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작은책
'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한국의료문제점'에 해당되는 글 1

  1. 2018.11.28 서유럽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어요(작은책 2018년 12월호)
2018. 11. 28. 16:06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작은책> 2018년 12월호

세상보기

생각해 봅시다

 

서유럽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어요

문정주/ 의사, 공공의료 연구자

 

공공의료가 뭐냐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면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속한 분야인 의료에 대한 비판을 담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공의료는 말 그대로 공공성에 충실한 의료라 할 수 있습니다. 공공성은 소수의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사회에 두루 관계하고 유익하게 작용하는 특성이지요. 그러므로 공공성에 충실한 의료란 도시에 살든 농어촌에 살든, 부자든 가난하든, 누구나 건강을 지키고 증진하게 돕는 의료입니다. 이러한 의료를 제공하는 활동, 기관, 제도를 모두 합하여 공공의료라 합니다.

참 좋은 말이지요? 그런데 무슨 비판이 있느냐고요? , 우리나라 의료에 공공성이 허약하여 의료만으로는 공공성의 의미가 살지 않는다는 문제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공의료의 개념이 따로 세워졌으니 이 말은 문제점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의료의 문제점을 살펴볼까요. 첫째, 병의원이 주로 대도시, 더 자세히는 수도권 대도시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방 소도시나 읍면에서는 의료를 이용하기 어려워요. 전국의 232개 시군 중 60곳에는 산모가 분만할 의료기관이 전혀 없을 정도입니다. 둘째, 건강보험제도가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 주지만, 가난한 계층을 든든히 보호하지 못합니다. 돈이 없어 제때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심지어는 돈이 없어 건강보험료가 밀려 병의원 출입을 아예 할 수 없는 사람도 어림잡아 200만 명이나 됩니다. 셋째, 돈 되는 것과 돈 안 되는 것을 노골적으로 구분하는 의료기관이 많습니다. 척추와 관절 수술, 심장병 치료, 성형수술, 건강검진 등 돈 되는 데에는 설비 투자를 하여 확장하지만 돈 안 되는 응급, 분만, 신생아 진료, 감염병 진료, 재활, 질병 예방과 상담 등은 안 하거나 최소한만 하려 합니다. 공공성에 충실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도립 진주의료원을 없애 버린 어떤 정치인을 기억하시나요. 그런 분들은 공공성이 의료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핸드백이나 자동차처럼 의료도 시장에서 사고팔면 된다고요. 소비자는 자기 용도와 취향에 맞게 필요한 걸 고를 테고 공급자는 소비자를 의식하여 의료의 내용과 질을 관리하므로 시장에 맡겨두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의료가 공급된다고, 그래서 공공성을 강조하는 대신에 자유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이 의료의 발전을 돕는 길이고 영리 병원 등 의료 민영화도 나쁠 것이 없다고 하죠. 그러나 이 견해는 의료의 핵심적 특징인 정보의 비대칭성을 너무 가볍게 다룹니다. 의료서비스에는 수많은 정보가 포함되는데 그중 소비자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터넷으로 많은 정보가 오간다지만, 실제 의료는 전문적인 내용이 워낙 많고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영역이 제한적이어서 소비자가 충분히 알고 고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요. 그래서 공급자인 의료인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 있는 비대칭성, 즉 기울어진 운동장이 의료의 특징입니다. 교환도 환불도 원상복귀도 불가능한 의료서비스를 기울어진 관계에서 이용해야 한다니, 으스스하지요? 그러니 의료인의 전문성, 책임감, 환자에 대한 신의가 더없이 중요할 수밖에요. 어쨌든 이러한 비대칭성을 가볍게 다룬다면, 글쎄요, 소비자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의료 시장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그분들조차 농어촌 주민이나 가난한 사람의 건강을 보호하는 서비스, 돈이 되지 않아 시장이 외면하는 서비스에 관해서는 정부가 따로 방책을 세워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아요. 의료의 공공성을 아주 외면하지는 못하는 거죠.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요? 그보다는 공공성이 의료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잠시, 서구의 공공의료를 알아보지요. 그곳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습니다. 놀랍죠? 영국에는 국영의료제도가 있어 국가가 의료 전반을 책임지고, 독일도 질병보험을 중심축으로 하여 국민 모두에게 의료를 든든하게 보장한다는 얘기를 들어 보셨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서유럽 국가 중 절반은 국영의료제도를, 절반은 보험 방식의 의료보장제도를 두고 있는데 국민 누구나 수준 높은 의료를 무료 또는 거의 무료로 이용하는 데에는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런데도 그곳에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는 이유는 의료가 그대로 공공의료이기 때문이랍니다. 영어로 헬스케어(Healthcare)가 의료이자 곧 공공의료를 뜻해요. 또한 보건, 의료, 재활서비스를 다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고요. 국가적 헬스케어란 국민 누구나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폭넓게 이용하도록 보장하는 제도이며 예방과 치료와 재활을 통합하여 제공하는 제도이니까요. 이렇게 의료가 곧 공공의료인 나라, 새삼 부럽지 않습니까?

, 미국 말씀이군요. 그 나라는 참, 별종이에요. 국영의료도, 국가적인 의료보험도 없어 인구의 약 9퍼센트인 3천만 명이 의료보장 바깥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나라가 미국이랍니다. 의료보험도 모두 영리적인 민간 회사가 운영하여 보험료가 매우 비싸고 보장 내용도 천차만별이라, 산모가 아이를 낳고 12일 만에 쫓기듯이 퇴원하면서 병원에 2천만 원을 냈다는 기막힌 얘기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미국이 잘사는 나라의 표준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예외적인 나라고, 특히 의료보장에 관해서는 안쓰러운 눈길을 받는 뒤처진 곳이지요.

다시, 우리나라 의료가 공공성에 충실하게 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도립병원 같은 공공병원을 더 세우면 될까요? 그건 꼭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일차의료 제도가 필요합니다. 이는 국민 누구나 자신의 건강 전반을 돌봐줄 의사를 정하여 부담 없이 진료받고 상담하는 제도입니다. 서구 사람들이 마이 닥터라 부르는 그 의사는 환자와 꾸준히 교류하며 건강을 돌봅니다. 동네에 있으므로 환자가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 질병의 초기 또는 발병 전 단계에서 진료하고 상담하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정밀검사나 입원치료를 받도록 환자를 종합병원에 의뢰합니다. 서구에서는 보편적인 제도로, 국민 누구나 의료를 적절히 이용하고 건강을 보호하는 데 큰 효과를 낸다고 인정받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일차의료 제도가 없어, 공간적으로 가깝고 정서적으로 친밀한 의료가 자리 잡지 못하고 있어요. 환자는 값비싼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쏠려 동네 의사의 역할이 갈수록 줄어들고요. 2012OECD가 한국 의료 현황을 검토한 뒤에 이 제도를 도입하기를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한국이 지금처럼 종합병원 중심으로 의료를 운영하다가는 고령화 시대에 중증 만성질환 환자가 급격히 늘어 개인과 국가 모두 엄청난 비용을 들이게 되리라는 우려와 함께 말이지요.

다음으로, 지방자치단체 및 시민사회가 의료와 건강에 관련하여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지금은 중앙정부가 의료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관리해요. 지자체는 보건소를 운영하여 방역, 예방접종, 건강증진사업, 간단한 진료와 취약계층 방문서비스 정도를 할 뿐입니다. 의료제도에 관해 시민이 참여할 기회는 거의 없고요. 그러나 의료는 생활하는 장소 가까이에서 이용할수록 효과적이고, 건강은 생활에 밀착하여 관리할 때 증진됩니다. 이른바 생활 밀착형 의료가 필요한데 고령 인구가 많아질수록 이게 더욱 절실해요. 앞으로 자치분권이 강화되면 지방자치단체가 의료에 관련하여 상당한 책임을 지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를, 일차의료 제도를 도입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나라에서도 의료가 곧 공공의료가 되어, 공공의료 개념을 굳이 따로 정할 필요가 없어질 테지요. 우리 함께 그런 날을 상상하면 어떨까요

posted by 작은책
prev 1 next