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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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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비정한 먹이사슬

이순이/ 벌농사꾼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새벽에 한바탕 벌통 내검을 하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집 안이나 그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리고 해지기 전에 또 한바탕 벌통 내검을 한다.

, 벌통은 왜 이리 많고 또 여름 해는 왜 이리 긴 거냐. 온종일 일을 하다가 문득 노예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일을 멈추고 집 안으로 들어가 캔 맥주를 마시거나 냉커피를 마시면서 일을 할지 안 할지는 내가 결정한다며 버텨 보기도 한다. 그러나 농사일이나 벌 일은 미룬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다시 작업에 돌입하곤 한다.

며칠 전 새벽일을 하다가 남편이 뭔가를 발로 차서 봉장 밖으로 치우는 것을 보았다. 차는 모습을 보니 꽤나 크고 잘 밀쳐지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뭐냐고 물었더니 두꺼비란다. 두꺼비가 벌을 잡아먹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면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면 멀리 갖다 버리든지 죽이든지 해야지 거기에 그렇게 두면 또 돌아오지 않겠냐고 툴툴댔다. 양서류나 파충류에는 적응이 안 되어 그 두꺼비를 나는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저녁 작업을 하고 뒷정리를 하다가 투실투실한 두꺼비가 벌통 앞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개구리를 귀엽게 볼 정도까지는 적응이 되었는데 두꺼비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놈은 너무 크고 징그러웠다. 무엇보다 인기척을 느끼고도 도망가지를 않고 어정어정 벌통에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네가 인기척을 모르는 게냐? 하여간 벌통 앞에 앉아 저 큰 배가 부를 때까지 꿀벌을 한 마리 한 마리 혀로 말아 먹는 생각을 하니 보호본능에 전투력이 상승했다.


그놈을 골프공 날리듯 쳐내겠다는 생각으로 벌통을 눌러놓은 굵은 각목을 집어 들었지만 입은 이미 남편을 부르고 있다. 그놈을 쳐내며 느껴질 물컹함과 무게감에 몸서리를 치며 남편에게 각목을 건넸다. 성질 급한 남편은 내가 건네주는 각목을 본 체도 않고 지나쳐 가며 두꺼비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각목으로 두꺼비가 있는 쪽을 가리키자 근시안인 남편은 그곳을 들여다보느라 허리를 굽히고 고개까지 수그린다. 위험하다. 두꺼비 혀에 독이 있다고 들은 기억에서 두꺼비 혀가 1미터도 넘게 뻗어 나와 남편의 얼굴을 핥는 것까지 상상의 날개가 순식간에 펼쳐지니 소름이 돋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발길질로 두꺼비를 걷어찼다. 그리고 어디로 날아갔는지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덩치 큰 두꺼비는 축구공처럼 멀리 날아가지 않고 바로 옆에 떨어져 별일 없었다는 듯이 벌통 쪽으로 어정어정 기어가고 있었다. 흥분한 남편은 그제야 내 손에 있는 각목을 낚아채서 게이트볼 치듯 투욱 쳐냈다. 그러나 두꺼비가 꿈쩍도 않자 맘을 고쳐먹고 장타를 날리듯 힘껏 쳐냈다. 그 타격이 빗나갔는지 두꺼비는 굴러가지도 날아가지도 않고 5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벌러덩 나자빠져 있었다. 덩치 때문일까. 파리나 모기를 잡아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버리던 것과는 다른 느낌 때문에 우리 부부는 말없이 뒷수습을 했다. , 꿀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꺼비를 죽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던 것일까. 미안함과 죄책감을 털어 내기 위해 둘이서 몇 마디 말을 더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남편이 말하고, 맞아 맞아, 저 놈이 날마다 와서 먹을 꿀벌을 생각해 봐. 우리도 먹고살자고 그런 거지 재미로 죽인 건 아니니까.그렇게 종알대며 걸어 나오다가 나는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돌아섰다. 또 다른 두꺼비가 죽은 놈과 같은 자세로 벌통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남편은 골프 치듯 두꺼비를 단번에 봉장 바깥쪽으로 쳐냈다. 살생이란 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이미 숙련이 되는가 보다. 마음이 무거워서 소주를 아니 마시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밤마다 두꺼비 보초를 서러 나갔다. 아랫마을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주변의 풀을 더 베어 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놈을 양파망에 넣어 꽉 묶어 두란다. 그놈이야 말라 죽을 테고 다른 두꺼비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록 두꺼비가 나타나지 않는다. 적당히 서로 먹고살면서 눈에 안 띄니 다행이라 했더니, 남편이 말한다.

어제 아침에 보니 뱀이 두 마리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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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아이 짐을 교실까지 들어다 줘, 말아?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 교장

 

 

첫날이라 짐이 많아서요.” “교실을 못 찾을까 봐 그러는데요.”

짐도 무겁고 아이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몰라서 오늘만 들어가면 안 될까요?” “아이만 먼저 들여보내고 제가 뒤따라가서 잘하나 보면 안 될까요?”

이런 말을, 입학식 다음 날 교문에서 아침맞이하며 1학년 학부모들과 쉴 새 없이 주고받았어. ‘아이가 힘들다는데 잠깐 들어갔다 오는 게 문제요?’ 하는 당당한 민원인 표정부터 안 들어가는 게 원칙인 건 아는데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 아이만하는 애틋한 호소까지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게 장난이 아니네.

다른 날보다 몇 배 힘든 아침맞이였어. 운동장과 학교 건물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걷는데 1학년 학부모와 아이들이 자꾸 떠올라. 학부모와 입학 초 학교 생활 적응 방법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했는데 놓쳤다는 생각이 드네. 예비 소집 이후 몇 차례 신입생 학부모를 위한 소통의 자리가 마련되었다면 오늘 아침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 상황에 따라 부모가 교실까지 들어갈 수도 있어. 사전에 담임과 학부모가 아이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나눈 뒤 나온 결론이라면 무엇은 못 하겠어?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학교가 정한 원칙을 무너뜨리는 건 교육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오늘 아침에 겪은 일을 가볍게 넘어가면 내년에도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거야. 그러지 않도록 내년 교육 과정 수립과 운영에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봤어.

유치원을 떠나 학교라고 하는 곳에 처음 등교하는 아침이야. 그런데 갖고 가야 할 준비물이 많아. 이걸 어떻게 들고 간다? 태어나 학교에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날, 준비물을 들고 가는 방법에 따라 아이에게 심리적으로 어떤 움직임과 변화가 있고 그 교육적 의미는 뭘까? 아침맞이하며 만난 1학년 아이들과 부모를, 준비물을 들고 오는 방법에 따라 세 묶음으로 나눠 봤어. 그랬더니 부모와 아이들 표정, 몸짓, 눈빛,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다르더라고.

첫 번째는 부모가 짐을 교실까지 가져다주는 거야. 부모 표정을 보면 밝고 뿌듯해. 그런데 온몸에 긴장감이 흐르고 양 볼이 불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어. 기운이 올라와 있다는 이야기지. 아이와 말을 하면서도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로 봐서 빠르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 교실 위치가 어디인지, 준비물을 어디에 넣어야 하고 담임을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등 생각이 많아.

반면 아이는 발걸음이 가볍고 두 손바닥은 펼쳐져 있고 눈은 이리저리 편하고 자유롭게 움직여. 편안하고 느긋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어느 하나를 깊이 바라보지는 않아. 여유롭고 편안하고 행복해. 눈길과 마음 모두 친구가 아니라 부모에게 쏠려 있어.

두 번째는 부모가 짐을 교문까지만 들어다 주고 거기서부터 아이가 들고 들어가는 거야. 부모 먼저 살펴보면 들여보내 주면 안 되나, 다른 사람도 들어가는데. 애 보는 앞에서 규칙을 어길 순 없고.’ 하며 교문 앞에서 아침맞이를 하고 있는 교장 눈치를 슬쩍 살피는데 갈등이라고 할까. 망설임, 머뭇거림이 느껴져. 애당초 집에서 떠날 때부터 교문까지만 들어다 주기로 아이와 약속하고 온 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이에게 짐을 넘겨주는데, 교실까지 들어다 주기로 해 놓고 교장이 버티고 서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들려 보내는 경우에는 떼쓰고 울고 난리야.

이렇든 저렇든 대부분의 부모에게서 불안감, 걱정, 두려움, 노심초사 같은 감정이 느껴져.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한다. 혼자 갈 수 있지?”, “넌 잘할 수 있어.”, “이제 네 힘으로 하는 거야.”, “화이팅!”, “너 파일 박스 어디에 둬야 해? 크레파스는? 실내화는? 잘 보고 해라.”, “교실 찾을 수 있어? 모르면 내게 전화해.”

반면 대부분의 아이들 입이 댓 발은 나와 있어. 골이 난 거야. 왜 교실까지 들어다 주지 않냐는 거지. 울거나 드물게는 같이 들어가자고 우기기도 해. 기운은 가라앉아 있고 눈꼬리와 어깨도 처져 있어. 발은 끌리고 다리는 풀려 있다. 친구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쳐다보지도 않거나 더 말 붙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게 하는 표정으로 영혼 없이 건성으로 대답하고. 가끔은 웃으며 걱정 마라는 표정을 짓거나 엄마를 힘차게 부르는 아이도 있지만 아주 드물지.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집에서부터 혼자 짐을 들고 오는 아이들이야. 이런 아이들은 교문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신호등을 건너오는 순간부터 아우라가 느껴져. 얼굴은 상기되어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두 손은 마치 절벽에 오르며 밧줄 붙잡듯 봉지와 손가방을 꽉 움켜쥐고 있는데 발은 번쩍번쩍 들어 힘차게 앞으로 내딛어. 친구들이 부르면 대답은 하면서도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듯 길게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아. 얼굴에는 긴장감이 넘치는데 짜증은 없고 눈동자는 앞만 보고 머릿 속에서는 뭔가 많은 생각이 솟구치고 있는 게 보여. 낯선 세상에 혼자 들어가는 두려움이 느껴지고 콧구멍은 벌렁거리고 콧등엔 땀이 솟아 있어. 주먹 하이파이브 하자고 말을 걸어도 귓등으로 흘리고 몇 녀석은 눈으로 자기 두 손을 가리켜. ‘보면 모르냐. 지금 내 손이 하이파이브 하게 생겼냐?’ 이런 뜻이지. 목에 힘 주고 당당하게 나를 쳐다보는데 가슴이 뭉클해.

이 세 종류의 아이들 가운데 삶에서 만나는 문제 상황을 풀어내고 해결해 삶의 주인으로 설 힘을 얻은 아이는 누구일까? 손발이 편안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얻기로 따지면 첫 번째 아이가 가장 큰 이익을 본 거고 세상살이라는 큰 바다와 산을 넘어갈 힘을 얻은 걸로 치면 세 번째 아이를 당할 수 없어. 사람들은 학교란 아늑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곳이어야 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난 아니라고 믿어. 학교라는 곳, 배움이 일어나는 곳은 낯설고 두렵고 불안한 자극이 가득한 곳이야. 모험이 가득한 곳이라는 거지. 학교가 왜 모험이 가득한 곳이어야 하는지는 다음 호에서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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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6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청년으로 살아가기

 

죽을죄를 저지른 건 아니었구나

유OO/ 촌스럽게 살고 싶은 스물일곱 살

 

 

아이를 만들었던 날, 아랫배가 아프고 피도 살짝 나왔다. 으레 달거리(월경)인 줄 알았다. 달거리할 때는 아이를 배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이때다싶었던 그와 콘돔을 끼지 않고 몸을 섞었다. 그 뒤로 두 달이 지났는데도 생리를 하지 않았다. 산부인과에 갔더니 임신 12주째였다. 의사 선생님이 그때 나왔던 피는 배란혈이라고 했다.

초음파로 배 속에 있는 덩어리를 어렴풋하게 봤다. 심장 뛰는 소리도 들었다. 놀랍고 신기했다. 혼자 좋아하지 말자고 되뇌면서도 나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었다. 그새 모성애라는 게 생긴 것 같았다.

아이를 함께 만들었던 그에게 아이를 뱄다고 했다. 그는 아이를 기르기엔 아직 이르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목숨 하나를 책임지기에는 갖춰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아이를 지우기로 했다.

수술을 앞두고 그는 내 걱정을 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씩씩한 척했다. 하지만 혼자 들어갔던 수술실은 너무도 차가웠다. 세균을 없애려고 소독했을 수도 있고, 어린 목숨이 죽었던 곳이라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을 수도 있다. 차가운 수술실에서 몸 안으로 들어오는 쇠꼬챙이는 차갑다 못해 시렸다.

수술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침대에 누워 영양제 링거를 꽂은 채 병실로 왔다. 그는 미안하다고 했다. “같이 저지른 일인데 너 혼자만 아파야 하는 게 속상해.” 슬퍼하는 그를 다독이려고 괜찮아라며 웃었다. 수술비는 꽤 비쌌다. 영양제, 약값까지 더해지니 백만 원 가까이 되었다. 그는 돈 걱정은 하지 말라면서 모두 자기가 내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쉬었다. 그 앞에서는 괜찮은 척했지만 혼자 있으니 많이 힘들었다. 쿵쿵 아이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엄마가 미안해라고 생각했다가 스스로 엄마라고 여길 자격이 있나 싶어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울었다. 수술하기 전에 병원에서 아이를 지우는 게 불법이라고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아이를 지우고 나서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힘도 없고 자주 피곤했다. 건널목을 걷다가 차에 치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이게 우울증이구나싶었다. 하지만 가족들이나 친구를 만나면 웃었다. 내 걱정을 하는 그에게도 잘 지낸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었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살면서 겪은 가장 힘든 일이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야 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와 헤어졌다. 도시에서 살고 싶은 그와 달리 나는 시골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골에 내려와서 새 남자 친구도 사귀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지내면서 지나간 사람은 잊혀 갔지만, 아이를 지운 일은 잊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애를 가졌다고 초음파 사진이나 영상을 SNS에 올릴 때, 영화에서 아기를 낳거나 임산부가 나오기만 해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듯 아팠다. 그때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꺼이꺼이 울었다.

수술하고 푹 쉬었어야 했는데 곧바로 괜찮은 척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날이 갈수록 몸은 안 좋아졌고 삼 년이 지나니 기력이 바닥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면역력이 약해져서 아토피도 생겼다. 기운을 북돋워 주는 한약을 먹고 침을 맞았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그는 잘 지낼 것만 같았다. 같이 저지른 일인데 나만 죗값을 치르는 것 같아 억울했다. 수술비는 그가 냈지만, 한약값이 부담될 때는 조금 보태 달라고 해 볼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인제 와서 책임을 묻는 나에게 그가 뭐라 할 것 같았다. 그 말에 맞받아칠 자신이 없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좋게 넘어갈 일도 삐딱하게 보고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공동체 식구들이나 친구들, 가족들은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늪에 빠져 있던 내게 힘을 준 건 페미니즘 에세이 책이었다. 특히 다른 여자들이 아이를 지웠던 이야기를 보며 위로를 받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었구나.’ 그 솔직한 이야기들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더는 나 때문에 다른 이들이 아프지 않길 바랐다. 기력을 되찾으려고 국선도를 하고 명상하면서 마음을 비웠다. 그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지운 게 아니라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얼른 다음 생으로 가서 더 좋은 부모 만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를 지우고 나서 네 번째 봄을 맞았다.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여성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자는 목소리를 많이 냈는데 드디어 받아들여진 거다. 여태 길거리에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했는데 목소리를 내 준 모든 이들에게 고마웠다.

한 국회의원이 14주까지 임신중절을 할 수 있게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법안을 발의했다고 했다. 석 달 가까이 아이를 밴 적이 있는, 그 아이를 지우고 죄인으로 살던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이제는 죄책감에 짓눌리지 않고, 잠깐이나마 내게 와 준 그 아이에게 사랑을 보내려 한다.

조금씩 용기를 내어 내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 놓았다. 떳떳해지면 좀 괜찮아질까 싶었기 때문이다. 같이 살던 이모, 친한 친구, 지금 남자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다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라며 나를 다독여 주었다. 엄마에게도 말했다. 힘없는 나를 보면서 그 누구보다 걱정했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많이 놀라면서도 언제, 누구랑 그랬는지’, ‘왜 이제껏 말 안 했는지다그치지 않았다. 고마운 이들을 위해서 얼른 튼튼해지고 싶었다.

올봄에 몸이 많이 좋아졌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나물 뜯으러 다닐 만큼 힘도 나고 피부도 좋아졌다. 기운이 생기니 하고 싶은 것도 생겼다. 첫 번째가 내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이었다. 혹시 나처럼 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나를 보고 힘을 얻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우리는 살아있고, 삶은 소중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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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6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도대체 매력이 뭘까?

엄익복/ 직장인

  

내 나이 올해 마흔 아홉. 낼모레면 오십이다. 결혼을 한 지도 이십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 아직도 아내와 티격태격 싸우는 날이 많다. 나는 가능하면 부닥치지 않고 피하려 하는데, 아내가 공격하듯 나올 때가 있다. 평소에도 무슨 불만이 있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 눈치를 보기는 하는데, 유독 화가 난 얼굴로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냥 살살 피해야 하는데, 괜히 웃어넘기려고 농담을 했다가 된통 당하곤 한다. 나는 기억도 안 나지만, 아마도 내가 마누라 등쌀에 못 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나 보다. 그 말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런 말이 나와? 나한테 고마운 줄은 모르고, 사람이 참 매력이 없어.”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한참을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뭐라고 한마디 하고는 싶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말 할 말이 없네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거실 한쪽에 앉아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아내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매력이 없다고? 그럼 오십 다 된 남편한테 무슨 매력을 기대한 거지?’ 화가 났다. ‘그러는 지는 무슨 매력이 있나?’ 분풀이하고 싶은 생각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하며 우울해졌다. 어쩌면 내가 생각해도 내 매력이 뭔지 알 수 없어서 그깟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 대해 스스로 자신감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사십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체력도 약해지고, 배도 나오고, 머리카락도 많이 빠진다. 거울 보기도 싫다. 가끔 머리 속이 허옇게 나온 사진이라도 있으면, 슬쩍 감추고 없애 버리기도 한다. 또 일을 할 때도 무슨 일이든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던 젊은 날의 패기는 사라지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며 의기소침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새로운 프로그램이라도 배울 때는 젊은 친구들에게 물어보면서 같이 해 보려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눈치만 보고 있을 때가 많다. 늘 하던 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준 후로는 어떻게 하는 건지 잊어버려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이젠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젊은 직원들끼리 즐겁게 얘기하는 중에도 내가 끼어들면 뭔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교육이나 연수를 받을 때도 내가 같은 모둠이 되면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진다. 빈말로라도 익복님이 함께해서 너무 좋다고 말해 주던 사람들도 이젠 찾아볼 수 없다. 나와 같이 일하는 것을 왠지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올해 초 직장에서 부서를 옮기게 되었는데, 같은 팀원들도 새로 옮겨 온 동료가 십팔 년차 부장이라니, 은근히 꺼리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말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다 보니 직장 생활이 가면 갈수록 재미가 없다. 정말 지금보다 돈을 적게 받더라도 뭐든 다른 할 일이 있으면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할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직장을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자, 내가 참 무능력한 존재라는 걸 확인하는 것밖에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버티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참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았는지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 물론 이건 직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다 커서 내 시간이 많아졌고, 밖에서는 그래도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취미 생활로 통기타 동호회도 나가고, 그림 그리는 모임도 나가는데, 이건 정말 재밌다.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 부르고, 서로 그린 그림을 보며 이야기 나누는 게 너무 좋다. SNS나 인터넷 카페에 사진과 그림을 올리고, 서로 칭찬의 댓글을 달아 주며 공유하는 것도 정말 즐거운 일이다. 이렇게 사는 게 나름 보람도 있고, 이게 다 나만의 매력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매력이 없다니. 화가 난다. 나만 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공동육아에 대안학교 보내면서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빠고, 청소며 빨래며 온갖 집안일도 다 도맡아 하는데, 이 정도면 남편으로도 괜찮은 거 아냐? 그런데 매력이 없다니. 생각할수록 열받는다. 회사에서 느끼던 소외감이 가정에서도 똑같이 느껴지는 것에 치가 떨린다.

도대체 매력이 뭘까? 어떻게 하면 매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만의 매력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무슨 일이든 열정을 다해 열심히 하는 사람이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지겹고 힘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매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사람이 매력 있는 사람이라면, 매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당장 밥벌이 때려치우고 나와 굶어 죽을 각오라도 해야 하는 걸까? 외모가 멋진 사람이 매력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다시 태어나야 하고, 돈 많은 사람, 돈 잘 쓰는 사람이 매력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태어날 때 부모까지 잘 만나야 하는데, 그건 하나 마나 한 소리일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매력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하지만 나를 매력 있는 사람으로 봐 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쳐 부러움을 사기도 하던데, 나는 왠지 더 이상 볼 것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니 아내에게까지 매력 없다는 소리나 듣겠지. 매력은 없지만, 매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은 있어서 괜히 마음만 무겁다. 그냥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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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5월호

교실 이야기

 

할 말은 글로 써 주세요

주한경/ 남양주 장내초등학교 교사

 

 

2017년부터 해마다 할 말 있어요를 하고 있다. ‘할 말 있어요는 작은 쪽지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교사인 내게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할 말 있어요는 칭찬할 일, 억울한 일, 부당하다 생각되어 신고할 일 따위를 적어 내는 종이다. 이것을 나는 모두 읽어 보고 해결을 본다.

10년도 더 전이다. ‘사소한 말이라도 아이들이 하는 말은 다 들어야 한다라는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 말을 물리치지 말고 잘 들어 주는 교사가 되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교실에서 아이들 말은 다 들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다 들어 주는 것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서른 명 가까운 교실에서 듣는 사람은 나 혼자인 데다 수업 준비와 잡다한 일로 말 걸어오는 아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내가 좀 더 부지런하면 되겠지 하며 모든 것을 허용하고 다 들어 주겠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자유롭게 말하라고 하면 모두가 허물없이 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목소리 큰 아이들이 나와의 소통을 독점하면 수줍음이 많아 나서기 힘든 아이들은 앓다가 뒤늦게 일이 터지기도 했다. ‘왜 말 안 했니?’라고 물어도 입을 닫고 있다. 이미 늦었다. 아이 탓을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참 어렵다. 그냥 모두 다 듣겠다는 분위기로만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종이에 써서 내는 것이다. 처음 누구나 써낼 수 있도록 좀 넘치는 말을 했다.

여러분, 고자질은 좋은 겁니다. 억울한 일, 좋은 일 있다면 뭐든 좋으니 써내세요.”

이 말을 듣고 아이들은 웃었지만 처음에는 머뭇거렸다. 그 뒤로 나는 써내는 글은 모두 받아 읽고 당사자를 불러 중재를 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듣고는 중재를 했다. 이러니 봇물 터지듯 이야기가 나온다. 정말 뭐든 써냈다. ‘지나가다 쳤어요’, ‘화를 냈어요. 아주 사소한 불만, 불합리함 그리고 조금의 칭찬과 장난 글까지 많이도 써냈다. 지난해에 600개가 넘는 할 말 있어요를 받았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글로 쓰게 한 덕이 컸다. 그냥 써내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확 줄었다. 보통 아이들은 앞뒤 잘라 내고 말을 하는 터라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몇 번을 물어 가며 들어야 좀 알아듣는데, 글로 내용을 미리 보며 이야기하니 그 시간이 확 줄었다. 또 기록의 힘도 있다. 이렇게 써낸 기록을 모두 모아 놓으니 뒤에 가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재하는 일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사소한 일에 자칫 편을 들다가는 원망을 사기도 한다. 처음에는 잘못 판단해서 학부모님의 연락을 몇 번 받기도 했다. 그래도 하면 할수록 요령은 늘었다. 천 번이 넘도록 중재를 하며 자리 잡은 방법은 대충 이렇다. 먼저 들어온 할 말 있어요를 읽는다. 그리고 당사자를 부른다. 서로 같이 읽으며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말할 기회를 준다. 부족할 때는 본 아이들도 부른다. 그렇게 따져 보고 고의로 했는지를 밝힌다. 따져 보면 대부분 오해 때문이다. 사과할 일이 있다면 진지하게 사과하도록 한다. 그러면 끝난다. 이제는 과정이 3분 이내로 끝난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은 나름 속 시원한 것이 있나 보다. 지난해는 할 말 있어요종이를 두면 바로 사라졌다. 아무리 많이 복사해 둬도 그렇다. 이는 몇몇 단골손님(?)들이 이 종이를 뭉텅이로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단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니 이야기를 들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꽤 많이 들었다. 또 헤어지며 할 말 있어요종이를 일부러 가지고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와 서먹한 아이가 없다. 예전에는 헤어지고 다시 보면 한두 아이는 어색해했는데 이제는 다 웃으며 본다. 나는 이것이 정말 좋다. 헤어진 누구와도 서로 웃으며 인사한다.

이렇게 아이들 말을 많이 듣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아주 사소한 일에 서로 소통이 안 되어 오해를 산다는 것이다. 작은 불만을 표현할 줄 몰라 마음에 담아 뒀다가 다른 충돌이 있을 때는 더 큰 감정 다툼으로 이어졌다. 집에서 혼자 자라고 잘 놀지 못하는 환경이 이런 수줍음을 낳았다고 여겼다. 나는 이런 수줍음이 서로 놀지 않아 그렇다는 데에 생각이 닿아 교실에서 즐겁게 놀 수 있도록 했다. 쉬는 시간 함께 놀 수 있는 도구를 두고 놀도록 했다. 그런데 그 뒤로 다툼은 더 늘었다. ‘할 말 있어요는 더 들어왔다. 놀이의 시비를 가리는 일까지 내게 들고 왔다. 왜 이리 많냐며 불평했지만 그래도 다 받았다. 그런데 이게 딱 한 달까지다. 그 시간이 지나면 자기들끼리 규칙을 만들어서 잘 논다. 자기들끼리 규칙이라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서로 심판을 보며 큰 다툼 없이 논다.

올해도 나는 할 말 있어요종이를 들고 말한다.

여러분, 고자질은 좋은 겁니다. 억울한 일, 좋은 일 있다면 뭐든 좋으니 써내세요.”

지난해 선배들이 한 두툼한 할 말 있어요뭉텅이도 보여 준다. 이를 보더니 몇몇 아이는 지난해 선배들보다 더 해 보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올해는 할 말 있어요받는 부서를 두고 아이들 도움으로 같이 해결하고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무들끼리 서로 나누고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목표다. 내가 편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쉬는 시간 내 책상 위에는 할 말 있어요종이가 쌓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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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5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봄나물 잔치

윤혜신/ 밥 짓고 꽃밭 가꾸는 시골밥집 미당주방장, 착한 밥상 이야기저자

 

 

요즘 들어 우리 옆 동네에 자주 가게 된다. 작은 미술관이 문을 열고 목요일 저녁마다 수묵화반이 생겨서 작년 늦가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수묵화를 그리러 다닌다. 미술관 앞에 책방도 생겼다. 오래된 시골 이층집을 살짝 고쳐서 아담한 책방을 열었는데 시골이라 어디 갈 곳이 마땅찮다가 아담한 시골 책방이 생기니 신이 났다. 그런데 또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내가 쓴 그림책 꽃할배를 알고는 작가라며 반겨 준다. 식당 주방장으로만 알고 있다가 그림책 저자라는 걸 알고 많이 놀랐다며, 갑자기 지역 작가로 우대를 한다.

어느 날, 늦은 오후에 세 명의 여성들이 밝게 웃으며 식당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그림책방 주인장 소개로 왔다며 자기들도 모두 동화작가라 했다. 반가운 마음에 차를 대접하고 얘기를 나누는데, 내가 아는 그 시골 책방에서 강연도 하신단다. 어쨌든 세상이 다 하나로 연결된 느낌이다.

강원도에 사시는 선생님에게 봄날이 되었으니 한번 산에서 내려오시라 연락을 드렸다. 흔쾌히 놀러 오신다 해서 이번에는 책방 주인장과 동화작가들을 같이 초대했다. 선생님 내외분도 그림책 작가시니 이름만 대면 서로 아는 사이리라. 그리하여 어느 봄날 밤에 모두 모였다. 봄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 비를 뚫고 다들 모여 앉았다.

나는 조금 특별한 봄 요리를 준비했다. 냉이를 다져 넣은 만두, 취나물을 갈아 쑨 죽, 방풍과 새우를 잘게 다져 넣은 전, 상수리묵과 묵은지, 취나물현미밥과 방풍조개된장국. 봄나물을 이용해서 색다른 맛을 냈다. 모두들 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맛있게 봄 요리를 먹었다. 예산 박 선생님이 작년 여름에 담근 술을 가져와서 입이 호강을 했다. 모두들, 냉이만두는 처음이라며 맛있게 먹고 신기해했다. 중동의 친구가 가르쳐 준 요리인 혼음, 내가 보기엔 만두는 만두인데 한꺼번에 크게 말아 쪄서 잘라 먹는 만두라 손쉽게 만두를 만들겠다 싶어서 내 방식으로 응용을 해 봤다. 먼저 밀가루 반죽은 거의 비슷하게 한다. 그런데 반죽을 밀 때, 우리나라 칼국수 반죽을 홍두깨로 밀듯이 커다랗게 밀고 그 위에 만두소를 골고루 얹어 돌돌 말아서 우리네 곱창같이 (순대같이) 둥그렇게 말아 놓고 찐다. 한 김 나가면 잘라서 접시에 담으면 된다. 나는 고기 위주인 그네들의 소 대신 양파, 부추, 냉이나물을 듬뿍 넣고 고기를 약간만 넣어 만든 소로 냉이만두를 만들었는데 냉이향이 향긋하니 맛난 만두가 되었다.

밥을 먹고 다시 집으로 내려와서 차와 다과를 먹으며 동화책 이야기랑 그림 이야기를 신나게 했다. 마침 송악에 살면서 그림책방과 그림책스테이를 준비하시는 감자꽃 선생님이 다음 날 놀러 오라고 초대를 했다. 몇 년째 그림책방을 준비 중이시라고. 우리는 꼭 가겠노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을 간단히 먹고 송악의 책방으로 놀러 갔다. 같은 당진이라지만 오지라고 할까. 가도 가도 시골길을 달려서 논밭 가운데 우뚝하게 서 있는 예쁜 책방. 높은 벽면 가득히 그림책이 꽂혀 있고 아직도 나무 냄새와 장작불이 타고 있는 동화 같은 집에 들어갔다. 한 사나흘 정도 이런 집에서 그림책만 실컷 보며 쉬었으면 하는 게 모두의 바램이다. 맛난 커피를 내려 주셔서 집안 구경도 하고 감자꽃 작가님의 책도 보고 즐겁게 놀다가 다시 면천의 책방 오래된 미래로 향했다.

책방에 들어서자 박수가 터지고 이담 선생님의 팬들이 책을 가지고 와서 기다렸다. 글쓰기 모임의 선생님과 제자라고. 역시 좋은 책을 쓰고 그리니 어딜 가도 팬들이 있다. 작은 책방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서 사인도 하고 담소도 나눴다. 책방 주인인 지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모두 책 선물을 했다. 예전부터 사려던 책을 딱 알아서 주시니 고마웠다. 예전에 우리 동네에 있던 작은 구멍가게들을 그린 그림책. 그 책장을 하나씩 넘겨 보며 마음이 따스해졌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다시 예산 슬로우시티 대흥마을로 가서 박 선생님이 하시는 수공예공방 짚과 헝겊에 갔다. 누님은 헝겊으로 가방, 모자, 손지갑, 생활용품을 만드시고 동생은 지푸라기로 짚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다. 특별히 이 공방은 예산에 사는 마을분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만을 판매한다고. 인형이며 브로치, 액자며 옷가지들이 정겹게 진열되어 있다. 선생님이 타 주신 꽃차를 마시며 예쁜 손물건을 구경하고 밀린 수다를 떨었다. 오후가 돼서 우리는 먼저 집으로 돌아와 저녁 장사를 했다.

자주 만나지는 않아도 가끔씩 얼굴 맞대고 사는 얘기를 진지하게 하고 살다가 실수한 거며 때론 일이 잘 안 풀려서 힘든 이야기며 부모자식 이야기를 나누니 핏줄이 아니어도 피붙이 같은 사람이 있다. 나도 남편도 집안의 첫째라 언니나 형이 없어서 의논할 사람이 없는데 어쩌다 만난(살림살이라는 책을 쓰다가 만남) 이분들은 내 친언니 친오빠같이 서로를 챙겨 준다. 가끔씩 만나면 너무 반갑고 안 보면 보고 싶다. 어제 하룻밤인데도 한참 전인 것처럼 느껴지고 빈자리가 허전하다.

어떻게 보면 우린 모두 이방인이고, 외지인이다. 강원도, 서울, 대구, 전주, 대전. 각기 자기 고향을 두고 여기서 살게 되었고 여기서 만났다. 외지인이라는 외로움이 우리를 더욱 친밀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살뜰하게 살펴 주고 다독여 주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괜히 이곳이 고향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내가 만든 새로운 음식들을 어색해하지 않고 맛있다고 색다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나는 또 용기백배하여 이것저것 요상한 조합으로 음식을 만들어 보며 신난다.

다음엔 꽃이 활짝 핀 따스한 날에 만나서 텃밭에서 나오는 재료들로 맛난 요리를 만들어 봐야지. 가지로 국을 끓이고 애호박으로 김치를 담가 볼까나?

 


냉이곱창만두

만두피 재료 : 밀가루 3, 따뜻한 물 1컵 반, 소금 약간

만두소 재료 : 다진 소고기(돼지고기도 가능) 300그램, 양파 1, 대파 2, 부추 100그램, 냉이 300그램

양념 : 소금, 후추, 참기름 2큰술, 다진 마늘 2큰술

그림_ 이동수


만들기

1. 만두피 반죽을 해서 비닐봉지 안에 넣어 숙성시킨다.

2. 양파, 대파, 부추는 다져서 소금에 살짝 절인다.

3. 냉이는 다듬어 씻어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물기를 꼭 짜고 다진다.

4. 절인 채소를 꼭 짜고 소고기와 냉이를 넣어 양념한다.

5. 반죽을 다시 치대고 반으로 나눠서 최대한 얇고 큰 타원형으로 민다.

6. 길이로 펴고 소를 반으로 나눠 골고루 얹고 김밥 말듯이 아래부터 만다. 끝 쪽은 떨어지지 않게 잘 붙인다. 이렇게 2개를 만다.

7. 찜통에 젖은 보자기를 깔고 김이 오르면 순대처럼 둥글게 말아서 30분간 찐다. 5분 식혀서 한 토막씩 잘라 접시에 놓는다. 달래초간장을 곁들인다.

* 냉이뿐 아니라 취나물, 방풍, 원추리, 유채 등 어떤 봄나물을 데쳐 넣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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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의부증 청산 수업료

임전/ 숲해설가

 

 

몇 년 전, 부부 동반 모임에서 남편 친구 부인이 지인의 권유로 사주를 보고 온 얘기를 했다. 상담을 해 주시는 분이 친구 부인에게 어떻게 그렇게 참고 살았냐며 눈물을 흘리더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음이 찡했다.

공부를 하기 전엔 사주 보는 사람들을 스스로 자기 일을 결정하지 못하는 비주체적인 인간이라 생각해 무시했다. 그리고 사주를 미신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사주는 음양오행, 우주와 천문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 영성수련 단체의 권장 도서인 얼굴경영이라는 책을 보았다. 모 디지털대에서 얼굴경영 공부를 했다. 얼굴경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잘 모른다. 관상이라 말하면 얼른 알아듣는다. 사는 데 따라 얼굴이 달라지니 마음 경영을 잘해서 얼굴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얼굴경영이라고 말한다. 교수는 3초 안에 사람의 얼굴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주와 접목해서 공부하면 사람 얼굴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동네 평생학습원에서 사주 공부를 시작했는데 처음엔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어려운 걸 배우겠다고 했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쉽게 그만두지도 못했다.

처음엔 뭔 소린지 모르겠더니 이론을 외우고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고 사주에 대한 재미를 알아 갔다. 사주에 대해 알아 가니 현장에 가서 내 사주를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 부인이 말한 곳을 가 보기로 했다. 막상 가 보니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는 곳은 아니었다. 한복 입은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나의 사주는 일주인 병화가 약해서 병화를 생해 주는 나무 목이 들어간 이름이 좋다고 해서 이름도 바꾸고 호도 만들었다.

사주 공부를 계속하던 작년 어느 날, 밤에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사무실도 아니고 현장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어디라고 말은 안 하고 나중에 얘기해 준다고만 했다. 일단 전화를 끊긴 했지만 찜찜하고 의심스러웠다. 나중에 얘기해 준다고 했지만 물어보자니 그렇고 속만 끓였다.

얼마 후 군대 간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모처럼의 가족 나들이인데 남편은 밥만 먹고 금방 일어나서 가야 한다고 했다. 개 눈엔 똥만 보인다고, 의심의 눈초리로 보니 그것도 촉수에 걸렸다.

다음 날 상도동의 철학관으로 달려갔다. 처음엔 여자가 없다고 하더니, 잘 좀 보라는 나의 채근에 종이로 만든 동그란 통에 자그마한 주사위 같은 것을 넣고 흔들었다. 통의 머리 부분을 쥔 손목에 스냅을 주어 꺾더니 주사위 하나를 꺼내서 보기를 몇 번 하였다. 밖에서 여자가 자꾸 불러내는구먼. 여자를 떼려면 부적을 써야 해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며 부적을 써 달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부적을 쓰고 있는데 손님이 왔다. 아들과 어머니로 보였다. 오래된 단골인 듯 근황을 주고받았다. 아들이 아기를 낳아 이름을 지으러 왔다고 했다. 대기실이 따로 있는 데가 아니어서 그분들은 내가 상담을 하는 옆에서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부적을 쓰면서 그들과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속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부적은 정성을 다해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고객과 이바구를 하면서 쓰고 있다니?’ 더 가관인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아들을 낳은 젊은 사람을 건너다보며 바람을 피우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책상 밑으로 다리를 뻗어 할아버지의 다리를 툭 쳤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두 개의 부적 중 하나는 집에 있는 베개에 넣고 다른 하나는 사무실에 있는 베개에 넣으라고 했다. 일단 집에 있는 베개에 두 개를 넣었다. 문득, 내가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확인한 것도 아닌데 부적을 써 왔다는 게 코미디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여자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남편은 성의 자기 결정권이 있고 본인의 인생이 있는 것인데, 부인이라고 해서 남편의 인생에 끼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사람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스스로 자존심이 상해 의부증 환자를 청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의 의부증의 역사는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다. 과부인 내가 총각인 남편과 결혼하여 스스로가 꿀린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나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을 달고 살았다. 결혼 전에 안양에서 야학을 같이하던 여자랑 잠깐 사귀었다는데 결혼 초 남편이 늦거나 하면 그 여자랑 다시 만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그 여자네 집에 한 번 찾아간 적도 있었다. 이렇다 할 물증이나 뭣도 없으면서 남편을 의심하는 마음에 찾아간 것이다. 그 여자는 내가 왜 찾아왔을까 이상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쇠고기뭇국도 끓여 주고 최대한 예를 갖춰 잘 대해 주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부적을 쓸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 돈이 모자랐다. 철학관에서 일부를 내고 나머지는 계좌 이체로 보냈지만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를 앉혀 놓고, 다른 손님을 바라보며 바람을 피면 안 된다고 떠들면 무슨 상담이 오고 갔는지 나팔을 부는 꼴이 아닌가? 상담은 내담자의 비밀을 보장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할아버지 책상을 둘러엎고 올 것을. 철학관에서 일부 낸 것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는 나 몰라라 할 것을. 후회하는 마음에 약이 오를수록 의부증 환자 청산 수업료로 쓴 것치곤 적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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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나는 그()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김경리/ 행복한책방 일산점 점장

 

 

또래에 비해 발육이 빠른 5학년이었다. 브래지어를 하는 초등학생이 아주 드문 때였기에 나는 노브라로 학교를 다녔다. 남들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서 그랬지만 오히려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담임이 내 가슴께를 흘끔거리는 걸 느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눈빛을 총애로 여겼던 것 같다.

어느 날 방과 후에 담임은 시험지를 채점해야 한다며 나만 교실에 남으라 했다. 채점을 마친 시험지 꾸러미를 들고 담임에게 다가가자 그놈은 나를 뒤에서 안더니 만져 보자, 만져 보자하면서 내 가슴을 한참 동안 주물거렸다. 그 행위가 어떤 의미인 줄은 몰랐지만 너무 무서워 눈물이 나려 했다. 그럼에도 울음을 꾹꾹 누르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후로 학교 가는 게 싫어진 나는 자주 배가 아팠다.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며 엄마가 일대일 수영 강습을 등록해 줬다. 수영 강사 그놈은 처음엔 소심하게 만졌다. ‘제대로 된 자세를 가르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우길 수 있을 만큼만 만지다가 내가 반항을 안 하자 점점 대범해졌다. 그 상황을 즐기는 듯 나만 보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구역질이 났다. 참다못한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대충만얘기했다. 그런데 펄펄 뛸 줄 알았던 엄마가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수영을 가르치다 보면 그 정도는 어쩔 수 없는데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것이다. 억울했다. 자세히얘기하려면 재연을 해야 했는데 그건 너무 수치스러웠다. 다시는 수영을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엄마는 돈이 아깝지도 않느냐며 등짝을 때렸다. 하지만 그놈 얼굴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아직도 수영을 못하는 건 순전히 그놈 탓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한 달 가까이 집수리를 하던 중이었다. 어른을 공경하는 착한 학생으로 교육받은 우리 형제들은 학교를 다녀오면 일하는 분들에게도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곤 했다. 하루는 그중 목수 아저씨 한 명이 오냐, 잘 갔다 왔냐하면서 내 엉덩이를 잠시 만졌다 놓았다. 툭 한 번 친 게 아니다. 잠깐이지만 분명히 움켜쥐었다’. 이번엔 내가 당한 일이 어떤 건지를 확실히 알 만한 나이였다. 너무 분한 나머지 경련이 일면서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결국 저녁 밥상에서 내가 당한 일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 편은 없었다. 딸 같아서, 이뻐서 그런 걸 가지고 계집애가 까탈맞게 군다.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놈보다 부모님이 더 미웠다.

스무 살 이후로도 여자로 태어난 죗값을 끊임없이 치러야 했다. 신체적 성희롱이 드문드문 겪는 일인 데 비해 언어폭력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일일이 맞서기도 피곤할 정도였다. 술 마시러 가자 할 때 볼일이 있어 빠진다고 하니 여자가 없으면 술맛이 나냐고 말하는 선배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항의하면 농담 가지고 뭘 그리 무섭게 덤비냐며 달래는 그들은 평소에 여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보통의 평범한 남자들이었다. 이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지만 매번 싸울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속에서는 천불이 났지만 번번이 쎄게대응하는 피곤한 여자로 살 용기도 없었다.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남자 선배가 여자 선배의 뺨을 때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남자 선배는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싸우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키가 작고 생김새도 순해 보이니까 나를 만만하게 보나 싶어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로 보이려고 애를 썼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면 단단해 보여야 했다. 그 대가로 턱관절장애를 얻었다. 강해 보이려고 이를 꽉 다물고 다닌 결과다.

▲ 사진_ Prentsa Aldundia

이런 얘기를 하면 두 가지 반응을 보게 된다. 여자들은 어쩜 너나없이 그렇게 비슷한 경험이 많으냐며 놀란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일들은 너무 흔해 새삼 얘깃거리도 안 될 정도라는 여자들의 말에 놀란다. 이런 경험이 얼마나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면 더 놀라겠군. 내 경우에는, 성적(性的)으로 결벽증이 생겼고 그로 인해 결혼 생활이 힘들었다.

오랫동안 혼자 담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 놓으니 새삼 분이 끓어오른다. 골목길에서 큰일 날 뻔했던 일, 전철에서 당했던 일 등 미처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떠올라 더 분하다. 이럴 땐 상상으로나마 복수를 한다. 죄질이 특히 나쁜 초등 담임을 불러내야겠다. 어떻게 복수하는지는 나만 아는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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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2월호

년으로 살아가기

 

배달이요

야채죽(필명)/ 배달 대행 기사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곧이어 누구세요?” 하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대답을 합니다.

배달이요.”

저는 배달 대행 기사입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 기사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배달 대행은 도시빈민들이라는 말입니다. 돈이 없어서 빈민이 아닙니다. 보통은 400, 500만 원씩, 흔치는 않아도 1000만 원씩 가져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하는 노동자와 하나도 다를 것 없이, 그저 가게 밖에서 서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에는, 우리는 여전히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 없어서 오토바이나 타는, 안전을 위해 헬멧을 써도 보안상의 이유로 헬멧을 벗어야 하는, 배달시키는 사람들의 편의와 위생을 위해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하층민일 뿐인 듯합니다.

왜 배달을 하냐는 말에는 어쩌다 보니, 라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생이었다가, 직업 군인이었다가, 족발집 사장님이었다가, 배달 기사가 되었습니다.

스무살,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은 했지만, 12년 동안 죽어라 외우고 익혔던 교과서는 전공이라는 큰 벽을 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공부가 재미없고, 성적도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학업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부사관으로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스무살의 여름 훈련소에서부터 11월의 임관식, 이후 약 5년간 직업 군인으로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에 열심히, 묵묵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명감만으로는 평생 군인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4년간의 의무 복무가 끝나고, 장기 복무가 아닌 3년의 연장 복무가 결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진급할 수 있는 사람은 1명뿐이었지만, 나만큼 열심히, 나보다 더 오래 노력한 사람들은 7명이나 되었습니다. 평생 군대에 말뚝을 박고자 대학을 포기했던 저는, 다시금 군 생활을 포기하고 전역을 선택하여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5년간의 복무 끝에는 5년간 모인 적금과 퇴직금이 남았습니다. 전역 간부에게 주어진 취업의 기회도 있었지만, 사무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컴퓨터만 보는 업무에 적응할 수 없어 얼마 가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무작정 쉴 수만은 없어서 친구의 부모님이 하시는 족발집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직원 세 명이 삶고, 썰고, 배달까지 하는 작은 가게였지만 꾸준히 손님이 찾는 맛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친구와 함께 돈을 모으고 약간의 대출을 받아 신림동 어느 한 가게에서 족발집의 사장님으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사도 잘되고 배달 주문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매출이 높은 날엔 하루에 300만 원씩 팔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만 장사가 되면 아무 걱정 없이 대출금도 갚아 나가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장사는 쉽지 않았습니다. 점차 매출은 줄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돈은 겨우 2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동업을 제안했던 친구가 먼저 포기 선언을 하고, 혼자만으로는 역부족이었기에 아쉽지만 저 역시 족발집의 꿈은 그곳에서 내려놓았습니다.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것은 3000만 원 가까이 되는 대출과 작은 전세방, 오토바이 한 대 뿐이었습니다.

폐업 이후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25살이지만, 배운 것이라고는 총을 쏘거나, 병사들을 지휘하거나, 족발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고, 경력 또한 별거 없는 고졸 청년에게 선택지는 월급 150만 원 정도의 일자리뿐이었습니다. 보통의 직장으로는 대출을 갚으며 생활을 꾸려 갈 수 없다는 판단에, 결국 남아 있던 한 대의 오토바이로 장사할 때 함께했던 배달 대행업체의 기사로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햇수로 5년차, 전업 배달 기사로 4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걱정하던 3000만 원의 빚은 1년 만에 정리할 수 있었고, 아직 절반은 은행의 것이지만 작은 내 집도 마련했습니다. 중간에 잠시 위험 부담이 높은 배달 기사보다는 안전을 찾아 회사를 다닌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수입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근무가 그리워 어느새 배달 기사로 돌아왔습니다. 큰 사고를 겪어 후유증이 남아도 어느새 익숙해진 생활은 다시금 배달을 하게 합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가족, 여자 친구에게도 숨겼던 배달 기사라는 직업이, 이제는 어딜 가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천직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겪었던 실패들은 이제 다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이 경험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만나게 되는 다양한 손님과 상점 직원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여러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줍니다.

배달 기사로 첫 여름, 한 대학가에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학생들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학교 다닐 때 얼마나 놀았으면 저렇게 배달이나 하고 다닐까?”

제 딴에는 저에게 들리지 않게 친구 귓가에 작은 소리로 얘기했겠지만, 배달 기사라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당시의 저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소심하게 한마디 하는 것으로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여러분이 다니는 대학교보다 더 들어가기 힘든 대학교 다녔어요.”

그분들을 다시 만나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서 배달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직업을 선택해서 준비하고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처럼 저도 이 직업을 선택해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은 사회적인 인식이 부족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점차 나아지는 것을 체감합니다. 전에는 추운 날 음식이 식었다고 타박을 듣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꽤나 자주 추운 날씨에 배달하느라 고생하셨다는 한마디를 듣습니다. 전에는 빨리오세요라고 하시던 손님들이 이제는 안전 운전하세요라는 말을 건네줍니다. 2019년 새해를 맞아 아주 조금이지만 더 나아졌다는,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초인종을 누릅니다. 누구세요?”라는 질문에 수천 번, 수만 번 했던 대답을 다시 되풀이합니다.

배달이요.”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년 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시래기 만찬

윤혜신/ 밥 짓고 꽃밭 가꾸는 시골밥집 미당주방장, 착한 밥상 이야기저자

 

 

먹고, 입고, 자는 것 중에 (이게 살림살이인데)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 보면 단연코 먹는 일이 우선이다. 옷이야 서너 벌로도 살 수 있고 집이야 내 몸 눕힐 한 평만 있으면 되지만 먹는 일은 하루 세끼 꼬박꼬박 안 먹어 주면 살 수가 없다. 내가 학창 시절에 종교적인 이유로 금식이라는 걸 몇 번 해 봐서 잘 아는데 하루, 이틀, 사흘···. 이 사흘째가 되면 아주 죽을 맛이다. 살맛이 안 나면서 기운은 기운대로 쪽 빠지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첩에 금식이 끝나면 먹어야 할 음식 목록을 적는 일이다. 그러다 금식이 풀리면 보식이라고 멀건 풀띠죽 한 그릇에 동치미 한 보시기를 먹는데, 그게 뭐라고 먹고 나면 어디서 그런 힘이 샘솟는지, 기어갔다가 뛰어온다. 밥 아니 죽 한 그릇에 사람이 죽었다 살았다 한다. 올해는 그래서 먹는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한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푸성귀들은 비실거리고(온실 재배) 비싸지고 제맛도 안 나니, 나는 봄부터 가으내 잘 갈무리해 두었던 먹거리 주머니들을 슬슬 풀어 본다. 마른 채소들, 마른 나물들이 제일 많다. 그중에서도 김장 때 빨랫줄에 척척 널어 말린 무청 시래기가 많으니 그걸로 별미를 만들어 보려고 가져와 삶기 시작한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무기질과 비타민, 5대 영양소까지 배웠고, 요즘은 하나 더해서 6대 영양소가 섬유질이다. 시래기는 그야말로 별 영양가가 없는 거렁뱅이 음식으로 취급되다가 요즘처럼 생활습관병이 젊어서부터 생기는 영양 과잉 시대에 꼭 필요한 필수 영양 식품이 되었다. 그러니 겨우내 이 시래기를 맛나게 먹고 내장과 혈관의 나쁜 기름을 쭉쭉 씻어 내자.

정월 대보름에 먹는 나물에 시래기나물이 빠지지 않는다. 나물로 볶아 먹어도 맛나지만 나는 요즘 뻑하면 시래기를 푹 지져 먹는다. 시래기에 된장을 넉넉히 풀고 멸치와 다시마도 한쪽 넣어 물을 넉넉히 잡고 한 시간 뭉근히 끓이면 국물이 잘박하게 졸아든다. 이때 파, 마늘, 고추 같은 양념을 더하고 마지막에 들깨 가루와 들기름을 넣어 간을 맞춘다. 시래기지짐 한 냄비 끓여 놓으면 당분간 반찬 걱정이 없다. 갑작스레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들에게도 뚝배기에 바글바글 데워 주면 게눈 감추듯이 뚝딱 먹어 치운다. ‘밥 한공기 더!’를 외치며, 어디서 이런 맛난 시래기를 먹느냐면서.

이 시래기가 또 효자인 게, 어디에 넣어도 순둥순둥 잘 어울린다. 딱히 반찬이 없을 때 숭숭 썰어 된장, 들기름, 마늘, 국간장에 주물주물 무쳐서 밥할 때 얹어 밥을 지으면 시래기밥이 된다. 여유가 있으면 그 안에 홍합도 넣고 조갯살도 굴도 넣는다. 나는 입맛이 워낙 촌스러워서 해산물보다는 멸치 서너 마리 넣고 시래기 듬뿍 올려 밥을 지어 먹는 걸 더 좋아한다. 간이 조금 싱겁다면 양념간장을 살짝 넣고 비벼도 좋다. 겨울이라 미나리를 종종 썰어 미나리양념장을 만들면 향긋하니 입맛이 돈다. 우리 집 개골창에 요즘 미나리가 한창이다. 신기하게도 날이 추워지면 미나리가 더 파랗게 올라온다. 겨울엔 상록수 빼고 파란 건 보리와 미나리다. 식당 일은 보통 2시가 넘어야 끝나니까 우리 일꾼들과는 2시에서 3시 사이에 점심을 먹는데, 그즈음엔 배가 한창 고플 때라 뭔들 맛있지 않겠냐 마는, 뜨끈하게 시래기지짐이나 시래기밥을 해서 둘러앉아 먹으면 일하면서 생기는 작은 불만들이 다 녹아 버린다.

내가 시골에서 밥집을 15년 하면서 밥집 운영의 철칙 중 하나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다이다. 그러니 우리 일꾼들의 밥 한 끼는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같이 먹자는 거다. 그래서 손님 찬보다 일꾼들 밥을 뭐 해 먹일까가 그날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다. 매일 음식을 만들어 서비스하는 일꾼들인데 스스로가 남은 거, 식은 거, 맛없는 거, 싸구려를 먹는다면 어찌 맛난 음식을 만들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해 준 점심을 다들 기다리고 좋아한다. 정성껏 지은 밥을 먹고 나면 시시콜콜한 불만들이 사라지고 섭섭함도 사라진다.

나도 조금 힘들었다가 일꾼들이 맛있게 먹어 주면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 밥집 일꾼들은 14, 10, 6년씩 오래 일하는 편인데,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하면 아마도 점심이 맛있어서가 아닐까 한다. 맛있게 먹다 보면 이런저런 얘기가 자연스레 나오고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바쁜 여름에는 아르바이트학생을 쓰는데, 학생들 말이 여기는 밥이 맛있어서 자꾸 일하고 싶어요.’ 한다. 내 계획이 딱 맞았다!

모두들 이 시래기지짐을 먹으면서 어지간한 고기반찬보다 낫다고 한다. 시래기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음식 중에 시래기부침개가 있다. 시래기를 무르게 잘 삶아 밑간을 하고 거기에 밀가루를 넣어 반죽을 하는데, 국간장과 들기름을 약간 넣어 지지면 구수한 별미전이 된다. 생선을 조릴 때에도 밑에 시래기를 깔고 고기찜을 할 때도 시래기를 밑에 깔면 먼저 손이 가게 된다. 맛이 하나도 없는 시래기가 요리의 주인공이 된다.

여기 충청도에서는 무청을 안 버리고 그대로 소금과 고추씨를 넣어 비벼서는 아주 짜게 강짠지식으로 김치를 담갔다가 5월이 되면 꺼내서 하루 이틀 짠 기를 빼고 쌀뜨물에 들기름을 넣고 푹 지져 먹는 꺼먹지라는 게 있다. 올겨울엔 시래기 많이 말리느라 꺼먹지까지는 못했는데 돌아오는 겨울에는 꺼먹지도 한 항아리 담가 날이 더워질 때 꺼내 먹어야겠다. 나이 드니 이런 짠지같이 오래된 반찬이 좋아진다. 사람도 음식도 은근히 오래 묵은 게 구수하고 소화가 잘된다.

 

 

 

* 시래기지짐

재료: 삶은 시래기 600그램

양념: 멸치 10마리, 다시마 10x10센티미터, 된장 3큰술, 대파 1, 마늘 1큰술, 들깨 가루 3큰술, 들기름 1큰술, 고추씨 1/2큰술(청양고추 1~2)

 

만들기

1. 삶은 시래기를 깨끗이 씻어 5센티미터 길이로 잘라 냄비에 넣는다.

2. 물을 넉넉히 붓고 멸치, 다시마, 된장을 풀어 넣고 중약불에서 40분 정도 푹 끓인다.

3. , 마늘, 고추씨(고추), 들깨 가루 넣고 잘 섞어서 다시 한소끔 끓인다.

 그림_ 이동수


* 시래기밥

재료: 삶은 시래기 200그램, 3

양념: 된장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들기름 1큰술,

국간장 1큰술

양념장: 간장 2큰술, 2큰술, 다진미나리 2큰술, 고춧가루 1작은술, 들기름 1작은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만들기

1. 쌀 위에 양념에 무친 시래기를 올려서 밥을 짓는다.

2. 뜸을 잘 들이고 풀 때 고루 섞는다.

3. 양념장과 곁들인다.

 

 

* 시래기전

재료: 삶은 시래기 200그램, 통밀가루 2, 11/2, 통들깨 3큰술

양념: 국간장 1큰술, 들기름 1큰술

 

만들기

1. 삶은 시래기는 종종 썰어 밑간을 한다.(국간장 1큰술, 들기름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2. 밀가루에 물과 통들깨, 국간장과 들기름을 넣고 부침개 반죽을 고루 섞은 다음 밑간한 시래기를 넣고 고루 섞는다.

3. 식용유와 들기름을 반반 섞은 기름을 팬에 두르고 한 장씩 노릇하게 지져 낸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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