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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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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4.21 물신 전체주의 사회
  2. 2019.05.08 모두가 용이 될 수는 없다(작은책 2019년 5월호)

<작은책> 202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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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 딴 생각_ 혁명 노트(김규항, 알마, 2020)

 

물신 전체주의 사회

변정수/ 출판 편집자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확연하게 구분하게 해 주는 단절적인 변화의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을 꼽는다면, 그건 아마도 한국전쟁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 이전 삶의 모습과 전쟁을 겪고 난 뒤 삶의 모습은 확연하게 달라졌고, 지금 사람들이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의 뿌리를 더듬어 가자면 어김없이 전쟁 체험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 이제 막 사회에 나서려는 젊은이들과 긴밀하게 접촉해 오면서 이런 상식과 조금은 다른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1997년의 구제금융 사태와 그로 인해 촉발된 사회 재편은 어쩌면 한국전쟁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그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사회를 만들어 낸 역사적 계기가 아닐까 싶달까. 그 실체가 뭔지는 아리송한 채로도,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은 분명히 감지됐던 것이다. 하나는 대체적인 경향성에서 그 이후에 성장기를 보낸 이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 이전에 성장기를 보낸 세대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 다른 하나는 기성세대는 그들대로 그 이전에 어떻게 살았었는지를 까맣게 잊었으며 이미 중년에 접어든 후속 세대는 또 그들대로 그것을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도대체 밀레니엄이 바뀌던 그때 한국 사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물론 그 변화의 성격은 여러 각도에서 살필 수 있고, 단순한 개념 틀 하나로 손쉽게 환원시킬 수도 없다. 다만 그 모든 국면을 매개할 수 있는, 그 모든 계기의 가장 깊은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을 근본적인동인이 있다면 그 실체가 무엇일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명해 줄 무슨 만능열쇠(따위가 있을 리도 없거니와)를 찾으려는 건 아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들만을 수박 겉 핥듯 좇아 봤자 헬조선이라는 비명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개탄과 냉소 말고는 남는 것이 없을 게다. 다기한 현상 이면을 꿰뚫어 통찰하는 데 나침반이 돼 줄 만한 화두가 늘 목말랐다. 그리고 김규항의 신작 혁명 노트에서 유력한 실마리 하나를 얻는다. 지식인이란 바로 이런 사회적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렷다. 저자는 지난 20년 사이에 일어난 한국 사회의 변화를 물신주의의 전면화로 설명한다. 이렇게 시야가 환하게 열리는 느낌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혁명 노트(김규항알마, 2020)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지만 전근대적 농촌 공동체 습속이 많이 남아 있는, 삶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아직 상품이 아닌 사회자본주의 사회지만 사회주의 요소들이 도입되어 있는, 생활의 기본 요소들이 상품이 아니거나 상품의 속성이 덜한 사민주의 복지사회에서 물신성이 억지된다면서, 전근대 농촌 공동체에서 사람들에게 인심이나 정이 있었던 게 그들이 경제적 안정을 누렸기 때문이 아니듯 이런 사회들에서 사람들이 좀 더 인간적이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흔히 말하듯 경제적 안정때문이 아니라 물신성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혹은 모든 아이가 대학 입시라는 한 경로에 줄 세워져 인생의 등급이 매겨지 교육 현실은 한국 민주화가 결국 물신 전체주의 사회로 귀결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누군들 끄덕이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물신성을 극복한다는 뜻이고, 그런 통찰은 어느샌가 막연한 이미지로 전락해 버린 혁명에 대한 관습적인 이해를 전복해 낸다. 우리가 우리네 일상 구석구석을 파고든 데다가 심지어 내면까지 잠식해 버린 물신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혁명은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극복의 목적은 정의롭고 인간적인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경제 차원을 벗어나 더 고양된 삶을 구현하는 데 있다.” 거칠게 빗대자면, ‘혁명의 대의를 위해서 불가피하게 인간다움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결코 혁명이 아니며 실은 혁명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이야말로 왜 혁명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대의에 대한 배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혁명은 건설만이 아니라 실은 이행이기도 하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미래에 속한 사람이며 또한 새로운 사회의 담지자다. 투쟁하는 자유인의 삶과 생활양식에 선취된 새로운 사회의 조각들이 현재 사회에 균열을 만들어 새로운 사회로 이행해 간다. 누군가 새로운 사회가 정말 가능한가 물을 때, 투쟁하는 자유인은 먼저 묻는다. ‘내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혁명은 인민의 자기해방이기 때문이다. 해방은 나를 억압하는 시스템 앞에 서는 일, 내가 그 안에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서는 일을 바탕으로 어느 순간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단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렇게 투쟁하는 자유인으로 거듭나는 데는, ‘더는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자각과 노예가 존재하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는 성찰이라는 두 경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 해방의 두 경로는 투쟁으로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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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5월호

쉬엄쉬엄 가요

책 읽고 딴 생각_ 바벨탑 공화국(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19)

 

 

 

모두가 용이 될 수는 없다

변정수/ 출판 편집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뉴스가 되곤 하는 갑질을 그저 예외적인 일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오히려 워낙 일상화되어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뿐이지, 크고 작은 갑질을 예사로 당하고 사는 게 대다수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벨탑 공화국에서 강준만은 우리는 사람들의 좋지 못한 의도와 행위들의 결과로 갑질이 창궐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결코 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갑질은 우리가 옳거니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들의 의도하지 않은결과에 의해 생겨나며 좋지 못한 의도와 행위도 실은 그런 의도하지 않은결과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갑질을 낳는 옳거니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개천에서 난 용을 보면서 열광하는 동시에 꿈과 희망을 품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보면서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는 확신마저 갖는모습이다. “모두가 다 용이 될 수는 없으며, 용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 하며, 용이 되지 못한 실패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좌절과 패배감을 맛봐야 하는지는 안중에도 없다며 “‘개천에서 용 나는모델을 깨지 않는 한, 지금의 과도한 지역간 격차, 학력·학벌 임금 격차, 정규직·비정규직 격차와 그에 따른 갑질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다.


이 책 제목의 바벨탑탐욕스럽게 질주하는 서열 사회의 심성과 행태, 그리고 서열이 소통을 대체한 불통 사회를 가리키는 은유이자 상징이다. 이는 바벨탑은 결국 무너진다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상생을 거부하는 탐욕을 건전한 상식으로 만든 사회, 그 상식을 지키지 않는 게 오히려 문제가 되는 사회 이게 바로 대한민국의 민낯이거니와 국민 다수가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해도 그건 내 손톱 밑의 가시보다 하찮은 일이라는 사고방식에 중독되어 있는것이 바벨탑 공화국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환기하면서 바벨탑의 붕괴로 가는 길이라 진단한다.

욕망의 바벨탑의 이면은 모욕의 바벨탑이기도 하다. “낮은 서열의 사람을 모욕하는 걸 자기 존재 증명으로 삼으려는 사람이 많은 건 물론이려니와 모욕의 강도를 높여 나가는 걸 자신의 위계가 올라가는 것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사코 모든 사람을 일렬종대로 세워 서열을 매기고 그 격차를 크게 벌려야만 직성이 풀리는이유를 삶의 만족과 보람은 나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남과의 사회경제적 비교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저자가 바벨탑 공화국의 실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회적 현상으로 지목하는 건 서울 초집중화이다. 거칠게 간추리면 지방을 희생한 대가로 서울이 모든 자원을 독식하는 갑질이야말로 이 나라를 온통 서열 사회로 몰고 가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개천에서 난 용의 첫 번째 조건을 우선 서울에 진입하는 것이라 여기곤 한다는 점에서 크게 무리한 주장도 아니다. 그 결과 지방은 점점 더 황폐화되는데. 그 피해가 지방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가령 도시 인구가 20만에서 10만으로 줄었다고 해도 그 도시의 도로나 수도, 전선, 통신망을 절반으로 줄일 수는 없는 일이고 어느 도시나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인프라 비용때문에 똑같은 면적에 절반의 인구가 살게 되면 재정 효율성은 급격히 떨어질수밖에 없다. 그건 결국 누구의 부담으로 돌아올까.

더 의미심장한 건 지방이 식민화되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만들어지는 사회적 자본조차 약화된다는 지적이다. 워낙 한국 사회의 사회적 신뢰가 바닥이기는 하다. “겨우 한 자릿수 신뢰도를 갖고 있는 권력기관, 10퍼센트대의 신뢰도를 갖고 있는 언론과 종교, 20퍼센트대의 상호 신뢰도를 갖고 있는 국민, 이게 바로 대한민국의 민낯이라니까. 그런데 저신뢰 사회의 부정적 효과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더 치명적이다. “지방에서 사회적 자본의 약화는 지방 소멸에 대해 저항하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주체가 파편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통찰은 비단 지방민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난제를 단적으로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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