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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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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5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그래, 우리 아들 퀴어

강향숙/ 홈리스 야학 글쓰기 교실 자원 교사

 

우리 아이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MTF, 즉 트랜스젠더이다. 쉽게 말해, 하리수를 떠올리면 된다. 아들이 커밍아웃을 한 것은 내가 말기 암 선고를 받고 1년쯤 투병 중이던 때였다.

“엄마, 나 딸이에요. 이제 어쩔 수 없어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순간 멍해지며 깊은 충격에 빠졌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아이가 어릴 적 굉장히 여성적이었던 취향들, 남자답지 않은 행동거지들,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의가사 제대를 했던 모습들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며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유는 알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내가 가진 신앙, 구원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적 관점으로, 성경에서는 분명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는 빨리 이 아이를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에 급해졌다. 목사님 세 분과 아이와 나 이렇게 면담을 했고, 심리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예약했다.

‘어떻게 시한부 암 투병 중인 엄마에게 이럴 수 있나. 불효막심하고 이기적인 놈...’ 계속해서 아이와 충돌했고 새벽에 1시간 넘게 하느님께 기도했다. 제발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이후 아이는 정신이 나간 듯 보였고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 심장이 터져 버릴 듯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매일 아이에게 카톡으로 성경 구절들을 보내고, 때로는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으며 무자비하게 상처를 주고받았다.

이런 시간이 1년 가까이 지났을 무렵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거리의 만찬’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나와 입장이 같은 성소수자 부모들이 진심 어린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공감이 되어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인터넷을 검색했고 ‘성소수자 부모 모임’을 알게 되었다.

목사님께서 그런 모임에 가면 나쁘게 세뇌된다며 만류했지만 난 가야만 했다. 난 절대 세뇌당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모임에 나갔다. 거기에서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 내고 그 아이들과 내 아이를 정죄했다. 다른 부모와 성소수자 당사자의 이야기는 귓등으로 들었다.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에서 우리 아이 같은 MTF의 어머니께서 내게 《동성애와 기독교》라는 책을 주셨다. 나는 《커밍아웃 스토리》 등 몇 권의 책을 샀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신앙과의 갈등이었다. 나는 20여 권이 넘는 동성애와 관련된 기독 서적들을 납득이 될 때까지 읽었다. 또 <바비를 위한 기도>라는, 게이 아들과 엄마의 모습을 그린 영화를 되풀이해서 보았다. 어쩜 바비 엄마는 나의 모습 그대로 복사판이었다. 영화에서 바비는 결국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는데, 그 이후 바비 엄마가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로 바뀌어 간다. 감동적이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지금은 하느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의 사랑은 그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실수가 아닌, 온전한 모습으로 만드셨음을 믿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도 많은 차별과 편견에 고통받고 있고, AIDS로 죽는 수보다 견뎌 내지 못한 사회의 시선과 고통 속에 자살해 사망하는 수가 훨씬 많다.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것을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태어났고 감수하며 살아갈 뿐이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동성애자들이 법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며 ‘동성 결합법’을 천명하셨다. WTO에서는 몇 년 전 동성애는 정신질환이 아니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대단한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며, 그들을 정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고도 그들은 사랑해서 그런단다. 개가 웃을 일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사랑이 아닌 광기만이 느껴질 뿐이다.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에서 답을 찾는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시다. 그분이시라면 온전히 그들을 감싸 안아 줄 것이다.

나는 내 아이를 진심으로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선물 같은 딸을 얻었다. 나는 내 딸을 위해, 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편견에 당당하게 맞설 것이고 투쟁할 것이다. 나는 내 딸을 매우 사랑하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

 

“엄마는 누가 뭐라고 하든 죽을 때까지 네 편이야. 사랑해,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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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의부증 청산 수업료

임전/ 숲해설가

 

 

몇 년 전, 부부 동반 모임에서 남편 친구 부인이 지인의 권유로 사주를 보고 온 얘기를 했다. 상담을 해 주시는 분이 친구 부인에게 어떻게 그렇게 참고 살았냐며 눈물을 흘리더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음이 찡했다.

공부를 하기 전엔 사주 보는 사람들을 스스로 자기 일을 결정하지 못하는 비주체적인 인간이라 생각해 무시했다. 그리고 사주를 미신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사주는 음양오행, 우주와 천문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 영성수련 단체의 권장 도서인 얼굴경영이라는 책을 보았다. 모 디지털대에서 얼굴경영 공부를 했다. 얼굴경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잘 모른다. 관상이라 말하면 얼른 알아듣는다. 사는 데 따라 얼굴이 달라지니 마음 경영을 잘해서 얼굴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얼굴경영이라고 말한다. 교수는 3초 안에 사람의 얼굴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주와 접목해서 공부하면 사람 얼굴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동네 평생학습원에서 사주 공부를 시작했는데 처음엔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어려운 걸 배우겠다고 했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쉽게 그만두지도 못했다.

처음엔 뭔 소린지 모르겠더니 이론을 외우고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고 사주에 대한 재미를 알아 갔다. 사주에 대해 알아 가니 현장에 가서 내 사주를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 부인이 말한 곳을 가 보기로 했다. 막상 가 보니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는 곳은 아니었다. 한복 입은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나의 사주는 일주인 병화가 약해서 병화를 생해 주는 나무 목이 들어간 이름이 좋다고 해서 이름도 바꾸고 호도 만들었다.

사주 공부를 계속하던 작년 어느 날, 밤에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사무실도 아니고 현장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어디라고 말은 안 하고 나중에 얘기해 준다고만 했다. 일단 전화를 끊긴 했지만 찜찜하고 의심스러웠다. 나중에 얘기해 준다고 했지만 물어보자니 그렇고 속만 끓였다.

얼마 후 군대 간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모처럼의 가족 나들이인데 남편은 밥만 먹고 금방 일어나서 가야 한다고 했다. 개 눈엔 똥만 보인다고, 의심의 눈초리로 보니 그것도 촉수에 걸렸다.

다음 날 상도동의 철학관으로 달려갔다. 처음엔 여자가 없다고 하더니, 잘 좀 보라는 나의 채근에 종이로 만든 동그란 통에 자그마한 주사위 같은 것을 넣고 흔들었다. 통의 머리 부분을 쥔 손목에 스냅을 주어 꺾더니 주사위 하나를 꺼내서 보기를 몇 번 하였다. 밖에서 여자가 자꾸 불러내는구먼. 여자를 떼려면 부적을 써야 해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며 부적을 써 달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부적을 쓰고 있는데 손님이 왔다. 아들과 어머니로 보였다. 오래된 단골인 듯 근황을 주고받았다. 아들이 아기를 낳아 이름을 지으러 왔다고 했다. 대기실이 따로 있는 데가 아니어서 그분들은 내가 상담을 하는 옆에서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부적을 쓰면서 그들과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속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부적은 정성을 다해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고객과 이바구를 하면서 쓰고 있다니?’ 더 가관인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아들을 낳은 젊은 사람을 건너다보며 바람을 피우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책상 밑으로 다리를 뻗어 할아버지의 다리를 툭 쳤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두 개의 부적 중 하나는 집에 있는 베개에 넣고 다른 하나는 사무실에 있는 베개에 넣으라고 했다. 일단 집에 있는 베개에 두 개를 넣었다. 문득, 내가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확인한 것도 아닌데 부적을 써 왔다는 게 코미디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여자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남편은 성의 자기 결정권이 있고 본인의 인생이 있는 것인데, 부인이라고 해서 남편의 인생에 끼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사람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스스로 자존심이 상해 의부증 환자를 청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의 의부증의 역사는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다. 과부인 내가 총각인 남편과 결혼하여 스스로가 꿀린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나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을 달고 살았다. 결혼 전에 안양에서 야학을 같이하던 여자랑 잠깐 사귀었다는데 결혼 초 남편이 늦거나 하면 그 여자랑 다시 만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그 여자네 집에 한 번 찾아간 적도 있었다. 이렇다 할 물증이나 뭣도 없으면서 남편을 의심하는 마음에 찾아간 것이다. 그 여자는 내가 왜 찾아왔을까 이상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쇠고기뭇국도 끓여 주고 최대한 예를 갖춰 잘 대해 주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부적을 쓸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 돈이 모자랐다. 철학관에서 일부를 내고 나머지는 계좌 이체로 보냈지만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를 앉혀 놓고, 다른 손님을 바라보며 바람을 피면 안 된다고 떠들면 무슨 상담이 오고 갔는지 나팔을 부는 꼴이 아닌가? 상담은 내담자의 비밀을 보장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할아버지 책상을 둘러엎고 올 것을. 철학관에서 일부 낸 것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는 나 몰라라 할 것을. 후회하는 마음에 약이 오를수록 의부증 환자 청산 수업료로 쓴 것치곤 적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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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엄마가 소곡주를 마시지 않은 까닭

유내영/ 충남 청소년노동인권센터 지킴이

 

 

휴대폰을 줘 봐라.”

왜요?”

그것 좀 떼 버리게.”

휴우.”

당진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설날, 추석을 나의 친정인 성남에서 보낸다. 추석 전날 저녁상을 마주하고 부모님, 남동생 부부, 조카와 모여 앉았다. 얼마 전 단톡방에서 고종사촌 언니들과 주고받았던 문자를 확인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화기애애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내 옆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내가 들고 있던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들고 있던 내 휴대폰 뒷면이 나와 마주 앉아 있던 아빠의 눈에 자꾸만 거슬린 모양이었다.

휴대폰 뒤쪽엔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란리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 세월호 스티커. 사진_노란리본캠페인(네이버카페)


아니, 이건 왜 떼려고요? 아빠 휴대폰이 아니라 제 거예요.”

그거 보는 게 정말 지겹고 싫다. 좀 떼어 버려라.”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붙인 건데, 아빠가 떼라 마라 왜 참견인데요?”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붙이고 있냐?”

아직 사고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고, 시작도 안 됐는데 뭐가 끝나요?”

세월호 타고 놀러 가다가 난 사고인데 뭘 그렇게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옆에 있던 남동생이 나선다.

놀러 가다가 난 사고는 그냥 둬도 돼요? 그리고 세월호에 탄 학생들이 학교에서 하는 일정에 함께한 거예요. 학생들도 있었지만 제주도로 살러 간 가족도 있었다고요. 화물기사 아저씨도 생업 때문에 타고 있었고요. 바다에서 사고 나면 국가가 나서서 구해야 되는데 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말을 거드니 약간 주춤한다. 아빠는 단호함이 약간 수그러진 소리로 고집스럽게, 그래도 보기 싫으니 떼란다. “보상도 많이 받았구만.” 하고 말끝을 흐리면서.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직접 만난 이야기, 대통령이 탄핵되자 인양하기 어렵다던 세월호가 올라온 것, 세월호에 갇혀 있던 학생들을 뭍으로 데려온 잠수사의 이야기, 해경이 사람들을 구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했던 거짓말, 배의 진행 방향을 거짓으로 발표했던 국가, 없어진 닻, 세월호에서 나온 아이들의 손톱 이야기. 눈물을 참으면서 엄마와 남동생과 번갈아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광주민주항쟁 이야기를 한다. 당시 광주에서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와 다를 게 없다며, 세월호를 이용하는 세력이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하이고이 널뛰기는 뭐지? 연결시킬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지?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어요?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군사독재 철폐를 위해 시위를 한 건데, 전두환이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총으로 쏴 죽이고 때려죽이고 사진 혹시 봤어요? 직접 광주에 가 보기나 했어요?”

그들이 폭도들이었지. 폭도들 진압하려고 군대가 투입된 건데 무슨 영웅이라고 돈을 주고.”

광주에 가서 직접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 들었느냐, 왜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확신 하냐, 그런 거짓말만 듣지 말고 다른 사람 말도 들어 봐라, 휴대폰으로 검색이라도 해 봐라.

그래도 자존심 강한 아빠는 지고 싶지 않은 눈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우리 말에 귀 기울일 생각이 없다. 왜 가족의 말보다 남의 말을 더 믿냐고 해도 꿈적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뭐라 말도 못하고 난감해하면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이 집안 가장의 사위와 며느리, 손주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3의 대결이 수습할 수 없는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빠는 내가 배 타고 놀러 가다 사고 나서 죽으면 그냥 수장시키세요. 놀러 가다 죽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죽었는데, 왜 사고가 났는지 원인을 알 필요가 뭐 있대요. 그리고 국가 돈 축내지 않게 말도 꺼내지 말고요. 아빠는 그렇게 하세요.”

쓸데없는.” 아빠는 말을 잊지 못한다.

가족 모임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야기가 정치로 흐른다. 정치 성향에 있어서 아빠와 나는 완전 반대편에 서 있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싸움으로 번진다.

몇 년 전의 나는 70대 중반의 아빠 생각을 바꾸기 위해 설득하려고 엄청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한고집 하는 내 성질이 꼭 아빠와 내가 닮았다는 것을 남편과 두 딸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남편과 딸들은 나와 아빠의 갈등 상황을 보고 있기가 힘들다면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 나도 아빠와의 끝나지 않는 싸움에 지치기도 했다. 그 뒤로 아빠하고는 되도록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정치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입을 닫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아빠도 나의 태도 변화를 눈치챘는지 언제부터인가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엄마와의 통화로 아빠는 여전히 꼴통보수임을 확인 하고 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광화문으로 집회를 가면 성남에서 하루 자고 내려가곤 했다.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면서 별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꼴통보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가슴 아파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거짓뉴스에 노출된 아빠에게 사실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좀 오래 이야기했다. 특히 정치 이야기를 할 때는 별말 없었던 남동생이 거들어 주어서 고마웠다.

엄마는 판문점 남북회담 때 마셨다는 면천 두견주가 어떤 맛인지 궁금해하셨다. 면천과 가까운 당진에 살고 있는 나는 추석을 맞이해서 두견주를 사 갔다. 그리고 소곡주를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한산에서 직배송된 소곡주도 가져갔다. 진달래꽃으로 만든 면천 두견주와 찹쌀과 누룩으로 만든 한산 소곡주를 맛보고, 평도 하고, 각자의 취향에 맞는 술을 선택해서 마셨다. 아빠는 소곡주가 더 좋다면서 두견주를 한사코 마다했다. 두견주는 맛도 안 봤으면서!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다음 날 시댁에서 올라온 동생네와 저녁을 먹으면서 두견주와 소곡주를 꺼냈다. 전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한잔 받으세요하면서 아빠에게 두견주를 권하니 잔을 받는다. 아무리 문재인 정권을 싫어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아빠는 두견주의 맛이 궁금했을 것이다. 모른 척하긴 했지만 술을 받는 그 모습이 밉살맞으면서 안쓰럽기도 했다. 아빠의 눈과 귀는 도대체 어디로만 향하고 열려 있는지. 안타까웠다.

엄마는 끝까지 소곡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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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

   최선희/ 부천실업고등학교 교사



  작년, 재작년 1학년 담임을 하면서 다음번에는 꼭 취업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아이를 바라보는 담임과 취업 교사의 차이를 느껴 보고 싶었고 내 스스로 좋은 조건의 회사를 발굴하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도 아이들을 취업시킨 적은 있으나 우리 반에 한정된 주먹구구식의 취업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올해는 1학년 전체를 취업시켜야하는, 말 그대로 취업 담당 교사였기 때문에 신입생이 들어오기 전인 2월 달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며 회사를 확보하려고 동분서주하였다.

마음이 급한 가운데에 생활정보신문, 기존에 재학생이 취업되어 있는 회사, 노동부 워크넷을 주로 이용하여 취업 회사를 발굴하였다. 취업 경험이 많지 않아, 일단 전화를 하여 우리 학교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들을 직원으로 써 준다고 하면 ‘아이고, 주여’ 하며 아이들을 취업시켰다. 학기 초라 취업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을 때여서 아이들을 써 주기만 한다면 너무나 고마운 그런 때였다.

  그러던 중에 생활정보신문을 보고 한 회사에 전화를 하니 흔쾌하게  여덟 명 정도를 고용하겠다고 하였다. “아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 회사를 확장하면서 한 라인을 우리 학교 학생으로만 돌리겠다는 거다. 그런데 아이들이 출근하고 이틀이 지나서 여자 아이 두 명을 해고했다. “한 명은 왼손잡이고 한 명은 손이 너무 느리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남학생 세 명과 여학생 한 명을 해고했다. “각자 제 몫을 하지 못한다.”

  마치 여덟 명을 데려다 놓고 경쟁하듯이 일을 시켜 놓고 그중에서 제일 잘 하는 놈, 돈이 되는 놈, 두 명만 남겨 놓은 듯한 생각이 들었다. 행위가 하도 괘씸해서 따졌다.

  “우리 아이들이 일한 경험이 없으니 처음부터 잘하리라는 기대는 안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일단 지각, 결근만 안 하게 지도해 주면 나머지는 자식 키우듯이 여유 있게 바라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설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한 달은 지켜보고 월급은 주고 자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니 그 회사에서는 “회사가 뭐냐, 돈을 바라보고 하는 데가 아니냐? 그날 생산량을 못 맞춰 주면 같이 갈 수가 없다. 이것저것 떠나서 돈이 되지 않는 애를 어떻게 데리고 있겠느냐?”는 것이다.

  워메, 열 받는 거… …. “아니, 그래서 면접 보기 전에 우리 아이들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지각, 결근하지 않고 성실하게 출퇴근 잘하고 어른들 말씀 잘 듣고 하면 미우나 고우나 아이들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적어도 한 달은 일해 보고 결정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했지만, 이미 상대는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굳은 표정이었다. 이어서 마지막 남은 에이스 두 명은 근근이 잘 버티더니 한 달 만에 그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로 이틀 만에 해고된 친구부터 한 달 만에 그만둔 친구들의 급여는 회사 측의 말도 안 되는 이유와 억지, 그리고 횡포로 그만둔 지 두 달이 다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다. 학기 초에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너무 순진하게 일 처리를 했나? 취업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너무 많으니 주면 주는 대로, 이게 쓴 건지 단 건지도 모르고 넙죽넙죽 받아먹지 않았나?’

  그래서 이제는 좀 냉철해지기로 하였다. 아이들을 회사에 데려가기 전에 먼저 회사를 탐방하는데, 이제는 좀 거리를 두고 생각하려고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라고 하면 좀 거창하겠지만 어쨌든 아이들을 고용하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일하는 아이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길고 느긋하게 봐 주기를 말씀드린다. 갈 때마다 “자식 하나 더 키운다고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린다.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자식이 내 마음대로만 되지 않고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한다’는 걸 알 테니까… ….

  요즘은 영화 제목 중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가 생각난다. 나는 취업부 일을 한 지 얼마 안 되고 1학년 아이들도 처음 일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서로 많이 얼었다. 일자리 찾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어떤 일에 관하여 깊고 넓게 보지 못한 면이 있을 것이고 아이들은 일을 해야 생활이 유지되는데도 정신 못 차리고 지각, 결근을 하여 어렵게 구한 회사를 하루 만에 잘린 놈, 월급 받고 바로 튀는 놈, 아예 우리 학교와 회사와의 연을 끊게 만든 놈들이 있고… …. 많은 것이 우리를 얼게 만들었다.

  그래서! 1학기 때 회사에서 두 번 이상 잘린 아그들에게 고함. 이제 우리 서로를 죽이지 말고 생기발랄하게 살아 보자. 한 학기 동안에 선생님 가슴에 못 박을 건 다 하지 않았니? 우리 2학기 때는 멋지게 부활하는 거야. 2학기 때도 1학기 때처럼 하루 만에, 일주일 만에 잘리고 온다면 선생님은 그냥 콱! 아우~. 생각만 해도 혈압 오른다. 그러니 우리 서로 웃으며 재미있게 살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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