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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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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27 한국음료의 봄날

<작은책> 20195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한국음료의 봄날

서종원/ 화섬식품노조 전북지부 한국음료지회 조합원

 

 

지방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공부했던 나는 200812월 전라북도 남원시에 OEM(주문자위탁생산방식) 생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한국음료 공장의 식품연구소 대리로 입사하게 되었다.

한국음료에서 생산하는 제품들. 사진_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한국음료는 자사 브랜드 없이 OEM사의 신제품 개발 및 처방 개선을 해 가며 자체 생산을 유도하여 매출을 이어 갔으며 롯데칠성, 팔도, 매일유업, 남양유업, 광동제약, SPC 등 국내 많은 기업들의 제품을 위탁 생산하고 있었다. 이런 한국음료는 지난 20103월 엘지생활건강 음료사업부인 코카콜라에 인수되었고, 한국음료의 모든 업무와 관련된 결정은 엘지생활건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인수 후 코카콜라 70퍼센트, 해태음료 10퍼센트, OEM사의 매출을 20퍼센트대로 유지하던 중 OEM 제품의 생산을 철수하라는 엘지생활건강 부회장의 지시에 따라 맡고 있던 OEM사의 신제품 개발 업무는 없어지게 되었으며, 현장 일은 전혀 모르던 내가 배합, 충진, 입고검사 중 택일해야만 하는 기로에 섰을 때 고심 끝에 배합 업무를 선택하였다. 주간 8시간 근무에서 주야간 12시간씩 2교대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낮과 밤을 바꾸어 생활한다는 게 쉽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과장 직급을 달고 아무것도 모르는 생산현장으로 쫓겨나다시피 나온 나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편치만은 않았다. 설비 관련 업무에 대한 기초 지식 부족으로 현장의 디테일한 업무를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고, 작은 거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고참들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쉬는 날엔 도서관에 가서 관련 서적도 찾아가는 등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비와 공정 흐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생산 중이던 배합액 일부를 폐수장으로 흘려보내 징계 위기까지 갔던 일, 첨가물 용해 시 밸브 조작 미숙으로 용해 중이던 첨가물탱크가 넘쳐 났던 실수 등을 경험하면서 세상사 열정만으로는 되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더 이상의 실수는 있을 수 없다는 각오를 다졌다.

한적한 시골에서 묵묵히 일만 하던 우리도 엘지의 가족이 되었다는 기쁨과 부푼 마음으로 엘지라는 이미지에 누가 되지 않게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였다. 엘지생활건강에서 인수하여 대기업 손주뻘 되는 자회사가 되었으니 누구나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지겠으나, 실상 속내를 들여다보면 빛 좋은 개살구였다.

 

한국음료 사측은 1) 소통 없는 일방적인 업무 지시 2) 지켜지지 않은 희망고문 3) 신규 채용은 손에 꼽을 정도며 정규직도 기댈 곳 없고 급기야 노노갈등까지 우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 각각의 포지션에서 맡은 바 업무를 충실히 행함에도 회사에서는 개인의 업무 외에도 잡다한 일들로 직원을 혹사시키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이에 항의라도 할라치면 지시에 따르라는 일방적인 회사의 태도에 상실감과 자괴감에 위축이 되었다.

2) 코카콜라에서 인수 후 안내를 위해 내려온 인수팀, 공장 업무를 맡았던 엘지생활건강과 코카콜라 책임자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얘기가 있다. 짧게는 3, 길게는 5년 내에 코카콜라 임금의 80~90퍼센트 수준까지 올려 주겠다던 약속, 복리후생 또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맞춰 주겠다던 약속들은 우리에게 희망고문이 되었다.

3) 서서히 아주 서서히 100명이 넘던 정규직 직원이 47명만을 남기고 도급직으로 바뀌었으며 라인을 하나 증설했음에도 신규 채용은 없었다. 경비직, 조리직, 생산직 중 여직원 전원, 물류직군까지 인건비 부담을 줄이고자 모조리 도급화하였다. 

위 직군이 마지막일 줄 알았지만 결국 배합과 충진업무를 제외한 후공정 6명 업무도 도급업체로 모두 넘어가면서 막다른 골목에 선 한국음료 직원들에겐 이제 충진, 배합 근무지를 제외하고는 선택할 수도, 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사측은 고정비 중 인건비 비중을 지속적으로 줄이는 방법을 선택했고, 결국 선택권 없는 직원들은 벼랑 끝에 서게 되었으며, 인수한 지 9년이 다 되도록 근로조건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기에, 이런 부당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멈추고자 자구책으로 지난해 4월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 전북지부의 문을 두드리면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북 남원 한국음료 공장 입구에서 노동자들이 출근 선전전을 하고 있다(2019110). 사진제공_ 한국음료지회


한국음료지회 2018101일을 시작으로 투쟁 기간 184, 단식농성 28일 경과. 드디어 여의도 트윈타워에서 천막을 걷었다.

인간 존중, 정도 경영을 경영 이념으로 내세우는 LG그룹을 상대로 한국음료지회 조합원만으로는 이토록 장기간의 투쟁도 역부족이었음은 분명하다.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단식농성까지 하는 모습을 본 많은 분들이 사측의 부당함에 함께 맞서 연대해 주시고, 우리의 안타까운 싸움이 언론매체를 통해 소개가 되고, 시민단체에서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자발적인 시민들의 성금으로 메인 일간지 1면에 엘지생활건강 규탄 광고가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6개월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던 LG그룹이 한국음료지회 노동조합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LG 자본 규탄 및 한국음료 투쟁 승리 결의대회에 참가자들이 모이고 있다(20181110). 사진제공한국음료지회


장장 반년이 넘는 정말 힘든 투쟁이었다. 혹자는 궁금해했다. 한국음료 조합원 29명의 이 처절한 6개월간의 싸움, 이 투쟁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사실 구구절절한 스토리는 없다. 그저 그동안의 삶보다 앞으로의 삶이 좀 더 나아지기를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세간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우리 한국음료지회 노동자들이다. 이젠 우리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도 들여다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고 함께 고민하고 풀어 나가며 모든 노동자들이 당당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여의도 LG트윈타워 앞 퇴근길 선전전(2018115) . '' 피켓을 든 사람이 서종원 씨사진제공_한국음료지회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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