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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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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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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밀레니엄 좌파는 기다리는 데 지쳤다

고태경/ 정치철학 연구자

 

 

밀레니엄 좌파는 기다리는 데 지쳤다.” 저널 <디 애틀랜틱>이 최근 미국 20~30대 좌파들을 다룬 기사의 제목이다. 무엇을 기다리다 지쳤다는 말일까. 미국 밀레니엄 세대의 생활 환경을 특징짓는 사건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다. 1940년대 미국 30세 청년의 소득이 그들 부모의 30세 당시 소득보다 높을 확률은 대략 90퍼센트. 그러나 2019년 현재 이 비율은 50퍼센트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

이들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화두는 단연 기후 위기다. 산업혁명 후의 역사를 돌아보자.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말은 체제를 불문하고 지구상 모든 국가의 비전을 특징짓는 단어였다. 산업화의 진보를 통해 다다른 곳이 기후 위기의 종말론적 파국이라는 사실, 경제 개발의 서사가 도달한 결론이 글로벌 경제 위기라는 사실 앞에 다시 한 번 기다림을 역설할 용기를 내기는 어렵다. 기다림에 조응하는 말은 약속이다. 20세기에는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진보의 약속이 있었다. 밀레니엄 좌파들이 기다림에 지쳤다는 말은 이 모든 것과 대립한다. 그들은 대안을 원하지만, 우리가 알던 그런 것은 아니어야 한다.

 

구심력의 붕괴

밀레니엄 좌파들이 기다림에 지쳤다는 말과 함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그들의 강한 사회주의 지향이다. 최근 미국 내 29세 이하 유권자들의 정치 성향을 다룬 여론 조사에서 대략 50퍼센트 정도가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먼저 21세기의 서막과 함께 거대한 구심력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배경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였고, 출발점이 된 것은 2010년 아랍 민주화 운동이었다. 미국의 월가 점거와 스페인의 분노한 자들시위가 연이어졌고,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논란(결국 잔류했다), 영국의 브렉시트, 카탈루냐의 스페인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 시도가 나타나며 국제 질서의 대변동 역시 촉발되었다.

체제의 구심력 붕괴는 기성 정치 세력의 몰락을 동반했다. 잠시 유럽에서 회자된 파소키제이션(Pasokization)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그리스의 양대 정당 중 하나였던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사회당(PASOK)2010년 유럽 재정 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며 지지율 급락을 경험했고, 2015년 총선에서는 제7당으로 몰락한다. 1980년대 이후 긴축 기조의 친자본 정책을 받아들이며 일어난 노동계급 지지 기반 이탈의 결과였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향들이 네덜란드와 프랑스와 독일 등지의 유럽 복지국가들에서 연이어 나타났다. 파소키제이션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풀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사회당화’. 조롱 섞인 이 말은 유럽사회민주주의의 시대가 사실상 끝났다는 것을 함축한다.

사회민주주의의 몰락은 동시에 노동계급의 동요를 불렀다. 20세기 혁명의 거점이라 여겨졌던 중화학공업 산업단지는 경제 위기의 광풍으로 혼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 미국 대선을 경유하며 이런 표현이 등장했다. ‘앵그리 화이트’. 이 표현 끝에 붙는 단어가 노동계급이다. 화가 난 백인 노동계급은 자신들의 직장을 이주노동자들로부터 보호해 주겠다고 선언한 트럼프를 지지했다. 백인이 중심에 된 서구의 구 혁명 중심지들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독일의 새로운 극우 정당 독일의 대안(AfD)의 주요 정치적 거점은 구 동독공산당과 현 좌파당의 거점이었던 구 동독 지역이다.

대중의 우파적 동원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대중의 좌파적 동원은 불가능할까. 미국 29세 이하 유권자들 절반이 지지한다고 말한 사회주의의 이름은 민주사회주의. 이 세력이 우파 포퓰리스트들과 공유하는 몇 가지의 관념이 있다. 하나는 기성 정치는 시효 만료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민들의 목소리가 표현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동원의 시작, 그런데 어떤 동원인가

영국과 미국의 신흥 좌파들은 최근 민주사회주의의 정책적 경향을 사회민주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 핵심 특징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는 20세기의 종말론적 파국의 상황과 연관된다. 미국 민주당 좌파 오카시오 코르테스가 최근 대표 발의한 그린뉴딜 결의안은 이 파국에 대한 잠정적 대안을 담고 있다. ‘그린뉴딜에서 뉴딜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루스벨트 정부의 확대재정정책의 기조를 받아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확대재정정책은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포괄하는 보다 보편적 성격을 수반한다. ‘그린은 기후 위기와 연관된다. 기후 위기 상황에서 요구되는 신재생에너지 산업은 정부의 적극적 확대재정정책을 통해 확장될 것이고, 이것이 일자리를 창출하며 선순환 경제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이다. 그린뉴딜은 산업화를 축으로 전개된 20세기 경제 패러다임과의 결별을 추구한다.

둘째는 시민들의 직접적 공론장 참여라는 문제다. 전후 유럽에서 전개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체제는 경제적 재분배 정책에 크게 의존했다. 확대재정정책을 통해 국가의 공공부문을 확장하고, 누진세 등의 세제 정책을 통해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개별 시민의 일상에서는 시장의 개인주의화, 경쟁, 실업의 리스크가 일부분 상존하지만 중앙정부의 소득이전정책과 복지를 통해 사후적으로 이들을 규제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자연스레 중앙정부의 역할은 비대해졌고, 개별 시민과 중앙정부를 매개할 장치는 (노조와 정당 외에는) 희소해져 갔다.


여기서 밀레니엄 좌파는 기다리는 데 지쳤다라는 말의 함의를 다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별 시민들이 공론장과 맺는 수동적 관계에 한계가 왔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세대가 지금 당장 행동하기를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후 파업의 열풍을 선도하는 것은 전 세계 10대 청소년들이다.

마찬가지로 밀레니엄 좌파들 사이에서 최근 새로운 도시 대안모델로 주목하는 미국의 클리블랜드와 영국의 프레스턴시의 사례를 볼 필요가 있다. 이 두 도시의 공통점은 기존에는 산업중심의 도시였다가 2000년대를 전후로 기업들이 자본을 빼 가며 산업생태계에 위기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지방정부가 중심이 되고 지역 공공기관과 비영리기관의 주도하에 산업생태계의 재편에 들어갔다. 공공연구기관이 시장 관계망들을 조사한 후, 지역 주민들이 직접 노동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노동자자주관리형 협동조합 모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도시재생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된 이 두 도시의 모델을 부르는 개념 중 하나가 지역기반형 경제(place-based)라는 것이다. 중앙정부와 시민들을 잇는 것은 사실상 선거를 제외하면 사회계약이라는 추상적 원리뿐이다. 반대로 지역은 지방의 공공기관과 시민의 참여가 만나는 공간으로, 시민사회의 새로운 합의의 모델을 구축하는 장이 될 수 있다. 최근 전 지구적으로 남용되는 민관협치형 거버넌스 모델은 사실상 공공부문을 민간의 시장으로 외주화하는 형태를 띠었다. 한국의 민관협치 모델로 주목된 광주형 일자리는 정부를 끼고 노동3권을 잃은 저가의 노동력이 현대차에 외주화되는 구조를 띠었다. 공공부문을 시민들의 직접 참여의 장으로 환수하는 클리블랜드 지역 기반 모델은 새로운 공적 참여의 모델로서 이 민관협치 모델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밀레니엄 세대는 누군가에 의해 대의되는 것을 꺼린다. 대안은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참여는 직접적이어야 한다. 그들은 이제 지금 여기의 대안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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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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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공정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고태경/ 정치철학연구자

 

 

지난 2월 서울대 시설관리노동자들의 파업에 서울대 총학생회가 성명을 내며 논란이 인 바 있다. 노조의 파업은 지지하지만,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지 않도록 도서관 난방은 중단하지 말아 달라는 게 성명의 골자였다.

성명 발표 후 대학 내외부에서 비판이 쏟아졌고, 총학생회는 내부 논의를 거쳐 3일 만에 노조와의 연대로 입장을 선회했다. 논란은 사그라졌지만, 대학사회의 이러한 혼란이 이례적이지는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재의 20대 청년학생들은 대체로 87민주화투쟁을 경험한 386세대의 2세들이며, 최근 공공부문 정규직화 이슈에서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한 세대집단이다. 노동의 기본권과 학생들의 피해를 저울질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공정함이란 어떤 것일까.

 

두 노동자의 죽음

잠시 두 개의 죽음에 대해, 혹은 그 죽음에 반응하는 방식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전태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진 그는 평화시장 한복판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든 채로 산화한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라는 유언은 80년대 평전의 출간과 함께 청년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된다.

전태일 이후 한국사회는 열사투쟁이라는 것을 시대의 유산처럼 경험한다. 80년대에는 전태일의 친구가 되고자 한 수많은 청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열사정국이라는 것이 형성되었다. 이들의 죽음은 대체로 비슷했다. 군중이 모인 곳에서 불타는 모습을 전시하는 것. 몸에 시너를 뿌렸고, 많은 이들이 유언처럼 구호를 외치며 산화해 갔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라는 유언은 당대 시민사회가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정언명령이 되었다.

48년이 지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이 발생했다. 아무도 없는 작업장에서 홀로 기계 속에 끌려 들어간 그의 몸은 (사진 한 장 외에) 우리에게 어떤 목소리도 남기지 못한다. 이미 2000년대를 전후로 노동자들의 죽음은 철저히 고립되는 형태를 띠었다. 크레인 위에서 조용히 목숨을 끊은 김주익이 그랬고, 열사로 부르지 말아 달라고 유서를 남긴 기아차 윤주형의 죽음이 그랬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이 죽음들의 비참과 고통에 주목했다. 그런데 정작 묻지 않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전태일은 왜 자신의 죽음에 사회가 응답할 거라 생각했을까. 그가 원한 대학생 친구는 정말 그의 편이었을까.

 

공정성이라는 낯선 물음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어떤 추상의 집합체가 존재한다. 가족공동체나 근대화 이전의 지역공동체와는 달리, 익명의 사람들이 시장과 미디어를 통해 엮인 거대한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예컨대, 올림픽 경기에 함께 열광하는 사람들, 혹은 사회적 재난에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은 익명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에 휩싸이는 순간 하나의 집합체에 결속된 듯한 느낌을 갖곤 한다.

이 네트워크는 때로는 이해관계에 의해 연결되고, 일부분은 미디어를 통해 연결되는 상상의 네트워크다. 우리가 공적 가치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 예컨대 기본권, 인권, 정의, 법 등과 같은 것들은 이 네트워크가 만들어 낸 공론의 결과물이다. 사회적 재난에 대한 분노, 정의의 감정들 역시 이것의 파생물이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그것을 시민사회혹은 사회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네트워크의 지반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를 부르는 오늘날의 용어가 바로 공정성이다. 이 용어와 함께 거론되는 또 다른 표현이 기회의 균등이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있어 공정성은 기성세대의 정의 관념과는 판이한 내용을 갖는다. 예컨대,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노동3은 헌법에 속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는 하나의 기본권이다. 그것은 이미 전제되었거나, 협상의 대상으로 축소될 수 없는 판단의 절대적 준거로 간주된다.

반면, 공정성 담론은 모든 것을 협상의 테이블로 올린다. 기회가 균등해야 하기에 어떠한 절대적 준거도 불필요하며, 모든 것은 이해관계의 문제처럼 협상 가능한 대상으로 쪼개져야 한다. 서울대 시설관리노동자들의 파업은 학생들의 피해와 거래되어야 할 또 하나의 이해관계로 간주되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기회 균등을 무너뜨리는 무임승차행위로 간주된다.

요컨대, 청년들의 도덕 감정은 완전히 새로운 틀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사회 정의의 관념이나 도덕 감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것에는 사회적 재난을 만난 것처럼 격분하고(하키 남북단일팀 구성 문제 등), 또 어떤 것에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치시키며 냉담한 모습을 보인다. 새로운 합의체제가 필요한 시점인데, 문제는 그 합의의 지점에 우리가 기본권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들어설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새로운 합의체제와 위태로운 기본권

새로운 합의의 체제가 형성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그것이 정부 주도로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합의 모델 중 하나로 등장한 것은 공론화위원회라는 것이었다. 어떠한 절대적 가치 준거도 없이 시민들의 숙의에 모든 것을 위탁한다는 공론화위의 유토피아 정신은 사회문제의 책임을 정부와 지배권력에 묻던 이전 시대의 감성을 완전히 이탈하고 있다.

시장은 언제나 불안정할 수밖에 없기에, 정부는 사회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사회를 동원하는 통치술을 사용하곤 한다. 80년대까지는 정부 주도의 하향식 내치모델이 지배적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개발독재국가들, 복지 중심의 유럽 국가들 일체가 그러했다. 영어로는 거번먼트(goverment), 우리말로는 통치라고도 번역되는 이 내치의 기법은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력이 일정 수준 확보될 때 가능한 것이었다(새마을운동을 생각하자). 반대로, 2000년대 이후 시장 중심의 작은 정부모델이 부흥하며 새롭게 등장한 내치모델이 우리말로 민관협치로 번역되곤 하는 거버넌스(governance)의 모델이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보자. ‘협치의 협력 대상은 시장의 이해관계 당사자들이다. 공적 영역으로 기업이 호출되고, 기업의 이해관계와 협상의 줄다리기를 할 시민단체들이 또 하나의 파트너로 호출된다. 이 내치의 기법에서 중요한 것은 파트너십이며, 정부는 이 이해관계들 사이에서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다. 모든 것이 협상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자(광주형 일자리에서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제한할 수 있느냐가 주쟁점이었다), 이제 쟁점은 이 거래에서 얼마의 파이를 나누어 갖느냐로 환원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이후 노동자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두드러졌던 것은 노동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주체가 명확했다는 점이다. 1840년대 이후 노동문제를 통칭한 용어가 사회문제(social question)였다. 빈곤과 죽음이라는 유령은 사회 그 자체가 낳은 난제(question)라는 것, 궁극적으로 자본과 지배권력이 그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은 이제 뒤바뀌게 되었다. 국가가 갈등의 중재자로 빠지고, 노동기본권이 협상 테이블로 올려지며 혼돈이 시작되었다. 전태일은 1969년의 한 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과제이다.” 어떠한 것으로도 외면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타협 불가능한 무엇이 존재한다고 가정된 시대가 있었다. 서울대총학생회의 혼란은 2019년 우리 모두의 혼란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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