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작은책
'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2018/05/09'에 해당되는 글 1

  1. 2018.05.09 <리틀 포레스트>가 따로 없다(작은책 2018년 5월호)

작은책 2018년 5월호

이야기가 있는 들녘


<리틀 포레스트>가 따로 없다

김진회/ 자연농 농부가 되고 싶은 일명 참참

 


홍천에서 맞이한 첫 겨울은 혹독했다. 날도 추웠거니와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게다가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은 다 서울에 있어 얼굴 한번 보려면 큰맘을 먹어야 했다. 모두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직접 겪어 보니 생각보다 더 추웠고, 더 외로웠다. 뭐가 문제일까 고민도 많이 했다. 고민이 무색하게도 봄이 오니 거짓말처럼 많은 것이 좋아졌다. 날씨나 환경, 몸의 상태가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그저 바깥 날씨가 따뜻해지고 파릇파릇 새싹이 올라오니 몸도 마음도 녹은 느낌이다.

겨우내 집 밖에 나가려 할 때마다 그렇게도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집 앞 슈퍼에 나가는 것도 귀찮았는데, 짝꿍이 냉이 캐 와서 파스타 해 먹잔 얘길 하자 그 길로 저 먼 밭에까지 냉이를 캐러 갔다. 나가자마자 향긋한 봄내음이라는 뻔한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냉이는 작았고 캐 본 적이 없어 서툴렀다. 심지어는 비슷하게 생긴 다른 풀은 아닌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소금쟁이 님이 냉이가 많다고 알려 주셨던 그 밭에서 신나게 캐 왔다.

작년 봄에도 난생 처음 먹어 본 것이 여럿이었는데, 올봄에도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있다. 냉이파스타가 그 처음이었고 두 번째는 머위된장이다. 이건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왔던 음식인데, 영화를 보면서도 저게 도대체 뭘까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다. 짝꿍은 그걸 잊지 않고 이미 작년부터 머위가 나는 곳을 잘 봐 두었다고 한다. 드디어 봄을 맞아 그곳을 찾아가 보니 역시나 머위꽃이 피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머윗대와 잎만 먹지만 일본에서는 머위의 수꽃을 데쳐서 된장에다 넣고 볶아 머위된장이란 걸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다.

영화에 보면 머위된장 하나로 밥 세 그릇을 뚝딱 비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연 그럴 만했다. 쌉싸름한 뒷맛이 입맛을 돋워 줬다. 물론 짝꿍이 만든 머위된장은 영화에 나온 것과는 맛이 다를 거다. 일본의 된장과 우리 된장의 맛도 분명히 다를 것이고 정확한 비율이나 레시피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든 것도 인터넷에서 어렵사리 찾은 레시피를 참고해서 만든 것이다. 머위꽃을 그냥 먹으면 쓴맛이 강한데, 일단 데친 뒤에 물에 오래 담가 두거나 잘 볶아야 쓴맛이 빠진다.

맛있는 머위된장을 다시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지난번 뜯은 냇가에는 그때 한 줌 뜯은 것이 전부였다. 머위에 비해 꽃은 별로 많이 피지 않는데, 우린 머위가 더 많은 곳을 몰랐다. 어쩌나 싶었는데 혹시나 싶어 여쭤 보니 이웃 농부님 중 머위농사를 짓는 분이 계셨다. 농사를 워낙 크게 하시는 분이라 올해는 아직 머위밭에 신경을 쓰지 못하셨다는데 물론 머위꽃은 팔지 않으신단다. 위치를 알려 주셔서 찾아가 보니 밭 가득 머위꽃이 피어 있었다! 보물창고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제 혹여나 머위된장 맛이 궁금하다며 찾아오는 손님들한테도 맛을 보여 줄 수 있게 됐다. 머위꽃도 한철이라 4월 초가 지나면 찾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아쉽지만 딱 요 때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소중해진다.

지난해 맛나게 먹었던 풀들도 다시 만나 어찌나 반가운지 모른다. 노랑꽃 또는 꽃나물이라 불리기도 하는 겹꽃삼잎국화와 이젠 재배하는 농가도 꽤 있는 눈개승마, 그 밖에도 파드득나물, 부추, 뱀밥, 새로 찾은 친구 원추리까지! 잊고 있던 봄나물 맛을 다시 보니 좋아하던 김치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렇게 온 들에 맛난 것들이 널려 있으니 맨날 봄만 계속되면 좋겠다.

이렇게 영화 같은 날만 계속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가을, 겨울에 먹을 것들을 위해 얼른 농사일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 작년에 물이 잔뜩 고였던 고랑을 정비하고 있는데 깊게 판 고랑들을 다시 메울 흙을 퍼 올 데가 마땅치 않다. 하도 잘못 만들어서 구배를 다시 맞추는 것도 큰일이다. 밭 계획도 좀 바뀌어서 여기저기 손볼 데가 많은데 삽자루를 들 때마다 이거 이러다간 올해도 다 못하겠다 싶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이미지


우선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해서 감자를 좀 심었다. 작년에 심어 두었던 마늘도 싹이 나왔다. 심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있었는데 파란 싹이 뚫고 나오니 참 예쁘기도 하다. 작년에 몇 개 못 따 먹었던 딸기도 절로 더 넓게 퍼졌다. 겨울에 죽은 듯 보이던 딸기 잎들이 저렇게 파릇파릇해 기세 좋게 살아난다는 게 신기하다. 딸기뿐 아니라 파드득나물, 부추 등은 다 매년 다시 심을 필요가 없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한번 심어 놓으면 몇 년이나 심는 과정 없이 가져다 먹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최대한 이런 풀들을 먹고 사는 쪽으로 삶을 바꾸고 싶다.

통장 잔고 고민이 깊어지던 때 개구리 님 덕에 자연농에도 관심이 있으신 읍내의 한 학원 원장님과 인연이 닿았다. 우리 사회의 교육제도와 사교육에 문제의식이 있어 그동안 과외나 학원 알바도 하지 않았는데, 농사도 짓고 다른 일도 하면서 짬을 내어 할 수 있는 일이 이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게 됐는데, 어떻게 하면 비록 학원 수업이나마 단순히 시험에 나올 것들을 외우는 것보다 좀 더 나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 고민이다. 실은 잊어버린 것도 많고 가르쳐 본 적도 없는 초짜라 학원에 폐나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지만 말이다.

새싹이 돋고 새로운 먹을거리도 먹고 일도 새로 시작하니 자연스레 마음가짐도 새로워진다. 이래서 예부터 그렇게 봄이 왔음을 노래했나 보다. 여기서도 다 피할 수 없는 황사와 미세먼지, 밭마다 잔뜩 쌓아 놓은 퇴비 냄새에 얼굴 찡그릴 때도 있지만 시골에 왔으니 시골에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봄을 만끽해야겠다.

▲ 김진회 ⓒ김진회(페이스북에서 갈무리)

posted by 작은책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