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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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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청소년노동'에 해당되는 글 2

  1. 2020.11.13 생계형 알바를 하는 학교 밖 청소년
  2. 2020.11.13 열세 살 때 나는 7번 시다였다
2020. 11. 13. 16:27 기획 특집

<작은책> 11월호

특집_ 전태일 열사 50주기, 아동·청소년 노동

 

 

생계형 알바를 하는 학교 밖 청소년

이정현/ 일하는학교 사무국장

  

민주는 스물네 살 청년이다. 열세 살 때부터 알바를 시작했다. 돈 문제로 다투는 일이 많던 엄마 아빠가 그 무렵 완전히 이혼을 했고, 건강이 나빠진 엄마는 일을 하지 못했다. 민주는 학교 준비물도 사고 친구들과 간식도 사 먹으려고 떡볶이집에서 시급 2000원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잠깐 일하고 용돈을 벌려는 생각이었지만, 이후 민주의 삶은 '끝없이, 쉼없이' 일해야 하는 알바 생활로 이어졌다. 엄마의 병이 깊어지고 이혼한 아빠가 몇 해째 생활비를 보내 주지 않아 민주는 고등학교 입학 두 달 만에 자퇴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주유소, 피시방, 호프집, 제빵 공장. 민주는 몇 달에 한 번씩 여러 가지 일을 오가며 일했다. 한동안 일하다가 몸이 지치면 잠시 그만두고 쉬었다가, 돈이 부족해지면 다시 일을 하러 나가는 패턴을 반복했다.

 

불성실하고 예의 없는 자퇴생

일하는 곳을 계속 옮기게 되면서, 민주에게는 '불성실하다'거나 '끈기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따라붙었다. 10대 청소년이 긴 시간을 지속해 일하기는 힘들었다. 일이 어렵거나 정해진 시간을 지켜 출퇴근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민주를 가장 지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일터의 사람들'이었다. 사장은 민주가 '당연한 것을 모른다'며 자주 혼을 냈고 민주가 스스로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근로계약서나 주휴수당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았다. 민주가 의지하고 싶었던, 그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매니저나 선임들은 나이 어린 민주를 무시하거나 텃세를 부리며 일터에서 존재감을 내세우려 했다. 사장이나 선배들이 던지는 수많은 거칠고 아픈 말들을 민주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마음이 지치면 몸이 지치고 아파 왔다. 하지만 병원에 가거나 쉴 수 없었다. 민주는 고등학교 졸업도 안 한 자신을 사회가 어떤 눈으로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병원에 간다고 조퇴를 하거나 결석을 하면 불성실하고 무례한 아이로 낙인찍히기 쉬웠다. 민주는 아파도 참고 버티며 일했다. 그러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지면,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락을 끊고 일을 그만뒀다. 회사에서 연락이 올까 무서워 아예 연락처를 차단하거나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민주가 '불성실하고 예의 없는 자퇴생'으로 평가되고 기억되는 악순환의 시간들은 그렇게 지나갔다.

 

알바가 직업인 청년들

우리 주변에는 '생계형 알바'를 하며 살아가는 청년, 청소년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직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열악하고 불안정한 고용 환경에 놓여 있지만, '알바'라 부르기에는 주 5일 이상 하루 8시간 이상 일하고 그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 가야 하는 사실상의 직업 노동자들이다.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아무런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그들은, 의미없게 느껴지는 학교 생활을 중단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친구들이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닐 무렵인 17세에 첫 알바를 시작한다. 하지만 절박한 생활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한곳에서 오래 일하지는 못한다. 이들 중 35퍼센트는 6개월 이내에, 70퍼센트가량은 1년 이내에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았다(생계형알바 실태조사 보고서’, 사회적협동조합 일하는학교, 2016).

 

'불성실'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과 싸우는 과정

오래 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른들은 '인내심이 없다', '불성실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그들이 '그만둔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마음의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학교'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모르고 부당함을 느끼는 일에 대해서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겪어 온 '비난과 공격'을 이겨 내는 방법도 아직 갖지 못했다. 그래서 '민주'처럼 어렵고 부당한 일이 있어도 아무 말 하지 않고 홀로 참고 마음의 고통과 싸우다가 단절이라는 최후의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뿐이다.

민주가 그랬던 것처럼, 10대에게 일터는 어렵고 두려운 곳이다. 너무나 일방적이고 불친절하고 윗사람이나 선배들 관계에 눈치껏 끼어들지 못하면 쉽게 왕따가 되는 힘든 곳이기도 하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지 않고, 내가 모르는 것을 '당연한 상식'이라며 되레 혼을 내는 막막한 곳이다.

그래도 그들에게 '''일터'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학교'라는 성장의 유예 기간, 친구를 만나 어울리는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 좌절과 은둔의 시간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그들은 '일과 일터'를 통해서 성취의 경험들을 채우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는 일터가 '학교'이고 '삶의 터전'이다. 돈도 벌어야 하지만, 나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 조금 더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일한다.

이 청소년들을 위해서 일터가 변화하면 좋겠다고 꿈꾸고 싶지만, 사실 너무 허황되고 요원하다. 다만 내 곁에 이렇게 일하는 청소년이 있다면, 그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고, 조금 더 이해하고 응원할 수는 있지 않을까

posted by 작은책
2020. 11. 13. 15:57 기획 특집

<작은책> 202011월호

특집_ 전태일 열사 50주기, 아동·청소년 노동

 

 

열세 살 때 나는 7번 시다였다

신순애/ 열세 살 여공의 삶저자

 

 우리 아버지는 1919년 남원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죽지 않기 위해 산속에서 약 6개월을 살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을 하셨다. 오빠들은 한국전쟁 때문에 생긴 장애로 모두가 불편한 몸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어머니는 삯바느질 혹은 품팔이 등으로 겨우겨우 먹고살아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나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포기하고 살았다.

우리 가족은 1965년에 서울로 상경하였고 중랑교 무허가촌에서 살았다. 나는 당시 중랑교 휘경동에 있는 PAT 공장을 찾아갔다. 공장장은 면접에서 "꼬마야, 몇 살이야?" 하고 물었다. 나는 "열두 살이요." 했더니 공장장은 "집에 가서 엄마 젖 더 먹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집에 계신 엄마를 돕고 싶었다. 주인집 언니는 평화시장의 미싱사였다. 나에게 평화시장에서 재봉틀 기술을 배워 보라고 권유했다.

1966년 봄, 나는 평화시장 3층 삼양사 아동복 블라우스 만드는 공장에서 7번 시다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시다들은 다락방 마룻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일을 해야 했다. 그곳에선 옷 라벨 뒤에 번호를 꼭 써야 했다. 왜냐하면 혹시 잘못된 옷이 만들어지면 수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7번 시다였다. 내 옆에는 1번 미싱사와 1번 시다가 있었고, 3, 5, 2번 미싱사와 시다가 함께 있었다. 당시에 S, M, L, XL, XXL, 이렇게 다섯 가지 사이즈가 있었다. 시다들은 일감을 받으려면 다락방에서 내려가서 받아 와야 했다. 여름에는 하루에 9~10번 정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고, 겨울철에는 두꺼운 잠바를 만들기 때문에 서너 번으로 줄어들었다.

1960~70년대 당시 여공들은 열세 살 아동이었다. 사진_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출근 시간은 아침 8시였는데 퇴근 시간은 각자 조금씩 달랐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남에서 다니는 노동자들은 밤 1030분 퇴근, 창동에서 다니는 노동자들은 11시 퇴근, 나는 1120분에 퇴근을 하는데 통금에 걸리지 않으려고 평화시장에서 동대문까지 달려가야 했다. 당시 사장들은 창신동, 신당동 주변에서 다니는 노동자들은 제일 좋아했다. 집이 가까우니까 밤 1130분까지 일을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다들은 점심을 먹고 바로 또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 점심때 도시락 먹고 또다시 일을 했고,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밤 1120분까지 일을 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척추가 바로 서지 못해 건강하지 못하다.

나는 삼양사에서 약 4년 일을 했지만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 7번 미싱사 언니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얼굴은 계란형이었고, 오뚝한 코에 눈이 아주 빛이 났고, 머리는 양쪽으로 늘 따고, 앉아서 미싱을 했다. 약간 여드름도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모른다. 한 번도 이름을 불러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알게 된 1번 시다는 윤자이다. 윤자는 옷을 만들기 위해서 다락방에서 내려가 일감을 받아 온다. 시다들은 쭉 붙어 있는 라벨을 하나하나 쪽가위로 잘라서 미싱사에게 줘야 한다. 1번 시다 윤자는 M자를 자르는데 잘못 잘라 W로 나올 때가 많았다. 1번 시다는 다시 다락방에서 사다리로 내려가서 받아 오는데 미싱사들은 절대 그냥 주지 않고 혼을 냈다. 1번 시다는 혼이 났고 울면서 일을 했었다. 이런 일은 반복되었다. 하루는 내가 "1번 시다, 왜 매번 혼이 나야?" 물었더니 1번 시다가 ", 내가 한글도 모르는데 영어를 어떻게 알아?" 했다. 영어 M자와 W자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1번 시다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하느님, 부처님, 오늘 M자 일감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출근을 한다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M자 사이즈 라벨을 잘라 주는 것을 도와주었다. 라벨 10개 자르는 시간은 약 10초면 충분했기에 나는 그 일을 도와주면서 윤자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삼양사에서 나와 진선미공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윤자는 정전되면 나를 꼭 찾아와 나를 보고 싶어 했다. 윤자와 나는 그 인연으로 1978년에 노조에서 한글반 공부를 조합원들과 함께 배우기도 하였다.

나는 하루 14~15시간 일을 하면서도 기술자만 되면 당시 가장 높은 삼일 빌딩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꾸면서 열심히 배웠다. 첫 월급으로 700원 받았는데, 미싱사는 1만 원~12천 원 정도 받았다. 나는 1만 원만 받으면 우리 가족 생활비를 하고도 저축할 수 있을 거라고 계산을 하였다. 공장에서는 물 한 모금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물 먹고 싶은 것, 배고픈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 참는 것은 미치도록 힘들었다. 화장실 한 번 가면 20~30명이 줄을 서 있어 기다려야 했다.

당시에는 한 달에 두 번, 첫째 셋째 일요일이 쉬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일이 바쁘면 토요일 아침에 출근해서 일요일 아침까지 24시간 꼬박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시다들은 월급을 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추석과 설 명절에 설탕 3킬로그램, 혹은 식용류 1.8리터 받은 기억이 있다.

나는 미싱사가 되어서도 열심히 일을 하였다. 한 달 동안 지각이나 결근을 하지 않아서 가끔 사장님이 가게로 내려오라고 해서 500원을 특별히 받기도 했다.

사춘기가 되면서 생리를 하게 되었다. 생리를 하면 생리대를 자주 갈아 줘야 했다. 재단사는 하루에 한두 번 가는 화장실을 자주 가면 생리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은 하지 않고 화장실만 갔다고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현대판 성희롱이다. 나는 도시락 가방에 천연 생리대를 챙겨 갔지만 장시간 일을 하다 보니 늘 부족했고, 그럴 때마다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속으로 삭이면서 일을 했었다.

1960년대는 밀가루, 우유 가루를 외국에서 지원받았다. 그 밀가루 자루는 잠바 주머니 속으로 재활되었다. 당시에는 약국에서 생리대를 팔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내 주머니에는 교통비 10원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2018년 어느 방송에서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이 생리대 구입할 돈이 없어서 운동화 깔창으로 생리대를 대신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날 밀가루 자루로 생리대를 대신했던 과거로 돌아가니, 내 몸에 진동이 오는 느낌을 받으면서 허탈하기도 했고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19701113일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하며 분신자살을 하였고, 분신 이후 청계노조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잘 알지 못했다.

당시에 나는 진선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공장장은 "평화시장 구름다리 밑에 깡패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어 놨으니 그곳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 나 역시 알지 못했다. 훗날 노조를 알게 되면서 나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 오열하는 사람들과 전태일의 운구를 운반하는 모습. 사진_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우리나라는 2020년 현재 GDP 세계 10위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에 허덕이는 청소년이 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 항거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1960년대 열심히 일을 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2020년의 청소년들은 희망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빈부 격차 때문이다.

1998IMF 사태가 터졌을 때 정부는 공적 자금을 기업에 한없이 지원을 했다. 이제 공적 자금을 사람에게 투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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