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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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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03 의부증 청산 수업료(작은책 2019년 4월호)

<작은책> 2019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의부증 청산 수업료

임전/ 숲해설가

 

 

몇 년 전, 부부 동반 모임에서 남편 친구 부인이 지인의 권유로 사주를 보고 온 얘기를 했다. 상담을 해 주시는 분이 친구 부인에게 어떻게 그렇게 참고 살았냐며 눈물을 흘리더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음이 찡했다.

공부를 하기 전엔 사주 보는 사람들을 스스로 자기 일을 결정하지 못하는 비주체적인 인간이라 생각해 무시했다. 그리고 사주를 미신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사주는 음양오행, 우주와 천문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 영성수련 단체의 권장 도서인 얼굴경영이라는 책을 보았다. 모 디지털대에서 얼굴경영 공부를 했다. 얼굴경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잘 모른다. 관상이라 말하면 얼른 알아듣는다. 사는 데 따라 얼굴이 달라지니 마음 경영을 잘해서 얼굴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얼굴경영이라고 말한다. 교수는 3초 안에 사람의 얼굴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주와 접목해서 공부하면 사람 얼굴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동네 평생학습원에서 사주 공부를 시작했는데 처음엔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어려운 걸 배우겠다고 했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쉽게 그만두지도 못했다.

처음엔 뭔 소린지 모르겠더니 이론을 외우고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고 사주에 대한 재미를 알아 갔다. 사주에 대해 알아 가니 현장에 가서 내 사주를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 부인이 말한 곳을 가 보기로 했다. 막상 가 보니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는 곳은 아니었다. 한복 입은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나의 사주는 일주인 병화가 약해서 병화를 생해 주는 나무 목이 들어간 이름이 좋다고 해서 이름도 바꾸고 호도 만들었다.

사주 공부를 계속하던 작년 어느 날, 밤에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사무실도 아니고 현장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어디라고 말은 안 하고 나중에 얘기해 준다고만 했다. 일단 전화를 끊긴 했지만 찜찜하고 의심스러웠다. 나중에 얘기해 준다고 했지만 물어보자니 그렇고 속만 끓였다.

얼마 후 군대 간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모처럼의 가족 나들이인데 남편은 밥만 먹고 금방 일어나서 가야 한다고 했다. 개 눈엔 똥만 보인다고, 의심의 눈초리로 보니 그것도 촉수에 걸렸다.

다음 날 상도동의 철학관으로 달려갔다. 처음엔 여자가 없다고 하더니, 잘 좀 보라는 나의 채근에 종이로 만든 동그란 통에 자그마한 주사위 같은 것을 넣고 흔들었다. 통의 머리 부분을 쥔 손목에 스냅을 주어 꺾더니 주사위 하나를 꺼내서 보기를 몇 번 하였다. 밖에서 여자가 자꾸 불러내는구먼. 여자를 떼려면 부적을 써야 해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며 부적을 써 달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부적을 쓰고 있는데 손님이 왔다. 아들과 어머니로 보였다. 오래된 단골인 듯 근황을 주고받았다. 아들이 아기를 낳아 이름을 지으러 왔다고 했다. 대기실이 따로 있는 데가 아니어서 그분들은 내가 상담을 하는 옆에서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부적을 쓰면서 그들과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속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부적은 정성을 다해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고객과 이바구를 하면서 쓰고 있다니?’ 더 가관인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아들을 낳은 젊은 사람을 건너다보며 바람을 피우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책상 밑으로 다리를 뻗어 할아버지의 다리를 툭 쳤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두 개의 부적 중 하나는 집에 있는 베개에 넣고 다른 하나는 사무실에 있는 베개에 넣으라고 했다. 일단 집에 있는 베개에 두 개를 넣었다. 문득, 내가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확인한 것도 아닌데 부적을 써 왔다는 게 코미디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여자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남편은 성의 자기 결정권이 있고 본인의 인생이 있는 것인데, 부인이라고 해서 남편의 인생에 끼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사람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스스로 자존심이 상해 의부증 환자를 청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의 의부증의 역사는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다. 과부인 내가 총각인 남편과 결혼하여 스스로가 꿀린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나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을 달고 살았다. 결혼 전에 안양에서 야학을 같이하던 여자랑 잠깐 사귀었다는데 결혼 초 남편이 늦거나 하면 그 여자랑 다시 만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그 여자네 집에 한 번 찾아간 적도 있었다. 이렇다 할 물증이나 뭣도 없으면서 남편을 의심하는 마음에 찾아간 것이다. 그 여자는 내가 왜 찾아왔을까 이상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쇠고기뭇국도 끓여 주고 최대한 예를 갖춰 잘 대해 주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부적을 쓸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 돈이 모자랐다. 철학관에서 일부를 내고 나머지는 계좌 이체로 보냈지만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를 앉혀 놓고, 다른 손님을 바라보며 바람을 피면 안 된다고 떠들면 무슨 상담이 오고 갔는지 나팔을 부는 꼴이 아닌가? 상담은 내담자의 비밀을 보장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할아버지 책상을 둘러엎고 올 것을. 철학관에서 일부 낸 것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는 나 몰라라 할 것을. 후회하는 마음에 약이 오를수록 의부증 환자 청산 수업료로 쓴 것치곤 적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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