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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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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동권'에 해당되는 글 2

  1. 2020.06.30 걸어 다닐 권리! 걸어 다닐 자유!
  2. 2019.12.30 배울 권리, 살아갈 권리

<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걸어 다닐 권리! 걸어 다닐 자유!

 

최숙하/ 장애인 재택근무 사원

 

코로나19 때문에 외출이 더 힘들어졌다. 외출해도 음식을 포장해서 오기 때문에 활동지원사 선생님과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여유롭게 먹은 게 언젠지 모르겠다. 올해 봄엔 놀이공원의 튤립 축제에도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내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요즘은 마음 편하게 외출했을 때가 그립다.

내가 처음으로 외출하기 시작한 때는 지체 부자유 특수학교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기숙사 생활도 했고 기숙사 학생들을 위한 지역사회 적응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분위기 좋은 인도 음식점에 가서 인도 카레도 먹어 보고, 방송국에서 장애인 가요제를 관람하기도 했었다. 그 이후로도 전동 휠체어를 타면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왼손으로 운전하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래 봤자 고작 학교 근방에 있는 장소뿐이었다. 하지만 항상 몸에 힘이 들어가서였을까? 내 몸은 언제나 피곤했다.

스물두 살에야 국어국문학과의 학생이 된 나는 무엇이든 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 시뿐이었다. 수업 내용에 관한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학교 구석구석 다니고 싶어도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없어 휠체어로는 갈 수 없는 강의실이나 학생식당도 있어서 이동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필수 과목으로 홈페이지 제작 수업 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 기말시험으로 홈페이지 제작 실기시 험을 봐야 했는데, 시험이 치러질 강의실은 2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고 장애인 경사로가 있었지만, 경사로의 시멘트 가 깨지고 갈라진 데다가 경사가 가팔라 도저히 올라갈 수 없어서 1층에 계신 경비원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경사가 가팔라 가지고, 2층으로 갈 수가 없어서요.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엔 경비원 아저씨의 표정이 얼떨떨해 보였지만 재빨리 나를 쫓아와 내 휠체어를 조금씩 밀어 주었다. 나는 전동 휠체어 컨트롤러로 운전하고 아저씨가 뒤에서 밀어 주며 앞 으로 가 보려 했지만, 경사로에 금이 가서인지 바퀴만 헛돌고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기말 시험이라 시험을 치지 않으면 F학점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 다. 나는 걱정으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나를 보고, 경비원 아저씨가 난처한 듯 말했다.

학생, 조금만 더 속도를 빠르게 해 봐요. 이게 안 움직이네, 다른 학생 휠체어는 잘 가던데.”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시험 시간은 다가오고 움직이려고 한참 동안 노력해도 그대로였다. 그렇게, 시험을 보지 못하고 전동 휠체어를 운전하며 기숙사로 돌아와야 했다.

불편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한 채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 때문에 졸업 이후 사회에 나오면서 마음이 움츠러들었고 두려움만 앞섰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활동지원사 선생님께서 함께 외출을 자주 해 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 주셨다.

선생님과 함께 교통약자 차량을 이용해서 경전철을 타고 가까운 놀이공원에서 꽃도 보며 웃음을 되찾고 필요한 물건을 사러 대형 할인점도 가고, 영화관도 가고.

비장애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도 주어지는 듯했지만, 학교의 안이나 밖의 세상에서도 나에겐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가 없었다.

대형 할인점이나 놀이동산은 장애인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왜 그렇게 좁은지, 전동 휠체어를 운전해 억지로 욱여넣다시피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면 붙잡고 서는 안전 손잡이가 너무 낮게 설치되어 있거나 잡는 순간에 흔들려서 넘어질 뻔한 적도 많았다.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해 외출을 할 때면 콜택시에서 내려 휠체어를 운전해서 사람들이 다니는 보도블록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낮은 방지턱 앞에는 자동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나와 활동지원사 선생님은 낮은 방지 턱이 나올 때까지 멀리 둘러 가야 했다.

길에 시멘트가 깨져 있거나 갈라지고 떨어진 보도블록을 지날 때 전동 휠체어가 흔들리거나 크게 쿨렁댔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다리와 온몸에 더 힘이 들어갔다. 옆에서 활동지 원사 선생님이 운전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다음 날 몸살이 났을 것이었다.

그날 오후 선생님과의 외출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가는 장애인 콜택시 안에서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이 보도블록으 로 가지 않고 자동차들이 달리는 차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사람이 걱정되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언젠가의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행자가 다니는 길이 전동 휠체어로 이동하는 장애인들 에게 편리했다면 그 사람이 도로로 가지 않았을 텐데.’

모두에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듯 모두에게 걸어 다닐 권리가 있다. 그것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당장은 아니 더라도 장애인의 이동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배울 권리, 살아갈 권리

최숙하/ 장애인 재택근무 사원  

 

나는 스물아홉 살,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여성이다. 어머니는 임신 7개월에 나를 낳았다. 갑작스러운 진통으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분만이 시작되었고, 배 속 태아는 거꾸로 있는 둔위 상태였다. 산모도 태아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의지 때문이었는지, 나는 1.25키로그램의 미숙아로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보았다.

첫돌이 될 때까지 1년여의 시간이 내가 비장애인으로 살 수 있었던 전부였다. 아무도 나의 장애를 발견하지 못한 시간이기도 했다. 돌이 지나도 나는 제대로 서지도, 걸음마를 떼지도 못했다. 병원에서 내려진 진단은 뇌성마비였다. 지적 발달은 6세쯤에서 멈출 것이고, 걷지 못할 것이고, 전형적인 강직 증상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나의 지적인 능력은 정상 범위에 가깝게 성장했지만, 몸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다른 사람과 달랐다. 서거나 걷는 것은 물론이고 벽에 기대지 않으면 앉을 수조차 없었다. 몸의 강직 때문에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도 없었고 말도 어눌했다. 아홉 살이 되어 겨우 장애아동 보호시설에 들어갈 때까지 내가 만날 수 있는 세상은 텔레비전과 비디오테이프와 동화 테이프가 전부였다. 부모님은 할머니에게 나를 맡겨 놓고 일을 하러 나갔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취학통지서가 나왔지만, 입학할 학교의 교장은 나의 장애 상태를 본 후 결정하겠다고 했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어도 몸이 불편한 나의 등하교를 도와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지적인 능력은 비장애인과 비슷한 수준이고 능숙하지는 못하더라도 읽고 쓸 수는 있었지만, 결국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후, 재활 과정을 거쳐 장애아동 주간보호시설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비록 시설 안에서뿐이었지만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었고 현장학습을 통해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홉 살의 나는 점심과 간식을 먹거나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보거나 억지로 낮잠을 자야 하는 유치원생 수준의 생활을 해야 했다. 장애의 정도도 나이도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는 나에게 맞는 교육도 어울릴 친구도 없었다.

일 년이 지나고 열 살이 되어서야, 한 초등학교와 협약을 맺은 장애인 재택학급이 생겼고, 나는 비로소 초등학생이 되었다. 학교 소속의 특수교사 한 명이 시설로 와서 수업을 진행하는 식이었는데, 몸 상태와 지적 수준이 다른 학생들을 선생님 한 명이 일대일 개인 지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과목을 다 배우지도 못했다. 수학과 국어가 수업의 전부였고, 다른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에는 역시 한쪽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어야 했다. 보조교사가 한두 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나는 초등학교 과정 6년을 결핍과 무기력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열여섯 살이 돼서야 시설과 재택학급을 떠나 지체부자유 학생들이 다니는 장애인 특수학교 중학부에 입학했다. 등하교가 어려운 장애 학생들은 그곳 기숙사에서 고등부 과정까지 6년을 지냈다. 나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스스로 생활해야 했다. 목욕, 청소, 옷 갈아입기, 휠체어 타기. 내 몸 상태로는 무엇 하나 쉽게 할 수 없었다. 우왕좌왕하다가 수업에 지각하고 꾸중을 듣고 함께 생활하는 방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기 일쑤였다. 생리대를 갈지 못한 날에는 수업이 끝날 때쯤 교실로 들어가기도 했고, 휠체어를 잘 움직이지 못해 이동수업 때마다 헤매 다녀야 했다.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면서 어린 시절의 갸름하고 제법 예쁘장했던 내 모습은 사라졌고 친구들은 그런 나를 놀려 대기도 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울며 잠들었다.

마침내 중·고등 과정 6년이 지나고 장애인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고 칭찬을 받은 것은 글쓰기였다. 그것은 몸이 불편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것도 기뻤다.

나는 국문과에 진학하여 기숙사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장애를 가지지 않은 비장애인 친구들과 함께하는 학교생활이었다. 그들과 같은 수업을 들었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초··고 시절 정상적인 수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전공 과목을 따라가기도 어려웠고 똑같이 주어진 시험 시간 동안 불편한 손으로 답안을 작성하는 것도 나에게는 무리였다. 글씨는 엉망이었고 성적도 과락을 겨우 면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학교 안에는 휠체어로는 갈 수 없는 곳도 있어서 가장 맛있는 학식은 한 번도 먹을 수 없었다. 장애인 화장실은 청소 도구로 가득 차 종종 다른 화장실을 찾아다녀야 했다.

장애학생회와 함께 장애 인식 개선 활동 등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내 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장애인의 세상도 비장애인의 세상도 바깥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헌법 제311항을 알게 되었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배울 권리, 살아갈 권리!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배움에 목마르고, 갈 수 없는 곳은 더 늘어만 간다.

 

특수반에서 수업이라고 할 만한 시간도 없어요. 사운드북 몇 번 눌러 주는데 사운드북은 집에도 많아요. 원반(일반학급에서의 통합교육)도 마찬가지예요. 교사가 성은이는 아이들 노는 것만 봐도 큰 교육이 된다는데, 이게 공부인가요? 성은이는 손만 빨고 있었어요. 쉬는 시간에 들어갔더니 손만 얼마나 빨며 침 흘렸는지, 바지까지 젖어 있었어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성은이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는 거예요.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심심하고 지겨워서 죽을 것 같았다는 뜻입니다.” (<비마이너>, ‘휠체어 타는 우리 아이는요?’(2019313) 인터뷰 글 중.)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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