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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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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29 결혼 30주년, 참자 참자 참자!

<작은책> 2019년 1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부부 30년 맞짱일기

 

결혼 30주년, 참자 참자 참자!


최해옥과 이동수/ 결혼 30년차 부부

 

 

남편 동수 이야기

결혼기념일이다. 30주년. 아내와 함께 산 지 30년이다. 1989103. 하늘이 열리는 날을 골랐다. 전국민이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 것이다. 물론 그때는 요즘같이 태극기를 혐오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결혼식 장소는 인천 답동성당 회관. 아내가 다니던 민중교회의 목사님을 주례로 모셨다. 구교와 신교의 조화로운 화합이랄까? 성당의 풍물패 노랏바치 후배들은 회관 입구에서 결혼식 내내 꽹과리와 장구와 북을 쳐대며 길놀이를 하고 흥을 돋워 줬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마운 일이다. 그날 소문에 의하면 인천의 거의 모든 운동권이 우리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고 한다. 더불어 인천의 정보과 형사들이 혹시나 결혼 축하를 하러 온 수배자들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모두 참석을 했다고 한다. 독재정권의 하수인들과 저항하는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한마음으로 모여 결혼식을 축하해 준 모양새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결혼식 입장은 신부와 신랑이 함께 들어갔다. 또한 성혼 선언문도 우리가 작성하여 열심히 사랑하며 살겠다고 읽어 내려갔다. 청첩장에는 내가 직접 그림도 그려 넣어 초대와 감사의 뜻을 표했다. 결혼식 피로연은 근처의 식당에서 했는데 밤을 새며 놀자는 선후배,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고 청바지로 갈아입고 비행기를 타러 갔다. 돌이켜보면 비행기 예약을 취소하고 밤새 놀았어야 했다. 선후배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설악산 인근의 호텔을 숙소로 잡고 설악산 주변을 걷다가 계곡 아래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들과 놀러 온 듯한 사람들이 고기를 굽다가 와서 같이 먹자고 해서 같이 먹었다. 이런 추억들이 좋다. 조금 걷다 보니 당시 유명했던 설악산 반달곰의 동상이 있다. 그 앞에는 단체로 온 30여 쌍의 신혼부부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지만 당시에도 웃겼다. 그러나 남는 것은 사진뿐이니 그녀에게도 그곳에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 거절당했다. 그녀는 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애교를 떨며 간신히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들어간 숙소. 호텔인데 10월이라고 난방을 안 틀어 줬다. 첫날밤을 추위에 떨며 지내야 하다니! 사랑의 불씨로도 추위를 이겨 낼 수 없었다. 이불을 더 가져다 달라고 해서 동사는 면했다.

새로 얻은 집은 장모님의 지인의 지인이 내놓은 단독주택 단칸방이었다. 허니문 베이비. 직장을 좀 더 다니려던 아내가 임신을 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본가로 들어가 부모님께 신세를 지고 살 수 있었다.(?)

30년 전의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때는 참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30주년을 기념하여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돈 걱정을 하는 아내는 해외여행은 무슨 놈의 해외여행이냐며 춘천을 가자고 했다. 뜬금없이 춘천이라니? 그래,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자고 마음먹었다. 30주년인데!


아뿔싸! 다음 날 103일 눈을 떠 보니 3시다. 오후 3. 지금이라도 춘천에 가면 되지 뭐 하고 그녀에게 말을 했더니 너무 늦었다고 한다. 평소 좋아하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자고 한다. 이왕이면 뭔가 평소와 다르게 하고 싶어 좀 더 고급진 중국집을 찾아갔다. 가격표를 보던 그녀가 그냥 나가자고 했다. 자리 핑계를 댔지만 너무 비싸다고 생각한 것이 뻔하다. 결국 평소에 가던 중국집에 갔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그 집 짜장면이 맛이 없다며 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차이가 없는 듯한데. 어쨌건 그녀와 손을 잡고 집까지 걸어왔다.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 이렇게 30주년이 지나가는 것도 괜찮지 아니한가? 하하하~. (혹시 나는 아직도 철이 덜 든 건가?)

 

아내 해옥 이야기

몇 년 전부터 남편은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해외여행을 가자고 졸랐다. 결혼하고 나서 여행을 간 적이 거의 없으니 이참에 가까운 대만이나 일본이라도 갔다 오자는 것이었다집 나가면 고생이고 다 돈이야. 무슨 해외여행까지. 국내도 가 본 데가 별로 없구만.” 말은 이렇게 했지만 해외여행을 가 본 적이 없는 나는 솔깃했다. 십여 년 전에 중국에 가 보긴 했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도서전에 가서 책만 보다 왔으니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업무가 아닌 여행으로, 물가가 싸고 음식이 맛있다는 태국이나 아오자이를 입은 여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베트남에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속으로 살짝 기대를 했다.

올해 103. 결혼한 지 삼십 년이 되었다. 해외여행은 진작에 포기했고 가까운 춘천이라도 갈까 싶었다. 봄의 시내라는 뜻의 춘천이라는 지명이 마음에 들었고 전철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말로만 듣던 공지천을 천천히 걷다가 오면 좋을 듯했다. 피차 평소에는 기념일 같은 거 안 챙겨도 결혼 삼십 년 정도 되면 작은 이벤트를 하는 것도 좋겠지.

드디어 기념일 당일. 남편은 오후 3시쯤 내게 전화를 했다. 작업실에서 자다가 지금 일어났다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늦긴 했는데 지금이라도 춘천에 갈까?” 좀 늦은 게 아니라 아주, 엄청, 많이 늦었다. 간단하게라도 씻고 출발하면 춘천에는 6시 넘어서 도착할 거 같은데. 금방 어두워질 그 시간에 낯선 동네에서 뭘 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안 될 거 같다. 그럼 아쉬운 대로 영화라도 볼까? 부랴부랴 가까운 극장의 상영 시간표를 찾아봤다.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 그럼 서울에는? 서울의 극장도 원하는 영화는 시간이 안 맞는다. 기분이 가라앉는다. 12시를 넘어갈 무렵부터 이게 뭐지 싶었는데 3시 넘어서 이런 통화를 하고 있자니 심사가 편치 않다. 해외여행 가자더니 춘천도 못 가냐, 결혼기념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 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 화를 낼까 말까. 잠깐, 생각해 본다. 만약 내가 화를 내면? 남편은 기분이 나빠지고 더 이상 미안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일이 많아서 그런 걸 어쩌란 말이냐며 도리어 내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면 내 기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질 게다. 결국 두 사람 다 마음만 상하고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성적으로는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어찌 되든 간에 화났다는 표시를 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어쩔까? 아니 아니, 안 될 말이다. 정신 차리자. 지금 짜증을 부리고 나면 수습이 어렵다. 이미 상황이 안 좋지만 더 꼬이게 하지는 말자. 갈등을 끝내고 태연한 척하면서 대안을 제시한다. 지금은 간단하게 먹고 저녁때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이나 먹읍시다.

춘천의 공지천을 걷는 대신 중국집까지 삼십 분 정도 걸어갔다. 결혼기념일이니까 다정하게 손을 잡고. 오늘따라 중국집의 실내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 식초와 춘장과 기름쩐내, 상한 음식 등등이 섞인 듯한 냄새가 조금 역하다. 그냥 나갈까 말까. 달리 아는 곳도 없고 배도 고프다. 자리에 앉아서 짜장면과 고기탕면을 주문했다. 계속 미안해하던 남편이 탕수육도 먹자고 한다. 이 집에서 뭘 더 주문하고 싶지 않아 말렸지만 탕수육으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수보다 조금 늦게 나온 탕수육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오래된 기름으로 튀겨 낸 거 같다. 주문하지 말라니까 굳이 왜 했느냐고 한마디 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하다. 할까 말까? 이미 나온 음식인데 안 좋은 말을 보태서 뭐 어쩌려구. 이가 부실한 남편은 탕수육을 먹다가 고기를 잘못 씹어서 때운 앞니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결국 치과에 갈 일까지 생겼다. 그럴 수도 있지. 병원 갈 일이 생기면, 가면 된다. 가볍게 가볍게. 오늘은 결혼 30주년 기념일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러 갔다. 식당 근처에 맛있는 커피숍이 있었는데 찾아갔더니 없어졌다. 업종은 그대로인데 상호가 바뀌었다. 그냥 집에 가자. 해외여행을 꿈꾸었던 결혼 30주년 기념일 이벤트는 이렇게 동네 중국집으로 끝났다.

나이를 먹으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남편도 맘대로 안 되고, 중국집도, 커피숍도 마음대로 안 된다.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나 자신뿐.

여보~, 당신이 오후 3시에 일어나서 춘천도 못 간 거 그냥 무사히 넘어간 줄 알면 엄청난 오해다. 쭈욱 지켜볼 거야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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