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작은책
'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항공사승무원'에 해당되는 글 2

  1. 2020.02.06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1
  2. 2018.10.02 죽비 같은 인연(작은책 2018년 10월호)

<작은책> 2020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2)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

김수련/ 29년차 항공사 객실 승무원

 

 

  오늘은 내캉 밭 가는 데 따라가자. 우짜마 오늘이 내캉 밭 갈러 가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같이 안 갈끼가. 니가 서울 가기 전에 할 이야기도 좀 있고.”

아직 창호문 너머로 어스름 새벽빛만 희미하다. 날이 채 밝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동네 어귀 당산나무 근처로 밭 갈러 나갈 준비를 다 하신 모양이다. 밭을 가는 건 어쩌면 핑계고, 다음 달 서울로 일하러 떠날 나와 얘기를 나눌 구실을 만드신 건지도 모른다.

어릴 적 온갖 농사일을 거들며 살았지만 어둠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일하러 나가는 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겨울 추위 끝자락이 매서운 2월이었지만, 그날 난 정말 기꺼이 창호문을 열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19902,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초중학교를 고향 동네 면 소재지에서 보낸 뒤 밀양 읍내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니 철든 뒤 부모님 곁에서 보내는 긴 시간은 그해 2월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으며,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임을 알았다.

2월의 시골은 농한기라 외견상 한가하다. 하지만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에게는 1년 농사가 이때 판가름 난다 할 만큼 귀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농부들은 논과 밭을 돌아보면서 한 해 농사를 계획한다. 어떤 농사를 지을지를 결정하고, 심을 작물에 따라 거름을 얼마나 낼지, 비료는 뭘 쓸지, 밭이나 논을 빌려 소작을 내야 할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날이 풀려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 동네 아재들은 너도나도 들로 밭으로 쟁기질을 하러 나간다. 당시에도 경운기가 있었지만 경지 정리가 되지 않아 대부분의 논과 밭에는 기계가 들어가기 힘들었다. 기계를 조립하고 부리는 일보다는 소가 끄는 쟁기질이 훨씬 더 손쉽기도 했다. 우리 집 어미 소는 몇 해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충분히 길이 들지 않아 아버지의 호령 소리를 아직 잘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앞에서 소를 몰면서 길잡이를 해 주어야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외양간의 어미 소를 깨워 물과 여물을 먹인 후, 아버지는 쟁기를 짊어지고 나는 소를 몰고 대문을 나섰다.

아침때 늦지 않게 후딱 댕기 오이소~.”

새벽부터 빈속에 오래 일하다 자칫 부녀가 기운이라도 빠질까, 걱정하시는 어머니 목소리를 뒤로 하고 들로 향했다.

암만 힘들어도, 니는 잘할 끼다.”

이려, 이려!”

아버지의 호령 소리에 맞춰 나는 앞에서 소를 끌고, 아버지는 쟁기질을 하셨다. 밭에는 오늘 내가 뿌려야 할 거름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쟁기로 밭을 가는 동안, 거름을 뿌리는 일은 내 몫이었다. 틈틈히 말 안 듣는 어미 소를 몰기도 하며 거름을 온 밭에 뿌리는 일은 무척 고단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쟁기질과 거름 내는 일은 아침때를 한참 넘겨 해가 중천에 가서야 끝이 났다. 동쪽 산 위로 훌쩍 솟은 햇살을 받아 쟁기질로 갈아진 흙에선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서늘한 아침 공기엔 싱싱한 거름 냄새가 가득했다.

힘들제?”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몇 시간째 일을 한 후 밭두렁에 앉으니, 헉헉대는 숨결에서 쇠를 달군 듯한 단내가 피어오른다. 고르게 잘 갈린 밭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말씀을 이어 가신다.

니가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러 간다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취업 결정이 나자 엄마는 정말 기뻐하시며 여기저기 인사하러 나를 데리고 다니셨지만, 아버지에게서 좋다는 말을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항공사에서 일한다니, 그기 어떤 긴지 나는 감히 상상도 안 된다. 테레비에 나오데? 비행기 타마 하와이라는 데도 가고 할 낀데, 와이키키라 카더나? 해변가가 좋더라. 언젠가 그런 데 가더라도, 오늘 이 시간을 잊지 말아라. 나는 니가 좋은 곳을 가고 멋진 옷을 걸치고 그래 산다 캐도, 니가 살았던 이 고향 동네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젊었을 땐 큰 데 나가 살고 싶었는데, 느거 할아버지가 절대 허락 안 하셔서 고향을 지키고 살았다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젠 농사지으며 고향서 사는 것이 내 운명이라 생각한 지 오래다. 니가 일손 부족한 시골서 자라면서, 지독히도 농사일을 많이 하면서 살아온 거 미안하기도 하고 많이 고맙게 생각한다. 고되고 힘들었을 텐데 큰 불평 안 하고 잘 따라 주는 너그들을 보미, 안타까운 마음이 와 없었겠노? 서울 가서 살아 보면 니 같은 경험을 하면서 살아온 친구들을 찾아보기는 힘들 끼다. 니한테 분명 값진 경험이 될 끼라 생각한다. 살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얼마나 많겠노? 그럴 때면 오늘 내랑 같이 밭 갈면서 우리가 지금 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 봐라. 지금보다 더 힘든 날이 얼마나 더 있겠노? 니는 잘 견뎌 낼 끼라 믿는다. 고향에서 살았던 이 시절이 너의 뿌리며 너의 근본 아니겠나. 니는 서울서도 잘 살 꺼라고 믿는다. 뭘 해도 잘 할 끼다.”

아버지의 그런 당부를 듣고 있자니, 나를 키워 주고 품어 준 고향 들과 산이 새삼 달라 보였다. 소 먹이느라 헤매 다녔던 뒷산과 앞산, 부모님 따라 농사짓던 들과 밭, 동무들하고 물장구치며 놀던 작은 개울, 봄의 산딸기부터 가을의 머루까지 내가 모르는 곳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속속들이 알고 기억하는 고향 마을이었다.

막 일을 끝낸 후라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두 사람 입에선 하얀 입김이 꽃처럼 피어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어미 소의 등과 입에서도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마치 곧 고향을 떠날 나를 위한 축포의 연기 같구나, 싶었다.

그림_ 최정규

항공사에서 객실 승무원으로 일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서울 생활도 그리 쉽지 않았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자랐던지라 체력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니는 일은 지독히도 고된 노동이었다. 태평양을 걸어서 건너다닌다고 말할 정도로 힘든 일 덕분에 퉁퉁 붓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낯선 나라의 차가운 침대에서 잠들 때, 모진 승객에게 무시당하며 눈물을 삼킬 때, 무섭고 호된 선배들의 질책에 속수무책일 때, 산골 소녀로서는 차마 상상조차도 못한 일을 겪으면서, 나는 서서히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 아버지가 얘기한 하와이 비행을 드디어 가게 되었다. 와이키키 백사장 바로 앞 호텔에 짐을 풀고 당장 해변으로 달려 나갔다. 휴양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그 아름다운 해변가를 걸었다. 잠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았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지쳤으며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을 겪으며 어쩌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힘들제? 그래도 안 잊어버렸제? 니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해라.”

그 순간, 그날의 고향 풍경과 아버지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마치 영화처럼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얼어붙은 땅에 박힌 쟁기를 끌던 어미 소의 거친 숨소리, 갈아엎은 흙에서 나던 신선한 땅 내음, 아침 햇살 받으며 피어오르던 아지랭이, 이랴~이랴~ 어띠이~ ~~” 소를 부리던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고단한 아침 일을 마친 후 아버지와 나누던 긴 이야기.

그후, 그날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시차를 넘나들며 타국에서 고단한 잠을 청할 때, 무서운 선배에게 혼이 나 혼자 눈물을 삼킬 때, 모진 말을 함부로 퍼붓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괴로울 때마다 되살아나, 나를 위로했다. 어미 소의 등어리처럼 판판하고 포근한 고향 뒷산과 굽이굽이 어여뻤던 논과 밭은 지금도 나를 어루만져 준다. 해마다 입사철의 그 봄날 즈음이면 나는 언제나 그 시간을 떠올린다. 그날 아버지와 내가 언 밭을 갈아엎으며 봄 농사를 시작했듯, 나의 긴긴 비행 생활도 그날 그렇게 시작한 것이 아닐까.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10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죽비 같은 인연

김수련/ 항공사 객실승무원

 

항공사 객실승무원으로 일하는 하루하루는 늘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하늘을 건너 온 세상 도시들을 오가며 다양한 국적의 승객들을 대하는 일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지구라는 열린 도서관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객실승무원으로 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전혀 알지도 못했을 나라와 사람들, 그들에 대해 새로운 걸 깨닫고 이해하게 해 주는 내 일이 나는 너무나 고맙다. 피부색, 언어, 종교에 상관없이 이 시대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런 교감과 공감 덕분에 길고 고된 하늘길에서의 노동을 견디며 오랜 시간 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행기라는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밀폐와 제한이다. 이 꽉 막힌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다 보면, 그 부대낌의 피로 탓일까. 이미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던 상황들을 그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극성수기가 지나고 나면 항공요금이 조금 싸진다. 휴가를 가는 여행객들은 줄어들고, 사업이나 고향 방문 목적의 승객들이 많아진다. 성수기가 끝났음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승무원들 앞에 또 다른 종류의 일이 들이닥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다. 그래서 미국을 오가는 승객들 중에는 고국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 특히 우리 항공사를 많이 이용하는 승객은 인도인이다.

인도처럼 식민지를 오래 겪은 나라들은 이민이 많다. 인도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로 계급간의 갈등이 꽤나 심각하며, 우리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지만 이름과 성만 보아도 그들끼리는 상대가 어떤 계급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신분이 낮은 이들은 자국기인 인디안항공 이용을 꺼리고 신분 계급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 외국 항공사들을 애용한다는 것.

그 얘기를 처음 듣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인도인 승객들을 만나면 무작정 연민의 마음부터 일곤 했다. 하지만 신분이 철저하게 구분된 사회에 오래 살았던 이들이라 그럴까. 그들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행동으로 우리를 당혹하게 했다. 나의 연민과 공감 능력으로는 그들을 다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들 인도인 승객의 특징 중 하나는 타국적의 승객들에 비해 휠체어 신청이 유독 많다는 점이다. 인천공항에서 인도 뭄바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모인 인도인들이 한 비행기에서 주문한 휠체어가 무려 50개가 넘을 때도 있다. 휠체어 승객이 몇십 명이 넘어가면 승무원이 할 일은 몇 곱절로 늘어난다. 달리 보상이 없으면서 챙기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부쩍 많아지니, 일하는 승무원 입장에서는 불평이 쌓이기 십상이다.

휠체어로 탑승하는 인도인들은 물론 대부분 노약자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충분히 걸어 다닐 나이 같은데도 제대로 못 걷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느 날 인도 뭄바이에서 현지 직원에게 물었다. 유독 많은 뭄바이행 휠체어 승객들에 대한 불평은 그 질문 하나로 자취를 감췄다.

직원은 답은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무 가난하여 자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미국으로 간 그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부실한 영양 공급 탓에 다리근육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며 가족을 부양하느라 자신을 챙길 여유가 없어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그들. 휠체어에 의지해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들. 어쩌면 미국 이민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고향 방문일 수도 있는 그들의 여정.

그들을 그렇게 휠체어 안에 주저앉게 만든 사정을 헤아리려 들지도 않은 채, 그저 고단한 업무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으려 했던 내가 얼마나 낯 뜨거웠는지 모른다. 그저 내가 할 일이 늘어나는구나, 더 고단해지겠구나, 아 힘들어, 그런 푸념만 연발하며 그 상황을 불편해하고 불평하다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늙고 병들어 혼자서는 잘 움직일 수도 없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인 인도로 가는 모자 승객이 우리 비행기에 탔다. 어머니의 좌석은 비즈니스였고 아들은 이코노미였다. 아들은 탑승하며 내게 부탁했다. 자주 와서 어머니를 돌보고 싶으니 사정을 봐 달라고. 비행기는 클래스별로 좌석이 나눠져, 다른 칸의 승객이 상위 좌석으로 맘껏 다니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탑승 과정 중 보았던 아들의 표정과 태도에 감동받아 그날 담당 팀장에게 사정을 설명해 잠시 오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그날도 승객이 많았던 날이라, 내 일이 한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 모자 승객이 자꾸 눈에 밟혀, 아들이 어머니의 식사 시중을 들고 화장실 방문을 돕는 모습을 틈틈이 지켜보았다. 할머니는 생각보다 자주 화장실을 가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나도 부지런히 다른 칸으로 오가며 아들 승객을 불러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잠도 못자는 그 승객이 안쓰러워, 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 서울 도착할 때까지 내가 돌봐 드릴 테니, 아드님은 조금 쉬시라고. 할머니는 평소 잘 못 움직이신 탓에 몸이 불어 있었고 인도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고 있어서 부축하고 화장실로 모셔 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를 도와드릴 때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깊이 감사하는 맘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눈길. 비록 능숙한 영어는 아니지만 넌 참 좋은 사람이야를 연발하던 할머니의 목소리. 그런데 식사 때면 식욕이 없으신지 거의 안 드셔서 마음이 아팠다. 더 드시라며, 다른 거라도 챙겨 드릴까 여쭈었더니, 맙소사! 자꾸 먹고서 화장실을 자주 가면 아들과 당신을 힘들게 해서 안 된다는 게 아닌가. 마음이 풀썩 주저앉은 나는 더 권할 수도 없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모자 승객은 다른 일반 승객들이 다 내리길 기다린 후에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를 꼭 안아 드리며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또 만나자고 인사했다. 할머니가 허리춤의 쌈지를 뒤져 꼬깃꼬깃 접은 5달러 지폐를 내 손에 꼭 쥐어 주셨다. 승무원의 업무 특성상 팁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난 괜찮다며 사양했으나 할머니는 절대 돌려받지 않을 기세셨다. 옆에 있던 아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맙다 인사를 드리고 손을 꼭 잡았다.

동료들은 그날, “왜 굳이 나서서 할머니를 돌보느라 더 힘들게 일했냐며 나를 책망하듯 칭찬했다. 아들과 늙은 어머니가 서로를 살뜰히 돌보고 위하는 마음을 어찌 외면한단 말인가. 서로를 위하는 애틋한 마음은 고단함도 잊게 만든다.

나는 잘 몰랐다. 아니 안 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엄격한 신분사회, 오랜 영국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 미국 이민자로 살면서 자신의 권리주장에만 몰입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편견만 쌓으며 내 업무의 어려움만 증폭시켜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만났던 모자 승객은 자꾸 편협해지려는 나를 번쩍 일깨워 준 죽비 같은 인연이었다. 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책도 뒤적이고 영화도 찾아보곤 하면서, 정작 그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들을 보는 일엔 게을렀던 게 아닐까.

지난달 광화문에서 열린 갑질격파 시민행동집회에서 나는 조합원의 편지로 발언대에 섰다. 항공기가 날아올라 움직이는 원리를 항공역학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난 항공기를 움직이는 진짜 힘은 항공기 안팎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협력과 조화에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뭄바이로 가는 모자 승객 같은 수많은 죽비 같은 인연들이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리고 난 그들과의 사연을 나의 세상 도서관 책장에서 항상 다시 꺼내 읽고 감동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니까

▲ 항공사 객실 승무원 김수련 씨. 사진제공_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posted by 작은책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