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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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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순이 아버지를 만났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연속극에서 삼순이 아버지로 나온 맹봉학 씨다. <작은책>에서 연예인을 인터뷰하기는 처음이다. 전화를 했더니 “요즘, 본의 아니게 내가 유명 인사가 됐네요” 하고 껄껄껄 웃는다.

대학로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성균관대 앞에 있는 풀무질 책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맹봉학 씨가 풀무질 책방 주인인 은종복 씨하고도 친하니 잘됐다 싶었다. 정확히 두 시에 책방으로 들어온 맹봉학 씨가 은종복 씨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맹봉학 씨는 요즘 더 바빠졌다. 어제도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에서 인터뷰를 했고 오늘도 이 인터뷰가 끝나면 이 근처에서 다른 매체와 또 인터뷰가 있단다. 이렇게 바쁜 까닭이 연기자로서 스타가 됐기 때문이 아니다. 가슴 아픈 얘기지만, 배우인데 사회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 여러 매체에서 취재당하는(?) 수준을 보면 거의 사회운동가가 다 됐다. 연기를 해야 먹고사는 배우가 그러기가 쉽지 않다.

“전에 경찰에 소환당해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벌금 맞으셨어요?”

“두 번 다 안 맞았어요. 뭐, 죄가 있어야죠.”

맹봉학 씨는 유일하게 연예인으로서 집회에 관련해 경찰에 소환을 두 번 당한 사람이다. 한 번은 2008년 촛불 집회 때, 두 번째는 지난해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 때였다.

“영결식 때 도로로 차를 따라 갔는데 사진이 찍혔더군요.”

연예인이 경찰에 출두하면 금방 소문이 나기 때문에 스스로 몸을 낮출 만도 한데 맹봉학 씨는 당당하다. 하지만 역시 그 사건 이후로 영화 섭외가 전혀 안 들어온단다.

“전혀 연락이 없어요. 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사실 영화 하는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거든요. 근데 촛불 집회 이후로 한 편도 못했어요. 단편 영화는 숱하게 했지만. 하 참 나, 하하하!”

촛불 집회 때 기억나는 게 있냐고 물었다.

“촛불 집회 때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먹을 걸 갖다 줘요, 고맙다고. 나 하나 나온 게 자기들 백 명 천 명 나온 것보다 더 힘 되니까 고맙다는 거죠. ‘아, 이분들이 지켜보고 있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맹봉학 씨는 푸근한 아버지 역할로 많이 나왔지만 아직 미혼이다. 올해 마흔여덟 살. 왜 결혼을 안 했느냐고 물었더니 “못했다고 봐야죠.” 하고 또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웃는 모습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다.

얼굴이 밝지만 맹봉학 씨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열두 살 때부터 일을 했단다. 7남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맹봉학 씨는 6ㆍ25 때 남쪽으로 넘어온 아버지가 수원에 자리를 잡은 뒤 태어났다. 친척이 없어 명절 때마다 우울했다. 맹봉학 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혼자 살아 나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걸 느꼈단다. 닭을 몇 마리 키웠는데 달걀 한 개를 공책이나 학용품으로 바꿀 만큼 어렵게 살았다. 학교에서 준비물을 사 오라고 하면 집에 돈이 없어 못 사줄 게 뻔해 아예 이야기를 안 했다.

그래도 맹봉학 씨는 늘 희망을 갖고 살았다. 그때 만화를 많이 봤단다.

“만화를 보면, 처음엔 고생하다가 나중에 다 성공하더라고요. 하하하.”

참 잘 웃는다. 꾸밈이 없다. 맹봉학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야간 학교인 산업체 특별 학교를 다녔다. 낮에는 구로공단에 있는 병 공장에서 일했다. 일하다가 손을 다치기도 했다. 다니던 산업체 특별 학교가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맹봉학 씨는 영등포공고 전기과로 들어갔다. 연극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우리 집이 가톨릭 집안이에요. 성당 학생회에서 문학의 밤을 했어요. 그런데 연출가 형이 딴죽을 거는 거예요. 연기를 그거밖에 못하냐고.”

맹봉학 씨는 오기가 생겼다. 가톨릭 학교를 다녀 수사가 되려고 했지만 자기 길이 아니라고 깨닫고는 연극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연극은 재미가 있었다. 첫 작품은 전주 지방연극제에서 한 〈멀고 긴 터널>이었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독립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때 출연한 작품은 영화아카데미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김진성 감독(<서프라이즈>, <거칠마루>)의 <환생>이었다. 그이가 맡은 역은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태어나는 두 명의 사형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밖에 <2001 이매진>, <수사반장 트위스트 김>, <트라이앵글 메모리즈>, <잘돼가? 무엇이든>, <바이칼>, <아버지 어금니 꽉 깨무세요> 등 수백 편에 출연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최원석 감독의 단편 영화 <트라이앵글 메모리즈>라고 한다. 맞고 다니는 아들한테 레슬링을 전수하는, 재미있는 역할을 맡았다.

“내가 코믹 배우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하하하.”

맹봉학 씨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삼순이 아버지 역할이었다. 2005년에 방영했던 그 연속극은 시청률이 50퍼센트 가까이 됐다고 하니, 우리 국민들은 다 봤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한다.

“대사가 좋았어요.”

가장 깊이 기억에 남는 대사는 삼순이가 사랑에 지쳐 혼자 소주를 마시면서 상상 속의 아버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한 대사였다.

“미안해, 아부지. (줄임) 끔찍해. 그렇게 겪고 또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내가 너무너무 끔찍해 죽겠어… …. 아주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그때 삼순이 아버지가 한 말이 시청자들을 울렸다.

“삼순아, 아버지는 가슴이 딱딱해져서 죽었잖아.”

맹봉학 씨는 이 사회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을까. 1987년, 거리에는 짱돌과 최루탄이 날아다니고 데모가 한창이었는데 맹봉학 씨는 연극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얼마 뒤 절차상으로나마 직선제 민주주의로 바뀌었는데 자신은 무임승차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밑바닥에 늘 미안함이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뭔가 할 거다’ 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씨앗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발아할 거’라고 했죠. 그럴 때 광우병 소 수입 반대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어요. 어른들이 막았어야 하는 일인데 아이들이 자기 먹을거리 때문에 싸우는 걸 보고, 이번에 안 하면 더 큰 죄의식을 느낄 것 같아 참여하게 된 거예요. 이왕 참여한 거 열심히 해 보자… ….”

맹봉학 씨는 현재 강동촛불, 참여연대, 언론행동모임, 강동중증장애인, 강동청소년공부방, 백혈병 단체, 제주도 다니엘, 동자동사랑방 등 일일이 외우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곳에 후원 회비를 내고 있다. 은평시립병원, 아산병원에서는 18년째 중증 환자들과 함께 사이코드라마를 하면서 자원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참여연대에서 주관한 ‘최저 생계비 하루 체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보다 앞서 그 하루 체험을 하고는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았다”고 허풍을 친 차명진 의원에게 ‘체험’과 ‘삶’도 구분 못하느냐고 쓴소리도 했다.

맹복학 씨가 이렇게 사회에 관심을 두고 촛불 집회까지 나와 경찰에 두 번 연행되면서 현실은 우울해졌다. 영화 섭외가 뚝 그친 것이다. 후회 안 하느냐고 물었다. 그이는 일분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후회했다면 이런 인터뷰 안 하죠.”

맹봉학 씨는 이어 말한다.

“사람이 영원히 권력을 잡을 수 없는 거고, 언젠가는 죽잖아요. 반성하면서 좀 더 착하게 살다 보면 죽을 때 덜 후회하고 죽을 텐데… …. 이명박, 자기는 안 죽나? 당장 2년 뒤에 청문회 하고 그럴 텐데. ‘버티면 전두환처럼 살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 가질 수 있겠죠. 세상이 잘못 됐지. 잘못을 저지른 전직 대통령들을 너무 빨리 사면해 줘서 그래요. 망명을 가게 하든지 종신형을 때리든지 해야 돼요.”

이렇게 용기 있는 연예인은 처음 만났다. 왜 이런 분이 아직까지 결혼을 못하고 있을까. 마음에 있는 분들은 용기를 내서 <작은책>으로 연락하시라. ‘소개팅’도 사양하지 않겠단다. 맹봉학 씨는 갑자기 배가 고프다면서 떡볶이를 사 왔다. <작은책> 일꾼 최규화가 연예인이 사 준 떡볶이는 처음 먹는다며 입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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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화/ <작은책> 편집부


  “용역 깡패가 공장에도 있어요? 난 철거촌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출판사 일꾼들과 저녁을 먹다가 이번에 취재한 곳의 이야기를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놀랄 수도 있겠다. 요즘은 파업 현장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용역 깡패들이 동원되지만, 뉴스에는 용역 깡패가 아니라 ‘경비 업체 직원’이라고 나오니까. 사실 나도 취재를 하면서 놀라긴 했다. 왜냐하면 이번에 찾아간 일터가 ‘풀무원’이었기 때문이다.

  풀무원은 회사 이미지가 꽤 좋다. 친환경, 유기농 식품 브랜드라서 그렇기도 하고, 원혜영 의원과 그이의 아버지인 원경선 목사의 이름값 때문이기도 하다. 원경선 목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기농을 시작했다는 ‘착한 농부’고, 아버지가 키운 농산물을 팔기 위해서 1981년에 풀무원을 만든 이가 운동권 출신으로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원혜영 의원이다. 그런 ‘착한’ 회사에서 ‘못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9월 6일 강원도 춘천에 있는 풀무원 춘천공장을 찾았다. 두부를 만드는 이 공장에는 백 명 남짓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노동조합을 만든 것은 2000년 8월, 전체 노동자 130여 명 가운데 104명이 조합원이었다. 사무직 20여 명을 빼면 생산직은 거의 다 가입한 셈이다.

  “57퍼센트가 비정규직이었고 체불 임금이 2,800만 원 정도 됐어요. 잔업 시키고 돈 안 주고, 특근 시키고 돈 안 주고, 예비군 훈련 간 날 월급 빼 버리고 한 돈이에요. 그래서 노조 설립하기 직전에 체불 임금을 다 받아 냈고, 노조 설립하고 첫 단체 협약에서 비정규직들을 다 정규직으로 바꿨어요.”

  수처리 일을 하다 지금은 노조 지회장을 맡고 있는 박엄선 씨의 이야기다. 평소에도 일주일에 사나흘은 잔업을 하는데, 성수기인 7, 8월이면 다음 날 새벽 대여섯 시까지 일하거나 집에도 못 가서 탈의장에서 잠깐 눈만 붙이고 다시 일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점심 먹을 시간도 없다. 뛰어 가서 밥을 먹고 얼른 교대해 줘야 하기 때문에 내내 소화제를 달고 살아야 했다. 단순 반복 작업을 하며 무거운 물건을 계속 들다 보니 손가락, 어깨, 목, 허리가 남아나지를 않았다. 또 성희롱 사건도 비일비재했고……,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그런데 노조가 만들어지자마자 체불 임금과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고 거침없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하니까, 노동자들은 ‘아, 이래도 되는 거였구나. 이게 우리 권리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됐다. 생산직 대부분이 노조에 가입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동자들의 호응이 높아지자 회사의 탄압도 시작됐다. 2001년에는 아웃소싱을 추진하다 노조에서 반대 농성을 시작하자 슬그머니 ‘없던 얘기’로 만들어 버렸고, 2002년 임단협 때는 용역 깡패를 등장시켰다. 한 50명 되는 용역 깡패들이 석 달 가까이 공장 안에 상주했다. 그자들은 하루 종일 제식 훈련을 하고 공장을 뱅글뱅글 돌면서 대부분이 여성인 조합원들한테 겁을 줬다. 다행히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그때부터 회사는 단협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4년 노조는 단협을 더 보완하려고 했다. 11개의 개정안을 올렸는데 회사는 한국경영자총협회에 있던 ‘노조 깨기 기술자’를 앞세워 54개 개악안을 들고 나왔다. 고용과 노조 활동 부분에서는 건드리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30번이 넘게 교섭을 했지만 결국 합의를 못했고, 춘천공장 노동자들은 의령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에 들어갔다.

  “그때 원혜영이 나선 거죠. 의령공장으로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대요.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힘을 못 쓰니까 의령 쪽부터 정리한 거예요. 그래서 의령공장이 파업을 접고 현장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이렇게 하면 둘 다 죽는다’고 말렸지만 별 수 없었어요. 저희도 한 40일 더 버티다가 163일로 파업을 끝냈죠.”

  이듬해인 2005년 3월, 회사는 부서 재배치를 하면서 노조 임원들을 엉뚱한 자리로 보내 버렸다. 면 공장 라인에 있던 사람을 기계 고치는 곳으로 보내거나, 물류에 있던 사람을 두부 공장 라인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노조 임원들을 재배치할 때는 노조와 미리 합의한다는 단협 조항까지 무시한 거였다. 재배치를 받아들이지 않자, 회사는 노조의 수석부위원장이던 송석호 씨와 부위원장이던 이창규 씨를 해고해 버렸다.

  부당 해고는 이어졌다. 노조 위원장이던 박엄선 씨는 2007년에 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석 달 동안 교육을 받았다. 교육이 끝나면 원래 일하던 수처리 일을 하기로 돼 있었는데, 복귀를 며칠 앞두고 회사에서는 아예 그 자리를 없애 버리고 생산 부서로 보냈다. 박엄선 씨는 원래의 부서로 계속 출근하며 대화를 요구했고, 회사는 계속 대화를 피하다가 석 달 뒤에 해고를 통보했다.

  하지만 상식과 약속을 저버린 해고의 부당성은 법정에서도 밝혀졌다. 지난해 11월, 법원의 부당 해고 판결에 따라 박엄선 씨가 복직했다. 그리고 올해 7월 송석호 씨와 이창규 씨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부당 해고라 판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회사는 두 사람을 아직 복직시키지 않고 다시 9월 17일에 있을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해고된 지는 이미 햇수로 6년째다.

  그동안 일반 조합원들이 겪은 괴롭힘도 상당했다. 관리자들이 비조합원들만 데리고 회식을 하거나 야유회를 가는 것은 어찌 보면 좀 사소한 축에 든다. 가장 큰 괴로움은 경제적인 압박이었다.

  “승진에서 누락되죠, 조합원들한테는 잔업도 안 시킵니다. 기본급이 최저 임금 수준입니다. 제가 여기 15년 있었는데 이제 130만 원 받아요. 잔업 해야 먹고살아요. 근데 웃긴 건 물류 쪽은 조합원이라도 잔업을 시켜요. 그래야 물량이 나가니까. 완전 엿장수 마음대로에요.”

  2006년 회사는 노동자들한테 잔업 동의서를 내밀었다. 그런데 시간과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회사는 제 마음대로 잔업을 시키고 나중에 노동자들이 항의할 때 “그때 니들이 동의서 썼잖아” 하고 나올 것이 뻔했다. 조합원들은 선택권을 달라고 하면서 동의서를 쓰지 않았고, 그 뒤로 회사는 조합원들에게 잔업을 시키지 않았다.

  몇 년 동안 그렇게 해고와 회유, 경제적인 압박을 당하면서 100여 명이던 조합원 수는 지금 30여 명으로 줄었다. 안타깝지만 이해는 된다. 이런저런 수당을 받아도 맞벌이를 안 하면 먹고살기 어려울 텐데, 5년째 잔업도 못하고 크고 작은 차별을 당하면서 버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남아 있는 조합원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었죠. 제가 1급 되는 데 10년 걸렸어요. 이건 노동 탄압을 넘어서 형벌이라니까요. 돈으로 죽이겠다는 거죠. 그래도 노조가 생겼으니까 제가 여기 10년을 다녔지, 안 그랬으면 그렇게 못했어요. 저는 일용직으로 들어왔거든요. 한 달에 한 번씩 계약 연장했는데 노조 생기면서 정규직 되고 정말 좋았어요.”

  두유(콩물) 만드는 일을 하면서 노조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인숙 씨의 이야기다. 사무국장이 된 지는 2년쯤 됐는데, 앞서서 노조 임원들이 줄줄이 해고되는 것을 봤지만 부당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두렵지 않단다. 조합원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씩 ‘하루 파업’을 하며 서울에 있는 풀무원 본사에 가서 해고자 복직과 노조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를 한다. 지난 8월에는 풀무원의 계열사가 외주 운영을 하고 있는 대구 동산병원 영양실 노동자들과 함께 집회를 열기도 했다.

  뉴스를 보면 노동자들은 흡사 싸움꾼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평화를 가장 바라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다. 싸움이 끝나기를 바라는 쪽은 원래 ‘때리는 쪽’이 아니라 ‘맞는 쪽’ 아닌가. 하지만 이들이 바라는 평화는 단순히 ‘싸우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복종이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는 노동자와 회사가 각자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풀무원 누리집에 가 보니 풀무원 정신이라는 꼭지에 “이웃 사랑과 생명 존중”이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풀무원이 지켜야 할 ‘제자리’는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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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쟁이 할매                                                                김영수/ 버스 노동자

  시내버스 운전을 하다 보면 별의별 승객들을 본다.

올해 8 무더운 여름날의 일이다. 그날따라 유난히 승객이 많았다. 영도대교 정류장에서 손수레를 덩치는 작은 할매가 버스 계단을 힘들게 올라온다. 60 후반으로 보이는 할매는 한눈에 봐도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뒤로 승객 명이 타고 마지막에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올라타자 앞에 앉아 있던 서른쯤  보이는 여성이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자 처음 손수레를 들고 할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씨발 누구는 비켜 주고 누구는 비켜 주고, 사람 가리 가메 비켜 주는 갑제!
자리를 양보한 여성을 어쩔 몰라 하다가 버스 뒤쪽으로 들어갔고, 자리를 양보 받은 불편한 할머니가 대신 대꾸했다.

“내가 몸이 아파서 그래 하요.
‘욕 할매’는 지지 않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나도 아프고 거다가 짐도 들었다 아이가!

점점 버스 안이 소란스럽게 되자 뒷자리에 있던 승객이 자리를 양보해서 할매는 자리에 앉을 있었다. 이젠 조용하겠구나 생각했다.

버스가 차라서 에어컨 바람이 아주 시원하다. 근데 할매가 갑자기 창문을 연다. 그러자 후텁지근한 바람이 안으로 휙휙 불어 들어왔다. 아줌마가 조용히 말했다.

“에어컨 틀어 놨는데 창문 닫으이소.
 “씨발 여편네들이 에어컨 바람이 좋다꼬 지랄이고? 얼매나 몸에 좋은데.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할매가 욕을 연발하자 모두 아무 못하고 조용히 수밖에 없었다.

종점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으며 동료들에게 조금 전에 못된 할매 얘기를 주니까 동료가 갑자기 아는 체를 했다.

“그 할매 경희어망에서 내리제?
“그걸 어째 아노?
“그랄
할매는 할매밖에 없다. 며칠 전에도 113 기사 운전하는데 모가지 잡고 흔들어 , 가게 처박을 했나.

동료의 얘기를 듣고 며칠 버스 대가 차도를 벗어나 가게를 향해 있는 것을 생각이 났다. ‘범인이 바로 할매였구나!

할매요, 내한테 시비 걸어서 고마운데, 사람들한테 제발 그라지 마소.




  작은책에서는 다달이 한 번 글쓰기 모임을 합니다.

글이란 소설가, 시인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건 사람들보다 평범한 서민들이 써야 합니다. 집에서 일하는 주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입시 공부에 시달리는 학생, 늘 스트레스에 찌든 샐러리맨 노동자, 노동자보다 더 힘든 영세사업자,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은 서민들이 써서 서로서로 위안 받고, 살아가는 힘을 받는 것이야 말로 글쓰기의 진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육의 결과는 ‘글’로서 나타납니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아도 ‘글’로서 표현하지 못하면 그 교육은 죽은 교육입니다. ‘글쓰기’가 아니라 ‘글짓기’나 또는 ‘논술’이라는 괴상한 교육으로 올바른 글쓰기 교육을 외면했던 우리 교육 현장에서 이제는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달아  글쓰기 열풍이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제대로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작은책에서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지만 스스로 배울 수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써 온 글을 평가하고 자기가 써 오고 고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글쓰기를 배웁니다.

글을 쓰고 싶은데 자신이 없는 분.
글을 많이 써 봤지만 잘 쓴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분.
글은 한 번도 쓰지 않았지만 남의 글은 귀신같이 보는 분.
글쓰기 취미도 없고, 글도 못 쓰는데 그냥 사람 만나는 게 좋아 뒤풀이에 참석해 술이나 마시고 싶은 분.
작은책 글쓰기 모임은 이런 분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한 번 나오면 '기냥' 평생회원이 되고, 웃다가 보면 글쓰기는 저절로 됩니다. 회비는 자기가 먹을 밥값 5천 원(+술값 5천 원)이면 됩니다.
언제- 2009년 9월 19일 토요일 4시
어디서- 작은책 사무실

서울 글쓰기 모임(다달이 셋째주 토요일)
언제- 20010년 1월 16일 토요일 늦은4시
어디서- 작은책 사무실

부산 글쓰기 모임 
언제- 2010년 1월 18일 월요일 늦은7시
어디서 - 부산 진구 가야1동 1-5 실업극복지원센터 3층
문의할 곳 : 김광열 011-568-3370 박선미 010-2827-1162, 작은책 02-323-5391


경남 글쓰기 모임
언제 - 2010년 1월 15일 금요일 늦은7시
어디서- 상남동 노동회관 201호
문의할 곳 _ 강봉수 011-557-0985 작은책 02-323-5391


작은책 서울 사무실 오시는 길 -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5층 481-2 도서출판 작은책
작은책 323-5391
주소-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5층
작은책 사무실은 5층이지만 겉에서 보면 4층 건물입니다.

2호선 -첫 번째 방법: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왼쪽으로 도세요. 빵가게와 정비공장 사이 마포만두 골목으로 10분만 쭉 가시면(중간에 부동산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버스 다니는 큰길이 나옵니다. 큰길에서 오른쪽으로(HP컴퓨터 가게를 끼고) 3분 가다 보면 '기분좋은 가게'가 나옵니다. '문턱없는 밥집' 사이에 있는 문으로 들어오세요. (전체시간 13분)

2호선-두 번째 방법(길을 잘 못 찾으시는 분은)-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곧바로 5분 가시면 우리은행 사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왼쪽으로 7분 가다가 큰사거리 서교가든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서교교회가 나오고 교회 오른쪽에 있는 건물입니다.(이렇게 오실 때는 조금 돌지만 헤맬 걱정이 없습니다) 큰 길가에 있습니다. 1층엔 '문턱없는 밥집'과 '기분좋은 가게'가 있습니다. (전체시간 15분)

6호선 - 1번 출구로 나오세요. 왼쪽으로 4분 가시다 보면 성산초교 사거리가 나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5분 가세요. HP컴퓨터 가게 지나 기분좋은 가게가 나옵니다.(전체시간 10분)

 ::: 부산지하철 2호선 가야역 하차, 2번출구로 나오시거나 가야방면 버스타고 가야시장에서 내려서 서면방향으로 100m 직진 육교가 나옵니다. 육교 왼쪽 골목안으로 쏘옥~오시면 오른쪽에 5층짜리 건물이있어요. 거기 3층 부산실업극복지원센터로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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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해고 노동자 류승택 씨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안건모




류승택 씨는 대한항공 소속 김해공장에서 일하다 2005년 9월 14일 해고됐다. 해고 사유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터넷 언론 기사, 즉 민중의소리에 난 기사를 사내 홈피에 유포했다는 거 하나고, 또 하나는 제 개인 홈피에 회사 문서를 올렸다는 게 이유죠.”

문제가 된 민중의소리 기사는, 2005년 대한항공조종사 노조가 쟁의행위와 관련 준법투쟁을 위해 준비한 리본을, 사측이 ‘절도’한 사실을 보도한 기사이다. 회사는 그것이 회사의 기물이기 때문에 ‘수거해 간 거지 절도가 아니’라고 명예 훼손으로 고발까지 했다. 또 하나는 류 씨의 개인 홈페이지에 ‘대외비입니다’라는 제목의 글, 회사 인사 정책(C-Player, HR Bank 등) 관련 문서를 올렸다는 이유와 개인 홈페이지에 회사로고 무단 사용 및 회사 문서 무단 게재, 위규 사실 시정 상사 지시 불이행 등이다. ‘C-플레이어’는 회사가 ‘3년 동안 가장 일을 못하는 사람을 저 평가자로 분류하는 것이고, 'HR-뱅크'는 대기 발령을 말한다. 인간으로서 모멸감을 받아 스스로 나가게끔 하는 것이다.

“사내 게시판에 보면 조종사는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억지 파업이니 하는 온갖 걸 다 실어 놨거든요 그렇다면 왜 파업을 하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다른 직원들이 조종사노조를 비판하고 조선일보 기사를 퍼올렸듯이 저도 민중의소리 기사를 퍼 올린 거거든요.”

△ 2006년 1월, 단식 투쟁하는 류승택 씨 ⓒ 안건모


류승택 씨는 2005년 10월 5일에 서울로 올라와 해고자 동지회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일인시위를 하면서 법정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류승택 씨는 1심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조정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판사가 정말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무조건 돈을 받고 정리하라는 거예요. 돈은 많이 받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난 못한다 했지요. 왜 심리도 안 해 보고 그렇게 판단하냐고 했지요.”

류승택 씨는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패소했다. 맨 처음 회사가 자신을 해고했던 이유는 2심에서는 아예 다뤄지지도 않았다. 류승택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류승택 씨는 경남 하동 골짜기에서 태어났다. 나무껍질 벗겨 먹고 살 정도로 어려운 할아버지 세대와 같은 삶을 살았다. 한반에 1, 2, 3학년이 같이 있는 분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했다. 중학교 때 신문을 배달하기도 했다. 공고를 졸업하고 1989년도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대한항공에 들어갔다고 부모님들은 기뻐했다.

류승택 씨는 군대 갔다 와서 복직해 2005년에 해고당하기 전까지 정말 평범하게 살았다. 1995년 회사가 3조 2교대라는 근무 제도를, 스윙 제도라는 맞교대 형태로 개악하려고 했다. 부산지부 대의원이나 조합원들의 의견은 전혀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조합원이었던 류승택 씨는 부당한 회사의 행태에 삭발까지 하면서 항의했다.

△ 대한항공 정문에서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주고 있는 류승택 씨 ⓒ 안건모


“제가 좀 앞섰던 거 같아요. 정직 2개월 징계를 당했지요. 그때 이후로 지금껏 이렇게 살아오고 있지만 지금 생각해도 후회는 안 해요. 오히려 빨리 알아야 할 걸 뒤늦게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년이면 해결된다고 믿었다. 아내한테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3년이 넘어서는 지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류승택 씨는 가족들한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싸움은 개인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가 아프고, 어머니는 아직도 새벽에 청소일 나가시는데, 힘들고 안타까운 거는 있지만 제가 어차피 시작한 일이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싸움이기 때문에 그냥 멈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오히려 복직한 뒤에도 노조 민주화 같은 이 사업들은 고스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조조정이 들어오더라도 누군가는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함께 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류승택 씨는, 자본의 탄압도 있지만 어용 노동조합의 행태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본들도 그 썩은 노조를 이용해야 노동자를 쉽게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대한항공 건물 전경 ⓒ 안건모


“단순한 해고자의 복직 문제가 아니라. 대한항공 노동자들이 새롭게 바로 서는 것은 주체가 서야 할 문제도 있지만 어용노조의 썩은 부분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노조가 변하는 계기가 되고 또 세상이 변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우리 안의 적이 가장 무섭다는 말과 통하는 건지도 모른다. 마치 이명박을 찍어 준 사람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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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용준 한 명만도 못하냐!(2009년 2월호)
오도엽의 일터 탐방

오도엽/ <작은책> 객원기자

‘여성 크로커다일’을 아십니까? 악어 그림의 상표가 붙은 여성 캐주얼. 이 옷을 만들어 파는 ‘(주)형지어패럴’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날도 바시니’라는 남성 브랜드를 만들어 한국 최고 연기자 배용준을 전속 모델로 계약한 회사이기도 합니다. 이 회사의 최병오 회장은 패션 업계의 신화로 불리기도 합니다. 나이 서른에 동대문에서 허름한 옷 가게를 열어 사업을 시작했고, 25년 만에 여성 캐주얼 시장의 선두에 섰습니다. 샤트렌, 올리비아 허슬러, 라젤로……. 새로 시장에 선보인 브랜드마다 소비자의 호응이 좋았습니다. 2007년도 우리나라 매출 순위 821위, 순이익은 481위를 차지한 알짜 기업입니다. 전해 대비 매출 성장률이 30퍼센트가 넘더군요. 2008년에는 매출이 5천억을 넘어섰습니다. 2011년에는 매출 1조 원 규모의 종합 패션 전문 기업이 되겠다고 야심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에 최병오 회장이 한 모임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을 들은 한 참석자는 ‘이론으로만 떠드는 강사와 달리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배려, 그리고 나눔 경영의 철학을 지닌 분’으로 ‘존경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인간 존중, 나눔 경영.’ 얼마나 우리 사회가 바라는 경영자의 모습입니까.

존경해야 할 최병오 회장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한 기사가 지난해 12월 9일 언론에 나왔습니다. 한 경제 전문 언론에는 사업 수익의 일부를 교육 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한 후원금으로 쓰겠다면서 국제 구호 단체 유니세프와 나눔 파트너십을 체결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같은 날, 이 아름다운 행사장 바깥 풍경을 다룬 인터넷 언론의 기사도 있네요. 앗,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지어패럴 직원이 피켓을 들고, ‘5년 동안 야근하고 일요일 특근한 대가가 해고라니……’ 하면서 울부짖고 있지 않습니까. 설마, 존경스러운 경영자가 있는 회사에서…….

무엇인가 사연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형지어패럴을 찾아갔습니다. 올해 쉰셋인 이재석 씨는 형지어패럴 샘플실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앉으라고 하더니 취재수첩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쏟아 냅니다.


△ 오도엽 기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이재석 씨 ⓒ 작은책


“제가 이 분야에서 30년 넘게 일했습니다. 본래 형지어패럴에는 샘플실이 없었어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알았던 분이 이곳에서 개발실 부서장으로 있었어요. 저보고 샘플실을 만들려고 하는데 와서 일을 해 달라는 거예요. 5년 전 일이죠. 샘플실은 매장에 내놓을 상품을 미리 만드는 일을 해요. 여기서 만든 샘플 옷을 가지고 품평회를 거쳐 제품을 선정하죠. 옷 패턴이 결정되면 재단도 하고 미싱도 하고 다 해요. 이 작업이 혼자서는 힘들거든요. 보통 둘이 짝이 되어 일을 하는데, 저는 아내와 함께 일했어요. 한 사람 월급만 받으면서 둘이 일을 시작한 거죠.”

이재석 씨는 얼마나 가슴에 맺힌 이야기가 많은지 지난 5년의 이야기를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계속 이어갑니다.

“하루 평균 열두 시간씩 회사에서 살며 날마다 잔업을 했어요. 토요일 격주 휴무가 된 지도 한 1년밖에 안 돼요. 명절 휴무 전에는 대체근무도 하고, 공휴일에도 특근을 했어요. 이제껏 근로자의 날에 쉬어 본 적도 없어요. 품평회가 끝나면 보통 샘플실은 잠깐 여유가 있는데, 저희는 그 다음날로 다른 브랜드 샘플 작업을 해야 했어요. 일요일에는 대리점을 방문해 상품 실태 조사를 해요. 제주도만 빼놓고 전국을 다 돌아다녀요. 저는 자가용이 없어 버스나 전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요. 약도 하나 가지고 구석구석에 있는 대리점을 찾아다니려고 하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대리점을 못 찾으면 전화를 해서 길을 물어보면 되는데 회사에서 그걸 못하게 해요. 대리점에 찾아간다는 정보가 새면 안 된다고요.”

대리점을 방문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이재석 씨 목소리가 커집니다.

“이 계통, 봉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많이 배우지 못해 학벌이 낮아요. 경력은 수십 년 되지만 직책은 사원이죠. 대리점을 찾아가 명함을 내밀면 점주들이 깔보기도 합니다. 찾아가면 무척 싫어해요. 본사에서 조사를 나오니 좋아할 리가 없죠. 옷 팔기 바쁜데 왜 찾아오냐, 내가 회장하고 친군데 니가 뭐냐, 뭐 이런 모욕을 받기도 해요. 샘플실 업무도 아닌데, 쉬는 날 나가서 욕만 얻어먹는 셈이죠. 내가 나이가 오십인데……(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소처럼 일만 했어요.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참고 일만 했어요.”

최병오 회장이 샘플실에 들어오면 이재석 부부에게 미안해 하더랍니다. 두 사람이 일하는데 제대로 임금을 챙겨 주지 못한 걸 안타까워 하며 말을 건넸고요. 이재석 씨 부부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았던지, 앞으로 샘플실은 부부 사원으로 채용하라고 했습니다. 회사가 새 브랜드를 출시하며 샘플실 직원을 늘여 갈 때 실제로 부부를 함께 채용했습니다.

지난해에 이재석 씨 부부는 모범 사원으로 뽑혀 사이판으로 해외 연수를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출국에 필요한 서류도 다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1월 12일, 점심을 먹고 작업실에 들어오니 12월 12일 자 해고 통지서가 놓여 있는 것 아닙니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해고를 받아들이죠. 해마다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고, 거액을 쏟아부어 우리나라 최고 연기자를 전속 모델로 쓰면서, 5년 동안 야간에 특근해 가며 죽도록 일한 저희들을 해고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우수 사원은 뭐 하러 선정합니까? 일을 못한 것도, 회사가 무너질 위기도 아닌데 말입니다. 지난해 가을에 주거래 은행이 바뀌면서 새로 선정된 은행이 무료로 경영 컨설팅인가 뭔가를 했어요. 불필요한 인력이 많다고, 한 100여 명인가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나. 그때부터 이유도 모르고 해고 통지가 날아오기 시작했어요. 500명이던 직원이 지금은 400명 정도예요. 불필요한 존재였다면 왜 야근에 특근은 시킵니까? 이렇게 회사 키운 게 누군데요.”

△ 이재석 씨 차영미 씨 부부와 한수자 씨 이광년 씨 부부. 갑작스런 해고 통보에 웃음을 잃었다. ⓒ 작은책


잘나가던 회사를 컨설팅 한답시고 며칠 오가던 사람의 한마디에 백여 명의 직원이 밥줄을 잃었습니다. 꽥 소리 한 번 못하고 나간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해고 통보를 받은 샘플실 직원 여섯 명만이 회사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모두 부부 사원입니다. 여성들은 십대부터 이 계통에서 일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수십 년 동안 쌓은 경력이, 배운 사람들의 세치 혀에 ‘불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재석 씨는 받아들일 수 없어 거대한 기업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선 그래요.‘어디 해 봐라. 오륙 년 걸릴 텐데 법적으로 가 봐라. 버틸 수 있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알고 있어요. 큰 회사에 맞서는 게 어렵다는 거 알아요. 이제 와서 슬그머니 돈 좀 줄 테니 나가서 아웃소싱 받아 일하래요. 저희는 다른 거 필요 없다. 첫째도 둘째도 복직이다. 정말 회사가 어렵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미련 없이 나갈 수 있지만 지금 이거는 아니다. 이랬어요. 제 말이 틀렸나요? 이해가 됩니까?”

틀린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직원을 해고하면서, 수십 명의 기자를 호텔로 불러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사업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최병오 회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강연장에서 ‘인간 존중과 배려’를 강조하시던 최병오 회장은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나눔 경영’ 기업 이미지만 좋게 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쇼’를 하신 건가요? 최병오 회장님, 혹 실수였다면 하루 빨리 해고자를 복직시켜 주십시오.

이재석 씨의 부인 차영미 씨는 해고 통보를 받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눈물만 펑펑 흘렸답니다. 하나뿐인 아들은 군 입대 자원 신청을 했습니다. 한 명의 입이라도 줄여야 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벌다가 한날한시에 쫓겨났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함께 샘플실에서 일하던 한수자, 이광년 부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수자 씨는 손이 덜덜덜 떨려 일이 안 되더랍니다. 해고를 당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자신이 해고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머리가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다가 가끔 현실로 돌아오면 미쳐 버릴 것 같답니다. 정신병자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답니다.

새 옷을 만들 때마다 어떻게 하면 입는 사람이 더욱 편하고 예쁠까만을 생각하며 장인 정신으로 일했던 형지어패럴 샘플실의 세 쌍의 부부. 평생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이들은 오십이 넘어 처음으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여성 크로커다일’이라는 유명 브랜드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형지어패럴이라는 큰 회사에 있으면 수입은 적더라도 좀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한순간에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배용준을 전속 모델로 계약했다는 사실을 앞 다퉈 다루던 언론들,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사랑의 손길을 대대적으로 떠벌리던 기자님들, 여기 한겨울 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겁니까?

더 큰 추위가 노동자를 덮칠까, 무척 두려운 2009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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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은 끝나지 않았다(2009년 2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정인열/ 코스콤비정규지부 부지부장

2008년 12월 29일 파업은 475일 만에 끝이 났다. 조합원 76명 중 65명은 3개월 이내에 무기계약직 별도직군제로 고용하고, 그 밖에 11명의 고용 문제는 ‘추후’ 협의 후 합의하기로 했다.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회사의 직접 고용을 투쟁을 통해 얻어 낸 이례적인 성과라고 평할 수 있다. 물론 11명(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절반의 승리와 절반의 패배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결이 되면 그 긴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눈물이 나고 아주 감격해서 어찌할 줄 모를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많아서 일까? 아니면 그 이면에 있는 냉혹한 진실 때문일까?

우리가 길바닥에서 먹고 자고 한 여의도는 소돔과 고모라같이 의인하나 없는 곳이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한 가족처럼 일했던 연봉 9300만원의 정규직 동료의 외면과 계속되는 방해는 우리를 더욱더 뼈저리게 춥게 만들었다. 1800만 원 연봉의 비정규직들은 매일 아침 팔뚝질을 하면서, 눈인사도 피하며 출근하는 정규직 동료를 바라만 봐야 했다. 거기에다 타결 막판에 정규직 이기주의를 결국 드러낸 증권선물거래소(코스콤의 원청) 노조 간부들의 반대로 전원 직접 고용 합의가 무산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날은 거래소 앞마당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분신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분신도 못하고, 고공시위도 못하고, 어디 가서 한풀이도 못한 채 우리는 힘없이 그 자리를 떴다. 자기들만의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정규직 노동조합 운동이 결국 비정규직의 정당한 요구도 묵살해 버리는 현실을 겪으면서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이렇게 싸운다 한들 세상이 바뀌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노동자가 저 모양이라면……’ 하는 절망에 또 절망이었다.

그래도 거래소와 코스콤 밖을 돌아보면 우리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않은데 노동자들이 모아 주신 성금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앞으로 파업 투쟁 때보다 더 많은 과제들이 남았다. 합의서가 이행될 수 있게 11명을 포함한 전원이 하루라도 빨리 복직하게 하는 것, 임금과 업무 배치 등 노동조건을 협상하는 일, 노동조합 활동에 관한 일 등이다. 뉴스에는 타결되었다고 하나 우리는 언제 또 다시 거래소 앞에서 농성을 시작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지부에 바라는 게 있다면 상명하복 식으로 일방적 명령 전달을 받는 의사소통 구조가 아닌 모든 조합원이 자유롭게 토론하여 의사 결정을 하고, 지부장은 대장이 아닌 조합원을 대표하고 조합원과 평등한 위치에 있는 그야말로 민주적인 조합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기나긴 파업 기간 중에 깨달았고 그것이 지금도 가장 절실하다. 민주적인 절차 없이 얻은 성과는 한낱 거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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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을 굽는 예수' 이적 목사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안건모




민통선에서 공부방을 하는 목사? 밤에는 횟집 주인, 낮에는 횟집에서 독거 노인 밥 주는 목사? 붕어빵을 파는 목사? 들으면 들을 수록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분일까. 12월 11일 5시, 횟집을 찾아갔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불광천 옆 주택가에 자리잡은 조그만 횟집, <이적 시인의 -‘바다가 된 그대에게’ 사량도 세꼬시>라는 이름으로 된 간판이 보였다.

8평 정도 되는 가게에 탁자가 네 개,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책을 보던 이적 목사가 반겨 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적 목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한국의 근본주의 교회를 비판했다.

언제 목사님이 되셨냐고 물었다.

“80년 대에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묘한 이유로’ 쫓겨나게 되죠.”

1980년 2월 무렵, 전두환이 집권하고 계엄 때였다고 한다.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전두환의 안녕과 무궁한 발전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적 목사는 그 조찬기도회가 잘못됐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담임 목사한테 지적을 받았다. 그 길로 이적 목사는 “다시는 교회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고는 전도사 생활을 접었다.
그 뒤 이적 목사는 지방 일간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 그러다가 1980년 10월 느닷없이 삼청교육대로 억울하게 끌려 들어간다.

“산꼭대기 동네에 수돗물이 잘 안 나온다, 공원에 깡패들 득실거려 경찰 단속 손길 아쉽다” 하는 시민들 편을 드는 기사를 좀 썼을 뿐이었다.

이적 목사는 삼청교육대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면서 ‘하나님은 왜 정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가’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이는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붕어빵을 굽고 있는 이적 목사 ⓒ 안건모


그리고 악몽 같은 4주를 보냈다. 풀려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자들은 성적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삼청근로봉사대 6개월 언도(?)를 내린다. “삼청근로봉사대를 갔는데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더라고. 밤이 되면 눈보라 몰아치고 영하 15도 회오리 바람 몰아치는 야밤중에, 팬티만 달랑 입혀 놓고, 연병장에 세워 둬, 거기다가 두 팔 두 다리 벌려 세워 놓고, 그마저도 부족해서 세숫대야에다 물을 퍼 가지고 와 몸에다 물을 뿌리는 거야, 물방울이 탁탁 튐과 동시에 물방울이 몸에 얼어 붙어 와, 그런 살인적 추위 상상도 못해 봤어.”

임근실이라는 사람이 2소대에서 이적 목사가 있던 3소대로 옮겨 왔다. 임근실 씨는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바른 소리를 잘 하던 사람이었다. 전두환 욕도 막 했다. 불침번 서라 하면 “민간인인 내가 왜 불침번을 서냐 ”하며 반항하고 대들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들인 악질 조교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이 친구는 매일 개 맞듯이 맞는 거야. 이 친구 밤마다 불려 나가서 그 겨울에 물고문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 얼굴이 아니야. 나도 같이 물고문을 받았는데 조교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한테 ‘당신은 글쟁이라는 걸 안다. 여기서 개죽음 당하지 말고 살아나가서 글을 써서 자기 죽음과 삼청을 폭로해 달라’ 그러는 거야.”

그날 임근실 씨는 쏟아지는 몽둥이 세례를 견딜 수 없어 개집 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러자 조교들은 개집 구멍을 하늘로 올려놓고 찬 물을 퍼부어 댔다. 임근실 씨는 개집 안에서 요동을 쳤다. 그 뒷날 임근실 씨는 시체로 들려 나갔다.

이적 목사는 꼭 살아 나가서 삼청교육대의 만행과 그이의 죽음을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은 ‘사회보호법’을 만들어 이적 목사를 군 감호소로, 또 청송 감호소로 이감을 보내면서 삼청 최장기수로 만들었다. 이적 목사는 84년 4월 3년여 만에 이른바 모범수로 가출옥을 해 살아나오게 된다.
하지만 바깥도 감옥이었다. 사기꾼, 빨갱이, 깡패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살아야 했다. 이적 목사는 임근실의 유언을 되새기면서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삼청폭로 미수 사건인 양곡상 침투사건으로 공무원자격 사칭, 공갈 등의 파렴치 죄로 조작되어 다시 8개월, 10개월, 두 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 이적 목사가 운영하는 횟집 ⓒ 안건모


이적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인 민족문학에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는 10편의 연작시를 발표하고 뒤이어 11월 삼청 실록수기《삼청교육대 정화 작전》(도서출판 전예원)을 출간한다. 국민들은 독재정권의 잔혹성에 몸서리를 쳤다. 심지어 군사정권에 아부했던 조중동까지 ‘삼청교육대 사망자 사인 의혹 많다’, ‘생체실험의 수기다’, ‘한국판 수용소 군도의 인권 유린과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 보내면서 군사정권을 비판했다.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은 그이를 만난 뒤 당내에 ‘삼청교육대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군사정권을 압박한다.

이적 목사는 김대중을 대통령 만드는 데도 한몫을 했다. 대변인, 지역선거대책위원장, 중앙당 부위원장, 선거 연설원을 지내며 김대중을 도왔다. 결국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 길이 보장될 수도 있었다.

“김대중 정권 때 바다살리기 국민운동본부라는 관변단체가 하나 생겼어, 월급은 없었는데 거기 본부장을 맡으라 그러더라고.”

취임식을 하는 날 친인척한테 받은 단체 후원금 때문에 문제 아닌 문제가 생겼다. 법원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싸우면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적은 민통선에 자신이 건립했던 통일 문학관으로 머리도 식힐 겸 잠시 글 쓰러 들어갔다가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 먹는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통선에 들어간 날 느닷없이 청빈한 참예수를 떠올렸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때 내가 신학교 출신이라는 게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거야. 기독교가 망하기만 바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들어가서 그들과 싸우며 참예수의 변혁 운동을 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니냐. 내가 욕했던 거는 여의도 ㅈ목사와 같은, 한국의 잘못된 기독교 지도자들이 미웠지,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니냐. 귀신 예수가 아닌, 평화와 사랑의 예수, 그 거룩한 삶을 본받아서 실천해 나간다면 나야말로 참예수의 그림자라도 되는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자, 이렇게 판단한 거지.”

△ 민통선공부방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사랑의 붕어빵 봉사회 ⓒ 안건모


이적 목사는 신학대를 편입했다.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 민통선 마을에 빈민 운동을 자원한다. 그리고 알콜중독자 자녀를 위한 아동공동체와 민통선 공부방을 만들었다. 2002년 11월이었다. 그리고 마을회관을 고쳐 민통선 평화교회도 설립했다. 신자는 해병대 군인들이었다. 헌금이 없으니 아동공동체와 공부방 운영하기가 벅찼다. 무료급식과 아동장학사업, 보육사업, 차상위계층자녀발굴보호사업, 체험학습 등 많은 사업을 벌려 놓았는데 후원금 들어오는 곳은 적었다. 그래서 이적 목사는 공동체 운영하기 위해 불광천에 횟집을 차렸다.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도 공동체와 공부방을 운영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더구나 불광천 근처에 사는 독거 노인들에게까지 무료 식사를 대접하는 독거노인급식소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그이의 목회를 좋아하는 서울 교인들과 사랑의 붕어빵 봉사회를 만들어 가게 앞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교인들한테 십일조 헌금 받아서 사랑을 실천했나? 그분 스스로 대중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전도하며 평화를 외치며 박애와 사랑을 실천했단 말이야, 목사의 삶이 예수의 삶처럼 그렇게 돼야 하는 거 아녀? 그래서 내가 만분의 일이라도 그분 흉내라도 내 보려고 이렇게 사는 거지.”

그렇구나. 예수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구나. 한국의 기독교를 싫어하면서 예수가 어디 있나 하고 생각하던 필자는 이적 목사를 보고 예수는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적 목사가 이번에 운영비 마련을 위해 다시 책을 낸다. 《민통선 예수》라는 책이 현재 인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땅에 사는 민중들을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 이명박 장로를 비롯해 그 하수인들, 부디 그 책을 읽고 회개를 좀 했으면 좋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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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쪼코형님과 박 주사님

고화숙/ 전국공무원노조 인천본부 문화국장

쪼코형님과 박 주사님은 공무원노조 조합원이자 간부이고 현직 지부장과 지부장을 역임했던 사람들이다. 쪼코형님은 공무원이었는데 2004년 파업 투쟁 이후 파면돼서 지금은 해고자다. 박 주사님도 해고되었지만 복직돼서 지금은 동사무소에서 근무하신다.

두 분 다 50대고 공무원 6급 팀장이거나 이었다. 쪼코형님은 5부 스포츠에 흰머리고, 박 주사님은 2대8 가르마에 새까만 머리칼이다. 쪼코형님은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박 주사님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공무원노조 인천본부에서 일하는 일꾼이다.

쪼코형님이라 하는 이유는 대화할 때 어느 지점에서 끊거나 정리할 때 ‘좋고’ 하신다. 발음 그대로 따면 ‘쪼코’가 돼서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쪼코형님은 누구나 ‘형님’하고 부르고 싶을 만큼 친근함과, 비호감을 동시에 갖고 있다.

술자리에서 말의 반은 씨팔이고 양념이 좆도 혹은 개시끼들이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놀랄 수도 있겠다. 말투가 그런 거지 아랫사람이라고 하대하는 법도 없고 남 얘기도 잘 들어 주신다. 그래서 쪼코형님하고 만나면 즐겁다.

박 주사님은 마주 대하는 즉시 노조 지부장님보다는 주사님 하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확 들게 한다.

예전에 한번 ‘어떤 공무원’이라는 제목으로 작은책에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박 주사님이다.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만큼 척 보는 즉시 ‘깐깐’ 이렇게 써 있다고나 할까.

두 분의 재미난 공통점은 노동조합 운동을 직접 하고 있으면서 ‘노동운동’에 대해서 주입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거다. 50대다우신 태도이다.

사실 난 두 분과 그런 거창한 주제로 대화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서 어려운 얘기는 잘 꺼내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사래를 치거나 고개를 좌우로 흔드신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전교조 선생님이 쓴 좋은 글이 하나 있어서 박 주사님한테 ‘이런 문제에 대해 공무원노조도 같이 공감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하니까 읽어보기도 전에 ‘나한테 노동운동에 대해 주입하지 말라니까’ 하신다. 그래서 막 웃었다.
쪼코형님의 7년 간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도 “일반 사기업과 공무원은 다릅니다잉”이다.

물론 어떤 조직이나 일반성과 특수성은 있는 거고 노동자라고 해서 똑같을 수는 없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도 굳이 매번 다르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 ‘특수성’을 강조하고 싶은 건데 ‘틀렸다거나 아니’라고 반론하지도 않는데도 매번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속으로는 ‘누가 머라나’ 하면서 웃는다.

그리고 또 하나 공통점은 노조에 대해 맨날 흉보면서도 노조 행사 때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챙기신다는 거다.

“그 시끼들 말이야 일을 그따위로 하고 말이야.” 이게 쪼코형님 버전이고 “노조에 전망이 없어요. 공무원노조를 도대체 왜 만든 거예요. 조합원들한테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는 노조가 노좁니까.” 이런 정갈한 어투가 박 주사님 버전이다. 맨날 전망이 없다면서 박 주사님은 무려 두개 지역의 지부장을 하시고 계시다. 워낙 자주 하는 말씀이니 남들은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그 꼴을 못 보는 정씨의 버럭 한마디.

“아니, 어르신들이 어떻게 하면 도와줄까, 어떻게 해야 잘될까, 이런 말씀은 안 하시고 맨날 남 탓만 하고 김 빼고 뭐지?”

보통 이분들과 나누는 대화의 장면이 이렇다.

이런 독특한 특징을 가진 두 분과 깊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쪼코형님과 대화를 나누다 말 끝에 ‘원죄 의식’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는데 본인이 정말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면서 간만에 욕 안 하고 착잡한 표정과 말투로 “나는 괜찮은데 말이야 나 때문에 괜히 해고당한 사람들 보면 참 마음이 너무 아파”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신다. 파업 당시 지부장이었던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짠했다.

박 주사님의 걱정은 좀 다르다. 전교조는 해고 기간이 길더라도 복직돼서 현직으로 가면 일할 수 있지만 공무원은 설령 복직이 돼서 현직으로 돌아가더라도 일하기 어렵다는 거다. 일리 있는 말이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공무원 사회에 지금도 5년인데 이보다 더 긴 세월을 떨어져 있다가 들어가서 적응하는 게 단순히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일수도 있겠다 싶다. 까마득한 후배들 눈치부터 부딪혀야 할 문제들이 얼마나 첩첩산중이겠는가. 이런 두 분의 고민을 들으면서 해고된 공무원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글을 쓴다.

공무원이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로 파업을 했다. 하루 혹은 이틀 정도 결근을 했고 그만한 일로 정부는 무려 400여 명을 공직 사회에서 내쫓았다. 대부분은 복직 판결을 받았으나 130여 명은 정말 쫓겨났다.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나 노동자인데 제대로 권한 행사를 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는 공무원이나 다른 게 뭘까. 공무원노동조합이 생기면서 겉으로 드러나 나타나는 변화보다 더 중요하게 내부 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공무원노동조합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과제들이 높고 많다 보니 작은 변화에 둔감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공무원 사회가 훨씬 깨끗해져 가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런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쪼코형님이나 박 주사님 같은 분들이다.

쌀 직불금을 부정한 방법으로 수령해 간 공무원들, 여전히 검은 뒷거래에 가담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고개 빳빳이 들고 사는데 쪼코형님과 박 주사님의 어깨는 오늘도 무겁다. 잘못된 세상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만들어 달라는 소박한 요구가 폭력으로 돌아오는 사회, 그것도 생존권까지 박탈해 가는 잔인한 사회는 참 나쁘다. 나쁜 사회를 바꿔 보겠다고 처지는 고개와 무거운 어깨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쪼코형님이나 박 주사 님같은 사람들…….

물론 지금 사회는 훨씬 더 비참한 노동자들이 즐비하다. 기륭이 그렇고 이랜드가 그렇고 인천 GM대우 비정규 노동자들이 그렇다. 그러나 조금 덜 비참하다고 해서 공무원 노동자들의 해고 문제가 소홀해져야 할 이유는 없다. 정부이기 때문에 솔선해서 잘못된 매듭을 푸는 모범을 보이고 이를 계기로 나쁜 자본의 횡포를 줄여 가는 건 꿈에나 불과한 일일까.

이런 마음을 담아 해고된 공무원 노동자들이 하루라도 빨리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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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민들에게 살인 테러 자행한 이명박 정권 규탄한다
   용산 철거민 살인 진압 규탄 성명


  지난 1월 20일 아침,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한 건물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철거민들을 경찰특공대가 과잉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너 폭발에 따른 화재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원 한 명이 숨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정말 우리가 21세기의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놀랍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후안무치한 경찰의 책임 회피와 은폐 공작을 보면서, 우리는 이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마음 아파 할 시간도 없이 다시금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난 세기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나 있었을 법한 살인적 진압 작전과 경찰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한 사건 조작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경찰이 농성을 시작한 지 세 시간 반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에 이미 경찰특공대 투입을 결정했다는 내부 문서가 발견되었다. 경찰은 철거민들이 도로에 화염병을 던지는 등 테러 행위를 했기 때문에 조기 진압을 결정했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지만,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손에 들기도 전에 이미 그들은 살인적 진압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60여 통의 시너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도 화재에 대한 대비 하나 없이 농성장을 침탈했다. 아래층으로 향하는 문을 막아둔 채 옥상으로 경찰특공대를 투입시키는 바람에 철거민들이 건물 아래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음에도 건물 아래에는 매트리스 하나 있지 않았다. 그리고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경찰특공대를 태운 컨테이너가 기중기에 의해 건물 옥상으로 내려지면서 철거민들이 농성하고 있던 망루를 건드렸고 그 충격으로 인해 폭발이 일어난 것 같다고 입을 모았지만, 경찰은 철거민들이 들고 있던 화염병 때문에 불이 났다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경찰이 사망자들을 두 번씩 죽이고 있는 작태는 정말 치가 떨리도록 뻔뻔스럽다. 사건이 일어난 지 열두 시간도 되지 않아 유가족의 동의도 없이 시신을 부검해 놓고는,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에서는 주민등록증이 버젓이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도 발표하지 않고, 20여 명에 이르는 부상자들이 어디에 입원해 있는지, 얼마나 다쳤는지조차 밝히지 않는 경찰의 은폐 공작을 보면서 정말 사망자와 부상자들의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전 · 현직 경찰관 모임인 ‘무궁화클럽’의 대표조차 “이번 참사는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과잉 충성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온 국민들의 비난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가운데, 경찰과 한나라당의 뻔뻔한 언행은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경찰특공대의 투입을 최종 승인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는 “그래도 법질서는 중요하다”며 계속해서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전국철거민연합과 민주노동당을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며 ‘반국가단체’ 라는 말까지 입에 담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제 집 한 칸 지키자던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세우고, 살인 진압 명령을 내린 리모컨을 쥔 자가 누구인지. 바로 뉴타운과 개발 이익에 미친 건설 재벌과 그들의 ‘사권력’이 되어 버린 공권력이 합심하여 이 나라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다. 이 나라의 권력이란 가진 자들의 이익 추구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무엇이든 처단해야 할, 진압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만행을 통해 국민들은 똑똑히 알게 되었다.

  경찰이 “그래도 법질서는 중요하다”며 철거민들의 목숨을 빼앗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 ‘질서’는 못 가진 자들이 가진 자들의 밑에서 고분고분 빼앗기는 질서, 고분고분 쫓겨나가는 질서만을 말할 뿐이다. 하지만 그 어떤 법도 살아남을 권리에 앞서지 못한다. 한겨울 보금자리를 뺏기고 거리로 내몰린 철거민들의 살아남을 권리를 통째로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러운 사건 조작과 정당성 주장을 일삼고 있는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또 다시 촛불을 들고 나선 국민들의 뜨거운 저항을 절대로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 철거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 진압 규탄한다!
― 살인 진압, 은폐 공작 책임자를 처벌하라!
― 노동자 민중 다 죽이는 이명박 정권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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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병원, 노동자는 파리 목숨
오도엽의 일터 탐방

오도엽/ <작은책> 객원기자

추석을 앞둔 9월 10일 강남고속터미널 너머에 있는 강남성모병원을 찾았다. 터미널과 병원을 잇는 육교에 올라서자 웅장한 글씨가 눈을 가로막는다. ‘2009년 5월, 생명을 존중하는 첨단 병원이 개원합니다.’ 이천억 원을 들여 짓는다는 가톨릭 대학교 서울성모병원.

강남성모병원에서 간호사와 호흡을 맞춰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파견업체를 통해서 고용된 사람들이다. 2년을 계약하고 들어왔고, 계약 기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가야 한다. 계약을 그리하고 일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해고에 아무 문제가 없다. 2006년 10월 1일에 파견업체에 고용되어 2년을 강남성모병원에서 일했으니 2008년 9월 30일에는 계약대로 집에 가서 푹 쉬면 그만이다. 법을 기계처럼 적용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법이란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 그것도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일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파리 목숨으로 여기면 안 된다.

홍석. 그는 서른일곱이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홍석 씨는 5년 전 자신이 다니던 성당을 통해 강남성모병원에 취직을 했다. 이때는 강남성모병원과 근로계약을 맺었다. 홍석 씨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돈보다는 환자들에게 봉사도 하고 사랑을 나눈다는 마음으로 고된 일도 흥겹게 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2006년 9월 28일, 낡아서 잘 굴러가지도 않는 침대를 힘겹게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으며 침대에 누운 환자를 검사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호출기가 울렸다.

“파견업체로 가라는 거예요. 더는 병원에서 직접 고용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딱 3일 남겨 두고 파견업체로 가든지 아니면 출근을 하지 말든지 선택을 하라는 거예요. 정말 얼떨결에 파견업체로 간 거예요. 별 수 없잖아요. 파견업체로 가지 않으면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판인데, 그것도 3일 남겨 놓고 통보를 하는데 어쩌겠어요.”


△ 9월 9일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항의집회를 하고 있는 조합원들. <비정규직 철폐하라>를 외치고 있다. ⓒ 작은책


홍석 씨만이 아니었다. 간호 보조 업무는 2002년 이전에는 모두 정규직이 담당하던 일이었다. 이 업무를 비정규직으로 고용 형태를 바꾸더니 2006년에는 파견업체로 떠민 것이다. 노동자들은 선택을 할 생각은커녕 시간의 여유도 가질 수 없었다. 시장에서 파는 채소와 다를 바 없다. 천 원에 팔리다가 해질녘에는 오백 원에 막판 떨이 신세가 되어도 그냥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팔려 나가면 그만인 존재다.

올해 서른둘인 이미경 씨도 마찬가지다. 다니던 회사가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하자 이미경 씨는 새 직장을 찾아 나섰다. 그때 강남성모병원에서 사람을 뽑고 있었다. 3교대로 일을 한다지만 하루 8시간 근무니 해 볼 만했다. 물론 강남성모병원과 근로계약서를 썼다. 이리 큰 병원이면 안정되게 일을 할 수 있으니라 생각했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장난이 아니다. 말이 8시간 근무지, 잠시도 숨 돌릴 겨를이 없다. 꼬박 8시간을 잔걸음으로 쉴 새 없이 뛰면서 근무를 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겨우 짬을 내서 식당으로 가 식판에 밥을 푸는 순간 호출기가 울린다. 호출기가 울리면 허기졌던 뱃속과는 달리 입맛이 싹 사라진다. 식판의 밥은 고스란히 잔반통으로 들어가기가 일쑤다. 제 시간에 근무가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늘 30분에서 한 시간은 잔업을 해야 한다. 수당도 없는데 말이다.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다가 퇴근시간이라고 나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자신이 담당한 환자의 일은 교대 근무자가 오더라도 자신이 끝내는 것이 마음이 놓인다. 보조 업무라 하지만 사람을, 그것도 아픈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이고, 생명을 다루는 일이 아닌가.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된다. 하루 8시간 넘게 병원 복도와 층계를 오르내리며 뛰어다녔으니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그리고 몸이 아픈 환자를 상대하다 보니 그 긴장은 육체의 피로를 몇 곱으로 가중시킨다.


△ 9월 9일 강남성모병원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조합원들. ⓒ 작은책


물론 이미경 씨도 홍석 씨가 있던 자리에 2년 전에 함께 있었다.

“너무 억울했어요. 찍소리도 못하고 파견업체로 팔려 간 거잖아요. 배추 시래기처럼 버려진 느낌이었어요. 그날 황당하게 파견업체로 버려진 사람들이 터미널 앞 호프집에 모여서 술을 한잔했어요. 울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러면서 다짐을 했죠. 이건 아니다. 다음에는 이렇게 당하지 말자.”

그리고 두 해가 지나고 9월이 왔다. 홍석 씨와 이미경 씨와 배추 시래기가 된 간호 보조 업무를 하던 파견사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한참을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했다.

홍석 씨와 이미경 씨에게, 강남성모병원 간호 보조 업무 파견 직원들에게 “2년 계약하고 들어왔으면서 이제 와서 못 나가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하며 손가락질할 사람 있습니까? 이들이 파견업체에 고용된 직원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강남성모병원에 고용된 사람입니까? 이들이 파견업체에서 일했습니까, 강남성모병원에서 일했습니까? 이들이 찍소리 하지 않고 나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가라사대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나무를 만들고 꽃을 만들었듯이, 강남성모병원 가라사대 간호 보조 업무가 정규직이 되라 하고 비정규직이 되라 하고 파견직이 되라 하면, 그 가라사대에 따라 고용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가톨릭의 정신입니까? 그게 생명 존중입니까? 수천억을 들여 짓는 새 병원 담벼락에 자랑스럽게 써 둔 ‘생명을 존중하는 첨단 병원’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인가요? 새 병원에는 70평짜리 초호화 병실을 만든다고 하는데요, 기업 CEO들이 입원을 해서도 회의를 할 수 있는 초특급 병실을 갖춘다고 하는데요, 가톨릭에서는 돈 있는 사람만 받아들이고, 돈 없는 이들은 2년마다 해고를 묵묵히 감수하며 일하는 세상이 옳은가요?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이들이 강남성모병원 간호부 소속 사원으로 되어있던데, 간호부의 부장님 과장님들이 수녀님이시던데, 수녀님! 당신 부서의 사원들이 시장판 배추 시래기 취급을 받고 있는데 침묵하거나 동조하거나 심지어 앞장서시는 것이 당신이 믿는 신앙에 따른 행동이신가요?

그리고 추석이 지났다. 강남성모병원에 비정규노동자들이 천막을 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천막이 세워진 몇 시간 뒤 강남성모병원이 용역업체 직원들을 동원해 천막을 철거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천막을 철거하는 과정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들려왔다.


△ 농성장 천막에 내걸린 현수막. ⓒ 작은책


9월 30일.

홍석 씨와 이미경 씨의 강남성모병원 마지막 근무하는 날 찾아갔다. 스무날 전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이미경 씨의 눈이 탱탱 부어 있었다. 웃을 때마다 콧잔등에 주름을 가득 지으며 까르르 자지러지던 이미경 씨는 보이지 않았다. 분홍 근무복 위에는 가을 하늘 빛깔을 가득 담은 조끼를 입었다. 결국 조끼를 입고 마는 구나. 칙칙한 청색도 뜨겁게 달궈진 붉은색도 아닌 가을 하늘빛 조끼라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설마 저 푸른 가을 하늘이 이들의 소박한 소망을 저버리겠는가 하는 위안을 했다.

“언제부터 로비에서 연좌 농성을 들어가셨어요?”

“연좌 농성 아니에요. 아침부터 병원 돌며 저희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 로비에서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왜 저희가 이런지 호소를 하는데 무릎이 팍 꺾여 이 자리에 주저앉은 거예요. 그동안 설움이 복받쳐 올라 주저앉아 있는 거예요.”

인사팀 직원들이 다가와 설움에 복받쳐 주저앉은 이들에게 나가라며 협박을 하였고, 병원의 연락을 받은 서초경찰서는 정보과 형사를 보내 연행을 하겠다고 통보를 한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 노동자들은 연행을 하든 말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투석을 받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병원을 온다는, 자신도 아이엠에프 때 정리해고를 당했다는 아저씨 한 분은 꼭 강남성모병원에서 계속 일을 하라며 요구르트를 건넨다. 휠체어에 링거를 달고 온 한 환자 분은 바나나 우유와 빵을 담은 하얀 비닐봉지 2개를 건네고 사라진다. 비닐봉지를 열던 박정화 조합원이 갑자기 굵은 눈물을 쏟아 내며 병원 로비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갔더니 손에 자그마한 쪽지 하나를 보여준다. 방금 전 우유를 건넨 환자가 봉지 안에 담아둔 쪽지다.

“힘내세요.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하며 응원합니다.^^”


△ 어느 환자가 투쟁 중인 조합원에게 건넨 음료수와 <힘내세요.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하며 응원합니다.>가 적힌 쪽지를 보고 있다. ⓒ 작은책


이미경 씨 병동에 있던 분이라고 한다. 환자들은 안다. 이들이 얼마나 병원에서 소중한 사람인지를. 아픈 자신들에게 이들이 보여 준 헌신과 애정을 환자들은 안다. 함께 일한 간호사들도 알고, 병원 청소를 하는 용역 아줌마들도 알고, 주차 관리를 하는 용역 아저씨들도 안다. 파견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이들이 강남성모병원 직원임을 알고, 반드시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 정말 환자들의 생명 존중만큼 노동자의 생명도 존중받아야 함을 세상은 알고 있다.

약물로도 수술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 2009년 광우병, 멜라민과 함께 온 사회를 엄습하고 있다. 비정규직,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사회가 무섭다. 가톨릭에서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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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