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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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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19 강사법 적용 이후에 생긴 일

<작은책> 201910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강사법 적용 이후에 생긴 일

김어진/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서울경기인천강원지역 분회장

 

 

2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이맘 때쯤이면 한 학기 강의 줄거리의 서론이 지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얼굴도 조금씩 익어 가고 학생들의 표정도 마음에 담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대학 시간강사를 시작했을 때는 늦은 결혼에, 아이까지 낳고 나서였다. 8년 동안 다섯 개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일명 보따리 장사를 전전했지만 그래도 학생들하고 강의실에서 호흡했던 그 순간은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학생들의 밝아지는 표정과 함께 느낌표가 공중에서 떠다니는 것 같은 순간들이었다. 그 시간을 위해 강의 준비에 몸과 마음을 다했다.

다음 학기에도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조교에게 연락이 올까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던 순간들이기도 했다. 대학 강의의 절반을 담당하면서도 연구와 강의를 안정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그 어떤 권리 주장도 할 수 없었다. 연구실은커녕 휴게실조차 없어서 창고에서 대기해야 했다는 얘기, 대형 강의의 경우 채점하느라 졸도 직전까지 갔다는 얘기, 부당한 것 따지면 곧바로 강의 못 받을 것이 뻔해 숨죽여 왔던 대학 시간강사들의 얘기들은 12권 전집으로도 모자라다.


강사법 적용 이후로 1년마다 계약을 하고 3년 보장이라 하니 이번 학기부터야 이런 불안감은 좀 덜해질지 모른다. ‘교원지위 보장이 대학 시간강사 신분의 안정성을 보장해 줄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그러나 지난 여름 공개채용 과정에서 많은 대학 시간강사들이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전임 수준의 연구 경력을 요구하는 학교가 적지 않았다. 생계형 시간강사들은 제대로 논문 쓸 시간도 여유도 없다. 대학에서 부교수가 된 친구는 최근 학기당 18학점 이상을 강의해야 했는데 그조차 논문은 방학에야 겨우 한 편 쓸까 말까 할 정도라고 한다. 자기 연구실도 있고 연구비도 쓸 수 있는 전임교원조차도 논문 쓰는 시간과 여유가 팍팍한데 생계형 대학 시간강사들은 오죽할까. 교육부가 해고 강사들을 지원하겠다며 추경예산으로 편성한 연구 지원 사업에 얼마나 많은 해고 강사들이 지원했을지도 걱정이다(교육부 통계로 해고 강사가 7500명이라는데 지원 대상은 2000명에 불과). 그런데 한 대학은 최근 3년간 등재지 논문 3편을 요구했다! 추천서를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학교도 있었다.

4대 보험이 되는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어 대학들이 좋아라 하는 겸임초빙 교수를 미리 왕창 뽑아 놓는 경우도 많았다. 아예 겸임초빙을 빙자하라며 여전히 건강보험 되는지를 묻는 경우도 많았다. 공정성의 모양새를 취했지만 말이 공채지 내정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대학이 물갈이를 하려 했는지 반백 살 넘어간 선생님들은, 특히 인문 사회 쪽에서는 낙방(공채 탈락)되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힘든 여름이었다.

강의를 잡은 선생님들은 한숨을 돌렸지만, 3년 뒤에는 또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대학 시간강사들이 모이면 다들 하는 얘기지만, 10년 가까이 대학 강의를 하면 강의 기술이나 경험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강의실에서 학생들 눈빛을 보면 우리는 대번에 안다. ‘, 내 말이 좀 어려웠구나!’ ‘! 이제는 알아들었다는 얘기구나!’ 그래서 한국 대학생들의 강점과 약점, 그들의 고민, 그들의 마음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들의 마음 문을 열어야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전송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새로운 연구 동향, 국제 비교 사례, 서점에서 20대들이 많이 보는 책 동향, 심지어는 청춘 개그감 등을 익히면서 스스로를 단련시켜 왔다. 박봉에, 그것도 1회용 휴지 취급해 왔던 대학이 이제는 우리에게 높은 진입 장벽을 치는 것을 우리는 지난여름에 똑똑히 목도했다. 예순이 다 된 한 대학 시간강사 대선배님은 면접까지 보라는 말에 깊은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고 토로했다.

낙방한 선생님들은 왜 낙방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수시에 탈락한 수험생들과 그 부모님들의 마음을 정말 뼈저리게 공감하게 됐다는 시간강사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들이 빼곡이 적어 놓은, 우리들의 노하우가 담긴 강의계획서들을 만끽한 대학들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우리를 내쳐 놓았어도 제대로 학생들을 성심껏 가르치며 교육기관으로서 본분을 다한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개강 후 서울의 한 대학에서 문학 관련 과목을 가르치는 한 대학 시간강사 선생님은 너무 놀랐다며 다음의 얘기를 들려주셨다. ‘그 동안 오랫동안 그 대학에서 강의해 온 50대 선생님들은 다 잘리셨다’(나이 많은 강사들에게 적은 강사료 주고 부리는 게 마음에 걸려서), ‘전공선택 과목이었고 정원이 20명인데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교양 과목이 대폭 줄어들어서 생긴 현상), ‘한 교양 과목은 수강 인원이 300명이라고 한다’(그래서 학생들은 학기 초에 방트-방귀 터도 되냐- 인사를 한다).

나는 지난 3월 한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잉여인간이 아니다’. 이런 외침은 2학기에도 유효하다. 맞다. 우리는 쓸모없는 퇴물이 아니다. 우리가 힘써 만들었던 그 느낌표들이 살아 숨쉬는 그런 대학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필요한 대한민국의 대학 시간강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원이고 분노의 강사들이기를 원한다. 지금 돈벌이가 우선인 대학을 초4인 내 딸이, 우리의 아이들이 있어도 괜찮을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절망과 낙담보다 분노와 투쟁에 동그라미를 쳐야 한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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