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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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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 에세이스트

 
 
 드디어 녹즙 졸업 허가를 받았다. 녹즙 졸업 증명서를 내주는 업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야쿠르트 여사님에게 받았다. 여사님도 별로 졸업 증명서를 주고 싶었던 건 아니고 내가 임의로 수령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그동안 쭉 녹즙아가씨는 여사님에게 반강제로 얼음팩을 상납해 왔다. 지난 18개월 동안 그게 녹즙아가씨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였다. 올해로 20년째 근속하고 있는 야쿠르트 여사님은 백 년 묵은 구렁이보다 더 무서워서, 얼음 좀 달라고 하면 녹즙아가씨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녹즙아가씨에게서 징수해간 얼음이 한국야쿠르트 지사에서 모두가 나눠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녹즙아가씨는 분노했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끝내 녹즙아가씨는 치사한 방식을 택하고 마는데, 그것은 그날그날 쓸 만큼 아이스팩을 받아다가 건물 공용의 냉장고에 절대 넣지 않고 쓰고 남은 만큼은 물류용 아이스박스에 도로 넣는 방식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얼음 좀, 하는 여사님을 도무지 당해 낼 수가 있어야지. 저번에는 얼음 좀, 하는 여사님에게 저도 사장님한테 더 달라고 못해요, 라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더니 여사님이 맑고 상쾌한 목소리로 이런 멍충이같으니, 하시는 바람에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멍충이가 되었다. 하긴 내가 멍충이니까 멍충이라는 소리 듣지, 하면서도 기어코 약이 올랐다. 약이 올라 봤자 녹즙 배달이나 열심히 할 수밖에.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삼일장 치르자마자 월요일부터 녹즙 배달한 녹즙아가씨는 아버지가 남기신 최후의 유산, ‘경매최고서’라는 것을 받아 들게 된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원망해 봤자 입만 아프고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면 녹즙 일을 계속할 생각이었지만 1월부터 사표 낸 자리에 여사님들이 오기만 하면 일이 힘들어 다 도망치는 바람에 녹즙아가씨는 뜻하지 않게 계속 끈기를 과시하고 마는데, 그러던 중 며칠 전 야쿠르트 여사님이 또 얼음을 달라고 말을 걸었다. 그 말을 듣기 싫어서 살색만 보면 전속력으로 도망쳤는데 기어코 또 얼음, 싶어 녹즙아가씨는 멍충이 소리 돌아올 것을 각오하고 저도 없어요 얼음,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바보라고 할까 멍충이라고 할까 기대하고 있는데 여사님이 별말 없이 이 일이 해 보면 되게 힘든 일인데 오래 해서 참 장해, 하더니 가 버렸다. 드디어 녹즙 졸업 허가를 받았다는 감격이 몰려왔다.

  나도 이제 고참이구나. 그러고 보니 어느 날 아침 배달하러 나가다가 입고 나가던 옷이 어쩐지 심상찮아 잘 생각해 보니 작년 이맘때 입고 배달하다가 청소 여사님에게 트집 잡혀 꼬집히고 쥐어박힌 옷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말 안 거는 걸 보니 나도 고참이구나. 이제 제대해야겠다. 강 건너로 이사 가게 되어서 일하고 싶어도 더 할 수 없어서 지사장님에게 진작 관둬야 해요, 관둬야 해요, 라고 늘 말했는데 오늘은 바로 이사 전날, 지사장님이 전화를 걸어 일단 물류 발주는 해 놨거든, 현진아 삼 일만 더 도와 주면 안 되겠니, 라고 너무 간곡하셔서 일단 삼 일은 강을 건너와 녹즙을 날라야 할 것 같은데 과연 녹즙아가씨는 이번 호 발매 후 ‘녹즙’ 자를 떼고 그냥 일반 ‘아가씨’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작은책 독자 여러분, 다음 호를 기대하시라.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