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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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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0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절대 자식을 위해 살지 마세요

 

정설경/ 작은도서관 운영자

 

 

인연을 이어 오던 동네 작은도서관에서 올해부터 책임을 맡게 되었다.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도서관을 세웠고, 월세를 근근이 만드느라 자원봉사 인력에 의지하여 도서관을 가동한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기관 중에 대한노인회가 있는데, 여기에 소속된 시니어 봉사자 세 분이 하루 또는 이틀씩 오셔서 도서관 정리 정돈을 해 주신다. 그중엔 연세도 제일 많고, 가장 정갈하고, 스스로 많이 배웠다고 자랑하시는 이 선생님이 계신다.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소액이라도 돈을 주는 게 얼마나 큰 복지인지, 늘 나라에 감사하다는 시니어 선생님. 팔순이 넘었는데 그 시절에 여고를 졸업하고 여대를 다녔다며, 말씀하시는 구절엔 꼭 영어 단어 하나씩을 넣어서 자신이 배운 사람이라고 티를 내신다. 그럴 때마다 귀여워서 속으로 큭큭 웃었다. 비록 취직하느라고 대학 졸업은 못했지만 명문 여대를 나온 것을 강조하신다. 그리고 못 배운(?) 주변 할머니들을 늘 흉보신다.

“5분만 말해 보면 저 할머니가 얼마나 배운 사람인지 나는 금방 알 수 있어요. 못 배운 사람은 표가 나거든요.”

어려운 시절에 남들보다 많이 배웠다는 시니어 선생님은 누가 더 많이 배운 사람인지 감별하고 품평하느라 이야기가 길다. 그런데 선생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찼다. 미국에 사는 딸과 카카오 보이스톡으로 통화하며 언성도 높이신다. 집엔 며느리가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한다며 도서관에 오면 와이파이도 터지겠다, 속내를 얘기하시느라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다.

내가 5천만 원 갖고 있는 줄 다 아는데 어떻게 안 주니? 전셋돈을 빼 줘야 한다는데 어떻게 안 주니?”

선생님의 딸은 엄마의 마지막 남은 재산 5천만 원을 아들과 며느리한테 절대 뺏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 같고, 선생님은 아들한테 얹혀 사는 주제에 돈이 급하다는데 어떻게 안 주고 버티냐며 언성을 높인다.

몇 주 동안 딸과 전화를 주고받으며 근심 걱정이 가득하시더니 어느날 차분하게 말씀을 들려주신다.

다시 태어나면 절대 이렇게 살지 않을 거예요. 자식 위하는 것도 다 소용없어요.”

마지막 남은 5천만 원을 아들한테 건네고서 상황이 종결됐나 보다. 많이 배운 할머니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푸념과 신세한탄을 듣느라 두 시간이 속절없이 간다. 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고역이지만 나이 들어 자식에게 종속된 경제적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집에 가만 있으면 누가 돈 한푼 줘요? 이렇게 나와서 뭐라도 하니까 얼마라도 받죠.”

근데 저 이런 데 와서 일하는 거 아무도 몰라요. 누가 알면 돈독 올랐다고 욕할 거예요.”

일찍 남편과 사별했지만 많이 배운 덕에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재력도 적지 않았는데 손녀가 유학 간다고 해서 몇 번 도와주다 보니 이젠 수중에 돈 한푼 안 남았다고 자책하신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시니어 일자리를 얻어서 연중 10개월은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어 좋지만, 혹시 누가 알까 봐 창피하다며 조마조마해 하신다. 나도 적잖은 나이가 되니 경제생활에 대한 고민이 많아져 이분의 푸념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평생 돈을 벌었는데 자식들을 도와줘야 할 상황에 부딪혔고, 자꾸 도와주다 보니 이젠 수중에 돈이 없다고. 시니어 일자리마저 없었으면 할머니는 구겨진 자존감을 살릴 방안도 없었을 것이다. 고령에 일할 수 있는 것도 자랑이라면 자랑일 텐데 할머니는 누가 알까 봐, 들킬까 싶어 조심조심 작은 발걸음을 옮기신다. 혹여 나이 많다고 내년엔 기회를 안 줄까 봐 도서관에 오실 때마다 인생의 회한을 자꾸 토해 내신다. 할머니의 근심에 공감하면서 나의 우울지수가 높아져 간다. ‘저 모습이 나의 미래, 우리의 나중 모습이 아닐까.’ 할머니를 보며 50대 나이의 도서관 봉사자들은 깊은 한숨을 나눴다. 우리가 노인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은 최소 3, 40년인데 그 긴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까.


50대인 우리들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딱히 없다. 노인들은 복지제도라도 있지, 우리는 새로운 일을 할 수도 없고 자격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순노무직이거나 취업 구제책으로 나오는 단발성 일이다.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고, 그렇다고 놀기도 어쭙잖은 나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만큼 앞으로 더 살아야 한다는데 뭣을 하며 노년을 보내야 할까. 소일은 노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용어였는데 그 소일해야 할 시기가 우리에게 닥치고 있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최소한의 생계는 걱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내가 주도할 소일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작아질 것이다. 노인으로 보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할일이 없으면 많이 배운 노인이라도 뒷모습은 허전하다. ‘까지 떨어지면 비참함으로 얼룩진다. .

다시 태어나면 절대 자식만 위해서 살지 않을 거예요.”

많이 배웠다고 자랑하시는 할머니의 등 뒤엔 외로움도 겹쳐 있었다. 허무하게도 후회만 남은 어느 할머니에게서 노인의 시간을 걱정하게 된 나, 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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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0월호

청년으로 살아가기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유지향/ 촌스럽게 살고 싶은 스물일곱 살

 

 

한국산림복지진흥원 인턴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지 두 달 만에 제2회 인턴 채용 공고가 떴다. 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산림교육 및 치유 시설이 여러 지역에 있는데 지난번과 다른 근무지에서 일할 청년을 뽑는 것이었다. 어디에서 일하든 크게 상관이 없었던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주어져서 기뻤다.

두 달 동안 준비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지난달에 컴퓨터활용능력(컴활)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다른 자격증에 비해 점수가 낮았다. 한 달 만에 딸 수 있는 건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었다. 고등학생 때 국사 성적을 믿고 덤볐으나, 스물일곱 취준생은 열일곱 고등학생과 같지 않았다. 빽빽하게 짜인 시간표 속에서 온종일 공부만 했던 십 년 전과 다르게 자유로웠다. 드라마를 보고, 늦잠을 자고, 친구를 만나고, 돈을 벌면서 열일곱처럼 공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

결국, 컴활 자격증 하나 가지고 인턴 서류를 썼다. 자기소개서 항목이 지난번과 같아서 살짝만 고쳐서 냈다. 그런데 웬걸. 서류합격이 됐다. 자격증 하나 있고 없고 차이가 이렇게 크단 말인가. 붙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처음 보는 취업 면접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면접을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열아홉 살 동생이 수시로 어느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쓰면 좋을지 알려 달라고 해서 시간을 많이 뺏겼다. 청소년지도사 과목 보고서도 써야 했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다. 거기다 애인에게 서류 합격 얘기를 하려고 전화했다가 친구들과 노는 모습에 삐져서 일주일 내내 심란했다.

정신없이 보낸 일주일이 지나고 면접날이 되었다. 면접 장소는 대전 정부청사역 근처였다. 면접장에 삼십 분 일찍 도착했다. 대기실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다른 지원자들을 구경했다. 눈을 감고 미리 써 온 대본을 외우거나, 옷매무새를 다듬거나, 물을 마시며 목소리와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대기실 안에 맴도는 긴장감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여자 지원자들은 풀메이크업에 정장 재킷과 치마를 입고, 구두에 스타킹까지 신고 있었다. 나는 흰 블라우스와 남색 바지 정도면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화장은 안 했지만, 새벽에 샤워하고 빗질도 가지런히 해서 뻗친 머리도 없었다. 또각또각 소리 나진 않지만 가지고 있는 신발 가운데 가장 단정한 단화를 신었다. 외모가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겠다는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잘못하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유지향 님, 앞쪽으로 오세요.” 하필 첫 순서였다. 복도에서 기다리면서 뜻밖에 찾아온 기회이니 즐기자.’ 생각했다. 다른 지원자 두 명과 함께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면접관은 남자 두 분과 여자 한 분이었다. 왼쪽 끝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면접관과 간단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첫 질문은 1분 자기소개였다. 제가 인턴이 된다면 두 가지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첫째, 톡톡 튀는 콘텐츠를 개발하겠습니다. 제게는 전공에서 배운 산림 지식과 교육 공동체에서 얻은 경험이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산림교육 콘텐츠를 기획하겠습니다. 둘째, 숲을 통한 국민 공감을 실현하겠습니다. 저는 숲을 좋아합니다. 숲에서 느낀 행복을 국민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숲의 매력을 전하겠습니다.” 내 옆 지원자는 전날 받은 레이저 수술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답했고, 옆옆 지원자는 준비해 온 답을 로봇처럼 건조하고 딱딱하지만 조리 있게 말했다.

이어서 장단점, 직장 생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 외딴 지역에서 근무할 자신이 있는가에 관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정이 많고, 단호하지 못한 나, 소통이 중요한 단체생활, 시골에 내려가서 사는 동안 행복했던 삼 년에 대해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에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남들과 다르게 특별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인턴을 지원하면서 저를 증명할 수 있는 전문성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인턴이 산림교육 전문가로 나아가는 소중한 첫발이 되길 바랍니다.”

예상했던 질문은 편하게 답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은 잠시 멈추어 생각을 다듬은 뒤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면접 시간 15분은 금방 지나갔다.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기실에 왔다.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지원자를 보니 빨리하길 잘한 것 같았다. 대기실 탁자 위에 놓인 과자를 먹으며 가족들과 애인, 친구들에게 면접을 보고 나왔다는 문자를 보냈다. 잘 봤어?”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한 것 같아.”

버스 타러 나가려는데 같이 면접 봤던 여자가 다가왔다. 면접장에서 로봇같이 말하던 거랑은 다르게 친근하게 터미널에 가는 거면 같이 가자기에 그러자고 했다. 같이 걸으면서 전공이 뭔지, 자격증은 몇 개인지, 인턴 면접은 이번이 처음인지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녀가 가진 스펙에 놀랐고, 그녀는 내가 자격증 하나로 서류 합격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터미널에서 그녀는 구두 대신 슬리퍼로 갈아 신고 광주 가는 버스를 탔다. 나는 전주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졸업한 지 일 년도 안 된 그녀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았을까. 대기실에서 굳은 얼굴로 앉아 있던 지원자들은 또 얼마나 간절할까. ‘되면 좋고, 안 되면 말지라는 생각으로 지원했던 내가 취업의 꿈이 간절한 사람들을 기만한 것은 아닐까 되돌아보았다.

며칠 뒤 확인한 최종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올라 있지 않았다. 덤덤하게 불합격 소식을 전하니 가족들은 아쉬운 기색을 살짝 내비쳤다. 애인은 면접 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준비할 시간이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취업 준비를 할 거라면 진지하게 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서울에서 산림교육전문가 자격증 과정이 열려서 얼른 등록했다. 10월에 있을 한국사능력검정시험도 다시 공부해야 한다. 취준생으로서 서울 생활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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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세상 보기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밀레니엄 좌파는 기다리는 데 지쳤다

고태경/ 정치철학 연구자

 

 

밀레니엄 좌파는 기다리는 데 지쳤다.” 저널 <디 애틀랜틱>이 최근 미국 20~30대 좌파들을 다룬 기사의 제목이다. 무엇을 기다리다 지쳤다는 말일까. 미국 밀레니엄 세대의 생활 환경을 특징짓는 사건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다. 1940년대 미국 30세 청년의 소득이 그들 부모의 30세 당시 소득보다 높을 확률은 대략 90퍼센트. 그러나 2019년 현재 이 비율은 50퍼센트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

이들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화두는 단연 기후 위기다. 산업혁명 후의 역사를 돌아보자.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말은 체제를 불문하고 지구상 모든 국가의 비전을 특징짓는 단어였다. 산업화의 진보를 통해 다다른 곳이 기후 위기의 종말론적 파국이라는 사실, 경제 개발의 서사가 도달한 결론이 글로벌 경제 위기라는 사실 앞에 다시 한 번 기다림을 역설할 용기를 내기는 어렵다. 기다림에 조응하는 말은 약속이다. 20세기에는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진보의 약속이 있었다. 밀레니엄 좌파들이 기다림에 지쳤다는 말은 이 모든 것과 대립한다. 그들은 대안을 원하지만, 우리가 알던 그런 것은 아니어야 한다.

 

구심력의 붕괴

밀레니엄 좌파들이 기다림에 지쳤다는 말과 함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그들의 강한 사회주의 지향이다. 최근 미국 내 29세 이하 유권자들의 정치 성향을 다룬 여론 조사에서 대략 50퍼센트 정도가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먼저 21세기의 서막과 함께 거대한 구심력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배경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였고, 출발점이 된 것은 2010년 아랍 민주화 운동이었다. 미국의 월가 점거와 스페인의 분노한 자들시위가 연이어졌고,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논란(결국 잔류했다), 영국의 브렉시트, 카탈루냐의 스페인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 시도가 나타나며 국제 질서의 대변동 역시 촉발되었다.

체제의 구심력 붕괴는 기성 정치 세력의 몰락을 동반했다. 잠시 유럽에서 회자된 파소키제이션(Pasokization)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그리스의 양대 정당 중 하나였던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사회당(PASOK)2010년 유럽 재정 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며 지지율 급락을 경험했고, 2015년 총선에서는 제7당으로 몰락한다. 1980년대 이후 긴축 기조의 친자본 정책을 받아들이며 일어난 노동계급 지지 기반 이탈의 결과였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향들이 네덜란드와 프랑스와 독일 등지의 유럽 복지국가들에서 연이어 나타났다. 파소키제이션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풀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사회당화’. 조롱 섞인 이 말은 유럽사회민주주의의 시대가 사실상 끝났다는 것을 함축한다.

사회민주주의의 몰락은 동시에 노동계급의 동요를 불렀다. 20세기 혁명의 거점이라 여겨졌던 중화학공업 산업단지는 경제 위기의 광풍으로 혼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 미국 대선을 경유하며 이런 표현이 등장했다. ‘앵그리 화이트’. 이 표현 끝에 붙는 단어가 노동계급이다. 화가 난 백인 노동계급은 자신들의 직장을 이주노동자들로부터 보호해 주겠다고 선언한 트럼프를 지지했다. 백인이 중심에 된 서구의 구 혁명 중심지들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독일의 새로운 극우 정당 독일의 대안(AfD)의 주요 정치적 거점은 구 동독공산당과 현 좌파당의 거점이었던 구 동독 지역이다.

대중의 우파적 동원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대중의 좌파적 동원은 불가능할까. 미국 29세 이하 유권자들 절반이 지지한다고 말한 사회주의의 이름은 민주사회주의. 이 세력이 우파 포퓰리스트들과 공유하는 몇 가지의 관념이 있다. 하나는 기성 정치는 시효 만료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민들의 목소리가 표현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동원의 시작, 그런데 어떤 동원인가

영국과 미국의 신흥 좌파들은 최근 민주사회주의의 정책적 경향을 사회민주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 핵심 특징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는 20세기의 종말론적 파국의 상황과 연관된다. 미국 민주당 좌파 오카시오 코르테스가 최근 대표 발의한 그린뉴딜 결의안은 이 파국에 대한 잠정적 대안을 담고 있다. ‘그린뉴딜에서 뉴딜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루스벨트 정부의 확대재정정책의 기조를 받아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확대재정정책은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포괄하는 보다 보편적 성격을 수반한다. ‘그린은 기후 위기와 연관된다. 기후 위기 상황에서 요구되는 신재생에너지 산업은 정부의 적극적 확대재정정책을 통해 확장될 것이고, 이것이 일자리를 창출하며 선순환 경제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이다. 그린뉴딜은 산업화를 축으로 전개된 20세기 경제 패러다임과의 결별을 추구한다.

둘째는 시민들의 직접적 공론장 참여라는 문제다. 전후 유럽에서 전개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체제는 경제적 재분배 정책에 크게 의존했다. 확대재정정책을 통해 국가의 공공부문을 확장하고, 누진세 등의 세제 정책을 통해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개별 시민의 일상에서는 시장의 개인주의화, 경쟁, 실업의 리스크가 일부분 상존하지만 중앙정부의 소득이전정책과 복지를 통해 사후적으로 이들을 규제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자연스레 중앙정부의 역할은 비대해졌고, 개별 시민과 중앙정부를 매개할 장치는 (노조와 정당 외에는) 희소해져 갔다.


여기서 밀레니엄 좌파는 기다리는 데 지쳤다라는 말의 함의를 다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별 시민들이 공론장과 맺는 수동적 관계에 한계가 왔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세대가 지금 당장 행동하기를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후 파업의 열풍을 선도하는 것은 전 세계 10대 청소년들이다.

마찬가지로 밀레니엄 좌파들 사이에서 최근 새로운 도시 대안모델로 주목하는 미국의 클리블랜드와 영국의 프레스턴시의 사례를 볼 필요가 있다. 이 두 도시의 공통점은 기존에는 산업중심의 도시였다가 2000년대를 전후로 기업들이 자본을 빼 가며 산업생태계에 위기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지방정부가 중심이 되고 지역 공공기관과 비영리기관의 주도하에 산업생태계의 재편에 들어갔다. 공공연구기관이 시장 관계망들을 조사한 후, 지역 주민들이 직접 노동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노동자자주관리형 협동조합 모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도시재생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된 이 두 도시의 모델을 부르는 개념 중 하나가 지역기반형 경제(place-based)라는 것이다. 중앙정부와 시민들을 잇는 것은 사실상 선거를 제외하면 사회계약이라는 추상적 원리뿐이다. 반대로 지역은 지방의 공공기관과 시민의 참여가 만나는 공간으로, 시민사회의 새로운 합의의 모델을 구축하는 장이 될 수 있다. 최근 전 지구적으로 남용되는 민관협치형 거버넌스 모델은 사실상 공공부문을 민간의 시장으로 외주화하는 형태를 띠었다. 한국의 민관협치 모델로 주목된 광주형 일자리는 정부를 끼고 노동3권을 잃은 저가의 노동력이 현대차에 외주화되는 구조를 띠었다. 공공부문을 시민들의 직접 참여의 장으로 환수하는 클리블랜드 지역 기반 모델은 새로운 공적 참여의 모델로서 이 민관협치 모델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밀레니엄 세대는 누군가에 의해 대의되는 것을 꺼린다. 대안은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참여는 직접적이어야 한다. 그들은 이제 지금 여기의 대안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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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세상 보기

존버 씨의 시간들

 

금지되어야 할 표현 통상적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저자

 

 

정신적 이상 상태의 양상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는 자해 행위로 인한 결과인 자살 자체를 원칙적으로는 업무상 질병으로 보기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몇 가지 예외를 인정하는데, 그 구체적인 경우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한 정신 질환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 행위를 한 경우. 둘째, 업무상의 재해로 요양 중인 사람이 그 업무상의 재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 행위를 한 경우. 셋째, 그 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 행위를 하였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다(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제36: 자해 행위에 따른 업무상 재해의 인정 기준).

그런데 세 사유 모두 정신적 이상 상태또는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정신적 이상 상태라는 전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차치하고라도, 정신적 이상 상태의 정도에 대한 내용들이 그렇게 명확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은 판정 과정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판정 내용의 모호함으로 인해 판정 결과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업무상 자살 사유로 산재를 신청한 케이스 가운데 2017년 판정된 총 63(승인 23건과 불승인 40)을 대상으로 업무 스트레스 - 정신적 이상 상태 - 자살 간의 관련성을 판정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이상 상태에 대한 판정 내용의 불명확성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를 구체화해 보자.

우선, 업무로 인한 자살이 산재로 승인 받으려면 업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살이 발생했음을 밝혀야 하는데, 업무와 정신적 이상 상태 간의 관련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정신적 이상 상태를 유발할 만큼의 업무 스트레스가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23건의 승인 사례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이상 상태의 내용들을 <재해조사서><업무상질병판정서>에 기술된 대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너무 억울하고 이번 일로 인해 직장과 당신 그리고 아이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두려워 죽겠다.”

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만두고 싶다. 아예 사라져 버리고 싶다.” 

손톱 옆살을 물어뜯는 등의 불안한 모습, 했던 말을 반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고 죽을 것 같다,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 등의 말을 수시로 함

걱정에 몹시 불안해하였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흥분함, 평소와 다르게 입으로 손톱을 뜯으면서 땀을 흘리고 혼자 중얼거림.

재해 직전에 보인 행동들은 평소 때의 모습이 아니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고 하지 않던 욕도 처음으로 했고 밤중에 소리를 지르기도 함.

주위의 시선이 너무나 따갑다. 인간적으로 나를 이렇게 매장당하게 할 줄 몰랐다. 억울하고 너무나 원망스럽다.”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면서 개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다는 말을 함.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도살장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

위에 언급된 스트레스의 양상들은 자살에 이를 만큼의 정신적 이상 상태로 제시되고 산재 승인에 합당한 이유로 설명된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스트레스의 양상들이 발견되어도 승인되지 못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통상적인 수준의 스트레스라니?

여러 불승인 사유들 가운데 눈에 띄는 지점은 정신적 이상 상태에 이를 만큼의 스트레스는 아닌 통상적인 수준의 스트레스라는 설명 방식이다. 통상적인 수준이란 이유로 자살을 업무상 사유로 판정할 수 없다는 사례들을 <재해조사서><업무상질병판정서>에 기술된 대로 몇 가지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역할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업무 스트레스 및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통상 업무에서 적응할 수 없을 만큼 과다한 부담으로 보이지 않고 20여 년간 해당 업무 근무 이력을 감안해 볼 때, 업무 스트레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라고 볼 수 없다.”

(새로운 인사관리 업무 등의 업무 스트레스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었지만) 고인이 그동안 수행하던 일상적인 조리 업무의 일부로 판단되고 자살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을 직무 요인이나 업무상 스트레스가 없었다.”

업무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이나, 통상적인 수준의 업무 수행으로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해 민감하게 책임감을 느끼는 개인적인 소양이 사망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매출 압박에 대한 스트레스는 통상적인 수준(타 영업팀장들도 있는 부분)이다.”

환경상 업무 스트레스(조직 개편으로 부하 직원 1명 퇴사, 영업 관련 비용으로 추정되는 채무로 이에 대한 독촉 전화 수시로 받음)가 없지 않았으나, 통상적인 범위 내라고 보이고 업무 환경의 결정적 변화, 충격 사건, 인간관계 변화 등 없어 과도한 스트레스로 정신 이상 상태에서 자살하였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인사이동(재해 1주일 전 타 부서로 이동)이 업무상 스트레스가 될 수 있으나, 인사이동이 고인에게 특정하여 실시된 것은 아니고 고인의 업무적 스트레스는 일반적 기자 업무 환경에서의 스트레스다.”

관리자로서의 책임감과 업무 실적에 대한 부담감 등 평소 업무 스트레스가 있었다 하더라도, 20여 년간 같은 업무를 수행해 해당 업무에 익숙했다.”

업무상 스트레스(자존감 상처, 의욕 저하, 우울감, 불면, 분노 감정 등의 증상으로 진료)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어 보이나, 우울증 등 질병에 이를 만큼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스트레스 요인을 확인하기 어렵다.” 

업무 질이나 강도가 정황상 문제적인 것으로 추정되더라도 많은 경우 통상적인 수준’, ‘자살을 유발할 정도의 업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보기 어려움’, ‘○○년 차에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과중한 업무는 아님’, ‘업무에 있어 큰 변화라고 볼 수 없는 수준등의 이유로 불승인되는 경향이 높다. 그런데 불승인 사례의 업무 스트레스들을 왜 통상적인 수준이라고 보는지에 대한 근거들을 <재해조사서><업무상질병판정서>에서는 찾기 어렵다. 판정 내용의 불명확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목이다.

국어사전에서 통상은 특별하지 않고 늘 예사로 있는 일이나 상태를 뜻한다. 그 일이나 상태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관행적으로 오래전부터 해 오던 것들이란 의미들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다. ‘너만 힘드냐, 다들 힘들다. 그 정도는 문제라고 볼 수 없다식이다. 이러한 통상적인 수준이나 ○○년 차 정도의 업무라는 설명 방식은 업무 스트레스를 재해 당사자의 입장에서 고려한 것도 아니요, 당시 업무 맥락에 기초해 고려한 것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심히 주관적일 수 있는 통상적이란 표현 그 자체는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판정의 언어들은 더욱 타당하고 객관적 자료에 기초한 판정 내용을 담는 것이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통상적인 업무 스트레스라고 말하는 그 수준이란 것이 이미 문제의 정도를 넘어선 상태라는 점을 먼저 인지하고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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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노동자

 

노조 가입해. 안 그럼 이혼할 거야

정인열/ <작은책> 기자

  

▲ 서울톨게이트 지붕 위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이들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6월 30일부터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경부고속도로 서울톨게이트 지붕 위에서는 고공농성이 벌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약 1500명이 지난 6월 대량 해고됐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50대 여성과 장애인이다. 630, 이중 43명이 지붕 위로 올라갔고, 전국에서 모인 해고자들은 바로 옆 교통센터에 모여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이들의 사연을 듣기 위해 지난 726일 시사만화가 이동수 씨와 함께 농성장을 찾았다.(이동수 화백은 <작은책>에 생활 만화와 삽화를 그리고 있다.)

교통센터 주변은 크고 작은 텐트들로 가득 차 난민촌을 방불케 했다. 간밤에 비바람까지 몰아쳐 젖은 옷가지들과 비품들이 널려 있었다. 현재 해고자들은 민주노총 조합원 약 600, 한국노총 조합원 약 900명이다. 이들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도로공사를 상대로 공동투쟁과 공동교섭을 하고 있다. 천막에서 민주노총 소속 박혜숙(순천영업소), 김원표(양평영업소), 이진희(청북영업소) 씨와 한국노총 소속 김병종(고창영업소), 이원종(대소영업소) 씨와 인터뷰를 했다.

▲ 경기도 성남시 서울톨게이트 옆 교통센터에 전국 톨게이트해고자들이 모여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이들은 부스 요금수납 말고도 화물차 과적 단속 및 통행료 미납 관리, 하이패스와 전자카드 관리 등의 민원 처리를 한다. 본래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한국도로공사의 직접고용 정규직이었다(기간제로 입사한 경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기계약 전환). 한국도로공사는 전국의 톨게이트 영업소를 직접 운영하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비핵심 업무 외주화명목으로 외주화를 시작했고, 2009년 이명박 정권 때 공공기관 선진화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모든 영업소가 외주화됐다. 김병종 씨와 이진희 씨가 말한다.

그때 남자 수납원들은 정규직 되고 여성 수납원만 외주화됐어요.”

외주업체 사장들은 도로공사 본부·지사 임직원 출신으로, 희망퇴직 시 남은 정년 기간만큼(보통 5~6) 수의계약을 맺어 수익을 보장받았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돼 논란이 커지자 점차 공개입찰을 통해 법인 위탁업체와 계약을 맺기 시작했지만, 지난 5월만 해도 대부분 영업소는 전직 도로공사 임직원들이 운영했다.

외주업체는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 2013~2014년 국정감사에서 신기남 의원실이 발표한 한국도로공사 희망퇴직자 수의계약 외주운영 실태한국도로공사 정책자료집에 따르면 임직원 출신 사장들이 서류까지 조작하며 임금을 착취하고 사업비를 부당 편취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써야 할 피복비, 식대, 교통비는 물론 상여금과 퇴직금 및 각종 수당(시간외, 야간, 휴일근로, 연차수당 등)을 떼어먹거나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근무하지도 않는 친인척 등을 직원으로 신고하고 근태기록 및 업무 일지를 조작해 인건비를 청구하기도 했다.

요금수납원들은 사장(업체)이 바뀔 때마다 고용불안에 떨어야 했는데, 장애인과 새터민을 채용하기 위해 기존 수납원들을 해고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새터민을 채용하면 정부로부터 고용지원금이 나오는데, 업체 사장들은 고용지원 기간이 끝나면 해고하거나 괴롭혀서 스스로 나가도록 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인 김병종 씨가 말한다.

중증은 60만 원까지 받는데 저는 경증이라 (고용지원금이) 30만 원 될 거예요. 저희(고창영업소)14명 중 12명이 장애인이었어요. 지방으로 갈수록 장애인 비율이 높아요.”

도로공사는 이런 불법행위들을 눈감아 주거나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았다. 신기남 의원실은 불법행위로 가져가는 이익을 업체당 한 해 4억 원으로 추산했다. 반면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 허덕였다. 심야노동을 하며 43교대로 일했지만, 임금인상 체계가 없어 10, 20년을 일해도 신입 직원과 급여가 같았다. 많게는 하루 1천 대 차량의 수납 업무를 했고, 영업소 사무실에서 민원 등을 처리하는 주임들은 교대자가 없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특히 하이패스 차량 정보 인식 오류로 인한 미납요금을 처리하느라 초과근무를 하고도 일한 만큼 임금을 못 받았다. 고객들을 대면하거나 전화로 미납요금을 독촉하면 고객들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난 뒤에는 근무 부실을 인정하는 경위서를 써내고 부족분은 자비로 충당했다.

이렇게 외주화 때문에 생긴 폐해는 고스란히 전국 354개 영업소 7천여 명 노동자들에게 돌아갔다. 2010년 한국노총 산하 전국톨게이트노동조합이 생기고 2015년에는 민주노총 산하 노조가 생겼다. 2013년 톨게이트 노동자들 800여 명이 먼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냈고 1, 2심 법원은 각각 2015년과 2017년 노동자들이 한국도로공사의 직원이라고 판결했다.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도로공사는 직접고용 방식이 아닌 자회사 채용을 추진했다. 박혜숙 씨와 김병종 씨가 말한다.

평소에도 티타임 때마다 자회사가 좋다고 세뇌시켰어요. 자회사로 안 가면 해고한다고 협박도 했고요.”

직접고용을 희망한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도로공사는 자회사 전환을 강행하고 30퍼센트 임금 인상과 기타공공기관 지정 등을 제안했다. 톨게이트 노동자 약 6500명은 자회사 전환에 동의해 지난 71일부로 자회사인 한국도로공사서비스()에 고용됐고 이를 거부한 약 1500명은 해고자로 남았다. 이들은 왜 자회사를 거부하는 걸까? 이원종 씨가 말한다.

용역업체나 자회사나 같은 거예요. 자회사도 낙찰률이 있어요. 그럼 정규직이 아니잖아요. 낙찰률이 88퍼센트면 나머지는 누구를 주는 건가요? 결국 명예퇴직자들한테 가는 구조 아닌가요?”

임금 인상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로공사는 자회사로 전환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20퍼센트 인상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건 사실 기존 법인 위탁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받던 금액이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직접고용 정규직화 요구에 대해 입사 시험도 안 친 주제에 떼를 써서 정규직원과 똑같이 대우해 달라고 한다며 비난한다.

정규직에는 일반직과 실무직이 있어요. 실무직에 도로관리, 청소, 조리원, 사무원 등이 있고요. 실무직은 일반직처럼 공채 시험을 치르지 않아요. 저희 요구는 우리를 실무직에 넣어 달라는 거예요.”

▲ 한국도로공사 교통센터 풍경 스케치. 입구에 적힌 표어와 해고노동자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이동수


현재 투쟁하는 조합원들 대부분은 최근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이다. 노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이 모두 집을 떠나 청와대와 서울톨게이트를 오가며 노숙을 하고 있다. 몸과 마음은 지칠 때도 있지만 가족들의 지지와 격려가 큰 힘이 된다. 홀로 아이 셋을 키우는 이진희 씨는 특히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녀는 스물두 살 첫째에게 동생들을 부탁하고 집을 나섰다. 자녀들에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투쟁하는 게) 엄마로서 너희들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힘이 닿는 데까지 하고 싶다고 애들에게 말했죠. 애들이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래요.”

박혜숙 씨는 오히려 남편이 적극 지지한단다. 박 씨의 남편도 민주노총 조합원이다. 예전에 그이는 남편이 노조에 참여하는 게 싫어 집회 현장까지 가서 끌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자회사 전환 사태가 벌어지자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노조 가입해서 직접고용 하고 와. 안 그럼 이혼할 거야.”

한국노총 소속 톨게이트노조는 민주노총과 달리 상급단체로부터 아무런 지원 없이 투쟁하고 있다. 자회사에도 한국노총 소속 노조가 생겼다. 한국노총은 수적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자회사를 선택했으므로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톨게이트노조는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 톨게이트 비정규직 노동자 김병종, 박혜숙, 김원표, 이진희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인터뷰 도중 소나기가 내렸다. 빗속에서도 이들은 서로를 격려했다. 이원종 씨가 남자들만 있었으면 벌써 집에 갔을 거예요. 여성분들이 정말 대단합니다.” 하고 말했다. 이에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대답했다. 상급단체 연대도 없이 홀로 투쟁하는 톨게이트노조도 대단해요. 함께 투쟁해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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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교실 이야기

 

똥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곽노근/ 고양 상탄초등학교 교사

 

 

아침을 거른 적은 없다. 어느 순간부터 내 장은 튼튼하고 건강해져 일을 열심히 잘한다. 아침을 거른다면, 속이 더부룩하고 너무 불편해 오전 중에 꼭 일을 치르게 된다. 쉬는 시간에, 틈을 봐서 허겁지겁 5분 정도 만에 끝내야 한다. 나는 진득하게 오래 누는 버릇이라 그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하기는 너무 버겁다. 하지만 허겁지겁, 되는 만큼 후다닥, 마무리하고 나온다. 아무리 내 똥이 급해도, 수업은 해야 하지 않은가. 급한 불은 껐으니.

첫 문단과 제목만 봐도 알겠지만, 그래, 똥 얘기다. 나는 똥 얘기 하는 걸 좋아한다. 사실 똥 얘기, 더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어릴 때는 똥을 지금처럼 잘 누지 않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안 눴던 이야기, 술 먹고 난 다음 날은 하루에 다섯 번 넘게 누기도 했던 이야기 등등. 그러나 이 자리가 내 똥 눈 이야기를 풀어놓는 자리는 아니니까, 여기서 그치련다. 여하튼 나는 똥 얘기 하는 걸 좋아한다. 똥 얘기는 사람들의 가면을 벗겨 주니까. 더러워하면서도, 사람들을 천진하게 웃게 해 주니까. 금기의 아슬아슬한 영역을 똥이 건드려, 시원하게 해 주니까.

그렇다고 무슨 내가 똥 얘기만 하고 사는 건 아니다. 똥 얘기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자리라고 여겨진다면, 당연히 애초에 꺼내지 않는다. 사람들과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나서, 혹은 똥 얘기 꺼내면 감정의 벽이 확 무너질 것 같다고 판단되면 꺼낸다. 그마저도 수줍은 나의 성격 탓에 상황을 보고 또 본 후, 내 몸이 시킬 때 꺼낸다. 벌써 똥 얘기만 세 문단째다. 불편한 분이 계시다면 죄송하지만 그냥 넘기시길 권한다. 앞으로도 계속 똥 얘기만 할 것이므로.


학교에서도 물론 나는 아이들에게 똥 얘기를 한다. 어른들에게 똥 얘기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아이들에겐 상대적으로 덜하다. 아이들은 백이면 백 좋아한다. “단어만 나와도 아주 자지러지고 죽을려 그런다.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들을 두고 내 어찌 똥 얘길 안 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과 똥 얘기는 일상이다.

선생님, 어디 가세요?”

, 똥 싸러.”

(까르르 웃으며) 또 똥 싸러 가세요?”

, 당연하지!”

(또 배시시 웃으며) 선생님, 즐똥하세요!”

그래, 고마워. 즐똥할게!”

급식실에서 급식을 마치고 나오면, 언제나 나를 맞아 주는 네 명 정도의 4학년 우리 반 여자 아이들이 있다. 나를 졸졸졸 따라온다. 그러면 나도 뒤돌아 그 아이들 뒤를 졸졸졸 따라가면서 서로 장난을 주고받는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다. 교사용 화장실. 위 대화는 그 내가 화장실을 가기 전 이 아이들과 항상, 매일 주고받는 대화다. 물론 실제 점심시간에 교사용 화장실에서 똥을 누진 않는다. (물론 아주 가끔은.) 그저 소변보고, 손을 닦고 할 뿐이다. 그러나 저렇게 똥 얘기를 농담 삼아 섞으니 분위기가 얼마나 화기애애하고 즐겁고 유쾌한가.

그 유쾌함을 위해 다소 도발적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전 학교에서는 교실에서 급식을 했는데, 밥 먹는 동안 플래시 노래를 많이 틀어 줬다. 이번엔 어떤 노래를 틀까 목록을 컴퓨터로 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꽂힌 제목이 있었다. 바로 내 똥꼬’. 선생님, 저거 틀어요!라는 말을 나는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내 똥꼬 _ 박진하 시/ 백창우 곡

 

똥 누러 뒷간에 가면

똥은 뿌지직 잘도 나온다

끙 끙 끄 응

조금만 힘줘도 잘도 나온다

자랑스런 내 똥꼬

 

플래시 영상엔 똥 누는 장면, 똥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또 틀자 해서 또 틀었다. 그래, 원하는 만큼 틀어 주마. 처음엔 재밌어 하던 아이들도 밥 먹으며 똥 노래를 계속 보고 들으니 거북했는지, 몇몇 아이들은 고만 보자 한다. 그렇지만 장난기 많은 친구들 몇몇은 또 보자 한다. 그래서 꿋꿋이 또 틀었다. 힘든 아이들이 늘어 갔다. 너무했나. 그러나 나는 간사하게 속으로 낄낄대며 웃었다.

그래서 벌을 받았나. 어떤 아이가 똥을 지렸다. 누군지는 모른다. 대변기가 있는 두 번째 칸. 똥은 대변기 뚜껑, 대변기 모서리, 양옆 벽, 벽 뒤 등등 산발적으로 묻어 있었다. 그 아이는 똥으로 그림을 그린 게 틀림없었다. 같은 학년 선생님들은 모두 고민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는데, 냄새는 심했고, 이 상태로 주말을 맞을 학교를 떠나기엔, 똥의 자태와 냄새가 너무 추악했다. 행정실에 전화해 보니 청소하시는 여사님(학교에서 이 직종에 일하시는 분의 호칭을 고작 여사님으로밖에 표현 못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땅히 더 나은 호칭을 찾지 못해 부끄럽게도 부득이 이 단어를 쓴다.)은 이미 퇴근하신 후였다. 어찌해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머리를 맞대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군대 가기 전 발령받은, 그리고 군대를 전역하고 얼마 전 다시 발령받은, 그 당시 신규였던 승현(가명)샘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제가 치울게요.”

마지못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게 뭐 그리 큰일이냐는 듯,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듯. 승현샘은 바로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으며 걸레를 찾아 나섰다. 나도 뒤따라가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으며 걸레를 찾아 나섰다. 이내 화장실에서 호스를 꽂고 두 번째 칸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호스의 물과 걸레로 똥의 그악스러운 자태는 생각보다 금세 사라졌다. 승현샘이 주도적으로 했고, 나는 뒤처리만 살짝 했다. 승현샘 이전엔, 누구도 똥을 직접 닦고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사들은 그렇게 고상하지 않다. 아이들이 통으로 엎은 반찬 찌끄러기들을 치워야 하고, 속이 안 좋아 게워 낸 아이들의 토를 치워야 하고, 교실에 들어온 벌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렇지만 똥은 아니었다. 똥을 치우지 않을 만큼은, 고상했다. 그리고 그 정도 고상함을 가진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교사들이 똥을 직접 닦고 치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욕먹을 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왠지 부끄러웠다. 똥을 좋아한다던 내가, 결국 현실의 똥 앞에서 주저하다니. 똥에 대한 사랑이 부족함을 깨달았다. 글을 쓰면서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앞으로 똥 얘기를 부끄럼 없이 할 수 있을까. 똥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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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여름휴가 때 겪은 오싹한 경험

이남림/ 완주 글쓰기 모임 회원

 

 

드라이브하러 나가게 준비하고 있어요.”

친구 소개로 몇 번 만나던 남자한테서 온 전화였다. 나는 그가 매번 알아서 데이트 코스를 척척 짜내는 게 정말 맘에 들었다. 길을 잘 몰랐던 나는 그가 운전해 가는 대로 어디든 좋았다. 시간이 많이 걸려도 드라이브하면서 얘기 나누는 데이트는 꽤 짜릿하고 매력적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나오기 시작했고 경사는 점점 심해지는 듯했다.

~! 그만 올라가고 어서 다시 돌아가요. 지금 당장!”

그는 갑작스런 내 말에 당황해하며 말했다.

차선이 하나라 차를 돌릴 수도 없는데.”

심장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30여 분을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손잡이를 꽉 부여잡은 채로 버텼다. 그리고 드디어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한 길이 끝이 났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라고 당황했을 그에게 나는 3년 전의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운전면허를 따고 중고차를 사서 그 복잡한 도로를 기어 다니다시피 했다. 2년쯤 지나 운전에 점점 익숙해진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여름휴가 때 나는 부모님과 언니, 조카 둘과 함께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계곡으로 향했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오가는 차들이 너무 많아 계속 브레이크를 밟으며 조금씩 움직여 갔다. 겨우 도착한 계곡에서 우리는 배부르고 시원한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도 차들이 밀려 거의 줄지어 서서 브레이크만 밟고 있기도 했다. 경사가 심한 길이라 차가 조금씩 움직일 때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햇살에 익어 버린 아스팔트인 데다가 경사가 심한 길을 계속 오르락내리락해서 그런지 타이어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

내려오는 중간에 쉼터에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고 다시 출발했다. 차를 타고 몇 초쯤 지났을까?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조금 전까지 잘 듣던 브레이크가 작동되질 않았다. 반대편 차선으로는 차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고, 내 앞에도 차들이 줄지어 가고 있었다. 또 도로 양옆은 경사가 심한 낭떠러지였다.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무섭고 막막하고 겁이 났다. 가족들 모두 이대로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어떡해! 어떡해! 큰일났어! 브레이크가 안 들어! 모두 벨트 잘 매고 손잡이 꽉 붙잡아요!”

몇 미터 앞 반대편 차선을 보니 작은 건물이 보였다. 그 순간 , 저 건물 쪽으로 핸들을 돌려 건물에 부딪치면 낭떠러지로는 떨어지지 않겠구나라는 판단이 섰다. 그쪽으로 급히 핸들을 틀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많이 오가던 차들이 그 순간엔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다행히 다른 차량과는 아무런 충돌 없이 건물에 바로 부딪칠 수 있었다.

사고 후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고만 있었다. 차 안에 가족들은 울고불고 더 난리였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뛰어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였다. 직원들은 다들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으니 안심하라며 119를 불러 주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고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119에 실려 병원에 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천만다행으로 언니만 이마에 몇 바늘 꿰맸을 뿐, 다른 가족들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나는 브레이크가 갑자기 밟히지 않은 순간부터 우리 가족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지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기적처럼 모두 다시 살아났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는 그 후로 한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다. 한참 지나 다시 핸들을 잡기는 했으나 구불구불한 오르막, 내리막은 아무리 경치가 좋더라도 스스로 운전해서는 절대 가지 않는다.

여름휴가에 관한 오싹한 이야기를 듣고 난 남자 친구는 그 후로는 데이트 코스에 드라이브를 절대 넣지 않았다. 그 당시 난 이 사람이 참 배려가 많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15년 동안 같이 살아 보니 원래 드라이브 같은 거 전혀 좋아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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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한국지엠 비정규직

 

아빠, 우리 집에 언제 놀러와?

정인열/ <작은책> 기자 

 

▲ 한국지엠 부평공장. 작은책(정인열)


한국지엠은 생산 물량 감소를 이유로 2014~2015년 군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약 1000명을 해고했다. 정규직은 노동조합이 있어 해고를 피했다. 인력 감축이 필요한 경우 비정규직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정규직을 전환배치해 고용을 보장한다는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이를 인소싱이라고 한다.) 비정규직이 일하던 공정에는 정규직원이 들어왔다. 정규직원들은 비정규직의 편성률(생산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회사는 해고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다시 불러 2~3개월간 정규직원에게 현장 업무를 가르치게 했다.

이완규 씨(40)도 인소싱으로 인해 20158월 해고됐다. 그는 2006년 군산공장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도어 라인(자동차 문)에서 일했다. 그러다 2015430, 3개월 유급 휴직 통보를 받았다. 복직 날짜는 없었다. 곧 해고된다고 생각하자 억울해서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지엠군산비정규직지회)에 가입했다.

모범사원 상도 세 번이나 받았어요. 성실하게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너는 비정규직이니까 나가라, 그러니까 억울한 거예요.”

2018213일 군산 및 부평공장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법원은 이완규 씨를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 45명이 한국지엠의 노동자라고 1심 선고를 내렸다. 해고 투쟁 3년 만에 들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같은 날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지엠이 군산공장 폐쇄를 발표한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공장에 돌아가겠다는 생각만으로 싸웠는데 갈 곳이 없어진다니까. 괜히 (투쟁)했나? 그때 많이 힘들었죠.”

인소싱은 2009년 부평공장에서 먼저 시작됐다. 당시 금융위기로 미국의 지엠 본사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비정규직 약 1000명이 해고됐다. 사실 비규정직이 해고된 자리에 정규직 인력을 1.5~2배 더 투입해야 공정이 돌아간다. 게다가 비정규직에게는 정규직 대비 50~70퍼센트 수준의 임금만 지급하고, 자녀의 학자금 같은 복리후생 하나 제공하지 않고, 골치 아픈 노사협상을 하지 않고도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을 손쉽게 해고했다. 비정규직에게는 노동삼권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부평공장 안에는 2, 3차 하청업체를 포함해 약 2500명의 비정규직이 있었다. 이영수 씨(46)와 박현상 씨(45)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비정규직의 열악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두 사람은 2006년 부평공장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차별을 묻자 이영수 씨가 말했다.

주말에 지게차 타는 라인 그리는 거를 한 적이 있어요. 정규직하고 똑같이 라인을 그리는데 거기는 이십몇만 원 받아가고 우리는 십만 원도 안 되는 거야. 그당시만 해도 3배 차이가 나는 거야. 야 이거는 심각하다 느꼈죠.”

▲ 출고 직전 차량에 스프레이 건으로 왁스를 도포하는 방청(녹 방지작업사진 제공_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2007년 한국지엠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 일하던 라인을 분리하고 모듈화를 도입하면서 일부 공정을 납품업체로 돌리려 했다. 이영수 씨와 박현상 씨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에 반대하며 200792일 비정규직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를 설립했다. 발기 조합원은 30여 명이었다. 설립 일주일 만에 비정규직 노조 간부들부터 차례대로 해고되더니 조합원이 가장 많았던 하청업체 스피드월드파워도 폐업됐다. 해고자만 25. 선전전, 천막농성, 집회를 해도 복직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071227, 박현상 씨는 해고자 복직 및 노조 인정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가지고 부평구청역 CCTV 탑에 올라갔다.

그날 비가 오고 날씨가 안 좋았어. 비닐 쳐 놓고 자고 일어났는데 못 내려가게 밑에 천막이 쳐져 있는 거야.(웃음)

하루 이틀 예상하고 올라갔던 그는 65일 만에 내려왔다. 이대우 당시 지회장이 이어받아 70일을 고공농성했다. 2008117일에는 황호인 씨가 부평역 CCTV에 올라갔다. 며칠 후 또 다른 조합원 4명이 한강대교 아치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했다. 227일에는 이준삼 씨가 마포대교 외줄 농성을 했다. 정화조를 잘라 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밧줄을 달고 다리 아래에 매달렸다. 이영수 씨와 박현상 씨가 말한다.

정화조가 플라스틱이잖아요. 그라인더로 그 위를 잘랐어. 밧줄도 혹시 끊어질까 봐 최고급 밧줄로 했는데 (진압하려고 하니까) 뛰어내려 버렸어.”

다행히 이준삼 씨는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고 수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방구조정에 구조돼 목숨을 건졌다.

▲ 황호인, 이준삼 조합원은 지엠대우 정문 아치에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두 달간 고공농성을 했다(2010년 12월 1일 ~ 2011년 2월 1일). 사진 제공_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부평구청역에서는 고공농성이 계속됐다. 135일째 되던 20085, 지회는 해고자 22명 중 7명만 선별 복직하기로 합의하고 이대우 지회장은 내려왔다. 하지만 지회장을 비롯해 박현상, 이영수 등 핵심 간부를 포함한 15명은 복직하지 못했다. 이들은 부평공장 서문 천막 농성장에서 2년 반이 넘게 투쟁을 이어 갔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2010121일 부평공장 정문 아치 위로 황호인, 이준삼 해고자가 올라가 또다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아래에서는 당시 지회장이었던 신현창 씨가 단식을 했다. 201121, 노사는 해고자 전원 복직에 합의했다. 2년 후인 2013년에 복직한다는 조건이었다. 신 지회장 단식 45, 고공농성 두 달이 되던 날이었다. 만족할 만한 합의는 아니었지만 일단락을 짓기로 했다. 이날 합의대로 20137월 해고자는 모두 복직됐다. 6년이 걸렸다이영수 씨가 당시 복직한 느낌을 회상했다.

돈을 버니까 좋더라.(웃음)

하지만 6년을 무임금으로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박현상 씨가 또 우스갯소리를 한다.

이영수 동지는 아직 혼자여서 버티는 거…. (웃음)

박현상 씨와 이영수 씨는 부양가족이 없는 싱글이라 버텼다며 웃는다. 겉으로는 가볍게 말하지만 아주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군산공장 이완규 씨는 어린 자녀 둘이 있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아내가 직장에 나가 돈을 벌지만 4인 가족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정규직 해고자들은 2년치 임금을 받고 나오기라도 했지만 비정규직은 빈손이다. 해고 후 4년 동안 쌓인 빚이 3천만 원. 그럼에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자녀들 때문이다.

현재 비정규직이 1200만 명 정도 된다잖아요. 가면 갈수록 비정규직은 늘어날 거거든요. 앞으로 야네들이 살아갈 세상이 보이는 거예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기자회견도 많이 하고 티비에도 나와요. 우리 와이프가 다른 건 다 좋은데 티비만 나오지마라, 전라도 말로 '거시기'하다는 거여요. 제가 와이프한테 그랬어요. 자기는 자기 '거시기'한 게 좋아 아니면 우리 자식들이 커서 비정규직으로 평생 살아가는 게 좋아? 그럼 당연히 아니래요. 그럼 자기도 좀 참아. 아빠의 투쟁으로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고 싶어요. 잠깐은 불편하겠지만 계속 싸우다 보면 우리 애기들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살 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이완규 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현상 씨와 이영수 씨가 박수를 치며 말한다.

이런 조합원이 있어야 되는데.(웃음)

한국지엠 구조조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영수 씨는 지난 11일부로 또 해고자가 됐다. 한국지엠이 정규직에게는 임금의 70퍼센트를 지급하며 유급휴직을 제안했지만 비정규직에게는 무급 순환휴직을 요구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이를 거부했고 이영수 씨는 해고됐다. 비정규직 노조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생산 물량이 없는데 무슨 해고자 복직과 정규직화 요구냐며 차가운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지회의 요구는 수긍이 갈 만하다. 작년 1교대로 전환되었던 부평2공장이 조만간 다시 2교대제가 될 예정인데, 이때 정규직 600여 명, 비정규직 100여 명이 필요할 것으로 지회는 예상한다. 지회 해고자는 46(부평 38, 군산 8). 그리고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로 법원 판결도 이미 받은 상태다. 복직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뿐만 아니라 한국지엠은 정부로부터 8100억 원을 지원받았다. 사회적 책임도 져야 한다.

▲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 이영수, 이완규, 박현상 씨(왼쪽부터). 지회는 해고자 복직 및 정규직 전환 요구를 하며 507일째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다(2019년 6월 27일). 작은책(정인열)


생계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이완규 씨와 박현상 씨의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다. 싱글인 이영수 씨는 난 담배나 피워야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박현상 씨는 네 살 된 딸이 있다. 집은 충북 진천. 딸이 두 살 때 육아휴직을 쓰고 1년 전 공장에 복귀하면서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다. 이완규 씨는 6월부터 상경 투쟁을 하고 있다. 이완규 씨가 아이들과 통화한 이야기를 한다. “‘아빠는 왜 회사 가면 (집에) 안 와?’ 이런다니까.” 이 말에 박현상 씨가 받아쳤다. 우리 애는 아빠 우리 집에 언제 놀러 와?’ 한다니까. ‘언제 와도 아니고. 하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네 사정이 더 낫네 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돌려서 표현했다. 싱글인 이영수 씨만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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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14)

 

자식을 두고 갈 때 알려 줄 것들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사랑하는 나의 딸이 엄마가 있어서 너무 불행하다고,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런 엄마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합니다. 엄마는 왜 사냐고 묻습니다.

이런 순간에 맞닥뜨리면 모멸감과 낭패감, 화살이 누구를 겨냥하는지 분명한 분노의 마음에 휩싸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진짜로 죽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미친 호기심이 일기도 합니다.

나는 평소에 딸아이한테 내가 죽으면 외딴 무덤이나 발걸음하기 어려운 곳에 두지 말고, 화장해서 곱게 빻아서 예쁜 병에 담아 부엌 찬장에 두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도 나의 부모님의 다음을 어떻게 챙길지 자신이 없는데, 우리 다음 세대들은 장례나 제사를 치러 낼 수 있을까요?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너무 슬프고 너무 절망스러워서 삶에서 저만치 비껴 나게 두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게 되어 있는데, 마치 죽음이 생과 전혀 다른 낯선 것인 양 외면하는 모양새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지나간 사람들 사진을 보고, 손때 묻은 물건들이 그대로 언제든 닿을 곳에 있어서 죽음도 삶도 관계의 영속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 죽음도 사라져 없음이 아니라 그저 삶의 일부로 있는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나의 백수 생활이 자꾸 길어지고 있을 때, 딸아이가, 엄마가 돈을 못 벌고 우리가 몹시 가난해져도 밥은 굶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엄마의 친구들이 자기가 굶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더라고요. 죽고 나면, 잠시 나의 딸을 굶어 죽게 하지 않을 나의 벗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봅니다. (한참을 계속 떠올리는 중) , 좋아요. 내가 지금 당장 물려줄 재산은 하나 없어도, 내 딸아이 밥 한 끼씩 챙겨 줄 사람들은 좀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어도 딸아이의 생존에는 하등 어려움이 없을 것 같네요. 조만간 약정서를 돌리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물론 자식을 두고 먼저 가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죽어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최소한 도시 아파트에서 얼른 벗어나 적당히 한적한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할 거 같습니다. 마당이 있고, 별다른 조리가 필요 없는 오이나 당근 같은 것들을 그 자리에서 따 먹으며 살 수 있으면 걱정이 좀 덜 되겠네요. 그리고, 고기 말고 그나마 즐겨 먹는 두부로 할 수 있는 음식들 몇 가지 요리법을 좀 정리해 놔야겠습니다.

그리고 시행착오투성이여서 실패하느라 정신없던 나의 삶보다는 조금 더 편히 살아가는 노하우를 알려 줘야겠습니다. 이를테면, 최악의 남자를 피하는 법 같은 게 있겠네요. 다음 체크리스트에서 항목을 체크해서 점수를 내 보게 하는 겁니다.

 

1. 남자 친구와 같이 밤길을 걷다가 휘파람을 부는데, ‘밤에 휘파람 불면 귀신 나온다하며 못하게 한다.

2. 머리를 자르고 만났더니, ‘긴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하며 아쉬워한다.

3. 나에 대해서 별로 궁금해하는 게 없다. 질문을 잘 안 한다.

4. 또 한편으로 나에 대해서 너무 다 알려고 한다.

5. ‘사전에 의논하지 않는다. 내 의사를 묻지 않는다.

6. 또 한편으로 하나하나 일일이 다 내 눈치를 살핀다.

7. 심부름을 하고 왔는데 또 나갔다 오게 할 때, ‘아까 말하지!’ 하며 눈을 부라린다.

8. 어떤 물건이 좋다는 이야기를 물건값으로 말한다.

9. 장난치다 다쳤을 때 갑자기 정색하며 화를 낸다. 특히 나 때문에 다쳤을 때 나를 쩔쩔매게 만든다.

10. 왠지 내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를 선뜻 만들지 않게 된다.

11. 전 여친을 몹시 안 좋게 말한다.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고도 한다.

12. 엄마, 아빠에게 원한이 깊다. 특히 어린 시절의 상처 이야기를 할 때 아직도 가시지 않은 적개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13. 화가 났을 때 주먹으로 문짝을 치는 일이 한 번이라도있다.

14. ‘도저히 답톡을 할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이 체크리스트는 체크할 때마다 1점씩 붙게 되는데, 그러면 점수 구간이 생기겠지요? 딸아이한테 단단히 일러두어야겠습니다. 정확하게 이 상황에서 이 말을 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유전자에 박혀 있는 것 같(다고 저만 믿고 있)다고요. 이 체크리스트는 무척 견고하고 엄마의 온 생을 통해 검증되고 검증된 항목이라서 단 1점이라도 나는 날에는 그 남자는 무조건 아웃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좋은 남자는 존재하기가 쉽지 않으니, 연애는 개떡 같은 남자 찰떡 같은 남자 다 만나 보다가 이 체크리트스에서 1점이라도 나는 순간에 뻥 차 버리면 된다고. 나중에 누구랑 같이 살고 싶어지면 그게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온순하고 착하고 눈이 반짝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도 해 주어야겠네요.

(그나저나, 원래 체크리스트에 14개는 어쩐지 좀 어정쩡하니, 나머지 한 개는 여러분이 좀 채워 주시지요.)

그 밖에 일기를 쓸 때는 같은 크기의 일기장에 써 두는 게 좋다거나, 설거지하기 가장 좋은 때는 밥 먹고 난 직후라는 놀라운 사실, 나의 엄마한테서 전수받은 소울푸드, 톳두부무침의 비법 같은 것, 장을 보러 갈 때는 꼭 밥을 먹고 가야 한다는 것, 양치질을 할 때는 위턱의 왼쪽 어금니, 윗니, 위턱의 오른쪽 어금니, 아래턱의 오른쪽 어금니, 아랫니, 아래턱의 왼쪽 어금니로 여섯 개 구역을 나눠서 한 구역씩 클리어하는 방식으로 칫솔질을 하면 놓치는 치아 없이 말끔하게 닦을 수 있다든가 하는, 온 생애를 통해 연마해 온 비기 가운데 비기들을 한 번에 하나씩 써서 집 안 구석구석에 숨겨 두어야겠습니다. 찾으면 찾는 대로 참고가 될 테고, 못 찾으면 못 찾는 대로 자기 노하우가 생길 테니까 어떻게 되든 괜찮을 거 같네요.

그림_ 최정규


하도 엄마 때문에 불행하고,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도대체 그 마음이 얼만큼인지 물었습니다. 지금은 한 60퍼센트라고 하네요. 다른 엄마들이 그렇듯, 나도 딸아이가 원하면 그게 뭐든 다 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100퍼센트가 되면 꼭 말해 달라, 그러면 반드시 죽어 주겠다고요.

가장 최근에 죽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딸아이가 기말고사를 망치고 걸어 온 전화 통화에서인데요. “괜찮아, 점수가 뭐가 중요해. 열심히 한 과정이 있으니까 됐지했더니, “과정이 뭐가 중요해, 시험은 다 점수로 말하는데! 내가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는데 왜 자꾸 과정이 중요하대? 내 기분을 그렇게 못 맞춰 줘?” 하는 것이 그 사유였습니다.

빵점이면 어떠냐, 공부 같은 거 못해도 된다고 말했는데 되레 욕을 먹으니, 100점 안 맞았다고 다그치다 욕먹은 엄마들보다 내가 더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는 딸아이가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80퍼센트라고 했습니다.

이 비율이 오르내릴 때마다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맑았다 개었다 날씨도 덩달아 바뀌는 것 같습니다. 100퍼센트가 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서둘러 이 글을 남겨 봅니다. 자꾸 죽으라고 하니, 죽고 나서 어떻게 될까 자꾸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모은 책은 제목을 죽으란다고 진짜 죽은 중2 엄마 이야기라고 지어 보고 싶습니다.

지난달에, 이제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무척 진중한 목소리로 엄마는, 내가 중2 때 중2병이 끝난 걸 다행으로 알아!” 그랬는데 개뿔. “넌 아직도 중2병 투병 중이거든!” 하는 말을, (차마 그녀석 면전에다가는 입도 뻥긋 못 하고) <작은책> 대나무 숲에다가 목 놓아 외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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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비정한 먹이사슬

이순이/ 벌농사꾼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새벽에 한바탕 벌통 내검을 하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집 안이나 그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리고 해지기 전에 또 한바탕 벌통 내검을 한다.

, 벌통은 왜 이리 많고 또 여름 해는 왜 이리 긴 거냐. 온종일 일을 하다가 문득 노예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일을 멈추고 집 안으로 들어가 캔 맥주를 마시거나 냉커피를 마시면서 일을 할지 안 할지는 내가 결정한다며 버텨 보기도 한다. 그러나 농사일이나 벌 일은 미룬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다시 작업에 돌입하곤 한다.

며칠 전 새벽일을 하다가 남편이 뭔가를 발로 차서 봉장 밖으로 치우는 것을 보았다. 차는 모습을 보니 꽤나 크고 잘 밀쳐지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뭐냐고 물었더니 두꺼비란다. 두꺼비가 벌을 잡아먹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면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면 멀리 갖다 버리든지 죽이든지 해야지 거기에 그렇게 두면 또 돌아오지 않겠냐고 툴툴댔다. 양서류나 파충류에는 적응이 안 되어 그 두꺼비를 나는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저녁 작업을 하고 뒷정리를 하다가 투실투실한 두꺼비가 벌통 앞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개구리를 귀엽게 볼 정도까지는 적응이 되었는데 두꺼비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놈은 너무 크고 징그러웠다. 무엇보다 인기척을 느끼고도 도망가지를 않고 어정어정 벌통에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네가 인기척을 모르는 게냐? 하여간 벌통 앞에 앉아 저 큰 배가 부를 때까지 꿀벌을 한 마리 한 마리 혀로 말아 먹는 생각을 하니 보호본능에 전투력이 상승했다.


그놈을 골프공 날리듯 쳐내겠다는 생각으로 벌통을 눌러놓은 굵은 각목을 집어 들었지만 입은 이미 남편을 부르고 있다. 그놈을 쳐내며 느껴질 물컹함과 무게감에 몸서리를 치며 남편에게 각목을 건넸다. 성질 급한 남편은 내가 건네주는 각목을 본 체도 않고 지나쳐 가며 두꺼비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각목으로 두꺼비가 있는 쪽을 가리키자 근시안인 남편은 그곳을 들여다보느라 허리를 굽히고 고개까지 수그린다. 위험하다. 두꺼비 혀에 독이 있다고 들은 기억에서 두꺼비 혀가 1미터도 넘게 뻗어 나와 남편의 얼굴을 핥는 것까지 상상의 날개가 순식간에 펼쳐지니 소름이 돋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발길질로 두꺼비를 걷어찼다. 그리고 어디로 날아갔는지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덩치 큰 두꺼비는 축구공처럼 멀리 날아가지 않고 바로 옆에 떨어져 별일 없었다는 듯이 벌통 쪽으로 어정어정 기어가고 있었다. 흥분한 남편은 그제야 내 손에 있는 각목을 낚아채서 게이트볼 치듯 투욱 쳐냈다. 그러나 두꺼비가 꿈쩍도 않자 맘을 고쳐먹고 장타를 날리듯 힘껏 쳐냈다. 그 타격이 빗나갔는지 두꺼비는 굴러가지도 날아가지도 않고 5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벌러덩 나자빠져 있었다. 덩치 때문일까. 파리나 모기를 잡아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버리던 것과는 다른 느낌 때문에 우리 부부는 말없이 뒷수습을 했다. , 꿀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꺼비를 죽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던 것일까. 미안함과 죄책감을 털어 내기 위해 둘이서 몇 마디 말을 더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남편이 말하고, 맞아 맞아, 저 놈이 날마다 와서 먹을 꿀벌을 생각해 봐. 우리도 먹고살자고 그런 거지 재미로 죽인 건 아니니까.그렇게 종알대며 걸어 나오다가 나는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돌아섰다. 또 다른 두꺼비가 죽은 놈과 같은 자세로 벌통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남편은 골프 치듯 두꺼비를 단번에 봉장 바깥쪽으로 쳐냈다. 살생이란 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이미 숙련이 되는가 보다. 마음이 무거워서 소주를 아니 마시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밤마다 두꺼비 보초를 서러 나갔다. 아랫마을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주변의 풀을 더 베어 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놈을 양파망에 넣어 꽉 묶어 두란다. 그놈이야 말라 죽을 테고 다른 두꺼비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록 두꺼비가 나타나지 않는다. 적당히 서로 먹고살면서 눈에 안 띄니 다행이라 했더니, 남편이 말한다.

어제 아침에 보니 뱀이 두 마리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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