”

과도한 분량 경쟁 속에서 웹툰 작가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2018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웹툰 작가 실태조사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45.3퍼센트는 하루 12시간, 주 평균 5.7일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웹툰 스토리작가 하신아 씨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콘티(영상 연출)를 짜고 있다. 김재형

 

웹툰 작가 조승우 씨가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을 위해 사용하는 부대 프로그램 사용료 등 고정 지출도 모두 본인 부담이다. 김재형


고용불안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만으로도 견디기 벅찬데 작가들의 목을 조르는 제도가 있다. 바로 누적 MG(Minimum Guarantee, 최소수익보장). 하 씨는 이를 간단히 표현했다.

내 몸값의 2배를 팔아도 빚이 쌓이는 겁니다.”

플랫폼(또는 에이전시)은 작가와 일반적으로 7 3의 비율로 수익을 분배한다. 플랫폼은 다달이 작가에게 MG200만 원을 가불한다. 이후 첫 매출이 400만 원이면 작가가 받는 돈은 ‘0’원이다. 작가에게 200만 원을 선불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600만 원(정확히 667만 원이지만 계산을 간단히 하기 위해 600만 원으로 예를 듦) 매출을 올려야 비로소 플랫폼에서 요구한 MG를 채울 수 있다.

작가들이 200만 원 받을 때 7 3이기 때문에 600만 원을 (플랫폼에) 줘야 합니다.”

문제는 600만 원의 매출을 올리지 못했을 경우 부족한 금액만큼 이월된다는 것이다. 하 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내 몸값의 2배 찍었어도 기존 MG 체제에서는 그냥 멸시만 당하고 말아요. ‘작가님~ 이번 달도 MG 못 채우셨어요.’ 그런데 누적 MG는 이월됩니다. 다음 달에 800만 원을 채워야 해요. 다음 달에도 나는 400밖에 안 찍었겠죠. 1년 연재가 끝나면 2400만 원 빚이 생기는 거예요. 2차 저작권 영화화 계약을 해도 빚이 남아요. 이거 깔 때(빚 갚을 때)까지 다음 작품도 구속해요.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 갈 수가 없어요.”

법으로도 보호받을 길이 없다. 실제 한 웹툰 사업체가 MG 반환을 요구하며 작가를 상대로 낸 선급금 소송에서 1심은 약 3천만 원 전액 배상 판결을 내렸다. (2017년 서울중앙지법, 이후 항소심에서 그보다 낮은 금액으로 조정) 원고료는커녕 빚만 쌓이는 형국이다. 다음 작품까지 저당 잡힌 채 작가들은 노예처럼 노동하다 결국은 매절로 모든 저작권(저작재산권)을 업체에 넘기기도 한다. ‘구름빵4400억 원 매출을 올려도 작가 수입은 2000만 원에도 못 미친 사례처럼 말이다. 불공정한 저작권 양도 방지를 위해 2015년 표준계약서가 고시되었지만 법적 강제성이 없어 사용률은 7.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2017년 디지털콘텐츠산업 유통실태조사, 정보통신산업진흥원.) 하 씨가 비판한다.

안전망이 전혀 없어요. 업체랑 나랑 계약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작가 네가 왜 서명을 했어? 좋아서 합의해 놓고 왜 그래?”

해결 방법은 노동조합이었다. 특히 임금 및 고용불안에서 남성 작가보다 훨씬 많이 피해를 본 여성 작가들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디콘지회는 201812월 설립했지만 2016년부터 게임업계 사상검증 사태(여성주의 온라인 커뮤니티 메갈리아티셔츠를 입은 게임 성우를 업체가 전격 교체, 이를 비판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명단이 블랙리스트로 업계에 공유되고 작업에서 배제됨.) 활동을 시작으로, 2017년 레진코믹스 블랙리스트 사태(플랫폼 업체 레진코믹스의 불공정한 수익 분배를 비판한 작가들을 대표가 블랙리스트로 규정하고 해당 작가들의 작품을 메인 화면에서 배제할 것을 지시.)에서도 활발히 투쟁해 좋은 성과를 냈다. 그리고 이 연대체는 노동조합으로 이어졌다.

여성노조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소개 일러스트 디콘지회

 

디콘지회의 요구는 크게 세 가지다. 저작권 양수자의 의무 강화 및 매출 내역을 작가에게 공개하도록 하는 저작권법 개정, 표준계약서 정립, 그리고 가장 시급한 예술인 고용보험 적용 즉각 입법.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많은 예술인들이 고통을 참아 왔지만 이제는 노동조합을 통해 말하기 시작한다.

정당한 대가만 받아도 감당이 되겠어요. 노동력에 대한 최저선을 정해서 대가를 줘야죠. 최저시급만 받아도 난 감당한다(웃음).”

두 사람은 잠도 자고 싶고 공휴일에는 좀 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약속한 고용보험법 개정도 미뤄지고 있는 마당이라 한꺼번에 다 요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번에 고용보험 입법이 안 되면 저도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거 같아요.”

조승우 씨가 담담히 말했다. 예술인 노동자들이 생계 걱정 없이 오롯이 자신의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시대는 언제쯤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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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1월호

살아가는이야기

교실 이야기

 

나중은 끝이 없는 거였어


구자숙/ 인천부개초등학교 교사


 

초등학교 6학년 국어 시간. 우리는 요즘 교과서 대신 시간 가게를 읽고 있다. 시간 가게에는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먼저 떠나간 남편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 엄마가 등장한다. 엄마는 보험설계사 일을 하며 5학년 딸을 국제중에 보내기 위해 무리해서 좋은 학군으로 이사를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며 말한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웃게 돼.”

나는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엄마가 이야기하는 나중은 언제일까?” 잠시 침묵. 한 아이가 말을 한다.

대학 가는 20대요. 아니다! 아니다! 제대로 취직하는 30대요. 그것도 아닌데. 결혼하고 애들 좀 크고 난 40대 중반? 그게 나중인 것 같은데요.”

. 그럼 인생의 반을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거야?”

아이들 눈동자가 공포로 휘둥그레졌다.

아이들 말을 듣고 나니 어떤 선배가 취중에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학 가면 다 해결된다고 해서 죽어라 공부했거든. 그래서 대학 갔더니 제때 취업해야 한다고 하더라. 취업하고 나서 이제 된 건가 했더니 결혼해야 한다 하더라. 아마 내가 결혼하고 나면 그다음은 언제 애 낳을 거냐고 묻겠지. 아들도 낳아야 한다고 할 거고. 그다음 집은 언제 살 거냐고 할 거야. 젠장. 처음부터 끝이 없는 거였어.”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지금 행복해야 나중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니, 지금 힘이 들어야 나중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니? 이건 굉장히 다른 인생관이거든. 고민해 보렴.”

사실 나도 여전히 혼란스럽다. 중고등학교 시절이 정말 너무 재미없었고 철학 같은 건 가르쳐 주지도 않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사는 건 원래 이렇게 재미없는 일인지 누군가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 주었으면 했다. 공부는 정말 재미없었지만 내가 학교에서 배운 유일한 기술은 재미없어도 참고 꾸역꾸역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었기에 어쨌든 한눈 팔지 않고 죽어라 문제집 풀이를 했고 교대를 가서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철밥통을 꿰찬 공무원으로 살고 있다. 공무원으로 살면서 누리는 경제적, 정서적 안정감이 감사한 순간마다 생각했다. 중고등학교 때 지겹게 공부했던 게 다행이다. 그 지겨움을 견뎌서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구나. 그러다가도 버스 정류장에서 생기 없는 눈빛으로 좀비처럼 버스에 올라타는 중고등학생들을 볼 때면 그 반짝이고 아름답던 시절을 문제집에 코 박고 평균과 등수 계산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 외에는 무얼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그 시절이 후회스럽고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하나 마나 한 생각을 해 본다.

얼마 전 20대 후반이 된 제자들을 만났다. 공무원 시험 준비로 거의 2년 만에 나온 제자가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공무원 시험 이제 그만 보려고요. 2년을 해 봤는데요저 그냥 한 거 아니고 정말 제 삶을 갈아 넣었거든요. 그런데 답이 안 나와요. 이 정도 했는데 답 없으면 그만해야죠.” 그 아이는 공무원 시험은 정해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풀어내는 실력을 보는데 완벽하게 답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탁탁 답안 체크만 하는 수준까지 외우고 공부해야지, 이게 답이 뭘까 고민하기 시작하면 게임 끝이라고 했다. 영어는 수준과 난이도가 너무 높아 시간을 들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이건 내가 고등학교 내내 하던 짓 아닌가. 문제 풀이를 잘하기 위해 인터넷 강의를 듣고 학원을 다니면서 쓴 돈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서른 살이 가까워 오는 그 아이는 말했다. 정말 공부 좀 그만하고 싶어요. 뭔가를 시작하려면 다시 돈 들여 공부해야 하는 게 지겨워요 대학은 왜 다닌 건지.” 적어도 20대는 살고 싶은 대로 살았던, 지금은 그냥 주는 월급 받으며 별생각 없이 사는 속 편한 나는 급 부끄러워졌다. ‘요즘 아이들은 중고등학교 시절만 갈아 넣는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구나정말 잔인하다.’



그리고 아들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는 또 심각하게 고민한다. 문제 풀이를 얼마나 잘하느냐로 가치를 매기는 곳에 아이를 보내야 할지 다른 방식으로도 살 수 있다고 안내해야 할지. 그래서 지난 주말 금산 간디학교 설명회에 갔다. 그곳에서 자기 삶을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며 살아가는, 상냥하고 따뜻한 눈빛을 가진 활기로 가득찬 중학생들을 보고 말았다. 그 아이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에너지에 매료되어, 우리 아들이 나중에 먹고사는 건 모르겠고 삶의 가장 찬란하고 활기찬 청소년 시기를 이곳에서 꼬오옥 살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설명회를 진행하던 선생님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아빠 머리로, 부모님 매니지먼트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고민하고 만들어 가고 성장하고 싶은 학생을 기다립니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 학교가 부모가 사회가 어떻게 아이들을 달달 볶아 대는지, 그 과정에서 아이들 삶은 얼마나 소외되는지, 그래서 이 지겨운 입시공화국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얼마나 슬프고 잔인한 일인지를 생각하니 씁쓸하고 서글펐고, 진짜 피해자인 아이들은 쏙 빼고 어른들끼리 내쳐 싸우는 모습은 슬픈 코미디처럼 보여 부끄러웠다.

아이들에게 내가 아이였을 때 가장 듣고 싶었던 질문을 던지고 싶다. “너는 요즘 사는 게 어떠니? 재미있니? 행복하고 재미있고 나답게 산다는 건 뭘까? 당당하게 어른으로서 독립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니? 그러려면 어른들이 그리고 이 사회가 무얼 도와줘야 할까?” 그리고 이런 질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아는 어른으로 커 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지금이 행복해야 나중도 행복한 거라고 망설임 없이 이야기하는 교사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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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1월호

살아가는이야기

교장 일기

 

문제는 부모한테 있다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 교장, 열일곱, 내 길을 간다저자

 

 

아이는 날마다 커. 몸만 아니라 마음도 크지. 큰다는 건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변한다는 거고 달라진다는 거라. 몸무게, 키는 말할 것도 없고 말투나 눈빛도 달라져.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쌓이고 쌓여 젖먹이가 초1이 되고 초6이 되고 중2가 돼. 아이는 이 엄청난 변화를 겪으면서도 본능에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지.

문제는 부모야. 특히 부모 눈이 문제라니까. 부모 눈에는 날마다 일어나는 티끌보다도 작은 변화가 잘 안 들어올 수 있어. 심각한 건 티끌이 쌓이고 쌓여 들보가 돼도 안 보이고 누가 말해 줘도 믿지를 않는다는 거지. 칠십 먹은 자식도 어린애로 보인다는 말, 이거 우스갯소리로 여기고 넘어갈 게 아니야. 부모 눈에 콩깍지가 씌어 자식의 변화를 읽어 내지 못한다는 뜻이거든. 학부모 상담할 때마다 적지 않은 부모에게서 듣는 말이 있어. 문제행동만이 아니라 부러워할 만한 모습을 이야기할 때도 이런 말 자주 들어.

우리 애한테 그런 모습이?” “친구를 잘못 사귀어 그래요.” “작년엔 안 그랬는데, 올해 갑자기 왜 그러지?”

부모가 아이의 변화를 읽어 내지 못하는 까닭 몇 가지만 살피자고. 부모가 아이의 특정한 모습에 집착하기 때문이야. 예쁘고 귀여운 모습일 수도, 몸서리칠 정도로 싫은 모습일 수도 있어. 그런 모습에 집착하면 변화를 민감하게 읽어 내질 못해. 또 부모의 신념이나 가치기준이 너무 강해도 그래. 부모가 살아온 사회, 아이가 태어난 사회가 갖고 있는 지배적 가치와 행동기준이 부모의 눈을 가리는 콩깍지 역할을 하지. 좋은 대학 가야 사람구실 제대로 한다는 생각도 그 가운데 하나야.

열린 마음이란 아이에게 일어나는 변화, 아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있는 그대로 읽으려 노력하는 마음을 뜻해. 나는 있는 그대로 읽는다고? 아니야.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연인 사이에 콩깍지가 씌어 봐. 못 말리거든. 하물며 부모와 자식 사이는 그 콩깍지가 한 겹이 아니고 수십 겹 덕지덕지 붙어 있어. 자식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걸 호락호락하게 보거나 나는 안 그래!’ 하고 큰소리치는 사람이야말로 위험해. 난 교직생활하면서 이런 부모를 만나면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몸으로 깨달았지.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예로 들어 부모가 자식 키우며 열린 마음으로 지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해 볼게.

4학년 남학생 이야기야. 이 녀석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내다 어느 순간 화가 치밀면 상대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려. 얼굴이든 배든 가리지 않아. 분노에 겨워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손은 부들부들 떨어. 그러니 아이들이 같이 어울리려 하지 않을 수밖에. 그럴수록 심술과 거친 행동은 늘어나고 혼자 빙빙 겉돌고. 그런데 부모님은 3월부터 상담하자고 해도 안 오셔. 학교 여는 날 오셨기에 상담하려 했더니 동생 교실 들러 오신다 하고는 안 오더군. 전화 통화는 몇 번 했지만 수박 겉핥기라 별 효과 없고. 별 수 있나. 담임 혼자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수밖에.

그러다 시월 하순 무렵 어머님을 우연히 학교에서 만났을 때 거의 억지로 교실에서 마주 앉았지. 오늘은 담임으로서 아드님의 지금 상황을 솔직히 있는 그대로 다 말씀드리겠다며, 그동안 있던 굵직한 사례만 이야기했지. 아드님이 지금 이렇게 힘든 상황이다. 아드님에게 유산 물려주려 준비하고 계시냐, 그깟 유산 물려주려 하지 말고 아드님 가슴에 있는 불덩어리, 저 감당 못할 분노라는 불덩어리를 들어내 주셔라. 난 이런 모습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내 나름 짐작은 하지만 부모님이 저에게 솔직히 말씀해 주지 않으니 어설픈 짐작만 갖고 한 해를 살아왔다. 안타깝지만 담임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말씀드렸고 공은 부모님에게 넘어갔다. 그나마 담임으로서 의무를 조금 한 거로 위안 삼겠다. 그랬더니 어쩌면 좋겠냐고 하시더군. 그래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분간만 도움 받으면 아드님은 의지가 굳고 지혜롭기 때문에 변화가 있을 거다.

그러고 퇴근하는데 힘들더라고. 가능한 부모님 처지 공감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했지만 공연히 부모 잠 못 이루게 한 거라는 생각에 죄책감까지 들더라고. 그런데 그날 밤 1030분 무렵 문자가 온 거야. 짧게.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다시 상담하고 싶습니다. 언제 할까요?”

미룰 거 있어? 다음 날 아침 1교시 전에 상담했어. 어제 담임과 이야기 끝내자마자 남편 직장으로 찾아가 두 분이 밤늦도록 의논한 거야. 아들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전문가 도움을 받겠다며 상담할 곳을 소개해 달래.


어찌 되었냐고? 시간이 흘러 한 해 뒤 6학년 담임 할 때 그 녀석이 내 옆 반이 된 거야. 새 담임은 그 녀석이 4학년 때 화를 조절 못하고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패던 아이라는 말을 못 믿겠다는 표정이야.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훈남이 됐거든. 서글서글하고 따스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품어 주는 그런 녀석이 된 거야. 부모님은 나와 만난 그날 곧바로 상담소 예약하고 무려 한 해 동안 상담을 받았지. 아들 혼자만이 아니라 식구들 모두. 그러고는 유치원 때부터 해 오던 대부분의 사교육 다 끊고 주말마다 캠핑 가고 맛있는 거 해 먹으며 흠뻑 애정을 주고받으려 애쓴 거야.

지금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늦게라도 부모가 자식에 대한 쓴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인 건 다행이야. 아이 아픔은 덜어 주고 엉뚱한 데 쓸 기운을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쏟을 수 있었지. 그 아이에게는 천지개벽 새로운 세상이 열린 거야. 아이가 밝아지니 부모가 기쁜 건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반 아이들에게도 복이지. 이런 부모 만나는 거 쉽지 않아. 부모가 내 자식에 대한 씁쓸한 충고를 받아들이려면 대단한 용기와 판단력이 필요해. 내 아이에 대해선 부모인 내가 가장 잘 안다는 믿음이 그만큼 무섭기 때문이야. 나와 너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할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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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1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부부 30년 맞짱일기

 

결혼 30주년, 참자 참자 참자!


최해옥과 이동수/ 결혼 30년차 부부

 

 

남편 동수 이야기

결혼기념일이다. 30주년. 아내와 함께 산 지 30년이다. 1989103. 하늘이 열리는 날을 골랐다. 전국민이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 것이다. 물론 그때는 요즘같이 태극기를 혐오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결혼식 장소는 인천 답동성당 회관. 아내가 다니던 민중교회의 목사님을 주례로 모셨다. 구교와 신교의 조화로운 화합이랄까? 성당의 풍물패 노랏바치 후배들은 회관 입구에서 결혼식 내내 꽹과리와 장구와 북을 쳐대며 길놀이를 하고 흥을 돋워 줬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마운 일이다. 그날 소문에 의하면 인천의 거의 모든 운동권이 우리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고 한다. 더불어 인천의 정보과 형사들이 혹시나 결혼 축하를 하러 온 수배자들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모두 참석을 했다고 한다. 독재정권의 하수인들과 저항하는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한마음으로 모여 결혼식을 축하해 준 모양새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결혼식 입장은 신부와 신랑이 함께 들어갔다. 또한 성혼 선언문도 우리가 작성하여 열심히 사랑하며 살겠다고 읽어 내려갔다. 청첩장에는 내가 직접 그림도 그려 넣어 초대와 감사의 뜻을 표했다. 결혼식 피로연은 근처의 식당에서 했는데 밤을 새며 놀자는 선후배,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고 청바지로 갈아입고 비행기를 타러 갔다. 돌이켜보면 비행기 예약을 취소하고 밤새 놀았어야 했다. 선후배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설악산 인근의 호텔을 숙소로 잡고 설악산 주변을 걷다가 계곡 아래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들과 놀러 온 듯한 사람들이 고기를 굽다가 와서 같이 먹자고 해서 같이 먹었다. 이런 추억들이 좋다. 조금 걷다 보니 당시 유명했던 설악산 반달곰의 동상이 있다. 그 앞에는 단체로 온 30여 쌍의 신혼부부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지만 당시에도 웃겼다. 그러나 남는 것은 사진뿐이니 그녀에게도 그곳에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 거절당했다. 그녀는 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애교를 떨며 간신히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들어간 숙소. 호텔인데 10월이라고 난방을 안 틀어 줬다. 첫날밤을 추위에 떨며 지내야 하다니! 사랑의 불씨로도 추위를 이겨 낼 수 없었다. 이불을 더 가져다 달라고 해서 동사는 면했다.

새로 얻은 집은 장모님의 지인의 지인이 내놓은 단독주택 단칸방이었다. 허니문 베이비. 직장을 좀 더 다니려던 아내가 임신을 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본가로 들어가 부모님께 신세를 지고 살 수 있었다.(?)

30년 전의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때는 참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30주년을 기념하여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돈 걱정을 하는 아내는 해외여행은 무슨 놈의 해외여행이냐며 춘천을 가자고 했다. 뜬금없이 춘천이라니? 그래,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자고 마음먹었다. 30주년인데!


아뿔싸! 다음 날 103일 눈을 떠 보니 3시다. 오후 3. 지금이라도 춘천에 가면 되지 뭐 하고 그녀에게 말을 했더니 너무 늦었다고 한다. 평소 좋아하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자고 한다. 이왕이면 뭔가 평소와 다르게 하고 싶어 좀 더 고급진 중국집을 찾아갔다. 가격표를 보던 그녀가 그냥 나가자고 했다. 자리 핑계를 댔지만 너무 비싸다고 생각한 것이 뻔하다. 결국 평소에 가던 중국집에 갔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그 집 짜장면이 맛이 없다며 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차이가 없는 듯한데. 어쨌건 그녀와 손을 잡고 집까지 걸어왔다.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 이렇게 30주년이 지나가는 것도 괜찮지 아니한가? 하하하~. (혹시 나는 아직도 철이 덜 든 건가?)

 

아내 해옥 이야기

몇 년 전부터 남편은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해외여행을 가자고 졸랐다. 결혼하고 나서 여행을 간 적이 거의 없으니 이참에 가까운 대만이나 일본이라도 갔다 오자는 것이었다집 나가면 고생이고 다 돈이야. 무슨 해외여행까지. 국내도 가 본 데가 별로 없구만.” 말은 이렇게 했지만 해외여행을 가 본 적이 없는 나는 솔깃했다. 십여 년 전에 중국에 가 보긴 했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도서전에 가서 책만 보다 왔으니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업무가 아닌 여행으로, 물가가 싸고 음식이 맛있다는 태국이나 아오자이를 입은 여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베트남에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속으로 살짝 기대를 했다.

올해 103. 결혼한 지 삼십 년이 되었다. 해외여행은 진작에 포기했고 가까운 춘천이라도 갈까 싶었다. 봄의 시내라는 뜻의 춘천이라는 지명이 마음에 들었고 전철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말로만 듣던 공지천을 천천히 걷다가 오면 좋을 듯했다. 피차 평소에는 기념일 같은 거 안 챙겨도 결혼 삼십 년 정도 되면 작은 이벤트를 하는 것도 좋겠지.

드디어 기념일 당일. 남편은 오후 3시쯤 내게 전화를 했다. 작업실에서 자다가 지금 일어났다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늦긴 했는데 지금이라도 춘천에 갈까?” 좀 늦은 게 아니라 아주, 엄청, 많이 늦었다. 간단하게라도 씻고 출발하면 춘천에는 6시 넘어서 도착할 거 같은데. 금방 어두워질 그 시간에 낯선 동네에서 뭘 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안 될 거 같다. 그럼 아쉬운 대로 영화라도 볼까? 부랴부랴 가까운 극장의 상영 시간표를 찾아봤다.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 그럼 서울에는? 서울의 극장도 원하는 영화는 시간이 안 맞는다. 기분이 가라앉는다. 12시를 넘어갈 무렵부터 이게 뭐지 싶었는데 3시 넘어서 이런 통화를 하고 있자니 심사가 편치 않다. 해외여행 가자더니 춘천도 못 가냐, 결혼기념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 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 화를 낼까 말까. 잠깐, 생각해 본다. 만약 내가 화를 내면? 남편은 기분이 나빠지고 더 이상 미안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일이 많아서 그런 걸 어쩌란 말이냐며 도리어 내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면 내 기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질 게다. 결국 두 사람 다 마음만 상하고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성적으로는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어찌 되든 간에 화났다는 표시를 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어쩔까? 아니 아니, 안 될 말이다. 정신 차리자. 지금 짜증을 부리고 나면 수습이 어렵다. 이미 상황이 안 좋지만 더 꼬이게 하지는 말자. 갈등을 끝내고 태연한 척하면서 대안을 제시한다. 지금은 간단하게 먹고 저녁때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이나 먹읍시다.

춘천의 공지천을 걷는 대신 중국집까지 삼십 분 정도 걸어갔다. 결혼기념일이니까 다정하게 손을 잡고. 오늘따라 중국집의 실내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 식초와 춘장과 기름쩐내, 상한 음식 등등이 섞인 듯한 냄새가 조금 역하다. 그냥 나갈까 말까. 달리 아는 곳도 없고 배도 고프다. 자리에 앉아서 짜장면과 고기탕면을 주문했다. 계속 미안해하던 남편이 탕수육도 먹자고 한다. 이 집에서 뭘 더 주문하고 싶지 않아 말렸지만 탕수육으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수보다 조금 늦게 나온 탕수육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오래된 기름으로 튀겨 낸 거 같다. 주문하지 말라니까 굳이 왜 했느냐고 한마디 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하다. 할까 말까? 이미 나온 음식인데 안 좋은 말을 보태서 뭐 어쩌려구. 이가 부실한 남편은 탕수육을 먹다가 고기를 잘못 씹어서 때운 앞니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결국 치과에 갈 일까지 생겼다. 그럴 수도 있지. 병원 갈 일이 생기면, 가면 된다. 가볍게 가볍게. 오늘은 결혼 30주년 기념일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러 갔다. 식당 근처에 맛있는 커피숍이 있었는데 찾아갔더니 없어졌다. 업종은 그대로인데 상호가 바뀌었다. 그냥 집에 가자. 해외여행을 꿈꾸었던 결혼 30주년 기념일 이벤트는 이렇게 동네 중국집으로 끝났다.

나이를 먹으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남편도 맘대로 안 되고, 중국집도, 커피숍도 마음대로 안 된다.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나 자신뿐.

여보~, 당신이 오후 3시에 일어나서 춘천도 못 간 거 그냥 무사히 넘어간 줄 알면 엄청난 오해다. 쭈욱 지켜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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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영남대의료원

 

보호자 침대는 저절로 생긴 게 아니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민주화가 밥 먹여 주냐?”라는 물음에 반론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이에 대해 한 칼럼에서 민주화운동을 거치고 노무현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박정희 독재정권 때 비해 군 의문사(비전투 인명손실)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며 민주화의 성과 사례로 꼽았다(<한겨레>, 201338).

대구의 종합병원인 영남대의료원. 이곳은 박정희와 박근혜가 지배하는 곳이다. 박정희는 죽고 박근혜는 감옥에 있지만, 박근혜가 추천한 이사진들이 영남대의료원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청산하지 못한 적폐들이다. 그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지난 71일 새벽, 두 명의 간호노동자가 의료원 본관 옥상에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다. 지상 약 70미터. 이들은 보건의료노조 영남대의료원지부 해고 조합원 박문진, 송영숙 씨로 1990년대부터 의료민주화노동조건 개선투쟁을 하다가 2007년 해고돼 무려 13년째 해고자 생활을 하고 있다.

영남대의료원 본관 옥상 70미터 높이에 사람이 있다. 검정 천막이 농성장이다. 작은책(정인열)

영남대학교는 1968년 박정희가 대구대와 청구대를 강탈, 통합해 출연 자금 한푼 들이지 않고 설립했다. 박정희 사망 후 1980, 딸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부임해 영남학원 정관 1조를 개정하며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문구를 넣었다. 1987년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영남대의료원에도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박근혜 이사장 재임 기간 부정입시 등 온갖 비리가 1988년 국정감사에서 다뤄지자 박근혜는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교육부는 영남학원을 관선이사체제로 관리하며 이사들을 파견했다. 총장, 학장, 의료원장도 직선제로 선출하는 등 박근혜 없는 영남학원에는 민주화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영남대의료원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조직을 변경하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임금인상 등 노동조건 개선뿐만 아니라 환자·보호자를 위한 선택진료제 폐지,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보호자 없는 병동) 등 의료민주화 투쟁도 시작했다. 교직원 대부분(의사 제외)이 노조에 가입해 조합원 수는 약 850명으로 절반 이상이 여성 간호사·간호조무사들이었다. 노조 지부장 김진경 씨와 사무장 김지영 씨는 각각 1992, 1996년 입사한 간호노동자다. 당시 간호사(간호조무사)들은 미스 김, 미스 리로 불리며 교수들의 담배와 커피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결혼하면 퇴사해야 했고 생리휴가도 사용할 수 없었다. 높은 노동강도에 비해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았다. 김지영 씨가 근무하던 심장내과는 응급환자가 많아 심폐소생술만 하루에 5번도 더 했다. 간호사 두 명이 54병상을 담당했다. 응급환자 처치를 하느라 다른 환자의 수액 교체가 늦어지면 화가 난 환자·보호자들로부터 폭언·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김지영 씨가 겪은 일이다.

프린터기를 던져서 머리에 맞은 적도 있었고 수액 폴대를 휘두르는 분들도 있었죠.”

노조는 병원 내 폭언·폭행 금지방안을 꾸준히 요구했고 정부는 지난 4월에야 안전한 진료환경 조성을 위한 법·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대부분 종합병원은 이와 관련한 공지를 환자·보호자에게 안내하고 있다. 인력충원도 꾸준히 요구했다. 김지영 씨가 말한다.

지금은 배로 좋아졌죠. 보통 4~5, 많게는 7명까지.”

▲ 고공농성자에게 점심 도시락과 선물로 들어온 꽃을 전달하러 옥상으로 가는 김진경(왼쪽,) 김지영(오른쪽) 씨. ⓒ작은책(정인열)

199550일 파업 투쟁을 시작으로 노조는 해마다 임단협 투쟁을 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임금과 복지는 대구지역 병원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대구지역 간호대 졸업생이 선망하는 일터가 됐다. 노조는 조합원만을 위한 막무가내 요구는 하지 않았다. 보호자 침대 설치, 환자·보호자 차량 무료 주차, 환자·보호자 위안 행사와 상시업무 비정규직 정규직화도 이뤄냈다. 이에 대해 김진경 지부장이 말한다.

외환위기 때는 자진 임금 동결했고요, 비정규직 처우 개선하면서 정규직 임금은 소폭만 인상했어요. 무조건 요구만 하는 게 아니라 병원 발전을 위해 노동조합이 어떻게 할 것인지 항상 고민했던 거 같아요. 병원이 발전해야 우리 행복도 같이 오니까요.”

▲ 영남대의료원 노동조합이 이뤄낸 의료민주화와 의료개혁작은책(정인열)

그러나 2006년 영남대의료원이 노무법인 창조컨설팅과 자문 계약을 맺으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당시 창조컨설팅은 이미 성애병원, 캡스, 레이크사이드CC 노동조합 등을 파괴시킨 전적이 있었지만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현장은 창조컨설팅의 계획대로 장악되기 시작했다. 사측의 일방적인 노사 합의사항 불이행, 교섭 불참 및 해태, 파업 유도, 개악안 제시, 단협 해지, 노조 간부 징계 및 해고, 조합원 탈퇴 유도. 이로 인해 2007년 김진경 씨와 김지영 씨를 비롯해 박문진, 송영숙 고공농성자까지 10명이 해고됐고 의료원은 노조에 56억 원 손해배상 청구 및 조합비, 간부 개인통장까지 가압류했다. 집회 장소인 병원 로비에 CCTV 16대를 설치하고 노조 활동을 밀착 감시했다. 조합원 탈퇴도 줄을 이었김진경 지부장이 당시를 회상했다.

탈퇴서가 내용증명으로 하루에 50, 100통까지 왔어요.”

▲ 창조컨설팅이 유성기업에 제출한 ‘노사관계 안정화 컨설팅 제안서'. 영남대의료원도 노조파괴 성공 사례로 적혀 있다.(2011년 4월 28일)

노조는 의료원 측이 조직 내 위력을 이용해 탈퇴를 종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병원 교육은 노조 탈퇴가 주 내용이었고, 탈퇴하지 않는 간호사에게는 수간호사가 일을 주지 않았다. 950명이던 조합원은 현재 80명으로 줄었고 가입률은 약 3퍼센트밖에 안 된다. 노조는 의료원과 창조컨설팅을 부당노동행위로 고소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9년 관선이사체제가 끝나자 이명박 정권은 박근혜에게 7인 이사 중 4인의 추천권을 주었다. 그리고 박근혜가 추천한 이사 4명이 들어왔다. 공주의 귀환이었다. 김지영 씨의 말이다.

본인(박근혜)이 주인이 아니라고는 해도 의료원장실이나 병원장실에 지금도 박정희 사진이 걸려 있어요.”

2010년 이사회는 의료원장, 총장, 학장 직선제를 폐지하고 과거로 돌아가 임명제로 변경했다. 같은 해 대법원은 해고자 10명 중 7명만 부당해고로 판결하고, 박문진, 송영숙, 곽순복 3명에 대해서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는 2012년 창조컨설팅의 노조 파괴 전모가 드러나기 전 판결이다. 노조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남학원의 실질 주인인 박근혜에게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기로 하고 2011년부터 박근혜 일정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투쟁을, 2012년 대선 때는 박근혜 집 앞에서 박문진 씨가 57일간 삼천 배 투쟁을 했다. 송영숙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서울에 지하방을 얻어 2년 동안 본격적으로 광주로 강릉으로 인천으로, 제주도를 제외하고 전국을 돌며 그림자 투쟁을 전개했고, 박근혜 집 앞에서 매일 아침 1인시위를 했고, 종일 국회 앞과 서울역 1인시위와 당시 한나라당 앞 집회와 1인시위도 했습니다.” (2018426, 보건의료노조 집중 집회 발언 중)

▲ 영남대의료원 간호조무사 박문진(왼쪽), 간호사 송영숙(오른쪽) 씨가 지난 7월 1일 본관 옥상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해고자들에게 눈길 한번 안 주던 박근혜는 2017년 탄핵, 구속됐다. 창조컨설팅 심종두 전 노무사와 김주목 전무도 노조 파괴 혐의로 지난 828일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 확정판결을 받고 감옥에 있다. 하지만 박정희-박근혜의 적폐인 영남대의료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 노조는 해고자 원직 복직 및 명예회복’, ‘노조 기획 탄압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및 재발 방지’, ‘영남학원재단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다.

▲ 영남대의료원 로비 스케치.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스님이 해고자 복직 기도회를 하고 있다. ⓒ그림_이동수


소수의 조합원만 남았지만 노조가 아무런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협은 계속 이어졌고 의미 있는 성과도 꽤 이뤄냈다. 2016년에는 교직원 모두 선생님으로, 2017년에는 청소, 경비 등 간접고용 노동자까지 선생님으로 호칭을 똑같이 하기로 합의했다. 청소 노동자 및 교직원 휴게실도 설치됐다. 반면 노조의 힘이 약해지면서 유급이던 생리휴가는 무급으로 바뀌었고, 2018년 고용노동부가 근로조건을 점검한 결과 연장근무, 휴게시간 미보장 등에 대해 시정 권고를 받을 정도로 노동시간이 많아지기도 했다. 그나마 노조가 있어 휴게시간 미부여 수당을 직원들에게 환원하기로 의료원과 합의했고 의료원은 20187월 교직원에게 3년치 수당을 지급했다.

노조 임단협은 조합원뿐만 아니라 전체 교직원에 적용된다. 전체 직원의 3퍼센트밖에 안 되는 조합원들의 노력과 눈물로 이룬 성과를 보자면 한홍구 교수의 말에 한 가지 주장을 더 보태야 할 것 같다. 민주화는 밥도 먹여 준다.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