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작은책
'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작은책> 20206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지원품, 고맙지만 작은 배려를 해 주면 좋겠다

 

정미영(가명)/ 보험설계 상담

 

보험대리점에서 설계와 상담을 담당하고 있는 나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다. 업무 특정상 매달 마지막 주가 되면 몰려드는 설계 건으로 각 보험사의 전산과 사투 아닌 사투를 벌인다. 특히 거절된 심사 건이 발생하면 예민해진 신경을 부여잡고 고객에게 필요한 자료를 설명하고 요구하여 재심사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몸과 마음이 더 지치게 된다. 그래서 어렵게 승인 나면 다행인데 그럼에도 인수 거절 나면 고객에게 좋지 않은 소리까지 듣게 되기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솔직히 화도 난다.

어느 날, 여러 보험사에서 거절 난 심사 건으로 팀장님과 한창 대화 중일 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민센터다. 우리 가족 앞으로 쌀이 기증되었으니 신분증을 가지고 방문하란다. 너무 바빠서 당장 가기가 어렵다는 말로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그 짜증은 나와 같은 기초생활수급자를 위한 정책에 대한 아쉬움으로 변해 갔다.

남편과의 사별로 갑자기 한 부모가 된 나는 세 자녀를 키우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부분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나라에서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여러 가지 혜택을 주는 건 너무나 감사할 일이다. 월급에 비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임대료를 지원해 주거나, 의료비·교육비 등의 지원은 소득이 많지 않은 나에겐 너무나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문화누리카드 같은 것은 작게라도 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책을 구입하는 등 다른 사람들과 구분 없이 문화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잘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정해진 시간 안에 사용하면 일정 기간 후 다시 충전되기에(물론 그 기간 안에 신분증을 가지고 주민센터에 가야 하지만 일 년에 한 번이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지원이 항상 감사한 건 아니다. 나는 회사에 고용된 상황이기에 정해진 업무 시간을 지켜야 월급을 받는다. 그렇기에 마음대로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쌀과 같이 무게가 있고 부피가 큰 지원품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나처럼 허리와 팔꿈치가 좋지 않은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수령할 수 있기에 매번 주변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또한 수급자나 차상위계층 등은 저렴한 가격에 쌀을 살 수 있고 구입한 쌀은 주민센터 직원이 배달해 주기 때문에 따로 지원된 쌀을 시간 내어 힘들게 가져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가끔 크리스마스 같은 때 각 단체(교회와 같은)에서 주는 과일 상자나 복지관에서 주는 라면상자 위에는 불우이웃돕기란 글귀까지 쓰여 있어서 부끄럽고 자존심도 상해 받기를 거부한 적도 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향해 배가 불렀군하며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내가 불우이웃인 것을 타인에게 알리면서까지 지원품을 받아야 하는지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요즘 쌀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쌀과 라면이 아닌 누구나 평범하게 누리는 문화적인 혜택을 더 받았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여느 가정의 아이들이라면 기본으로 한다는 피아노나 태권도 등을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준다거나, 아이가 배우고 싶은 것 중 하나 정도 선택하여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거나, 지금 이용하고 있는 문화누리카드의 한도액을 올려 주고 이용 기관을 늘려 아이들과 여가 생활을 지금보다는 풍요롭게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좋겠다(주말 외엔 시간 내기가 어렵고 대중교통으로만 이동 가능한 내가 그나마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영화관을 이용한다거나 책을 구입하고,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여유를 조금이라도 누릴 수 있는 건 문화누리카드가 있어서이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는 가정이라면 한 부모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양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 인력을 배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데 아이가 아프다는 연락이 오면 제일 난감하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 주지 못한 아쉬움과 아픈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출근해야만 하는 형편이 속상해서 남몰래 눈물을 훔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끔 아이들이 지원받고 있는 드림 스타트에서 우리 가정과 같은 상황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가족 여행을 진행하는데, 이 시스템은 초등학생 때만 이용 가능하고 횟수도 일 년에 한 번 정도이며 모든 비용은 시에서 제공한다. 여러 여건으로 아이들과 여행가기가 어려운 나와 아이에게는 너무나 좋은 프로그램이다. 작년에 작은아이와 23일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참여한 아이들이 우리 아이와 비슷한 상황 속에 있는 아이들이고 함께한 보호자도 같은 상황이다 보니 위축되지 않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한 번이 아닌 두세 번으로 늘려 줘서 여느 가정들처럼 여행의 기쁨을 아이와 함께 많이 누리고 싶다.


▲저소득층 양곡 할인 안내 화면. 복지로 홈페이지 갈무리


쌀이나 라면과 같은 지원품을 주는 단체를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솔직히 준다는데 싫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다만 이러한 지원은 매달 일정 금액을 주고 사 먹는 양곡미를 배달해 줄 때 같이 배달해 주는 작은 배려를 해 주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지원품에 배려까지 더해진다면 그것을 받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감사함을 느끼며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posted by 작은책

서로 안고 크니까 그렇지(작은책 엮음, 작은책 펴냄, 2020)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서영란(가명)/ 서울 글쓰기 모임 회원

 

 

 

네가 지금 세금 받아 처먹고 앉아서 하는 일이 대체 뭐야! ? 여기 책임자 나오라 그래!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선생님, 죄송합니다. 지금 동장님이 안 계셔서요. 일단 여기 좀 앉으시고 고정하세요.”

, 됐어! 넌 됐고 동장 나오라 그래! 동장!”

내 일터인 주민센터 민원실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속사정은 이렇다. 신분증 없이 서류를 발급해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도 통사정을 하면 본인 확인을 철저히 한 후에 서류를 떼어 준다. 그런데 인감은 얘기가 다르다. 인감이라는 서류 자체가 워낙 재산 문제와 관련해서 많이 쓰인다. 함부로 발급했다가 사고 터져서 구상권 청구(다른 이의 빚을 갚게 된 사람이 그이에게 반환 청구를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연대 책임이 있는 공무원에게도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다.)가 들어오면 공무원은 그야말로 인생 조지는 거다. 보험에 들었다 한들 보상 금액이 얼마 안 되니 나머지는 월급에서 까 나가야 한다. 퇴직할 때까지 갚아도 못 갚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도 그렇지만 민원인은 민원인대로 다른 사람이 인감 도용을 해서 사고가 터지면 그거 해결하느라고 생난리가 난다. 있는 사람이야 덜하겠지만 가뜩이나 없이 사는 사람들한테 돈 몇백, 몇천만 원은 엄청난 금액이다.

상황이 이러니 인감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발급한다. 본인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해도 신분증 없이는 절대 안 되고 남의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하면 반드시 위임자 신분증이 필요하다. 이건 뭐 예외고 뭐고 없다. 간혹 가다가 도장만 가지고 와서 가족이나 다른 사람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래저래 해서 안 된다고 안내를 한다. 그러면 알았다고 하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생짜로 우기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들은 우기는 공식이 있다. 처음엔 웃으면서 한 번만 봐 달라고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슬슬 언성을 높인다. 그것도 안 되면 회유를 한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누구누구고 내가 어떤 사람이니 이번 한 번만 해 달라. 참 웃기지도 않는다. 아니, 지금 지가 누구인지가 왜 나오고 지가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또 왜 갖다 붙여.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이제는 완전히 본색을 드러낸다.

! 민원인 편의를 봐주는 게 공무원이지 네가 거기 앉아 있다고 공무원인 줄 알아? 세금으로 월급 받아먹는 주제에! 여기 책임자 누구야! !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도저히 이해를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저럴까 싶다. 속이 터져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인간이 왜 저러는지 알 것도 같다. 소리 지르고 높은 사람을 찾고 해서 안 되는 걸 되게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인 거다. 처음엔 안 된다고 해도 누구 이름 대면 다 되더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더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사회적으로 통하니까 그러는 거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앞뒤 가려서 융통성 있게 해도 되는 경우도 있지만 엄격히 지켜야 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지켜야 하는 거. 이런 사회적 합의가 없으니 저 지랄 아닌가 말이다. 올바른 사회라면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 그 원칙을 준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각자 손해를 좀 볼지라도 말이다.

머릿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간신히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고 있는데 이놈의 인간이 아주 끝까지 간다. 때마침 등장하신 동장님한테 가서 직원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아주 큰소리다. 그러면서 또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한다. 참 대단하다, 대단해. 으이구… ….

동장님이 부르신다. 인감을 다른 사람이 발급할 수 있냐고 물어보신다. 신분증하고 도장 지참하고 위임장 쓰시면 발급 가능하다고 수십 번도 더한 안내를 또다시 한다. 신분증 없이는 절대 안 되냐고 하신다. 당연히 안 되지. 될 거 같았으면 이 난리 피우기 전에 얼른 발급해 줘 버리지 뭐하러 이러고 있었을까. 관련 법을 가지고 오라고 하셔서 얼른 가지고 갔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 하니 동장님도 나랑 한통속이라 생각했는지, 길길이 날뛰던 민원인은 이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법이 꼭 그렇게 하라고 있는 거냐고 한다. 참 나 무슨 소리냐. 법이 그럼 지키라고 있는 거지 어기라고 있는 것인감? 물론 거지 같은 법도 많지만 인감제도는 인감 관련 사기가 하도 많아서 선량한 시민들 재산 지켜 주려고 점점 더 보호되고 강화되는 쪽으로 개정되고 있다. 사실 인감 제도가 없어져도 좋으련만 없어질 때까지는 인감 사고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대체 당신은 어찌하여 이러시는 게요. 이보시오. 제발 좀 그만하시고 돌아가시오!

결국 그 민원인은 화를 내 봤자 본인 목만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끝까지 협박하며 대한민국 공무원들을 싸잡아 성토한 후 쿵쾅쿵쾅거리면서 주민센터를 떠났다.

워메, 정신없는 거. 맞아 본 적도 없는 폭격을 맞은 거 같다.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저런 사람들은 평소 복식 호흡에 발성 연습을 하나 보다. 무슨 연극배우 같다. 귀가 왕왕 울린다. 둘레에선 그래도 위로랍시고 저 정도 민원은 아무것도 아니야. 몇 날 며칠을 찾아오는 민원인도 있고 앞으로 공무원 생활하다 보면 더 심한 사람도 많이 만나니까 잊어버려 하고 한 술 더 뜬다. 저 정도는 애교라 이거지. 으이구, 내 팔자야. 아무래도 도를 닦든지 해야 쓰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민원인들은 하나둘 찾아오고 주민센터는 다시 북적댄다.

우라질 놈의 인감. 없어진다더니 그게 대체 언제냐고.’

괜히 애꿎은 인감한테 구시렁거리면서 마음을 다잡고 일에 몰두하려고 하는데 뉴스에서 공무원들이 저지른 비리 소식이 흘러나온다. 자기네끼리 몇 년 간 뇌물을 얼마를 받아먹었고 그 대가로 누구를 봐주고 관련 사업은 부실이 되고 어쩌고저쩌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도 줄줄 푸념과 욕지거리가 새어 나온다.

도대체 저런 인간들은 뭐하는 인간들이냐. 확 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돼. 삼대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해야 된다니깐. 나라가 어찌 되려고 공무원들이 저 모냥인지. 아주 내가 낯 뜨거워서 어디 가서 공무원이라고 하고 다니지를 못하겠다. 몽땅 감옥에 처넣고 재산 환수를 해야 돼. 아니지, 먹은 돈의 세 배를 갚게 해야 된다니깐. 근데 뭐가 어쩌고저째? 고작 구속 수사? 씨발, 대통령 나오라 그래!”

 

<서로 안고 크니까 그렇지 본문 , 작은책 2011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_ 교장 일기

 

늦고 싶어 늦는 아이는 없다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다섯, 교실이 아니어도 좋아저자

 

 

9, 정문 닫을 시간이야. 3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게 보여. 눈에 보이는 아이 놔두고 문 닫는 게 매정하다 싶어 기다렸지.

문 닫는다.”

고개 들어 나를 잠깐 보는 것 같더니 다시 느릿느릿.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하며 지각인 거 모르냐. 얼른 와라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밀고 올라오는 걸 꿀꺽 삼켰어. 잔소리한다고 지각 안 하면 맨날 잔소리하게.

아침은 먹었니?”

아뇨.”

들어가면 우유라도 미리 먹어. 담임선생님께 아침 못 먹었다고 말씀드리고.”

싫어요.”

이왕 늦은 거 천천히 올라가. 넘어질라.”

고개 숙인 채 그 걸음걸이 그대로 걸으며 하는 말에는 귀찮음과 어두움과 건조함이 느껴져. 아침맞이 때마다 아무리 아는 척해도 눈길 주지 않고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고개 숙이고 혼자 입을 꾹 다물고 등교하는 녀석.

지각하는 아이들만 보면 나도 모르게 불쑥 올라오는 말을 안 하도록 만들어 준 아이가 있어. 아현초등학교에서 5학년 담임할 때 만난 민선이. 민선이는 거의 날마다 지각을 했지. 수업 시작하는 9시에 오면 아주 훌륭한 거고, 1교시 중간이나 2교시, 가끔은 3, 4교시에 오기도 했는데 다행히 결석은 안 해. 우울한 얼굴에 말수는 적고 아이들과 즐겁고 맛있게 어울리지도 않아. 혼자 책 읽는 시간이 많고.


녀석이 늦을 때마다 그저 누구나 습관적으로 하는 말을 했어. 늦었구나.”, 조금 일찍 다녀라.”, 날마다 늦으면 어떻게 하니? 자리에 앉아서 얼른 수업 준비해.”, 내일부터는 조금 일찍 오도록 해 봐.” 내 표정과 말투가 좋을 리 없지. 가끔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물어보지만 민선이는 아무 말 안 했어. 그냥 늦게 자서 그런다는 말을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 마음을 안 연 거야.

그렇게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5월 하순. 2교시 수업을 하다 우연히 창문 밖을 보니 교문으로 들어서는 민선이가 보여. 2학년 여동생 손을 잡고 쪽문으로 들어서더니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텅 빈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야, 꽤 오래.

그 순간 나는 민선이가 되었어. 아무도 없는 운동장, 멀리 교실에서는 수업하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 조용하고 차분하고 엄숙한 학교. 나와 동생만 뚝 떨어져 있어. 저 학교 건물 안에 있는 아이들은 우리 둘과는 달라. 아이들과 선생님은 내게 관심도 마음도 없어. 나는 날마다 늦는 아이고 친구도 없고 옷은 꾀죄죄하게 입고 다니는 그런 아이. 그래도 나는 교실에 가야 해. 따로 갈 데가 없고 집에 있는 건 더 싫고 무섭기까지 해.

언니 손을 앞뒤로 흔들며 까부는 동생에게 무거운 표정으로 별 감정 없이 몇 마디 던지는 민선이. 축 처지고 지치고 무거운 저 발걸음에서 또래 다른 아이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고단함이 묻어나. 한 걸음 한 걸음이 아픔이고 슬픔이야. 집에는 어떤 사정이 있기에, 아침저녁 그리고 밤에 어떤 분위기와 흐름이 있기에 저렇게 어두운 얼굴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오게 될까. 지각할 때마다 저 지친 발걸음으로 등교했을 텐데.

도대체 나는 뭘 위해 선생을 하지? 내가 사람을 본 거야, 아니면 껍데기만 보고 매달려 사는 거야. 담임으로서 민선이의 저 삶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식이나 욱여넣고 규칙 잘 지키는 사람 만들겠다고 잔소리나 하다니. 아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모습을 그려 놓고는 거기에 맞춰 남녀노소 교사든 아니든 누구나 습관적으로 할 수 있고 하는 잔소리나 하고.

그 뒤로 민선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녀석은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민선이가 아침저녁으로 동생과 밥을 차려 먹는다는 것까지만 알았지. 집안의 흐름과 사는 형편은 그냥 짐작만 했고. 민선이에게 말했어. 늦어도 내게 미안한 마음 갖지 말고 당당하게 들어와라. 학교에 오는 것만으로도 너는 큰 공부 하는 거다. 대신 수업 흐름만은 따라가자. 늦어서 못 한 건 친구들이나 내게 물어서 해 가자. 밥을 못 먹고 올 때는 미리 우유를 먹도록 하고.

난 아이들에게 말했지. 부모님이 일찍 일하러 가셔서 민선이가 아침밥 차려 먹고 동생까지 챙겨서 온다. 어른도 힘들어하는 어려운 일이다. 어찌 보면 늦는 게 당연하다. 밥 먹고 동생 챙겨 학교 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공부니 민선이가 늦는 거에 대해서 너무 마음들 쓰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비슷한 어려움으로 늦는 사람은 말해 다오.

그러고는 민선이가 당당하게 늦도록 했어. 이상한 아이, 늦는 아이, 게으른 아이라는 어두움을 걷어 내고, 대신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하며 손이 야무진 아이 이미지를 만들어 갔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도록 자리 배치부터 모둠 구성, 현장 학습과 반에서의 역할 등도 신경 쓰고. 늦었다고 잔소리하는 일은 없었어. 오히려 늦게 오면 수업 중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멋지다고 했고. 그런데 지각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줄었어. 나중에는 840분 전에 오기 시작했고 6학년 올라갈 무렵인 2월 어느 날 아침엔 내게 와서 말하기도 했어.

선생님! 오늘 우리 반에서 가장 먼저 왔어요.”

그렇게 6학년으로 올려 보냈고 그해 스승의 날에 민선이로부터 편지를 받았어.

선생님, 오학년 때 지각해도 야단치지 않고 기다려 줘서 고맙습니다.”

지각하거나 공부 못 하는 게 삶의 목표인 아이는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모르고 사는 나를 깨우쳐 준 민선이! 난 지금도 늦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안 해. 하더라도 아이에게 맞게 하려 노력하지. 민선이가 지금은 서른 살 되었겠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코로나19! 에잇! 코로나18!

신혜진/ 시간제 댄스 강사

 

  

나는 방송 댄스, 줌바 댄스, 키즈 댄스 등등 수업을 진행하는 시간제 강사이다.

오전 수업 한 곳만 더 뚫었으면 좋겠다.’ 하는 찰나에 설날 즈음 아파트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줌바 댄스 수업을 맡게 되었다. 새해부터 이게 웬일이냐며 올해 운수가 좋음을 느끼는 하루하루였다. 아직 신규 수업이라 회원은 별로 없었지만 서서히 늘려 가리라 열정을 다해 열심히 했다. 하지만 2월 초부터 기존에 하던 수업들이 하나하나 중단이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그저 손 잘 씻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면 마스크를 꼭 쓰자 뿐이었다. 코로나19를 그냥 무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점점 확진자, 격리자 심지어 사망자가 늘어 가면서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수업을 진행하는 센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종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따른 주민자치 프로그램 수강료 일시적 환불 규정을 안내 드립니다라는 문자로 시작해 하루 사이에 주민센터, 문화센터가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천시, 구에 해당하는 곳들이다. 그러다 또 며칠 뒤 개인사업자인 피트니스센터도 영업을 중지했다.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신천지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수업이 중단되었다. 솔직히 신천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종교에 있어서 누구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조금 신경이 쏠렸다. 보는 뉴스마다 신천지 이야기가 나오고 단체 카톡에는 코로나 확진자 그리고 신천지 이야기뿐이었다. 신천지 31번 확진자가 나온 후로는 위에서 지령이 내려와 그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반 교회에 가서 코로나를 전파하라, 그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아무 집이나 가서 구하기 힘든 마스크를 무료 나눔을 한다 하고 바이러스를 옮겨라 등등 너무 소름이 끼쳤다. 물론 그게 실화라면 말이다. 정말 재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또 사건이 터졌다. 천안 줌바 강사가 확진자로 나온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포인트는 줌바 강사라는 것이다. 그냥 댄스 강사라고 해도 되는 것을 줌바 강사라고 기사가 뜬 것이다.


그래서 줌바 강사들 모임에도 비상이 걸렸다. 회원들은 천안 모임에 갔었냐 물어보기 일쑤였다. 천안에서 교육을 받았던 강사들의 명단을 보건당국에 넘기고 모두 검사를 받았단다. 확진자가 많은 대구 쪽 강사들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그 외 모든 강사들은 음성으로 나왔단다.

기자들은 기사를 올려 이슈화를 시켜야 하므로 자꾸 줌바를 엮어 글을 올리는 것 같다. 그래서 다수의 선생님들이 방송사에 항의 전화를 했다. 완전히 다 고쳐지지는 않았지만 줌바 강사에서 에어로빅 강사, 댄스 강사라고 바꾼 곳이 있었다. 아니 그런데 왜 또 에어로빅이냐! 한숨만 나온다. 확진자 강사도 많이 힘들 것이다. 너무 속상하다.

코로나19 때문에 가장 큰 일은 백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시간제 강사들은 지금 모두 강제 백수가 되었다. 우리들은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파트타임 운동 강사들도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으면 합니다.”

주민자치센터 외 공공 기관에서 수업하는 모든 강사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거 없이 서로 공유를 하며 동의를 받아 냈다. 현재는 동의자가 만 명이 훌쩍 넘어 청원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인천평생학습강사회에서도 인천시청에 휴업수당 지급요청 면담도 신청했다고 한다.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한다. 단기 알바라도 하고 싶지만 요즘 상황이 그런지라 선뜻 잡히는 곳이 없다. 내가 벌어 쓰던 용돈이 있기에 더 간절하다. 전에 일했던 피자집에 전화를 해 볼까 한다.

수업을 못 하니 몸도 굳는다. 운동을 하고 싶다. 춤을 추고 싶다. 며칠 전에는 아직 수업을 진행하는 주변 선생님 수업에 가서 돈을 내고 하루 청강을 하기도 했다. 땀도 많이 안 나고 돈이 아까웠다. 내가 수업을 하면 돈도 벌고 더욱 상쾌할 텐데 말이다. 살이 찐다. 움직임이 덜 하니 진짜 뱃살이 늘어난다. 입이 늘 심심하다. 몸도 늘어진다. 방학 중인 학생처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매일 출근하는 남편에게 괜히 미안하다. 눈치가 보여서 뭐 하나라도 더 챙겨 주게 된다.

문득 생각이 난다. 매일 아침 반가운 회원들이 있는 센터에 가서 맛있는 모닝 율무차 한 잔. 힘들다고 하면서 수업 시간 50분을 잘 버텨 주던 그들. 서로의 모습을 보며 깔깔대고. 수업이 끝나면 점심 먹고 차 마시며 수다 떨자는 그들. 생각이 난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듯 평범했던 일상들이 지금은 특별한 일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리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19, 어서 없어져라.

에잇! 코로나 18! 꺼져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2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북상댁 할매가 돌아가셨습니다

김훈규 / 거창 농부


 

북상댁 할매가 돌아가셨다

몇 년을 병원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할매 수십 년 농민 데모판을 따라나섰던 할매다

여성 농민들 행사나 데모하러 가도 착실히 참석했던 할매다

농민회 하는 자식 도와주는 거는 이것밖에 없다며 자식보다 더 열심히 데모하러 다닌 할매다

자식이 데모 못 가면 자식 대신 해서라도 참석하신 할매다

예비군 훈련 대신 참석했다는 노모 이야기는 많이 들어 봤어도 자식 대신 데모하러 가는 할매는 처음 봤다

그 할매가 북상댁 할매다

 

한칠레 FTA 싸울 때 1년에 서울을 100번도 더 오르락거릴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국회의원 사무실 점거 농성, 단식 농성 제일 많을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농민회 제일 살판나게 잘 돌아갈 때 제일 신명나게 싸울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북상댁 할매는 그럴 때마다 회원들 만날 때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많이 도와주소. 우리 아들.

단디 하소. 단디 하소. 자식 같은 농민회 회원들아, 단디 하소.”

야무치게도 당부를 하셨다

회원도 간부도 아닌 할매는 세상 돌아가는 처지를 더 빤히 알고 있었다

농민들이 농사 포기하고 자꾸 서울로 올라가는 이유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북상댁 할매 앓아눕고 나서 그 농민회장도 바깥출입을 끊었다

몇 년이 지나서

아직도 누워 계시려니 했는데

어제 세상을 버렸다 연락이 왔다

 

문상객도 파하고 상주도 한잔 술에 노곤한 야심한 시간에 장례식장을 찾았다

우리 엄마… 우리 엄마… 내 총각 때부터 자식 도와주는 짓이라고 데모하는 데 다 따라나서 준 우리 엄마. 도와주는 것보단 자식 걱정이 앞서 내보다 데모 더 많이 다닌 우리 엄마. 한미 FTA 싸움도 내보다 더 할 말이 많았던 우리 엄마. 그런 우리 엄마가 이제는 없소.”

 

소주잔을 사이에 두고

옛날 농민회장이 지금 농민회장 앞에서 반술 취한 넋두리를 한다

지금 농민회장은 옛날 농민회장 앞에서 고개만 끄덕인다

 

버스 타고 지독히도 서울을 오르락거리던 할매 할배들이

문디 같은 세상!”

외마디 부르짖고는 그냥… 자… 세상을 버린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농사일이 없어서

꿈적거릴 일이 없어서

그냥 방 안에서

보일러 끄고 전기장판만 켜고 자다가

세상을 버리는 할배 할매들이 너무 많다

기껏해야 대통령하고 비슷한 나이인데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맨땅으로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주라고

 

이지우/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7기 수료한 청년

 

2018, 어느 초여름 저녁. 이태원 고급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뜀박질하며 불판을 나르는데 주머니가 웅- 하고 울렸다. 끊기기 직전 겨우 받은 연락은 대박쌤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십 년 넘게 영어학원을 해 오던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던 애제자의 근황이 무척 궁금했던 것 같다. 특유의 호탕한 말투는 그날따라 근심이 가득했다.

너 평생 고깃집 같은 데서 알바만 하고 살 거냐?”

저한테 한 달에 칠십 이만 팔천 육백 원만 주실래요? 전 그 돈이 꼭 필요하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사회생활이다, 생각하며 꾹 참았다. 곧 찾아뵙겠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 대충 전화를 끊었다. 인생 참 뭐 같지만 한가롭게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오른쪽 귀에 무전기를 차고, 나는 다시 기름진 소음 속으로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돈 벌기(취업)돈을 벌 수 있는 공부하기(대학)였다. 은근슬쩍 대학을 권하는 부모님의 말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올 한 해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 보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정해진 시간표 아래 주어진 일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대신 내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떠돌다, 어딘가 잠시 머무르다 우연히 누군가와 만나는 일상을 상상했다. 청년 실업이니 뭐니 말이 많지만 대학과 취업 중 무엇을 선택해도 불안하다면, 나만의 길을 선택하고 불안해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이제 앞만 보고 달려갈 일만 남았다는 스무 살에, 나는 샛길로 빠져 멈춰 서 있다. 역사와 인문학 강의를 듣고, 출판 워크숍에 참가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일 년이 생겼다. 그렇게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주제 파악을 한 건 겨울도 채 지나기 전이었다. 듣고 싶은 강의는 이십만 원이 훌쩍 넘었고 모임이나 워크숍은 매달 참가비를 내야 했다. 부모님이 보내주는 생활비는 숙소와 밥, 교통비를 해결하면 딱 알맞게 없어졌다. 네 자릿수도 되지 않는 통장 잔고를 보며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이 곧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걸.

학력도, 경력도 없는 조무래기인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알바 앱뿐이었다. 이제 내가 하고픈 일을 하지 누가 시킨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당차게 첫걸음을 내디딘 지 불과 석 달 만에, 나는 시키는 일은 뭐든 척척 해내는 일꾼이 되었다. 투잡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날 밤 열두 시에 고깃집에서 퇴근하고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빵집에 출근하는 날들로 그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면 시간과 체력이 없어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했다. 대신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으면 인생이 그런대로 살 만했다. 나의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살겠다고 해 놓고서는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건 술이야!”라며 매일 음주가무를 즐겼다. 지갑에 구멍 난 것처럼 돈이 술술 나가면 또 악착같이 돈을 벌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최저 시급 인생이라 월 백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사장님 전화를 두 번 못 받았다고 다음 날 잘리고 같이 일하던 남자 동료들이 성매매 업소에 간 걸 항의했다가 잘리는 동안, 처음에 내가 상상했던 자유롭고 빛나는 스무 살은 점점 끝나 가고 있었다.

마지막 알바였던 연남동의 카페는 바싹 태워 먹은 원두를 씹은 것처럼 쓰디쓴 기억밖에 없다. 2층짜리 매장 홀과 바를 밤늦게 혼자 쓸고 닦는 것도 버거웠는데, 자동 세척기는 컵을 넣기만 하면 깨트려서 일일이 설거지해야 했다. 그러자 매니저가 그냥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쓰라고 했다. 텀블러와 스테인리스 빨대를 챙겨 다니던 나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구를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멈춥시다!’ 외치는 사회 활동가는 못되어도 내 손으로 사람들에게 플라스틱 컵을 건네주는 건 못할 일이었다. 대신 사람을 더 뽑아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매출을 늘려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평소 윤리적인 이유로 모든 동물성 재료를 소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바를 할 때는 맛있는 라떼와 예쁜 골든와플을 만들어야 했다. 더 많은 사람이 사고 먹어서 더 많은 젖소와 닭이 희생되어야만, 내가 조금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된다니.

손님이 몰려 한 시간이나 마감이 늦어진 날, 지칠 대로 지쳐 펑펑 울며 애인에게 말했다. 나는 우유와 계란을 팔고 플라스틱과 비닐을 남겨서 돈을 벌고, 이제 진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학생이에요? 직장인? 둘 다 아니에요? 그럼 뭐하세요?”

대학과 취업이 전부인 사회에서 그 둘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나는 아무것도 아닌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조차 나를 소개할 말을 몰라 그냥 하고 싶은 거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라고 얼버무렸다.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런 순간들이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사실 너도 잘 모르겠지? 하고.

이런 일상으로 이 년째 살아오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언제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먹고살 궁리를 하면서 나의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 수 있는지.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지.

나 같은 요즘 젊은 것들을 보고 한참 전에 젊음이 끝난 사람들이 혀를 쯧쯧 찬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라고 닥치는 대로 일단 부딪혀 보라고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맨땅에 헤딩해 보라고.

하하, 큰일 날 소리. 그러다 머리 깨지는 수가 있는데. 여러 번 시도해 보는 건 여러 번 실패해도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한 번의 시도에 모든 걸 걸고 한 번의 실패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왜 모를까. 맨땅으로 자꾸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줬으면 좋겠다. 이거 쓰고 몇 번이고 시도해 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이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이놈의 마스크를 어째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일곱, 내 길을 간다저자

 

마스크 쓰시고 하이 파이브도 하면 안 돼요.”

개학을 앞두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책 회의 때 교감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을 떠올리며 마스크 쓰고 아침맞이하러 나섰어. 답답하지만 어쩌겠어. 어제로 확진자 15, 하루 새 3명이 늘어나고 중국에서는 사망자가 하루에 수십 명 나오는 판인데 천 명이 넘는 아이들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바이러스 숙주 노릇을 한다면 어째. 가능성이야 낮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방역하느라 이 난리잖아.

마스크를 쓰고 아침맞이를 하니 숨 쉬기 불편한 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아이들 표정을 못 보니 답답해. 마스크로 가려도 어느 정도 누구인지는 알겠는데 누구인지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오늘 이 순간 아이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 답답한 거지. 마치 아이와 나 사이를 콘크리트 벽이 막고 있는 것 같아.



아침마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들, 이 아이들의 모든 게 내겐 자극이야. 표정, 몸짓, 가방, 온갖 준비물, 옷 심지어 머리카락까지도. 온몸이 자극이지. 그리고 혼자 오는지 누구랑 함께 오는지도. 아침맞이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그 까닭은 바로 이런 아이들의 자극이 짧은 5초 안팎의 순간에 날 건드리기 때문이야. 아이들이 일으키는 자극 안에 담긴 많은 이야깃거리가 내 생각과 상상력을 흔들거든.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것, 살면서 특히 교직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이 스멀스멀, 불쑥 솟아오르도록 건드리거든.

그런데 아이들과 나 모두가 마스크를 쓴 오늘은 이 자극이 달라. 미세먼지가 안 좋을 때도 마스크를 쓰지만 이렇게 모든 아이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온 적은 없지. 그동안의 아침맞이 때와는 달리 아이들이 내 가슴에 확 들어오질 않아. 멀리서 걸어오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벌써 아이도 나도 표정이 달라지고 마음에 물결이 이는데 코앞에 와도 그 느낌이 없다니. 어색할 정도로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많이 눈을 맞추고 웃고 말도 거는데 아이들에게서 반응이 안 와. 나도 말만 요란하지 울림이 없고.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것과 안 가린 게 이렇게 다르다니.

거기다 손으로 바이러스 옮길까 봐 하이 파이브를 안 하니까 그냥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휙 지나가. 인사 자세만은 하이 파이브 할 때보다 더 깍듯해. 평소에는 이렇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거든. 하지만 단지 인사를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별다른 느낌이 없어. 무덤덤하고 답답해.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보면 좋은 교육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아이들과 나 모두의 마음에 물결이라고 할까 변화가 일어나질 않아 재미가 없어. 이런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아침맞이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마음이 드네. 시간은 안 가고 지루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하루 이틀 새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고 마스크 때문에 아이들 표정 못 읽는다고 푸념 늘어놔 봐야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싶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다른 방법이 안 떠올라 우선 아이들과 눈을 맞췄어. 좀 어색하지만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눈을 뚫어져라 봤지. 눈은 마음의 창이라 표정은 속여도 눈은 속일 수 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런데 그 말도 마스크 없을 때 이야기지 헛말이더라고. 아무리 눈을 맞춰도 느낌이 예전과 달라. 예전 같으면 아이의 기운이 느껴지거든. ‘힘이 넘치네.’, ‘즐겁고 밝구나.’, ‘어쩌면 저렇게 생동생동할까?’, ‘따스하고 푸근하구나.’, ‘저 어두움을 어째.’, ‘의욕이 없네.’ 이런 감이라고 할까 느낌이 한 방에 내게 와. 느낌이 오거든.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뿌연 안갯속이라 안 보여.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내 기운을 못 느낄 거고.

안 되겠어. 아이들 상태를 읽어 내려 매달릴 게 아니라 겉에 보이는 것, 확실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아이에게만 말을 걸기로 했어. 다른 아이들에게는 살짝살짝 눈을 맞추면서 모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하기로 마음먹었지. 표정이나 눈빛 대신에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눈에 띄는 이야깃거리가 걸리면 목이 아프더라도 크게 말을 걸었어.

! 너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구나. 어울린다.”

개학한다고 머리 깔끔하게 다듬었구나. 좋아 보인다.”

머리 누가 묶어 주셨어? 와우! 정성이 느껴져.”

운동화 새로 했네.”

오빠 동생 오누이가 패딩을 샀구나. 너무 잘 어울리고 예쁘다. 좋겠다.”

목도리가 눈에 띈다. 따스해 보여.”

오빠는 왜 안 보여?”

늘 같이 오던 친구는?”

오늘은 엄마랑 안 오고 동생 손잡고 오네. ! 이제 엄마 없이 너희 둘이 등교하기로 마음 먹었구나. 와우!”

이것도 안 되겠어. 마스크가 가로막아 목만 아프지 내 말이 아이들에게 잘 전해지지도 않아. 설령 내 말이 전해져도 말하는 순간 표정을 서로 읽지 못 하니 차라리 그냥 인사나 정성껏 하는 게 더 낫겠어. 내가 일방적으로 던지기만 하지 주고받을 수도 없는 데다가 누구에겐 말 걸고 누구는 그냥 보내는 것도 아니다 싶고. 더구나 날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눈에 띄는 것만 보고 이야기하는 거 오래 할 일은 아니야. 아이들과 학부모가 겉치장에 신경 쓰는 부작용이 생길지도 몰라. 한두 번은 몰라도 오래 쓸 방법은 아니네.

마스크 쓰고도 겉이 아니라 속을 읽고 느낄 방법을 얼른 찾아야겠어. 그래야 마음을 주고받지. 느낌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면 아침맞이는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할 수 없지. 순식간에 서로를 느끼고 좋은 기운을 주고받을 가능성을 높이려면 얼른 마스크를 걷어 내야 하는데. 이놈의 마스크를 어쩌나. 안 할 수도 없고.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아이들이 졸업했고 나는 또 조금 컸다

구자숙/ 인천부개초등학교 교사

 

 

아이들이 엄마 키만큼 크는 6년 동안 곁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챙겼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나는 학교 공간에서 애달아하며 고생한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하면 급식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급식실을 찾아갔다. 점심 급식 준비로 정신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영양사 선생님과 급식실 조리원님들에게 딱 1분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모두 모시고 인사를 드렸다.

“6년 동안 여러분이 이만큼 키와 몸과 마음을 크게 하는데 가장 많이 기여해 주신 분들입니다. 그동안 맛있는 밥 하루도 빠짐없이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할게요. 자세 바로. 인사.”

19명의 아이들과 함께 고개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고 얼굴을 드는데 눈앞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물을 뚝뚝 떨구고 계셨다. 잠시 당황스러웠으나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간 맞춰 몇백 명의 밥을 짓는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얼마나 많이 담길지. 작은 실수 하나도 큰 사건인 양 떠들어 대는 사람들 덕에 얼마나 노심초사할지. 맛있는 건 얘기 안 하면서 맛없는 건 품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밥을 해 낸다는 게 얼마나 마음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인지. 그 모든 긴장감과 고단함을 졸업하는 아이들의 감사합니다 한마디에 위로받고 계셨다.

밥 맛있게 먹고 쑥쑥 커 줘서 고맙다고, 중학교 가서도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여기서 20년 일했는데 이렇게 인사하러 와 준 아이들은 너희들이 처음이라고, 너무 고맙다는 급식 조리원님 인사말을 마음에 담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은 청소 노동자! 건물이 세 채가 연결된 3층짜리 학교를 단 2명이 어떤 기계의 도움 없이 청소를 하신다. 여름에는 땀을 뚝뚝 흘리며, 겨울에는 추운 날도 편하게 움직이려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수많은 화장실과 길고 긴 복도와 사람들이 드나드는 현관을 돌본다. 구역이 달라 함께 계시는 일이 잘 없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2층 화장실 앞에 함께 계셨다. 너무 반가워서 호들갑을 떨며 종종 달려가 내일 졸업식인데 인사드리러 왔다고 했다.

여러분이 쾌적한 공간에서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를 늘 깨끗하게 관리해 주신 분들입니다. 이분들 덕에 더 행복하게 학교생활 했습니다. 인사드릴게요. 자세 바로. 인사.”

두 분에게 졸업 축하 인사를 부탁드렸는데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졸업을 축하해. 너희들이 학교를 깨끗하게 써 주어서 청소하는 게 한결 수월했어. 그리고 만날 때 반갑게 인사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고맙다고 인사드리러 갔는데 되레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아이들 19명과 나는 이렇게 학교를 샅샅이 돌면서 그간 감사했던 많은 이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물론 아이들은 인사하는 와중에도 앞 친구를 밀거나 뒤 친구를 밀치면서 몸 장난을 치고 그분들이 축하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옆 아이들과 수다를 떨면서 딴짓을 했다. 하지만 고개 숙여 다함께 감사합니다 인사하던 순간 울려 퍼지던 아이들 목소리가 아름다웠고 그 인사를 받던 이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다. 앞으로 6학년을 맡으면 이 활동은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이 졸업했고 나는 또 조금 컸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2)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

김수련/ 29년차 항공사 객실 승무원

 

 

  오늘은 내캉 밭 가는 데 따라가자. 우짜마 오늘이 내캉 밭 갈러 가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같이 안 갈끼가. 니가 서울 가기 전에 할 이야기도 좀 있고.”

아직 창호문 너머로 어스름 새벽빛만 희미하다. 날이 채 밝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동네 어귀 당산나무 근처로 밭 갈러 나갈 준비를 다 하신 모양이다. 밭을 가는 건 어쩌면 핑계고, 다음 달 서울로 일하러 떠날 나와 얘기를 나눌 구실을 만드신 건지도 모른다.

어릴 적 온갖 농사일을 거들며 살았지만 어둠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일하러 나가는 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겨울 추위 끝자락이 매서운 2월이었지만, 그날 난 정말 기꺼이 창호문을 열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19902,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초중학교를 고향 동네 면 소재지에서 보낸 뒤 밀양 읍내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니 철든 뒤 부모님 곁에서 보내는 긴 시간은 그해 2월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으며,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임을 알았다.

2월의 시골은 농한기라 외견상 한가하다. 하지만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에게는 1년 농사가 이때 판가름 난다 할 만큼 귀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농부들은 논과 밭을 돌아보면서 한 해 농사를 계획한다. 어떤 농사를 지을지를 결정하고, 심을 작물에 따라 거름을 얼마나 낼지, 비료는 뭘 쓸지, 밭이나 논을 빌려 소작을 내야 할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날이 풀려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 동네 아재들은 너도나도 들로 밭으로 쟁기질을 하러 나간다. 당시에도 경운기가 있었지만 경지 정리가 되지 않아 대부분의 논과 밭에는 기계가 들어가기 힘들었다. 기계를 조립하고 부리는 일보다는 소가 끄는 쟁기질이 훨씬 더 손쉽기도 했다. 우리 집 어미 소는 몇 해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충분히 길이 들지 않아 아버지의 호령 소리를 아직 잘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앞에서 소를 몰면서 길잡이를 해 주어야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외양간의 어미 소를 깨워 물과 여물을 먹인 후, 아버지는 쟁기를 짊어지고 나는 소를 몰고 대문을 나섰다.

아침때 늦지 않게 후딱 댕기 오이소~.”

새벽부터 빈속에 오래 일하다 자칫 부녀가 기운이라도 빠질까, 걱정하시는 어머니 목소리를 뒤로 하고 들로 향했다.

암만 힘들어도, 니는 잘할 끼다.”

이려, 이려!”

아버지의 호령 소리에 맞춰 나는 앞에서 소를 끌고, 아버지는 쟁기질을 하셨다. 밭에는 오늘 내가 뿌려야 할 거름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쟁기로 밭을 가는 동안, 거름을 뿌리는 일은 내 몫이었다. 틈틈히 말 안 듣는 어미 소를 몰기도 하며 거름을 온 밭에 뿌리는 일은 무척 고단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쟁기질과 거름 내는 일은 아침때를 한참 넘겨 해가 중천에 가서야 끝이 났다. 동쪽 산 위로 훌쩍 솟은 햇살을 받아 쟁기질로 갈아진 흙에선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서늘한 아침 공기엔 싱싱한 거름 냄새가 가득했다.

힘들제?”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몇 시간째 일을 한 후 밭두렁에 앉으니, 헉헉대는 숨결에서 쇠를 달군 듯한 단내가 피어오른다. 고르게 잘 갈린 밭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말씀을 이어 가신다.

니가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러 간다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취업 결정이 나자 엄마는 정말 기뻐하시며 여기저기 인사하러 나를 데리고 다니셨지만, 아버지에게서 좋다는 말을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항공사에서 일한다니, 그기 어떤 긴지 나는 감히 상상도 안 된다. 테레비에 나오데? 비행기 타마 하와이라는 데도 가고 할 낀데, 와이키키라 카더나? 해변가가 좋더라. 언젠가 그런 데 가더라도, 오늘 이 시간을 잊지 말아라. 나는 니가 좋은 곳을 가고 멋진 옷을 걸치고 그래 산다 캐도, 니가 살았던 이 고향 동네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젊었을 땐 큰 데 나가 살고 싶었는데, 느거 할아버지가 절대 허락 안 하셔서 고향을 지키고 살았다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젠 농사지으며 고향서 사는 것이 내 운명이라 생각한 지 오래다. 니가 일손 부족한 시골서 자라면서, 지독히도 농사일을 많이 하면서 살아온 거 미안하기도 하고 많이 고맙게 생각한다. 고되고 힘들었을 텐데 큰 불평 안 하고 잘 따라 주는 너그들을 보미, 안타까운 마음이 와 없었겠노? 서울 가서 살아 보면 니 같은 경험을 하면서 살아온 친구들을 찾아보기는 힘들 끼다. 니한테 분명 값진 경험이 될 끼라 생각한다. 살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얼마나 많겠노? 그럴 때면 오늘 내랑 같이 밭 갈면서 우리가 지금 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 봐라. 지금보다 더 힘든 날이 얼마나 더 있겠노? 니는 잘 견뎌 낼 끼라 믿는다. 고향에서 살았던 이 시절이 너의 뿌리며 너의 근본 아니겠나. 니는 서울서도 잘 살 꺼라고 믿는다. 뭘 해도 잘 할 끼다.”

아버지의 그런 당부를 듣고 있자니, 나를 키워 주고 품어 준 고향 들과 산이 새삼 달라 보였다. 소 먹이느라 헤매 다녔던 뒷산과 앞산, 부모님 따라 농사짓던 들과 밭, 동무들하고 물장구치며 놀던 작은 개울, 봄의 산딸기부터 가을의 머루까지 내가 모르는 곳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속속들이 알고 기억하는 고향 마을이었다.

막 일을 끝낸 후라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두 사람 입에선 하얀 입김이 꽃처럼 피어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어미 소의 등과 입에서도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마치 곧 고향을 떠날 나를 위한 축포의 연기 같구나, 싶었다.

그림_ 최정규

항공사에서 객실 승무원으로 일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서울 생활도 그리 쉽지 않았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자랐던지라 체력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니는 일은 지독히도 고된 노동이었다. 태평양을 걸어서 건너다닌다고 말할 정도로 힘든 일 덕분에 퉁퉁 붓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낯선 나라의 차가운 침대에서 잠들 때, 모진 승객에게 무시당하며 눈물을 삼킬 때, 무섭고 호된 선배들의 질책에 속수무책일 때, 산골 소녀로서는 차마 상상조차도 못한 일을 겪으면서, 나는 서서히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 아버지가 얘기한 하와이 비행을 드디어 가게 되었다. 와이키키 백사장 바로 앞 호텔에 짐을 풀고 당장 해변으로 달려 나갔다. 휴양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그 아름다운 해변가를 걸었다. 잠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았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지쳤으며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을 겪으며 어쩌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힘들제? 그래도 안 잊어버렸제? 니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해라.”

그 순간, 그날의 고향 풍경과 아버지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마치 영화처럼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얼어붙은 땅에 박힌 쟁기를 끌던 어미 소의 거친 숨소리, 갈아엎은 흙에서 나던 신선한 땅 내음, 아침 햇살 받으며 피어오르던 아지랭이, 이랴~이랴~ 어띠이~ ~~” 소를 부리던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고단한 아침 일을 마친 후 아버지와 나누던 긴 이야기.

그후, 그날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시차를 넘나들며 타국에서 고단한 잠을 청할 때, 무서운 선배에게 혼이 나 혼자 눈물을 삼킬 때, 모진 말을 함부로 퍼붓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괴로울 때마다 되살아나, 나를 위로했다. 어미 소의 등어리처럼 판판하고 포근한 고향 뒷산과 굽이굽이 어여뻤던 논과 밭은 지금도 나를 어루만져 준다. 해마다 입사철의 그 봄날 즈음이면 나는 언제나 그 시간을 떠올린다. 그날 아버지와 내가 언 밭을 갈아엎으며 봄 농사를 시작했듯, 나의 긴긴 비행 생활도 그날 그렇게 시작한 것이 아닐까.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배울 권리, 살아갈 권리

최숙하/ 장애인 재택근무 사원  

 

나는 스물아홉 살,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여성이다. 어머니는 임신 7개월에 나를 낳았다. 갑작스러운 진통으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분만이 시작되었고, 배 속 태아는 거꾸로 있는 둔위 상태였다. 산모도 태아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의지 때문이었는지, 나는 1.25키로그램의 미숙아로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보았다.

첫돌이 될 때까지 1년여의 시간이 내가 비장애인으로 살 수 있었던 전부였다. 아무도 나의 장애를 발견하지 못한 시간이기도 했다. 돌이 지나도 나는 제대로 서지도, 걸음마를 떼지도 못했다. 병원에서 내려진 진단은 뇌성마비였다. 지적 발달은 6세쯤에서 멈출 것이고, 걷지 못할 것이고, 전형적인 강직 증상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나의 지적인 능력은 정상 범위에 가깝게 성장했지만, 몸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다른 사람과 달랐다. 서거나 걷는 것은 물론이고 벽에 기대지 않으면 앉을 수조차 없었다. 몸의 강직 때문에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도 없었고 말도 어눌했다. 아홉 살이 되어 겨우 장애아동 보호시설에 들어갈 때까지 내가 만날 수 있는 세상은 텔레비전과 비디오테이프와 동화 테이프가 전부였다. 부모님은 할머니에게 나를 맡겨 놓고 일을 하러 나갔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취학통지서가 나왔지만, 입학할 학교의 교장은 나의 장애 상태를 본 후 결정하겠다고 했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어도 몸이 불편한 나의 등하교를 도와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지적인 능력은 비장애인과 비슷한 수준이고 능숙하지는 못하더라도 읽고 쓸 수는 있었지만, 결국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후, 재활 과정을 거쳐 장애아동 주간보호시설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비록 시설 안에서뿐이었지만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었고 현장학습을 통해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홉 살의 나는 점심과 간식을 먹거나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보거나 억지로 낮잠을 자야 하는 유치원생 수준의 생활을 해야 했다. 장애의 정도도 나이도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는 나에게 맞는 교육도 어울릴 친구도 없었다.

일 년이 지나고 열 살이 되어서야, 한 초등학교와 협약을 맺은 장애인 재택학급이 생겼고, 나는 비로소 초등학생이 되었다. 학교 소속의 특수교사 한 명이 시설로 와서 수업을 진행하는 식이었는데, 몸 상태와 지적 수준이 다른 학생들을 선생님 한 명이 일대일 개인 지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과목을 다 배우지도 못했다. 수학과 국어가 수업의 전부였고, 다른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에는 역시 한쪽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어야 했다. 보조교사가 한두 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나는 초등학교 과정 6년을 결핍과 무기력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열여섯 살이 돼서야 시설과 재택학급을 떠나 지체부자유 학생들이 다니는 장애인 특수학교 중학부에 입학했다. 등하교가 어려운 장애 학생들은 그곳 기숙사에서 고등부 과정까지 6년을 지냈다. 나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스스로 생활해야 했다. 목욕, 청소, 옷 갈아입기, 휠체어 타기. 내 몸 상태로는 무엇 하나 쉽게 할 수 없었다. 우왕좌왕하다가 수업에 지각하고 꾸중을 듣고 함께 생활하는 방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기 일쑤였다. 생리대를 갈지 못한 날에는 수업이 끝날 때쯤 교실로 들어가기도 했고, 휠체어를 잘 움직이지 못해 이동수업 때마다 헤매 다녀야 했다.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면서 어린 시절의 갸름하고 제법 예쁘장했던 내 모습은 사라졌고 친구들은 그런 나를 놀려 대기도 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울며 잠들었다.

마침내 중·고등 과정 6년이 지나고 장애인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고 칭찬을 받은 것은 글쓰기였다. 그것은 몸이 불편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것도 기뻤다.

나는 국문과에 진학하여 기숙사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장애를 가지지 않은 비장애인 친구들과 함께하는 학교생활이었다. 그들과 같은 수업을 들었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초··고 시절 정상적인 수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전공 과목을 따라가기도 어려웠고 똑같이 주어진 시험 시간 동안 불편한 손으로 답안을 작성하는 것도 나에게는 무리였다. 글씨는 엉망이었고 성적도 과락을 겨우 면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학교 안에는 휠체어로는 갈 수 없는 곳도 있어서 가장 맛있는 학식은 한 번도 먹을 수 없었다. 장애인 화장실은 청소 도구로 가득 차 종종 다른 화장실을 찾아다녀야 했다.

장애학생회와 함께 장애 인식 개선 활동 등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내 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장애인의 세상도 비장애인의 세상도 바깥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헌법 제311항을 알게 되었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배울 권리, 살아갈 권리!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배움에 목마르고, 갈 수 없는 곳은 더 늘어만 간다.

 

특수반에서 수업이라고 할 만한 시간도 없어요. 사운드북 몇 번 눌러 주는데 사운드북은 집에도 많아요. 원반(일반학급에서의 통합교육)도 마찬가지예요. 교사가 성은이는 아이들 노는 것만 봐도 큰 교육이 된다는데, 이게 공부인가요? 성은이는 손만 빨고 있었어요. 쉬는 시간에 들어갔더니 손만 얼마나 빨며 침 흘렸는지, 바지까지 젖어 있었어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성은이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는 거예요.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심심하고 지겨워서 죽을 것 같았다는 뜻입니다.” (<비마이너>, ‘휠체어 타는 우리 아이는요?’(2019313) 인터뷰 글 중.)

posted by 작은책
prev 1 2 3 4 5 ··· 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