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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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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2.07 그녀는 오지 않았다

<작은책> 202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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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속 여성들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종수/ 미술사학자, 조선회화실록저자

 

  

이 무덤은 특별합니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고구려의 수많은 벽화고분 가운데 묘 주인이 확실한 유일한 무덤입니다. 연대까지도 확실하죠. 408. 앞서 보았던 안악3호분의 경우, 많은 정보를 주긴 했지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묵서명에 이름을 남긴 동수가 무덤의 주인인지 등등,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인 까닭에 여주인의 신분 또한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지요.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


그런데 안악3호분으로부터 약 반세기 후, 훨씬 더 정확한 정보를 품고 있는 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무덤 안 벽화 사이에 남겨진 명문을 보자면, 그 내용인즉, 영락(永樂) 18, 즉 광개토대왕 시대인 408년에, 유주 자사 등등을 역임했던 진()이라는 남자가 77세까지 잘 살다가 이곳에 묻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주 자사라면 지방 태수에 해당하는 지위이니 진의 무덤은 5세기, 고구려가 한창 잘나가던 시대의 지배층 무덤을 대변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무덤 안 가득 벽화로 장식되었으니 당연히 무덤 주인 부부의 초상화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5세기 무렵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앞 시대의 안악3호분과는 달리, 무덤 주인 부부가 한 장면에 나란히 앉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무덤 안에서의 위치도 바뀌었죠. 묘주 부부 초상화를 측실에 그렸던 안악3호분과는 묘실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인데요. 측실이 사라진 5세기에 이르면 묘 주인의 초상화는 현실(玄室, 무덤방)의 북쪽 벽면에 그려집니다. 주인공들을 상석(上席)에 모신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일까요. ‘덕흥리 벽화고분의 현실 북벽에는 이 홀로 앉아 있습니다. 배우자가 없었던 것일까 싶지만,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 남성이 미혼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만한 선택지가 아닙니다. 게다가 명문 기록을 보면 자손들의 영달을 기원하는 내용이 더해져 있습니다. 진은 여느 고구려의 상류층 남성들처럼 자손을 둔, 다시 말해 기혼자였던 것입니다.

벽화의 원래 계획이 단독 초상일 리도 없습니다. 남주 혼자 벽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명백히 그 옆자리가 비어있지요. (선으로 모사한 그림을 보면 이 장면이 보다 선명하게 확인됩니다.) 진의 옆으로는 그를 위해 대기 중인 말 한 마리, 그리고 시중꾼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진과 나란해야 할 배우자의 자리는 비어 있고, 장방 바깥쪽으로 여주를 위해 준비해 둔 수레 하나와 시녀들이 대기 중일 뿐입니다. 진의 아내는 이 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선 모사도).


궁금합니다. 진이 홀로 그려져야 했던 이유. 저 영원의 세상에서도 부부가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지배층 남성이 무덤에 홀로묻힌 경우가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있기는 했습니다. 그저 그런 관직도 아닌 국왕의 신분이었죠. 물론 그는 결혼을 했습니다. 다만 왕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뿐인데요. 문제될 것 없지요. 대부분의 부부처럼, 후일 왕비가 죽은 뒤에 합장을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왕비는 남편 곁에 묻히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죠. 두 번째 남편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쪽도 국왕의 신분이었는데 두 남자는 형제 사이였답니다.

고구려의 9대 임금인 고국천왕이 승하한 것은 197. 아들은 없이, 동생들만 여럿 있는 왕이었습니다. 왕비 우씨는 고민이 깊었지요. 어떻게 왕비 자리를 더 유지할 수 있을까. 고국천왕은 첫째 동생인 발기를 후계로 골라 두었지만, 그 유지의 시행 여부는 살아 있는 왕비의 몫이었죠. 결국 왕비는 자신을 박대한 첫째 시동생 발기를 제치고, 둘째 시동생인 연우를 왕으로 세웁니다. 바로 10대 임금인 산상왕인데요. 고국천왕의 비였던 우씨는 다시 산상왕의 비가 되어 왕비의 자리를 유지해 나가지요.

흥미로운 것은 다소 무리를 해 가며 다시 왕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별다른 비난이나 저항 없이 왕비의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의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를 생각해 본다면, 그녀의 행동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녀와 새 임금 산상왕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은 권력에서 밀려난 발기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신민들 모두 왕과 왕비를 승인했다는 얘기지요. 오히려 왕위를 차지하려 분란을 일으킨 발기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왕비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그녀의 출신인 연나부, 즉 고구려의 왕비를 배출했던 부족의 힘이,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하는 배경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집안의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왕비 자리를 유지할 방법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출신 부족이 세력을 겨루어야 했던 것이 2세기 말, 고구려의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한 여인이 출가를 했다 할지라도, 딱 잘라서 출가외인으로 금을 긋지 않았다는 점만은 분명하지요.

물론 그렇다 해서 산상왕비의 경우가 고구려 여성의 평균적인 삶일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고구려 여성들은 권력에서 소외되지 않았다, 뭐 그런 식의 일반화로 이해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후 조선의 여성상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나마 조금 숨을 쉴 만한 시대라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게 해 줍니다. 산상왕비 개인의 선택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 별개로 말입니다.

묘실 벽화 이야기를 하던 중이니만큼 죽음 후 이 왕비의 안식처가 궁금해집니다. 그녀는 죽은 뒤 어느 남편 곁에 묻혔을까요. 자신의 유언에 따라 산상왕 곁에 묻혔다고 합니다. 첫 번째 남편의 뜻을 어기고 왕위 계승을 흔들었으니 고국천왕과 함께 영원의 시간을 나눈다는 건, 아무래도 낯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어쨌거나 홀로 무덤을 지키는 신세가 된 고국천왕. 저승에서도 마음이 썩 좋지 못했나 봅니다. 왕비 우씨가 산상왕 곁에 묻히게 되자, 무녀의 꿈에 나타나 큰 분노를 토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두 무덤 사이에 소나무를 심어 서로 보이지 않게 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하네요. 재혼이야 고구려가 허락한 제도이니 그렇다 쳐도, 자신을 무덤 안에 홀로 남겨 둔 왕비를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겠죠. 왕비 없이 혼자 묻힌 고국천왕의 무덤 안에 벽화가 그려졌다면, 몹시도 외로운 묘 주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여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어째서 이토록 장엄하게 장식된 영원의 안식처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요. 고국천왕의 왕비가 두 번째 남편인 산상왕을 따라 묻혔듯이 의 아내에게도 무언가 사연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묻혀 버린,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어 있는 여주인의 자리. 고구려 여성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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