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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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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12. 15:16 기획 특집

<작은책> 20206월호

300호 특집

 

먹물출신의 노동자 홍보물 도전기

하종강/ 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1981년에 노동운동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만난 사람들이 7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과 같은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하늘이 내려 주신 천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124명 중에 절반 정도가 나하고 동갑내기였다. 그 노동자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말이 넌 배운 놈이니까.”, “넌 지식인이니까.”, “먹물이니까.” 등이었다. 대화나 토론을 하다가 그런 지적을 당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대화가 더 이상 진전이 안 되곤 했다.

알짜배기 노동자 출신이 아닌 사람이 계급성을 극복하고 노동자 정서에 충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 끝에 생각해 낸 훈련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 무렵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서울로 간 허수아비, 어느 돌멩이의 외침등 노동자 수기와 노동 야학의 졸업 작품집 등에 노동자들이 쓴 글이 많이 나올 때였는데, 그런 글들을 있는 대로 모아서 같은 단어에 대해 노동자들의 정서가 표현된 문장들을 칼로 오려 대학 노트에 붙여 보는 것이었다.

고향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새벽에 고향에서 기차 타고 떠나오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지만 한국 농업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활동가도 있다. ‘노동조합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노동조합이 뭘까?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걸까?’ 이런 의문을 품는 노동자도 있지만 노동운동에 일생을 걸고 활동하는 노동자도 있다.

구름, , 어머니, 고향이런 수많은 단어들에 대해서 노동자 생각이 담긴 글을 주제별, 단계별로 오려서 대학 노트에 가지런히 붙여 정리하는 작업을 일 년쯤 했다. 그렇게 해 보니까 먹물출신으로서는 노동자 정서에 상당히 친숙해진 편이었고, 그 경험이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큰 재산이 됐다고 생각한다.

먹물이 노동자들과 함께 2년쯤 부대낀 뒤에 만든 첫 번째 홍보물이 바로 <일꾼>이다. 하종강


편집 책임자였던 내가 글자 폰트의 크기와 종류를 적어 놓은 흔적이 보인다. ‘노동자도 한자어니까 일꾼이 우리말이다, 그런 호기로운 생각으로 이름을 <일꾼>으로 정했고, 어떻게든 노동자들에게 글을 쓰게 해 보자는 뜻으로 노동자가 쓴 글을 모집하는 광고도 실었다.

이 작업이 점점 발전해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일꾼 노동문제 자료연구실을 설립하고 내가 실장을 맡았다. 노동자들에게 노동문제를 작은 주제로 나누어 정말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교재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노동자 교육의 교재로 사용될 뿐 아니라 노동자가 한번 손에 잡으면 너무 재미있어서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도록 해 보자는 취지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일꾼노동문제자료> 시리즈다.

▲ <일꾼노동문제자료> 시리즈. ⓒ하종강


<나는 바르게 계산된 월급봉투를 받고 있나?> 세 번째로 만든 일꾼 노동문제 자료이다.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민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글은 지배 세력의 또 다른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글은 길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나 밭을 매는 노인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원칙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림을 많이 사용해 설명했고 관심을 유발하려고 노동문제 상식 퀴즈도 만들어 넣었다. 그때 무보수로 삽화를 담당해 주었던 대학생 후배가 바로 요즘 투쟁 현장마다 따라다니며 사람들 초상화 그려 주고 <작은책>에 만화도 연재하는 이동수 화백이다.

작업이 끝나면 사람들과 같이 식당에 가서 뒤풀이를 했다. 한번은 식당에서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 뉴스가 나오는데 부장검사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마약의 위험성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제고시켜야 합니다.” 그 무렵 우리는 그런 거 절대로 그냥 못 넘어갔다. 일행 중 한 명이 내뱉었다. , 인마, 너 말 꼭 그렇게 해야 돼? ‘마약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똑같은 뜻이야.”

TV 뉴스에 나와서 희생자가 더 나올 개연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라고 말하는 소방관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컨트롤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의사들이 우리들의 제삿밥이 되곤 했다.

노동자 정서에 충실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올바른 교육 교재 하나 만드는 것이 노벨문학상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내 모습이 최규석 작가의 만화 <송곳>에 잠깐 나온다.

▲ 《송곳》(최규석, 창비)


그 무렵에는 유인물 한 장을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불심검문에 걸려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던 시대여서, 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갖고 다닐 수 있는 노동교육 교재를 만드는 작업도 해 봤다. 현장에서 보다가 직·반장한테 걸리거나 경찰 불심검문에 걸려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는, 그러나 속에는 나름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그런 노동문제 자료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손바닥 크기쯤 되는 <일하며 산다> 시리즈다.

 

 ▲ <일하며 산다> 시리즈. ⓒ하종강

 

온갖 정성을 들여서 가능한 한 예쁘게 편집을 했다. 사람들이 쉽게 버리지 않도록 지하철 노선도도 넣었다. 나중에 100이라고 가격을 붙인 이유는 불법 유인물로 취급당하지 않도록 합법 출판물로 만들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정암사라는 출판 등록을 내기도 했다. 당시 가리봉 오거리에 있는 공단서점에서도 팔았는데 한 달에 한 번 수금을 하러 가면 이 100원짜리 책을 판 대금을 고스란히 필름 통에 모았다가 건네주던 사람이 지금 노동자교육센터대표를 맡고 있는 김진순 동지다.

이 책들도 삽화는 이동수 화백이 맡았다. 한번 붙잡히면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것이 예나 이제나 이 바닥의 생리다.

 ▲ <일하며 산다> 시리즈. 삽화는 이동수 화백이 그렸다. ⓒ하종강


당시 이런 작업들을 할 때는 모두 건방지게도 이것이 한국에서는 최초의 시도다. 어떤 사회에서든지 혁명의 시기에 이런 과정들이 있었다.’ 그런 자부심에 불탔다.

198812월 새로운 노동상담소 일을 시작했다. 그 상담소가 나중에 한울노동문제연구소로 발전했지만 처음에는 사무실 구석에 책상 하나 놓고 시작했다. 거기서도 똑같은 작업을 시도했다. 노동법을 노동자들에게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하는 교재를 만들어 보자. 그런데 실패했다. 대중적 매체를 만들수록 그걸 만드는 사람은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경망스럽게 쉽게 풀어 쓴다고 해서 쉬운 문장이 되는 게 아니다. 대중 정서에 충실한 글을 쓰려면 정말 그 사람은 전문가여야 한다.

창간 준비호도 두 번이나 만들어 보면서 준비했는데, 쉽지 않았다. 결국 우리 비슷한 놈들끼리 볼 수 있는 걸 만들었다. 그렇게 나온 시리즈가 <한울노동법강좌>이다. 활동하는 노동자들보다는 사법시험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사법연수생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는 말을 나중에 두고두고 들었다. 20113월 연구소 문을 닫을 때까지 53호까지 만들었다.

▲ <한울노동법강좌> 시리즈. ⓒ하종강


이러한 노동문제와 관련된 홍보물을 만들고 글을 쓰는 작업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내가 1994년에 제6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지금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그러한 작업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작은책

안건모 / <작은책> 발행인


  삼화고속노동조합이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총 26개 노선 광역버스 328대 가운데 20개 노선 242대의 운행을, 날마다 2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중단하는 부분 파업을 하고 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삼화고속버스 회사를 가려고 합정동 버스정류장을 갔다. 노동조합이 있는 곳을 가려면 1601번을 타야 한다. 정류장에 있는 전광판을 보니 55분 뒤에 차가 온다고 나온다. 파업 때문인가? 나중에 알았지만 준법운행 때문이었다. 신호를 지키고 난폭 운전을 하지 않는 준법운행만 해도 이렇게 운행 시간 간격이 뜨게 되는 게 버스 운행 현실이다.

  노동조합 사무실엔 최용환 총무부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용환 씨는 삼화고속에서 18년 동안 근무하다 작년에 사표를 썼다. 삼화고속에서 오랫동안 투쟁해 왔는데 회사가 인천에서 대구까지 발령을 낸데다 투쟁 중에 아내의 지병이 악화되어 사표를 썼단다. 먼저 삼화고속 조합원들이 파업을 하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물었다. 최용환 총무부장은 한 치 망설임 없이 말한다.

  “월급이죠. 월급이 너무 적으니까.”

  도대체 월급이 얼마나 될까. 광역버스 시급은 4,727원이다. 고속 부문 5,010원보다 터무니없이 적다(서울시내버스 시급은 1년 근무자 8,027원, 8년 근무자 8,703원이다). 인천광역버스는 월 시급 대비 만근 일수에 따라 임금이 정해지는데 연봉으로 하면 광역은 한 달 13일(26일) 만근에 1일 19시간씩 247시간이지만 연 2,800만 원, 고속은 연3,000여만 원이다. 다른 사업장보다 턱없이 적다. 광역버스 부분은 지난 10년 동안 임금이 동결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급은 해마다 올라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루는 교통신문에서 전화가 왔어요. 기자가 하는 말이 ‘회사가 준 자료를 보니 시급은 계속 올라갔다, 그런데 왜 임금이 동결됐다고 하냐?’는 거예요. 제가 한번 오라고 했어요. 회사 쪽만 찾아가서 취재하지 말고 노조도 취재해 달라고 얘기했죠. 맞아요. 시급은 올라갔어요. 근데 왜 깎였을까요? 상여금에서 잘라먹은 거예요.”

  광역버스는 2005년도에 상여금이 임금 총액의 670퍼센트였다. 하지만 시급이 올라가면서 상여금이 계속 깎였다. 임금 총액의 670퍼센트가 아니라 기본급에 야간 수당만으로 상여금이 지급됐다. 2008년도에는 야간 수당을 시급대비 30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삭감했다. 복잡하게 계산할 것 없다. 임금이 10만 원 올라가면 상여금에서 10만원 깎였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10년 동안 시급은 올라갔어도 받는 임금이 그대로였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근무 시간이다.

  “지난 10년 동안 법정근로시간이 주 48시간에서 44시간, 40시간으로 줄었는데 우리 광역버스 근무 시간은 오히려 계속 늘어났어요."

  광역버스 기사들은 서울시내버스처럼 1일 2교대제가 아니라 격일제이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제도다. ‘괜찮네’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정을 들어 보면 이렇다.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와 5시에 일을 시작한다. 하루 종일 일하고 서울역에서 막차가 새벽 1시에 인천으로 출발한다. 그러면 종점에 빨리 들어와 봐야 새벽 2시나 2시 반이다. 집에 들어가면 세 시가 넘어 네 시쯤에 잠을 잘 수 있다. 그러면 그 다음날 쉬는 날은 오전 내내 잠을 자야 된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에 일하러 가야 하니 일찍 자야 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물론 심야수당을 받기는 하지만 23시 이후는 8천 원, 24시 이후는 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심야 수당 안 받고 심야 근무 2시간에서 3시간 안 나가는 게 오히려 낫다.

  사실 고속버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임금이 10년째 동결이다. 아이엠에프 터지고 나서 임금이 그대로인 셈이란다.

  다섯 시가 되니 나대진 지회장이 들어왔다. 나대진 씨는 지난 1월 6일 조합 선거에서 지회장으로 당선된 사람이다. 3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한 나대진 지회장은 지난 5월 18일에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한국노총 자동차연맹 산하였던 삼화고속버스 노조를 민주노총 민주버스 소속으로 상급단체를 변경했다. 아마 서울 경기 지역에서 최초로 조직 형태 변경을 하지 않았나싶다.

  지회가 민주버스로 조직 형태를 변경한 뒤 회사는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대진 지회장이 이끄는 삼화고속지회는 지난 6월 8일 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신청을 했다. 6월 22일 조정 중지가 결정됐다. 그리고 6월 25일, 26일에 시한부 경고 파업을 했다.

삼화고속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대진 씨

  “7월 7일이 급여 지급일이에요. 사측은 ‘파업해서 수익금이 줄어서 급여를 못 주겠다’ 공고를 붙였어요. 7월 8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죠. 인천시에서 중재를 서서 7월 10일 기본합의서를 작성해서 파업을 푼 거죠. 그런데 회사가 합의서 이행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7월 22일부터 심야운행 거부 투쟁에 돌입했죠.”

  기본합의서 내용은 ‘노사 간에 자율적으로 교섭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재 삼화고속 노조는 겉으로 보면 모두 세 개다. 올해 초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변경한 현 지회와 전 ‘어용조합’이 한국노총을 상급단체로 해 새로 설립한 노조, 또 일부 조합원이 만든 제3노조이다. 사측은 ‘관련법에 따라 3개 노조가 교섭 창구를 단일화하기 전엔 교섭하기 곤란하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교섭대표권을 놓고 노노 갈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대진 지회장 말은 달랐다.

  “현재까지 지회에서 탈퇴한 조합원이 없어요. 2노조는 노동청에 28명으로 신고돼 있고, 3노조는 7명인데 우리 조합에서 탈퇴하지 않고 이중 가입을 하고 있어요. 사측의 회유와 압력에 의해서 복수노조를 만들었다고 보는데, 그래도 전체 조합원의 10분의 1이 돼야 공동교섭권이 있잖아요. 그런데 결국 10분의 1을 확보하지 못한 거예요.”

  결국 교섭대표권이 단일화되지 않아서 교섭을 하지 않는다는 건 회사의 핑계일 뿐이라는 말이다.

  나대진 지회장한테 월급에 대해 다시 물었다. 지회장은 오늘 인천시에 갖고 간 간담회 자료를 보여 준다. 그 자료를 보니 인천을 운행하는 시내버스보다 급여가 적다.

  “전국 6대도시 중에서 인천이 임금이 제일 낮은 수준입니다. 삼화고속 광역버스는 인천시내버스 급여보다 월 50만 원 정도 더 적어요. 고속부분은 금호고속보다 연봉 천만 원 정도가 적습니다. 조합원들이 임금과 근로 조건에 대해 한이 맺힌 거죠.”

  정태수 씨가 들어왔다. 정태수 씨는 지금 준법운행 투쟁 중이다.

  “힘들어요. 어용하고 싸워야죠, 사측하고 투쟁해야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굴엔 웃음기가 떠 있다. 힘들어도 보람이 있어 보였다.

  “어젠 앞차하고 1시간 정도 간격이 벌어져서 다녔어요. 여유 있게 다니니까 스트레스도 안 받고……. 요즘에는 노선에서 사고도 없어요.”

  옆에 있던 나대진 지회장이 거들었다.

  “한 달에 사고가 평균 100건, 하루에 세 건은 나는 거죠.”

  처음 파업하는 날 어땠을까. 1987년 서울시내버스 기사들이 파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관리자들이 기사들한테 차를 운행하지 않으면 해고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기사들은 하나둘씩 그 협박에 굴복해 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집행부에서도 불안했어요. 45년 동안 한 번도 파업한 적 없었으니까. 쟁의 행위 조합원 찬반 투표에서 85.3퍼센트가 파업 찬성했어요. 파업 투쟁에 돌입하니까 조합원들이 열정적으로 호응하고 참여하는 거예요. 집행부도 놀랬죠. 간부 파업할 때는 ‘즉시 운행 중지하고 파업 투쟁에 돌입합니다’ 하고 문자를 발송했더니 영업소가 대전인데 울산에다 차 세워 놓고 인천 농성장으로 상경한 거예요. 확대간부 80퍼센트가 참여했어요. 45년 동안 한이 맺힌 거죠. 워낙 근로 조건이 안 좋으니까. 바닥까지 온 거예요. 한이 맺혀 있었던 거예요.”

  나대진 지회장은 그동안 조합원들이 얼마나 쌓인 게 많았겠냐며 ‘한이 맺혀 있었던 거예요’를 자꾸 되풀이한다.

  그동안 사측은 ‘튀는’ 조합원들에게 탄압을 가했다. 어용조합도 나대진 지회장을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거나 제명까지 했다.

  “지노위에 부당 징계로 민사 소송 넣어서 해결하고……. 시내버스 어용조합의 기본이잖아요. 버스 해 보셔서 알잖아요. 배차시간에 쫓겨 밥 먹다 말고 나가라면 나갔잖아요. 거의 서서 김치 쪼가리하고 먹고 나갔잖아요. 배차 담당이 기사에게 ‘내일 일 나왓! 안 나와?’ 노예 부리듯 했는데 이젠 ‘일 좀 해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요. 불과 두 달 만에 상황이 바뀐 거죠. 의식이 바뀐 거예요. 파업은 학습이잖아요.”

  이번 파업이 그냥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나대진 씨는 1990년대부터 민주버스노조협의회를 다녔고, 99년 7월 1일에 삼화고속에 입사한 뒤 2005년부터 ‘참노동조합 만들기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민주버스지회로 변경 후 규약도 민주적으로 모두 바꿔 버리고 조합원 교육도 많이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몰랐으니까. 처음에 대의원대회할 때 벽에 가사를 쓴 종이를 붙여 놓고 했죠. 조합원 교육 때는 하종강 선생님이 강연하는데 조합원이 눈물 흘리고 그랬어요. 그게 다 파업 동력이 된 거예요.”

  이렇게 되기까지는 나대진 지회장을 비롯한 현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희생이 컸다. 활동을 하느라 잠도 못 자고, 일을 많이 하지 못해 월급이 적을 수밖에 없다. 아내와 아이들이 얼마나 걱정할까.

  “그래도 요즘엔 집에서 응원해요. 아내가 ‘힘내세요. 당신에게는 우리 가족이 있잖아요.’ 애들한테도 ‘아빠가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지 몰랐어요. 아빠가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문자가 와요.”

  나대진 지회장은 “삼화고속 사정이 다른 버스사업장하고 똑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사실 지방 버스 현실이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전북고속버스도 지금까지 파업을 이어 가고 있다. 전국의 버스노동자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작은책
2011. 8. 22. 13:34 기획 특집

'쉽게 강연하려고 배운 글쓰기',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8월 25일 목요일 늦은 7시, 서교동 태복빌딩(문턱없는밥집 건물) 2층 강당 
수강료: 1만원 (독자/청소년 5천원) 


 
전국에서 1년에 300여 회를 강연하는 하종강 선생님이 작은책에서 강연합니다. 이번 강연은 하선생님이 늘 하시는 노동에 관한 교육이 아니라 작은책에서 1년 기획한 특집 강좌 <내 인생과 글쓰기> 중 한 강좌입니다. ‘노동자가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철학으로 책을 내고 있는 작은책은 올해 초 홍세화 선생님부터 시작해서, 돌아오는 9월 안재성, 10월 윤구병 선생님까지 기획한 강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주 25일에 강연하는 하종강 선생님은 자세한 소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전국에 있는 노동, 사회단체나 학교 같은 곳에 강연을 하러 다니는 분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낸 책으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길에서 만난 사람들》,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이번 강연은 노동 강연이 아니라 하종강 선생님의 삶과 글쓰기가 주제입니다. 하종강 선생님은 명강사일 뿐만 아니라 많은 책을 낸 저자이자, 한겨레, 경향신문 같은 매체에 칼럼을 쓰는 칼럼니스트입니다. 하종강 선생님이 어떻게 살아왔고, 처음 글을 쓸 때 어떻게 썼는가, 왜 대중이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강연합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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