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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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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2월호

년으로 살아가기

 

배달이요

야채죽(필명)/ 배달 대행 기사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곧이어 누구세요?” 하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대답을 합니다.

배달이요.”

저는 배달 대행 기사입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 기사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배달 대행은 도시빈민들이라는 말입니다. 돈이 없어서 빈민이 아닙니다. 보통은 400, 500만 원씩, 흔치는 않아도 1000만 원씩 가져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하는 노동자와 하나도 다를 것 없이, 그저 가게 밖에서 서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에는, 우리는 여전히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 없어서 오토바이나 타는, 안전을 위해 헬멧을 써도 보안상의 이유로 헬멧을 벗어야 하는, 배달시키는 사람들의 편의와 위생을 위해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하층민일 뿐인 듯합니다.

왜 배달을 하냐는 말에는 어쩌다 보니, 라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생이었다가, 직업 군인이었다가, 족발집 사장님이었다가, 배달 기사가 되었습니다.

스무살,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은 했지만, 12년 동안 죽어라 외우고 익혔던 교과서는 전공이라는 큰 벽을 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공부가 재미없고, 성적도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학업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부사관으로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스무살의 여름 훈련소에서부터 11월의 임관식, 이후 약 5년간 직업 군인으로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에 열심히, 묵묵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명감만으로는 평생 군인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4년간의 의무 복무가 끝나고, 장기 복무가 아닌 3년의 연장 복무가 결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진급할 수 있는 사람은 1명뿐이었지만, 나만큼 열심히, 나보다 더 오래 노력한 사람들은 7명이나 되었습니다. 평생 군대에 말뚝을 박고자 대학을 포기했던 저는, 다시금 군 생활을 포기하고 전역을 선택하여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5년간의 복무 끝에는 5년간 모인 적금과 퇴직금이 남았습니다. 전역 간부에게 주어진 취업의 기회도 있었지만, 사무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컴퓨터만 보는 업무에 적응할 수 없어 얼마 가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무작정 쉴 수만은 없어서 친구의 부모님이 하시는 족발집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직원 세 명이 삶고, 썰고, 배달까지 하는 작은 가게였지만 꾸준히 손님이 찾는 맛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친구와 함께 돈을 모으고 약간의 대출을 받아 신림동 어느 한 가게에서 족발집의 사장님으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사도 잘되고 배달 주문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매출이 높은 날엔 하루에 300만 원씩 팔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만 장사가 되면 아무 걱정 없이 대출금도 갚아 나가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장사는 쉽지 않았습니다. 점차 매출은 줄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돈은 겨우 2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동업을 제안했던 친구가 먼저 포기 선언을 하고, 혼자만으로는 역부족이었기에 아쉽지만 저 역시 족발집의 꿈은 그곳에서 내려놓았습니다.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것은 3000만 원 가까이 되는 대출과 작은 전세방, 오토바이 한 대 뿐이었습니다.

폐업 이후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25살이지만, 배운 것이라고는 총을 쏘거나, 병사들을 지휘하거나, 족발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고, 경력 또한 별거 없는 고졸 청년에게 선택지는 월급 150만 원 정도의 일자리뿐이었습니다. 보통의 직장으로는 대출을 갚으며 생활을 꾸려 갈 수 없다는 판단에, 결국 남아 있던 한 대의 오토바이로 장사할 때 함께했던 배달 대행업체의 기사로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햇수로 5년차, 전업 배달 기사로 4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걱정하던 3000만 원의 빚은 1년 만에 정리할 수 있었고, 아직 절반은 은행의 것이지만 작은 내 집도 마련했습니다. 중간에 잠시 위험 부담이 높은 배달 기사보다는 안전을 찾아 회사를 다닌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수입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근무가 그리워 어느새 배달 기사로 돌아왔습니다. 큰 사고를 겪어 후유증이 남아도 어느새 익숙해진 생활은 다시금 배달을 하게 합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가족, 여자 친구에게도 숨겼던 배달 기사라는 직업이, 이제는 어딜 가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천직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겪었던 실패들은 이제 다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이 경험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만나게 되는 다양한 손님과 상점 직원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여러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줍니다.

배달 기사로 첫 여름, 한 대학가에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학생들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학교 다닐 때 얼마나 놀았으면 저렇게 배달이나 하고 다닐까?”

제 딴에는 저에게 들리지 않게 친구 귓가에 작은 소리로 얘기했겠지만, 배달 기사라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당시의 저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소심하게 한마디 하는 것으로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여러분이 다니는 대학교보다 더 들어가기 힘든 대학교 다녔어요.”

그분들을 다시 만나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서 배달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직업을 선택해서 준비하고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처럼 저도 이 직업을 선택해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은 사회적인 인식이 부족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점차 나아지는 것을 체감합니다. 전에는 추운 날 음식이 식었다고 타박을 듣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꽤나 자주 추운 날씨에 배달하느라 고생하셨다는 한마디를 듣습니다. 전에는 빨리오세요라고 하시던 손님들이 이제는 안전 운전하세요라는 말을 건네줍니다. 2019년 새해를 맞아 아주 조금이지만 더 나아졌다는,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초인종을 누릅니다. 누구세요?”라는 질문에 수천 번, 수만 번 했던 대답을 다시 되풀이합니다.

배달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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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2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내가 보육 교사를 할 줄 꿈에도 몰랐다

이현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보육1.2지부 대표지부장


 

나는 보육 교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보육 교사를 시작할 무렵의 나는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리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어려움을 느껴 피하거나, 조용한 구석을 찾아 들어가는 집순이 기질이 매우 강하기도 했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보육 교사를? 물음표를 그리는 사람 여럿 봤다.

내가 보육 교사를 하게 된 건 교회 전도사님이 한 달만 지인의 어린이집에서 그저 아이들만 돌봐주면 된다며 간곡히 부탁한 때문이었다.

당시 나 역시 미디어의 폐해로 아이 돌봄 그까짓 거 아이들하고 행복한 미소를 띄며 아름답게 놀아 주면 되는거 아니야?’라고 감히 생각해 버렸고, 그게 화근이 되어 어린이집에 발을 들였다. 첫날, 30분 만에 9명이(4살 초과 보육 인원) 번갈아 가며 10초마다 비명을 지르며 울기 바빴고, 그 와중에 불편함을 못 견디는 아이들은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가며 물고 뜯고 맛보는(?) 실력 행사를 했다.

어흥이로 돌변한 아이 두 명을 품 안에 넣어 훈계(?)를 하고 있자니 그 옆에서 한 아이가 응가를 하고 손가락으로 만지작(벽에 안 바른 게 신의 한수였다), 또 다른 아이는 쉬야 마렵다 화장실이 급하다 소리치고, 내 품 안에 넣은 어흥이 둘은 계속 실력 행사를 노리고, 실력 행사 당한 아이들은 여전히 울고, 나도 울고.

전쟁이 나도 이 정도는 아닐만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은 그렇게 예쁘지도 어른의 말을 잘 듣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고 당일 도망이 절실했으나, 나를 그 전쟁터에 소개해준 전도사님의 을 생각해서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싶어 이를 정말 악물고, 정확히 3개월만 일하고 도망가려고 했다. 다시는 어린이집 일 따위는 안 하고 싶었고, 30분간 이루어진 상황에 나를 밀어 넣은 전도사님이 너무 미웠다.

나도 내가 보육 교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아이 은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죽어도 몰랐다. 내가 애증의 보육 교사를 하게 만든 그아이 은서, 그아이는 예쁜 얼굴의 자폐스펙트럼에 있는 여섯 살 아이였다. 누구와도 소통이 안 됐고, 언제나 같은 머리 모양에 손가락마다 붙인 밴드가 하나라도 헐거워지면 있는 힘껏 소리를 치며 불편감을 호소하던 아이였다.

청소하던 볼풀장에서 3개월만 버티자 속으로 날짜를 세고 있던 어느 날, 그아이와 나 단둘. 10초 남짓한 짧은 그 순간 그아이 은서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씽긋 웃어 주던 그 찰나. 그 찰나가 나를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마음속에 불이 확 일어났다고 표현해야 하나. ‘, 내가 잘 몰랐나 보다. 내가 정말 아이들을 몰랐나 보다. 만약 제대로 알았다면 어쩌면 더 많은 표현들로 소통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그냥 들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12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어린이집 일이 어렵다.

12년 전과 다름없이 어린이집은 교사 한 사람이 정말 많은 수의 아이들을 동시에 돌봐야 하는 환경에서 보통 기본 3가지부터 28가지의 다른 사건들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게 보통이고 이 상태가 매일 10시간씩 유지되는 현장이다. 몸이 100개였으면 좋겠다는 말이 매일 매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전쟁 같은 점심시간, 먹는 걸 싫어하는 아이들 여럿과 사투를 벌여야 하고, 그럼에도 먹여 달라는 양육자와 먹기 싫으면 놔두라는 양육자의 의견도 들어서 적용시켜야 하고, 이런 과정에서 양육자의 요구와 아이들의 거절할 권리 또한 무시할 수 없기에 양육자 혹은 아이들을 설득해야 하는 과정까지 모두 동시간에 일어난다.

아이들이 움직이지 않는 유일한 시간인 낮잠 시간. 이 시간에는 아이들이 움직이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일들을 처리한다. 매일같이 하지 않으면 밀려 버리는 일들을 중심으로, 각각 감사하는 기관이 요구하는 내용의 서류를 쓰고 교구들을 만들고, 청소와 정리를 한다.

보육교사가 보육노동과 별개로 매일 작성해야하는 업무들.  사진_공공운수노조 보육지부


보육 교사는 매일같이 입주 청소 버금가는 청소로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하루의 마무리는 실력 행사한 아이와 실력 행사 당한 아이들의 부모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일. 원장과 일부 양육자들의 감정을 받아 내는 욕받이가 되기도 한다.

그날 그 은서라는 아이의 미소가 아니었으면 나는 3개월을 채우고 도망갔을 것이다. 어린이집 일이라는 건 정말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요구되고 100개의 몸이 할 일을 고작 몸뚱이 하나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은 직업이다.

이런 나의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게 현재 23만의 보육 교사들이며, 그들 또한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원장의 갑질, 부모의 갑질, 행정기관의 갑질, 잠재적 아동 학대라는 편견의 갑질 속 위태로운 교사의 삶에 그나마 버팀목이 되는 것이 보육노조이다.

▲ 아동 학대 오해로 자살한 보육교사를 기리는 분향소.  사진_공공운수노조 보육지부


은서와 같은 아이들의 미소에 홀려 보육 교사라는 직업을 유지하기엔 너무 많은 어려움들이 있고, 시스템에 의해 편견에 의해 타의적으로 그 삶을 끊어 버리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교사들은 말한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저는 아이들이 좋았을 뿐입니다.”

전 그저 아이들만 돌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부모가, 원장이 싫어서 전 떠나렵니다.”

어흥이가 돼 버린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부모님에게 이야기했지만 듣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원장님이 부모에게서 민원이 들어왔다고 당장 나가래요.”

넘어지는 아이를 잡다가 팔이 부러졌는데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래요.”

아이들 장난감 만들다 손가락이 잘렸는데 다쳤다고 화를 냈어요.”

아이는 재미있게 놀았는데 상처가 생긴 줄 교사가 몰랐다면서 부모님이 무척 화를 내셨어요. 저 아동 학대로 신고당할까요?”

원장님이 임신도 순서대로 하래요.”

정말 몸이 힘들어 쉬고 싶은데, 원래 어린이집에는 방학 빼곤 쉬는 날이 없대요.”

아이가 또래보다 많이 달라서 부모님께 이야기하려고 했더니 원장님이 원아 떨어진다고 말하지 말래요

이 아우성 속에 보육 교사는 혼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이제는 보육노조가 같이하기 위해 조금 더 단단하게 뭉쳤다. 그리고 힘 있는 걸음걸이로 은서와 같은 아이를 만나 도망갈 궁리를 접고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려고하는 교사들의 뒷배가 되어주고 있다.

어린이집 교사가 쉬워 보이는가? 그렇다면 어린이집으로 오시라! , 100명분은 할 각오를 하시고! 그 뒤엔 보육노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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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2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

 

국회 앞 작은 집

/ 사진_ 하명희


 ▲ 국회 앞 작은 집  작은책(하명희)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를 빠져나와 열한 걸음을 걸으면 3인용 텐트만 한 작은 집이 있다. 이 집의 벽면은 천막이 아니라 조각 천으로 이어져 있다. 왼쪽에는 세 개의 산등에 동이 터 오고, 오른쪽에는 조각배가 떠 있는 바다가 출렁인다. 사면의 조각보 위로 삼각 지붕이 얹혀 있는데 국회의사당 정문 쪽으로 살아남은 아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박음질되어 있다. 그 아래엔 바닷가 해당화일까, 커다란 꽃송이가 피어 있다. 이 집의 삼각 지붕에는 다른 집에는 없는, 매일 숫자가 바뀌는 칠판이 있다. 정문에는 머리를 빡빡 민 아이가 나는 도망가다가 잡혔습니다라는 글자가 박힌 붉은 티셔츠를 문패처럼 달고 있다. 그 옆에는 여름에도 이곳에 이 집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돌돌 말려 올라간 차양막이 있고 스티로폼으로 된 문이 있다. 문을 열면 방이다. 서너 명 앉을 수 있는 방. 그러니까 이 작은 집은 방이다. 이 방에 들어와 본 사람들은 알 수 있는 묘한 기운이 있는데, 그것은 방의 두 면에 있는 산과 바다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어서일 것이다. 산의 속, 지하철역 쪽으로는 지난가을에 입었을 법한 쑥색 점퍼가 걸려 있다. 바다의 속, 국회의사당 정면 쪽에는 형제복지원에는 3개의 병동이 있었다로 시작되는 어느 날의 신문 기사가 벽면 가득 붙어 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다른 이름 '살아남은 아이' 작은책(하명희)


앞머리가 눈을 덮고 찬기에 어깨를 웅크린 그가 허리를 구부려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신발을 벗고 바닥을 덮고 있던 이불 속으로 발을 뻗었다. 그가 미리 덥혀 놓은 주전자에서 캔 커피를 꺼냈다.

이거라도 들고 있으면 조금 나아요.”

이 방에서 캔 커피는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일한 온열기다. 이 이불 하나로 괜찮으냐고 물었다.

하도 길에서 살아서 이젠 뭐, 괜찮아요.”

그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왔다. 누구나 들어오라는 듯 입김이 열린 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누군가 고개를 들이밀고 손님이 있었네, 하고 끼어들었다. 그는 1인시위에서 했다던 몸에 익은 목례를 하며 내게 저기 민간인 학살 투쟁위원회의 어르신이에요 하고 말했다. 다른 농성장에서는 천막 안에 잠자는 텐트가 있던데 여긴 온열 기구도 없이 어떻게 견디느냐고 물었다.

천막 농성장이 커지면 더 추워요. 작은 게 좋아요. 여긴 사람들이 신발 벗고 들어와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힘든 얘기나 농담이나 그런 걸 나눌 수밖에 없죠. 방이니까. 사랑방이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었다. 그는 칠판에 날짜를 지우고 더하며 긴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 고맙죠. 저쪽 한국에서 제일 큰 집(국회)에서는 아무도 안 와요. 매일 이 앞을 지나가면서도 단 한 명도 안 들어오더라고요. 1인시위를 시작한 때가 2012년이니까 6년 지났고 올해 7년째인데, 작년 1226일에도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구요.”

그는 웅크린 어깨가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말했다. 나는 책을 보았다고 했다. 내가 책을 꺼내자 그는 첫 페이지를 손으로 짚었다.

  ▲ "이게 나예요팔사일공삼육일팔!"  작은책(하명희)

이게 나예요. 팔사일공삼육일팔! 아홉 살 때. 어릴 때 사진은 이것뿐이에요. 팔사일공삼육일칠은 작은누나고.”

그는 이빨이 시린지 얼굴을 찡그렸다. 책을 보고 알고 있었다. 그에게 추위는 공포라는 걸. 잠깐이라도 따뜻한 곳에서 밥을 나눠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대방의 생각을 미리 알아채는 법을 아홉 살 이후 몸에 익힌 듯 내게 먼저 밥 먹으러 가죠라고 말했다.

살아남은 아이. 우리는 그들 수용소의 생존자들을 이렇게 부른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대략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이것이 그들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리고 있는가. 그는 밥을 씹지 않고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이빨이 아파서요. 어릴 때니까 유치가 빠지고 어른 이빨이 나오는 때였어요, 형제복지원에 붙잡혀 들어갔을 때가. 그때 관리를 못한 것도 있고, 빨리 먹어야 하니까 급하게 삼키던 것이 버릇이 된 것도 있고, 또 어떻게든 거기서 나가야 사니까 이를 악물었던 게 이렇게 되어 버렸어요.”

내가 씹기에는 무른 밥이 그에게는 딱딱한 밥이었구나. 이 책에는 그가 왜 무른 밥을 씹지 못하고 삼켜야 하는지, 왜 찬 바닥에서 자는 것이 일상이면서도 그것이 공포인지, 왜 어깨를 움츠린 채 허리를 펴지 못하고 인사를 하는지, 그의 몸에 새겨진 폭력과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역사의 거대한 공백이 조각보의 박음질 글자처럼 새겨져 있다.

▲ 살아남은 아이-개정판,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 (전규찬, 박래군, 한종선/ 이리/ 2014)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개나 소나 다 글을 쓰는구먼.’ 그렇다.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 나는 지금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국가가 버렸고, 사회가 관심을 안 갖는데, 어찌 개인의 힘으로 쉽게 나올 수 있겠는가? 당신들은 진정으로 그들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길 원하는가?” 한종선, 살아남은 아이(이리, 2012) 134135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옥을 경험한 그가 형제복지원을 나와 생존자로서 살아야 했던 세월을 사회가 몸으로 받아 적는 일이다. 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이다. 안영춘은 어째서 소년은 그동안 우리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는 수용소와 연관된 모든 이들이 퇴소 후에도 여전히 비가시적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문맥과 행간에서 찾아야 한다(10)고 이 책의 발문에 적고 있다. 책이 나온 것이 2012년이니 벌써 7년이 지났다. 그사이 이 책의 소년이 던진 질문들은 그 거대한 공백을 어떻게 채웠을까. 이 책을 기획하고 생존자 한종선이 그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격려한 전규찬은 수용소의 생존자들에게는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의 의무, 수용소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그 증언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경청의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책 속의 아이가 있고, 생존자들이라 불리는 그들은 423일째 폭력의 날짜를 새기고 지우며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진심으로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가?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집인 국회 앞에 나는 도망가다가 잡혔습니다라는 문패를 단 작은 집이 있다. 작은 집에는 울타리가 없어 집 밖이 다 마당이다. 주소가 없어 우편물을 들고 직접 가야 한다. 작은 집은 지나는 사람이 들어와 인사를 건네거나 주변의 농성하는 사람들이 걱정을 풀어놓는 사랑방이 된다. 작은 집 마당의 큰 집에서는 작년에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특별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1인 시위를 시작한 지 7, 국회 앞에 작은 집이 들어선 지 423일이 지났다. 그동안 국회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이 작은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오지 않았다. 

* <작은책> 편집위원인 글쓴이는 2014나무에게서 온 편지로 제22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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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0월호

쉬엄쉬엄 가요

독립영화 이야기_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감독의 <사수>

 

우리가 없던 시간의 기록들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솔직한 고백을 드립니다. 유성기업에 대해서는 자주 들었습니다. ‘장기투쟁 사업장으로서 늘 이름이 나왔고 그래서 2014밀양·청도 72시간 송년회의 방문지이기도 했었죠. 하지만 저는 그동안 이름만 알고 있었어요. 2014년 그때에 밀양, 청도 주민들의 일정에 부분적으로 동행하기도 했으면서도 유성기업의 사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구미 스타케미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코오롱 해고 노동자, 씨앤앰 케이블 노동자, 기륭 노동자. 다 열거하기에도 숨이 찹니다. 너무 많은 곳에서 너무 긴 시간동안 절절한 사연을 안고 싸우는 분들이 너무나 많아서 각자의 차이는 뭉뚱그려진 채 이름으로만 구분될 뿐이었습니다, 제게는. 그러다가 이번에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만난 <사수>라는 영화 덕분에 이제야 그곳이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수>라는 영화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수>를 만든 생활공동체 공룡(이하 공룡)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공룡 사람들은 미디어교육 워크숍 같은 데 가면 만나는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청소년들과 교육 활동을 하면서 지역에서 함께 살아내고 성장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라 평소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거든요. 공룡이 만든 영화라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달 영화로 <사수>를 추천합니다.

2016년 여름,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유성기업 노동자 한광호 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011년부터 시작된 회사의 노조 파괴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키려 싸워 온 지 5년이 되어 갈 무렵이었습니다. 무장한 경비용역들로부터 무차별 폭력을 당하며 감시와 차별의 일상을 살아오던 일터 동료들에게 한광호 님의 죽음은 곧 자기 자신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또다시 동료를 잃을 수 없다는 각오로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은 노조 파괴를 끝내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웁니다. <사수>는 그 시간의 기록입니다.

영화 <사수스틸 이미지.


공룡 사람들이 유성기업을 만난 건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문이었습니다. 폭력의 기록이 담긴 피켓을 든 채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웃지 않았고 가만히 비를 맞고 서 있었다고 김설해 감독은 말합니다. 김설해 감독이 들려주는 유성기업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2011518일 그들의 회사는 야간노동을 없애기로 한 노조와의 약속을 어기고 교섭 도중 기습적으로 직장을 폐쇄합니다. 용역들이 공장 문을 막은 채 폭력을 행사하고 2000명의 경찰들이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렇게 기나긴 싸움은 이어집니다. 처음 보는, 하지만 낯설지 않은 화면들이 이어집니다. 투쟁의 일상 중 하루였을 어느 날, 노동자들이 천막을 철거합니다. 그중 한 노동자에게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라는 말을 하면서 인터뷰에 응해 줄 것을 청하지만 그 노동자는 나는 고생 안 했다고, 다른 사람 섭외해 주겠다고 쑥스럽게 웃으며 카메라를 피해 도망갑니다. ‘1994년 유성기업 입사라는 설명 자막과 이름이 떠도 저는 몰랐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에 돌입한 동료에 대해 마음이 아프고 안쓰럽다는 심정을 토로했던 그분의 얼굴이 장면이 바뀌면서 영정사진 속에서 웃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고 한광호 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생전의 한광호 님을 알고 있었던 거죠. 인형극을 준비하고 연습하며, 천막을 치고 걷으며, 용역의 폭력에 함께 맞서 싸우며,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내 온 겁니다. 그래서 영화를 두 번째로 볼 때에는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화면들을 보게 됩니다. 쑥스러워하던 한광호 님의 인터뷰가 끝난 후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하며 나무 그늘 밑에 모여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멀리서 찍은 화면이 보입니다. 보통은 씬의 마무리 화면으로 쓰이는 롱샷 안 그 어딘가에 한광호 님의 모습이 있는 겁니다. 어제와 다름없는 일상이라고 생각했을 그 순간들. 영화를 만들기 위해 화면을 고르며 떠올렸을 지나간 시간의 추억들. 그리고국석호, 김성민, 김수종, 김풍년. 지금은 함께 있지만 다가올 미래는 가늠이 안 되어서 불안한 이 관계들.

영화가 진행될수록 각자의 사연들이 하나 둘씩 펼쳐집니다. 그 사연들은 고 한광호 님의 시간과 겹쳐집니다.

떠나고 싶은 생각어떻게 하면 끝낼까 이런 생각. 심지어 극단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죠. 차로 밀어버릴까. 어디 숨어 있다가 오며는 급브레이크 잡아가지고 뭐 이런 생각. 확 들이받고 싶은(김수종)

▲ 영화 <사수스틸 이미지.


거기에 떠나간 동료에 대한 미안함까지 겹칩니다.

나 때문에 죽은 것 같고 내가 더 나서지 못해서 죽은 것 같고. 내가 좀 더 그 자리에 서서 그 형(고 한광호 님)보다 좀더 한발 더 앞서서 아니면 옆에서 왜 못해 줬을까.”(김풍년)

김풍년 님이 들려주는 그다음 얘기에 또 충격을 받습니다. 세 살, 네 살, 많아야 여섯 살 되는 자신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목을 조르고, 아이가 피가 나는데 피 난다고 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갔다는 김풍년 님.

영화를 보고 유성기업에 대해서 찾아보면서 참 많이 놀랬습니다. 현대와 기아자동차에 피스톤링, 실린더사이더와 같은 핵심 엔진 부품을 납품하던 이 기업의 2012년 말 기록을 보면 매출액, 당기순이익, 직원 평균 연봉 등이 대기업에 밀리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고 창조컨설팅이라는 낯설지만 끔찍한 기업의 이름도 알게 되었습니다. 노조파괴 전문기업이래요. 이 기업이 망가뜨린 건 유성기업 만이 아니더군요. 상신브레이크, 발레오만도, 보쉬전장, 에스제이엠(SJM). 악명높은 이 기업의 배후에 현대차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한숨 밖에 안 나옵니다. ‘창조컨설팅의 그 비인간적인 창조성이 노동자들의 삶을, 그 가족들의 평화를 어떻게 깨뜨리는지 영화는 속속들이 보여 줍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무릎 꿇지 않습니다. 길거리에 비닐 천막을 치고 고공농성을 하며 유시영 대표이사의 법정구속까지 이끌어냅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고 한광호 님의 장례는 치러집니다. 싸움은 진행 중이고 이분들의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거기 늘 공룡의 카메라가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 영화 <사수스틸 이미지.


동료로서 <사수>가 지켜낸 자리에 경의를 표합니다. 사용자 측 직원에게 멱살을 잡힐 뻔하는 조영은 감독의 모습이 화면에 언뜻 비칩니다. 청소년기에 보았었는데 이제 성인이 되어 공룡의 정회원으로서 여전히 삶의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대화하던 회사측 직원이 갑자기 카메라에 달려들 때 노동자들은 얼른 몸으로 막아서며 말합니다. 우리 카메라한테 왜 그러느냐고. 노동자들의 카메라로 지내온 세월. <사수>에는 2011년부터의 그 모든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시간을 꼭 한 번 만나 보세요. (문의: 생활공동체 공룡 043-266-4055) 

posted by 작은책
2019. 2. 19. 14:47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정용연


발행인의

  

이달 첫 꼭지 책이 이끄는 여행은 국회 앞이네요. 소설가 하명희 씨가 살아남은 아이책을 보고 국회 앞 농성 텐트를 찾았습니다. 아담하고 예쁜 그 텐트엔 생지옥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아이한종선 씨(44)가 진상을 규명해 달라며 7년째 살고 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1987년 폐쇄될 때까지 12년 동안 500여 명이 사망했던, 한국판 아우슈비츠 사건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그런 형제복지원에 해마다 운영비를 10~20억 원씩 지원했고 두 번이나 훈·포장을 수여합니다. 한종선 씨는 2008, 광우병 촛불집회를 계기로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1인시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는 빨리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

독자님들,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하는 송추향 씨가 드디어 한사람연구소가 뭐하는 데인지 밝혔습니다. 아하! 하고 머리를 끄덕이게 합니다. 그리고 특성화고등학교로 노동인권 수업을 나가는 유내영 씨의 글은 요즘 학교 분위기를 실감케 합니다. 그런 경험을 겪고 나서 글쓴이는 더욱 겸손해졌다네요. 이달 정인열 기자의 일터탐방20186월에 노동조합을 만든 한국와이퍼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현장을 탐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달에 <작은책>이 만난 사람은, 사회 정의를 찾다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내내 56개월 동안 독방에서 징역을 살았던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입니다. 만나 보니 참으로 유쾌한 분이었습니다. 독자님들, 까치 까치 설날 말고 우리 설날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9118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국회 앞 작은 집 하명희

10 발행인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선배와 결혼해서 후배와 살고 있다 이동수

15 딱 죽을 것 같았는데 지나가더라 류미례

19 선물 공세하는 남편, 알고 보니최해옥

22 조폭 출신들의 뮤지컬 김호균

26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어부와 결혼은 못 했지만윤혜신

32 청년으로 살아가기 배달이요 야채죽

38 이야기가 있는 사진 장영식

40 살아온 이야기(8)

한사람연구소가 뭐 하는 뎁니까? 송추향

46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아토피 치료도 연대가 필요하다 권해진

49 교실 이야기

그날 경험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유내영

54 산골부부의 시골살이

속풀이 동치미로 행복한 상상을 조혜원

58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2 일터 탐방_ 한국와이퍼

급똥을 참느라고 불량 내지 마세요 정인열

68 일터에서 온 소식

내가 보육 교사를 할 줄 꿈에도 몰랐다 이현림

73 일터에서 온 소식

기아차의 이상한 신규 채용 신산

77 작은책 법률 상담소

말도 안 되는 월세 연체료, 내야 하나요? 박시진

 

작은책이 만난 사람_ 한상균

81 본래 순둥이가 무서운 거예요 안건모

106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108 생각해 봅시다

공유경제라는 가면과 호출형 노동의 등장 고태경

113 어린이 해방과 평화 어린이 행복 선언 이주영

118 여성으로 살아가기 치마와 나의 역사 홍승은

123 생태 이야기 예타필요충분조건 박병상

128 오앵의 일상의 온도 오앵

 

쉬엄쉬엄 가요

129 책 읽고 딴 생각

말이 칼이 될 때 변정수

132 독립영화 이야기

가장 먼 데 있는 영화 류미례

138 우리말과 국어사전 짚어 보기

찻사발과 놋사발 박일환

142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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