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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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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9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교장과 수다 떨 수 있는 학교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다섯, 교실이 아니어도 좋아저자

 

 

교장과 수다를 떨 수 있는 학교, 이런 학교에 근무하는 게 내 꿈이었다. 이제 내가 교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런 학교를 만드는 게 결코 쉽지 않더라고. 마음 같지 않아. 수다는 아무하고나 떨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수다를 떨려면 많은 게 갖춰져야 하더라고. 수다가 가능한 문화가 만들어져야 가능하더라니까. 이게 안 되면 수다가 아니라 간담회, 좌담회 또는 잘해야 토론회 수준이나 될까. 설교나 다툼이 될 수도 있고. 어떻게 해야 교직원과 교장이 수다 떨 수 있는 학교를 만들까 생각해 봤어. 실제로 그렇게 하려 노력하고 있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수다가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며 찾아낸 핵심 몇 가지를 정리해 보려고.

다른 것보다 먼저 직급을 내려놓아야겠어. 교장이 아무리 편안하게 이야기하자고 말해 봐야 헛말이더라고. 시어머니가 아무리 친정 엄마처럼 생각하며 지내자고 말해 봐야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 그냥 교장이라는 건 인정하고, 우리 문화 속에서 교장이라는 낱말이 품고 있는 의미를 받아들이되 그 선에서 버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버리고 떨쳐 내는 거야. 쓸데없는 권위,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목에 힘주는 권위만은 내려놓는 거지. 내가 교장으로 발령 날 때부터 내 친구가 농담처럼 하는 진담이 있어. 어디 가면 수저 먼저 놓고, 물 따르고, 차는 자기 손으로 타 먹고 그러라고. 교장 대접받으려 하지 말라는 말이지. 특권을 누리려고도 하지 말고.

그러면서도 교장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해 나가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선을 지켜야 해. 권위를 얼마나 내려놓을 건지는 그 사회, 조직의 소통 문화, 의사 결정 구조 등을 살펴서 정해야 한다고 봐. 권위를 내려놓고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마저도 그 조직, 그 사회의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는 있어. 이럴 때 떠오르는 말이 있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 내가 지금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조직과 구성원의 특성 그리고 나의 특성을 함께 살피면서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는 거지. 자칫하면 아이들 포함 1250명이 사는, 학부모 포함하면 3~4천 명의 조직이 무너지는 수가 있으니까 상황에 맞게 수다를 떨며 살아야지. 하지만 조금씩 수준을 높여서 수다의 편안함을 늘이는 게 내 목표야.

두 번째로 나이를 떠나야 수다가 가능하다고 믿어. 내 나이는 지금 학교에서 어느 정도냐고? 랭킹 1! 36개월 뒤 정년퇴직이지. 나이가 지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마음을 주고받는데 큰 장애가 돼. '젊은 놈이 말하는 뽄새 봐.' 하거나 '너 나이 몇이야?' 하면서 민증 까자고 덤비는 사람도 있어. 나이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보장하거나 지혜의 총량을 결정하거나 인간성을 보증하지는 못하는데도 그래. 오죽하면 우리말에 존댓말이 있어서 민주주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주장도 있을까.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대접받겠다는 마음을 털어 내야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편안하게 풀어 갈 수 있고 수다가 가능하단 말이지. 외국에 나가 지내다 온 분들 가운데 이야기를 들어 보면 직책이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과 편안하게 이야기 나눈다고 하더라고. 마치 비슷한 나이의 친구와 이야기하는 느낌이라나. 나이를 털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나이로 인한 외로움과 소외감에서 벗어나고 젊은이의 총명함, 추진력, 모험심과 나이 든 이의 지혜로움, 멀리 넓게 보는 눈, 많은 사람을 겪은 경험이 버무려진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너무 크게 볼 것 없고 지금 당장 서로가 조금 더 행복하지 않을까. 나이를 털어 낼 용기가 젊은이와 나이 든 이 모두에게 필요해. 나이가 주는 혜택을 미련 없이 털어 낸 채 말하려 노력하고 있기는 한데 마음같이 쉽지 않아.

마지막으로 성의 구별을 떠나야 한다고 믿어. 난 초등 교사라 평생을 여성이 더 많은 환경에서 살아왔어. 대학교 가서는 우리 반 40명 가운데 남자가 셋이었고 발령받은 뒤에는 교사 60명 가운데 남자 교사는 나 혼자일 때도 있었지. 그렇게 살아가는 게 내 삶이야. 그런데 남녀라고 선을 긋고 말을 섞지 못한다면 남자와 여자로서 갖고 있는 장단점을 보완하고 보충해서 더 나은 교육,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어려움이 생겨. 그냥 남녀를 떠나 사람으로, 교사로, 한계와 부족함을 갖고 있는 존재로, 가슴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이 세상에 유일한 특성을 갖고 있는 존재로 볼 때 존중하면서 손을 내밀어 잡아 주고 이야기하고 일을 풀어 갈 수 있다고 믿어. 어색하지만 남녀의 선을 지키면서 사람으로 만나려 노력하는 중이야.

직급, 나이, 남녀를 내려놓으면 뭐가 남을까? 사람, 인간. 그냥 사람으로 보는 거지. 직급, 나이, 남녀라는 낱말에는 어느 정도 편견이 담겨 있어. 물론 법에 정한 권한과 책임이 있는 직급의 특성을 인정하면서도 수평적으로 관계를 풀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는 거야. 우리 사회가 만들어 온 담장이지. 직급이라는 담장, 나이라는 담장, 남녀라는 담장. 어떤 담장은 담만 있는 게 아니라 고압선까지 쳐 놓았다는 느낌이 들어 섬뜩할 때도 있어.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지. 부부, 부모 자식, 형제, 친구 등 모든 사이에는 선이 있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존재로서 갖고 있는 존엄성과 간직해야 할 자기만의 영역이 있어서 그것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 누구도, 어떤 권력도 넘어가면 안 되지만, 그것은 직급, 나이, 남녀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런 마음으로 만나는 걸 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의 만남이라고 봐.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가운데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수다야.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선에서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학교 문화 속에서 살고 싶어. 아이들, 교사, 직원, 학부모, 지역 사회 구성원들과 수다를 떨되 교장으로서,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내는 그런 교장. 수다를 떤다는 것은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존엄성을 지켜 주는 것이며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해. 조금 더 민주화된 사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교육에 충실한 학교에 한 걸음 다가가는 길은 수다에서 시작된다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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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_ 교장 일기

 

늦고 싶어 늦는 아이는 없다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다섯, 교실이 아니어도 좋아저자

 

 

9, 정문 닫을 시간이야. 3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게 보여. 눈에 보이는 아이 놔두고 문 닫는 게 매정하다 싶어 기다렸지.

문 닫는다.”

고개 들어 나를 잠깐 보는 것 같더니 다시 느릿느릿.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하며 지각인 거 모르냐. 얼른 와라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밀고 올라오는 걸 꿀꺽 삼켰어. 잔소리한다고 지각 안 하면 맨날 잔소리하게.

아침은 먹었니?”

아뇨.”

들어가면 우유라도 미리 먹어. 담임선생님께 아침 못 먹었다고 말씀드리고.”

싫어요.”

이왕 늦은 거 천천히 올라가. 넘어질라.”

고개 숙인 채 그 걸음걸이 그대로 걸으며 하는 말에는 귀찮음과 어두움과 건조함이 느껴져. 아침맞이 때마다 아무리 아는 척해도 눈길 주지 않고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고개 숙이고 혼자 입을 꾹 다물고 등교하는 녀석.

지각하는 아이들만 보면 나도 모르게 불쑥 올라오는 말을 안 하도록 만들어 준 아이가 있어. 아현초등학교에서 5학년 담임할 때 만난 민선이. 민선이는 거의 날마다 지각을 했지. 수업 시작하는 9시에 오면 아주 훌륭한 거고, 1교시 중간이나 2교시, 가끔은 3, 4교시에 오기도 했는데 다행히 결석은 안 해. 우울한 얼굴에 말수는 적고 아이들과 즐겁고 맛있게 어울리지도 않아. 혼자 책 읽는 시간이 많고.


녀석이 늦을 때마다 그저 누구나 습관적으로 하는 말을 했어. 늦었구나.”, 조금 일찍 다녀라.”, 날마다 늦으면 어떻게 하니? 자리에 앉아서 얼른 수업 준비해.”, 내일부터는 조금 일찍 오도록 해 봐.” 내 표정과 말투가 좋을 리 없지. 가끔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물어보지만 민선이는 아무 말 안 했어. 그냥 늦게 자서 그런다는 말을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 마음을 안 연 거야.

그렇게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5월 하순. 2교시 수업을 하다 우연히 창문 밖을 보니 교문으로 들어서는 민선이가 보여. 2학년 여동생 손을 잡고 쪽문으로 들어서더니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텅 빈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야, 꽤 오래.

그 순간 나는 민선이가 되었어. 아무도 없는 운동장, 멀리 교실에서는 수업하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 조용하고 차분하고 엄숙한 학교. 나와 동생만 뚝 떨어져 있어. 저 학교 건물 안에 있는 아이들은 우리 둘과는 달라. 아이들과 선생님은 내게 관심도 마음도 없어. 나는 날마다 늦는 아이고 친구도 없고 옷은 꾀죄죄하게 입고 다니는 그런 아이. 그래도 나는 교실에 가야 해. 따로 갈 데가 없고 집에 있는 건 더 싫고 무섭기까지 해.

언니 손을 앞뒤로 흔들며 까부는 동생에게 무거운 표정으로 별 감정 없이 몇 마디 던지는 민선이. 축 처지고 지치고 무거운 저 발걸음에서 또래 다른 아이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고단함이 묻어나. 한 걸음 한 걸음이 아픔이고 슬픔이야. 집에는 어떤 사정이 있기에, 아침저녁 그리고 밤에 어떤 분위기와 흐름이 있기에 저렇게 어두운 얼굴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오게 될까. 지각할 때마다 저 지친 발걸음으로 등교했을 텐데.

도대체 나는 뭘 위해 선생을 하지? 내가 사람을 본 거야, 아니면 껍데기만 보고 매달려 사는 거야. 담임으로서 민선이의 저 삶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식이나 욱여넣고 규칙 잘 지키는 사람 만들겠다고 잔소리나 하다니. 아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모습을 그려 놓고는 거기에 맞춰 남녀노소 교사든 아니든 누구나 습관적으로 할 수 있고 하는 잔소리나 하고.

그 뒤로 민선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녀석은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민선이가 아침저녁으로 동생과 밥을 차려 먹는다는 것까지만 알았지. 집안의 흐름과 사는 형편은 그냥 짐작만 했고. 민선이에게 말했어. 늦어도 내게 미안한 마음 갖지 말고 당당하게 들어와라. 학교에 오는 것만으로도 너는 큰 공부 하는 거다. 대신 수업 흐름만은 따라가자. 늦어서 못 한 건 친구들이나 내게 물어서 해 가자. 밥을 못 먹고 올 때는 미리 우유를 먹도록 하고.

난 아이들에게 말했지. 부모님이 일찍 일하러 가셔서 민선이가 아침밥 차려 먹고 동생까지 챙겨서 온다. 어른도 힘들어하는 어려운 일이다. 어찌 보면 늦는 게 당연하다. 밥 먹고 동생 챙겨 학교 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공부니 민선이가 늦는 거에 대해서 너무 마음들 쓰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비슷한 어려움으로 늦는 사람은 말해 다오.

그러고는 민선이가 당당하게 늦도록 했어. 이상한 아이, 늦는 아이, 게으른 아이라는 어두움을 걷어 내고, 대신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하며 손이 야무진 아이 이미지를 만들어 갔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도록 자리 배치부터 모둠 구성, 현장 학습과 반에서의 역할 등도 신경 쓰고. 늦었다고 잔소리하는 일은 없었어. 오히려 늦게 오면 수업 중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멋지다고 했고. 그런데 지각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줄었어. 나중에는 840분 전에 오기 시작했고 6학년 올라갈 무렵인 2월 어느 날 아침엔 내게 와서 말하기도 했어.

선생님! 오늘 우리 반에서 가장 먼저 왔어요.”

그렇게 6학년으로 올려 보냈고 그해 스승의 날에 민선이로부터 편지를 받았어.

선생님, 오학년 때 지각해도 야단치지 않고 기다려 줘서 고맙습니다.”

지각하거나 공부 못 하는 게 삶의 목표인 아이는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모르고 사는 나를 깨우쳐 준 민선이! 난 지금도 늦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안 해. 하더라도 아이에게 맞게 하려 노력하지. 민선이가 지금은 서른 살 되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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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1월호

살아가는이야기

교장 일기

 

문제는 부모한테 있다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 교장, 열일곱, 내 길을 간다저자

 

 

아이는 날마다 커. 몸만 아니라 마음도 크지. 큰다는 건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변한다는 거고 달라진다는 거라. 몸무게, 키는 말할 것도 없고 말투나 눈빛도 달라져.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쌓이고 쌓여 젖먹이가 초1이 되고 초6이 되고 중2가 돼. 아이는 이 엄청난 변화를 겪으면서도 본능에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지.

문제는 부모야. 특히 부모 눈이 문제라니까. 부모 눈에는 날마다 일어나는 티끌보다도 작은 변화가 잘 안 들어올 수 있어. 심각한 건 티끌이 쌓이고 쌓여 들보가 돼도 안 보이고 누가 말해 줘도 믿지를 않는다는 거지. 칠십 먹은 자식도 어린애로 보인다는 말, 이거 우스갯소리로 여기고 넘어갈 게 아니야. 부모 눈에 콩깍지가 씌어 자식의 변화를 읽어 내지 못한다는 뜻이거든. 학부모 상담할 때마다 적지 않은 부모에게서 듣는 말이 있어. 문제행동만이 아니라 부러워할 만한 모습을 이야기할 때도 이런 말 자주 들어.

우리 애한테 그런 모습이?” “친구를 잘못 사귀어 그래요.” “작년엔 안 그랬는데, 올해 갑자기 왜 그러지?”

부모가 아이의 변화를 읽어 내지 못하는 까닭 몇 가지만 살피자고. 부모가 아이의 특정한 모습에 집착하기 때문이야. 예쁘고 귀여운 모습일 수도, 몸서리칠 정도로 싫은 모습일 수도 있어. 그런 모습에 집착하면 변화를 민감하게 읽어 내질 못해. 또 부모의 신념이나 가치기준이 너무 강해도 그래. 부모가 살아온 사회, 아이가 태어난 사회가 갖고 있는 지배적 가치와 행동기준이 부모의 눈을 가리는 콩깍지 역할을 하지. 좋은 대학 가야 사람구실 제대로 한다는 생각도 그 가운데 하나야.

열린 마음이란 아이에게 일어나는 변화, 아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있는 그대로 읽으려 노력하는 마음을 뜻해. 나는 있는 그대로 읽는다고? 아니야.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연인 사이에 콩깍지가 씌어 봐. 못 말리거든. 하물며 부모와 자식 사이는 그 콩깍지가 한 겹이 아니고 수십 겹 덕지덕지 붙어 있어. 자식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걸 호락호락하게 보거나 나는 안 그래!’ 하고 큰소리치는 사람이야말로 위험해. 난 교직생활하면서 이런 부모를 만나면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몸으로 깨달았지.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예로 들어 부모가 자식 키우며 열린 마음으로 지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해 볼게.

4학년 남학생 이야기야. 이 녀석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내다 어느 순간 화가 치밀면 상대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려. 얼굴이든 배든 가리지 않아. 분노에 겨워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손은 부들부들 떨어. 그러니 아이들이 같이 어울리려 하지 않을 수밖에. 그럴수록 심술과 거친 행동은 늘어나고 혼자 빙빙 겉돌고. 그런데 부모님은 3월부터 상담하자고 해도 안 오셔. 학교 여는 날 오셨기에 상담하려 했더니 동생 교실 들러 오신다 하고는 안 오더군. 전화 통화는 몇 번 했지만 수박 겉핥기라 별 효과 없고. 별 수 있나. 담임 혼자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수밖에.

그러다 시월 하순 무렵 어머님을 우연히 학교에서 만났을 때 거의 억지로 교실에서 마주 앉았지. 오늘은 담임으로서 아드님의 지금 상황을 솔직히 있는 그대로 다 말씀드리겠다며, 그동안 있던 굵직한 사례만 이야기했지. 아드님이 지금 이렇게 힘든 상황이다. 아드님에게 유산 물려주려 준비하고 계시냐, 그깟 유산 물려주려 하지 말고 아드님 가슴에 있는 불덩어리, 저 감당 못할 분노라는 불덩어리를 들어내 주셔라. 난 이런 모습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내 나름 짐작은 하지만 부모님이 저에게 솔직히 말씀해 주지 않으니 어설픈 짐작만 갖고 한 해를 살아왔다. 안타깝지만 담임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말씀드렸고 공은 부모님에게 넘어갔다. 그나마 담임으로서 의무를 조금 한 거로 위안 삼겠다. 그랬더니 어쩌면 좋겠냐고 하시더군. 그래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분간만 도움 받으면 아드님은 의지가 굳고 지혜롭기 때문에 변화가 있을 거다.

그러고 퇴근하는데 힘들더라고. 가능한 부모님 처지 공감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했지만 공연히 부모 잠 못 이루게 한 거라는 생각에 죄책감까지 들더라고. 그런데 그날 밤 1030분 무렵 문자가 온 거야. 짧게.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다시 상담하고 싶습니다. 언제 할까요?”

미룰 거 있어? 다음 날 아침 1교시 전에 상담했어. 어제 담임과 이야기 끝내자마자 남편 직장으로 찾아가 두 분이 밤늦도록 의논한 거야. 아들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전문가 도움을 받겠다며 상담할 곳을 소개해 달래.


어찌 되었냐고? 시간이 흘러 한 해 뒤 6학년 담임 할 때 그 녀석이 내 옆 반이 된 거야. 새 담임은 그 녀석이 4학년 때 화를 조절 못하고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패던 아이라는 말을 못 믿겠다는 표정이야.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훈남이 됐거든. 서글서글하고 따스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품어 주는 그런 녀석이 된 거야. 부모님은 나와 만난 그날 곧바로 상담소 예약하고 무려 한 해 동안 상담을 받았지. 아들 혼자만이 아니라 식구들 모두. 그러고는 유치원 때부터 해 오던 대부분의 사교육 다 끊고 주말마다 캠핑 가고 맛있는 거 해 먹으며 흠뻑 애정을 주고받으려 애쓴 거야.

지금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늦게라도 부모가 자식에 대한 쓴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인 건 다행이야. 아이 아픔은 덜어 주고 엉뚱한 데 쓸 기운을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쏟을 수 있었지. 그 아이에게는 천지개벽 새로운 세상이 열린 거야. 아이가 밝아지니 부모가 기쁜 건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반 아이들에게도 복이지. 이런 부모 만나는 거 쉽지 않아. 부모가 내 자식에 대한 씁쓸한 충고를 받아들이려면 대단한 용기와 판단력이 필요해. 내 아이에 대해선 부모인 내가 가장 잘 안다는 믿음이 그만큼 무섭기 때문이야. 나와 너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할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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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아이 짐을 교실까지 들어다 줘, 말아?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 교장

 

 

첫날이라 짐이 많아서요.” “교실을 못 찾을까 봐 그러는데요.”

짐도 무겁고 아이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몰라서 오늘만 들어가면 안 될까요?” “아이만 먼저 들여보내고 제가 뒤따라가서 잘하나 보면 안 될까요?”

이런 말을, 입학식 다음 날 교문에서 아침맞이하며 1학년 학부모들과 쉴 새 없이 주고받았어. ‘아이가 힘들다는데 잠깐 들어갔다 오는 게 문제요?’ 하는 당당한 민원인 표정부터 안 들어가는 게 원칙인 건 아는데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 아이만하는 애틋한 호소까지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게 장난이 아니네.

다른 날보다 몇 배 힘든 아침맞이였어. 운동장과 학교 건물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걷는데 1학년 학부모와 아이들이 자꾸 떠올라. 학부모와 입학 초 학교 생활 적응 방법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했는데 놓쳤다는 생각이 드네. 예비 소집 이후 몇 차례 신입생 학부모를 위한 소통의 자리가 마련되었다면 오늘 아침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 상황에 따라 부모가 교실까지 들어갈 수도 있어. 사전에 담임과 학부모가 아이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나눈 뒤 나온 결론이라면 무엇은 못 하겠어?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학교가 정한 원칙을 무너뜨리는 건 교육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오늘 아침에 겪은 일을 가볍게 넘어가면 내년에도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거야. 그러지 않도록 내년 교육 과정 수립과 운영에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봤어.

유치원을 떠나 학교라고 하는 곳에 처음 등교하는 아침이야. 그런데 갖고 가야 할 준비물이 많아. 이걸 어떻게 들고 간다? 태어나 학교에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날, 준비물을 들고 가는 방법에 따라 아이에게 심리적으로 어떤 움직임과 변화가 있고 그 교육적 의미는 뭘까? 아침맞이하며 만난 1학년 아이들과 부모를, 준비물을 들고 오는 방법에 따라 세 묶음으로 나눠 봤어. 그랬더니 부모와 아이들 표정, 몸짓, 눈빛,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다르더라고.

첫 번째는 부모가 짐을 교실까지 가져다주는 거야. 부모 표정을 보면 밝고 뿌듯해. 그런데 온몸에 긴장감이 흐르고 양 볼이 불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어. 기운이 올라와 있다는 이야기지. 아이와 말을 하면서도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로 봐서 빠르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 교실 위치가 어디인지, 준비물을 어디에 넣어야 하고 담임을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등 생각이 많아.

반면 아이는 발걸음이 가볍고 두 손바닥은 펼쳐져 있고 눈은 이리저리 편하고 자유롭게 움직여. 편안하고 느긋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어느 하나를 깊이 바라보지는 않아. 여유롭고 편안하고 행복해. 눈길과 마음 모두 친구가 아니라 부모에게 쏠려 있어.

두 번째는 부모가 짐을 교문까지만 들어다 주고 거기서부터 아이가 들고 들어가는 거야. 부모 먼저 살펴보면 들여보내 주면 안 되나, 다른 사람도 들어가는데. 애 보는 앞에서 규칙을 어길 순 없고.’ 하며 교문 앞에서 아침맞이를 하고 있는 교장 눈치를 슬쩍 살피는데 갈등이라고 할까. 망설임, 머뭇거림이 느껴져. 애당초 집에서 떠날 때부터 교문까지만 들어다 주기로 아이와 약속하고 온 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이에게 짐을 넘겨주는데, 교실까지 들어다 주기로 해 놓고 교장이 버티고 서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들려 보내는 경우에는 떼쓰고 울고 난리야.

이렇든 저렇든 대부분의 부모에게서 불안감, 걱정, 두려움, 노심초사 같은 감정이 느껴져.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한다. 혼자 갈 수 있지?”, “넌 잘할 수 있어.”, “이제 네 힘으로 하는 거야.”, “화이팅!”, “너 파일 박스 어디에 둬야 해? 크레파스는? 실내화는? 잘 보고 해라.”, “교실 찾을 수 있어? 모르면 내게 전화해.”

반면 대부분의 아이들 입이 댓 발은 나와 있어. 골이 난 거야. 왜 교실까지 들어다 주지 않냐는 거지. 울거나 드물게는 같이 들어가자고 우기기도 해. 기운은 가라앉아 있고 눈꼬리와 어깨도 처져 있어. 발은 끌리고 다리는 풀려 있다. 친구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쳐다보지도 않거나 더 말 붙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게 하는 표정으로 영혼 없이 건성으로 대답하고. 가끔은 웃으며 걱정 마라는 표정을 짓거나 엄마를 힘차게 부르는 아이도 있지만 아주 드물지.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집에서부터 혼자 짐을 들고 오는 아이들이야. 이런 아이들은 교문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신호등을 건너오는 순간부터 아우라가 느껴져. 얼굴은 상기되어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두 손은 마치 절벽에 오르며 밧줄 붙잡듯 봉지와 손가방을 꽉 움켜쥐고 있는데 발은 번쩍번쩍 들어 힘차게 앞으로 내딛어. 친구들이 부르면 대답은 하면서도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듯 길게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아. 얼굴에는 긴장감이 넘치는데 짜증은 없고 눈동자는 앞만 보고 머릿 속에서는 뭔가 많은 생각이 솟구치고 있는 게 보여. 낯선 세상에 혼자 들어가는 두려움이 느껴지고 콧구멍은 벌렁거리고 콧등엔 땀이 솟아 있어. 주먹 하이파이브 하자고 말을 걸어도 귓등으로 흘리고 몇 녀석은 눈으로 자기 두 손을 가리켜. ‘보면 모르냐. 지금 내 손이 하이파이브 하게 생겼냐?’ 이런 뜻이지. 목에 힘 주고 당당하게 나를 쳐다보는데 가슴이 뭉클해.

이 세 종류의 아이들 가운데 삶에서 만나는 문제 상황을 풀어내고 해결해 삶의 주인으로 설 힘을 얻은 아이는 누구일까? 손발이 편안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얻기로 따지면 첫 번째 아이가 가장 큰 이익을 본 거고 세상살이라는 큰 바다와 산을 넘어갈 힘을 얻은 걸로 치면 세 번째 아이를 당할 수 없어. 사람들은 학교란 아늑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곳이어야 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난 아니라고 믿어. 학교라는 곳, 배움이 일어나는 곳은 낯설고 두렵고 불안한 자극이 가득한 곳이야. 모험이 가득한 곳이라는 거지. 학교가 왜 모험이 가득한 곳이어야 하는지는 다음 호에서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끝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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