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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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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2월호

일터 탐방_ 손말이음센터

 

믹스커피 하나에 울음이 터졌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안녕하십니까. 손말이음센터 중계사 OOO입니다. 청각장애인분의 요청으로 대신 전화드렸습니다.”

▲ 청각·언어장애인과 수어로 통역하고 있는 통신중계사.             사진제공_손말이음센터지회


번 없이 107을 누르면 연결되는 한국정보화진흥원 손말이음센터는 청각·언어장애인(농아인)과 비장애인이 중계사를 통해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도록 수어(수화언어) 통역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전국 32만 농아인들이 음식 주문부터 금융기관, 관공서의 민원 상담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도록 36524시간 운영되고 있다. 하루 평균 이용 건수는 2066(20171~10월 기준, 한국정보화진흥원 보도자료), 중계사 한 사람당 하루 평균 55건을 처리하고 있다(민경욱 의원실, 2017년 기준).

손말이음센터 중계사 김영수 씨(37)와 황소라 씨(31)를 문래동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노동조합(민주노총 KT새노조 손말이음센터지회, 이하 지회) 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황 씨는 대학에서 수어통역학을 전공하고 20113월에 입사했다. 김영수 씨는 대학 졸업 후 200810월에 입사했다. 대다수 중계사들은 더 나은 통역을 위해 개인 시간을 할애해 농아인 교회를 다니거나 공부 모임을 하는 등 농아인들과 교류를 유지한다.

그러나 중계사들의 노력과 달리 이들의 처우는 너무나 열악하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센터 설립 직후 민간위탁을 했기 때문이다. 제니엘, 인포데이타를 거쳐 2009년부터는 KT계열사인 KTcs가 위탁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동종업계 대비 중계는 10배 이상 많이 하고 근무 조건은 훨씬 열악한데도 급여는 30퍼센트 이상 낮은 최저임금 수준이다. 하지만 이보다도 중계사들을 괴롭힌 문제는 서 아무개 전 센터장을 포함한 일부 팀장급 관리자들의 권력 남용과 부정 행위들이었다. 지회는 정부 기관들에 글을 올렸다. ‘서 전 센터장이 여성 중계사들 허벅지를 만지고 사적으로 접근하는 등 성추행을 했으며 시간외수당 조작 및 횡령, 연차휴가 및 병가 반려부터 화장실 이용 제재등 다양하고 사소한 방법으로 중계사들을 괴롭혔다는 내용이었다.

계속 통화하면 입이 너무 써요. 그래서 오후에 양치를 한 번 더 할 때도 있는데 걸리면 여자 팀장이 자리 비운다고 면담하고.”

서 전 센터장은 중계사들의 연차휴가 신청을 반려했다. 사유는 바쁠지도 몰라서’. 반면 자신에게 잘 보이는 중계사들은 연차휴가 사용과 업무 편의를 봐주었다. 많은 중계사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지회에 따르면 센터 개소 이래 누적 퇴직자는 80퍼센트. 늘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데, 해마다 이용자는 늘어 중계사 36명이 근무할 때 응대율이 54.4퍼센트(20185월 기준, 지회 자료). 이용자의 절반은 통화 연결이 안 돼 피해를 보고 중계사들은 화장실도 못 가며 중계를 받아야 했다. 중계사들의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한 때는 20158월 무교동 청사로 이전한 뒤부터다. 100센티미터의 좁은 책상에 갇힌 채 쉼 없이 중계를 받았다. 창문도 블라인드도 냉·난방 시설에도 손댈 수 없었다. 김영수 씨가 말한다.

하루는 출근해서 커피를 타려고 봤더니 믹스커피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갑자기 눈물이 펑펑 나는 거예요. , 내가 100원짜리 믹스커피도 아까워할 만한 존재구나. 그분(서 전 센터장)이 평소에 프린트도 못하게 종이도 다 빼놓고 그랬거든요.”

스마트폰 보급이 늘어나자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은 201412월 전용 모바일 앱을 개발했다. 20141224, 성탄 전야로 거리가 떠들썩한 밤에 야간근무를 하던 황소라 씨는 한 중계 영상을 받았다. 한 남성 이용자가 자위 행위를 하는 음란 중계였다. 황 씨는 깜짝 놀라 울면서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모바일 앱이나 PC 프로그램으로 접속할 때 실명 인증 절차나 휴대전화 번호 인증 절차가 없는 점을 악용한 성폭력이었다. 황 씨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말을 하는데 목소리를 떨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 김영수 씨(왼쪽)와 황소라 씨(오른쪽)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_안건모


그런데 화면을 꺼야 하는데그런데 화면을 봐야 끌 수 있잖아요.”

김영수 씨가 황소라 씨의 말을 끊었다.

소라가 이 일로 산재 요양 중이라 제가 얘기하는 게 좋겠어요. 작년 국정감사 준비하다가 멀리서 그 자료 화면을 봤거든요. 정말 그 정도인 줄 몰라서 꺼이꺼이 울었어요. 그리고 얘(황소라)한테 너무 미안한 거예요. 소라가 인터뷰할 때 약 먹으면서 손 떨면서 얘기하는 거 저도 알았는데, 이 정도로 심한 장면인 줄은 몰랐어요.”

해당 음란 중계는 무려 6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성폭력이 계속됐다는 것은 KTcs와 서 전 센터장의 악의적인 방치로 볼 수밖에 없다. 서 전 센터장은 화면 캡쳐를 하라는 지시만 내렸다. 화면 캡쳐를 하려면 중계를 봐야 하는데 명백한 직무유기 및 2차 가해였다. (범인은 비장애인이었다.)

황소라 씨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노동조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민주노총 KT새노조와 연락이 닿았다. 중계사 대다수가 노조 가입에 흔쾌히 동의해 20176월 노조를 설립하고 KT새노조 산하 조직으로 들어갔다. 황소라 씨는 지회장을 맡았다. 곧바로 KT와 한국정보보호진흥원에 센터 운영에 관한 감사 요청서를 보냈으나 반응이 없었다. 조합원들은 센터 건물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국정감사를 준비했다. 음란 중계와 센터장 성희롱 문제가 환경노동위원회 의원들의 공감을 샀고 진흥원 이사장은 여야를 막론하고 질타를 받았다. 그러자 센터에 변화가 일어났다.

음란 중계 때 신고 기능 신설, 모바일 앱 및 PC프로그램 실명 인증 회원제 도입, 2배 넓은 문래동 부지로 센터 이전, 서 전 센터장 격리 및 퇴출, 보다 자유로운 연차 휴가 사용 등.

▲ 손말이음센터 모바일 앱 이용 화면.                                 사진_한국정보화진흥원


문래동으로 이전할 때 진흥원 직원분이 직접 나오셨어요. 그동안 못 해 줘서 미안하다고 하시고. 이제는 회사 가는 게 너무 좋아요.”

고용노동부 산재예방지도과에서는 근골격계 질환 운동법도 안내해 주었다. 직무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중계사는 상담사를 연결해 주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201911일부로 전 직원이 한국정보보호진흥원 정규 직원이 된다는 점이다.

런데 문제가 있다. 진흥원 본원이 대구에 있어 정규 직원이 되면 센터도 대구로 이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대다수 중계사들은 퇴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지회는 수도권 잔류 기준 중 별도의 독립적인 업무’, ‘기타 지방 이전 시 업무수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업무조항을 들어 지금의 서울 센터 유지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대구 센터를 신설해 응대율을 100퍼센트로 끌어올리는 방안을 설득 중이다.

중계사들의 임금은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이다. 그동안 열악한 상황에서 중계사로 버텨 온 이유는 무엇일까? 황소라 씨가 말한다.

저희 센터를 통해 이용자분이 주체적으로 전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이죠. ‘중계사 님, 손말이음센터 있어서 너무 편해요, 고마워요할 때 너무 좋아요. 그 사람들의 권리를 우리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으니까.”

김영수 씨는 이용자의 구직 중계를 예를 들며 말했다.

기업 측에서는 청각장애인이요? 우리는 어려운데하고 농아인은 면접 원해라고 표현해요. 짧은 네 글자지만 저는 그분의 간절함을 담아 기업 측에 면접이라도 한번 볼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하고 전달할 때 자긍심을 느껴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들의 얼굴이 무척 환하다. 황소라 씨가 말한 것처럼 중계사도 농아인에게 더 좋은 환경에서 도움을 주면서 잘 사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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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28. 16:06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작은책> 2018년 12월호

세상보기

생각해 봅시다

 

서유럽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어요

문정주/ 의사, 공공의료 연구자

 

공공의료가 뭐냐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면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속한 분야인 의료에 대한 비판을 담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공의료는 말 그대로 공공성에 충실한 의료라 할 수 있습니다. 공공성은 소수의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사회에 두루 관계하고 유익하게 작용하는 특성이지요. 그러므로 공공성에 충실한 의료란 도시에 살든 농어촌에 살든, 부자든 가난하든, 누구나 건강을 지키고 증진하게 돕는 의료입니다. 이러한 의료를 제공하는 활동, 기관, 제도를 모두 합하여 공공의료라 합니다.

참 좋은 말이지요? 그런데 무슨 비판이 있느냐고요? , 우리나라 의료에 공공성이 허약하여 의료만으로는 공공성의 의미가 살지 않는다는 문제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공의료의 개념이 따로 세워졌으니 이 말은 문제점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의료의 문제점을 살펴볼까요. 첫째, 병의원이 주로 대도시, 더 자세히는 수도권 대도시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방 소도시나 읍면에서는 의료를 이용하기 어려워요. 전국의 232개 시군 중 60곳에는 산모가 분만할 의료기관이 전혀 없을 정도입니다. 둘째, 건강보험제도가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 주지만, 가난한 계층을 든든히 보호하지 못합니다. 돈이 없어 제때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심지어는 돈이 없어 건강보험료가 밀려 병의원 출입을 아예 할 수 없는 사람도 어림잡아 200만 명이나 됩니다. 셋째, 돈 되는 것과 돈 안 되는 것을 노골적으로 구분하는 의료기관이 많습니다. 척추와 관절 수술, 심장병 치료, 성형수술, 건강검진 등 돈 되는 데에는 설비 투자를 하여 확장하지만 돈 안 되는 응급, 분만, 신생아 진료, 감염병 진료, 재활, 질병 예방과 상담 등은 안 하거나 최소한만 하려 합니다. 공공성에 충실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도립 진주의료원을 없애 버린 어떤 정치인을 기억하시나요. 그런 분들은 공공성이 의료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핸드백이나 자동차처럼 의료도 시장에서 사고팔면 된다고요. 소비자는 자기 용도와 취향에 맞게 필요한 걸 고를 테고 공급자는 소비자를 의식하여 의료의 내용과 질을 관리하므로 시장에 맡겨두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의료가 공급된다고, 그래서 공공성을 강조하는 대신에 자유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이 의료의 발전을 돕는 길이고 영리 병원 등 의료 민영화도 나쁠 것이 없다고 하죠. 그러나 이 견해는 의료의 핵심적 특징인 정보의 비대칭성을 너무 가볍게 다룹니다. 의료서비스에는 수많은 정보가 포함되는데 그중 소비자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터넷으로 많은 정보가 오간다지만, 실제 의료는 전문적인 내용이 워낙 많고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영역이 제한적이어서 소비자가 충분히 알고 고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요. 그래서 공급자인 의료인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 있는 비대칭성, 즉 기울어진 운동장이 의료의 특징입니다. 교환도 환불도 원상복귀도 불가능한 의료서비스를 기울어진 관계에서 이용해야 한다니, 으스스하지요? 그러니 의료인의 전문성, 책임감, 환자에 대한 신의가 더없이 중요할 수밖에요. 어쨌든 이러한 비대칭성을 가볍게 다룬다면, 글쎄요, 소비자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의료 시장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그분들조차 농어촌 주민이나 가난한 사람의 건강을 보호하는 서비스, 돈이 되지 않아 시장이 외면하는 서비스에 관해서는 정부가 따로 방책을 세워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아요. 의료의 공공성을 아주 외면하지는 못하는 거죠.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요? 그보다는 공공성이 의료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잠시, 서구의 공공의료를 알아보지요. 그곳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습니다. 놀랍죠? 영국에는 국영의료제도가 있어 국가가 의료 전반을 책임지고, 독일도 질병보험을 중심축으로 하여 국민 모두에게 의료를 든든하게 보장한다는 얘기를 들어 보셨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서유럽 국가 중 절반은 국영의료제도를, 절반은 보험 방식의 의료보장제도를 두고 있는데 국민 누구나 수준 높은 의료를 무료 또는 거의 무료로 이용하는 데에는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런데도 그곳에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는 이유는 의료가 그대로 공공의료이기 때문이랍니다. 영어로 헬스케어(Healthcare)가 의료이자 곧 공공의료를 뜻해요. 또한 보건, 의료, 재활서비스를 다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고요. 국가적 헬스케어란 국민 누구나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폭넓게 이용하도록 보장하는 제도이며 예방과 치료와 재활을 통합하여 제공하는 제도이니까요. 이렇게 의료가 곧 공공의료인 나라, 새삼 부럽지 않습니까?

, 미국 말씀이군요. 그 나라는 참, 별종이에요. 국영의료도, 국가적인 의료보험도 없어 인구의 약 9퍼센트인 3천만 명이 의료보장 바깥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나라가 미국이랍니다. 의료보험도 모두 영리적인 민간 회사가 운영하여 보험료가 매우 비싸고 보장 내용도 천차만별이라, 산모가 아이를 낳고 12일 만에 쫓기듯이 퇴원하면서 병원에 2천만 원을 냈다는 기막힌 얘기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미국이 잘사는 나라의 표준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예외적인 나라고, 특히 의료보장에 관해서는 안쓰러운 눈길을 받는 뒤처진 곳이지요.

다시, 우리나라 의료가 공공성에 충실하게 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도립병원 같은 공공병원을 더 세우면 될까요? 그건 꼭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일차의료 제도가 필요합니다. 이는 국민 누구나 자신의 건강 전반을 돌봐줄 의사를 정하여 부담 없이 진료받고 상담하는 제도입니다. 서구 사람들이 마이 닥터라 부르는 그 의사는 환자와 꾸준히 교류하며 건강을 돌봅니다. 동네에 있으므로 환자가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 질병의 초기 또는 발병 전 단계에서 진료하고 상담하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정밀검사나 입원치료를 받도록 환자를 종합병원에 의뢰합니다. 서구에서는 보편적인 제도로, 국민 누구나 의료를 적절히 이용하고 건강을 보호하는 데 큰 효과를 낸다고 인정받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일차의료 제도가 없어, 공간적으로 가깝고 정서적으로 친밀한 의료가 자리 잡지 못하고 있어요. 환자는 값비싼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쏠려 동네 의사의 역할이 갈수록 줄어들고요. 2012OECD가 한국 의료 현황을 검토한 뒤에 이 제도를 도입하기를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한국이 지금처럼 종합병원 중심으로 의료를 운영하다가는 고령화 시대에 중증 만성질환 환자가 급격히 늘어 개인과 국가 모두 엄청난 비용을 들이게 되리라는 우려와 함께 말이지요.

다음으로, 지방자치단체 및 시민사회가 의료와 건강에 관련하여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지금은 중앙정부가 의료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관리해요. 지자체는 보건소를 운영하여 방역, 예방접종, 건강증진사업, 간단한 진료와 취약계층 방문서비스 정도를 할 뿐입니다. 의료제도에 관해 시민이 참여할 기회는 거의 없고요. 그러나 의료는 생활하는 장소 가까이에서 이용할수록 효과적이고, 건강은 생활에 밀착하여 관리할 때 증진됩니다. 이른바 생활 밀착형 의료가 필요한데 고령 인구가 많아질수록 이게 더욱 절실해요. 앞으로 자치분권이 강화되면 지방자치단체가 의료에 관련하여 상당한 책임을 지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를, 일차의료 제도를 도입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나라에서도 의료가 곧 공공의료가 되어, 공공의료 개념을 굳이 따로 정할 필요가 없어질 테지요. 우리 함께 그런 날을 상상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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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6)

내가 불쌍해 보입니까?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요즘 텔레비전에서 양진호가 사람을 철썩철썩 때리는 걸 보는데 갑자기 내 볼때기가 저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때리면 무척 아픕니다. 너무 아파서 더는 안 맞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할 것 같지요. 빌라면 빌고,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요. 보복은 엄두도 못 냅니다. 때리는 손은 너무 크고 무서워서, 법보다, 정의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작동하거든요. 그래서 나처럼 겁이 날 만큼 맞아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참 불쌍합니다.

<작은책>살아온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뒤로, 여기저기서 안부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오래 연락이 끊겼던 이들이, 할까말까 하는 망설임을 뚫고 기꺼이 기별을 넣어 볼 엄두를 내는 까닭 역시 불쌍한 마음 때문입니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아저씨가 지안이한테 이런 말을 하지요. 네가 나 왜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불쌍하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너무 우뚝 서서 너무 빛나고 있으면, 아무리 반가워도 금세 기별 넣는 행동으로 이어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차라리 불쌍한 처지여서, 내 좋은 사람들이 겁먹지 않고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 참 안심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전혀 불쌍하지 않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가 얼마나 씩씩하게 살고 있는지, 할 말 다 하고, 뻘짓 다 하면서 살고 있는지 말해 두지 않으면, 내 전화통에 불이 날지도 모르니까요.

결혼 생활을 접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나는 혼자 갓난쟁이를 돌볼 길이 없어 부산 본가에 아이를 맡겨 둔 채, 서울-부산 출퇴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무사히 수행하고, 그때까지도 나를 힘들게 하던 아이 아빠와의 전투(?)에서 당당히 이겨 내려면 몸이 튼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사무실 근처에 수영장이 있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등록을 했습니다. 나는 물을 참 좋아합니다. 물 마시는 것도 좋고, 팔 할이 물인 술도 좋고, 물속에서 노는 것도 좋고, 나이 들면 물가로 가서 살고 싶을 정도입니다. 한동안 신나게 수영을 다니다 생리 기간이 닥쳐왔습니다. 전화를 걸어 생리 기간이라, 잠깐 쉬었다가 다시 다닐게요.” 했더니 안 된답니다. 아무도 그런 까닭으로 수영장을 쉬는 사람은 없다면서요. 정히 오기 힘들면 진단서를 떼 오세요.” 나는 벌컥 화가 났습니다. 아니, 생리가 어떻게 병입니까?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제가 건강해서 생리를 하는 거니까요. 생리 기간 일주일 동안 잠깐 쉴 수 있게 안 해 주시면, , 그냥 가지요. 수영장에 가면 물에다 사람들이 눈물에, 콧물에, 침도 뱉고, 오줌도 싸고 그러는데, 생리혈 하나 더 보태는 게 이상할 것도 없겠네요.”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불쾌감을 준다나요? 이렇게 황당할 데가 또 있습니까?

내가 다닌 수영장은 현대 계동사옥 지하에 있었는데, 가만 보니,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길이랑 브이아이피(VIP)들이 드나드는 길이 아예 달랐습니다. 아마 여러 처우들도 많이 달랐겠지요. 이게 그러니까, 그저 일반인에 불과하고 여자일 뿐이라서 당하는 일이다 싶으니까 더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습니다. 가임기 여성은 평균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는데, 그 기간이 엄연함에도, 남자들과 한 달 정기권 금액이 같은 건 옳지 않다, 쿠폰제로 운영하거나, 생리 기간에 수영을 잠시 쉬었다 다시 할 수 있게 해 주거나, 같은 기간이라면 여자들 정기권 금액이 더 싸야 한다는 취지를 담아서 말입니다. 그 뒤로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이 내용이 반영되어서, 공공이 운영하는 수영장에 생리할인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제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 아시겠지요?

또 있습니다. 지난해 국정농단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정권을 우리 손으로 내몰고 새로운 지도자로 바꾸어 냈을 즈음, 나도 ()적농단을 몰아내고 무혈혁명을 이뤄 냈더랬습니다. 딸아이 성을 엄마인 내 성으로 바꾸었거든요. 이게 무슨 혁명인가 싶겠지만, 진짜 피만 안 흘렸지, 성 하나 바꾸는 데 참 욕 많이 봤습니다.

딸아이랑 다시 같이 살게 되면서, 2의 인생이 시작된 거니까,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시대 새 이름을 지어 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이런저런 이름들이 후보로 나왔는데, 처음 우리 둘 다 흡족해한 이름이 이송이였습니다. 내 성이 씨니까, 성이랑 이름을 붙이면 송이송이’! 뭔가 좋은 기운이 송이송이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또 하나 눈에 확 들어온 이름은 덕분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내가 만들던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느림 작가가 연재하는 덕분이와 장판이의 한뼘텃밭이라는 꼭지가 있었거든요. 딸아이랑 같이 사는 게 참 좋은 일이니, ‘네가 좋은 건 내 덕분이고, 내가 좋은 건 네 덕분이다. 이 이름만 한 게 없다싶었지요. 물론 도시내기 딸아이한테는 씨알도 안 먹혔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이름입니다.

내가 원래는 아이를 셋 갖고 싶었는데, 그 녀석들이 다 씨가 달랐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었습니다. 이름도 다 지어 뒀거든요. 첫째가 마루.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가장 밑바닥을 받쳐 주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둘째는 지붕이. ()을 알아주는 벗()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집으로 치면 적잖이 떨어져 있으니, 셋째는 기둥이라고 지어서 마루와 지붕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게 하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하나 낳고도 내가 이토록 헤매는 꼴을 보고 얼른 주제파악이 돼서 마루라는 이름밖에 못 쓴 겁니다. 그래, 지붕이나 기둥이 가운데 하나는 어떠냐?”고 딸아이한테 물었지요. 하지만 이 녀석, 잠시 틈도 갖지 않고 싫어!” 합니다.

결국 녀석이 하자는 대로 했는데, 친구들이 많이 불러 줘서 익숙한 지금 이름은 그대로 두고, 성만 바꾸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을 바꾸려고 보니, 우리가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의 성과 본 변경 허가 신청소송에서 이겨야 된다는데, 이게, 준비하는 서류부터 복잡합니다. 왜 성을 바꾸고 싶은지, 성을 바꿔 쓴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일상에서 얼마나 자리 잡았는지, 이를 왜 재판부가 허가해 주어야 하는지 들에 대한 내용을 쓰고, 필요한 증거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가까스로 서류를 꾸며서 판사 앞에 섰더니, 내게 묻는 첫마디가 재혼하려고 그러세요?”였습니다. 엄마가 재혼해서 아이 성을 새아버지 성으로 바꾸는 게 보통인데, 재혼도 안 하면서 멀쩡한 아이 성을 엄마 성으로 바꾸는 일은 상당히 이례적이며, 아이 생부 의사가 어떤지도 확인해야 하고, 가사 조사에, 심리에 절차가 아주 복잡하다는 겁니다.

상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성 문제는 자기 결정의 권리이지 누가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법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생부 의사까지 물어야 하다니. 그 생부의 생사도 알지 못하던 나로서는 이것이 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를 딸아이 친구들한테 하소연하니 이 녀석들도 같이 분개하면서, ‘내 친구 이름은 송OO입니다하는 피켓을 펼쳐듭니다. 이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 탄원서와 함께 준비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졸업 앨범에 OO’으로 표기해 주었고, 아이가 물건에 쓴 이름에, 일상생활에 엄마 성을 쓰고 있다는 증거 자료를 싹싹 긁어모아서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성 변경 허가 판결을 받은 것은 촛불혁명으로 새 정권이 들어서고도 석 달이 지나서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나이 마흔 넘은 육중한 몸을 얼마나 폴짝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뛸 듯이 기쁘다는 말이 있나 봅니다. 마시면 기운이 팡팡 나는 자양강장제 박카스를 잔뜩 사서 바까스로 바꿔 둘레에 돌리던 그날의 상큼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이 성 하나 바꾸는 데 일 년 넘게 싸웠으니, 촛불혁명보다 더 질기고 오랜 혁명이었지요.

▲ 그림_ 최정규


, 그러니까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가진 걸 함부로 쓰고, 나쁜 짓 하는 놈한테는, 있는 힘 없는 힘 다해 이겨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럴 땐 상식 없는 게 진짜 큰 무기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해지거든요.

이렇게 힘자랑이 길어진 것은, <작은책> 보고 걸려 온 전화 몇 통에 마음이 속절없이 따땃해져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철벽을 거두게 되는 건, 갑질과 겁박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측은해하는 마음, 다정히 헤아려 주는 마음들 때문이잖아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이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빛인 것처럼요.

물론 그러다 철벽이 홀라당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2018. 11. 28. 13:13 알림 / 엮은이의 글

▲ 표지 그림_ 김정렬


엮은이의 글

 

2018년 마지막 호를 만듭니다월간지를 만들다 보니 남들보다 한 달을 앞서 살아 그런지 세월이 더 빠르게 가는 것 같네요.

12월호 특집은 작은책 올해의 인물입니다. 2015년부터 작은책 올해의 인물을 뽑았습니다옳은 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오롯이 내어놓고힘든 상황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가는 분들 중에 한 분을 올해의 인물로 모셔서그런 분들의 삶을 배우고 따라 살려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 시작한 거지요.

올해는 전 케이티엑스(KTX) 철도노조 열차승무지부장 김승하 씨를 뽑았습니다. (함께 싸운 케이티엑스(KTX) 동료들도 모두 작은책 올해의 인물입니다.) “데모 한번 하지 않고 대학 시절을 보냈다는 김승하 씨가 케이티엑스(KTX) 승무원을 직접고용하지 않는 코레일을 상대로 지난 12년을 싸웠습니다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싸우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복직이 결정되어 지난 11월 12일 첫 출근을 시작한 김승하 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우리가 연대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청년으로 살아가기’ 꼭지의 진솔아 님, ‘이야기가 있는 들녘’ 꼭지의 김진회 님의 연재를 마칩니다. ‘이재관의 그림일기’,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김형민 님의 그때 그 사건 다시 보기도 연재가 끝납니다 그동안 귀한 글 나눠 주신 필자님들참 고맙습니다다음에 새로운 기획으로 다시 뵐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독자님들새해 새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함께해 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2018년 11월 16

유이분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바다, ,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 이동수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내 둘레에 있는 소중한 자산, 이백 박소영

16 말로만 듣던 출근전쟁 강정민

20 영등포산업선교회 다시 길을 묻다송기훈

2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과 이주영 선생님 정병규

29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한 해가 지나가네 윤혜신

33 청년으로 살아가기 낯선 동네 여행 강릉 진솔아

38 이야기가 있는 사진 변백선

40 살아온 이야기(6)

내가 불쌍해 보입니까? 송추향

46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오지랖은 그만 안재성

51 교실 이야기 전담시간 가기 싫어요 윤일호

57 이야기가 있는 들녘

나도 풍구에 들어가고 싶었다 김진회

61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4 일터 탐방_ 손말이음센터

믹스커피 하나에 울음이 터졌다 정인열

70 일터에서 온 소식

우리에게 내려진 마지막 낙인 양해준

75 작은책 법률 상담소

디지털 성범죄, 당연히 범죄입니다 김묘희

 

작은책이 만난 사람_ 김승하

79 우리가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안건모

100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102 생각해 봅시다

서유럽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어요 문정주

107 어린이 해방과 평화

점심을 굶는 아이가 있다고! 이주영

114 여성으로 살아가기

거품이 되지 않고 사랑하기 홍승은

119 ‘그때 그 사건다시 보기

조선인들에게 던진 나석주의 폭탄 김형민

124 생태 이야기

새만금은 생명 품는 바다로 돌아가야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9 책 읽고 딴 생각

단일민족국가라는 판타지 변정수

132 독립영화 이야기

함께하는 삶, 어렵지만 신비로운 길 류미례

137 우리말과 국어사전 짚어 보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말 박일환

142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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