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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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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7 우리가 배용준 한 명만도 못하냐!(2009년 2월호)
우리가 배용준 한 명만도 못하냐!(2009년 2월호)
오도엽의 일터 탐방

오도엽/ <작은책> 객원기자

‘여성 크로커다일’을 아십니까? 악어 그림의 상표가 붙은 여성 캐주얼. 이 옷을 만들어 파는 ‘(주)형지어패럴’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날도 바시니’라는 남성 브랜드를 만들어 한국 최고 연기자 배용준을 전속 모델로 계약한 회사이기도 합니다. 이 회사의 최병오 회장은 패션 업계의 신화로 불리기도 합니다. 나이 서른에 동대문에서 허름한 옷 가게를 열어 사업을 시작했고, 25년 만에 여성 캐주얼 시장의 선두에 섰습니다. 샤트렌, 올리비아 허슬러, 라젤로……. 새로 시장에 선보인 브랜드마다 소비자의 호응이 좋았습니다. 2007년도 우리나라 매출 순위 821위, 순이익은 481위를 차지한 알짜 기업입니다. 전해 대비 매출 성장률이 30퍼센트가 넘더군요. 2008년에는 매출이 5천억을 넘어섰습니다. 2011년에는 매출 1조 원 규모의 종합 패션 전문 기업이 되겠다고 야심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에 최병오 회장이 한 모임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을 들은 한 참석자는 ‘이론으로만 떠드는 강사와 달리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배려, 그리고 나눔 경영의 철학을 지닌 분’으로 ‘존경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인간 존중, 나눔 경영.’ 얼마나 우리 사회가 바라는 경영자의 모습입니까.

존경해야 할 최병오 회장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한 기사가 지난해 12월 9일 언론에 나왔습니다. 한 경제 전문 언론에는 사업 수익의 일부를 교육 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한 후원금으로 쓰겠다면서 국제 구호 단체 유니세프와 나눔 파트너십을 체결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같은 날, 이 아름다운 행사장 바깥 풍경을 다룬 인터넷 언론의 기사도 있네요. 앗,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지어패럴 직원이 피켓을 들고, ‘5년 동안 야근하고 일요일 특근한 대가가 해고라니……’ 하면서 울부짖고 있지 않습니까. 설마, 존경스러운 경영자가 있는 회사에서…….

무엇인가 사연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형지어패럴을 찾아갔습니다. 올해 쉰셋인 이재석 씨는 형지어패럴 샘플실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앉으라고 하더니 취재수첩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쏟아 냅니다.


△ 오도엽 기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이재석 씨 ⓒ 작은책


“제가 이 분야에서 30년 넘게 일했습니다. 본래 형지어패럴에는 샘플실이 없었어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알았던 분이 이곳에서 개발실 부서장으로 있었어요. 저보고 샘플실을 만들려고 하는데 와서 일을 해 달라는 거예요. 5년 전 일이죠. 샘플실은 매장에 내놓을 상품을 미리 만드는 일을 해요. 여기서 만든 샘플 옷을 가지고 품평회를 거쳐 제품을 선정하죠. 옷 패턴이 결정되면 재단도 하고 미싱도 하고 다 해요. 이 작업이 혼자서는 힘들거든요. 보통 둘이 짝이 되어 일을 하는데, 저는 아내와 함께 일했어요. 한 사람 월급만 받으면서 둘이 일을 시작한 거죠.”

이재석 씨는 얼마나 가슴에 맺힌 이야기가 많은지 지난 5년의 이야기를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계속 이어갑니다.

“하루 평균 열두 시간씩 회사에서 살며 날마다 잔업을 했어요. 토요일 격주 휴무가 된 지도 한 1년밖에 안 돼요. 명절 휴무 전에는 대체근무도 하고, 공휴일에도 특근을 했어요. 이제껏 근로자의 날에 쉬어 본 적도 없어요. 품평회가 끝나면 보통 샘플실은 잠깐 여유가 있는데, 저희는 그 다음날로 다른 브랜드 샘플 작업을 해야 했어요. 일요일에는 대리점을 방문해 상품 실태 조사를 해요. 제주도만 빼놓고 전국을 다 돌아다녀요. 저는 자가용이 없어 버스나 전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요. 약도 하나 가지고 구석구석에 있는 대리점을 찾아다니려고 하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대리점을 못 찾으면 전화를 해서 길을 물어보면 되는데 회사에서 그걸 못하게 해요. 대리점에 찾아간다는 정보가 새면 안 된다고요.”

대리점을 방문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이재석 씨 목소리가 커집니다.

“이 계통, 봉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많이 배우지 못해 학벌이 낮아요. 경력은 수십 년 되지만 직책은 사원이죠. 대리점을 찾아가 명함을 내밀면 점주들이 깔보기도 합니다. 찾아가면 무척 싫어해요. 본사에서 조사를 나오니 좋아할 리가 없죠. 옷 팔기 바쁜데 왜 찾아오냐, 내가 회장하고 친군데 니가 뭐냐, 뭐 이런 모욕을 받기도 해요. 샘플실 업무도 아닌데, 쉬는 날 나가서 욕만 얻어먹는 셈이죠. 내가 나이가 오십인데……(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소처럼 일만 했어요.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참고 일만 했어요.”

최병오 회장이 샘플실에 들어오면 이재석 부부에게 미안해 하더랍니다. 두 사람이 일하는데 제대로 임금을 챙겨 주지 못한 걸 안타까워 하며 말을 건넸고요. 이재석 씨 부부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았던지, 앞으로 샘플실은 부부 사원으로 채용하라고 했습니다. 회사가 새 브랜드를 출시하며 샘플실 직원을 늘여 갈 때 실제로 부부를 함께 채용했습니다.

지난해에 이재석 씨 부부는 모범 사원으로 뽑혀 사이판으로 해외 연수를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출국에 필요한 서류도 다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1월 12일, 점심을 먹고 작업실에 들어오니 12월 12일 자 해고 통지서가 놓여 있는 것 아닙니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해고를 받아들이죠. 해마다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고, 거액을 쏟아부어 우리나라 최고 연기자를 전속 모델로 쓰면서, 5년 동안 야간에 특근해 가며 죽도록 일한 저희들을 해고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우수 사원은 뭐 하러 선정합니까? 일을 못한 것도, 회사가 무너질 위기도 아닌데 말입니다. 지난해 가을에 주거래 은행이 바뀌면서 새로 선정된 은행이 무료로 경영 컨설팅인가 뭔가를 했어요. 불필요한 인력이 많다고, 한 100여 명인가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나. 그때부터 이유도 모르고 해고 통지가 날아오기 시작했어요. 500명이던 직원이 지금은 400명 정도예요. 불필요한 존재였다면 왜 야근에 특근은 시킵니까? 이렇게 회사 키운 게 누군데요.”

△ 이재석 씨 차영미 씨 부부와 한수자 씨 이광년 씨 부부. 갑작스런 해고 통보에 웃음을 잃었다. ⓒ 작은책


잘나가던 회사를 컨설팅 한답시고 며칠 오가던 사람의 한마디에 백여 명의 직원이 밥줄을 잃었습니다. 꽥 소리 한 번 못하고 나간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해고 통보를 받은 샘플실 직원 여섯 명만이 회사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모두 부부 사원입니다. 여성들은 십대부터 이 계통에서 일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수십 년 동안 쌓은 경력이, 배운 사람들의 세치 혀에 ‘불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재석 씨는 받아들일 수 없어 거대한 기업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선 그래요.‘어디 해 봐라. 오륙 년 걸릴 텐데 법적으로 가 봐라. 버틸 수 있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알고 있어요. 큰 회사에 맞서는 게 어렵다는 거 알아요. 이제 와서 슬그머니 돈 좀 줄 테니 나가서 아웃소싱 받아 일하래요. 저희는 다른 거 필요 없다. 첫째도 둘째도 복직이다. 정말 회사가 어렵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미련 없이 나갈 수 있지만 지금 이거는 아니다. 이랬어요. 제 말이 틀렸나요? 이해가 됩니까?”

틀린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직원을 해고하면서, 수십 명의 기자를 호텔로 불러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사업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최병오 회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강연장에서 ‘인간 존중과 배려’를 강조하시던 최병오 회장은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나눔 경영’ 기업 이미지만 좋게 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쇼’를 하신 건가요? 최병오 회장님, 혹 실수였다면 하루 빨리 해고자를 복직시켜 주십시오.

이재석 씨의 부인 차영미 씨는 해고 통보를 받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눈물만 펑펑 흘렸답니다. 하나뿐인 아들은 군 입대 자원 신청을 했습니다. 한 명의 입이라도 줄여야 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벌다가 한날한시에 쫓겨났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함께 샘플실에서 일하던 한수자, 이광년 부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수자 씨는 손이 덜덜덜 떨려 일이 안 되더랍니다. 해고를 당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자신이 해고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머리가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다가 가끔 현실로 돌아오면 미쳐 버릴 것 같답니다. 정신병자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답니다.

새 옷을 만들 때마다 어떻게 하면 입는 사람이 더욱 편하고 예쁠까만을 생각하며 장인 정신으로 일했던 형지어패럴 샘플실의 세 쌍의 부부. 평생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이들은 오십이 넘어 처음으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여성 크로커다일’이라는 유명 브랜드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형지어패럴이라는 큰 회사에 있으면 수입은 적더라도 좀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한순간에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배용준을 전속 모델로 계약했다는 사실을 앞 다퉈 다루던 언론들,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사랑의 손길을 대대적으로 떠벌리던 기자님들, 여기 한겨울 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겁니까?

더 큰 추위가 노동자를 덮칠까, 무척 두려운 2009년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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