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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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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부모한테'에 해당되는 글 1

  1. 2019.10.29 문제는 부모한테 있다

<작은책> 201911월호

살아가는이야기

교장 일기

 

문제는 부모한테 있다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 교장, 열일곱, 내 길을 간다저자

 

 

아이는 날마다 커. 몸만 아니라 마음도 크지. 큰다는 건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변한다는 거고 달라진다는 거라. 몸무게, 키는 말할 것도 없고 말투나 눈빛도 달라져.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쌓이고 쌓여 젖먹이가 초1이 되고 초6이 되고 중2가 돼. 아이는 이 엄청난 변화를 겪으면서도 본능에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지.

문제는 부모야. 특히 부모 눈이 문제라니까. 부모 눈에는 날마다 일어나는 티끌보다도 작은 변화가 잘 안 들어올 수 있어. 심각한 건 티끌이 쌓이고 쌓여 들보가 돼도 안 보이고 누가 말해 줘도 믿지를 않는다는 거지. 칠십 먹은 자식도 어린애로 보인다는 말, 이거 우스갯소리로 여기고 넘어갈 게 아니야. 부모 눈에 콩깍지가 씌어 자식의 변화를 읽어 내지 못한다는 뜻이거든. 학부모 상담할 때마다 적지 않은 부모에게서 듣는 말이 있어. 문제행동만이 아니라 부러워할 만한 모습을 이야기할 때도 이런 말 자주 들어.

우리 애한테 그런 모습이?” “친구를 잘못 사귀어 그래요.” “작년엔 안 그랬는데, 올해 갑자기 왜 그러지?”

부모가 아이의 변화를 읽어 내지 못하는 까닭 몇 가지만 살피자고. 부모가 아이의 특정한 모습에 집착하기 때문이야. 예쁘고 귀여운 모습일 수도, 몸서리칠 정도로 싫은 모습일 수도 있어. 그런 모습에 집착하면 변화를 민감하게 읽어 내질 못해. 또 부모의 신념이나 가치기준이 너무 강해도 그래. 부모가 살아온 사회, 아이가 태어난 사회가 갖고 있는 지배적 가치와 행동기준이 부모의 눈을 가리는 콩깍지 역할을 하지. 좋은 대학 가야 사람구실 제대로 한다는 생각도 그 가운데 하나야.

열린 마음이란 아이에게 일어나는 변화, 아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있는 그대로 읽으려 노력하는 마음을 뜻해. 나는 있는 그대로 읽는다고? 아니야.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연인 사이에 콩깍지가 씌어 봐. 못 말리거든. 하물며 부모와 자식 사이는 그 콩깍지가 한 겹이 아니고 수십 겹 덕지덕지 붙어 있어. 자식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걸 호락호락하게 보거나 나는 안 그래!’ 하고 큰소리치는 사람이야말로 위험해. 난 교직생활하면서 이런 부모를 만나면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몸으로 깨달았지.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예로 들어 부모가 자식 키우며 열린 마음으로 지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해 볼게.

4학년 남학생 이야기야. 이 녀석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내다 어느 순간 화가 치밀면 상대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려. 얼굴이든 배든 가리지 않아. 분노에 겨워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손은 부들부들 떨어. 그러니 아이들이 같이 어울리려 하지 않을 수밖에. 그럴수록 심술과 거친 행동은 늘어나고 혼자 빙빙 겉돌고. 그런데 부모님은 3월부터 상담하자고 해도 안 오셔. 학교 여는 날 오셨기에 상담하려 했더니 동생 교실 들러 오신다 하고는 안 오더군. 전화 통화는 몇 번 했지만 수박 겉핥기라 별 효과 없고. 별 수 있나. 담임 혼자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수밖에.

그러다 시월 하순 무렵 어머님을 우연히 학교에서 만났을 때 거의 억지로 교실에서 마주 앉았지. 오늘은 담임으로서 아드님의 지금 상황을 솔직히 있는 그대로 다 말씀드리겠다며, 그동안 있던 굵직한 사례만 이야기했지. 아드님이 지금 이렇게 힘든 상황이다. 아드님에게 유산 물려주려 준비하고 계시냐, 그깟 유산 물려주려 하지 말고 아드님 가슴에 있는 불덩어리, 저 감당 못할 분노라는 불덩어리를 들어내 주셔라. 난 이런 모습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내 나름 짐작은 하지만 부모님이 저에게 솔직히 말씀해 주지 않으니 어설픈 짐작만 갖고 한 해를 살아왔다. 안타깝지만 담임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말씀드렸고 공은 부모님에게 넘어갔다. 그나마 담임으로서 의무를 조금 한 거로 위안 삼겠다. 그랬더니 어쩌면 좋겠냐고 하시더군. 그래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분간만 도움 받으면 아드님은 의지가 굳고 지혜롭기 때문에 변화가 있을 거다.

그러고 퇴근하는데 힘들더라고. 가능한 부모님 처지 공감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했지만 공연히 부모 잠 못 이루게 한 거라는 생각에 죄책감까지 들더라고. 그런데 그날 밤 1030분 무렵 문자가 온 거야. 짧게.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다시 상담하고 싶습니다. 언제 할까요?”

미룰 거 있어? 다음 날 아침 1교시 전에 상담했어. 어제 담임과 이야기 끝내자마자 남편 직장으로 찾아가 두 분이 밤늦도록 의논한 거야. 아들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전문가 도움을 받겠다며 상담할 곳을 소개해 달래.


어찌 되었냐고? 시간이 흘러 한 해 뒤 6학년 담임 할 때 그 녀석이 내 옆 반이 된 거야. 새 담임은 그 녀석이 4학년 때 화를 조절 못하고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패던 아이라는 말을 못 믿겠다는 표정이야.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훈남이 됐거든. 서글서글하고 따스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품어 주는 그런 녀석이 된 거야. 부모님은 나와 만난 그날 곧바로 상담소 예약하고 무려 한 해 동안 상담을 받았지. 아들 혼자만이 아니라 식구들 모두. 그러고는 유치원 때부터 해 오던 대부분의 사교육 다 끊고 주말마다 캠핑 가고 맛있는 거 해 먹으며 흠뻑 애정을 주고받으려 애쓴 거야.

지금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늦게라도 부모가 자식에 대한 쓴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인 건 다행이야. 아이 아픔은 덜어 주고 엉뚱한 데 쓸 기운을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쏟을 수 있었지. 그 아이에게는 천지개벽 새로운 세상이 열린 거야. 아이가 밝아지니 부모가 기쁜 건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반 아이들에게도 복이지. 이런 부모 만나는 거 쉽지 않아. 부모가 내 자식에 대한 씁쓸한 충고를 받아들이려면 대단한 용기와 판단력이 필요해. 내 아이에 대해선 부모인 내가 가장 잘 안다는 믿음이 그만큼 무섭기 때문이야. 나와 너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할 일이야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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