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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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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1.04.14 ‘시대의 기후’를 읽을 줄 알아야1

<작은책> 20215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그래, 우리 아들 퀴어

강향숙/ 홈리스 야학 글쓰기 교실 자원 교사

 

우리 아이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MTF, 즉 트랜스젠더이다. 쉽게 말해, 하리수를 떠올리면 된다. 아들이 커밍아웃을 한 것은 내가 말기 암 선고를 받고 1년쯤 투병 중이던 때였다.

“엄마, 나 딸이에요. 이제 어쩔 수 없어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순간 멍해지며 깊은 충격에 빠졌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아이가 어릴 적 굉장히 여성적이었던 취향들, 남자답지 않은 행동거지들,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의가사 제대를 했던 모습들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며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유는 알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내가 가진 신앙, 구원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적 관점으로, 성경에서는 분명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는 빨리 이 아이를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에 급해졌다. 목사님 세 분과 아이와 나 이렇게 면담을 했고, 심리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예약했다.

‘어떻게 시한부 암 투병 중인 엄마에게 이럴 수 있나. 불효막심하고 이기적인 놈...’ 계속해서 아이와 충돌했고 새벽에 1시간 넘게 하느님께 기도했다. 제발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이후 아이는 정신이 나간 듯 보였고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 심장이 터져 버릴 듯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매일 아이에게 카톡으로 성경 구절들을 보내고, 때로는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으며 무자비하게 상처를 주고받았다.

이런 시간이 1년 가까이 지났을 무렵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거리의 만찬’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나와 입장이 같은 성소수자 부모들이 진심 어린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공감이 되어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인터넷을 검색했고 ‘성소수자 부모 모임’을 알게 되었다.

목사님께서 그런 모임에 가면 나쁘게 세뇌된다며 만류했지만 난 가야만 했다. 난 절대 세뇌당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모임에 나갔다. 거기에서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 내고 그 아이들과 내 아이를 정죄했다. 다른 부모와 성소수자 당사자의 이야기는 귓등으로 들었다.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에서 우리 아이 같은 MTF의 어머니께서 내게 《동성애와 기독교》라는 책을 주셨다. 나는 《커밍아웃 스토리》 등 몇 권의 책을 샀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신앙과의 갈등이었다. 나는 20여 권이 넘는 동성애와 관련된 기독 서적들을 납득이 될 때까지 읽었다. 또 <바비를 위한 기도>라는, 게이 아들과 엄마의 모습을 그린 영화를 되풀이해서 보았다. 어쩜 바비 엄마는 나의 모습 그대로 복사판이었다. 영화에서 바비는 결국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는데, 그 이후 바비 엄마가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로 바뀌어 간다. 감동적이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지금은 하느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의 사랑은 그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실수가 아닌, 온전한 모습으로 만드셨음을 믿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도 많은 차별과 편견에 고통받고 있고, AIDS로 죽는 수보다 견뎌 내지 못한 사회의 시선과 고통 속에 자살해 사망하는 수가 훨씬 많다.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것을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태어났고 감수하며 살아갈 뿐이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동성애자들이 법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며 ‘동성 결합법’을 천명하셨다. WTO에서는 몇 년 전 동성애는 정신질환이 아니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대단한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며, 그들을 정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고도 그들은 사랑해서 그런단다. 개가 웃을 일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사랑이 아닌 광기만이 느껴질 뿐이다.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에서 답을 찾는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시다. 그분이시라면 온전히 그들을 감싸 안아 줄 것이다.

나는 내 아이를 진심으로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선물 같은 딸을 얻었다. 나는 내 딸을 위해, 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편견에 당당하게 맞설 것이고 투쟁할 것이다. 나는 내 딸을 매우 사랑하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

 

“엄마는 누가 뭐라고 하든 죽을 때까지 네 편이야. 사랑해,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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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4월호

세상 보기

 

‘시대의 기후’를 읽을 줄 알아야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은퇴한 지 십 년이 지났어. 나 스스로 언제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는지 깜짝 놀랄 때가 있어. 이런 말이 있지. 20대에 좌파(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바보인데, 40대에 여전히 좌파(또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어도 바보라는 말. 나이가 들면 그동안 축적한 재산이 있으니까 그만큼 보수적이 된다는 뜻이라고 해. 하지만 난 이 따위 말을 신뢰하지 않아. 나이 들면 보수화된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말이라고 보기 때문이야. 나이 들면 보수화되는 걸 나는 ‘돈 공부’만 하고 ‘세상 공부’를 하지 않는 탓으로 보는 편이야.

요즘 ‘하루 만 보 걷기’를 실행하고 있어. 매일 만 보를 걷는 거야. 스스로 ‘은퇴한 산책자’라고 부르는데, 온건한 사람이 되긴 틀렸다는 걸 최근 트랜스젠더 성소수자들의 죽음을 만나면서 다시금 확인했어. 며칠 사이를 두고 김기홍 씨와 변희수 씨가 세상을 등졌어. 무척 우울했는데, 그게 코로나 블루 때문만이 아니었어.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잖아. 사회적 존재로서 두 사람은 한국 사회를 반영해. 그 일원인 나에게도 그들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해.

세상에는 왼손잡이가 9분의 1정도 있다고 해. 아홉 명 중 한 명이 왼손잡이라는 거야. 한국은 왼손잡이 비율이 더 적을 것 같기도 해. 오른손잡이가 절대다수를 차지하지. 나도 오른손잡이야. 근데 내가 오른손잡이를 선택했나? 물론 아냐. 내가 선택하지 않은 채 남자로 태어났듯이 그냥 오른손잡이가 된 것뿐이지. 높은 담을 넘어갈 때에도 오른발을 먼저 짚는 사람이 있고 왼발을 먼저 짚는 사람이 있어. 평소에 왼발을 먼저 짚는 사람에게 오른발을 먼저 짚으라고 하면 잘 넘어갈 수 있을까? 어려울 거야.

오른손은 ‘옳은 손’에서 온 게 분명해.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도 하는데, 바른손은 ‘바른 손’에서 왔지. 그럼 왼손은 ‘틀린 손’인가? 좌우동형으로 똑같은데 한쪽을 ‘옳다’, ‘바르다’고 말하게 된 근거나 배경은 뭘까? 절대다수가 오른손잡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 “언어가 곧 사유이고 사유가 곧 언어”라면, 오른손 또는 바른손이라는 말에서 다수의 횡포를 읽어 낼 줄 알아야 해. 이 다수의 횡포가 한국어에만 있는 게 아냐. “언어는 곧 사유이고 사유는 곧 언어”라는 언어학의 명제가 한국어에만 적용될 리 없기 때문이지. “right hand(영어로 ‘오른손’)”의 right도 “main droite(프랑스말로 ‘오른손’)”의 droite도 모두 ‘옳다’의 뜻을 갖고 있어. 이건 순전히 가정인데, 어떤 사회에 왼손잡이가 절대다수를 차지한다면, 그 사회의 언어는 우리와 정반대로 왼손잡이를 ‘오른손(옳은 손)잡이’라고 쓰고 오른손잡이를 ‘왼손잡이’라고 쓸 거야.

이처럼 좌우동형으로 똑같은 오른손과 왼손임에도 오른손잡이가 절대다수라는 이유로 ‘옳은 손’이라고 주장해 온 게 인간의 사유였는데, 그런 인간사에서 성소수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었을지 쉽게 가늠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건대, 좌우동형인 왼손잡이/오른손잡이를 그렇게 갈라치기했는데, 성소수자/이성애자는 왼손잡이/오른손잡이의 차이 정도가 아니잖아! 역사상 거의 모든 국가의 가장 중요한 국책이 부국강병인데 여기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성소수자들은 그야말로 배제와 차별,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어. 실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 노예해방이나 여성참정권보다 한두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을 만큼. 성(별)정체성이 사람의 의지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과학의 기여가 필수적이었지. 그리하여 마침내 21세기 초에 네덜란드에서 동성결혼권이 처음 법제화되고(정확히 2001년의 일이야) 다른 유럽 나라들이 뒤를 이어 가면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됐어.

“19세기가 노예해방의 세기였고 20세기가 보통선거권(여성참정권)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성소수자들이 해방되면서 시작되었다.”

파리와 암스테르담 등의 유치학교에는 ‘엄마’가 둘인 동무를 가진 어린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어제 동무를 찾으러 온 엄마와 오늘 찾으러 온 엄마가 다른 거야. 맞아! 레즈비언 커플인 거지. 양육권을 가진 그들은 정자은행을 통해 생물학적 자식도 가질 권리가 있어. 남성 커플일 경우에는 대리모 관련법이 나라마다 다른데 여성 커플보다는 어려운 편이야. 이런 게 한국의 헌법에도 있는 행복추구권이 살아 있는 사회의 모습이야. 그 아이들은 ‘정상 가족’이라는 고루한 개념에서도 해방되겠지.

이런 시기인데 김기홍 씨와 변희수 씨의 죽음을 만난 거야.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의 “나중에!”에서 4년이 지난 오늘까지 반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이고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안철수 씨는 “퀴어 퍼레이드를 안 볼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면서 그의 평소 지론이었던 ‘새 정치’의 실체를 알려 주었어.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국회에서 14년째 표류 중이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미국의 진보적인 여성 대법관은 ‘시대의 기후’라는 말을 인용했어. 내일의 날씨를 알아야 하듯이 시대의 기후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였어. 누구보다 정치인들이 들어야 할 말이야. 아무리 한국의 현실 정치인들이 공부하지 않고 구닥다리로 남아 있어도 시대의 기후는 이미 성소수자들의 해방을 분명히 말하고 있어.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당기기 위한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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