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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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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18 [생태 이야기] 편의를 강요하는 과학 기술의 이면 (2011년 10월호)
2011. 10. 18. 15:32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박병상 / 인천 도시생태 · 환경연구소 소장


  얼마 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암 검진 대상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전단이 편지로 왔다. “아직도 안 받으셨나요?” 묻는 전단은 검진 비용의 90퍼센트를 공단에서 담당하니 조기 진단으로 건강을 잃지 말라는 고마운 친절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친절을 이미 여러 차례 받은 처지에서 마음이 흔쾌하지 않는 건 왜일까. 가부장적이거나 상업적 친절이라는 냄새를 느낀다고 반응하면 좀 지나친 걸까.

  국내 굴지의 종합병원에서 원장으로 은퇴한 어떤 의사가 사석에서 자신은 건강 검진을 여태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친구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까닭을 묻자, “무서워서!”라고 답했다며 그 은퇴 의사의 친구인 선배는 실소했는데, 그 선배는 해마다 사원 개인에게 마치 크나큰 권리라도 선물하는 양, 건강 진단 다녀올 것을 해마다 회사는 권고한다고 덧붙였다. 나이 들은 만큼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거야 당연한데,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무게 잡는 의사들의 과잉 전문성이 불편하다며 ‘모를 권리’가 존중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토로했지만 회사는 알고 싶었을 게다. 미리 정리할 사원이 누구일지를.

  충성스런 고객에게 특별한 배려처럼, 구형 손전화를 스마트폰으로 바꿔 주겠다는 호들갑스런 전화를 극성스레 받는다. 멀쩡한 전화기를 바꾸라니! 통화와 문자를 주고받는데 아무 지장이 없고 배터리 성능도 좋은데 왜 바꾸라는 겐가. 할부금 시한보다 훨씬 빨리 새로운 기능을 더한 제품을 내놓는 세태에서 재고품을 처리하려는 속셈은 아닐까. 헐값의 프린터를 내준 뒤 고가의 잉크나 토너를 파느라 여념 없는 업체의 상혼과 비슷한 건 아닐까. 아무튼, 옛 번호를 고집하는 손전화는 아직 내 손을 떠나지 않았다.

  최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탈퇴하는 이가 늘어난다는 소식이 들린다. 프라이버시 유출에 진저리를 친 경험이 쌓이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언론은 귀띔했다. 진저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그치지 않는다. 호기심을 과시하는 누리꾼들이 공개하지 않은 개인 정보를 ‘신상 털기’라며 인터넷에 흘리자 관음증과 더불어 조회가 폭발하지 않던가. 이런 와중에 손 안의 인터넷인 스마트폰은 사람들의 ‘모를 권리’를 송두리째 빼앗아 갈 소지가 다분하다. 사전 허락 없이 사용자의 행적을 감시하던 손전화기 제조 회사가 고발되었고, 벌금이 부과된 게 엊그제다.

  “건강 이상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전자 피부’가 나온다!”며 독자에게 가슴 벅찰 것을 요구하는 언론 보도가 얼마 전에 있었다. 잘 휘어질 뿐 아니라 견고한, 가로 2센티미터 세로 1센티미터에 두께가 37마이크로미터의 전자 피부를 문신처럼 심장 가까이 붙이면 환자의 심박수나 체온은 물론 근육의 움직임과 뇌파의 변화까지 24시간 감지하며 주치의에 연결한다는 언론 기사는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개발을 시작했다”는 과학자의 소견을 소개했다. 다만 “생체 신호를 전송할 수 있는 거리가 몇 센티미터에 불과해 원거리 전송이 필요한 의료 기기 적용에 한계”가 있으므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덧붙이면서.

  전자 피부의 가능성을 타진한 과학자의 순진한 의도는 기술 개발 속도를 미루어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다. 스마트폰 기술과 범지구위성항법시스템(GPS)을 활용한다면 미약한 생체 신호가 담당 의사의 손전화 모니터에 전달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리라. 그뿐이 아니다. 새 세기가 시작될 즈음, 세계 과학기술의 추이를 분석한 미래학자는 개인의 DNA를 기반으로 만든 칩을 피부에 이식할 경우, 개인의 맞춤 의학이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담당 의사는 컴퓨터로 환자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진단해 적절한 약품을 그때그때 처방할 뿐 아니라 환자가 약을 제대로 먹는지, 먹지 않고 독한 술을 어디에서 누구와 얼마만큼 마시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해 보호자에게 일러바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전자 피부에 개개인의 DNA칩을 넣어 환자, 아니, 모든 국민의 피부에 태어나자마자 이식한다면 어떠한 장밋빛 미래가 약속될까. 집 잃은 개를 얼른 찾게 할 뿐 아니라 함부로 버린 개의 임자를 꼼짝없이 잡아내고, 물린 이가 예방 주사 접종 여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전자칩은 개에 한정하는 게 아니다. 안전할 뿐 아니라 효율이 훨씬 빼어나고 비싼 DNA 전자 피부가 전하는 은밀한 정보를 병원은 물론이고 행정망의 중앙컴퓨터와 연결한다면 생활은 무시무시하게 편해질 게 틀림없다. 말썽 많은 주민등록증이나 인감증명이 지갑에서 사라지는 건 물론이고, 출입국 수속을 위해, 내 나라든 남의 나라든, 공항에서 길게 기다릴 이유도 당연히 없어질 것이다.

  1990년대 말, 인감증명과 건강보험카드의 기능을 포함하는 전자주민등록증을 편의를 앞세우며 추진하려는 정부에 시민 단체는 맞서야 했다. 지문과 주민등록번호로 시민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개인 정보들이 은행이나 보험 회사, 그리고 기업에 흘러들어갈 경우 빚어질 감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는 전자주민등록증 계획을 철회했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살아나려 한다. 전자주민등록증이 없어도 일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 시민과 달리 정부는 아쉬움이 큰 모양인데, 그 실체가 도대체 뭘까. 전국 곳곳에서 눈을 번뜩이는 폐쇄회로 카메라보다 효율적인 그 무엇은 감시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까.

  넓은 아스팔트가 한산해진 야심한 밤,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횡단보도로 찾아갈 때 저기 경찰차가 보였다. 그래서 안심하고 횡단보도 도착 전에 길을 건넜더니, 경찰 순찰차는 요란한 소리를 남발하며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민중의 지팡이를 믿어 안심하고 건넜다는 핑계를 귓전에도 듣지 않으며 도로교통법 운운하던 경찰은 전과가 없으니 봐 준다며, 더 바쁜 일이 있었는지 가던 길로 휑하니 사라져 갔다. 주민등록번호만 입력하면, 남이 보든 말든, 순찰차의 작은 단말기로 모든 범죄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현실에서 더욱 가깝게 다가온 전자주민등록증이 걱정인데, 최첨단을 찬미하는 과학 기술은 전자 피부를 넘어설 세상을 장밋빛으로 그린다.

  전자 피부의 쌍방향 정보는 주치의와 환자의 스마트폰 사이만 맴돌까. 그런 정보는 고객의 수가를 조절하고 싶은 보험 회사에서 반색하고 이윽고 가입을 거부할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기업은 어떤 이의 입사를 원하지 않겠지만 그 정도는 약과에 불과할지 모른다. 전자 신호의 감시와 통제는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다. 편의에 사로잡힌 개인은 중앙이 은밀히 수집해 분류할 뿐 아니라 가공하는 정보에 굴복할 뿐, 중앙의 의도를 좀처럼 파악하지 못한다. 철두철미한 감시 사회에 내팽겨진 개인은 나이 들어 몸이 쇠약해지면 저절로 병원 고객으로 등록되면서 나아가 ‘디지털 치매’에 들어간다. 현관 자물쇠의 번호를 기억 못하는 차원이 아니다. 전자 신호 체계에 소외된 이는 ‘디지털 학대’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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